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의 응용] 6

닐 암스트롱이 그의 왼발을 달에 내려놓기 전에는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충분히 납득시킬 수 없었다. 이론적 증명으로는 부족하다. 우주인이 지구 바깥에서 지구를 찍은 사진을 제시해야 확실히 알게 된다.

그러나 책상머리에서의 논박을 떠나 일찍이 어부들과 항해사들은 지동설의 도움을 받았다. 실용성에 의해 증명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다. 구조론은 이미 사회에서 활용되고 있다. 그 효용성을 통하여 검증되고 있다.

구조론을 경영에 응용하는 기업가도 있고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데 활용하는 미술학원도 있다. 구조론을 응용하여 창안한 자신의 독창적인 이론을 가르치는 교수도 있다. 각론의 오류가 있겠으나 총론에서 검증된 것이다.

구조론을 접목하여 사업가는 경영에 성공하고, 교육가는 학생들의 성적을 높이는데 성공하고, 예술가는 새로운 창의의 아이디어를 얻고, 리더는 조직을 통제하는데 성공하면 그만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구조론은 특히 시장의 구조가 작동하는 경제분야, 그리고 소통의 구조가 작동하는 예술분야, 또 조직의 구조가 작동하는 정치분야, 그리고 창의의 구조가 작동하는 교육분야에서 빛을 발할 수 있다.

그 외에 생명의 구조가 작동하는 진화론, 물질의 구조가 작동하는 양자론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구조라 하면 특히 건축의 구조다. 건축은 쌓는다. 점에서 선으로 각으로 입체로 나아간다.

모든 진화하는 것, 진보하는 것, 나아가는 것, 증가하는 것, 집적되는 것에 구조가 적용된다. 생물이 진화하므로, 역사가 진보하므로, 학생의 성적이 나아지므로 나라의 경제가 증가하므로 구조가 적용되는 것이다.

구조는 진보한 결과 숫자가 늘어나서 감당할 수 없게 되었을 때도 계 전체를 통제할 수 있는 합리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그러므로 경영가는 구조를 알아야 한다. 커진 시장을 통제하기 위해서.

예술가도 구조를 알아야 한다. 증가한 관객과의 소통하려면. 정치가도 구조를 알아야 한다. 기대치가 늘어난 유권자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 당신도 구조를 알아야 한다. 파트너의 마음을 끌어보려면.

돈과 권력의 방법이 실패하므로 구조가 필요하다. 조직하지 않고 강제하지 않고 지배하지 않고 이심전심 소통의 방법으로 풀어낼 수 있으므로 구조가 필요하다. 나의 전부를 들어 상대의 전부를 끌어낼 수 있다.

구조주의 교육론

창의의 구조

교육의 핵심은 창의에 있다. 창의는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 다른가? 다름은 같음의 전제 안에서의 다름이다. 색깔이 다르다면 컬러를 공유하고 있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맛이 다르다면 음식이 있어야 하고 냄새가 다르다면 향이 있어야 한다. 어떤 것이 다르다는 것은 그 같고 다름을 구분할 구분대상을 함께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아래가 다르면 위가 같다는 뜻이다.

● 소통하기 - 이다/아니다

● 하나되기 - 있다/없다

● 맞서기   - 같다/다르다

● 맞물리기 - 옳다/그러다

● 만나기   - 맞다/틀리다

같고 다른 정도는 구조가 물려있는 수준에 따라 다섯 층위의 계급을 가지는 것이며 ‘맞다/틀리다’는 가장 낮은 표면의 같고 다름이다. 점점 더 깊숙히 맞물려 들어서 ‘이다/아니다’의 소통구조에 도달한다.

이다/아니다는 근본적인 질이 다름이다. 맞다/틀리다는 말초적인 양의 다름이다. 질과 양 사이에 입자와 힘과 운동의 다름이 있다. 양의 다름이 모여 운동의 다름을 이루고 운동의 다름이 모여 힘의 다름을 낳는 식이다.

이러한 집적구조를 모르면 다름을 끌어낼 수 없다. 창의할 수 없다. 막연히 다름을 고안해 봤자 표면의 양이 다를 뿐 바탕의 질은 같다. 소년들이 제각기 개성있게 입어봤자 개성의 다름 하나로 획일화 된다.

다름을 추구하기 때문에 오히려 획일화 된다. 하위 단계가 다르기 위해서는 상위 단계가 같아야 하기 때문이다. 모양의 다름을 추구하면 모양을 내는 소재로 획일화 되고 색의 다름을 추구하면 색을 내는 소재로 획일화 된다.

소재≫기능≫성능≫효능≫디자인의 1 사이클이 있다. 다름을 추구하면 결국 디자인에 몰입하여 획일화 된다. 소재와 기능과 성능과 효능에서 달라야 진짜 다른 것이다. 진정한 창의는 그곳에 있다.

소재와 기능으로 갈수록 다름을 끌어내기 어렵다. 그러나 성공하면 완전히 달라진다.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효능과 디자인으로 갈수록 다름을 끌어내기 쉽지만 겉으로 다를 뿐 본질이 같다.

차별화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절대경로의 차별화다. 둘은 상대경로의 차별화다. 절대경로는 질≫입자≫힘≫운동≫량이다. 이를 상품에 적용하면 소재≫기능≫성능≫효능≫디자인의 차별화가 된다.

질의 다름은 레벨이 다르고 수준이 다른 것이다. 소재와 기능으로 갈수록 근본적인 질의 다름이 된다. 소재를 바꾸면 저절로 기능이 바뀌고, 기능이 바뀌면 저절로 성능이 바뀐다. 무수한 다름들을 대량복제할 수 있다.

상대경로는 짝짓기다. 그것은 일을 하는 것이다. 절대경로의 차별화가 부모가 다르고 족보가 다르고 출신성분이 다른 것이라면 상대경로의 차별화는 파트너가 다르고 취미가 다르고 직업이 다른 것이다.  

구조는 짝짓기다. 세상 모든 다름들은 짝짓기가 생산한다. 그것은 무엇인가? 포지션이다. 공격수와 수비수가 역할이 다른 것이 상대경로의 차별화다. 포지션이 있는 이유는 대결할 상대팀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대결하지 않으면 다름은 얻어지지 않는다. 나아가 세상과 만나고 세태와 맞서지 않으면 다름은 얻어지지 않는다. 밤과 낮은 서로 대칭된다. 그러므로 다른 것이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대칭된다. 그러므로 다른 것이다.

여자와 남자, 땅과 하늘, 밤과 낮으로 구분되는 것이 다 포지션이다. 그 포지션이 대칭구조 속에서 성립함을 알아야 한다. 그 대칭구조가 세상과의 대결, 시대정신과의 대결 속에서 성립함을 꿰뚫어보지 않으면 안 된다.

막연히 다름을 찾으려 들 것이 아니라 그러한 대칭과 평형의 집적구조를 꿰뚫어볼 수 있어야 한다. 절대경로에서 수준차를 끌어내고 상대경로에서 다양성을 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비로소 창의할 수 있다.

질의 향상이 없이는 진정 다를 수 없다. 세상과의 대결 없이는 진정 다를 수 없다. 역사를 모르고 공동체를 모르고 시대정신을 모르고 정치를 모르고 경제를 모르고 문화를 모르고는 다를 수 없다. 창의할 수 없다.

만약 당신이 예술가가 되고자 한다면 역사를 알아야 한다. 만약 당신이 시인이 되고자 한다면 역사를 알아야 한다. 시대를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상대경로의 차별화는 짝짓기에 의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고민이 없는 상태에서의 다름의 추구는 너절해질 뿐이다. 어수선해질 뿐이다. 산만해질 뿐이다. 그 너절함과 어수선함과 산만함으로 획일화 된다. 시대의 트렌드를 읽고 그 시대의 격랑 속에 몸을 맡기지 않으면 안 된다.  

이상주의란 무엇인가?

모든 창의의 아이디어들은 그 아이디어의 자궁에서 쏟아져 나오는 법이다. 그냥 창의한다는 따위는 없다. 반드시 모태가 있고 자궁이 있다. 서구의 사상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라는 두 자궁에서 복제되어 나왔다.

근본은 헬레니즘의 이상주의다. 서구의 합리주의는 고대 수학과 그리이스의 이상주의와의 결합에서 얻어진 것이다. 창의의 수준은 곧 이상주의의 수준이다. 창의할 수 있느냐는 제대로 된 이상주의가 있느냐에 달려 있다.

이상주의란 무엇인가? 완전성에 도달하려는 태도이다. 왜 완전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완전해야 소통이 되고 소통이 되어야 복제되기 때문이다. 그래야 창의가 얻어지고 아이디어가 생산되기 때문이다.

계가 있다. 입력에서 출력까지 있고 시작에서 끝까지 있고 인풋에서 아웃풋까지 있다. 그것이 완성될 때 소통한다. 완전한 종은 울음을 토하고 완전한 피리는 소리를 내고 완전한 꽃은 향기를 낸다.

완전하지 못한 씨앗은 싹트지 않는다.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죽는다. 무릇 인간의 창의란 그 완전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리스의 이상주의는 다신교 사회였던 고대 헬레니즘 세계의 영웅숭배와 관련이 있다.

그들은 인간이 완전해질 때 신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트로이 전쟁의 영웅 헥토르야말로 완전한 인격의 영웅이라는 따위의 담론들 말이다. 헬레니즘의 이상주의가 중세에 와서 헤브라이즘의 메시아 개념과 겹쳐졌다.

그들은 신(神)의 모습에서 완전을 찾았다. 완전한 음악, 완전한 건축, 완전한 회화, 완전한 인격으로 신에게 다가갈 수 있다고 믿었다. 서구의 모든 창의는 이 완전성의 개념에서 유도된 것이다.

서구의 클래식 개념이 여기서 나왔다. 여기에 수학이 결합되어 합리주의로 나아간 것이 고전주의 개념의 완성이다. 수학이야말로 완전한 건축, 완전한 균형, 완전한 대칭에 도달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  

동양정신의 창의력 빈곤은 이상주의의 결핍에 원인이 있다. 신의 완전성에 다가서려는 클래식 개념이 빈곤하니 그것을 증명하려는 수학적 사고도 결여되었다. 동양사상은 완전한 음악, 완전한 그림에 도전하지 않았다.

동양에도 이상주의는 있다. 도교의 소통하는 이상주의와 불교의 초월하는 이상주의와 유교의 통제하는 이상주의가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긴장 보다는 이완에서 답을 찾는다는 것이다.

반면 서구의 이상주의는 긴장에서 답을 찾는다. 신은 인간을 긴장시키기 때문이다. 동양사상은 인간중심적이다. 절대주의에서 비롯되는 극적인 긴장보다는 중용이나 중도, 혹은 평상심의 이완을 강조하였다.

존재는 포지션이며 포지션은 대칭구조 안에서 성립한다. 대칭은 긴장을 유발한다. 여럿이 하나의 지점과 맞물려 있어서 그 중 하나가 움직이면 다른 것도 그에 연동되어 일제히 함께 움직이기 때문에 긴장할 수 밖에 없다.  

서구의 이상주의는 팔등신의 인체비례나 건축에 있어서의 황금비례나 소실점이론과 같아서 여럿이 하나의 지점과 맞물려 있어서 그 중 하나가 어긋나면 모두 붕괴된다는 점에 있어서의 긴장된 이상주의다.

반면 동양의 이상주의는 미인을 논하되 오똑한 코와 땡글한 눈과 오이씨같은 이와 삼단같은 머리칼를 열거하는 식이어서 긴장이 없다. 유교가 강조하는 주나라의 이상정치나 도교가 강조하는 역설의 관점은 긴장의 해소다.

무엇인가? 완전한 것은 소통하는 것이다. 서구의 이상주의가 그 소통의 절대적인 조건을 충족함에 주의를 두고 있다면 동양의 이상주의는 그 소통의 상대적인 실행에 주의를 둔 것이다.

서구의 신성지향이 절대경로의 차별화라면 동양의 인간성지향은 상대경로의 차별화다. 서구는 수준을 끌어올리는 방법으로 차별화를 꾀하고 동양은 짝짓기로 차별화를 끌어낸다. 동양정신에 인류문명의 대안이 있다.  

서구의 이상주의가 일 천만 시청자를 하나의 TV앞에 모아두는 긴장의 이상주의라면 동양의 이상주의는 그 TV로 다양한 드라마를 방영하여 시청자를 웃기고 울리는 이완의 이상주의인 것이다.

동양의 이상주의는 수학과 결합되지 않으니 합리주의로 나아가지 못했다. 소통의 실행에 주의를 두었을 뿐 소통의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다. 낮은 수준에서 많이 소통되었으나 높은 수준에서의 근본적인 소통은 일어나지 않았다.

참된 이상주의는 긴장을 거쳐서 이완으로 가는 것이다. 먼저 대칭구조의 긴장을 받아들여야 한다. 대장이 연병장에 모인 일만 병사를 하나의 구령으로 통제함과 같에서 서로 밀접하게 연관시키는 것이다.

이완은 특수부대 요원들이 서로간에 계급구분 없이 누구든 먼저 상황을 포착하는 자가 리더 역할을 맡아 동료에게 지시를 내릴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서로간에 완전한 신뢰와 이해라는 전제가 필요하다.    

● 긴장 - 리더가 요원에게 지시한다. 뇌에서 몸으로 정보를 내려보낸다.

● 이완 - 요원이 서로 협력한다. 몸에서 뇌로 정보를 올려보낸다.

인간은 직관으로 파악한다. 사랑과 증오, 떳떳함과 부끄러움, 아름다움과 추함, 자연스러움과 어색함, 시원함과 답답함으로 구조를 꿰뚫어 본다. 완전한 것은 사랑스럽고, 떳떳하고, 아름답고, 자연스럽고, 시원하다.

사랑의 열정은 긴장과 이완을 동시에 낳는다. 그러나 긴장이 먼저다. 긴장은 극에 몰입하는 것이고 이완은 쾌감의 보상을 받는 것이다. 긴장은 극을 시작하는 것이고 이완은 극을 종결하는 것이다.

긴장은 절대경로의 차별화고 이완은 상대경로의 차별화다. 긴장없이 이완으로 직행은 불가능이다. 그것은 매너리즘이거나 타성이거나 표절이거나 진부한 것이다. 이러한 감정의 신호를 통해서 인간의 영감은 작동한다.

직관력과 통찰력은 자신의 감정을 해석하는 능력이다. 이러한 창의의 원리를 파악하여 창발성을 기를 수 있다. 직관은 이러한 감정을 통하여 자연의 포지션구조를 파악하는 능력이다. 자연의 대칭성을 통찰함이다.

큰 산이 있는 곳에는 항상 큰 강이 있고 큰 바위가 있는 곳에는 항상 큰 폭포가 있다. 이러한 자연의 대칭성을 포착할 때 인간은 본능적으로 긴장한다. 집중한다. 몰입한다. 열정을 가지고 달려든다. 창의한다.

이성을 만날 때 긴장된다면 내 안에 사랑이 싹튼다는 증거다. 상대가 내게 무슨 짓을 해도 경계심이 일어나지 않을 정도로 편안하다면 사랑이 무르익었다는 증거다. 이렇듯 긴장과 이완에 의해 직관된다.

지적 능력이란 무엇인가?

지능의 차이에서 가장 큰 부분은 집중력이다. 집중력은 긴장을 조절하는 능력이다. 벌레도 위기를 당하면 한 순간에 지능이 급속하게 높아진다고 한다. 인간도 화가나면 본질을 꿰뚫어 보게 된다.

인간에게 분노가 없다면 표피만을 보고 안이한 대응을 하게 된다. 문제를 확대시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분노하면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되기 때문에 기어이 본질을 파악하게 된다.

이러한 내용은 최근 학계의 실험결과가 언론에 보도된 바 있다. 지적 능력의 큰 부분은 집중력이다. 집중력은 긴장하고 흥분하고 몰입하는 능력이다. 집중은 뇌의 특정 부분을 극대화하여 사용하는 것이다.

긴장은 뇌의 많은 부분이 활동을 멈추고 특정 부위의 활동량이 증가함이다. 긴장을 통제할 수 있다면 학습효과는 극대화 된다. 간단하다. 어떤 사실과 맞물려 있는 변수의 수가 최대화 할 때 인간은 긴장한다.

어떤 사건이 다른 많은 사건과 동시에 맞물려 있어서 특정 사건에 대한 대응이 다른 사건으로 상당히 파급될 때 인간은 긴장한다. 연동되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는 인간의 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단어를 암기할 때 뇌의 어느 부위를 사용하는가다. 입으로 중얼거리고 볼펜으로 끄적거린다면 겨우 입과 손을 사용할 뿐이다. 만약 눈과 코와 귀와 몸을 전부 사용한다면 학습효과는 극대화 된다.

그것은 상황을 포착하는 것이다. 하나의 단어가 단지 하나의 의미를 나타내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상황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대칭되는 상대가 존재하여 있다는 것이다.

상대와의 대칭을 이루는 대결구조가 있다. 스포츠게임과 같다. 나의 행동이 상대의 행동과 연동되어 있다. 그러므로 긴장이 있다. 긴장한다는 것은 서로 대칭되어 있다는 것이고 그 안에 밸런스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밸런스의 평형이라는 목표가 있다. 어떤 상황에서든 그 상황에서의 숨은 대칭구조를 포착하여 평형이라는 목표를 얻어 동기부여 하기다. 그리고 그러한 긴장상태의 해소는 인간으로 하여금 쾌감을 느끼게 한다.

