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을 얻다

초등학교 3학년이다. 선생님이 국어사전을 나눠주고 사전찾기 숙제를 낸다. 젖을 찾아보니 유방이었고 유방을 찾아보니 젖이었다. 사과는 사과나무의 열매였고 고양이는 고양이과의 동물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남편이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아내라면 뭔가 제자리에서 뱅뱅 도는 느낌이다. 이건 이상하다. 확실하게 끊어주는 맛이 있어야 한다. 분명하게 끝단이 드러나 보여야 한다.

산은 정상에서 끝나고 동굴은 막장에서 끝난다. 나무는 뿌리에서 끝나고 강은 바다에서 끝난다. 무엇이든 시작과 끝이 분명해야 이야기가 된다. 하나의 단위가 똑 떨어지게 완성되는 맛이 있어야 한다.

국어사전의 기술체계는 잘못된 것이다. 뭔가 허전하다. 텅 비어 있는 느낌이다. 그 빈 곳을 채우고 싶다. 어른이 되면 합리적인 기술체계를 만들어 사전을 바로잡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조금씩 생각을 모았다.

4학년 자연과목이다. 자석에 쇠를 붙이는 실험을 한다. 결과를 발표하는데 아무도 선생님의 마음에 드는 답변을 못한다. 나의 답변은 ‘자석과 쇠 사이에 일정한 힘의 방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실험으로 알아낸 나의 지식이다. 그러나 선생님은 일축했다. 급우 전원이 손바닥을 맞았다. 선생님의 결론은 ‘자석이 쇠를 잡아당긴다’는 것이었다. 황당하다. 3학년 때의 국어사전처럼 이상하다.

‘자석으로 쇠를 당기는 실험’의 결과가 ‘자석이 쇠를 당기는 것’이라면 유방이 젖이고 젖이 유방이라는 사전의 뺑뺑이와 다를 바 없다. 동어반복에 순환의 오류다. 뭔가 허전하다. 동의할 수 없다.

딱 느낌이 왔다. 목숨을 걸어도 좋다는 생각. 갈릴레이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 할 때의 기분. 선생님이 틀렸고 내가 옳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아닌 건 아닌 거다. 나의 길을 찾았다. 끝이 궁금하다. 이 길 끝까지 가보자.

만유인력을 배웠을 때도 충격을 받았다. 사과가 땅에 떨어진다. 이유가 뭐지? 무겁기 때문이다. 그렇게 알고 의심하지 않았다. 내가 거기서 더 의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름이 확 끼쳤다.

자석이 쇠를 당기는 실험의 결과가 자석이 쇠를 당기는 것이라는 선생님의 허무한 가르침과, 사과가 무겁기 때문에 떨어진다는 나의 견해가 뭐가 다르지? 같은 동어반복이다. 역시 텅 빈 느낌. 허전하다.

무겁다? 왜 무거울까? 사과가 떨어지려 하기 때문에 무거운 것이다. 결국, 사과가 떨어지는 이유는 사과가 떨어지려 하기 때문이다? 이건 아니다. 이런 식이라면 만유인력을 발견할 수 없다. 동어반복을 벗어나자.

뭔가 느낌이 왔다. 직관이다. 허공에 떠 있는 느낌. 처음 수영을 배울 때 물속에서 발이 바닥에 닿지 않을 때의 느낌. 그 느낌 놓치지 말아야 한다. 뼈에 새겨 놓아야 한다. 이후 10년 동안 줄곧 생각했다.

‘무겁기 때문이다’와 ‘만유인력 때문이다’의 차이는? ‘무겁다’는 형용사다. 만유인력은 명사다. 명사로 표현되어야 진짜다. 명사는 ‘있는 것’을 나타낸다. ‘있다’고 말할 때의 어떤 뻑적지근한 느낌이 있다.

내가 ‘자석과 쇠 사이에 일정한 힘의 방향성이 있다.’고 했을 때도 ‘있는 것’이다. 비로소 발이 바닥에 닿았다. 지구의 중력이 느껴진다. 밑에서부터 그득하게 차오르는 충일감 느껴진다. 똑 떨어진다는 느낌이다.

동사나 형용사로 표현할 때 허전함이 있고 명사로 표현할 때 벅차오르는 느낌이 있다. 명사는 존재를 나타낸다. 자석이 쇠를 당긴다고 할 때 당긴다는 동사다. 존재가 아니다. 존재가 정답이다.

