잎 사이로 숨은 복숭아가 더 탐스럽다. 더 소담스럽다. 칼라를 전하는 데는 나 혼자 뽐내기로도 충분하지만 그 향과
그 기운까지 전하려면 너의 도움이 필요하다. 관계가 필요하다.
동그라미 속의 동그라미가 더 동그랗다. 네가 내 곁에 있어줌으로 해서 내가 더 돋보인다. 너의 존재로 하여 내가
달라진다. 네가 내게로 다가왔을 때 비로소 너는 너다운 네가 되고 나는 나다운 내가 된다. 그것이 빛나는 관계다.
빨강이 빨깡을 끌어당긴다. 관계가 관계를 끌어당긴다. 관계는 관계를 만나 손잡고 함께 또다른 관계로 나아간다.
관계의 나무가 무럭무럭 자란다. 세상끝까지 나아가 세상을 온통 뒤덮는다. 관계의 처음에 서서 관계의 끝을 바라
보는 것 그것이 깨달음이다.
처음에는 그저 한 그루 나무에 지나지 않았다. 하얀 구름이 나무에게로 다가왔을 때 노란 들판도 파란 하늘도 깨어
나 인사하였다. 나무와 구름 사이에 있던 모든 것이 함께 깨어난 것이다.
들판도 하늘도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지만 나무와 구름의 아슬한 데이트를 지켜봄으로써 그들을 주인공으로 만들
어주는 무대 역할을 떠맡게 되었던 것이다. 너와 나 그리고 우리를 전부 하나의 무대 안으로 통일하는 것, 무대 안
에서 각자의 역할을 나눠주는 것, 그것이 깨달음이다.
딱딱한 맨바닥과 고요히 잠든 여인이 무심코 만났을 뿐인데, 서늘한 그림자와 따사로운 볕이 서로의 존재를 새롭게
알아보았다. '너 거기 있었구나! 나 여기 있었어.'
관계는 너와 나의 관계이면서 동시에 그 둘의 관계를 지켜주는 무대와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다. 관계는 모든 것을
잇고 모든 것을 깨우고 모든 것들에게 제 위치와 역할을 일러준다.
나는 너를 만났을 뿐이지만 그 빛나는 한 순간에 세상은 세상이 되었고 우주는 우주가 되었다. 진리는 진리 자신이
되었고 역사는 역사 자신이 되었다. 그 방법으로 신은 우리 에게 말을 걸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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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은 관계의 깨달음이다. 관계는 너와 나를 잇는다. 둘을 하나로 이었을 때 기적은 일어난다. 소통은 일어난다.
바이얼린 현은 활을 만나 소리를 내고 산사의 종은 울음을 토하여 세상을 깨운다.
너와 내 사이에 흐르는 작은 강 있어 징검다리 하나 놓았을 뿐인데 세계와 세계가 이어지고, 대륙과 대륙이 이어지
고, 문명과 문명이 다시 만난다.
너와 나의 만남을 계기로 삼아 또다른 누구와 누구가 만난다. 그렇게 세상 모두가 만난다. 그렇게 관계는 자란다.
관계는 진보한다. 역사를 짓고 문명을 일군다. 관계의 나무 크게 자라나 신에게까지 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