그 쾌감에 중독될 때 학습능력은 최고조에 달하게 된다. 그것이 이완이다. 집중력은 ‘상황≫대칭구조≫맞물림≫연동≫긴장’에 따른 동기부여와 그 긴장의 이완에 의한 쾌감의 보상을 유도하는 능력이다.

한국인이 어학을 못하는 이유는 상황을 읽지 못하기 때문이다. 단어의 의미가 문장 안에서 전제와 진술, 주어와 술어, 명사와 동사의 대칭성에 의해 유도된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긴장이 없으면 이완도 없다. 동기가 없으면 보상도 없다. 집중이 없으면 쾌감도 없다. 하나의 단어가 하나의 상황이고 하나의 대결이고 짝짓기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반드시 짝이 있다.

긴장은 주어진 과제에서 대칭성을 포착하는 데서 집중하여 동기부여를 얻는 것이며 이완은 그 대칭구조를 통제하는 밸런스를 얻어 쾌감으로 보상받는 것이다. 동기와 보상으로 완성된다. 창의할 수 있다.

직관력의 공식

창의력은 직관력이며 직관력은 집중력과 연동된다. 집중력은 긴장하는 능력이다. 긴장하는 능력은 자연의 대칭성을 포착하는 능력이다. 이는 어떤 일의 1 사이클이 진행되는 전체과정에의 참여할 때 얻어진다.

반제품이 아니라 완제품을 추구하는 것이다. 완제품≫완전성을 추구하는 태도가 이상주의다. 서구의 이상주의는 긴장의 몰입을 강조하고 동양의 이상주의는 이완의 보상을 강조한다.

쾰른성당의 첨탑처럼 뾰족한 것이 서구의 이상주의라면 산수화처럼 편안한 것이 동양의 이상주의다. 서구의 긴장은 절대경로의 차별화고 동양의 이완은 상대경로의 차별화다. 둘 다 중요하지만 인류의 대안은 동양정신에 있다.

● 소통함 - 사랑하는가(긴장과 이완)/분노하는가

● 하나됨 - 떳떳한가(자부심과 소속감)/부끄러운가

● 맞섬   - 아름다운가/추한가

● 맞물림 - 자연스러운가/어색한가

● 만남   - 시원한가/답답한가

사랑이란 열정이다. 그것은 자연의 대칭성에 몸이 반응하는 것이다. 그것은 최고도의 긴장이다. 남녀간의 사랑 뿐 아니다. 흙을 빚는 도공이 흙을 사랑함과 같다. 악사가 악기를 애지중지함과 같다. 후끈 달아오르는 것이다.

떳떳한가는 자랑스러움을 느낌이다. 역시 두 가지 감정으로 나타난다. 자부심은 주도권을 쥘 때고 소속감은 반대로 상대에 의해 주도당할 때다. 그것을 거부하면 열패감을 느끼지만 받아들이면 소속감을 느낀다.

주도권의 자부심이 잘못되면 승부욕이 되고 소속감이 잘못되면 노예근성이 된다. 이렇듯 어떤 상황에 직면했을 때 어떤 감정을 느끼는가에 따라 이면에 어떤 구조가 작동하고 있는지 순간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집중력은 어떤 문제에 직면하여 시원함≫자연스러움≫아름다움≫떳떳함≫열정으로 감정이 에스클레이터를 타고 고조되는 것이다. 그것은 주어진 상황이 생각보다 더 복잡하게 맞물려 있을 때 가능하다.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할 때 거기에 연동된 더 많은 성과들이 일거에 해결될 때가 있다. 하나를 풀었을 뿐인데 전부 풀린다. 뽕을 땄을 뿐인데 님도 본다. 열심히 했을 뿐인데 칭찬도 듣고 용돈도 받는다. 그럴 때 집중한다.

집중력은 어떤 일의 전체과정에 대한 이해에서 얻어진다. 전체과정의 이해란 시원함≫자연스러움≫아름다움≫떳떳함≫열정으로 집적도가 상승하는 각 단계의 밸런스를 사전에 세팅해 두는 것이다.

베테랑이 모든 경우의 수에 대한 대응책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 경우 긴장과 이완 하나로만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하나만 해결하면 나머지는 자동으로 해결되도록 사전에 각 부위의 밸런스를 세팅해 두는 것이다.

투수가 인체의 모든 관절을 직결로 연결시키는데 성공한다면 뇌에서 단 하나의 명령만으로 직구를 원하는 각도로 꽂을 수 있음과 같다. 어깨와 팔과 손목과 손가락의 근육에 별도로 명령하지 않아도 된다.

지식인의 문제는 완제품이 아니라 반제품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들은 일이 진행되는 1 사이클의 전체과정에 참여해 본 경험이 없다. 반제품을 만들어놓고 이를 완제품으로 착각하고 대중에게 강권한다.

대중은 흥미를 잃고 등을 돌리지만 지식인은 이유를 모른다. 하나의 조작으로 통제할 수 있는 밸런스의 축이 있는데도 만남≫맞물림≫맞섬≫하나됨≫소통의 각 부분에 일일이 개입하려 들므로 개입이 최대화 된다.  

사실이지 지식은 본래 반제품이다. 지식 그 자체로는 쌀이 나오지 않고 떡이 나오지 않는다. 그것을 현실에 접목해야 가치가 창출된다. 그러므로 지식인은 일의 전 과정에 참여했을 때 받는 보상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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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중 한 쪽이 바람을 피운다. 이는 일상생활에서의 부자연스러움으로 나타난다. 파트너가 그 부자연스러움을 포착한다. 그러나 포착한 내용을 언어적으로 해석한 것은 아니다. 자신이 무엇을 포착했는지 모른다.

단지 기분이 나쁠 뿐이다. 넘겨 짚는다. ‘당신 바람 피웠지?’ 상대는 당황해한다. 알아챈다. 이것이 여자의 직감이다. 그 경험이 쌓인다. 점장이가 그렇고 베테랑이 그렇다. 느낌만으로 무엇이 잘못인지 파악할 수 있다.

그 사람의 직업이 화가라면 그리는 중에 기분이 나빠진다. 연주자라면 연주하는 중에 기분이 나빠진다. 어색함이 있다. 예술가들은 그 긴장감을 포착하는데 능한 사람이다. 그러한 긴장은 포지셔닝을 읽는 본능에서 비롯된다.

그것이 눈치다. 형세판단이다. 상대와 내가 맞선 중에 누가 높은지, 누가 주도하는지, 누가 갑인지 그 형세를 잘 읽는다. 천재는 직관한다. 감정이 섬세한 사람이 천재다. 쉽게 긴장하는 민감한 사람이 천재다.

구조주의 경제학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한 국가의 경제하는 시스템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본주의가 있을 뿐이다. 자본주의의 바탕은 자연의 법칙으로 존재하며 인간이 그 원리를 발견하고 이를 토대로 경제하는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풀과 나무가 햇볕을 착취하여 풍성하게 열매맺거나 혹은 사슴이 그 풀을 뜯어먹고 또 사자가 그 사슴을 먹으며 자손을 번식시키는 따위는 자연의 법칙이다. 그 생태계에 일정한 시스템이 적용되어 있다.

시스템은 여러 층위의 밸런스들이 단계적으로 집적되어 있다. 한 부분이 고장나면 전체적으로 완전히 잘못되고 만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시스템의 무리없는 가동을 위해서는 많은 전제가 필요하다.

자본주의는 시스템이다. 시스템의 가동을 위해서는 정교한 초기화 세팅의 절차가 필요하다. 시스템은 구성요소들의 집적에 의해 성립하며 인적자원이야말로 자본주의 시스템의 가동을 위해 필요한 핵심적 요소이다.

사회주의적 가치는 특히 자본주의 시스템 가동의 중요한 전제가 된다. 사회발전단계가 낮은 원시사회에 자본주의 시스템의 이식은 불가능하다. 토대가 되는 교육의 보급과 경제하려는 동기를 부여하는 공동체 건설이 필요하다.

혈관이 막히고 신경이 차단되면 인체의 생명시스템은 작동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도로가 막히고 언어가 막히면 시장의 소통시스템은 작동하지 않는다. 교육이 보급되지 않은 후진국에서 자본주의 시스템은 작동하지 않는다.

공동체 문화의 수준 역시 중요하다. 한 개인이 가족≫부족≫국가≫세계로 나아가며 지속적으로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고 세상과 대결의 각을 세우며 합리적인 판단과 결정을 하게 하는 밸런스의 축이 있어야 한다.

인간이 일한다는 것은 세계와 만나고 맞서고 소통하는 과정이다. 그 만나고 맞물리고 맞서는 포지션을 잃어버린다면, 세상을 바라보는 자기만의 눈높이를 잃어버린다면 인간은 상승할 수 없다. 경제하려는 동기를 얻을 수 없다.

대척점을 잃었을 때 비교와 판단과 결정이 불가능하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공동체의 진보다. 또 교육이 보급되지 않았을 때 자본주의의 두 기둥이라 할 주식회사제도와 금융제도는 작동하지 않는다.

교육의 보급과 공동체의 발전은 사회주의에서 특히 강조된다. 사회주의적 가치야 말로 자본주의 건설의 기초라 할 수 있다. 자본주의가 내적인 에너지 순환을 통하여 가동되는 정교한 시스템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중요한것은 순환되는가이다. 약탈이나 착취구조는 에너지가 순환되지 않는다. 그것은 지속가능하지 않은 시스템이다. 자원은 고갈되고 토지는 바닥나고 지력은 쇠퇴하고 노예는 도망친다. 그 지점에서 시스템은 붕괴한다.

자본주의는 인간이 물질을 통제하는데 사용하는 수단이다. 그것이 하나의 도구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망치와 같고 칼과 같다. 과연 인간이 그 도구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느냐다.

자본주의는 시장영역에 국한되는 시스템이며 사회주의는 그 시스템을 작동하게 하는 사회적 기반이다. 자본주의가 자동차라면 사회주의는 그 자동차를 달리게 하는 도로체계와 같고 또 그 자동차를 제어하는 운전기사와 같다.

사회주의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일반에 두루 적용되는 자본주의보다 더 높은 차원의 가치다. 그러므로 자연법칙에서 유래한 자본주의와 보다 인간화된 이념적 가치로서의 사회주의는 애초에 비교대상이 아니다.

시장영역 안에는 자본주의가 있을 뿐이며 그 자본주의의 발전된 형태와 원시적 형태가 있을 수 있다. 대결은 주로 후진국형의 원시적 자본주의와 선진국형의 진보한 자본주의 사이에서 일어난다.

사회주의 이념은 있어도 사회주의 경제는 없다. 구소련의 계획경제는 에너지 순환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지속가능한 시스템은 아니었다. 자본주의 초기단계에 나타나는 기형적인 경제실험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는 이념이 아니어야 한다. 이념은 목적이다. 자본주의는 도구다. 목수의 목적은 집을 짓는 것이고 망치와 톱은 그 수단이다. 자본주의는 망치와 같고 톱과 같다. 망치를 섬기는 어리석은 목수는 없다.  

자본주의가 일부 이념화 된 부분도 있으나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과학적 사실과 ‘그러므로 인간은 태양 앞에 경배해야 한다’는 수구꼴통의 이념적 주장은 다른 것이다. 자본주의는 통제의 대상일 뿐 섬김의 대상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통제할 수 있는가이다. 자본주의는 정밀한 기계장치와 같다. 기계장치를 다룰 수 있는 숙련된 기능공이 필요할 뿐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는 순수하게 전문가의 손에 맡겨져야 한다.

인간은 자본주의라는 도구로 물질을 통제한다. 마찬가지로 사회주의라는 가치로 자본주의를 통제한다. 자본주의는 전문가들에 의해 통제되어야 하지만 그 전문가들 역시 사회주의라는 검증장치에 의해 통제되어야 한다.

경제란 무엇인가?

구조는 집적되어 밸런스를 성립시키고 그 위에 또다른 밸런스를 성립시키는 식으로 정밀하게 구축된다. 하나의 구조는 미학적 완성형이 있다. 완전성이 있다. 완전하지 않으면 통하지 않는다.

하나의 포지션이 하나의 밸런스를 이룬다. 하위포지션과 상위포지션 사이에 중간과정은 없다. 집적도 1과 집적도 2 사이에 1.5는 없다. 지게도 있고 수레도 있다. 지게와 수레를 결합한 바퀴달린 지게는 실패다.

● 보퉁이≫지게≫수레≫자동차≫상수도체계

20여년 전 어떤 교수가 300키로를 운반할 수 있는 바퀴지게를 발명하여 인도와 같은 후진국에 보급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길 없는 곳으로 가는 지게의 장점과 대량수송하는 수레의 장점 중 하나도 소화하지 못한다.

토마토와 감자를 합성하여 뿌리에는 감자가 열리고 줄기에는 토마토가 열리게 한 포마토처럼 실패다. 감자도 부실하고 토마토도 부실하다. 계획경제라는 것은  바퀴지게와 같이 완성도가 떨어지는 실패작이다.  

경제는 생물이다. 생물은 무엇이 다른가? 저절로 돌아간다. 햇볕의 공급이 끊어지지 않는 한 생물은 저절로 자라고 저절로 번식한다. 반면 도둑이 훔치거나 혹은 전쟁으로 약탈함은 저절로 돌아가는 방식이 아니다.

도둑이 훔치고 병정이 약탈하면 결국 도둑에 대한 경계가 늘고 약탈할 대상이 사라져서 더 이상 훔칠 수도 없고 약탈할 수도 없게 된다. 시스템의 에너지 순환이 유지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는 경제가 아니다.

경제란 1이 2를 통제함으로써 1의 잉여를 창출하는 것이다. 밸런스의 심 1이 날 2를 통제한다. 천칭의 저울 축 하나가 접시 2를 제어한다. 그것이 경제다. 여기서 잉여가 창출되므로 시스템이 작동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경제원리가 자연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자본주의는 인간이 임의로 주장한 것이 아니라 자연에 있는 것을 사회로 이식한 것이다. 그래야 진짜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는 정치적으로 중립이다.

자본주의는 진보도 아니고 보수도 아니다.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인간이 자본주의를 잘 운용하면 선이고 잘못 운용하면 악이다. 도구에 불과한 자본주의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그 도구의 주인인 인간이 문제다.  

왜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가? 왜 강의 물줄기는 나뭇가지처럼 여러 지류가 하나의 본류로 합쳐지는가? 1이 2를 통제하기 위해서다. 그 조건에서만 1에 의한 2의 통제가 성립하므로 그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동물은 하나의 뇌에서 전해지는 신호로 수 조개의 세포가 동시에 통제된다. 식물은 하나의 줄기를 통하여 뿌리의 물과 잎의 당분이 교환된다. 수만의 잎과 수천의 가지가 하나의 줄기에 의해 통제되는 것이다.

강은 물줄기가 하나씩 합쳐질 때 마다 유속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물이 흐르고, 나무가 자라고, 바위가 구르고 모두 그러한 2≫1의 잉여에 의한 통제원리를 따른다.

왜 갑자기 돌풍이 부는가? 그곳에 밀도차에 의한 잉여가 생겼기 때문이다. 왜 갑자기 비가 쏟아지는가? 그곳에 수분이 모여서 에너지의 잉여가 생겼기 때문이다. 모든 자연현상은 잉여에 의해 일어난다. 시장도 마찬가지다.

잉여를 통제가능한 시스템 안에 가두면 자본주의 성공이다. 잉여를 통제하는데 실패하면 자본주의 모순이다. 원자로가 핵분열의 속도를 제어하듯이 힘조절에 성공해야 한다. 인간에게 그러한 능력이 있느냐가 중요하다.  

구조가 잉여를 창출한다

최적화된 구조는 1의 조작으로 계 전체를 통제한다. 그것이 경제다. 경제하기 이전의 상태는 ‘1의 조작으로 1의 성과’였는데 경제함에 따라 1의 조작으로 얻는 성과의 수가 절대적으로 늘어난다.

하나의 경제수단을 획득할 때 마다 조작횟수는 1/5로 줄어든다. 자원시장≫생산시장≫평가시장≫분배시장≫소비시장이 있으며 이를 단계적으로 세팅하여 갈 때 마다 1/5씩 비용이 감소한다.

인식≫판단≫결정≫조작≫피드백의 개입횟수가 줄어든다. 경제한다는 것은 결국 덜 손대고 동일한 효과를 얻자는 것이다. 시스템의 하부구조를 상부구조의 아래에 연동시켜 배치하는 방법으로 가능하다.

밭을 준비할 때≫씨앗을 뿌릴 때≫곡식을 키울 때≫수확할 때≫먹을 때 각각의 밸런스가 있다. 각각의 시장이 있다. 각각의 판단과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앞단계가 5배씩 뒷단계에 영향을 미친다.

원시의 채집경제라면 앞의 네 단계가 생략된다. 입력≫저장≫제어≫연산≫출력의 5단계에서 마지막 출력만 있다. 여기에 한 단계를 추가할 때 마다 1/5씩 적게 개입하고 동일한 효과를 얻는다. 그것이 경제다.

기계장치는 집적도 1에서 5까지 있다. 집적도 1은 막대, 집적도 2는 바퀴, 집적도 3은 저울, 집적도 4는 엔진, 집적도 5는 인공지능이다. 자본주의 시스템 역시 이러한 집적도를 가진다.