명사와 동사의 차이. 빛과 그림자의 차이. 물체는 뻑적지근하게 존재하여 있고 그림자는 텅 비어서 없다. 발이 공중에 떠서 허전한 느낌이 들 때 그림자를 좇는 거다. 발이 지면에 닿는 충일감이 느껴져야 한다.

심과 날의 관계다. 심을 잡아야 명사로 표현할 수 있다. 날은 심에 딸려 있다. 동사나 형용사로 표현된다면 날을 잡은 거다. 뒤에서 소맷자락을 잡을 것이 아니라 정면에서 목줄을 움켜잡아야 한다.

‘만유인력’처럼 명사로 표현해야 한다. 자기력 혹은 자기장으로 명명해야 한다. 자석 실험의 결론은 자기장의 존재를 발견하는 것으로 정리되어야 한다. 명사의 존재가 나와주어야 비로소 답이 나온 거다.

안다는 것은 동사를 명사로 만드는 것에 다름 아니다. 핵심을 발췌하여 추상화시켜서 ‘A면 B다’를 충족하는 하나의 방정식으로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으로 사전의 기술체계를 바로잡을 수 있다. 유레카다.

만유는 주어+동사다. 주어에 주목하면 동사로 표현되고 동어반복의 오류에 빠진다. 뒤집으면 보인다. 동사에 주목하면 관계가 보인다. 관계는 추상적 메커니즘이고 명사로 표현된다. 메커니즘을 잡아채야 한다.

바람이 불다. ‘불다’를 명사로 바꾸면 ‘불음’이 된다. 불음=바람이다. 바람에 주목하면 불다로 끝나서 뒤가 허전하지만 불다에 주목하면 주어인 바람 곧, 밀도차, 기압의 존재가 발견된다. 뻑적지근하다.  

입으로 바람을 불어본다. 입속이 바깥보다 밀도가 높다. 기압의 차이에 의해 공기가 특정 경로로 이동한다는 사실이 규명된다. 동역학적 메커니즘의 발견이다. ‘A면 B다’를 충족하는 방정식 확립이다.  

시선을 어디에다 둘 것인가. 대부분의 사람은 전제에 대하여 진술, 주어에 대하여 술어, 명사에 대하여 동사를 따라가는데 나는 이를 뒤집어 보았다. 그랬더니 메커니즘 구조가 드러나 보였다.

이후 나의 모든 지혜는 이 하나의 아이디어에서 나왔다. 하나의 패턴을 지난 수십 년간 무수히 써먹었다. 고백하자면 나는 아직도 허전한 느낌과 뻑적지근한 느낌의 차이로 직관하여 판단한다.

무릇 철학이나 과학이란 것은 동사로 포착된 자연의 사실에서 추상성을 부여하여 메커니즘을 규명하고 명사화하는 과정이다. 명사를 만드는 데 성공하면 지식 하나가 확립된 것이다.

명사는 동사를 거느려서 체계를 성립시키고 전제와 진술로 구조화되며 명제와 담론으로 발전하는 씨앗이 되기 때문이다. 모든 움직이는 것에는 메커니즘이 숨어 있다. 이를 규명하여 명명하는 것이 과학이다.

사랑이나 자유나 깨달음이나 진리나 역사나 문명이나 다 마찬가지다. 이름붙여준 것이다. 미나 추나 선이나 악이나 도나 덕이나 마찬가지다. 들여다보면 그 안에 메커니즘이 숨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메커니즘은 집과 같다. 그 안에 방이 딸려 있다. 가장과 같다. 식구들이 딸려 있다. 그렇게 집을 찾고 가장을 찾고 주소를 찾은 것이 개념이다. 개념은 존재의 주소다. 철학한다는 것은 개념을 잡는다는 거다.

개념은 또 다른 개념과 만나 짝을 짓는다. 미추로 짝짓고, 선악으로 짝짓고, 도덕으로 짝짓는다. 그렇게 구조로 얽혀 점차 가지를 쳐 나간다. 심에서 날로 뻗어나간다. 비로소 세상은 크게 이루어졌다.

4학년 때다. 과학경시대회에 나갈 후보를 선발한다고 해서 초등학교 1학년 자연과목을 공부하게 된 일이 있었다. 후보로 선발되지 못했지만 그때 물질, 물체, 물상, 물리 등의 기초개념을 다시 배우게 되었다.  

