구조론의 가치
완전성을 알 수 있다 모든 존재는 관계맺기라는 하나의 목적을 가진다. 무엇이든 관계를 통해 이루어진다. 관계는 둘이 만나서 어울리고서야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관계는 상대적이다. 이에 완전성의 문제가 제기된다. 짝사랑은 불완전하다. 혼자서는 불완전하다. 인간은 먼저 지식에서 답을 찾지만 실패다. 학자가 골방에서 홀로 지식을 이룰 수는 있으나 그것은 짝사랑과 같다. 그 지식이 쓰이지 않으므로 실패다. 다음에는 돈에서 답을 찾는다. 사회가 있어야 돈이 쓰인다. 타인이 받아들여 주어야 돈이 돈값을 한다. 재벌이 금고에 쌓아둔 돈은 짝사랑과 같다. 불완전하다. 이제 인간은 종교와 예술, 문화로 눈을 돌린다. 지식과 돈을 삶과 짝 짓는 것이 문화예술이다. 삶과의 짝짓기가 불완전한 지식, 불완전한 돈에 생명을 불어넣어 그것들을 완전하게 한다. 종교와 예술과 문화는 궁극적으로 인간과 인간의 관계맺기다. 무엇인가? 낳음이다. 세상 모든 존재는 시스템 구조 안에서 그 시스템의 성장으로 하여 애초의 원본으로부터 복제된 것이다. 불완전하다. 짝사랑과 같다. 그러므로 소통하여 낳지 않으면 안 된다. 지식도 공식에서 복제된 것이고 돈도 은행에서 복제된 것이다. 그러므로 불완전하다. 돈은 금고에서 나와야 제 구실을 한다. 지식은 골방에서 나와야 제 구실을 한다. 소년은 세상으로 나와야 사람 구실을 한다. 비로소 숨을 쉬고 맥박이 뛰고 혼이 서린다. 흥분된다. 느낌 온다. 존재의 근본 문제는 결국 낳음의 문제다. 불완전한 복제본을 짝지어 완전하게 하는 문제다. 낳음은 둘 이상이 만나고 짝짓는 현장에서 얻어진다. 현장에서 답해야 진짜다. 예술, 종교, 문화, 관습, 이념은 이 문제에 답하고 있다. 현장에서 지식과 돈을 사람과 짝 짓는다. 짝짓기는 실천이다. 불완전한 복제본이 짝짓고 낳을 때 새로운 원본으로 거듭난다. 종교와 예술은 소통의 접점을 제시한다. 틀린 답안지라도 일단 답안지를 내밀어 보기는 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과학은 현실과의 소통을 거부한다. 혼자서 문제나 풀어댈 뿐 답안지를 제출하지 않는다. 구조는 집적되어 고도화된다. 복제본에서 원본으로 비약한다. 밀도의 단계에 이르러 완성된다. 내부에 심을 얻고 외부로 날을 뻗는다. 그 펼쳐진 날개로 타인과 손잡을 수 있다.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예술, 종교, 문화, 이념들은 날개가 있다. 외부와 만나는 접점이 있다. 입력과 출력의 창구가 있다. 질은 낮아도 완제품이다. 인간으로 하여금 실천하게 한다. 사이비 종교집단이라도 소통의 접점은 있다. 반면 과학은 반제품이다. 지식은 반제품이다. 만질 수 없고 먹을 수 없다. 소스를 제공할 뿐, 그 자체로서 인간의 삶과 직결되지 않는다. 인간이 놀라고 당황했을 때 어쩌라는 건지 답을 주지 않는다. 지식 자체로는 관계맺지 못한다. 입력과 출력의 접점이 없기 때문이다. 소통과 낳음의 문제에 답해주지 않는다. 결정적 순간에 침묵한다. 실천할 타이밍을 찍어주지 못하고 무리가 나아갈 방향을 일러주지 못한다. 구조론의 완전성 개념이 답을 제시한다. 완전과 불완전을 가려보는 심미안을 제공한다. 우선순위를 알아서 스위치를 켤 타이밍을 얻고, 접근경로를 알아서 함께 행진하여 나아갈 방향을 정할 수 있다. 일머리 깨닫기 일을 풀어가는 시간의 우선순위와 공간의 접근경로가 있다. 모든 존재는 고유한 주소지를 가진다. 이에 목차를 정할 수 있고 프로그램을 짤 수 있다. 