시장이 두뇌 역할을 하는 증권시장 개념이 집적도 5라면 위에 최고집행자가 있는 금융제도는 집적도 4에 해당한다. 매매가 이루어지는 상품시장이 집적도 3이면 경작은 집적도 2고 채집은 집적도 1이다.

인간의 개입횟수가 최소화 되게 세팅하는데 시장의 의미가 있다면 인간의 개입이 가치를 창출한다고 믿는 마르크스의 노동가치설은 틀렸다. 지구촌 환경에의 무분별한 개입을 주장하는 개발지상주의 역시 틀렸다.

우리는 시장이 인간의 개입없이 저절로 돌아가게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인류의 생존환경 역시 개입을 최소화 시켜야 한다. 땅을 파고 삽질하고 장벽을 세우는 방식은 자본주의 원리에 맞지 않다.

개입은 하위단계의 개입을 줄이기 위한 상위 단계의 개입이어야 한다. 손발의 개입이 아니라 몸통의 개입이어야 하며 몸통의 개입이 아니라 가슴의 개입이어야 하고 가슴의 개입이 아니라 머리의 개입이어야 한다.

인간이 얻는 가치는 대부분 태양에서 공급된다. 석유와 같은 화석자원도 고대의 태양이 비축해 둔 것을 빼서 쓰는 것이다. 가치란 태양이 지구에 공급하는 것을 인간에게 향하도록 물줄기의 방향을 슬쩍 틀어놓은 것이다.

그것은 포지션 변경이다. 그러므로 가치를 생산하는 것은 노동이 아니라 정보다. 노동과 정보의 차이는 정확도에 있다. 노동은 에너지를 소비한다. 정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보는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으므로 가치가 있다.

아인슈타인에 의해 물질이 에너지로 대체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듯이 구조론은 에너지가 정보로 대체된다는 사실을 규명하고 있다. 경제하는 시스템에 의해 노동은 정보로 대체된다. 그러나 노동이 아주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노동의 형태가 달라질 뿐이다. 정보판단에 의해 입력≫저장≫제어≫연산≫출력에서 인간은 더 상위단계에 개입한다. 글자를 써도 옛날에는 인간이 붓으로 출력했지만 지금은 컴퓨터가 출력하고 인간은 입력할 뿐이다.

예전에는 손으로 TV 채널을 돌렸지만 지금은 리모컨을 누른다. 노동량은 감소했지만 누군가는 그 일을 해야한다. 노동시간과 에너지 투입은 감소하지만 오고가는 정보의 총량은 줄어들지 않는다.

트래픽은 오히려 증가한다. 총노동량이 감소할수록 리모컨의 버튼 숫자는 증가한다. 노동이 감소해도 일자리는 증가한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인간은 입력≫저장≫제어≫연산≫출력 중에서 입력포지션의 일을 차지하게 된다.

● 입력포지션 - CEO, 자영업자, (최상위 포지션)

● 저장포지션 - 고위간부

● 제어포지션 - 중간관리자

● 연산포지션 - 숙련노동자

● 출력포지션 - 비숙련노동자 (최하위 포지션)

입력은 CEO, 저장은 간부, 제어는 관리자, 연산은 숙련노동자, 출력은 비숙련노동자에 의해 통제된다. 사회가 발달할수록 자영업과 서비스업이 발달하여 더 많은 사람이 입력과 저장, 제어의 상위포지션에서 역할을 맡게 된다.  

경제의 완성

경제에 무엇이 필요한가? 옛날에는 의식주가 필요했지만 지금은 의와 식이 해결되고 있으므로 집과 차와 여가가 필요하다. 인간은 밥과 옷과 집과 차와 여가만 있으면 충분히 살 수 있다. 더 필요하지 않다.

무한한 경제성장은 불필요하다. 인간의 욕망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지금 밥과 옷의 조달에 성공한데 이어 집과 차를 조달하려 하고 있고 선진국은 거기에 여가가 더 있다는 점이 다르다.

● 여가-질의 경제  :  환경을 초월하여 창의적 활동 가능

● 차 - 입자의 경제:  공간의 지배로 환경에 우위.

● 집 - 힘의 경제  :  거점확보로 환경에 맞섬

● 옷 - 운동의 경제:  외부활동가능

● 밥 - 량의 경제  :  생존가능

경제의 질적 성장단계는 인간이 환경과의 맞섬에 있어서 어느 수준의 비교우위에 서는가이다. 경제의 최종적인 목적은 여가에 있다. 환경과의 대립에 있어 이간의 환경에 비해 우위에 서는 것이 여가다.

인간이 불행한 이유는 근본 환경과의 마찰 때문이다. 배가 고프고 날씨가 춥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것은 환경의 공격이다. 인간은 의식주를 획득하여 환경의 공격에 대해 방어할 수 있다.

인간은 밥을 얻어 배고픔을 피하고 옷을 입어 추위를 피하고 집을 지어 비바람을 막는다. 여기까지는 소극적인 회피다. 거기에 더하여 자동차를 가진다는 것은 환경과의 맞섬에서 인간이 확실히 우위에 선다는 것이다.

집이 있는 사람은 방에서 비를 피하지만 집 밖으로 나갈 수는 없다. 비가 그칠 때 까지 집안에 갇혀 있어야 한다. 반면 자동차가 있는 사람은 비가 오지 않는 곳으로 이동할 수 있다. 비가 와도 집에 갇혀있지 않는다.

그러나 환경과의 갈등상태는 여전히 존재한다. 여전히 비를 피해서 쫓겨다녀야 하는 것이다. 여가는 여유다. 형편에 여유가 있다면 비가 와도 상관이 없다. 밖에 나가서 식량을 구하려 하므로 환경에 제약을 받는 것이다.

경제의 궁극적인 목적은 환경의 제약을 극복하고 자기실현적인 삶의 형태를 완성하는데 있다. 그것은 첫째 친구를 얻는 것이며 둘째 그 친구와 함께 하는 소통의 양식을 완성하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자기방식의 이상주의적인 삶의 형태를 일구어내는 것이다. 가난해도 부유해도 이러한 본질의 문제는 회피될 수 없다. 경제는 자기실현의 성공확률을 높여주는 부차적인 것이고 자기실현이 진짜다.

인간에게는 얼마만큼의 부가 필요한가? 자기실현에 필요한 만큼의 부가 필요하다. 자기실현은 자기 내부에 잠재한 가능성을 끌어내어 현실화 하는 것이다. 그것을 끌어내는 과정은 소통이다.

결국 인간에게는 사회와 소통할 수 있는 만큼의 부가 필요하다. 어리석은 자는 부유해도 친구를 잃어 소통에 실패할 것이며 현명한 자는 가난하지만 친구를 얻어 자기실현에 성공할 것이다.

경제는 무한히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밥≫옷≫집≫차≫여가로 1 사이클이 완성된다. 그 수준에서 소통은 완성된다. 경제가 성장해도 더 높은 수준에서의 밥≫옷≫집≫차≫여가로 대체될 뿐 이러한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가치란 무엇인가?

구조란 맞물림이다. 거래가 성립하는 지점에 수요의 힘과 공급의 힘이 맞물려 있다는 데서 경제이론은 출발한다. 금리를 조정하면 수요와 공급 양 측이 통제된다. 맞물려 있으므로 1의 조작으로 2를 통제할 수 있는 것이다.   

구조는 만남≫맞물림≫맞섬≫하나됨≫소통됨의 순서로 질적인 심화를 이룬다. 개입횟수가 감소하는 대신 더 정밀한 통제기술이 필요하다. 경제운용의 핵심은 높은 단계에 개입하여 정밀하게 조작하는 것이다.

● 창안 - 전쟁, 혁명, 교육, 자원확보, 발견과 발명을 통한 토대건설.

● 생산 - 상품공장에서 기능과 용도 및 생산요소의 결집

● 평가 - 시장에서 경쟁을 통한 가격결정, 비교판단

● 분배 - 상품의 거래, 매매,

● 소비 - 상품의 사용과 피드백

가치는 짝짓기다. 짝짓기에 실패하면 가치가 0이 된다. 진주목걸이도 돼지에게 던져주면 가치가 소멸된다. 어떤 것이 가치있다는 것은 짝을 잘 지어서 잉여를 창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일 뿐이다.

하나의 상품이 입력≫저장≫제어≫연산≫출력의 어느 지점에 포지셔닝 되느냐에 따라 가치가 다르다. 동일한 한 그릇의 밥을 먹고 잠을 자느냐 혹은 일을 하느냐에 따라 가치는 달라진다.

가치있는 것은 5단계 중 상위단계에 랭크되는 것이다. 영화를 보고 친구와 토론한다면 그 영화의 가치는 상승한다. 가치는 상품 자체에 고유하지 않고 어떤 소비자와 어떤 방식으로 짝짓는가에 따라 상대적으로 결정된다.

자동차를 주차해 두기만 한다면 가치없다. 친구에게 자랑한다면 가치발생이다. 자동차로 여행을 한다면 가치상승이다. 자동차로 영업을 한다면 가치는 더욱 상승한다. 짝을 잘 지어야 가치있다.

● 창안.. 경제 시스템의 토대가 되는 발견과 발명이다. 자원의 획득, 시장의 확보, 교육을 통한 인적자원 조달, 외교와 전쟁을 통한 영토획득, 혁명을 통한 공동체 건설이 가장 가치가 크다.   

● 생산.. 생산은 토대에 의해 제공된 여러 요소들을 한 줄에 꿰어서 목적에 맞게 기능을 유도하는 것이다. 주식회사 제도, 은행제도, 시장제도 등 경제하는 시스템의 구축이야말로 세상의 어떤 상품보다 가치있다.

● 평가.. 경쟁은 포지션 경쟁이다. 모든 경쟁은 짝짓기다. 시장에서의 가격경쟁, 품질경쟁, 서비스경쟁은 무수한 경쟁들 중 하나일 뿐이다. 진짜 경쟁은 각종 법률과 제도, 규범, 관습 속에 숨어 있다.

● 분배.. 시장에서의 상품거래다. 우리는 시장에서 경쟁이 이루어진다고 믿지만 착각이다. 진짜는 포지션 경쟁이며 소비자 포지션에 선 것은 이미 진 것이다. 창안자≫생산자≫평가자가 순으로 경쟁에 이긴다.

● 소비.. 상품의 이용을 통한 가치실현이다. 우리는 소비단계에서 가치가 창출된다고 믿지만 착각이다. 소비는 창출된 가치를 집행할 뿐이다. 창안≫생산≫평가≫분배≫소비의 전개에서 앞에 서는 것이 가치다.

가치는 비교평가가다. 비교우위에 서는 것이 가치다. 창안≫생산≫평가≫분배≫소비의 순으로 비교우위가 성립한다. 밥을 먹기 때문에 밥이 가치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밥을 먹고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밥이 가치있다.

가치있다는 것은 그 다음단계가 있다는 것이며 그 단계들의 전개 중에서 서열이 앞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치는 시장경쟁을 통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전단계인 창안과 생산에서 대거 일어난다.

시장경쟁의 가치는 가치서열 중 세번째 평가의 가치다. 이는 낮은 수준의 가치다. 우리는 시장에서 경쟁하여 가치를 발생시킨다고 믿지만 중요한 경쟁은 창안≫생산≫평가≫분배≫소비 중에서 포지션 경쟁이다.

소비자가 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경쟁에서 진 것이다. 인간이 상품을 소비하면서 느끼는 쾌감은 대단한 가치가 아니다. 가치는 상위포지션의 획득에 의해 일어나며 쾌감은 어떤 것이 가치있는지 알려주는 지표일 뿐이다.

인간은 쾌감을 통해 가치있는 것을 알아내지만 쾌감 자체는 가치가 아니다. 쾌감은 술이나 마약, 섹스로도 조달되지만 그것이 가치있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가치는 창안자≫생산자≫평가자의 포지션에 서는 것이다.  

시장경제의 핵심은 경쟁에 의한 가치평가에 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재래시장 안에서의 상거래 과정에서는 의미있는 경쟁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평가경쟁일 뿐이다. 진짜 시장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진짜 경쟁은 시장의 건설과정에서 일어난다. 목 좋은 자리가 있다. 인터넷 기업의 선점경쟁, 표준경쟁이 예가 된다. 먼저 뛰어들어 입력≫저장≫제어≫연산≫출력의 전개 중에서 입력포지션을 차지한 포털이 대거 먹는다.

높은 포지션을 차지하여 갑이 된다. 을이 되면 이미 경쟁에서 밀려버린 것이다. 갑과 을의 흥정은 무의미하다. 갑이 이기도록 구조가 세팅되어 있다. 콘텐츠 제공업체는 포털이 먹고 남은 찌꺼기를 먹을 뿐이다.

포항제철이 철강을 선점한다. 그 자체가 경쟁이다. 재벌경제가 문제로 되는 이유는 재벌이 독점을 통하여 경쟁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특히 영토가 좁은 소규모 시장 안에서 독과점은 경쟁을 제한한다.

시장만능주의야말로 가장 반시장적이다. 품질이나 가격의 하위 포지션은 경쟁의 비중이 약하다. 소재경쟁이 중요하고 표준경쟁이 다음이다. MS가 지배적 위치를 얻은 것은 품질이 아니라 표준 때문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중요한 경쟁은 정치와 법률과 제도에서 얻어진다. 이는 미국의 이라크침략과 같은 전쟁, 혹은 EU통합과 같은 외교동맹 또는 독립과 건국, 계급철폐, 성해방 등 사회혁명으로 나타난다.

● 시장 밖에서의 전략경쟁 - 목 좋은 곳을 차지하는 포지션 경쟁

● 시장 안에서의 전술경쟁 - 품질과 가격, 서비스의 요소투입 경쟁

조중동이 강조하는 시장경쟁은 전략을 버리고 전술만 논하자는 억지다. 목 좋은 곳을 차지한 자가 다 먹는 구조 안에서 이미 시장은 죽었고 효율은 사라졌다. 그 자본주의는 호흡과 맥박을 멈춘다.  

상인들은 시장에서 상품거래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 밖에서 목좋은 곳을 놓고 포지셔닝 싸움을 벌인다. 그것이 전략이다. 품질이나 가격이나 서비스 경쟁은 낮은 단계의 전술에 불과하다.

전술이 전략을 이길 수 없다. 재벌은 이겨놓고 싸운다. 전략경쟁에서 미리 승리해 두는 방법으로 싸우지 않고 이긴다. 그들은 품질로 경쟁하는 대신 관리를 매수하여 경쟁자를 제거하는 방법을 쓴다.

경쟁하지 않기를 경쟁하는 것이다. 정치가의 밀실에서 사과상자를 앞에 놓고 이루어지는 그 진짜 경쟁은 흔히 은폐된다. 이들이 90을 먹고 남긴 10의 뼈다귀를 두고 시장에서 소비자가 싸운다.

조중동은 이것이 자본주의 경쟁의 전부인 것처럼 말하지만 속임수다. 시장에서의 상품거래 과정에서 일어나는 평가경쟁은 가치창출 정도가 미미하다. 밀실에서의 진짜 경쟁을 드러내는 민주주의가 가장 경쟁력있는 상품이다.

경제의 실패

경제가 망하는 이유는 하나다. 지대가 비싸기 때문이다. 지대는 자릿세다. 텃세다. 기득권이다. 일체의 진입장벽이다. 토지비용 뿐 아니라 일체의 선점자들이 가진 권리가 일종의 지대에 비유될 수 있다.

농부는 토지개간≫씨앗파종≫키우기≫수확하기≫소비하기의 5 단계에 개입한다. 이 중에서 앞단계가 뒷단계에 비해 5배씩 큰 영향을 미치므로 되도록 토지확보의 제 1단계에 개입해야 한다.

똑같은 100이라는 목표를 위하여 토지 넓히기≫좋은 씨앗 뿌리기≫잘 키우기≫ 잘 수확하기≫잘 먹기의 5단계에 개입할 수 있다면 어느 단계에 집중하여 개입하는 것이 유리할까?

작은 토지에 정성들여 가꾸기 보다는 넓은 토지에 대충 가꾸는 것이 낫다. 그러므로 정성들여 가꿀 시간이 있다면 그 시간을 빼서 황무지를 일구어 토지를 새로 개간하는 쪽에 투입하는 것이 낫다.

그러나 토지가 바닥나서 개척할 땅이 없다면 어쩔 수 없이 좁은 땅에 정성들여 가꾸어야 한다. 지대가 비싸다는 것은 개입의 5단계 중 제 1단계에 개입하기가 구조적으로 불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입력≫저장≫제어≫연산≫출력’ 중에서 높은 포지션을 차지해야 큰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높은 포지션에 진입하는데 드는 비용이 지대다. 지대는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일체의 사회적 진입장벽이 지대다.

귀족계급이 하층계급과 소통의 장벽을 치고 끼리끼리 결혼하는 것이 지대를 상승시켜 경쟁을 제한하는 수구세력의 수법이다. 이 상황에서 시장의 시스템은 작동을 중지한다. 경제가 질식한다.  

지대가 상승한다는 것은 지구가 작아진다는 것과 같다. 지구가 작으면 땅이 없어서 농사를 지을 수 없다. 경제가 망한다. 인구가 늘면 상대적으로 지구가 좁아진다. 인구증가는 지대상승의 주범이다.

반면 전쟁, 혁명, 교육, 자원획득, 발명과 발견은 지대를 낮춘다. 전쟁은 영토를, 혁명은 공동체를, 교육은 인적자원을, 자원획득은 화석연료를, 발견과 발명은 시스템의 최적화를 얻어 지대를 낮춘다.