물질이란 무엇인가? 물체란? 물리란? 물상이란? 물건이란? 배운 기억이 없다. 충격을 받았다. 물질과 물체가 과학의 출발점인데 물질이 뭐고 물체가 뭔지 모르면서 과학자가 되겠다고 꿈꾼다면 터무니없다.

산을 오르면 정상을 밟아야 하고 강을 내려가면 바다에 닿아야 하고 동굴을 탐사하면 막장을 찍어야 한다. 출발점과 종결점을 확보해야 한다. 그래야지만 비로소 그것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 터이다.

중요한 것은 끝단을 얻는 문제다. 산의 정상, 동굴의 막장, 강의 바다를 찾아야만 안심이 된다. 그런데 학문의 시작은 어디이고 끝은 어디인가? 시작도 끝도 모호하다. 허공에 떠서 흘러다닌다. 발이 허공에 떴다.

지구의 끝은 북극도 남극도 아닌 지구 중심이다. 만유인력이 지구 상의 모든 물체들을 지구중심을 향해 줄 세운다. 그렇다면 학문의 만유인력은? 모든 별들은 북극성을 중심으로 운행한다. 학문의 북극성은?

린네의 분류법이 힌트다. 그런데 왜 7단계지? 이유가 없다. 린네의 분류법 역시 발이 허공에 떠 있다. 그렇다면? 답은 나왔다. 분류학이 답이다. 분류체계가 잘못되어 문제가 생겼으므로 분류를 바로잡으면 된다.

학문은 인간의 경험에 체계를 부여한 것이다. 학문이 무당의 주술이나 종교의 경전과 구분되는 점은 경전이나 주술이 특정인의 개인작업인 데 비해 학문은 인류의 공동작업이라는 점이다.

공동작업을 위해서는 줄기와 가지가 구분되어야 한다. 스승이 토대를 놓고 중흥조가 기둥을 세우면 후학들이 논문과 리뷰로 가지에 가지를 쳐서 지붕을 완성한다. 체계있는 분류이론에 의해 가능하다.

도서관을 찾았다. 제대로 된 분류학 이론은 없더라. 학문이 탄생하고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강단 한계의 분류법은 공자의 육예(六藝)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시적인 분류이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더라.

린네가 생물을 분류했으므로 나는 무생물을 분류하기로 했다. 린네가 생물의 진화경로에서 7단계의 구분지를 얻었듯이 나는 물질의 구성원리에서 구분지를 얻어 분류에 착수하기로 하였다.

생물이 원핵생물에서 진핵생물로, 무척추동물에서 척추동물로 진화한 경로를 모방하여 물질이 한 점에서 선으로, 각으로, 입체로 성장하여 존재 자체를 구축하는 경로를 찾아내자는 것이다.

물리, 물질, 물상, 물건, 물체 등의 개념들을 수집할 수 있었다. 린네식으로 분류하여 내 책상 위의 연필에 도달하는데 많은 단계가 있었다. 물리가 물성을 낳고 물성이 물질을 낳는 식이다.

물리≫물성≫물질≫물상≫물체●사물≫물건≫기물≫물품≫상품●문구류≫필기구류≫필통≫연필들≫특정연필의 전개를 관찰하던 중 일정한 패턴이 주기를 가지고 반복되고 있음을 알았다. 중간에 끊어주는 ●가 있다.

린네의 7단계 분류에 아종을 추가하면 8단계다. 동물이면서 식물인 것이 있다는데 이를 더하면 9단계다. 곤란하다. 산이 정상에서 끝나고 동굴이 막장에서 끝나듯이 분명하게 끝단을 드러내야 한다. 어떻게?

어떤 학자가 이제마의 사상의설을 발전시켜 8상, 16상으로 확대하였다고 한다. 곤란하다. 뒤이어 32상, 64상이 나오지 말라는 법 없다. 주역의 8괘, 64괘도 비슷하다. 끝단을 드러내지 못하면 가짜다.

석가의 12연기법도 일정한 패턴의 반복이 있어서 대략 3개의 그룹으로 나뉜다. 12연기는 노사(老死)에서 끝난다. 왜 노사에서 끝나지? 죽었으니 끝이라는 건가? 이상하다. 발밑이 허전하다.

피천득의 수필 인연에서 아이디어를 얻는다. 인연이 뭐지? 인연 개념은 인과율과 같다. 인(因)은 원인이고 연(緣)은 그 원인이 작동하게 하는 조건이다. 기(起)는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결과를 촉발한다.