계획할 수 있다. 설계도를 그릴 수 있다. 세상 모든 문제는 결국 연결의 문제다. 어떤 정밀한 기계장치라도 연결을 위한 입력과 출력의 노즐 부분은 아날로그다. 뛰어난 컴퓨터라도 입력의 자판은 아날로그다. 손가락으로 일일이 쳐주어야 한다. 출력의 모니터도 아날로그다. 눈으로 일일이 읽어야 한다. 연결의 접점부위는 어떤 과학도 답을 제시할 수 없다. 과학의 지식은 처음의 시작과 결말의 끝단을 찍어주지 않는다. 세팅된 중간 부분을 알려줄 뿐이다. 존재는 많은 부분에서 세팅되어 있다. 공식이라고 한다. 과학은 세팅된 공식 부분을 해명한다. 그러나 세상에는 세팅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어떤 일의 시작과 끝은 고독하게 혼자서 결정해야 한다. 누구도 대신 밥먹어주지 않고, 누구도 대신 화장실 다녀와주지 않는다. 먹기와 싸기는 대신할 수 없는 입력과 출력 부분이다. 열차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운반해주지만 타고 내리는 것은 본인이 직접 해야 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국적과 주소와 가족과 신분이 정해진다. 사전에 세팅되어 있다. 정해진 궤도 안에서 자기 자리만 정확히 찾아가면 된다. 이렇듯 세팅된 시스템에 적응하려 들기 때문에 인간이 망가진다. 허상임을 알아야 한다. 아무것도 정해져 있지 않다는 사실 깨달아야 한다. 죽음 앞에서, 사랑 앞에서, 변혁의 기로에 서서 세팅된 공식은 헛될 뿐이다. 언제라도 백지상태에서 새로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찍어주는 대로 정답만 따먹으면 된다고 가르치지만 막상 사회로 나가보면 많은 일을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 입출력 부분은 어떤 선생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일의 1 사이클이 진행되는 전체과정을 아는 것이 일머리를 아는 것이다. 과학이 해명해주는 세팅된 중간의 공식 부분을 제외하고, 세팅되지 않은 시작과 끝 부분을 다룰 줄 아는 것이 일머리를 아는 것이다. 피드백을 알아야 하고, 대상을 장악하고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베테랑이어야 한다. 달인이어야 한다. 고수여야 한다. 그들은 다르다. 전체과정을 안다. 일머리를 안다. 삶과 짝 지을줄 안다. 낳을 줄 안다. 시스템을 통제하기 구조가 고도화되어 밀도를 얻으면 닫힌계의 시스템이 완성된다. 시스템은 에너지 순환이 이루어지는 1 사이클이다. 완성되면 저절로 돌아간다. 자동차처럼 발동만 걸어주면 저절로 돌아가야 완전하다. 저절로 돌아가야 조직을 통제할 수 있다. 최소의 개입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는다. 조직을 통제하는데 실패하는 이유는 리더가 일의 시작단계가 아닌 중간단계에 개입하기 때문이다. 그 경우 방향을 잃는다. 1만 명의 무질서한 군중을 통제하려면 무리를 하나의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 리더는 맨 앞이나 맨 뒤에 있어야 한다. 리더가 중간에 파묻혀 있으면 군중은 방향을 잃고 사방으로 흩어져 버린다. 리더는 시작단계와 마지막 단계만 개입해야 한다. 중간단계는 완벽하게 세팅해 두고 아예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 예로부터 중간 허리에는 전문가와 관료를 포진시켰다. 