전쟁과 혁명이 경제의 토대라는 표현은 오해될 수 있다. 전쟁은 정확하게 말하면 토지에 대한 지배권이다. 신대륙 발견과 국가의 건설로 영토를 획득함이다. 혁명은 정확히 말하면 공동체의 건설이다.

언어와 문자, 역사와 전통을 공유한 민족국가와 그렇지 않은 원시 부족국가 사이의 경제시스템의 효율성 차이는 크다. 부족이 난립하고 있는 아프리카가 빈곤한 이유는 공동체 건설이 진척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별로 나뉘고 인종으로 나뉘면 차별이 일어난다. 언어가 다르고 문자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면 소통의 장벽이다. 공동체 건설이 불완전한 경우다. 혁명에 의해 공동체는 건설된다. 소통은 이루어진다.

민족국가의 공유된 언어와 문자, 역사, 전통, 문화 그 자체가 거대한 경제의 자산임을 깨달아야 한다. 성차별, 인종차별, 지역주의는 그 자산의 파괴임을 깨달아야 한다. 이는 경제적 자살행위다.

● 전쟁 - 토지자원에 대한 지배권

● 혁명 - 공동체의 건설

● 교육 - 인적 자원 조달

● 창안 - 발견과 발명

● 시장 - 자본주의 시스템 가동

전쟁, 혁명, 교육, 창안, 시장은 지대를 낮춘다. 영토를 크게 늘린 것과 같은 효과를 낸다. 선점자의 기득권이 약화된다. 후발주자가 상위포지션에 올라설 기회가 증가한다. 포지션 이동이 얼마든지 가능해진다.

인터넷의 도입은 사이버 상에서 대지를 획득함과 같다. 당연히 지대가 낮아진다. 사이버공간 안에서 새로운 전쟁과 혁명과 교육과 자원과 발명과 발견들이 도입되는 것이다. 그만큼 지구가 커진다.  

경제는 짝짓기다. 입력≫저장≫제어≫연산≫출력 중에서 입력과 저장의 높은 포지션을 차지하여 짝을 지으면 경제성공이고 연산과 출력의 낮은 포지션으로 짝지으면 상대적으로 경제실패다.

상품순환의 1 사이클 구조

상품은 입력≫저장≫제어≫연산≫출력의 1 사이클에 따라 소재≫기능≫성능≫효능≫미감의 1 사이클을 가진다. 소재의 혁신, 기능의 혁신, 성능의 혁신, 효능의 혁신, 디자인(미감)의 혁신이 있다.

구조론의 의미는 뒷 단계가 앞단계를 추월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소재가 낙후한 상태에서 기능의 개선은 무의미하며, 기능이 원시적인 상태에서 성능의 개선 역시 무의미하다. 항상 앞 단계가 먼저 가야 한다.

컴퓨터라면 반도체가 소재다. 기계식 컴퓨터와 전자식 컴퓨터가 소재경쟁을 벌이면 반도체를 이용한 전자식 컴퓨터가 승리한다. 이때 기계식 컴퓨터를 소재로 선택한 상태에서 기능을 혁신해봤자 무의미하다.

한 때는 기계식 텔레비젼도 있었다. 지금은 전자식 텔레비젼에 밀려 사라졌다. 돌이나 도기로 소켓이나 스위치 따위를 만들던 때도 있었다. 지금은 플라스틱으로 바뀌었다. 소재가 바뀐 것이다.

● 소재의 혁신 - 신소재의 발견

● 기능의 혁신 - 요소의 결합에 의한 용도의 발명 및 표준의 제정

● 성능의 혁신 - 작용 반작용의 접점문제 해결에 따른 제품의 완성도

● 효능의 혁신 - 자동화에 따른 비용절감 및 가격경쟁력

● 미감의 혁신 - 소비자의 취향을 반영한 디자인

소재의 혁신이 진정하다. 소재는 발명되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는 것이다. 고무나 플라스틱, 반도체의 성질은 발견된다. 소재의 발견이 가장 큰 혁신이며 기능의 발명은 상대적으로 하위포지션이다. 발견이 발명에 앞선다.

소재경쟁 다음에 기능경쟁이다. 기능은 제품의 용도를 발명하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는 요소들의 결합과정에서 요청되는 표준의 선점이 중요하다. 매킨토시가 성능이 뛰어났다지만 IBM과 MS에 밀렸다.

대발명과 소발명이 있다. 기능의 발명이 대발명이다. 기능의 발명에 연동되어 다양한 성능과 효능 및 디자인의 발명이 따라온다. 하위발명이 상위발명을 침범하지 못하므로 표준의 문제가 제기된다.

기능에서 표준이 결정되므로 하위발명인 성능의 혁신이 상위발명인 기능의 혁신을 이기지 못한다. 이 단계에서는 성능이 뛰어난 매킨토시가 표준을 지배한 MS의 호환기능을 이기지 못한다.

시간이 흘러 기능경쟁이 끝나면 성능경쟁으로 시장판도가 바뀐다. 처음에는 컴퓨터로 그래픽을 할 것인가 게임을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했지만 점차 표준화가 진행되어 기능이 비슷해지면 그러한 고민이 사라진다.

모든 제품에는 바늘끝 같은 접점이 있다. 모래시계의 오목한 허리부분이 있다. 칼의 날, 볼펜의 볼이 있다. 그 접촉점이 제품의 성능을 결정한다. 그 접점의 해결여부에서 제품의 이상주의적인 완성도 문제가 제기 된다.

이 단계에서는 가격이 싼 제품이 성능이 뛰어난 제품을 이기지 못한다. 후발주자의 기술이 점차 선발주자를 따라잡아 제품의 성능이 비슷해지면 효능경쟁으로 옮겨간다. 성능대비 가격경쟁이다.

이 시기에는 많은 기능들 중 한 두가지의 핵심기능이 강조된다. 휴대폰이라면 MP3기능이나 카메라 기능이 약화되고 통화와 문자메시지에 집중된다. 제품이 대중화 되고 대량생산되어 가격이 싸진다.

과시용이 아니라 실용적인 목적에만 제품을 사용하게 된다. 최후에는 디자인이 다. 어떤 상품의 디자인경쟁이 치열하다면 그 상품에서 더 이상 신기능, 고성능이 출현하지 않는 시장의 완숙단계로 접어들었다는 증거다.

중요한 점은 시장이 효능경쟁 단계에 돌입하지 않은 상태에서 가격이 싼 제품을 판매하면 싸구려로 인식되어 팔리지 않는다는 데 있다. 물론 상위단계의 경쟁이 끝났다면 재빨리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

스티브 잡스의 실패는 MS와의 기능경쟁이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너무 이르게 성능경쟁과 디자인경쟁으로 넘어간 데 있다. 그에게는 아이디어가 너무 많았다. 아이디어를 현실화하고 싶은 욕망을 조절할 필요가 있다.

왜 소비자는 소재≫기능≫성능≫효능≫디자인 중에서 상위 단계의 경쟁이 이루어지는 제품을 구매하려 하는가? 소비자가 그 상품을 이용하여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점에서 더 높은 포지션을 차지하려 들기 때문이다.

후진국에서 저가품이 팔리지 않는 경향이 있다. 후진국일수록 소재가 뛰어난 명품과 기능이 꽉찬 고가품이 팔리는 이유는 제품을 친구에게 자랑하는 등의 용도변경으로 높은 포지션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자 한 개를 먹는다면 낮은 포지션이다. 입력≫저장≫제어≫연산≫출력 중에서 출력 포지션에 해당된다. 그 과자를 친구에게 선물한다면 더 높은 포지션을 차지한 셈이다. 부가가치가 창출되는 것이다.

상품 밖에도 기능이 있을 수 있다. 후진국에서는 상품을 이용하여 권력을 창출하고 신용을 얻는 등 없는 기능을 새로 추가할 수 있다. 제품을 다른 용도에 활용할 수 있으므로 가격이 비싼 제품을 원한다.

● 선진국의 출력포지션 - 개인이 혼자 상품을 소비한다.

● 후진국의 입력포지션 - 대가족이 하나의 상품을 공유하면서 권력의 매개로 활용하는 등의 형태로 부가가치를 창출한다.

한국인이 유독 큰 차에 집착하는 이유는 친구나 가족들을 태워주면서 사회관계에서 상대적인 우위에 서는 높은 포지션을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자동차에 본래 없는 기능이 하나 더 추가된 것이다.

선진국은 작아도 성능이 뛰어난 차를 산다. 기능경쟁에서 성능경쟁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가족의 성원 모두가 자기 차를 소유하고 있으므로 자동차의 소유권을 이용하여 타인을 지배할 수 없게 된다.   

연필로 낙서를 하면 출력이고 소설을 쓰면 입력이다. 상품은 동일한 연필 하나이지만 소설가는 입력≫저장≫제어≫연산≫출력 중에서 입력포지션을 차지하고 낙서쟁이 꼬마는 출력 포지션을 차지한다.

이렇듯 용도가 달라지므로 계획경제 개념의 일반화는 불가능하다. 계획은 입력≫저장≫제어≫연산≫출력 중에서 상위 포지션만 가능하다. 소재의 발견과 기능의 발명을 통한 토대구축은 일정부분 국가계획의 영역이다.

성능과 효능, 미감 등 하위포지션의 계획은 무익하다. 계획을 통한 기능의 통제는 용도전용에 따른 부가적인 잉여의 창출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품사이클 중에서 위는 계획해야 하고 아래는 방임해야 한다.   

구조주의 미학

미학적 완성도

미학은 양식학이다. 양식은 소통의 양식이다. 소통의 접점에서 요철(凹凸)이 맞아야 하기 때문에 양식이 필요하다. 입력과 출력의 볼록하고 오목한 부분이 일치할 때 위대한 소통은 일어난다.

전축의 바늘과 레코드판의 홈이 만날 때가 그러하다. 송신기와 수신기의 안테나가 전파를 잡아챌 때가 그러하다. 여자와 남자가 맞선을 보아도 그러하다. 마음이 통하는 온전한 만남을 위해서 절묘한 밸런스가 필요하다.

접점의 일치를 위하여 완성도 문제가 제기된다. 완성될 때 통한다. 통해야 낳는다. 낳을 때 울림과 떨림이 있다. 전율함이 있다. 오르가즘이 있다. 그렇게 보상된다. 널리 공명된다. 증폭된다.

완성이 없고 통함이 없고 낳음이 없는 채로 말로 떠드는 소통의 주장은 헛될 뿐이다. 울림이 없고 떨림이 없는 그것은 진짜가 아니다. 진정한 소통은 이심전심이어야 한다. 소통이 막히니까 말이 많은 것이다.

그것은 포지션의 바른 결합이다. 순서와 방향이 올바른 관계맺기다. 공격수와 수비수 사이에 포지션들이 바르게 조합되었다면 구태여 말이 필요하지 않다. 절로 손발이 척척 맞는다. 그래야 소통이다.

인간이 언어와 문자로 소통하지만 자연은 언어 없이도 소통하고 문자 없이도 소통한다. 꽃은 그 컬러의 완전함으로 벌을 초대하고 그 향기의 완전함으로 나비를 초대한다. 넉넉하게 소통한다. 열매로 결실한다.

모든 소통하는 것에 완성도의 문제가 걸려 있다. 소통의 접점이 있다. 도킹이 이루어지는 지점이 있다. 그 부분은 본래 불완전하다. 서로 다른 둘의 만남이기 때문에 백퍼센트 완전은 없다.

둘이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으므로 불완전하다. 파트너로 하여금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 진정한 소통이다. 그것이 소통의 전제조건이 된다. 그러므로 완성도가 존재한다.

터치가 이루어지는 타이밍이 있다. 상대가 이쪽으로 돌아앉게 만들 때 그 한 순간은 정지해 있어야 한다. 도킹이 일어나는 그 한 순간은 완벽하게 보호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잡아주는 자궁이 필요하다.

소통의 양식에 있어서 미학적 완성도가 문제로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우리가 예술을 논하고 문화를 찾고 심미안을 닦는 것은 그 때문이다. 소통의 자궁을 세팅하기 위해서다. 모든 예술은 소통의 자궁 만들기다.

소통의 자궁

아날로그 구조와 디지털구조가 있다. 디지털구조는 세팅된 자궁 속을 일(work)이 통과한다. 음식이 식도를 통과하듯 파이프 속을 지난다. 아날로그 구조는 그 만남의 접점에서 순간적으로 자궁이 성립한다.

전축의 바늘과 레코드판의 홈이 만나는 접점이다. 그 접점은 열려 있으므로 아날로그다. 그러므로 불완전하다. 완벽은 없다. 퍼펙트는 없다. 어떤 소통이라도 약간의 잡음은 반드시 있다.

양식은 아날로그 구조를 관 모양의 디지털구조로 세팅하는 것이다. 디지털구조라도 최초의 출발점은 아날로그 구조로 되어 있다. 몸 속의 식도와 위장은 파이프 형태지만 입과 음식이 만나는 입술은 열려 있다.

소통은 아날로그 구조에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예술은 아날로그다. 아날로그는 2인의 의견이 일치해야 하는 주관이고 디지털은 1인이 판정하는 객관이다. 예술이 주관의 영역에 속한다는 말은 그런 의미다.  

소통은 독립된 둘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둘을 한 순간에 한 지점에 모아 마주보고 정렬시켜야 한다. 일이 통과하는 하나의 파이프를 성립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일정한 양식이 필요하다.

여자와 남자, 꽃과 나비, 바이얼린의 활과 현, 도공와 손과 흙, 요(凹)와 철(凸)을 한 순간에 한 지점에서 정렬시켜 절묘하게 세팅해야 한다. 그것은 비행기를 활주로에 착륙시키는 것처럼 어렵다.

중력과 대지가 작용 반작용을 성립시켜 파이프를 성립시킨다. 그 사이를 비행기가 통과하는 것이다. 안전한 착륙이 있을 뿐 완벽한 착륙은 없다. 관성의 법칙에 따라 모든 착륙은 상당한 충격을 남긴다.

누구나 소통을 말하지만 피상적인 접근일 뿐이다. 소통은 구체적인 낳음을 끌어내는 것이며 이는 포지션의 바른 조합에 의해 가능하고 또 타이밍이 일치해야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말을 하고 문자를 쓰더라도 그 안에 의미를 운반하고 가치를 판정하고 의사를 결정하는 알맹이가 들어 있다. 그 언어와 문자는 디지털 구조로 세팅되어 객관화 되어 있기 때문에 소통의 본질에서 멀다.

언어와 문자를 쓰더라도 출발점은 아날로그일 수 밖에 없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첫 대면은 아날로그다. 포지션이 바르게 맞아야 한다. 한쪽이 등을 돌린 채로 귀를 닫고 있다면 소통은 실패다. 만남은 실패다.

5 단계 완성도

완성도에 따라 다섯 가지 미가 있다. 예쁘다≫곱다≫어울린다≫아름답다≫멋있다 순으로 미의 격이 상승한다. 그것은 만남의 밀도다. 만나기≫맞물리기≫맞서기≫하나되기≫소통하기 순으로 더 깊숙한 만남이다.  

● 멋있다  (소통하기) - 소통의 자궁이 완성되었다.

● 아름답다(하나되기) - 호흡이 정지된 상태에서 A에서 B로 통과한다.

● 어울린다  (맞서기) - 둘의 접점이 일치하여 밸런스를 이루었다.

● 곱다    (맞물리기) - 상대를 향하여 돌아앉는다.

● 예쁘다    (만나기) - 상대가 눈에 띈다.

예쁘다는 것은 상대가 눈에 띈다는 것이다. 처음 파트너를 만났을 때의 판정이다. 곱다는 것은 상대에 의해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만나고 난 다음의 판정이다. 먼저 예쁘다를 통과하여야 곱다로 상승한다.

만나지 못했는데 맞물릴 수는 없다. 맞물린 다음에 밸런스를 이루어 맞서고 맞선 다음에 꼬치에 꿰듯 관통되어 하나되며 최종적으로 그 소통의 자궁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소통은 그렇게 점진적으로 상승하여 완성된다.

가시가 있다면 혹은 표면에 끈적한 이물질이 묻었거나 냄새가 고약하다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것은 징그러운 것이다. 곱다의 반대는 징그럽다이다. 포유류가 부드러운 털을 가진 이유는 상대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다.

파충류와 달리 포유류와 조류는 암수가 부부를 이루어 서로를 받아들인다. 그래서 길짐승은 털이 곱고 날짐승은 깃털이 곱다. 포유류의 새끼가 귀여운 것도 그렇다. 받아들여져야 어미가 젖을 먹이기 때문이다.

어울린다는 뜻은 콜라와 햄버거처럼 서로를 보완한다는 의미다. 앙상블이다. 포도주와 치즈, 막걸리와 김치, 소주와 삼겹살처럼 맞는 궁합이 있다. 여기에 밸런스가 있다. 그러므로 맞서기다.

아름답다는 것은 요소들이 하나의 테마로 통일되는 것이다. 아름은 팔로 안아서 한 아름이다. 여러 요소들이 서로 마찰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어 하나가 되는 것이다. 밸런스의 날 2를 통일하는 심 1이 테마가 된다.  

소설이라면 온갖 에피소드들을 꼬치처럼 꿰어내는 주제가 있다. 어울린다는 것이 날 2가 50 대 50으로 대칭을 이루어 밸런스에 이르는 것이면 아름답다는 것은 그 밸런스의 축이 되는 심 1이 있는 것이다.