거기에 결과를 더하면 인≫연≫기≫과의 4단계 인과법칙이 성립한다. 확실히 석가의 인연법 혹은 연기법은 서구 논리학의 인과율을 한 단계 더 심화 발전시킬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헤겔의 변증법에서 아이디어를 빌린다. 정반합의 3단구조는 인≫연≫기≫과의 4단구조와 비슷하다. 그런데 선이 아니라 각이다. 인과율이 종적인 시간순서인 데 비해 정과 반은 횡적인 공간의 대칭이다.

시간의 인과율에서 공간의 인과율로 바꾼다. 비로소 산의 정상이 눈에 들어온다. 산을 오르는 과정은 수직 ↑다. 정상에 서면 수평선 ↔가 펼쳐진다. 수직은 수평을 만나 끝단을 이룬다. 평형계 ┳의 성립이다.

강은 종으로 흐르지만 바다에 이르면 횡으로 펼쳐진다. 동굴은 종으로 진행하지만 막장은 횡으로 가로막는다. 모든 종은 횡으로 막히고 모든 수직은 수평에 이르러 끝난다. 그렇게 완성된다.

건물은 대지의 ↔에 중력의 ↑를 복제하여 기둥의 ↑로 일어서고 지붕의 ↔로 마감된다. 지구의 중력과 대지가 ┻꼴을 이루었으므로 건물은 이를 복제하여 대칭을 이루니 ┳로 완성된다.

산은 ┻고 바다는 ┳다. 둘이 만나 ┣┫로 대칭되면 1단위 완성이다. 왜 그 지점에서 끝나는가? 복제했기 때문이다. 원본이 산 ┻이므로 이를 복제한 바다 ┳로 대칭되어 끝난다. 그렇게 짝지어 세팅된다.  

하늘과 땅, 음과 양, 여자와 남자, 산과 바다, 밤과 낮은 짝을 지어 쌍을 이룬다. ┻와 ┳로 짝짓고 凹와 凸로 짝짓는다. 1.2.3.4...로 펼쳐지는 무한전개의 미로에 빠지지 않고 확실히 세팅해준다.

세상 모든 존재는 복제된 존재이며 복제본은 원본을 바라보고 대칭을 이루어야 하므로 구조론은 5로 끝난다. ┣┣┣로 반복되지 않는다. ┣┫로 마주 보기 때문에 1단위를 이루어 매조지 된다.

차원은 0에서 4차원까지 있다. 5차원 이상은 없다. 차원은 자연을 복제하는데 자연이 ┻로 끝나므로 차원은 ┳로 끝난다. 산은 정상에서 끝난다. 산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지구 중심에서 시작된다.

0차원 점이 산의 정상이면 4차원 밀도는 지구 중심이다. 거기서 끝난다. 존재는 심과 날이다. 뾰족한 산이 날이면 지구 중심이 심이다. 자동차는 엔진에서 시작되어 바퀴에서 끝난다. 메커니즘이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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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는 순서와 방향의 얽힘이다. 시간은 순서, 공간은 방향이다. 기존의 인과율 개념은 시간의 순서에 주목할 뿐 공간의 방향성을 반영하지 못한다. 구조론은 인과율을 공간개념으로 해석한 것이다.

시간의 순서는 쭉 이어져서 끝단을 알 수 없다. 오늘 다음에 내일, 모레, 글피로 끝없이 이어진다. 하루는 0시에서 시작되어 24시로 끝나지만 임의로 정한 것이다. 0시가 시작점이라는 필연적인 근거는 없다.

그러나 공간으로 보면 태양과 나의 거리가 가까운 시각이 있다. 마주 보고 →←의 대칭을 이루는 시점이 있다. 시간은 영원히 순환될 뿐이지만 공간은 시작과 끝이 있다. 공간의 짝짓기 법칙 때문이다.

구조론의 5는 인과율에 공간의 방향성을 반영한 것이다. 구조는 5로 완결된다. 왜 5인가? 5에서 세팅되기 때문이다. 원인과 결과, 시작과 끝, 작용 반작용으로 세팅되고 해체되며 끝단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구조는 왜 5로 끝나는가? 복제되기 때문이다. 한 알의 씨앗은 싹으로 자라나 꽃과 열매로 완성된다. 끝난다. 왜 끝나는가? 씨앗 속에 배아가 있다. 꽃의 한살이는 그 씨앗 속에 세팅된 배아를 복제한 것이기 때문이다.