그들에게 전권을 주고 건드리지 않았다. 이명박류 어리보기들은 중간허리를 건드려서 망친다. 위의 리더는 깨우쳐 방향을 바꿀 수 있고, 아래의 병사는 선동하여 사기를 끌어올릴 수 있지만, 훈련된 중간간부들은 전문성을 존중하고 손대지 말아야 한다. 리더는 뛰어난 기획가이거나 뛰어난 영업맨이어야 한다. 스티브 잡스의 기획력과 빌 게이츠의 영업력을 동시에 갖추어야 한다. 중간 허리를 흔드는 멍청이 리더를 만났다면 일은 글렀으니 튀는게 상책이다. 시스템 세팅은 디지털화다. 그러나 입출력은 아날로그를 벗어날 수 없다. 최초의 기획은 리더가 혼자 결정하여 발동을 걸어주어야 한다. 최후의 문화는 소비자가 제 손으로 떠먹어야 한다. 누구도 떠먹여 주지 않는다. 뛰어난 엔진도 구동모터 없이 작동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밖에서 최소한의 개입으로 시동을 걸어주게 되어 있다. 좋은 리더는 그 부분만 개입한다. 개입을 최소화한다. 조직의 혼선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개입을 최소화하려면 중간 부분이 디지털화되어야 한다. 입력≫저장≫제어≫연산≫출력 중에서, 입력 단계는 리더가 직접 개입하고 하부구조를 효율적으로 세팅해두면 조직은 저절로 돌아간다. 운전기사는 단지 입력할 뿐이다. 저장≫제어≫연산≫출력의 하부구조는 엔진과 기어와 구동축과 바퀴가 스스로 알아서 한다. 그것이 조직을 통제하는 방법이다. 하부구조를 단계적으로 세팅해 두는 방법으로 가능하다. 창의하여 낳기 인간은 언어로 사유하여 판단하고 결정한다고 착각하지만 실로 그렇지 않다. 언어는 두뇌 속에 세팅된 입체적 모형 안에서 직관이 판단하고 결정한 것을 자신에게 납득시키고 타인에게 전달할 뿐이다. 언어로 이루어진 교과서적 지식은 과거에 먼저 온 선현들이 판단하고 결정하여 축적한 데이터를 불러와서 쓰는 것이다. 그 부분은 세팅되어 있다. 이 부분은 진행되는 일의 중간 부분에만 사용된다. 어떤 일의 첫 시작은 직관이 기능한다. 첫 등교, 첫 출근, 첫 만남, 첫 데이트, 첫날밤은 그 불러들일 데이터가 없다. 있다 해도 쓸모가 없다. 그것은 가짜이기 때문이다. 복제된 모조품이기 때문이다. 행동과 연결되는 부분은 직관된다. 직관은 자연의 시원함, 자연스러움, 아름다움, 떳떳함, 긴장됨의 감정을 사용한다. 예술가가 열정을 갖는 이유는 작품 앞에서 긴장하기 때문이다. 긴장이 창조의 직관을 끌어낸다. 모든 창조는 첫 시작이다. 다른 사람이 저장해 둔 데이터를 불러들여 사용한다면 모방이다. 모방에는 열정이 필요하지 않다. 긴장이 필요하지 않다. 유니폼으로 세팅되어 있는 것을 그냥 가져다 쓰면 된다. 자기 감정을 해석하는 능력이 직관력이다. 창의력은 직관력이다. 진정한 창의는 스타일의 완성에 있으며 그것은 계를 통일하는 밀도에 의해 얻어진다. 밀도의 깊이를 느끼는 것이 예술가의 긴장 곧 열정이다. 예술가의 첫째 조건은 민감함이다. 예민해야 한다. 그래야 직관력을 사용할 수 있다. 계에 걸려 있는 긴장의 밀도를 보고 단번에 파악할 수 있다. 그 긴장의 밀도차에서 독창적인 자기 스타일이 유도된다. 자기 내면의 깊이에서 그 대상의 깊이가 반응한다. 내면에 구축된 입체적 모형의 세계가 얕으면 얕게 반응하고 깊으면 깊게 반응한다. 그것이 작가의 스타일로 나타난다. 계를 통일하는 자기류의 조형적 질서다. 자기 내부에 쌓아둔 내공이 없다면, 내면에 구축해 둔 입체적 모형이 없다면, 마음 속의 어떤 응어리가 없다면, 깨달음이 없다면 대상은 반응하지 않는다. 