멋있다는 개념이야 말로 미(美)의 진정한 의미에 가깝다. 아름답다가 단지 보기에 좋은 것이라면 멋있다는 그 이상의 어떤 각별함이 있다. 그것은 소통의 자궁을 세팅하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쉽다. 날 2를 심 1이 꿰어내기는 쉽다. 서로 가까이 붙어있기 때문이다.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멋있다는 개념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따로 떨어져 있는 별개의 둘에 해당된다.

둘을 밖에서 잡아주고 일치시켜 주는 자궁이 필요하다. 타이밍이 맞도록 기다리게 하고 포지션이 일치되도록 유도하는 특별한 분위기가 필요하다. 그것은 고도의 섬세함과 정밀함을 요구하는 것이다.

양복에 넥타이라면 어울린다. 양복에 고무신이라면 어울리지 않는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둘을 어울리게 하려면 특별한 분위기가 필요하다. 바닥에 은은하게 깔아주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멋이다.

남자는 축구경기장에서 남자끼리 어울리고 여자는 여자끼리 까페에서 수다떨며 어울린다. 어울리지 않는 남자와 여자를 어울리게 하는 것은? 사랑이다. 열정이다. 멋이다. 역시 배경으로 깔아주는 무드가 있다.

고흐는 진흙과 같은 두터움으로 깔았다. 영화의 클라이막스에서 배경음악 깔리듯 깔았다. 박수근은 안개처럼 희미한 붓터치로 깔았다. 이중섭은 어린이의 볼과 엉덩이같은 오동통함으로 깔았다.

추사 김정희는 금석문 연구에서 얻은 추사체 특유의 속도감으로 깔았다. 석수장이가 돌을 쪼듯이 거침없이 헤쳐 나가는 기세로 깔았다. 원교 이광사는 단단한 화강암의 골체미로 깔았다. 양식은 다르나 본질은 같다.  

미의 완성은 멋이다. 멋은 사랑이다. 사랑의 결론은 낳음이다. 그것은 창조다. 멋은 창조를 위한 자궁이다. 그 자궁에서 낳는다. 아기를 싼 포대기처럼 바탕에 깔아주는 무드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스타일이다.

모든 창조는 어울리지 않는 것을 어울리게 함에 의해 얻어진다. 천에 잉크가 묻으면 천이 못쓰게 된다. 천과 물감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 어울리지 않는 천과 물감이 어우러져 멋진 그림을 만든다. 낳음이다. 창조다.

어떤 것을 완성시켜 독립된 하나를 이루기 위해서는 요소들을 꿰어내는 뼈대가 있어야 한다. 테마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독립된 별개의 둘이 소통하여 낳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궁이 있어야 한다. 스타일이 있어야 한다.

의미와 가치의 완성도

미는 서로 다른 둘 사이의 소통을 위한 양식이다. 의미는 그 둘을 연결하는 것이며 가치는 그 연결의 완성도를 판정하는 것이다. 의미가 둘을 링크하는 것이라면 가치는 링크의 우선순위를 판정하는 것이다.

연결되어야 낳는다. 연결되지 않고 낳은 경우는 없다. 서로는 친척관계로 연결되고 친구관계로 연결되고 부부관계로 연결된다. 의미는 그 관계가 있느냐이고 가치는 그 관계가 어느 수준의 관계인가이다.

● 의미의 연결   : 어떻게든 둘이 이어지는가?

● 가치의 짝짓기 : 친척인가 친구인가 부부인가?

가치란 어떤 선택의 기로에서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게 하는 것이다. 그 선택을 위한 판정의 기준이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무엇을 선택할까? 가치있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

진학을 앞두고 전공을 선택하든 취업을 앞두고 직장을 선택하든 결혼을 앞두고 배우자를 선택하든 인생은 부단한 짝짓기의 연속이다. 선택의 연속이다. 성≫주≫미≫선≫진을 선택해야 한다.

● 성속(聖俗 - 소통하기) - 창조인가 모방인가?

● 주종(主從 - 하나되기) - 주도하는가 종속되는가?

● 미추(美醜 - 맞서기)   - 보완하는가 충돌하는가?

● 선악(善惡 - 맞물리기) - 받아들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 진위(眞僞 - 만나기)   - 보이는가 감추는가?

창조하는 것이 멋있고, 주도하는 것이 아름답고, 보완하는 것이 어울리고, 받아들이는 것이 곱고, 보이는 것이 예쁘다. 어떤 실천에 있어서는 이 순서대로 선택을 해야 한다. 성≫주≫미≫선≫진의 순서대로 가치있다.

두 가지 선택법이 있다. 연역과 귀납이다. 연역적 상황은 완성된 자동차를 운행하는 것이고 귀납적 상황은 그 자동차를 제작하는 것이다. 둘은 전혀 반대방향으로 작동한다. 그러므로 선택방법이 달라야 한다.

실천에서는 연역적 선택을 해야하고 학습에서는 귀납적 선택을 해야한다. 연인을 찾을 때는 진≫선≫미≫주≫성의 순으로 나아가야 하고 그 연인과 사귈 때는 성≫주≫미≫선≫진으로 나아가야 한다.

인간의 모든 실패는 이 순서를 잘못 적용하여 일어난다. 가치판단의 우선순위가 바뀐 것이다. 문화가 양식을 필요로 하고 인간이 예술을 찾는 이유는 그 바르게 선택하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이다.

먼저 병뚜껑을 열고 다음 물을 마셔야 한다. 이 문제를 고민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뚜껑을 열지 않고는 물을 마실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뚜껑을 열지 않고 물을 마실 수 없도록 세팅해 두는 것이 문화의 양식이다.

일생생활에서 부닥치는 많은 문제들은 양식이 세팅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순서를 틀리게 적용하고 만다. 일은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먼저 인사하고 다음 거래해야 하는데 거꾸로 하는 것이다.

아기들은 삐치고 돌아앉아서 엄마가 삐친 자신을 발견하고 ‘왜 그러니?’ 하고 묻도록 기다리는 작전을 쓴다. 상대방이 먼저 말을 걸게 하기다. 실패다. 논객들은 공연히 화를 내고 트집을 잡으며 말을 거는 맹랑한 전술을 쓴다.

친구에게 말을 걸어야 하는데 방법을 모르므로 공연히 시비를 걸어서 자신을 주목하게 하는 것이다. 초딩 꼬마가 관심있는 여자아이 주변에 얼쩡거리면서 놀이를 방해하듯이 말이다. 이런 소통의 시도는 실패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인사’라는 양식을 개척한다. 인사는 소통의 양식이다. 정치인은 뇌물이라는 인사법을 쓰고 연인들은 꽃다발이라는 인사법을 쓴다. 생일이니 뭐니 하며 기념일을 정하는 방법도 있다.

진≫선≫미≫주≫성

진, 선, 미, 주, 성에 계급이 있다. 우선순위가 있다. 이 개념들은 가치판단의 완성도에 따라 단계적 접근을 하기 위한 레벨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치의 수준이다. 명백히 수준차가 있다.

진선미는 알려져 있지만 주종의 주(主)와 성속의 성(聖) 개념은 알려져 있지 않다. 진선미는 주를 거쳐 성으로 간다. 그리고 완성된다. 주(主)는 상대방에게 종속되지 않고 자신이 능동적으로 상황을 주도하는 것이다.

꼬마의 ‘삐치고 돌아앉아 상대방이 먼저 내게 말걸게 하기’ 혹은 ‘좋아하는 여자친구 앞에서 방해하며 얼쩡거리기’ 또는 ‘오줌싸서 좋아하는 선생님 주의끌기’ 수법은 주도권을 놓치는 잘못된 방법이다.

성(聖)은 소통의 자궁을 완성함이다. 완전성이다. 그 완전한 자궁에서 창조된다. 모든 가치는 궁극적으로 창조에서 나온다. 낳음에서 나온다. 낳지 못하는 가치는 벤치에서 대기하는 후보일 뿐이다.

진(眞)을 단순히 진짜인가 가짜인가로 판단해서는 부족하다. 만남이므로 진이다. 진정한 만남인가 잘못된 만남인가이다. 진짜는 바른 만남이요 가짜는 잘못된 만남이다. 수컷과 수컷이 만나서는 짝짓지 못한다.

조화에 날아든 벌은 꿀을 얻지 못한다. 가치들 중에서 진(眞)이 으뜸인 이유는 진으로 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은 시작일 뿐 끝은 아니다. 완성은 아니다. 완성은 소통이다. 성(聖)이다.

중요도가 있다. 우선순위가 있다. 건물을 짓는 단계에서는 진≫선≫미≫주≫성의 순으로 중요도가 결정되고 우선순위가 결정된다. 그 완성된 건물을 사용함에 있어서는 성≫주≫미≫선≫주의 순으로 가치가 결정된다.

무엇이 선(善)인가? 받아들여지는 것이 선이다. 걸인에게 동전을 던져주었는데도 상대가 도리어 화를 내는 수가 있다.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악(惡)이다. 악이 악인 이유는 사회로부터 배척되기 때문이다.

무엇이 미(美)인가? 서로를 보완하는 것이 미다. 단점을 감추고 장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무엇이 주(主)인가? 미의 밸런스를 유지하는 것이 주다. 가운데서 중심을 잡아주므로 가지가 자유로이 뻗어나가게 돕는다.

만약 주(主)가 없다면 마른 논에 올챙이처럼 오골오골 모여있게 된다. 리더가 있기 때문에 구성원들이 마음껏 날개를 펴는 것이다. 집안에 어른이 있기 때문에 아이들은 들판에서 뛰놀 수 있는 것이다.

성(聖)은 완전한 것이고 속(俗)은 불완전한 것이다. 속은 통하지 않는 것이다. 흉내를 내는 것이다. 낳음이 없는 것이다. 불임이다. 모방작이고 짝퉁이고 복제품이다. 거기에 향기가 없고 아우라가 없다.

도공이 흙을 빚고 화가가 그림을 그리고 소설가가 작문을 할 때는 진≫선≫미≫주≫성의 순으로 작업이 진행되지만 그 완성된 작품으로 관객과 소통할 때는 성≫주≫미≫선≫진으로 전개된다.

● 자동차를 운전할 때 - 운전할 차가 완성된 차인지 먼저 판단한다.(완성된 차라는 판정이 되면 진짜 차라는 점은 이미 확인된 셈이다.)

● 자동차를 제작할 때 - 만들 차가 장난감 차인지 진짜 차인지 판단한다.(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완성된 차인지는 판단할 수 없다.)

인간사회에 일어나는 모든 갈등은 이 순서가 틀려서 일어나는 것이다. 문화가 양식을 필요로 하고 또 상류사회가 엄격한 격식을 따지는 이유는 그 순서가 혼동될 여지를 없애기 위해 사전에 절차를 세팅해놓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가들은 격식에 구애받지 않는다. 순서를 혼동하지 않을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자유로움이 그 안에 있고 진정한 소통 또한 그 안에 있다. 양식을 완성한 다음에는 그 양식을 초월해야 한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모든 음악, 모든 문학, 모든 조형, 모든 예술에 구조가 있다. 구조는 긴장을 끌어내는 구조다. 예술은 인간을 긴장시킨다. 불꽃처럼 번뜩이는 소통의 한 순간에 호흡을 멈추지 않으면 소통은 실패로 되기 때문이다.

시조를 예로 들 수 있다. 4.4조는 대칭을 이룬다. 4.4와 4.4가 또한 대칭을 이룬다. 그 겹대칭으로 이루어진 초장과 중장이 역시 대칭을 이룬다. 대칭≫대칭의 대칭≫대칭의 대칭의 대칭이다.

최후에는 (초장+중장)과 종장이 대칭을 이룬다. 초장은 문을 열고 내용물을 꺼낸다. 중장을 그것을 펼쳐낸다. 초장과 중장은 자연의 전개이다. 종장은 자연과 대칭되는 인간의 감정을 담아내거나 혹은 정치를 풍자한다.

왜 대칭인가? 대칭이 인간을 긴장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지 대칭이 반복되어서는 무의미하다. 반복은 지루하다. 파격이 있어야 한다. 초장과 중장은 대칭되며 반복되지만 종장에 이르러서는 파격이 있다.

종장이 홀로 초중장을 감당한다. 종장에는 밀도가 걸려있기 때문이다. 접혀 있는 것이다. 어즈버! 하고 감탄할 때 거기에 여운이 있고 무게감이 있다. 그 묵직한 중량감으로 초중장의 길이에 맞선다.

반복적 대칭구조에서 느껴지는 속도감에서 파격에 의한 무게감으로의 전환이다. 선의 길이에서 밀도의 질량으로 차원이동이다. 그 방법으로 완성한다. 소통한다. 발사한다. 방아쇠는 격발되고 화살은 과녁을 향해 날아간다.   

그 화살이 심중에 맞을 때 위대한 소통은 일어난다. 파문이 있다. 여운이 있다. 쾌감이 있다. 긴장의 극점을 넘어선 이완이 있다. 전체에서 부분으로 쏘아진 화살이 부분에서 전체로 다시 메아리되는 오르가즘이 있다.

중요한 것은 완성이다. 완성의 느낌이 있어야 한다. 이 지점에서 완결된다는 느낌을 주어야 한다. 처음 시조의 초장에서 문을 열고 다음 중장에서 내용물을 전부 꺼내놓고 종장에서 다시 뚜껑을 덮고 빗장을 채워 갈무리한다.

번듯한 형태를 이루어 완결된다는 느낌을 끌어낸다. 점에서 촉발한 사건이 선과 각과 입체로의 비약을 거쳐 메아리 있는 밀도로 끝이 나야 한다. 더 이상 아쉬움도 없고 미련도 없다는 느낌이 따라야 한다.

아쉬움없는 매조지를 위하여 예술에는 형식이 있다. 겉으로 드러난 형식이 없어도 숨은 형식이 있다. 자유시에도 보이지 않는 호흡이 있고 긴장이 있고 파격이 있고 이완이 있다. 그것이 없는 시는 시가 아니다.

음악이라도 그러하다. 제 1악장의 장중한 전개가 있고 제 2악장의 구석구석 조용한 탐색이 있으며 제 3 악장의 강한 임팩트로 된 마무리가 있다. 1악장이 집을 건축함과 같다면 2악장은 집 주위에 정원을 꾸밈과 같다.

마무리 3 악장은 그 집과 정원에서 뛰노는 주인공들의 열정적인 감정을 담는다. 그 집과 정원에서 멋드러진 춤을 춘다. 폭풍같은 연주로 감정의 찌꺼기를 모두 쏟아내면 미련없이 완결된다. 완전히 소진된다.

달아오른 절정에서 객석을 향해 방아쇠가 당겨지고 심중에 화살은 쏘아지며 과녁에 명중하면 파문 하나 남긴다. 배우가 객석을 향해 쏜 한 발의 화살이 관객과 관객 사이에서 무수한 반향을 낳는다. 소통은 일어난다.

그것은 하나의 프레이즈 안에서의 대칭을 고리로 부단히 바깥에서의 대칭을 탐색하는 연쇄고리와 같다. 고리가 고리를 만들고 더 큰 고리로 나아간다. 높고 낮은 음역에서 길고 짧은 음역으로 구석구석 탐색하기다.

김기덕 감독의 활이 그러하듯이 구석구석 숨어있는 작은 긴장의 조각들을 결집시켜 하나의 큰 활에 시위를 매기고 살을 올린다. 작은 긴장들이 모여 큰 긴장을 만들고 어느 순간에 그 팽팽함을 끊어버린다. 완전히 이완된다.

미술이라도 그러하다. 동양화라면 대개 정(靜)과 동(動)의 대칭이 있다. 산과 물, 음과 양, 빠름과 느림, 높음과 낮음, 수직과 수평, 공간과 시간의 얼개가 있다. 그리고 최후에는 덮개 역할의 어떤 통일성이 있다.

고흐는 두터운 질감으로, 박수근은 희뿌연 안개로, 이중섭은 아이의 동적인 곡선으로 통일성을 주어 부분과 부분이 분리되는 어색함을 막고 그것으로 뚜껑을 삼고 덮개삼아 자물쇠 채워 마무리한다. 매조지된다.

미학의 최종적인 완성은 스타일에 있다. 멋의 연출이다. 그것은 양식이다. 스타일이란 인식의 핵심이라 할 통일성을 성립시키는 테마가 강조될 때 주변의 배경과 분리되는 데 따른 어색함을 다스리는 기법이다.

스타일을 얻을 때 테마가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어떤 작품이든 테마가 있어야 요소들이 꿰어지고 긴장이 유지되며 관객이 집중한다. 그러나 테마를 강조할수록 어색해진다. 권선징악의 주제를 부각할수록 유치해진다.

틀에 맞춘 것 같고 붕어빵 같고 억지 같고 관객을 가르치려 드는 것 같다. 그런 부자연스런 느낌을 잠재우기 위해 바닥에 깔아주는 배경음악이 있고 배경무늬가 있다. 고가의 비싼 장식품일수록 배경무늬가 화려하다.

어떤 것이든 질감을 주면 그런 어색함이 줄어든다. 동양화는 여백을 두어 산과 물이 마주치는 접점을 불분명하게 처리하는 수법을 쓴다. 모든 어색함은 둘의 긴장된 마주침에 의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인물을 그린다면 뒤의 배경과 인물의 충돌이 문제로 된다. 인간의 눈은 촛점에 모이지만 그림은 평면이라서 3차원 입체의 촛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배경을 또렷하게 그리면 인물이 죽는다.

