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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4153 vote 0 2008.12.29 (15:39:53)

 상식의 오류들

구조론이 중요한 이유는 상식의 오류를 정확히 짚어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오판을 저지른다. 오류가 없다면 오히려 이상하다. 그러므로 항상 검증되어야 한다. 이에 거대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두 번 생각해야 답이 보인다. 당연히 옳을 것이라는 믿음은 당연히 틀렸다. 반드시 의심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때 판단내용이 틀린 것이 아니라 판단의 전제가 원초적으로 틀렸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인식내용이 틀린 것이 아니라 인식의 틀이 틀렸다. 눈이 삔 것이 아니라 그 눈이 애초에 엉뚱한 방향을 보았다. 충격받아야 한다. 처절하게 반성해야 한다. 상시적인 오류가능성을 인정해야 한다.

예외적으로 틀리는 것이 아니라 항상 틀린다는 점이 중요하다. 돼지셈과 같다. 돼지가 자신은 빼고 셈하듯이 보는 자신의 포지션은 빼고 바라보므로 처음 시도하는 일은 검증이 없을 경우 거의 틀린다.

바꾸어야 한다. 상식의 이름으로 굳어진 고정관념과 편견과 타성과 무지에서 벗어나야 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의 틀을 재구축해야 한다. 그 틀은 선형사고의 2분법에서 벗어나는 입체적 모형의 틀이어야 한다.

돼지 불을 까는 요령은 주둥이를 말뚝에 묶어두는 것이다. 돼지는 앞에서 공격받았으므로 뒤로 물러나려 한다. 뒤로 몸을 뻗댄다. 농부는 뒤에서 불을 까버린다. 항상 이런 식이다. 앞에서 바람 잡고 있다면 타겟은 뒤다.

우리는 야바위꾼이 빠른 손놀림으로 속인다고 여기지만 천만에! 야바위꾼은 마술사가 쓰는 도구를 쓴다. 장치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야바위꾼이 장치가 숨겨진 도구를 이용하여 속인다고 알아챈다. 천만에!

야바위는 손동작으로 속이지 않고 장치로도 속이지 않는다. 야바위는 바람잡이를 동원하여 행인에게 속임수의 수법을 넌지시 일러준다. 만약 당신이 야바위꾼이 쓰는 수법을 알아냈다고 믿었다면 그게 속은 거다.

어떤 사람이 야바위꾼에게 걸려 돈을 잃고 울상짓고 있다면 바로 그 사람이 그 패거리의 행동대장이다. 이런 식이다. 당신은 어떤 경우에도 속는다. 야바위꾼은 모든 경우의 수에 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상식은 이토록 허술하다. 불을 떼이는 돼지와 같다. 상식적 판단이 틀리므로 그 상식 위에 건설된 시민의 민주주의는 위태롭다. 상식적인 판단으로 투표했는데 결과가 이명박이다. 집단의 오판이다.

중세의 마녀사냥 같은 집단적 사고의 오류는 늘 있어왔다. 양떼는 숫자만 많으면 안심한다. 다수가 가는 길은 옳다고 믿는다. 그러나 역사는 다수가 저지른 잘못을 소수가 수습하는 시행착오와 오류시정의 연속이다.

인간은 원래 속도록 세팅되어 있다. 구조를 꿰뚫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전모를 보는 눈을 얻어야 한다. 1 사이클 전체과정을 경험해야 한다. 뇌 속에 입체적 모형을 세팅해야 한다. 두 번 생각하면 보인다. 깨달음이다.

● 부분의 합은 전체보다 작다

부분의 합은 전체와 같다는 판단은 상식이다. 그러나 그것은 숫자 0의 존재를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0은 포지션이다. 자리다. 자릿값이 있다. 포지션의 존재를 감안하면 부분의 합은 전체보다 작다.

시골다방의 배달커피가 홀손님보다 더 가격이 싸다. 이유가 있다. 역전다방은 역 앞이라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자릿값이 매겨져 있다. 배달커피는 그 자리를 차지하지 않으므로 싸다.

신발을 잊은 채 출근하는 사람은 없다. 신발을 신지 않고는 발이 아파서 출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다. 10층 건물을 짓는 사람은 1층부터 짓는다. 10층을 먼저 짓고 9층을 짓는 실수를 저지르는 사람은 없다.

신발을 잊고 출근할 수 없듯이 그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지구 상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은 지구 중력의 도움을 받기 때문에 우리는 그 중력이 디폴트값으로 제공하는 포지션의 존재를 망각한다.

자릿값을 잊고 산다. 그래서 0은 뒤늦게 발견되었다. 그런데 만약 인간이 땅속에서 산다면 어떨까? 사과 한 개를 안으로 들여오기 위해서는 사과 한 개를 놓아둘 빈 공간을 먼저 확보해야 한다.

만원전철과 같다. 안쪽의 승객이 내리기 위해서는 문앞에 있는 사람이 잠시 내려주어야 한다.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한 사람이 밖으로 빠져주어야 한다. 그 경우 0의 존재를 망각할 수 없다.

그렇다. 지구 표면에서는 중력이 포지션 문제를 해결해준다. 공기의 고마움을 모르듯이 포지션의 고마움을 잊어버린다. 0의 가치를 잊어버린다. 인간은 일상적으로 오류를 저지르지만 그 오류는 흔히 은폐된다.

자동차의 부품은 3만 개에 달한다. 자동차 부품 3만여 개의 가치는 완성차 한 대와 같을까? 그렇지 않다. 부품들을 모두 모아도 뭔가 하나가 빠졌다. 부품들은 자기 포지션을 가진다. 아뿔싸! 포지션을 빠뜨렸다.