배아에서 세팅이 완성되어 있으므로 그 배아를 복제한 꽃의 한살이는 거기서 끝난다. 왜 강은 바다에서 끝나는가? 강의 깊음은 산의 높음을 복제하기 때문이다. 산과 강이 마주 보고 ┣┫를 이루기 때문이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 마주 보고 대칭을 이룬다. 환자가 감기에 걸렸다. 원인은 바이러스의 침투다. 결과는 감기의 발병이다. 이때 감기의 발병 ┫는 바이러스의 침투 ┣를 복제한다.

원인이 작용이면 결과는 반작용이다. 작용반작용 법칙에 따라 작용과 반작용은 대칭된다. 반작용은 작용을 복제한다. 결과는 원인을 복제한다. 산이 원인이면 강은 결과다. 강의 깊음은 산의 높음을 복제한다.

작용 ┣는 열렸고 반작용 ┫는 닫혔다. 닫혀서 끝난다. 구조가 5인 이유는 작용과 반작용, 원인과 결과, 열림과 닫힘이 ┣┫로 마주 보고 ●로 대칭되어 ┣●┫를 이루기 때문이다. 구조체 (┳)로 나타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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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이었다. 김성동의 소설 만다라를 읽는다. ‘병 안의 새’ 화두가 소개된다. 유리병 속에 작은 새 한 마리 갇혀 있다. 병의 입구는 좁다. 새는 나올 수 없다. 병에 손을 대지 않고 새를 꺼낼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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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불가능하다. 그러나 물과 햇볕이 단단한 씨앗 속에서 뿌리와 싹과 잎과 꽃을 꺼내기는 쉽다. 부르면 나온다. 물이 부르면 뿌리가 나오고, 햇볕이 부르면 잎이 나오고, 바람이 부르면 꽃이 나온다.

안과 밖이 있다. 밖에서 부르면 안에서 나온다. 태초에 우주의 빅뱅도 이와 다르지 않았으리라. 밖에서 부르는 인식론과 안에서 나오는 존재론이 마주보고 대칭되어 ┣●┫를 이루니 세계는 완전하다.  

중요한 것은 작은 씨앗 속에 배아의 형태로 미래의 나무가 완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무는 자라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씨앗 속에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을 다치지 않고 무사히 꺼낼 때 완성되는 것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뜰 앞의 한 떨기 꽃은 복제된 것이고 씨앗 속의 배아가 원본이다. 원본은 완전하다. 작은 씨앗 속에 우주가 갖추어져 있다. 뿌리도 싹도 잎도 꽃도 소스의 형태로 예비되어 작은 만다라를 이루었다.

우리는 배우고 익혀서 점차 완성되어 간다고 믿지만 착각이다. 나의 내부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는 본성을 다치지 않고 잘 꺼내기만 해도 성공이다. 깨달음이다. 밖에서 구하지 않고 안에서 꺼내기다.

우리는 건물이 1층부터 차곡차곡 쌓여서 완성된다고 믿지만 틀렸다. 구조로 보면 냇가의 모래 두꺼비집에도 있을 것은 다 있다. 입력≫저장≫제어≫연산≫출력이 갖추어져 있다. 전부 세팅되어 있다.

한 문명에도 그것이 있고, 한 나라에도 그것이 있고, 한 도시에도 있고, 한 채의 집에도 작은 씨앗 속에도 있다. 도처에 있다. 컵에도 있고 주전자에도 있다. 어디라도 있다. 끊임없이 복제되고 있다.

세상 모든 것이 제각기 만다라를 갖추고 그 안에서 훨훨 날고 있다. 각자의 우주를 이루고 완성되어 있다. 구태여 바깥세계로 출타하고픈 욕망을 가질 필요조차도 없이. 나는 만족한다. 스물네 살 무렵 여기까지 정리했다.  

깨달음과 구조론

어떻게 구조에 다가설 것인가이다. 구조론은 깨달음과 관계가 있다. 구조는 내밀한 것이다. 겉에서는 구조가 보이지 않는다. 구조는 체험에 의해서만 직관되고 깨달음에 의해서만 통찰된다.

구조는 작동해야 모습을 드러낸다. 시스템이 멈추어 있을 때는 구조가 파악되지 않는다. 시스템을 작동시켜 에너지 순환 1 사이클의 전체과정에 참여해 본 경험에서 구조를 포착하는 직관이 얻어진다.

