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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0960 vote 0 2009.06.18 (23:5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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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주제 태운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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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든 소설이든 영화든 음악이든 주제를 태워야 한다. 전체를 한 줄에 꿰어내는 것이 주제다. 만약 주제
가 없다면 영화는 여러 단편의 집합인 옴니버스가 되고 만다. 그림을 구성하는 각 부분을 하나의 촛점에 맞
추어 통일시킬 때 그림은 주제를 태우고 가는 자동차가 된다.

먼저 자극적인 소재로 눈길을 끌고, 다음 밀도를 주어 각 부분을 연동시키고, 다음 대칭시켜서 의도를 태우고
그 다음에 소실점을 주어 주제를 태울 수 있다. 소실점을 찾아야 한다! 이 그림의 소실점은 어디에 있을까? 원
근법의 소실점 말고 그림 안의 조형적 질서 말이다.

생전 처음 포드자동차를 타보는 시골촌놈 셋이 두근거리는 심장을 억누르면서 바라보는 시선의 끝단이 있다. 
그곳이 소실점이다. 정확히 말하면 소실점이 아니라 그림 전체를 한 줄에 꿰어내는 촛점이다. 그림 내부의 조
형적 질서가 가지는 통일성이다.

중요한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소실점을 포착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냥 보면 보인다. 그러나 동양인들은 지난
5천년간 무수히 눈으로 보면서도 소실점의 존재를 깨닫지 못했다. 보면 보이는데 보고도 보지 못했다. 그래서
동양의 산수화는 점점 지도가 되어갔다.

서양도 마찬가지다. 고전주의 회화는 인물의 시선이 통일되어 있지 않다. 모든 인물이 각자 다른 곳을 바라보며
다른 형태로 몸을 뒤틀고 있다. 산만한 그림이다. 그래서는 주제를 태울 수 없다. 한 눈에 전모가 보이지 않는다.
그림이 이미지가 아니라 텍스트가 된다. 

서양의 고전회화는 한 편의 그림 안에 여러 편의 만화와 삽화가 숨어 있다. 한 컷의 그림 안에 10년 동안 계속된
전쟁의 시작과 끝이 공존한다. 소실점없는 동양의 산수화가 지도가 되었듯이 시선의 통일성없는 서구의 회화는
그림이 아니라 만화이거나 그림소설이 되었다.

왜 깨닫지 않으면 안 되는가? 눈으로 보면서도 소실점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르네상스는 소실점의 발견으로
부터 시작되었다. 극적으로 격이 높아졌다. 21세기 신문명 역시 깨달음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모든 존재 안에
내재하는 질서가 있으며 그러므로 한 줄에 꿰어낼 수 있다. 그것이 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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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의 다리는 그림의 오른편에 위치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시선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진행하기 때문이다.
왼쪽 상단 모서리에서 오른쪽 인물의 위치까지 전개는 시간과 공간의 진행을 나타낸다. 시간의 진행, 공간의 전개,
인물의 동선, 관객의 시선을 한 지점에 모을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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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실점은 원근법의 형태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인물의 동선 역시 소실점이다. 사건의 진행방향 역시 소실점이다.
인물은 셋이지만 사건은 한 지점에서 시작된다. 그렇게 모아주는 것이 있으므로 주제를 태울 수 있다. 안료, 색채,
구도, 질감, 등 여러 방법으로 소실점을 부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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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감에도 소실점은 있다. 닭은 뛰어가고 관객의 시선은 쫓아간다. 쫓고 쫓기는 둘의 연결선이 있다. 그 선으로 한
줄에 전부 꿰어낸다. 작가의 메시지가 바로 들어온다. 고전회화는 그렇지 않다. 한 눈에 전모를 볼 수 없다. 저건 아
프로디테, 저건 헤라, 저건 아테네  하는 식으로 하나하나 줏어섬겨야 한다. 산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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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바도르 달리  '기억의 고집'은 과학적 탐구의 결정판이다. 가로 그어진 수평선은 시간의 길이를 나타낸다. 아득한
태고적 시원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하늘의 청색과 땅의 갈색이 대칭하여 중앙의 노란색으로 관객의 시선을 모
아간다. 시간의 소실점을 연출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시계를 그렸으므로 시간이 주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시계를 그려서 시간을 나타내는 따위의 직설법은 초등학생도
할 수 있다. 시간의 소실점을 연출해야 진짜다. 가로 그어진 수평선과 아득한 바다와 오른쪽의 낡은 대륙이 까마득
한 태고적 모습을 떠올리게 하므로 시간이다.

상단의 밝음과 하단의 어둠이 대칭하여 밤과 낮을 나타내므로 시간이다. 이렇듯 주제는 그리는 것이 아니라 태우는
것이다. 그림이 자동차면 주제는 승객이다. 주제를 태우면 이미지가 되고 주제를 직설하면 텍스트가 된다. 주제는 관
객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배어들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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