자동차는 3만 개의 부품+3만 개의 포지션으로 이루어져 있다. 합이 6만이다. 부품의 합+부품의 위치+부품의 결합순서+부품의 결합방향+부품의 결합에너지라야 비로소 전체가 이룩된다. 한 대의 자동차가 완성된다.

포지션 0을 포착하지 못하므로 우리의 상식은 틀렸다. 그래도 사는데 크게 불편하지는 않지만 그 투박함으로 우주에 로켓을 쏘아 보낼 수는 없다. 우주로 가려면 정밀해야 한다. 반드시 0을 고려해야 한다.

언어가 다른 한국인과 일본인이 무인도에 표류한다면 어떨까? 의사소통에 무리가 없다. 배가 고프기 때문에 손짓만 해도 ‘먹거리를 나누자’는 의미를 알아듣는다. 궁하면 통하기 때문에 포지션의 중요성을 망각한다.

그러나 예술은 한가롭다. 예술은 궁하지 않다.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에는 흔히 포지션의 오류가 있다. 김홍도의 씨름도에서 오른쪽 맨 아래 인물은 왼손과 오른손이 바뀌어 있다. 한가로우면 실수를 저지른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있다. 소프트웨어는 부품의 포지션이다. 부분의 합이 전체보다 작은 이유는 포지션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한 채의 건물은 건축자재들의 합+설계도다. 완공되고 나면 설계도는 버려진다.

0과 같다. 0은 사라졌을까? 설계도는 사라졌을까? 천만에! 완성된 건물 안에 설계도가 숨어 있다. 포지션들은 설계도에서 슬쩍 걸어나와 건물로 자리를 옮겨갔다. 인간이 꿰뚫어 보지 못할 뿐이다. 그곳에 있다.

● 껍데기가 알맹이보다 중요하다

우리는 흔히 알맹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당연한 상식이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안쪽을 바라보고 있을 때 리더는 홀로 밖을 경계해야 한다. 변화는 항상 밖에서 온다.

모든 변화는 높은 질서에서≫낮은 질서로 이행한다. 밖이 안보다 더 많은 변수와 물려 있다. 밖이 더 높은 질서다. 사건은 항상 밖에서부터 시작되므로 처음에는 밖이 중요하다. 물론 나중에는 안이 중요하게 된다.

알맹이는 껍질에 쌓여 있다. 그 알맹이는 임신의 결과로 존재한다. 임신은 밖에서 촉발된다. 우리가 알맹이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이유는 껍데기가 저 들판에서 수개월 동안 알맹이를 보호하는 역할을 완수했기 때문이다.

껍데기가 이미 중요한 역할을 끝냈기 때문에 임무를 마치고 떠나가는 것이다. 봄부터 가을까지 비와 바람과 곰팡이와 벌레의 공격으로부터 껍데기가 보호했기 때문에 알맹이의 성과가 주어지는 것이다.

형식이 내용을 규정한다. 형식의 전제 없이 알맹이만 빼먹으려 하다가는 실패하게 된다. 형식에 집착해도 안 되지만 형식의 절차는 반드시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알맹이가 중요하다는 상식은 매우 위험하다.

중요한 일일수록 형식이 중요하다. 전쟁에서 형식은 특히 중요하다. 정치에서도 형식은 중요하다. 예술에서도 형식이 중요하다. 어떤 일이든지 처음 시도할 때는 형식이 중요하다. 첫인상이 대세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부터는 형식이 중요하지 않다. 형식은 양식으로 대체된다. 설계도와 같다. 설계도는 복제되고 모방된다. 만약 어떤 사람이 형식을 멀리하고 실질만을 추구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표절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모방에는 형식이 필요하지 않다. 후진국이 선진국을 따라잡는 데는 형식이 필요 없다. 그러나 짧은 글을 쓰더라도 남의 것을 모방하지 않고 순수하게 자신의 창의로 해결하려 한다면 반드시 형식의 고민에 빠지게 된다.    

● 자전거는 달려야 중심을 잡는다.

먼저 중심을 잡고 균형을 잡은 다음에 속도를 내야 한다는 생각이 우리의 상식이다. 틀렸다. 자전거는 속도를 내야 바로 설 수 있다. 팽이는 돌아야 바로 선다. 배는 빠르게 달려야 파도를 헤쳐 나아갈 수 있다.

헤엄치는 사람은 어떻게든 물을 헤쳐야 뜬다. 먼저 자세를 잡아 물에 뜬 다음에 헤엄쳐 전진하려고 하면 실패한다. 먼저 균형을 잡고 난 다음에 속도를 내야 한다는 우리의 당연한 상식은 당연히 틀렸다.

이런 점은 정치에서 잘 관찰된다. 진보냐 보수냐 노선투쟁을 벌여 바른 진로를 결정한 다음 속도를 내려고 하면 출발하지도 못한다. 평화시위냐 강경투쟁이냐 결정한 다음 투쟁하려 하면 시작도 못 해보고 주저앉는다.

방향을 찾은 다음에 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가다보면 세가 모이고 그 기세에 의해서 방향은 저절로 찾아진다. 정치에서는 실천이 중요하다. 행동하지 않은 말발은 사기다. 그리고 그 실천은 물적 토대에 기반을 둔다.

어떤 정치집단이 노선투쟁에 골몰하고 있다면 물적 토대를 잃었다는 증거다. 좌파들이 노선투쟁에 집착하는 이유는 토대와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토대는 인터넷이다. 토대는 창의다. 토대는 미디어다.

