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media.daum.net/culture/others/newsview?newsid=20140819040010122
피카소의 청색시대나 고흐의 초기작을 연상케 하는 천경자의 그림은 1인칭 주관적 시점을 극복하지 못한
즉 진중권평론처럼 유아틱한 것이다. 화가로서 득음하지 못한 것. 깨닫지 못한 것. 그림을 그리는 주체가
누구인지 찾아내지 못했다. 하여간 이런 그림 흉내내는 아류들이 많다는게 문제.
그림은 사람이 그리는게 아니라 그림이 그리는 것이다. 그림 자체의 결을 따라가야 하며 그러려면
에너지를 포착해야 한다. 이 그림에는 에너지가 없고 대신 에너지에 대한 갈구가 엿보인다. 그게 치기.
이중섭의 이 그림은 625를 만나 피난을 가며 길을 떠날 때 그린 것이다. 인생에서 가장 힘든 순간.
그러나 인물들은 덩실덩실 춤 추고 있다. 득음한 자의 솜씨다. 에너지가 길을 잡고 있다는 말씀.
고흐의 지누부인은 에너지가 있다. 보이는 것을 그리면 그림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내면의 기운을 잡아채야 그림이 된다.
고흐도 처음에는 이렇게 그리지 않았다. 어느 순간 득도한 것이다.
고갱의 지누부인은 에너지가 없다. 이 그림은 자기가 본 것을 사실적으로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의 작가는
나는 이렇게 보았다고 나는.. 하면서 자기를 강조하고 있다. 자기소개다. 아직 눈을 뜨지 못한 햇병아리다.
이건 좀 낫소이다만 제목을 spirit of the dead watching라고 더럽게 붙인걸 보면 .. 뒤의 검은 옷입은 여성은 딸을 맡겨놓고
고갱을 따라다니며 감시하는 장모. 그림은 자신이 어디에 매혹되었는지를 보여야 한다는 거. 이 그림은 매혹되었다 하는
점을 보이고 있지만 유치한 제목이 망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