근대 서양화는 배경을 어둡게 하고 인물에 조명을 주는 기법을 사용한다. 유치한 기법이지만 모두 의존하고 있다. 모든 예술가는 이 하나의 문제를 고민하게 되며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

TV 개그프로그램이라도 어색해지려 하면 갑자기 웃음소리 효과를 집어넣거나 아니면 생뚱맞게도 배우들이 일제히 춤을 추거나 혹은 쓸데없이 노래를 삽입하며 장면연결을 매끄럽게 하려고 노력한다.

자신만의 벗어나는 방법을 찾았을 때 작가가 된다. 그것이 스타일이고 멋이고 창조의 자궁이다. 자신만의 자궁을 얻었을 때 진정한 작가로 거듭나는 것이며 남의 자궁을 빌려 낳는다면 아류신세를 벗어나지 못한다.

테마와 스타일

소통의 구조에 접점이 있고 그 접촉부분은 열려 있으므로 완성도 문제가 제기되며 모든 예술은 결국 완성의 모습을 찾아가기다. 완성하기 위해서는 서로 연결해야 한다. 예술이란 둘을 하나로 잇는 문제다.

하나의 구조체 내부에서 요소들을 통일하는 것은 테마다. 구조체 밖으로 나와서 서로 다른 별개의 둘을 연결하는 것은 스타일이다. 스타일은 스틸(steel)에서 나왔다. 스틸은 쇠다. 쇠는 단단하다. 왜 단단한 것이 필요한가?

단단하게 연결하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스타일 문제는 연결부위에서 일어난다. 그림이라면 인물과 배경의 접점이 문제다. 그 접점에 무엇이 있는가? 윤곽선이 있다. 윤곽선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가 모든 화가의 고민이다.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동양화처럼 여백을 두어 접점을 희미하게 하는 방법과 거꾸로 윤곽선을 굵게 하는 방법이다. 명성을 얻은 화가들은 대개 피카소처럼 윤곽선을 굵게 한다. 그래야 선이 굵은 그림이 되기 때문이다.

이중섭의 소는 굵은 윤곽선 만으로 충분히 완성되고 있다. 고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마네의 피리부는 소년은 아예 배경을 생략해 버리는 방법을 쓴다. 역시 접점의 문제에 대한 고민의 결과다.

그 점점을 해결했을 때 소통은 일어난다. 작가와 작품 사이에서 일어난 소통이 작품과 관객 사이의 소통으로 복제된다. 음악이든 회화든 영화든 너와 나의 사랑이든 마찬가지다. 모든 예술은 둘 사이에서 소통의 접점을 고민한다.

다양한 방법이 있다. 밝음과 어둠의 대비 수법도 있고 세잔이 형태를 강조하는 것도 그렇고 그 모든 것은 결국 주제와 배경의 접점문제 해결이다. 어떻게든 그림은 선이 굵어야 한다. 그것은 대칭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동양화는 산과 물, 정과 동의 대칭성을 드러내고 서양화는 근경과 원경, 인물과 배경의 대칭성을 드러낸다. 대칭성을 드러낼 때 인간은 긴장하여 집중하고 그 대칭의 접점을 해소할 때 인간은 편안하게 이완된다.

그 절정의 긴장된 집중에서 편안한 이완으로 급반전될 때 쾌감을 느낀다. 오르가즘을 느낀다. 그 쾌감은 인간 내부의 질서에서 유도된다. 그 마음의 질서를 끌어내는 것은 예술가가 완성한 작품 내부의 미학적 질서다.

어떻게 살 것인가?

어차피 인생 별 거 아니다. 지푸라기와 같은 것이다. 신통한 일은 어디에도 없다. 슬퍼할 일도 없고 분노할 일도 없다. 잘난 것도 없고 못난 것도 없다. 멋지게 살든 우울하게 살든 종이 한 장 차이다.

행복하게 살든 불행하게 살든 실제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것은 말하자면 붙여놓은 장식, 걸어놓은 타이틀, 명목상의 표제에 불과하다. 그대의 삶이 성공이든 실패든 그러하다.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다만 그대에게 그런 것을 구분하게 하는 가려보는 눈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 보는 눈이 타락했다면, 그 느끼는 가슴이 죽어버렸다면 인생은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진짜는 사람이다. 사람이 걸작이어야 한다.

고흐는 캔버스 위에 해바라기를 그려놓고 간 것이 아니라 지구 위에 인간 고흐라는 작품 하나 탄생시켜 놓은 거다. 고흐의 마음과 소통하지 못하면 실패다. 고흐의 완전성과 반응하여 그대 삶의 완전성을 끌어내지 못하면 실패다.

어떻게 살 것인가? 내가 잘 되고 잘못되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 잘된 것과 잘못된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그대의 섬세한 가슴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은 늙어서 죽지 않는다. 그 눈을 잃어서 죽고 그 가슴 잃어서 죽는다.

어느 사이에 비위가 세어지고 뻔뻔해져서 수줍음을 잃고 순수를 잃고 부끄러움을 모르게 된다면 살아도 이미 죽은 것이다. 예술의 의미는 그 눈과 가슴을 보호하여 인간을 회복함으로써 인간에게로 되돌리는데 있다.

    

구조주의 진화론

진화론이 각별한 이유는 구조론의 이론적 타당성이 상당부분 검증 가능하기 때문이다. 자연의 생태계야 말로 구조론이 실제로 적용되고 있는 모습이 실시간으로 생중계되고 있는 적나라한 현장이라 하겠다.

구조가 명백하게 드러나는 곳은 어떤 탄생의 현장이다. 이미 완성되어 있는 건물의 구조를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지금 막 건축되고 있는 건물의 구조는 확실하게 파악된다. 그 현장은 감출 수가 없다.

산모가 아기를 낳을 때는 어쩔 수 없이 치부를 드러낸다. 아기 역시 벌거벗은 알몸뚱이를 만천하에 드러낸다. 탄생과 죽음, 입력과 출력은 아날로그 구조로서 접점이 열려 있으므로 감출 수가 없다.

입자 가속기로 물질이 탄생하는 장면을 관측하고 천체 망원경으로 별이 탄생하는 모습을 관찰하여 과학은 이룩되었다. 마찬가지로 생명이 탄생하는 모습을 관찰함으로써 구조론은 검증될 수 있다.

과학의 여러 분야 중에서도 생물학 영역에서 특히 최근에 주목할만한 보고가 많이 올라왔다. 10년 사이에 교과서 기술이 바뀌었을 정도이다. 컴퓨터와 인터넷 등 중요한 혁신이 생물학과 밀접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지난 십 수년간 진화와 관련하여 많은 의견들을 게시했고 이는 게놈프로젝트와 줄기세포 연구 등 최근 학계의 연구성과와 상당히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렇게 구조론의 이론적 타당성이 검증된 것이다.

진화란 무엇인가?

자동차는 자전거보다 복잡하다. 컴퓨터는 텔레비젼보다 복잡하다. 구조의 집적도가 더 높다. 여기에 필연의 메커니즘이 존재한다. 운전자와 자동차 사이에 상대적인 대칭구조가 성립하고 있다.

높은 수준에서 적게 개입할 것인가 아니면 낮은 수준에서 많이 개입할 것인가다. 자동차는 운전자가 높은 수준에서 개입한다. 기름을 넣고 키를 돌리고 기어를 조작해야 한다는 점에서 정밀한 통제가 필요하다.

반면 자전거는 페달만 밟으면 된다. 그러나 쉬지않고 계속 페달을 밟아야 하므로 더 많이 개입한다. 여기서 대칭성이 성립한다. 구조는 5에 의해 에너지 순환의 1사이클이 완성되므로 이쪽이 1이면 저쪽은 4여야 한다.

● 운전자가 4로 개입  - 칼은 집적도 1이다.  

● 운전자가 3으로 개입- 수레는 집적도 2다.

● 운전자가 2로 개입  - 자전거는 집적도 3이다.

● 운전자가 1로 개입  - 자동차는 집적도 4다.

● 운전자가 개입 않음 - 인공지능은 집적도 5다.

  

생물의 운전자는 환경이다. 생물의 구조가 단순할수록 환경은 더 많이 개입한다. 식물은 외부에서 햇빛과 물을 제공해야 한다. 그러므로 부단히 개입한다. 동물은 스스로 먹이를 찾으므로 놔두어도 된다. 덜 개입한다.

생물의 진화는 외부환경의 개입정도를 줄여나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환경과의 소통구조 안에서 작동하는 필연의 메커니즘이 있다. 대칭성이 있다. 그러므로 진화는 그 필연의 메커니즘을 따라가는 것이어야 한다.

만약 진화가 우연에 의해 일어난다면 종의 퇴화도 관찰되어야 한다. 그러나 신체기능의 퇴화는 있을지언정 종의 퇴화는 없다. 동굴생물의 눈이 퇴화된 것은 환경적응의 결과라는 점에서 역시 종의 진화에 해당된다.

동굴생물의 운전수인 환경과 그 환경에 의해 통제된 자동차인 동굴생물이 힘을 합쳐 5를 성립시키고 있다. 환경과의 대칭구조라는 필연의 메커니즘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화다.  

무엇이 진화인가? 진화는 첫째 변화이어야 하며 둘째 일정한 방향성을 가져야 하며 셋째 구조적인 집적도를 더 높여가는 것이어야 한다. 외부환경의 개입정도를 줄여가는 형태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돌연변이가 진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겠으나 그것이 진화는 아니다. 대부분의 돌연변이는 기형을 낳고 태내에서 사망한다. 살아남은 극소수도 열성인자를 남기므로 잘 유전되지 않는다.

돌연변이는 환경과의 교감이라는 본질을 무시하고 있으므로 필연의 메커니즘 밖에 있다. 환경과의 교감에 의해 외부 환경의 변화를 수용하는 형태로 일어나는 변이가 진정한 진화인 것이다.

진화를 판정하는 기준은 종이다. 종은 소통의 단위이기 때문이다. 구조의 집적은 외부와의 소통에 의해 일어나고 그 소통의 대상은 환경이다. 진화는 환경의 개입정도에 의해 통제되기 때문이다.  

역사 이래 신종의 출현은 유의미한 수준에서 관측되지 않았다. 화석을 토대로 과거에 있었던 신종의 출현사례를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포유류나 조류를 비롯한 고등동물의 신종출현은 역사이래 관측되지 않았다.

반면 생태계 환경의 진화는 지금도 관측되고 있다. 인류문명의 진보도 그 생태계 환경의 일부다. 두 가지 진화가 있다. 종의 진화와 생태계 환경의 진화가 있다. 기존의 진화론은 종의 진화에 주목할 뿐이다.

구조체가 모여서 시스템을 이룬다. 건물이 모여서 도시를 이룬다. 개인이 모여서 국가를 이룬다. 종이 모여서 생태계를 이룬다. 한 채의 건물을 짓는 것이 종의 진화라면 하나의 도시를 건설하는 것은 생태계의 진화다.

둘은 유기적인 관계를 맺는다. 도시가 바뀌면 건물이 바뀌고 건물이 바뀌면 도시가 바뀐다. 나비와 벌이 없으면 식물의 꽃가루받이가 불가능하다. 식물 생태계가 변하면 그 식물을 먹이로 삼는 동물 생태계도 연동되어 변한다.

● 진화 1 - 신종의 출현

● 진화 2 - 종간 소통에 의한 모듈의 출현

● 진화 3 - 환경과의 소통에 따른 생태계의 진화

나비와 꽃은 서로가 없으면 살지 못한다. 이들은 각각의 종이면서 모듈을 이룬다. 모듈은 숙주와 기생생물의 관계에서 잘 드러난다. 진화는 종의 진화이면서 모듈의 진화이고 동시에 생태계의 진화다.

진화는 환경과의 대화다. 생태계의 진화야말로 진정하다. 무엇인가? 지구 생물체의 총합을 하나의 종으로 보는 관점이 필요하다. 종이 모여서 모듈을 이루고 환경과 소통하여 생태계의 시스템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다윈의 생존경쟁 개념은 이 부분을 설명하지 못한다. 지구 생태계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라는 관점이 필요하다. 생태계의 진화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구조주의 진화론의 차별성이 있다.

진화는 유전체계의 진화다

구조주의 진화론은 한 마디로 진화의 핵심적 과정이 유전체계 내부에서 전적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진화는 유전인자의 진화다. 유전체계 내에 진화를 담당하는 소프트웨어가 존재한다.

생물은 조직, 기관, 계 등으로 구성된다.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세포조직이나 내부장기 기관이나 신경계, 혈관계, 따위의 계가 진화한다고 보지만 실제로는 유전체계 내의 소프트웨어 차원에서 수학적으로 진화한다.

신체기관이라는 하드웨어가 아니라 유전정보라는 소프트웨어가 진화한다. 진화가 일어나는 이유는 유전체계 내에 진화담당 유전정보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계기로 그 진화 소프트웨어가 발현될 때 진화가 일어난다.

구조주의 진화론의 핵심은 유전체계 내의 진화 유정정보에 구조론의 밸런스 원리가 적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종의 진화는 다윈이 주장하는 생존원리가 아니라 구조론의 미학원리에 크게 지배된다.

종은 살아남기 경쟁이 아니라 아름답기 경쟁을 벌인다. 동물의 신체구조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밸런스다. 종은 살아남기에 알맞게 진화해 온 것이 아니라 밸런스를 이루어 자연스럽게 진화해 왔다.

기린의 목이 길어질 때 다리도 길어진다. 코끼리의 코가 커짐에 따라 귀도 커지고 상아도 커져서 밸런스를 이룬다. 그런데 모든 변이는 밸런스를 무너뜨린다. 그 밸런스의 회복과정에서 대부분의 진화가 일어난다.

● 진화는 유전체계의 진화다.

● 유전체계의 진화는 구조체의 밸런스 원리를 반영한다.

● 밸런스 원리에 따라 진화는 생존원리가 아닌 미학원리에 지배된다.

● 자연에서 모든 변이는 밸런스를 무너뜨려서 종의 생존을 어렵게 한다.

● 무너진 밸런스의 회복과정에서 결정적인 진화가 일어난다.

우리가 진화라고 믿는 변이의 상당부분은 퇴화다. 인간 남자의 성을 결정하는 Y염색체는 처음 1천여개에서 점차 감소하여 지금 16개만 남아있다. 다윈의 돌연변이설이 주장하는 변이는 대부분 이런 식의 퇴화다.

유전자는 우주 방사선 등의 영향으로 손상된다. 유전체계는 복제 과정에서 손상된 부분을 치유한다. 유전체계가 기본적으로 종의 안정성을 지향한다. 진화는 그 손상된 부분을 복구하는 안정화 과정에서 일어났다.

대진화와 소진화가 있다

진화는 유전체계 내에서 일어난다. 겉으로 보이는 신체는 스크린에 비친 그림자다. 진상이 아니라 허상이다. 질료가 아니라 형상이다. 모니터에 비친 그림자를 보지 말고 이면에 감추어진 소프트웨어를 보아야 한다.

모니터에 뜬 게임 속의 아바타가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소프트웨어 속의 소스코드가 2D게임에서 3D게임으로 진화하는 것이다. 아바타는 스스로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프로그래머가 그냥 입력해 놓은 것이다.

활성화 된 유전자 수의 증가를 수반하는 대진화와 활성화 된 유전자 수의 감소를 수반하는 소진화가 있다. 돌연변이설, 격리설 등 기존에 알려진 모든 이론들은 소진화를 설명할 뿐이다.

소진화는 대진화가 일어난 후 안정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조정현상이다. 자동차에 비유할 수 있다. 신차가 출시되면 초반에는 고장이 잦다. 몇 차례의 리콜을 거치며 점차 안정화 된다.

설계오류가 바로잡히고 노동자의 숙련도가 높아져서 점차 고장이 줄어든다. 신차의 출시가 대진화라면 리콜은 소진화다. 여기서 대진화와 소진화는 진행방향이 다르다는 점이 중요하다.

대진화는 연역되고 소진화는 귀납된다. 대진화는 높은 질서에서 낮은 질서로 일어나고 소진화는 낮은 질서에서 높은 질서로 일어난다. 대진화는 유전체계의 내부논리에 따라 일어나고 소진화는 외부환경과의 교감에 의해 일어난다.

어떤 계기에 의해 대진화가 일어나서 코끼리의 코가 길어진다. 이후 구조론의 밸런스 원리에 따라 귀와 다리와 상아와 몸통도 함께 커진다. 이러한 전개는 소진화의 미시조정에 해당한다.

발명에도 여러가지가 있다. 요소를 결집하여 기능을 창안하는 대발명이 있고 주어진 기능을 건드리지 않고 외관을 바꾸는 실용신안이나 의장등록 따위의 소발명이 있다. 대진화는 기능이 변하고 소진화는 디자인이 변한다.

대진화는 유전체계 내의 밸런스 법칙을 따르고 소진화는 생태계의 생리를 따른다. 참된 진화는 신종의 출현이며 이는 대진화에 의해서만 일어난다. 그리고 대진화는 필연적으로 신체의 불균형을 초래한다.

소진화는 환경과의 교감을 통하여 점차 불균형을 시정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종의 안정화 과정은 구조론의 미학원리를 따른다. 인간은 여자가 아름답지만 새들은 수컷의 무늬가 화려하다.

암컷은 원앙이나 공작처럼 깃털이 화려한 수컷을 선택한다. 이 부분은 생존경쟁원리로 설명할 수 없다. 종은 살아남기를 경쟁한 것이 아니라 내부의 유전체계와 외부환경의 마찰에 따른 오류를 지속적으로 시정해온 것이다.