자전거도 없이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려고 하니 노선투쟁을 하게 된다. 물도 없는데 헤엄치려고 하니 노선투쟁을 벌이게 된다. 자전거가 토대고 물이 토대다. 이미 자전거를 얻고 물을 확보했다면 길은 저절로 분명하다.

우리가 새로운 도구를 활용하고 끝없이 창의한다면, 새로운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온다면 대세가 가는 방향은 뚜렷하다. 그러나 사전에 방향을 정해놓고 출발하려고 한다면 백날 논쟁만 하다가 시기를 놓치게 된다.

    

● 우주는 총체적 인플레이션이다

우리는 무에서 유가 탄생하지 않는다고 배웠다. 질량보존의 법칙에 따라 에너지의 총량은 증가하거나 감소하지 않는다고 배웠다. 당연한 상식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우주의 탄생은 그 자체로 인플레이션이다.

당연한 상식이 적용되지 않는 지점이 있다. 질량보존의 법칙에 따라 에너지는 늘지도 줄지도 않지만 우주의 총정보량은 순증가한다. 정보는 돌에 화석으로 새겨지고 나무에 나이테로 새겨진다. 그 정보가 늘었다.

깡통을 누르면 찌그러진다. 속부터 구겨져서 나뭇가지 모양의 주름살이 생긴다. 이때 중심과 주변의 차이가 성립한다. 심과 날이 얻어진다. 정보가 생겨난 것이다. 포지션이 생겨난 것이다. 그 포지션은 증가한다.

태초에 우주는 하나의 둥근 알과 같았다. 어떤 이유로 밖에서 압력이 작용했다. 계의 밀도가 높아졌다. 이때 사방에 미치는 힘은 균일하게 작용하지 않는다. 중심이 주변보다 밀도가 높다. 중심으로부터 균열이 시작된다.

지금 우주는 대체로 균일해 졌지만 그것은 정보가 무수히 탄생하여 밀도차를 상쇄시켰기 때문이다. 깡통의 찌그러짐이 중심부의 높은 밀도를 흡수하여 도로 환원시켰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총 정보량이 증가했다.

모든 존재는 점점 늘어난다. 사람이 나이를 먹을수록 기억은 증가한다. 너무 많아져서 통제할 수 없는 수준이 되면 둘로 나눠진다. 새로운 생명이 탄생한다. 우주 전체로는 무언가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자연이 우주탄생의 인플레이션 원리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팍팍하다. 조금의 여유도 없다. 잠시 한눈이라도 팔면 누군가가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다.

자연은 그렇지 않다. 모든 것이 넉넉하다. 우주는 터무니없이 크다. 공간을 무한대로 낭비한다. 별은 너무나 많다. 외계생명체가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의 별에는 생명이 없다. 자원이 낭비되고 있는 것이다.  

지구에는 물이 너무나 많다. 공기도 많다. 햇볕도 넉넉하다. 태양이 매년 지구에 공급하는 에너지의 극소량만 활용해도 지구인의 살림살이는 넉넉해진다. 우리가 그 에너지를 사용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식물은 꽃을 넉넉하게 피운다. 겨울이 되면 많은 잎새들을 아낌없이 버린다. 버리는 김에 화려한 단풍잔치 벌인다. 하늘은 많은 비를 내리지만 대부분은 그냥 바다로 흘러간다. 터무니없이 자원을 낭비하고 있다.   

자연이 이렇듯 풍요로운데도 우리의 삶이 팍팍한 이유는 톱 포지션을 차지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최상위 포지션은 넉넉하지만 한 단계 포지션이 내려갈 때마다 그 넉넉함과 같은 비례로 재량권이 좁아진다.

왕에게 1억이 있다면 귀족에게는 그 절반 혹은 십 분의 1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작 백 분의 1이 주어질 뿐이며, 평민에게는 다시 귀족이 가진 것의 백 분의 1이 주어진다. 노예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톱 포지션을 차지하는 방법은 창의다. 인터넷의 바다는 무한히 넓다. 창의한다면 그 넓은 인터넷을 모두 먹을 수 있다. 그러나 누구 남이 하는 것을 따라하려고 하면 각박해지고 만다. 치열한 경쟁에 내몰린다.

우리는 모든 것이 한정되어 있고 부족하다는 상식에 익숙해 있다. 그것은 우리나라가 그동안 이류국가였기 때문이다. 창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선진국 따라잡기 급급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 마인드 바꿔야 한다.

자연은 넉넉하다. 창의할 수 있다면 우리도 넉넉해질 수 있다. 경쟁의 방법으로는 넉넉해질 수 없다. 남의 것을 빼앗아서는 넉넉해질 수 없다. 오직 창의의 방법으로만이 우리는 자연의 본래와 닮을 수 있다.   

● 양질전환은 없다.

양이 일정한 한계에 도달하면 질적인 비약을 이룬다는 마르크스의 생각이 퍼져 있으나 틀린 상식이다. 닫힌계 안에서 양은 질로 전환되지 않는다. 바다에 물을 아무리 많이 모아도 질의 변화는 없다.

양적변화가 질적변화를 촉발한다는 착각은 닫힌계 개념의 부재로 인한 오류다. 변화는 일정한 범위의 계를 중심으로 일어난다. 계 밖에서 촉발되어 계 안으로 진행된다. 그 영역 안에서 양은 질로 비약하지 않는다.

양질전화의 예로 알려진 사건들은 한 부분에서 이미 일어난 질적 변화가 계 전체에 파급되는 과정이다. 질은 공명된다. 복제된다. 전파된다. 닮아간다. 그 과정은 양질전환처럼 보이지만 착각에 불과하다.  

