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깨달음이어야 하는가? 저도 모르게 관행과 타성에 끌려가는 ‘관성의 법칙’이 있다. 가만 두면 점점 나빠지는 법칙이 있다. 점점 깊은 수렁에 빠져들게 되지만 정작 본인은 자신이 수렁에 빠져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왜냐하면 남들도 함께 수렁에서 허우적대고 있으니까. 중요한 건 소통이다. 소통은 하나의 기준을 정하여 레벨을 맞추는 것이므로 다 함께 빠져서 허우적대거나 아니면 다 함께 깨달아서 빠져나가거나다. 거기에는 구조적이고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 자연의 법칙이다. 원래 그렇게 되게 되어 있다. 오래 쓴 자동차가 낡아가듯이 점점 나빠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두 팔 벌리고 자라는 나무는 그 법칙을 위배한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지만, 생명은 아래에서 위로 솟아오른다. 모든 것이 점점 나빠지도록 되어 있는 자연의 법칙을 극복하는 생명의 법칙, 낳음의 법칙, 창조의 법칙이 있다. 깨달음이다. 게는 등딱지가 딱딱해서 속으로 살이 찐다. 살이 찔수록 내부는 비좁아진다. 그 때문에 온갖 문제들이 일어난다. 게가 허물을 벗는 것이 깨달음이다. 낡은 관행은 허물벗듯이 속시원하게 떨쳐버려야 한다. 일대 비약을 일으켜야 한다. 그러나 보통은 어떤가? 감히 벽을 넘어설 생각은 못하고 내부에서 서로 발목잡고 아귀다툼이다. ‘네가 먼저 밀쳤잖아.’ ‘아냐! 네가 먼저 반말했잖아’ 하고 화를 낸다. 깨달아야 한다. 누가 밀쳤기 때문이 아니고 반말했기 때문도 아니다. 애초에 장소가 비좁은 탓이다. 박차고 일어나 껍질을 깨고 너른 세계로 나아가면 바로 해결이 되는데 감히 그 생각을 못한다. 초등학생 일기라면 어떨까? 첫 머리에 ‘나는 오늘..’이라고 써놓고 시작한다. 무심코 ‘나는 오늘’을 써버리면 오늘 하루 동안에 일어난 사건, 나를 중심으로 한 사건으로 소재의 폭이 좁혀진다. 일기 쓸 거리가 없어진다. 무심코 자신을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가두어 버린 것이다. 자신이 갇혀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야 한다. 벽을 무너뜨려야 한다. ‘마음 속 관성의 법칙’을 깨는 것이 깨달음이다. 그림일기 그리는 초등학생은 무심코 하늘에 해를 그린다. 왜 해를 그렸을까? 거기가 하늘이라는 표시를 한 것이다. 그곳이 확실히 하늘이라는 증거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망가진다. 물론 해를 그려도 무방하다. 초등학생에게 해를 그리지 말라고 윽박지를 필요는 없다. 그러나 무심코 정해진 규칙 속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자기 자신을 알아채고서야 진정한 창의는 가능하다. 해를 그려서 하늘이라는 증거를 남기는 식으로 가면 그림이 점점 텍스트로 변한다. 나무는 나무색이어야 하고, 땅은 황토색이어야 하고, 피부는 살구색이어야 한다는 식이다. 칼라가 고정된다. 나무는 나무색, 풀은 풀색으로 정해버리면 색을 고민할 필요가 없어서 좋다. 그것이 그림 그리는 요령이 된다. 편해서 좋지만 편한 길 찾다가 망가진다. 진정한 창의는 정해진 공식을 깨는데 있다. 나무색으로 된 나무는 주변에 없다. 가로수들은 대개 회색에 가깝다. 알면서 다들 가짜그림을 그린다. 의심하지 않고 관습을 따른다. 그래야 말하지 않아도 그게 전봇대가 아닌 나무라고 인정해주니까. 무심코 저지르는, 부지불식간에 끌려들어가는 오류들을 극복해야 한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타성에 빠져 진부한 그림을 그리는 관성의 법칙을 의식적으로 극복해야 한다. 어떤 문제들이 있는가?