진화는 생태계 환경과 유전체계의 대화다. 둘은 상호작용을 가진다. 환경이 변하면 결정적인 진화가 일어난다. 새들이 특히 화려한 깃을 가진 수컷을 선택하는 이유는 새가 공중을 날아다니기 때문이다.

원숭이의 엉덩이가 붉은 이유는 원숭이가 나무 위에서 생활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몸매가 특히 매력적인 이유는 인간이 원숭이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반면 평지에서 생활하는 호랑이나 사슴은 특별히 컬러를 사용하지 않는다.

2차원 평면환경과 3차원 입체환경의 차이다. 포유류의 평면환경에서는 발정기에 냄새로 유인하여 짝짓기를 할 수 있으므로 컬러가 불필요하다. 그런데 공중을 나는 새는 냄새로 짝을 유인할 수 없다.

조류의 수컷은 화려한 컬러깃으로 장식하고 구애의 춤을 춘다. 나무 위의 원숭이도 마찬가지다. 평면이 아니라 입체환경이므로 엉덩이를 부풀리는 방법을 쓴다. 그런 점에서 종의 진화는 환경과의 대화다.

인간은 두 눈이 앞에 있어서 입체를 본다. 원숭이였던 시절 나무 위에서 다른 나무로 건너 뛸 때 거리조절을 위한 것이다. 인간의 입술과 뺨과 가슴과 엉덩이가 특별히 통통한 것은 인간의 눈이 입체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포유류의 상징은 털이지만 인간은 포유류 중에서 유일하게 그 털을 버리려고 노력하였다. 왜인가? 털을 버려야 입체감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는 구조론의 미학원리를 따른 것으로 다윈의 생존경쟁이론과 무관하다.

생존경쟁을 벌인 결과 뺨과 입술이 통통한 한국인만 살아남고 뺨과 입술이 얇은 서구인이 멸종해버린 것은 전혀 아니다. 생존경쟁은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뺨이 얇은 서구인도 멸종하지는 않았다.

처음 원숭이의 엉덩이가 통통해질 때 진화의 방향성이 결정되었다. 이후 지속적으로 밸런스를 맞추어온 결과로 이렇게 된 것이다. 머리카락도 마찬가지다. 왜 인체 중에서 머리만 털이 길까?

긴수염고래의 수염과 마찬가지로 밸런스 원리에 따라 피부에 털이 없어진 만큼 보상되어 상대적으로 머리칼이 길어진 것이다. 백인의 뒷통수가 돌출한 만큼 미간이 좁아지듯이 구조는 밸런스를 따라 보상된다.

시력을 잃으면 귀가 예민해지고 청력을 잃으면 독순술 능력을 얻게 되듯이 구조는 보상된다. 인간의 지능이 발달한 것은 후각을 비롯한 다른 많은 능력을 잃어버린 결과다. 이 역시 구조체의 밸런스 원리가 작동한 결과다.

이러한 주장은 필자가 처음 내놓는 것이다. 이렇듯 필자가 처음으로 개진한 의견과 10여 년 후에 보고된 학계의 성과가 절묘하게 일치한 경우가 많았다. 그 방법으로 구조론의 이론적 타당성이 검증된 것이다.

생존원리와 미학원리

다윈의 생존경쟁이론도 일정부분 종의 진화와 관련성이 있다. 그러나 진화의 핵심인 신종의 출현 및 그 전제인 활성화된 유전자 수의 증가와 관련이 없다. 생존경쟁이론은 다만 멸종한 종이 멸종한 원인을 설명할 뿐이다.

신종이 출현하면 생태계 환경이 변한다. 속씨식물이 등장하고 충매화가 등장하고 나비나 벌이 등장하면 식물생태계가 변하고 잇달아 동물생태계도 변한다.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종은 멸종된다.

생존경쟁은 이 부분을 보조적으로 설명할 뿐이다. 만약 생존경쟁이 극단적으로 심화된다면 종의 숫자는 점차 감소하여 극소수의 바이러스만 살아남을 것이고 고등동물은 극소수를 제외하고 대개 멸종한다.

다윈의 이론은 진화론이 아니라 멸종론이다. 인류가 지구 생태계를 파괴하여 생태계에 대멸종을 가져온 현상을 다윈의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인간이 서로 살아남으려고 했기 때문에 무수한 종이 절멸된 것이다.

최근 학계의 보고에 의하면 인류의 조상이 아프리카 남부에서 1천 개체 안팎의 극소수인 채로 수 백만년을 이어왔다고 한다. 멸종 직전까지 간 것이다. 이는 다윈의 생존경쟁이론과 맞지 않다.

모든 변화는 기본적으로 생태계에 타격을 준다. 라디오나 자전거와 같은 복잡한 장치를 두고 외부에서 돌이나 물로 타격을 가하면 그것이 고장날 뿐 더 나은 TV나 자동차로 진화하지는 않는다.

생존경쟁 개념은 TV나 자동차와 같은 신종의 출현 이후 라디오나 마차 따위가가 도태된 이유를 설명할 뿐, TV나 자동차와 같은 신종이 왜 출현했는지는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  

식물은 비가 오지 않으면 더 많은 꽃을 피운다. 생존확률을 높이기 위해서다. 그러나 환경이 양호하면 적은 숫자의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번식에 대해서는 관심을 끊고 세력 키우기에 집중하는 것이다.

무엇인가? 식물은 생존보다 세력을 원한다. 주변에 같은 종의 식물이 있으면 이를 알아보고 뿌리에서 내뿜는 화학물질로 공격하지 않는다는 보고가 최근에 있었다. 생존이 아니라 세력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행운목이 행운목이라 불리는 이유는 꽃이 잘 피지 않으므로 운이 좋아야만 꽃을 볼 수 있다고 해서이다. 행운목에 물을 주지 않으면 꽃이 핀다. 환경이 나빠지면 죽음에 대비하여 꽃을 피우는 것이다.

행운목 입장에서는 행운이 아니라 불운이다. 행운목이 꽃을 피우면 곧 죽게 되므로 살리려면 특별히 잘 관리해야 한다. 많은 식물들은 서식환경이 나빠지면 꽃을 피워 후손을 남기고 죽는다. 풀은 겨울이 닥치면 죽는다.

과연 그럴까? 천만에! 아니다. 생태계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풀은 씨앗 속으로 숨은 것이다. 생태계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식물에게 죽음이란 없다. 어떤 면에서 종은 지구에 출현한 후 한 번도 죽지 않았다.

가을에 날씨가 추워지면 낙엽이 진다. 나무가 죽은 것일까? 아니다. 나무는 잎을 버리고 후퇴하여 껍질 속으로 숨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풀은 추위가 닥치면 몸을 버리고 씨앗 속으로 숨는다.

종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종은 생존을 원하지도 않는다. 종의 관점에서는 죽음이 없기 때문에 생존도 없다. 죽음은 인간의 정서적인 관점이고 특히 식물 입장에서는 단지 세력의 확대와 후퇴가 있을 뿐이다.

종은 환경이 좋을 때 수컷 중심으로 세력확장을 꾀하고 적은 숫자의 우량한 자손을 남긴다. 환경이 나쁠 때 암컷 중심으로 많은 자손을 남긴다. 여기서 수컷의 역할이 종의 생존이 아니라 세력확대라는 점이 중요하다.

● 세력이 생존에 앞선다.

● 종은 환경이 좋을 때 세력확대를 꾀하고 환경이 나쁠 때 생존을 꾀한다.

생존이 유일한 목적이라면 수컷은 필요하지 않다. 어류 중에는 모두 암컷으로 태어났다가 대장 한 마리만 수컷으로 변하는 종도 있다. 생존환경이 나쁜 심해어 중에는 특히 수컷의 역할이 미미한 경우가 많다.

보도에 의하면 갓 출산한 여성이 사내아이의 남성호르몬에 반응하여 미소를 짓는다고 한다. 왜 여자에게 남자가 필요할까? 세력확장을 위해서다. 모계사회에서 많은 사내아이를 낳은 여성은 종족의 리더가 된다.

남자의 완력이 어머니를 보호하기 때문이다. 생존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소떼나 양떼라면 암컷의 번식력이 필요할 뿐 황소는 거의 없어도 된다. 사바나의 물소 수컷은 무리에서 쫓겨나 단독생활을 한다.

물소 무리는 백퍼센트 암컷에 의해 통제된다. 늙은 암컷이 무리의 리더가 된다. 물개는 수컷 한 마리가 암컷 무리를 독점한다. 이는 대부분의 수컷이 자신의 존재가치를 입증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생존을 위해서라면 암소 백 마리에 황소 한 마리로도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남녀의 성비가 1:1에 가까운 것은 생존원리가 아니라 미학원리가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미학원리는 개체 단위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룹 전체 단위로 본다. 이때 그룹의 핵심은 항상 여성이다. 여성이 낳고 낳음이 소통의 단위가 되므로 여성이 진화의 중심이 되고 남성은 단지 보조적 존재일 뿐이다.

어떤 여성이 아들을 많이 낳아 열 명의 사내아이를 거느렸다면 자신의 몸이 열 배로 커진 것과 같다. 이때 여성 1인+아들 10인으로 이루어진 그룹이 마치 하나의 개체처럼 행세하는 것이 미학원리다.

여성이 남성보다 몸집이 작은 이유는 사내아이를 낳아 세력을 늘리면 되기 때문이다. 자기 몸집을 두배로 키우기 보다 옆에 사내아이 하나를 거느리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그래서 여성은 날씬해지기를 원한다.

환경이 좋아서 죽을 가능성이 없다면 계속 사내아이만 낳는다. 아이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이 자기 자신이 커진 것과 같기 때문이다. 여성이 여성을 낳는 이유는 환경이 나빠져서 자신이 죽을 경우에 대비한 것이다.

식물의 경우 개체보다 군(群)이 중요하다. 클로버는 봄이면 재빨리 세력을 키워 지표를 차지한다. 개미나 벌도 마찬가지로 군집의 세력확대에만 열심이다. 만약 진화나 생존의 단위가 개체라면 수컷은 존재의미가 없다.

수컷이 세력에 기여할 뿐 생존에 기여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암수가 적당한 성비로 공존하는 이유는 하나의 군(群)이 하나의 개체처럼 행세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지구 생태계 환경 전체가 진화의 한 단위가 된다.

환경이 양호하면 남는 지방을 허리에 비축하다. 암컷이 수컷을 두는 것은 자신의 허리에 지방을 축적하는 것과 완전히 동일하다. 겨울에 대비하여 곡물을 저장하듯 사내아이의 형태로 영양을 저장하는 것이다.

생태계에서 모든 환경의 변화는 밸런스를 깨뜨려 종을 해친다. 진화는 생태계가 온갖 환경의 변화를 수용하면서 부단히 밸런스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이것이 구조주의 진화론의 미학원리다.     

구조주의 진화론의 3가지 예견

● 모든 성은 여성이다.

● 게놈 유전자는 생각보다 적다.

● 인간의 조상은 처음부터 직립했다.

학계의 보고와 일치한 필자의 예견이 많지만 특히 세 가지를 강조할 수 있다. 구조주의 진화론의 핵심은 밸런스 원리다. 다윈이 강조하는 변이는 우연히 일어난다. 반면 밸런스는 필연적으로 작동한다.

오른쪽 다리가 길어지면 왼쪽 다리도 같이 길어져야 한다. 이는 필연이다. 유전정보들 중에서 인체의 밸런스가 무너졌을 때 그 부분을 바로잡는 유전정보가 있다. 원초적으로 진화에 관계하는 유전인자가 있는 것이다.

생물의 진화는 진화 유전인자에 의해서 일어났다. 진화 유전인자는 평소에 가만이 잠복해 있다가 어떤 외부에서의 자극에 의해서 중대한 변이가 일어났을 때 활성화 되어 발현을 시작한다.

● 외적 영향.. 우주 방사선 등의 환경변화가 진화를 촉발

● 내적 원인.. 진화 담당의 유전정보가 발현하여 신종출현

우주 방사선의 작용 등 외부환경의 영향에 의해 방아쇠가 당겨진다. 진화 담당의 유전정보가 발현되어 대진화를 촉발하는 거대한 변이가 일어난다. 변이는 활성화 된 유전자 숫자의 증가형태로 나타난다.

이때 밸런스 원리가 작용하여 그 변이에 의해 일어난 모순을 바로잡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종의 진화가 일어난다. 신종의 출현이다. 대진화는 짧은 순간에 폭발적으로 일어난다.

기린의 목이 길어지면 불균형이다. 이 불균형을 시정하기 위해서는 다리도 함께 길어져야 한다. 유전체계 내에 밸런스를 바로잡는 유전인자가 있으며 이 부분이 생물체의 진화를 촉발하는 가장 큰 부분이다.

모든 성은 여성이다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는 패러독스가 있다. 정답이 없다고들 말한다. 틀렸다. 구조론으로 보면 닭이 먼저다. 구조론은 완전성 개념을 전제로 한다. 완전한 것이 1이다. 1에서 부터 전개가 시작된다.

처음부터 2인 경우는 없다. 빛과 어둠이 있다면 반드시 빛이 먼저다. 빛과 어둠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마찬가지다. 구조원리로 볼 때 암컷과 수컷은 평등하지 않다. 모든 성은 암컷에서 유래되었다.

수컷은 암컷이 세력확장을 위하여 만들어낸 것이다. 암컷이 완전하며 수컷은 불완전하다. 완전체를 기준으로 볼 때 닭과 달걀 중 닭이 먼저다. 그리고 그 닭은 달걀을 품은 암닭이어야 한다.

달걀은 암수가 결정되어 있지 않다. 그 달걀에서 수컷이 나올 수도 있고 암컷이 나올 수도 있다. 수컷은 불완전한 개체다. 달걀은 완전체가 아니므로 어떤 이론적 전개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연역의 출발점이 될 수 없다.

구조론에 따르면 모든 변화는 전체에서 부분으로 간다. 달걀은 부분이므로 대표성이 없다. 달걀이 먼저일 수 없다. 줄탁동기라 했다. 달걀은 혼자서 껍질을 깨고 나올 수 없다. 혼자 성장할 수 없다. 불완전하다.

[오마이뉴스 이명옥 기자]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신경정신과 의사인 저자는 성역할은 사회화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며 여자 아이는 태어날 때 이미 여성의 뇌에 설치된 프로그램에 따라 행동하고 살아가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인간의 태아는 38주에 걸쳐 엄마의 몸 밖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관들을 하나하나 획득하게 되는데 처음 8주 동안은 남아든 여아든 모두 여아의 뇌를 가지고 있다. 즉 여아가 자연의 기본적인 성 설정이다. 8주간이 지나면서 테스토스테론이 분비되면 태아의 뇌는 확실하게 남아의 뇌가 된다. 테스토스테론은 커뮤니케이션 중추에 있는 세포들을 죽이고 섹스와 공격 중추에 있는 세포들은 점점 더 성장시켜 남자 뇌 기능을 갖추는 것이다.

만일 테스토스테론 대신 에스트로겐이 분비되면 태아의 뇌는 동요함 없이 여자의 뇌로 성장하게 된다. 성적 분기점이 되는 성호르몬의 분비가 여자와 남자의 뇌구조를 다르게 만들므로 여자와 남자의 생물학적 운명을 결정하게 된다.♣

인용한 신문기사는 근래에 보도된 것이다. 필자가 ‘모든 성은 여성이다. 닭과 달걀 중 닭이 먼저다’는 의견을 게시한 것은 15년 전이다. 구조론에 따르면 원래부터 둘인 경우는 절대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며칠 전 살구나무를 관찰해 보았는데 수정을 하지 못한 열매는 살구씨가 생기지 않은 채로 씨방만 커져 있었다. 수정을 한 열매는 크기는 작았지만 속에 단단한 살구씨가 들어 있었다. 크기 차이는 서너배에 달했다.

남자가 여자보다 몸집이 큰 것은 수정을 못한 살구씨가 씨방만 커진 것과 같다. 그 속이 빈 헛살구는 곧 죽는다. 구조의 집적도가 높은 경우 성장의 속도가 느려진다. 그러므로 수퇘지의 불을 제거하면 성장이 빨라진다.

게놈 유전자는 생각보다 적다

▦인간의 유전자 수가 극히 적은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유전자는 선충 수준, 만물의 영장 노릇 어떻게)

인간의 유전자 수는 2만 5천개에 불과하다. 생명공학 기술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을 때 인간이 적어도 10만개의 유전자를 지니고 있을 것으로 추정하던 것과는 크게 차이가 난다. 이는 풀 종류인 아기장대나 C. 엘리건스라는 선충과 비슷한 수준이다.

과학자들은 인간이 이처럼 적은 수의 유전자를 갖고 어떤 생물체에도 뒤지지 않는 다양성을 지니고 있는 이유를 밝히기 위해 힘쓰고 있다. -사이언스의 과학자들이 해결하고 싶어하는 25가지 난제 중에서-

우리는 진화가 신체의 기관이나 조직 혹은 신경계 따위에서 일어난다고 착각하지만 실제로는 유전체계 내에서 일어난다. 이러한 견해는 필자가 진화론을 처음 배운 30여년 전부터 가졌던 것이다.

자연에서 유래한 원시상태의 단수한 유전자가 어떻게 고도의 지적 능력을 가진 지성체의 개입없이 로보트보다 더 복잡한 생명체를 탄생시킬 수 있었을까? 구조론의 밸런스 원리로 가능하다.