지구 상에 사람이 둘 뿐이었던 에덴동산에서는 글자가 필요하지 않았다. 아담과 이브 둘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라야 뻔하다. 주로 먹고 싸는 일이다. 언어 없이도 의사소통은 가능하다.

인구가 증가한다. 갈수록 소통은 어려워진다. 언어와 문자가 창안된다. 이때 인구의 양이 늘어났기 때문에 문명의 질적인 비약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인간 내부에 잠재한 역량이 촉발되어 드러났을 뿐이다.

소떼는 아무리 늘어나도 소떼고 쥐떼는 아무리 늘어나도 쥐떼다. 질적인 비약은 일어나지 않는다. 오직 인간만이 질적인 비약을 이룬다. 이는 특별한 것이다. 인간에게는 처음부터 언어와 문자의 가능성이 있었다.

질은 사전에 담보되어 있었다. 그 질의 파급을 촉발시킬 방아쇠가 당겨지지 않았을 뿐이다. 인구증가는 그 방아쇠가 당겨질 확률을 높여준다. 타이밍이 문제였을 뿐 그 확률 또한 사전에 예비되어 있었다.

문명의 진보를 위해서는 양적 증가가 아니라 질적 비약이 필요하다. 그 질의 변화는 확률에 의해 얻어지며 그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다양성뿐이다. 다양성은 계에 동시에 물려 있는 변수의 수다.

하나의 구조체 안에서 중심의 심이 많은 날개를 가질 때 질의 변화는 작동한다. 질의 비약은 창의에서 얻어지고 창의는 다양성에서 얻어지고 다양성은 질서의 자궁이라 할 근원의 무질서에서 얻어진다.

노력하면 이루어질 것이라는 망상을 버려야 한다. 포지션의 조합이 잘못되면 아무리 노력해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천재는 99퍼센트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99개 포지션의 이상적인 조합에서 얻어진다.

천재는 포지션과 타이밍으로 완성된다. 톱 포지션을 차지한 사람은 무한히 창의할 수 있다. 그것은 신대륙을 얻은 절대군주가 그 신대륙에 국가를 건설하며 무한히 창의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독재자가 흔히 그러하듯이 온갖 아이디어를 실험할 수 있다. 반면 낮은 포지션을 차지한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조금도 얻을 수 없다. 그것은 소가 열심히 일해도 조금의 소득도 얻을 수 없는 것과 같다.

포지션은 다섯이다. 한 단계 내려갈 때마다 1/5씩 몫이 줄어든다. 일의 1 사이클이 진행되는 입력≫저장≫제어≫연산≫출력 중에서 가장 낮은 출력 포지션을 차지한 사람은 디자인을 개선하여 1을 얻을 수 있다.

네 번째 연산 포지션을 차지한 사람은 효능을 개선하여 5를 차지할 수 있다. 한 단계 상승할 때마다 몫이 5배씩 증가한다. 세 번째 제어 포지션을 차지한 사람은 성능을 개선시켜 25를 얻을 수 있다.

두 번째 저장 포지션을 차지하면 기능을 발명하여 125를 얻을 수 있고, 톱 포지션인 입력 포지션을 차지한 사람은 소재를 개발하여 625를 얻을 수 있다. 소재≫기능≫성능≫효능≫디자인 순이다.

MS의 빌 게이츠가 톱 포지션을 차지했다. 그는 소스를 쥐고 있다. 교류전기를 발견한 테슬라나 플라스틱으로 전기용품을 개발한 마쓰시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적은 노력을 기울이고 무한히 얻는다.

인터넷에서도 마찬가지다. 네이버나 다음, 구글은 톱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다. 거저먹기로 성공하고 있다. 물론 그 포지션을 차지하는 과정에는 노력이 따랐겠지만 한 번 선점한 다음에는 거의 공짜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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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론은 포지셔닝 게임이다. 포지션은 다섯이다. 어느 위치에 설 것인가? 맨 아래 사람이 1을 먹을 때 그 윗사람은 5를 먹는다. 더 윗사람은 25를 먹고, 더 윗사람은 125를 먹고, 맨 위 사람은 625를 먹는다.

일관되게 포지션의 우위에 설 수 있다. 질≫입자≫힘≫운동≫량의 포지션이 있다. 상대가 량에 위치한다면 운동을 차지하여 이길 수 있다. 상대가 운동을 차지한다면 힘을 차지하여 이길 수 있다.

그런데 상대가 처음부터 가장 높은 포지션인 질을 차지해 버린다면?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사건은 언제나 양에서 촉발되기 때문이다. 사건은 항상 현장에서 일어난다. 현장은 가장 낮은 포지션이다.

현장 근무자의 임금이 적은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실로 그 현장이 중요하다. 승리하려면 처음 현장으로 가서 먼저 양을 차지하고 있다가 상대가 그 자리를 뺏으러 올 때 운동으로 이동해야 한다.

현장에만 매달려 있어도 곤란하다. 폭넓게 움직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 상대가 뺏으러 오면 현장을 양보하고 운동으로 점프하고, 상대가 운동 포지션을 뺏으러 오면 힘의 포지션으로 점프해야 한다.

역시 상대가 힘으로 나오면 입자로, 입자로 나오면 질로 이동하며 일관되게 포지션의 우위에 서야 한다. 그러려면 구조의 사다리를 이해해야 한다. 어디가 운동이고 어디가 힘인지 꿰뚫어볼 수 있어야 한다.

구조론은 포지션 잡기다. 자리 잘 잡아야 한다. 자리 잘못 잡은 사람은 노력해도 얻을 수 없고 목 좋은 곳에 자리 잡은 사람은 텃세만 받아먹어도 배가 부르다. 실정이 이런데도 구조론을 배우지 않겠는가?  