● 이발소그림병.. 이발소그림은 관람객들에게 따뜻한 행복감을 안겨준다. 그러나 관객들에게 뭔가 주는 것은 상품이지 예술이 아니다. 물론 예술성과 상품성이 결합되어도 좋다. 그러나 주객전도는 곤란하다. 이발소그림이나 민화를 재평가 하자는 논의도 있다. 거기에도 숨은 창의성이 있다. 그러나 이는 ‘그리다보니 저절로 이발소그림이 되는’ 관성의 법칙에서 벗어난, 아는 사람들끼리나 하는 이야기다.
● 졸업작품전병.. 미처 자기 스타일을 완성하지 못한 학생그림에 흔히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 주로 환경문제를 비판하는 방법으로 주제를 앞세운다. 먼저 주제를 정해놓고 거기에 꿰어맞춘 맞춤식 그림이다. 완성된 자신의 독창적 스타일에다 주제를 태워야 참되다. 스타일의 완성없이 인위적으로 주제를 얽으려 하면 역시 주객전도다. 잠시 이목을 끌 수는 있으나 자신을 주제라는 이름의 게딱지 속에 가둬 버린다. 그림은 캔버스에 그려지기 전에 마음에 먼저 그려진다. 의식적으로 주제를 깨뜨리는 훈련을 해야 한다. 감각 기르기다. 예민하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자신의 본능이 반응하는 지점을 찾아내야 한다.
● 아줌마패션병.. 현란한 아줌마옷은 조폭패션과 디자인이 비슷하다. 한국 아줌마들에게는 일종의 유니폼이다. 인간에게는 현란한 색깔 속에 자신을 숨기려는 심리가 있다. 진화과정에서 얻은 생존본능이다. 무심코 선택했지만 실제로는 어떤 힘에 끌려간 것이다. 의식적으로 훈련하여 피해야 한다. 그림과 패션은 자기를 나타내는 수단이다. ‘나란 누구인가?’ 하는 고민이 패션에 반영되어야 한다. 예술은 자기다움을 나타내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것을 피하고 군중 속에 유니폼으로 숨으려는 본능이 있다. ‘튀면 안 된다’는 본능적인 두려움이 있다. 인간의 창의성을 억압하는 방어기제가 있다. 고소공포증을 극복하듯이 의식적으로 훈련하여 극복해야 한다. 대부분의 한국 화가들에게는 화려한 원색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튀는 행동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의식적 훈련이 부족했던 것이다.
● 시골화가병.. 시골화가들은 자신에게 실력이 있다는 점을 명확하게 나타내려는 경향이 있다. 척 봐도 ‘이건 좀 그리는 사람이 그렸네’ 하고 관객이 탄성을 지르게 하는, 티 나는 그림이다. 주로 숲 속의 나무나 강가의 조약돌 혹은 신문지 따위를 정밀하게 그린다. 반면 서울화가들은 초보자가 봐서는 잘그린 그림인지 못그린 그림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헛갈리는 그림을 그린다. 아는 사람만 아는 그림을 그린다. 관객이 그림 앞으로 한걸음 더 바짝 다가오게 하는 유인책이다. 자동차라도 그렇다. 시골 아저씨들은 유명브랜드의 고급차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경향이 있다. 반면 ‘차 좀 탄다’는 독일 아저씨들은 일부러 신형 BMW의 마크를 떼놓고 헛갈리게 한다. 구경꾼이 궁금해하며 안을 들여다보도록 유도하는 심리가 있다. 그 방법으로 관객들에게 말을 건다.