긴장되지 않는다. 스타일이 얽어지지 않는다. 그럴 때 관객은 졸음을 참지 못한다. 소설도 졸리고 드라마도 졸리고 객석의 청중도 졸고 있다. 관객을 집중하게 하는 긴장감은 작가의 긴장이 복제된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스타일을 잃을 때 관객은 잠든다. 예술가는 창의한다. 창의는 작가 자신이 주장하는 조형적 질서다. 작품 내부에 그 질서에 기초한 내적 정합성이 성립해야 한다. 계에 밀도가 걸려야 한다. 작품의 한 부분이 다치면 전체가 다치게 하는 것이다. 스타일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가 그러하다. 한 귀퉁이를 바꾸면 다른 부분이 전체적으로 영향을 받아서 흔들려야 한다. 건물의 못 하나를 뽑으면 건물 전체가 무너져야 한다. 그럴 때 완벽한 작품이다. 분류할 수 있다 안다는 것은 분류할 줄 안다는 것이다. 자동차를 분류할 수 있는 사람이 자동차를 아는 사람이다. 완전성을 이해해야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외부와의 소통을 이해해야 그 완전성을 이해할 수 있다. 자동차 외부의 도로를 알고, 외부의 배를 알고, 외부의 비행기를 알아야 한다. 외부의 배에서 내린 짐을 싣고, 외부의 도로로 이동하여, 외부의 비행기로 옮겨 싣기 때문이다. 자동차 내부만 안다면 불완전하다. 둘째 내부에서 내적 정합성을 이해해야 완전하다. 계 전체를 한 줄에 꿰어 하나의 수단으로 제어하기다. 내부를 장악하고 하나의 논리로 전부 설명해야 한다. 그래야지만 안다고 말할 수 있다. 자동차는 핸들 하나로 조작한다. 운전기사는 한 명이어야 한다. 기어는 1단이거나 2단이거나 그 중 하나다. 1단이면서 동시에 2단일 수는 없다. 브레이크와 액셀레이터를 동시에 밟을 수는 없다. 존재는 항상 1을 따라간다. 그래야 계 전체가 통일된다. 통일되어야 외부에 맞설 수 있다. 그래야 일할 수 있다. 일해야 낳을 수 있고 낳아야 완전하다. 하나의 논리로 전체를 상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머리와 몸통을 각각 다른 논리로 설명하면 불완전하다. 정치는 정치논리로 설명하고 경제는 경제논리로 설명한다면 불완전하다. 정치와 경제를 하나로 통일하는 상위단계의 논리를 찾아내지 못하면 실패다. 셋째 그러한 내부의 통일성을 위해서 하위 단계의 부품들은 밸런스를 이루어야 한다. 천칭 저울처럼 하나의 조작으로 양쪽이 동시에 통제되어야 한다. 그 긴장된 날 위에 올려져야 한다. 대칭성 부여로 가능하다. 자전거의 두 바퀴가 마주 보고 대칭되므로 통제할 수 있다. 좌우의 두 페달이 대칭되므로 통제할 수 있다. 모든 방향으로 대칭성을 부여한 것이 둥근 바퀴다. 자동차가 바퀴로 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인간이 오른팔과 왼팔을 동시에 가지며, 또 오른발과 왼발을 동시에 가지는 이유는 몸통이 그러한 대칭구조 위에 올려져 있어야만 제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팔이 하나뿐이면 도리어 제어하기 어렵다. 안다는 것은 분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막연히 요소들을 선 위에 나열하는 주워섬기기는 분류가 아니다. 입체적 모형으로 통찰해야 완전하다. 하부구조는 대칭되어야 하고 상부구조는 일원화되어야 한다. 최상위 단계에서 소통의 창구는 외부로 열려야 한다. 