구조주의 역사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뜰앞에 피어난 화려한 꽃도 근본을 추적해 보면 하나의 작은 씨앗으로부터 차근차근 전개되어 나왔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씨앗의 그러한 성질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씨앗은 원래 그렇다. 그것은 물(物) 자체의 고유한 속성이다.’ 이것이 옛 사람의 견해다. 원자론이 그러하다. 원자는 만물의 씨앗이다. 씨앗 내부에 고유한 속성이 있다.

과연 그러한가? 세상은 원자라는 씨앗이 꽃을 피운 결과인가? 틀렸다. 고유한 속성 따위는 없다. 원자는 없다. 씨앗 또한 중간에 거쳐 가는 하나의 정거장일 뿐 최종적인 것은 아니다. 근본은 따로 있다.

꽃은 씨앗 속의 유전자가 피운다. 유전자는 정보의 집적이다. 정보는 관계에서 나온다. 씨앗은 물과 햇볕과 거름을 만나 관계를 맺고서야 꽃을 피울 수 있다. 관계는 만남이다. 만물의 근본은 만남이다.

만남은 둘 이상에 의해 성립한다. 혼자서는 만날 수 없다. 혼자서는 관계를 맺을 수 없다. 만유의 성질은 물(物) 자체에 고유하지 않고 어떤 상대적인 만남과 그에 따른 관계맺기에 의해 이차적으로 성립한다.

칼은 도마 위에서 무를 만나야 칼이다. 연필은 종이를 만나 글씨를 이루어야 연필이다. 만나서 관계를 맺으면 전봇대도 이쑤시개가 될 수 있고 임자를 만나지 못하면 고려청자도 사금파리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구조론은 물(物) 자체의 고유한 속성이 아니라 상대적인 관계로 세상을 이해하려는 태도이다. 왜인가? 세상은 너무나 크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물 자체의 속성으로 설명하려면 현상의 숫자만큼 원소가 있어야 한다.  

삼라만상의 온갖 현상을 씨앗의 논리로 설명하려면 온갖 씨앗이 있어야 한다. 원소의 숫자는 점점 증가한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의 숫자처럼 증가한다. 힌두교 신화에 등장하는 신은 많기도 하다.

일본의 신도라서 다르지 않다. 신의 숫자는 국어사전에 오른 개념의 숫자만큼 늘어나야 한다. 하나의 개념이 탄생할 때 하나의 신이 탄생하는 식이다. 이런 식이라면 감당할 수 없다. 세상을 모두 설명할 수 없다.

구조주의는 세상의 모든 개별현상을 하나의 통합적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일원론적 태도로부터 출발한다. 세상은 다양하다. 그러나 추적해 보면 한 지점에서 모두 만나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등산을 하는 사람은 산의 정상에서 모두 만난다. 물줄기를 따라 내려가다가 보면 강의 하구에서 모두 만나게 된다. 족보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아담과 이브에서 모두 만나게 된다. 결국 세상은 하나다.

구조론은 일원론이다. 일원론이 다원론의 한계를 극복한다. 신들의 숫자가 많아야 할 이유는 없다. 세상은 크게 하나로 통합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의 눈에 보이는 현상은 결코 하나가 아니다.

그런데도 근본이 하나인 이유는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연결하는 것은 길이다. 길은 도(道)다. 도는 도시와 도시를 잇는다. 하나가 아닌 것을 하나로 되돌린다. 그래서 진리는 예로부터 도로 표현되어 왔다.  

엄마와 아빠와 자녀는 서로 연결되어 한 가족을 이룬다. 전라도와 충청도와 경상도는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대한민국을 이룬다. 머리와 몸통과 손발은 서로 연결되어서 하나의 사람을 이룬다.

구조는 연결이다. 연결될 때 만나서 관계를 맺는다. 관계맺기에 의해 만유의 속성이 이차적으로 유도된다. 사랑은 연결이다. 어디서 누구를 만나 무슨 짓을 하였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격이 결정된다.

구조적 관점의 탄생

세상은 크고 현상은 다양한데 하나의 주머니에 우겨 담으려면 큰 주머니가 필요하다. 가장 큰 주머니는 무엇일까? 거짓말하기 시합과 같다. 먼저 말하면 진다. 상대가 어떤 말을 해도 더 큰 거짓말을 댈 수 있다.

가장 큰 숫자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상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큰 주머니는 어떤 주머니인가? 그것은 점점 커지는 주머니다. 고무풍선처럼 계속 커지는 주머니가 있다면 모두 담아낼 수 있다.

계속 커지면서도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점점 커지면서도 본래의 하나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큰 나무다. 큰 생태계다. 큰 도시다. 큰 조직이다. 큰 나라다. 큰 네트워크다. 인터넷이다.

그것은 유전인자다. 씨앗이 되는 기초적인 소스가 있다. 그 소스로부터 복제하여 점점 양이 많아진다. 나무처럼 커지고 개미집처럼 커지고 도시처럼 커진다. 그러면서도 최초의 출발점과 연결을 유지한다.

그 연결이 끊어지면? 풍선은 터진다. 둘로 쪼개진다. 그 경우 정체성을 잃고 변질된다. ‘하나여야 한다.’는 전제와 어긋난다. 변질되지 않고 정체성을 유지하려면? 연결되어야 한다. 떨어져 있어도 통해야 한다.

떨어져 있는 것을 통하게 하는 것은 질서다. 도시가 커지면 둘로 쪼개진다. 그러나 도로에 의해 연결되기 때문에 문명은 붕괴되지 않고 보존된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두 도시 사이에서 소통의 질서다.