직관을 끌어내는 것은 깨달음에 의한 통찰이다. 어떻게 깨달을 것인가다. 세상과 나 사이의 관계설정에서 비롯된다. 깨달음은 세상과 나와의 실존적 대면에서 내가 포지션의 우위에 서는 것이다.

입각(立脚)하여 바라보는 지점이 있다. 세태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체제에 순응할 것인가 아니면 각을 세우고 저항하여 나의 입지를 확보할 것인가이다. 주인의 관점이 있고 손님의 관점이 있다.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의 관점이 있고, 남의 게임에 박수치는 관객의 관점도 있다. 사태에 개입하여 판정하는 심판의 관점도 있고, 물러나 발을 빼고 배후에서 드러나지 않게 조정하는 감독의 관점도 있다.  

먼저 관점을 얻어야 한다. 어려서다. 세상을 바라보는 특별한 시선을 얻었다. 기법을 개발했는데 그것은 말끝에다 ‘라고 한다.’를 붙이는 것이다. ‘1+1은 2다.’와 ‘1+1의 값을 2라고 한다.’는 느낌이 다르다.

찰흙 한 덩이에다 한 덩이를 더하면 역시 하나의 큰 덩어리가 되는데 왜 1+1은 2인가? ‘라고 한다.’를 붙이면 ‘1+1은 2라고 한다.’가 된다. 찰흙을 더하여 얻은 큰 덩어리를 2라고 하기로 우리가 약속한 것이다.

이때 숨은 구조가 드러난다. 존재의 대칭성이 판명된다. 감추어져 있던 사회의 약속이 드러난다. 관계가 드러나고 게임의 룰이 드러난다. 그것이 이른바 ‘논리’라는 것이다. 깨달음은 논리의 획득이다.

논리는 사실에 대해 논리다. 어떤 보이는 사실이 있다면 그 배후에 의미≫가치≫개념≫원리가 숨어 있다. 논리는 표면의 사실에서 이면에 숨어 작동하는 의미로, 가치로, 개념으로, 원리로 상승해 가는 것이다.

사실은 항상 본인의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 과연 1인지 2인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실수로 잘못 볼 수 있다. 언제라도 의심해야 한다. 그러나 논리는 다르다.

논리의 세계는 동시성이 작동한다. 일치와 연동의 법칙에 따라 1의 값이 결정될 때 2의 값도 동시에 결정된다. 사실은 매번 확인해야 하지만 논리는 검증된 틀을 한번 만들어 놓고 반복적으로 써먹는다.

보이지 않는 이면에서 작동하는 논리구조를 통찰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언어라는 시스템의 작동에서 나는 그 논리의 작동현장을 포착했다. 어떤 진술이든 뒤에 ‘라고 한다.’를 붙여본 것이다.

그러자 구조가 드러났다. 뒤집어 보는 효과가 있다. 두 번 생각하는 효과다. 모든 의문이 풀렸다. 거꾸로 생각하기다. 1 더하기 1이 2가 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값 2의 의미를 1 더하기 1로 약속한 것이다.

왜 1+1은 2인가? 그렇게 약속했기 때문이다. ‘사실’은 내가 직접 확인해야 하므로 오류가 있을 수 있지만 사회의 약속은 항상 상대가 있고 또 증인이 될 제 3자가 있기 때문에 오류가 없다.

왜냐하면, 논리에 오류가 있을 경우 약속지키기는 실패로 되기 때문이다. 언어는 약속이다.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언어를 이용한 의사소통은 실패다. 언어 시스템은 작동되지 않는다. 그렇게 검증된다.

약속이 지켜져서 의사소통에 성공했다는 사실 자체로서 언어라는 이름의 약속과 그 약속의 신뢰를 담보하는 논리 시스템은 검증된 것이다. 그것이 논리의 힘이다. 구조 속에 논리가 있다.

거북이와 토끼의 경주 이야기가 계기가 되었다. 과연 거북이 토끼를 이긴 것일까? 토끼가 거북보다 빠르다는 사실이 변하지 않을진대 거북의 일방적인 승리선언은 허무할 뿐이다. 납득할 수 없다.

내게는 큰 화두로 되어 이후 골똘히 생각했다. ‘라고 한다.’를 적용하여 ‘거북이 이긴 걸로 한다.’로 바꾸어보니 납득이 되었다. 그렇다. 그것은 누가 빠르냐는 사실판단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약속의 문제였던 것이다.