손과 발은 대칭원리를 따라 마주 보아야 하고, 입력과 출력은 입에서 항문까지 하나의 관으로 연결되어야 하며, 눈과 귀와 코는 바깥을 향해 창을 내야 한다. 선장은 밖을 보고, 갑판장은 내부를 통솔하며, 선원은 2인 1조로 작업해야 한다. 대통령은 밖으로 안보와 외교를 책임지고, 총리는 안으로 내각을 통솔하며, 국민은 부부로, 가족으로, 공동체로 짝지어야 한다. 안다는 것은 분류할 줄 안다는 것이다. 인간의 사유는 분류로부터 시작되므로 분류를 모르면 사유할 수가 없다. 어떤 주제를 두고 사색하고자 해도 도대체 당장 무엇부터 착수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명상을 한다해도 눈 감고 앉아있을 뿐이다. 골똘히 생각한다 해도 그저 머리에 힘주고 있을 뿐이다. 분류할 수 있어야 명상할 수 있다. 명상의 첫 단추를 끼울 수 있다. 분석하고 종합하고 응용할 수 있다. 분류는 대상의 컨셉을 잡고, 안과 밖을 살펴서, 밖에서 안으로 흐르는 에너지의 흐름을 추적한다. 외적인 소통가능성≫내적인 통일성≫하부구조의 대칭성 순서를 따라간다. 비로소 사색할 수 있다. 알아낼 수 있다. 예견할 수 있다 베테랑은 다음 상황을 예측한다. 전체과정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일머리를 알기 때문이다. 일의 우선순위와 접근경로를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테랑도 익숙한 자기분야에 한해 예측이 가능할 뿐이다. 고수는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예측한다. 자신이 판을 짰기 때문이다. 자신이 상황을 장악하고 주도하기 때문이다. 상대는 낚인 것이다. 함정에 빠졌다. 단수를 치고 장군을 부르면 빠져나가는 길은 외길이다. 모든 변화는 높은 질서에서 낮은 질서로 이행한다. 높은 포지션을 선점한 사람이 상대를 낚는다. 밀도의 포지션을 차지했다면 5장의 카드를 쥔 셈이다. 입체는 4장, 각은 3장, 선은 2장, 점은 1장의 카드뿐이다. 적을 유인하여 함정에 빠뜨렸다면 적은 점의 포지션이다. 적은 함정에서 빠져나오는 수 외에 다른 카드가 없다. 반면 이쪽은 밀고 당기며 여러 카드를 쓸 수 있다. 적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대비할 수 있다. 앞날을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만 그 예측모형을 만들고 이를 객관화하여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은 적다. 구조론의 의미는 입체적 구조의 예측모형을 모델링하고 시뮬레이션 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예측가능한 이유는 구조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대칭원리다. 수요와 공급은 대칭된다. 가격이 오르면 수요는 줄고 가격이 내리면 수요는 는다. 물려있음에 기반을 두어 가격의 오르내림을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수요공급은 선형구조다. 더 많은 대칭구조가 쌓여 입체적 모형을 구축한다. 세상 돌아가는 원리는 복잡하다. 바깥 변수도 물려 있다. 가격이 오르면 사재기로 수요가 더 올라간다. 예측은 빗나간다. 세상은 크다. 그것은 하나의 동그라미다. 큰 동그라미 안에 작은 동그라미가 있고, 작은 동그라미 안에 더 작은 동그라미가 있다. 