질서란 어떤 계가 점점 커지다가 한계에 도달하여 둘로 쪼개져도 연결이 유지되게 하는 것이다. 자녀가 크면 분가한다. 부모와 헤어진다. 그러나 연락은 유지된다. 소통은 유지된다. 그것이 질서다.

점(點)은 분리된다. 쪼개진다. 떨어진다. 하나가 아니게 된다. 선(線)은 연결하지만 단지 길어질 뿐 커질 수 없다. 크기가 없다. 면(面) 역시 넓어질 뿐 커지지 않는다. 크기가 있는 것은 입체다.  

입체는 딱딱해서 커지기 어렵다. 입체처럼 크기를 가지면서도 딱딱하지 않은 것은? 점점 커져서 분리되면서도 본체와 연결을 유지함으로써 최초의 단일체가 갖는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은? 밀도다.

본래 하나에서 비롯되고, 점점 커져서 분가하게 되며, 그러면서도 연결을 유지하여 네트워크를 이루고 내부에 질서를 유지하여 보존되는 것은? 그것은 어떤 기초적인 소스로부터 무한복제되는 것이어야 한다.

세상은 그것으로 되어 있다. 구조다. 구조는 망이 개방되어 있어서 누구든지 한 지선을 차지하고 거기서 사이트를 개설하여 점포를 열고 독자적인 상행위를 할 수 있는 열린 구조라야 한다.

● 속성 - 만유의 속성은 관계가 낳는다.

● 진보 - 관계는 점점 커지면서 분가하여 시스템으로 발전한다.

● 질서 - 분가해도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본래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다.

만유는 보편적 속성이 있고 그 속성으로부터 발현되어 삼라만상으로 전개된바 진보가 있고 그 진보의 과정에 질서가 있다. 속성은 씨앗이다. 진보는 그 씨앗이 싹이 터서 성장함이다. 질서는 꽃피움이다.

한 알의 씨앗이 물과 흙과 태양과 거름을 만나 새싹으로 진보한다. 발전한다. 점점 커진다. 마침내 꽃을 피운다. 거기에 질서가 있다. 그러므로 아름답다. 일찍이 이러한 구조적 관점에서의 착상이 있었다.

탈레스의 물 일원론이 그 시작이다. 탈레스가 최초로 구조를 사유한 것이다. 물은 무르다. 딱딱하지 않다. 물은 생명을 자라게 한다. 물은 하천으로 강으로 바다로 연결된다. 물은 구조론의 모든 속성을 가진다.

탈레스가 물 일원론을 주장했을 때 물의 어떤 속성을 빗대어 말한 것이지 물(水) 자체를 말한 것은 아니다. 물도 있고 돌도 있고 쇠도 있고 불도 있는데 유독 물만 선택될 수는 없는 것이니까.

물의 속성을 뽑아 추상화하여 독립적인 개념을 만들어야 한다. 이 수준에서 나온 착상 중 하나가 원자론이다. 원자는 씨앗이다. 그 씨앗은 새싹으로 자라나서 마침내 꽃을 피운다. 그러나 틀렸다.

원자론은 열거한 많은 속성을 가지지 않는다. 원자는 돌처럼 딱딱하므로 스스로 커질 수 없다. 씨앗은 흙과 물과 태양과 거름을 만나야 꽃을 피울 수 있는데 원자론은 그러한 만남에 대해서 해명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작은 씨앗에서 한 떨기 꽃이 피어나는 것을 보고 원자 개념을 상상했지만 틀렸다. 씨앗은 껍질이 있어서 딱딱하다. 구조는 성장한다. 딱딱한 것은 성장할 수 없으므로 무른 컨셉이 제시되어야 한다.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 형상 개념이 구조와 가깝다. 카오스와 코스모스 개념도 그러하다. 도교의 도(道) 개념, 장자의 혼돈개념에도 일부이나 구조적 측면이 사색되어 있다.

중국철학 특유의 음양론과 오행론 역시 구조원리를 일부 반영한다. 음양론의 조화설 개념은 구조가 점점 성장하는 성질과 통한다. 오행론의 상생상극개념은 구조론의 관계망 개념과 닮은 부분이 있다.

석가의 제행무상 제법무아 개념과 금강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 개념에도 구조의 관계-상대성 개념이 반영되어 있다. 인연설에서 인(因)은 씨앗이다. 최초의 소스다. 연(緣)은 씨앗의 성장이다. 기(起)로서 꽃 피운다.

근대에 와서는 헤겔의 변증법이 구조론과 닮았다. 정(正)과 반(反)의 대칭개념은 구조론의 평형계 개념과 유사하다. 그러나 시스템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합(合)에서 다시 정으로 되돌아가므로 순환의 오류에 빠진다.  

데카르트의 연역법과 그 방법적 접근이 거둔 성취는 중요하다. 연역법의 제1원인 개념은 구조론의 ‘성장하여 본체에서 떨어져 나갔어도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본래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질서 개념과 닮았다.

인간에게 칼을 주면 휘두르려 하고 자를 주면 재려고 한다. 그 칼과 자가 어디서 왔는지는 관심이 없다. 특히 동양사상은 실용적인 산술에 관심을 가졌을 뿐 근거가 되는 보편원리의 발견에 소홀하였다.    

세상 모든 것은 높은 질서≫낮은 질서로 간다. 근본을 돌아보지 못하고 실용의 낮은 질서에 빠져버린다. 반면 데카르트는 수학자였지만 연산에 몰입하지 않고 시선을 반대로 돌려 수학의 근원을 더듬었다.

수학의 자궁을 탐색한 것이다. 최초 탄생지점이 중요하다. 반드시 자궁이 있다. 그러나 데카르트 이후 자궁을 탐색한 사람은 없다. 낙동강은 황지에서 발원되고 한강은 검룡소에서 시작된다. 항상 근본이 있다.