밸런스 원리는 1이 2를 통제하는 것이다. 그것으로 하나의 구조체를 이룬다. 그 구조체가 모듈화 된다. 모듈화 된 정도가 집적도다. 집적도 5까지 모듈화가 가능하다. 5회에 걸쳐 모듈화 되어 고도로 집적되면 완전체가 된다.

생명체는 동력원(대부분 태양에서 광합성 형태로 유래)이 주어지면 동력발생, 동력제어, 동력전달, 동력효과까지 전개되도록 모듈화된 완전체다. 가장 원시적인 생명체는 3125의 질서를 가지는 625의 구조체로 성립된다.

하나의 구조체가 입력≫저장≫제어≫연산≫출력의 5가지 기능을 가진다. 그러므로 훨씬 더 적은 구성으로도 훨씬 더 많은 효과를 끌어낼 수 있다. 당연히 유전인자 숫자는 생각보다 적어야 한다.

가로변 체육공원에 오른 팔과 왼 팔로 두 개의 바퀴를 돌리는 기구가 있다. 이때 어떤 방법으로 돌리더라도 하나의 패턴으로 나타난다. 중심으로 모으기 방식과 중심에서 멀어지기 방식이 있다.

또 둘 다 왼쪽으로 돌리기와 둘 다 오른쪽으로 돌리기가 있다. 어떻게 차별화 해도 결국 같아져 버린다. 다리를 움직여도 마찬가지다. 왼발은 앞으로 가고 오른발은 뒤로 빼면 중심에서 멀어지기다.

왼발과 오른발을 동시에 움직이면 제자리 뛰기다. 어떻게 해도 1이 되어버리며 왼발과 오른발이 완전히 따로노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어떤 동작이라도 모듈화 되어 뇌에서 내려온 1의 명령으로 통제된다.

사람의 몸은 오른팔과 왼팔을 가진다. 얼굴은 오른쪽 눈과 왼쪽 눈을 가진다. 둘은 모듈화 되어 하나의 통제를 받으며 대외적으로 1로 행세한다. 뇌에서 내려온 하나의 명령이 양쪽을 동시에 통제하는 것이 밸런스 원리다.

뇌가 왼발과 오른발에 별도로 명령을 내린다면 걸음은 엉킨다. 걸을 수 없게 된다. 하나의 명령에 의해 두 발이 동시에 통제되어야 걸을 수 있다. 유전인자의 숫자가 적어야 인체가 통제된다.

학은 왜 물 속에서 한쪽다리를 들고 있을까? 체온을 절약하기 위해서라고 알려져 있지만 잘못 알려진 이야기다. 학은 더운 여름에도 한쪽 다리를 든다. 물 밖에서도 한쪽 다리를 든다.

비둘기도 심심하면 한쪽 다리를 든다. 대부분의 새들이 한쪽 다리를 든다. 사람도 짝다리 짚고 선다. 한쪽 다리로 서는 것이 더 균형잡기에 편하기 때문이다. 뇌가 두 다리에 각각 별도로 신호를 전해야 한다면 피곤한 거다.

밸런스 원리는 모듈의 원리다. 여러 개체가 모듈화 되어 대외적으로 1로 행세하므로 1의 명령으로 전부 통제될 수 있고 따라서 이를 통제하는 활성화 된 유전인자의 수는 많을 이유가 없다.

컴퓨터 그래픽에 2D와 3D가 있다. 2D보다 3D가 더 적은 용량을 차지한다. 2D로 구현된 에니메이션이 3D로 구현된 에니메이션보다 비용이 더 많이 먹힌다. 집적도가 높을수록 통제효율이 높아지고 부하는 적게 걸린다.  

일본에서 사람처럼 걷는 로봇이 제작되었지만 성공적이지 못하다. 하나의 신호로 통제되어야 하는데 아시모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듈화를 통한 구조론의 단계적 제어원리가 적용되지 않는 한 걷는 로봇은 성공하지 못한다.

게놈 프로젝트는 2003에 완성되었다. 게놈지도를 완성한 결과 인간의 유전자 숫자는 당초 학자들이 추산했던 10만개에 미치지 못했다. 인간의 3만여개는 하등식물 2만 5천개, 작은 벌레 1만 9천개와 큰 차이가 없다.

이러한 내용은 그 시점에 필자가 예견하여 주장한 바와 일치한다. 1이 2를 통제하는 구조론의 밸런스 원리가 적용되면 적은 유전자 숫자로 4조개의 세포가 모여 있는 거대한 인체를 통제할 수 있다.

하나의 완전체는 3125 구성소에 625 구조체로 조직되며 하나의 명령에 따라 하나의 일을 수행하도록 세팅된다. 뇌는 단 하나의 명령만으로 3125 구성소로 이루어진 조직 전체를 통제할 수 있다.  

3125구성소-625구조체 단계에서 가장 단순한 생물체의 수학적 원리는 확보된다. 이로서 하나의 일을 하는 원시적인 컴퓨터가 성립하며 나머지는 환경의 다양한 간섭에 대응하느라 일의 숫자가 증가한데 불과하다.

구조체의 일은 환경으로부터 복제하여 내부로 받아들여지며 제어단계에서 처리되어 연산단계에서 다시 환경과의 비례에 맞추어 증폭된다. 구조가 복잡해 보이는 이유는 증폭과정 때문이다. 증폭되어 양이 늘어났을 뿐이다.

잃어 버린 고리는 없다

인류, 450만년전부터 직립보행”…에티오피아서 화석 발견

450만∼430만 년 전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초기 인류의 화석(사진)이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에서 대거 발굴됐다. 발굴팀은 이 화석이 450만 년 전 인류가 직립보행을 했다는 증거라고 추정했다.

미국 인디애나대 크래프트 석기시대연구소 연구팀은 에티오피아 북부 아파르 지역에서 최초의 인류 조상 중 하나로 추정되는 원시인류 9명의 치아, 턱, 발 및 손가락뼈 화석 30여 점을 발견했다.

이 화석들은 10년 전 학계에 보고된 ‘아르디피테쿠스 라미두스(Ardipithecus ramidus)’에 속한다.

오랫동안 학계에서는 1974년 에티오피아에서 발견된 화석을 근거로 300만 년 전 초기 인류가 처음 직립보행을 한 것으로 여겨왔으나, 최근에는 인류가 600만 년 전부터 직립보행을 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주성원 기자 swon@donga.com [동아일보 2005-01-20]

구조론에 따르면 미싱링크(missing link)는 없다. 원숭이는 등이 굽어서 직립보행을 못했는데 수백만년 동안 조금씩 등이 펴져서 마침내 온전한 직립보행을 하게 된다는 식의 그림이 과거 교과서에 실려 있었는데 가짜다.

최근 필자가 교과서를 확인해 본 바에 의하면 그림이 과거와 다르게 그려져 있었다. 처음부터 직립한 것으로 그려져 있었다. 최근 학계의 성과가 반영된 것이 분명하다. 필자의 15년 전 주장한 바와 일치한다.

구조론에 따르면 인류는 나무에서 내려오는 즉시 직립했다. 밸런스 원리에 따라 인체의 한 부분이 바뀌면 다른 부분이 이에 연동되어 모두 바뀌기 때문이다. 하체가 발달하는 즉시 등이 곧게 펴지고 직립한다.

하체가 발달하지 못하면 나무에서 내려올 수 없고 하체가 발달하면 등이 굽을 수 없다. 둘은 연동되어 있다. 상체와 하체 사이에 밸런스가 있기 때문이다. 하체가 발달하면 뛰어다니게 되고 땀샘이 발달하고 털이 없어진다.

털이 없어지면 피부가 탱탱해진다. 이것이 구조론의 미학원리다. 그래야 짝짓기를 할 수 있다. 원숭이의 발정기에 부풀어오른 엉덩이가 가슴과 뺨과 입술로 의태되어 원인은 수백 만년 전부터 인간의 피부를 가지게 되었다.

2D게임과 3D게임이 있을 뿐 그 중간인 2.5D게임은 없다. 수레와 지게의 중간단계인 바퀴지게는 성공하지 못한다. 도스와 윈도의 중간단계는 살아남지 못한다. 기능이 변화면 모두 변해야 한다.

원숭이와 인간의 유전정보 차이는 크지 않다. 단 하나의 소스코드가 바뀌어도 나머지도 이에 연동되어 모두 변하도록 애초에 유전체계가 처음부터 그렇게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고리는 원래 없다.

점진적인 진화는 없다. 물론 미세한 부분은 달라질 수 있다. 지금의 인류는 현생인류의 첫 탄생시점보다 지능이 향상되었을 수 있다. 그러나 현생인류가 탄생한 수 만년 전에 이미 지금과 같은 전개가 예비되어 있었다.

돌연변이에 의해 지능이 높은 인류가 나타나서 생존경쟁의 결과로 지능이 낮은 구인류를 멸절시킨 것은 아니다. 3만년 전 현생인류가 출현했을 때 이미 평균 지능지수 100의 인간이 출현할 확률이 예비되어 있었다.

3만년 전에 비해 현생인류의 지능이 진화한 것이 아니라 밸런스 원리에 의해 미학적 최적화가 일어나 지능지수 100으로 수렴된 것이댜. 인류의 지능은 진화한 것이 아니라 상향 평준화 된 것이다.

이러한 전개는 평균화가 아니라 일정한 방향성을 가진 전개다. 말은 지구상에 처음 출현했을 때 개 만큼 작았지만 점차 상향평준화 되어 오늘날처럼 몸집이 커졌다. 원래 그렇게 되도록 유전정보가 세팅되어 있었다.

대진화로 신종이 출현하면 밸런스가 어긋난다. 밸런스 조정은 특정방향으로 계속 진행된다. 기린의 목이 길면 밸런스가 어긋난다. 다리가 길어져 밸런스를 맞추면 또다른 불균형을 낳아 이에 더욱 목이 길어진다.

생장구조이론

생존경쟁은 결과론에 불과하다. 원인분석이 아니다. 생존을 경쟁할 종이 이미 지구상에 출현해 있다. 이미 종이 출현하여 진화된 상태에서 살아남기를 경쟁한다. 요는 그 종이 왜 출현했는가이다.

45억년 전 최초의 원시 생명체가 출현한 후 수십억년 동안 종은 거의 진화하지 못했다. 진화는 최근 수 억년 사이에 갑작스럽게 이루어졌다. 결정적인 방아쇠가 당겨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생장이다.

진화 이전에 생장이 있다. 진화는 생장의 산물에 불과하다. 진화는 종 단위로 확정되지만 생장은 하나의 세포≫하나의 개체≫하나의 군(群)≫하나의 종≫하나의 생태계로 확대된다. 생태계 전체가 하나의 생명체 같다.

최초의 생명체는 하나의 세포였다. 구조체원리에 따라 입력≫저장≫제어≫연산≫출력이 그 안에서 이루어진다. 하나의 완전체 탄생이다. 문제는 세포의 몸집이 커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화하지 못한다.

생명이 탄생하고 수십억년 동안 진화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생명은 세포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생장하면 커진 몸집을 지탱할 수 없어서 세포벽이 쪼개진다. 쪼개지면 죽거나 이탈한다. 그러므로 진화하지 못한다.

아날로그 구조체와 디지털 구조체가 있다. 생명은 디지털구조체다. 그러나 최초에는 아날로그 구조체였다. 디지털구조는 입력≫저장≫제어≫연산≫출력으로 세팅된다. 이때 입력과 출력은 아날로그여야 한다.

생장구조이론의 핵심은 모든 생명체의 출발점은 반드시 아날로그 구조체여야 한다는 것이다. 동물의 교미와 식물의 꽃가루받이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밖으로 열려있는 아날로그 구조를 가진다.

꽃은 바깥을 향하여 꽃잎을 벌려야 하고 동물의 성기도 외부에 노출되어 있어야 한다. 생명은 최초의 단세포 단계에서 고민된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전환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끙끙대며 지금까지 끌고왔다.

충매화는 벌레에 의존하고 풍매화는 바람에 의존한다. 일정부분 외부환경에 의존하는 것이 아날로그 구조체다. 혼자서는 수정할 수 없다. 수술의 꽃가루를 암술 속으로 밀어넣을 수 없다. 반드시 외부의 도움을 얻어야 한다.

식물은 대개 지구의 중력을 이용한다. 나무의 속부분은 생물학적으로 죽어있다. 죽어서 지구의 일부가 되었지만 중력을 유발시켜 몸체를 지탱하게 한다. 식물은 흙에 뿌리를 내린다는 점에서 지구와 자신을 완벽하게 분리할 수 없다.

이렇듯 신체의 일부를 외부에 의존하는 구조가 아날로그 구조다. 생물은 어느 시점에서 아날로그 구조에서 디지탈구조로 전환된다. 디지털 구조는 입에서 항문까지 파이프와 같은 형태가 된다.

파이프 형태를 이루어야 반복작업이 가능하다. 반복작업을 해야 생장할 수 있다. 아날로그 구조체는 스스로 동력원을 획득하지 못한다. 식물처럼 반드시 외부에서 빛과 물을 공급해 주어야 한다.

세포가 커지면 구조가 붕괴한다. 몸체가 쪼개져서 죽는다. 설사 살아난다 해도 쪼개진 부분이 이탈한다. 이 경우 숫자가 증가할 뿐 커질 수 없다. 생장할 수 없다. 생물은 수십억년 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세포가 쪼개져서 이탈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신경계와 혈관계로 연계되어 통일성을 유지하며 개체를 성립시키는 것이 종의 진화다. 이 문제는 원초적인 딜레마다. 누구도 완벽하게 해결할 수 없다.

모순을 해결하면 새로운 모순이 생겨난다. 다른 방법으로 새로운 모순을 해결하면 역시 또다른 모순이 생겨난다. 이 과정이 반복된 것이 종의 진화다. 그리고 그 해결의 노력은 개체가 아니라 생태계 전반에 걸쳐 일어난다.  

수십 억년 전에 아날로그적인 방법으로 원시생명체가 탄생했다. 원시생명체는 세포벽이 없으므로 곧 붕괴했다. 마침내 세포벽을 얻어 디지털구조로 전환했으나 먹이를 먹으면 쪼개지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세포들이 연합하여 개체를 성립시켰다. 세포 안에 세포를 가두어 원핵생물에서 진핵생물로 나아간 것이다. 5억 년 전에 최초로 성공한 방법이다. 수십억년 만에 겨우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역시 생장의 한계가 있다. 세포들의 결합체 그 자체로 구조체의 입력≫ 저장≫제어≫연산≫출력의 모듈을 성립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암컷과 수컷으로 성을 나누는 전략이 채택되었다.

성은 아날로그다. 암컷과 수컷의 결합구조가 순간적으로 파이프를 성립시켜 디지털화 되는 것이다. 오늘날 지구상의 모든 발달된 생물 중에 이 방법을 쓰지 않는 생물은 없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  

모든 생물은 생장하기 위해서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전환되는 과정을 거친다. 그런 점에서 세포는 먹이를 가두는 디지털 파이프다. 그 가두는 결합과정은 아날로그 형태로 전개된다.

먹이가 인간의 몸으로 진입할 때 입에서 항문까지 파이프를 통과하지만 먹이를 포획하는 순간은 칼이 도마를 내려치듯 아날로그 형태다. 최초의 단계에서 먹이는 파이프 바깥에 있다. 어떻게 내부로 빨아들일 것인가이다.

포크를 사용하든 젓가락을 사용하든 손가락을 사용하든 반드시 외부의 것을 사용한다. 그 먹이를 먹는 순간은 아날로그다. 숟가락으로 음식을 떴을 때 입과 숟가락이 파이프가 되어 음식을 가두는 것이다.

개체는 세포를 가두는 디지털 파이프다. 종은 개체를 가두는 디지털 파이프다. 생태계는 종을 가두는 파이프다. 그러므로 종이 특별히 진화의 기준이 될 이유는 없다. 먹이≫세포≫개체≫종≫생태계의 차례로 디지털 파이프가 된다.

이러한 전개의 상위단계가 바깥에서 칼을 받아주는 도마 역할을 해주는 것이다. 최초 원핵생물에서 진핵생물로 진화할 때 하나의 세포가 다른 세포 내부로 침투하면서 그 다른 세포를 칼을 받아주는 도마로 이용한 것이다.

원래 모든 종은 암컷이다. 진화는 암컷의 낳음을 기준으로 일어난다. 단지 그 칼을 받아주는 도마가 필요하기 때문에 종은 수컷을 만들었다. 정자와 난자의 수정은 그 도마를 외부에서 가져오는 것이다.

모든 종은 정자와 난자의 수정이라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전환과정을 반복한다. 특히 식물은 생장점이라는 도마를 가지의 끝부분으로 계속 밀고 다닌다. 생장점은 외부환경을 이용하여 아날로그 상태를 성립시킨다.

● 생명은 생장의 일을 한다.

● 생장은 디지털 파이프를 성립시켜 반복작업을 한다.

● 외부와 먹이로 소통하는 입력부분은 디지털화 될 수 없다.

● 아날로그 구조는 일을 받아주는 도마 역할을 외부에 의존한다.

● 그 외부를 주변에 잡아두기 위해서는 그 외부의 외부가 또한 필요하다.

종은 먹이와 소통한다. 먹이는 바깥에 있다. 바깥을 향해 열려야 한다. 불완전하다. 이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그 바깥의 바깥을 두어야 한다. 그 바깥의 바깥의 바깥이 필요하다. 이런 식으로 계속가면 진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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