무수히 많은 동심원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예측하기 어렵다. 입체적 구조를 세팅해야 이해할 수 있다. 지금 진행되는 변화가 1년 주기의 작은 사이클인지, 100년 주기의 큰 사이클인지 아니면 인류문명 단위의 더 큰 사이클인지 구분할 수 있다. 예측할 수 있다. 예측은 높은 단계에서 낮은 단계를 아는 것이다. 일의 진행은 언제나 높은 질서에서 낮은 질서의 한 방향으로만 이행하므로 선점한 높은 포지션에서 내려다보고 패턴을 읽어서 예측할 수 있다. 함정을 파고 상대성을 유인하여 예측할 수 있다. 주도권을 장악하고 게임을 지배하는 방법으로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약하다. 진짜는 창의다. 참된 자는 상대성을 끊는다. 대칭구조를 끊는다. 상대를 유인하지도 않고 함정을 파지도 않는다. 상대하지도 않는다. 대신 바깥으로 나아가 새로운 지평을 연다. 그들은 창조한다. 창조는 예측을 뛰어넘는다. 예측조차가 불필요하다. 모든 것이 그 안에 있다. 지성인이라면 미래를 내다볼 수 있어야 한다. 지식은 부분을 보는 것이고 지성은 전체를 보는 것이다. 전모를 보아야 예측이 가능하다. 인간의 일상적 사고는 선형적 사고다. 입체적 사고를 통해 전모를 볼 수 있다. 구조주의 세계관 ● 존재는 언제나 일방향으로 작동한다. 계는 언제라도 안정되려 하기 때문이다. 불안정할 경우 외부에서의 작용에 의해 우연히 변화가 일어날 확률이 높다. 변화는 에너지의 손실을 초래하고 그 결과로 점차 변화의 동력을 잃으며 따라서 안정된다. 그러므로 존재는 높은 질서에서 낮은 질서, 위에서 아래, 밖에서 안, 형식에서 내용, 불균일에서 균일, 전체에서 부분, 복잡에서 단순으로 움직인다.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에 따라 비가역적 진행을 가진다. 바둑을 두어도 주변과 많이 물려 밀도가 높은 화점에서 출발한다. 주변과 팽팽하게 물려 있는 화점이 긴장도가 높다. 그곳이 기둥줄이 되고, 근간이 되고, 줄기가 되고, 벼리가 된다. 사건은 그 주변에서 시작된다. ● 양질전화는 없다. 존재는 질에서 양, 들뜬상태에서 바닥상태로 이행한다. 양질전화의 착각은 정보의 무한복제 성질 때문이다. 물의 온도가 일정한 한계에 이르기까지 올라가면 일제히 끓는 것이 아니다. 이는 외견상의 착시다. 불과 물의 집적상태가 이미 높은 질서다. 곧 질이다. 닫힌계의 한 부분에서 이미 높은 질서에 도달하여 질이 달성되었을 때 그 정보가 무한복제 되어 계 전체에 고루 전해지는데 시간이 걸릴 뿐이다. 모순이 팽배해야 혁명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한 부분에서 일어난 혁명적 변화가 국가 전체에 전파되는데 시간이 걸릴 뿐이다. 네티즌의 불만이 폭발해야 정치가 바뀌는게 아니라 인터넷 도입이 이미 혁명이다. ● 자전거는 전진해야 균형이 잡힌다 물고기가 꼬리를 왼쪽으로 치든 오른쪽으로 치든 몸은 앞으로 간다. 심의 1이 대칭의 날 2를 통제하기 때문이다. 새의 좌우 날개는 방향성이 없으므로 결국 저절로 원위치 된다. 몸통의 방향이 진짜다. 자전거는 먼저 균형을 잡고 다음에 페달을 밟아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전진하면 저절로 균형이 잡힌다. 균형은 좌우의 날 2고 전진은 심 1이다. 구조는 언제라도 앞서는 심 1이 날 2를 통제한다. 사회도 먼저 전진해야 진보와 보수의 밸런스가 잡힌다. 