그러나 근대의 그들은 물의 흐름을 따라 하류로 내려갔을 뿐 물길을 거슬러 수원지를 조사하지 않았다. 근대주의가 선보인 온갖 신기한 물건들에 홀려서 호기심 많은 아이처럼 줄지어 뒤따라갔다.

현대 프랑스철학의 구조주의도 그러하다. 이름만 구조를 내세울 뿐 누구도 구조의 자궁을 탐색하지 않았다. 그들은 강을 따라 줄지어 바다로 갔을 뿐 근원을 더듬어 황지와 검룡소를 발견할 생각은 못했다.

그들은 모든 것을 구조로 설명하기를 시도했지만 하나의 소스인 구조체를 해명하지 않았다. 소스인 C언어도 모르면서 실용적인 소프트웨어만 개발하려고 덤빈 격이다. 소스를 모르면 한계가 있다.

씨앗을 찾았다고 다가 아니다. 만유의 소스가 있고 유전인자가 있다. 씨앗 속에서 그 유전인자를 찾아야 한다. 근래에 유행하는 철학 사조 중에는 카오스이론의 일부 개념이 구조론에 가깝다 하겠다.

카오스이론이 주목한 난류는 곧 구조체의 자궁이라 할 밀도의 장(場)이다. 모든 것은 거기서 탄생했다. 장자의 혼돈 개념도 마찬가지다. 장자의 혼돈은 질서를 비판함이 아니라 질서의 자궁을 탐색함이다.

무질서는 질서의 파괴가 아니라 출발점이다. 세상에는 질서가 있다. 모두들 질서를 좋아한다. 아이처럼 그리로 졸졸 따라간다. 그들이 근대의 모든 성취를 일구었다. 대단하다. 그러나 완전하지가 않다.

아름답지가 않다. 고결하지도 않다. 더 사색했어야 했다. 그 질서의 자궁을 탐색했어야 했다. 자궁은 낳는다. 세상은 위대한 낳음에 의해 이루어졌다. 무른 것이 낳을 수 있다. 질서는 딱딱해서 낳을 수 없다.

태초에 혼돈이 있었는데 일곱 개의 구멍을 뚫어 질서를 부여하였더니 혼돈이 죽었다고 했다. 혼돈처럼 커다란 주머니가 있다. 자궁이 있다. 구조는 세상의 자궁이다. 구조가 모든 것을 낳는다.

구조주의에서 구조론으로

소설 로마인 이야기에 따르면 로마군 특유의 발달한 조직과 전술, 시스템은 에트루리아인의 뛰어난 석조건축술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들은 건축가의 구조주의 마인드로 군대를 운영하였던 것이다.

로마군은 특히 숙영지 건설에 열심이었다. 잠시 쓰고 버릴 숙영지라도 교범에 따라 튼튼하게 짓는다. 단지 전투에 승리할 목적이라면 그렇게 튼튼한 숙영지가 필요하지 않다. 다른 목적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1회의 전투로 사태가 종결되기를 기대한 게르만족은 당황한다. 숙영지가 주둔지로 변하고 주둔지가 식민도시로 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전투는 장기화되고 성질 급한 게르만족은 질려버린다. 전의를 상실한다.

로마군은 건축가가 집을 짓듯이 조금씩 구축한다. 게르만의 땅을 야금야금 파먹는다. 영토를 단번에 빼앗는 것이 아니라 황무지를 개척하여 도시를 건설한다. 이는 동서고금의 전략가들이 말하는 바와 다르다.

전장에서는 병사의 사기가 중요하고 장수의 임기응변하는 지휘능력이 중요하다.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는 것은 전쟁의 명분이고 리더가 주입하는 것은 전쟁의 목표다. 그러나 로마군은 다르다.

그들은 돌을 쪼는 석수장이다. 석수장이처럼 열심히 쌓아댄다. 한니발과 같은 장수의 천재적인 자질이나 제갈량의 신묘한 전술구사와 다르다. 전술의 기본은 속임수라는 손자병법의 주장과도 다르다.

전쟁은 쓸어버리는 것이다. 방해자를 없앤다. 장애물을 제거한다. 소멸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로마군은 반대다. 그들은 건설한다. 도로부터 닦는다. 항구를 열고 상선을 보내고 식민도시를 건설한다.

로마군이 상승한 배경은 건축가가 도시를 건설하듯이 밑에서부터 차근차근 쌓아가는 형태의 집요한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그 경우 뛰어난 리더가 없어도 교범에 의해 저절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쓸어버리는 데는 속임수가 필요하다. 속임수는 일회용이다. 한 번 속지 두 번 속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건설하는 데는 속임수가 없다. 건설은 정직해야만 한다. 건설은 결코 한 번에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로마군은 적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적에게 신뢰를 주는 방법으로 승리했다. 적의 땅을 빼앗고 전리품을 챙겨 떠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주저앉아 도시를 건설하고 상품을 교역할 것에 대한 신뢰다.

전투에 지고 전쟁에 이겼다. 전투에서는 한니발에 속아서 졌지만 전쟁에서는 건축가의 마인드로 신뢰를 구축하여 이겼다. 건축술과 국가의 시스템은 닮았다. 국가도 건물처럼 건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조주의는 건축가의 마인드로 세상을 본다. 다만 로마의 건축이 하드웨어 건축인데 반해 구조론의 건축은 소프트웨어 건축이다. 하드웨어는 보이는 질서를 추구하고 소프트웨어는 보이지 않는 무질서를 통제한다.  