● 아카데미즘병.. 북종화는 기교 중심으로 발달하여 작가의 특색이 드러나지 않는다. 서구 고전주의 회화는 거의 북종화라 봐도 무방하다. 그 안에 작가와 관객의 소통은 없다. 서권기 문자향은 없다. 북종화는 교회나 귀족에 의한 주문제작이므로 작가의 개성이 튀면 안 된다. 그것은 주문자의 의도를 거스르는 셈이 된다. 작품은 주로 성당이나 종교시설, 왕궁의 장식으로 쓰인다. 그림이나 건축, 조각을 주문한 귀족은 경쟁자와의 비교에서 승리하기를 원한다. 평가는 시민이 내린다. 평범한 시민이 봐도 ‘확실히 뛰어나다’고 판정할 수 있는 것은 관람객을 압도하는 완벽한 기교 뿐이다. 고전주의가 지나치게 격식을 따지는 이유는 그래야 평가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좋은 작품과 아닌 작품이 명백하게 나누어지기를 원한다. 반면 인상주의는 좀 아는 사람이나 아는 것이다. 작품이 아니라 작가가 주인이고 평가의 목적이 작품의 차별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목의 차별화에 있다는 사실은 문인화 전통의 동양에서 일찌감치 알려졌다. 서구에서는 근래에 확립된 개념이다.
● 현대회화병.. 20세기 들어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아프리카붐 이후 조형예술은 길을 잃었다. 추상화는 관계를 그린다. 화가들은 관계를 그리면서도 자신이 관계를 그린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다. 추상화는 단서≫포지션≫밸런스≫주도권≫생명성으로 관계가 발전하여 나아가는 단서만을 던질 뿐이다. 그 던져진 단서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지 못하고 거기서 단절되고 마는 것이 문제다. 전통을 계승하는 흐름 안에 있어야 한다. 역사와 문명, 그 도도한 진보의 흐름 안에서 명확한 자리매김이 있어야 한다. 자신이 지금 어디쯤 와 있고 또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정도는 알고있어야 한다. ★★★ 현대성은 관계를 그린다. 관계를 통하여 세상은 전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서≫포지션≫밸런스≫주도권≫생명성’으로 이어지는 관계의 심화 발전과정 전부를 하나의 화폭에 담아낼 필요는 없다. 조주는 다만 단서를 단졌을 뿐이다. ‘끾다거!’ 그 하나가 일본으로 건너가서 다도명인 센리큐를 낳았고 그것이 포지션≫밸런스≫주도권≫생명성으로 발전하여 시스템화 된 것이 요즘 뜬다는 서구의 젠스타일이다. 지금은 오히려 너무 시스템화 되었다. 발달한 일본의 다도와 형식미 위주의 젠스타일은 ‘단서만 던진다’는 깨달음의 본질을 훼손한다. 그들은 조주의 행동을 모방했을 뿐 그 마음은 이어받지 못했다. 중요한 점은 조주가 단서 하나 던졌을 뿐인데, 화두 하나 남겼을 뿐인데 그것이 지구 반바퀴를 돌아 현대적인 스타일을 낳더라는 사실이다. 최소로 개입했을 뿐인데 최대의 효과가 일어난 것이다. 미학의 족보가 있다. 피카소가 벌거벗고 뛰어다닌 것도, 존 레넌과 오노 요꼬가 훌훌 벗어던진 것도 그렇다. 죽림칠현의 유령이 술만 들어가면 옷을 홀딱 벗어던졌을 때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 성철의 ‘산은 산, 물은 물’도 마찬가지다. 1700년 전의 죽림칠현을 출발점으로 해서 육조 혜능과 원효와 소동파와 화담과 추사를 거치며 노무현이 남긴 ‘자연의 한 조각’까지 전부 연결되어 있다. 조주의 끽다거 한 마디가 북경에서 나비의 날개짓이면 서구의 젠스타일은 뉴욕에서 토네이도 발발이다. 그러므로 깨달을 일이다. 우리가 관계의 힘으로 정치와 제도의 완력에 맞설 수 있다. 깨달음은 미학이다. 미학은 양식을 완성한다. 완성하면 통하고 통하면 낳는다. 신의 완전성에서 유래한 씨앗이 무수히 낳음을 거쳐 인간의 삶으로 꽃 피우고 지성의 문화로 열매맺는다. 지극히 아름답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