밸런스를 잡으려고 중도를 추구하면 끝내 밸런스에 이르지 못한다. 정치에서 중도노선이 옳은데도 중도파는 항상 패배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 부분이 전체를 대표한다 힘이 꺾어지는 연결부위가 구조적 취약점이다. 모든 고장은 힘이 전달되는 연결부위에서 접점의 마모 형태로 일어난다. 인체의 관절과 같다. 기계장치에서 힘을 전달하는 톱니바퀴가 맞닿는 접촉부분이다. 관절부위는 완벽하게 세팅되지 않는다. 아날로그 구조이므로 베어링으로 힘을 분산하고 윤활유와 스프링으로 완충시켜야 한다. 힘이 전달되는 끝단의 작은 부분에 구조체 전체의 힘이 일시에 걸리기 때문이다. 연인과 입술이 맞닿는 접촉점에서 사랑의 밀도 전체가 전달된다. 역사의 전환점은 관절과 같다. 변화의 시기에는 부분이 전체를 대표한다. 1 퍼센트 깨어 있는 네티즌의 불만이 대한민국의 전체모순을 집약한다. ● 완전무결한 시스템은 없다. 구조체의 중간은 고장나지 않게 세팅할 수 있으나 최초 입력과 최후 출력부분은 세팅될 수 없다. 지식은 세팅될 수 있으나 예술은 세팅될 수 없다. 사랑은 세팅될 수 없다. 창의는 잡아 가둘 수 없다. 우연성이 지배하는 공간이 있다. 최초의 만남과 최후의 이별은 어쩔 수 없다. 탄생과 죽음은 해결될 수 없다. 그러므로 조직하지 않는 조직, 통제하지 않는 질서, 이심전심으로 작동하는 유기적인 시스템이 필요하다. 기계론의 오류를 인정해야 한다. 힘이 전달되는 단위마다 재질서화가 일어나야 한다. 그 부분은 확률에 지배된다. 오류를 인정하고 시행착오에 따른 오류시정의 패치기능과 리셋기능을 두어야 한다. ● 세상은 무수한 동그라미들의 집합이다. 어떤 존재든 1을 따라간다. 가만히 있는 물체도 무게중심이 있다. 내부에 중력이 흐르고 있다. 움직이는 물체에 운동의 중심이 있고 작용하는 물체에는 힘의 중심이 있다. 계 내부의 내적 정합성이 있다. 통일성이 있다. 요소들을 일관되게 꿰어내는 하나의 테마가 있다. 완성형이 있다. 완성된 하나의 세포, 완성된 하나의 심장, 완성된 한 명의 사람, 완성된 하나의 인류, 완성된 하나의 우주로 동그라미를 이룬다. 존재는 스크린이되 입체적 스크린이다. 투시할 수 있어야 한다. 내부에 혈관이 도로망을 구성하고 있고 분주하게 오가는 혈액이 있고 트래픽이 걸려 있다. 모든 존재의 내부에 그러한 독립성과 자기완결성이 있다. ● 만병통치약은 없다. 존재의 절반은 나의 바깥에 있다. 확률 개념이다. 주사위가 어떤 눈을 가리킬지의 절반은 주사위 자체가 아니라 바깥의 환경이 결정한다. 그러므로 바깥의 환경을 동시에 조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바깥 환경은 부단히 변화한다. 그러므로 시행착오와 오류시정에 따른 부단한 미시제어 과정이 있어야 한다. 한 번의 혁명으로 모두 바뀌고 평화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밀고 당기는 긴장상태가 지속되어야 한다. 진보든 보수든 긴장에서 벗어나려 하다가 매너리즘에 빠진다. 최고의 진보는 대결의 긴장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개인이 단련되어야 한다. 강한 개인이어야 한다. 깨어 있어야 한다. ● 세상은 온통 역설이다. 정치는 역설, 경제도 역설이다. 오른손을 내밀어 상대방을 타격한다고 믿지만 중력 메커니즘을 들여다보면 먼저 왼발로 땅을 뒤로 밀고 있다. 왼발로 땅을 미는 동작이 먼저다. 왼발에 의존해서 오른발을 내민다. 