● 재래의 전쟁 - 방해자를 제거한다.

● 로마의 관점 - 쌓아올려서 건축한다.

● 구조의 관점 - 길을 열어서 소통시킨다.

세 가지 관점이 있다. 재래의 관점은 앞길을 막는 방해자를 제거하는 것이다. 보수세력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그렇다. 로라 부시가 연설에서 유머라고 한 말이 이렇다. “전기톱으로 잘라버려!”

부시가 텍사스 농장에서 항상 던지는 말이었다고 한다. ‘이라크가 문제라구? 제거해버려! 북한이 문제라구? 제거해버려!’ 그들은 로마교범의 방법을 쓰지 않았다. 로마는 제거하는 대신 건축했다. 포용했다.

구조론은 건축한다. 단단한 하드웨어 건축이 아니라 부드러운 소프트웨어 건축이다. 일의 구조, 정보의 구조다. 의미의 구조, 가치의 구조다. 변화의 구조, 진보의 구조다. 최종적으로는 소통의 구조다.

● 보수세력의 단선적 사고- 전진과 후진밖에 없는 선(線) 위에서는 무력으로 방해자를 제거할 뿐 다른 수단은 없다.

● 진보세력의 건설적 사고- 상하좌우가 있는 입체에서는 방해자를 뛰어넘어 우회할 수 있고 포용할 수 있다. 항상 비켜가는 수단이 있다.

● 구조론의 창조적 사고 - 진보의 관점이 하나의 수직적 질서 아래 통제되는 데 비해 구조론은 서로 분리되어 네트워크를 이루고 소통하며 창조한다.   

구조론은 서구의 구조주의와 다르다. 서구의 건축은 유형의 건축이다. 질서의 건축이다. 지배하고 조직하고 통제한다. 구조론은 무형의 건축이다. 질서를 초월한 건축이다. 이심전심으로 소통한다.

서구 구조주의는 입체를 조직하지만 구조론의 건축은 밀도를 조직한다. 밀도는 무르다. 로마군단의 조직력이 뛰어났다지만 하나의 단일체라는 한계가 있다. 구조론은 정보의 소통으로 그 한계를 극복한다.

입체건축은 밀도건축의 하부구조다. 입체건축은 건물을 올려 집을 짓고 밀도건축은 길을 닦아 도시를 연다. 입체건축은 하나의 대문으로 내부를 통제하고 밀도건축은 사통팔달을 이루어 외부로 개방한다.

입체건축은 하나의 중심을 가지고 밀도건축은 여러 부도심을 가진다. 입체건축은 지배하고 밀도건축은 호응한다. 관점의 차이가 있다. 한 차원 더 높은 데서 바라보고 있다. 그 배경에 동양적 사고가 있다.

서구의 구조주의에는 미학적 완전성의 개념이 없다. 이심전심 수평적 소통의 개념이 없다. 로마처럼 지배할 뿐 인도처럼 공존하지 못한다. 동양철학에는 예로부터 그러한 발상의 씨앗이 있었고 서구철학에는 없다.

서구의 구조주의와 필자의 구조론은 출발점이 다르고 입각한 포지션이 다르다. 의식적으로 구조주의 서적은 피했다. 구조론이라 이름한 이유도 구조주의와 구분하기 위해서다. 차이가 있다.

기하학과 대수학의 차이와 같다. 기하가 대수에 앞선다. 대수학은 원래 기하학을 연산해놓은 것이다. 대수학은 주어진 문제를 해결할 뿐이지만 기하학은 그 문제가 어떤 원인으로 생겨났는지 추론한다.

동양수학은 기하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편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이 아니라 하급기술자의 실용학문으로 수준이 낮아졌다. 구조론이 기하학이라면 서구 구조주의 철학은 대수학에 해당된다.

구조론은 국어사전에 일정한 기술체계가 없다는 사실을 포착하고 합리적인 기술체계를 세우자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또 세상의 모든 오류가 사실판단에서가 아니라 언어사용에서 빚어진다는 점에 주목했다.

눈에 보이는 것은 같은데 그것을 서로 다르게 표현하여 전달하기 때문에 혼선이 빚어진다. 언어를 과학화하면 모든 문제가 풀린다. 그렇다면 문법에 답이 있다. 그리고 그 문법은 자연의 진리를 반영한다.

자연의 진리를 포착하는 언어는 일차적으로 대수학이고 이차적으로 기하학이다. 대수와 기하를 넘어 자연의 본래와 직접 연결하는 것은? 그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구조론이다.

자연≫구조≫기하≫대수≫언어 순으로 유도된다. 자연이 사과 하나를 입력하면≫구조론이 얽어 저장하고≫기하학이 틀어 제어하고≫대수학이 풀어 연산하고≫언어의 개념으로 그 사과가 인식에 반영된다.

구조론을 진전시킨 것은 인연 개념에 대한 깨달음과 린네의 분류이론에서 얻은 아이디어였다. 그리고 기하학의 점≫선≫각≫입체≫밀도의 차원개념에서 구조론의 입력≫저장≫제어≫연산≫출력의 5를 얻었다.

헤겔의 변증법에서 자연의 대칭원리를 얻고, 데카르트의 제1원인에서 연역법을 얻었다. 엔트로피의 법칙과 상충되는 마르크스의 양질전화 개념에 대한 의문에서 존재론과 인식론의 혼선된 문제가 풀렸다.

그러나 이들이 구조론의 자궁은 아니다. 구조론의 씨앗은 순수하게 나의 내부에서 나왔고 이들은 햇볕과 물과 거름과 흙의 역할을 했다. 나의 내부에서 완성된 구조론을 이 모든 방향으로 검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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