거북의 승리 의미는 사회가 거북을 상찬하기로 약속한 데 있다. 승자에게 보상이 주어진다. 누가 빠르냐는 사실판단을 버리고 누가 보상받느냐는 게임의 룰로 관점을 바꾸니 사실의 배후에 가려져 있던 의미가 드러났다.

모든 명제 뒤에 ‘라고 한다.’를 붙여보았다. 구조가 드러났다. 사실의 배후에 숨은 의미가 드러나고, 의미의 배후에서 가치가 드러나고, 개념이 드러나고, 원리가 드러났다. 세상 모든 의문이 한꺼번에 풀렸다.

누구와 논쟁해도 이길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아이들이 1층에서 멱살잡이로 다투며 서로 교착되어 씩씩거리고 있는데 2층 높은 곳에서 훤히 내려다보며 낄낄대는 느낌이다. 통쾌했다.

논리는 약속이며 상호성을 가진다. 그 상호성으로 묶어버린다. 아방과 타방, 원인과 결과, 작용과 반작용을 짝지어 연동시켜 동시에 확정한다. 그리하여 처음과 끝이 맞아떨어지게 하는 것이다.

논리는 구조의 내적 정합성을 만족시킨다. 무엇인가? 자연을 관찰하여 데이터를 얻으면 그것이 과연 그러한지 의심이 든다. 1+1은 3인데 혹시라도 내가 실수로 2로 잘못 본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든다.

게임은 의심될 수 없다. 명제의 일방성과 달리 게임은 상호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게임은 항상 상대가 있다. 내가 이렇게 나가면 상대가 이렇게 응수한다는 것이 있다. 상대와 나 사이에 오가는 것이 있다.

명제는 죽어 있는데 반해 게임은 살아있다. 게임은 시간상에서 진행하며 오류가 있을 경우 즉시 스톱된다. 그러므로 게임은 오류가 즉시 확인된다. 깨달음은 죽은 명제를 산 게임으로 변환시킨다.

게임은 자동차와 같다. 자동차가 도로 위를 달리고 있다면 고장 나지 않았다는 확실한 증거다. 게임은 처음과 끝이 연동된다. 처음 1을 결정할 때 2와 3의 값도 연동되어 동시에 결정된다.

그 즉각적 반응이 자동차의 질주와 같다. 구조는 직관과 통찰로 접근되며 그것은 죽은 명제를 산 게임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며, ‘라고 한다.’를 적용하여 사실을 의미≫가치≫개념≫원리로 상승시킴으로써 가능하다.

언어는 전제와 진술, 주어와 술어, 명사와 동사의 연속적 대칭구조로 전개된다. 그 안에 게임의 룰이 있다. 구조가 있다. 완전성이 숨어 있다. 그러므로 만약 오류가 있다면 의사소통에 실패하게 된다.

‘라고 한다.’를 붙인다는 것은 문장 뒤에 동사 하나를 더 붙여서 진술을 객관화한다는 것이다. 의사소통을 현재진행형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멈춰 있는 자동차에 시동을 걸어 움직여버리는 것이다.

멈춰 있는 자동차는 오류의 가능성이 있다. 주차된 차를 보고 집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노숙자가 폐차를 집으로 쓰고 있었던 거다. 그렇다면 자동차가 아니라 집이다. 움직여 보면 집인지 자동차인지 확정된다.

자라는 나무는 조화가 아니고 움직이는 개는 석상이 아니다. 멈춘 것은 속일 수 있지만 움직이는 것은 속일 수 없다. 움직일 때 주변과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관계가 증인이 되기 때문이다. 관계로 보면 보인다.   

흔히 ‘정의가 승리한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불의가 승리할 수도 있다. ‘라고 한다.’를 붙여 보자. 정의의 승리에 한해 승리를 인정한다는 게임의 룰을 제안함이다. 만약 불의가 승리하면? 인정하지 않는다.

‘정의가 승리한다.’는 말은 ‘정의가 승리해야 싸움이 끝난다.’는 의미다. 정의가 승리할 때까지 싸움 멈추지 말자는 약속이다. 이제 수긍이 된다. 정의가 승리한다. 왜? 정의가 승리할 때까지 우리는 포기하지 않으니까.

원리≫개념≫가치≫의미≫사실이 있다. 우리는 말단부인 사실의 세계에 살고 있다. 깨달음은 거기서 한 단계 상승하여 의미로 나아가는 것이다. 더 나아가 가치로, 개념으로, 원리로 계속 상승하는 것이다.