만약 왼쪽으로 내디뎌 진보하려거든 오른쪽의 사정에 관심을 가지고 미리 조치를 해두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발목을 잡힌다. 발목을 잡는 오른편에 화낼 일이 아니다. 일의 우선순위가 잘못된 거다. 배가 앞으로 가려면 노가 먼저 뒤로 빠져주어야 한다. 항상 의도하는 쪽의 반대편이 먼저 조치된다. 문제는 이것이 우연이거나 혹은 여러 현상 중 하나가 아니라 예외 없이 적용되는 보편법칙이라는데 있다. ● 변화의 바람은 바깥에서 온다. 주변부가 중심부를 치는 것이 역사의 본질적인 모습이다. 모든 변화는 밖에서 온다. 요원의 들불처럼 온다. 주변부에서 아웃사이더가 일을 저지른다. 내부에서 자가발전으로 가능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중심부는 시스템에 갇힌 미완성의 존재들이다. 미완성이므로 서로 협력한다. 상대와 밀접하게 맞물려서 세팅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변화될 수 없다. 서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변부는 작으므로 완성되기 쉽다. 그들은 독립적으로 완성된 존재들이다. 서로 밀접하게 물려 있지 않으므로 발목 잡는 이가 없다. 중심부로 쇄도하면서 가속도를 얻는다. 변혁의 기운은 그곳에 있다. ### 구조를 알면 다 아는 거다. 그런데 아는 사람이 없다. 건물의 구조를 모르는 목수가 집 짓고, 정치의 구조를 모르는 CEO가 정치판에 뛰어든다. 구조를 알면 다 풀리는데 구조를 몰라서 온통 막혀 있다. 조형의 구조를 모르는 화가가 눈 감고 대충 그린다. 마음의 구조를 모르는 종교인이 잘못된 설교를 한다. 소통의 구조, 낳음의 구조를 모르는 지식인이 따라주지 않는 대중들에게 불평을 늘어놓는다. 구조의 얽힘에 높은 얽힘과 낮은 얽힘이 있다. 높은 얽힘은 궁수가 활을 당기는 것이고, 낮은 얽힘은 활시위가 화살을 당기는 것이다. 구조론은 한 마디로 높은 얽힘 밸런스 1이, 낮은 얽힘 밸런스 2를 지배함이다. 이를 원리(原理)라 한다. 으뜸가는 결이다. 결 따라간다. 세상 모든 것은 그 하나의 원리를 유전인자 삼아 대량으로 복제하여 이루어진다. 이에 삼라만상이 펼쳐진다. 세상의 모습은 다양하나 근본은 하나다. 궁수가 활을 당기면 궁수의 팔은 ┓자로 꺾인다. 이를 복제하여 활시위가 화살을 당기면서 역시 ┓자로 꺾인다. 모든 존재는 이렇듯 연쇄적인 복제로 전개된다. 세상은 복제되었으므로 원본만 고치면 다 해결된다. 인간은 먼저 화살을 발견하고 두리번거리며 그 화살이 어디서 날아왔는지를 추론한다. 다음에 활을 발견한다. 화살이 활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알지만 그 이전에 궁수가 그 활을 당겼다는 사실은 모른다. 통찰력은 복제본을 보고 추론하여 원본을 포착하는 것이다. 활이 화살을 당겼다는 사실을 토대로 궁수가 활을 당겼음을 추론하여 아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속에 몇 가지 질서가 겹쳐져 있는지 단박에 안다. 구조주의 세계관이 필요하다. 중복과 혼잡을 제거하여 원본을 찾는 것이다. 만유의 소스가 되는 하나의 질서가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포착하기다. 관악기의 리드처럼 세상의 온갖 다양한 모습들을 변주해낸다. www.drkimz.com.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