언어는 전제와 진술, 주어와 술어, 명사와 동사의 연속적인 대칭구조다. ‘라고 한다.’ 붙이기는 동사에 대해 그 이전단계인 명사를 공략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주어를 공략하고 더 나아가 전제를 공략하는 것이다.

사실은 드러난 것이고, 의미는 배후에서 잇는 것이고, 가치는 상대와 짝짓는 것이고, 개념은 전체를 하나의 축에 통합하는 것이다. 원리는 그 모든 하부구조를 갖추고 세팅을 완성한 다음 외부세계와 소통하는 것이다.

오류에 빠지는 이유는 전제를 검토하지 않고 진술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1+1은 2인 이유는 2의 값을 1+1로 하기로 전제했기 때문이다. 룰이 전제다. 명사를 보고 주어를 보고 전제를 보면 보인다.

논쟁이 벌어지면 논자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옳다.’ 이때 나는 ‘아냐. 네가 틀렸고 내가 옳아’ 하고 반격하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말한다. “그래! 너는 여기서 내가 옳다고 말하는 역할을 맡은 거야.”

뭐든 게임으로 만든다. 반론하는 대신 ‘그래 넌 여당이니까 네 입장에서는 그렇게 말하는 게 맞지.’ ‘그래 넌 남편이니까 그렇게 말하는 역할이지.’ 거꾸로 상대방의 주장을 합리화시켜주며 숨은 공식을 드러낸다.

구조가 드러난다. 상대방이 정상에 서 있는지 아니면 기슭에 서 있는지 혹은 주인의 입장에 서 있는지 또는 손님의 입장에 서 있는지가 드러난다. 각자의 입각한 포지션이 드러나면 논쟁은 불필요해진다.

선문답은 포지셔닝 게임이다. 조주가 ‘차나 한 잔 들게(喫茶去)’라고 하면 무슨 뜻인지 의미가 알쏭달쏭하지만 ‘조주는 차나 한잔 들게라고 말하네.’라고 하면 눈앞에 한 폭의 그림이 펼쳐진다.

조주가 상석에 앉아 있고 맞은편에 손님이 앉는다. 그 사이에 차 한 잔이 놓여진다. 서로의 역할이 드러난다. 주인은 권하고 손님은 받아들인다. 조주와 손님 사이에 성립한 게임의 룰이 관측된다.

거기에 포착해야 할 대칭구조의 완전성이 있다. 완전성의 직관이 깨달음이다. 영화감독 조주는 누가 어떤 의도로 방문하더라도 순간에 그 한 폭의 그림을 완성시켜 내기에 성공하고 있다. 당신의 눈으로 찍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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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은 세상을 바라보는 틀 얻기다. 그것은 일체의 포지션에 있어서 우위에 서는 것이다. 행복에 있어서도, 사랑에 있어서도, 소통에 있어서도, 자유에 있어서도, 낳음에 있어서도 포지션의 우위에 설 수 있어야 한다.

‘나는 행복해’ 하고 말들은 하지만 그 행복의 노예가 되기 십상이다. 행복의 필요충분조건 안에 갇혀서 포로가 된 신세다. 그 조건의 굴레를 깨부수고 자기 힘으로 행복의 길을 개척할 수 있어야 진짜다.

사랑에 있어서도 우위에 설 수 있어야 한다. 수동적으로 사랑받기 원한다면 그것은 사랑의 소비에 불과하다. 능동적으로 너와 나 사이의 관계를 건축하여 그 사랑을 밀도를 높여가는 것이어야 한다.

‘나는 자유롭다.’고 선언하면 이미 자유에 종속된 몸이다. 자유의 필요충분조건에 갇히어 예속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나아가 세상을 향해 싸움을 걸며 그 자유의 길을 개척해야 진짜다.

포지션의 우위란 2층 높은 곳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입장이 되는 것이다. 정상에서 전모를 바라보기. 그럴 때 상대가 어떻게 나오든 한 차원 위에서 내게 유리한 방향으로 상황을 조정할 수 있다.

인생과 맞설 때도 그러하고, 사랑과 맞설 때도 그러하고, 운명과 맞설 때도 그러하고, 역사와 맞설 때도 그러하고, 세태와 맞설 때도 그러하고, 신과 대면할 때도 그러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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