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벨루가 흰돌고래 사진이 볼만하다. 감이 딱 와주는 거다. 이런 그림을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고래는 물속에서 걷고 뱀은 땅 위에서 헤엄친다.’ 박문호 박사가 한 말이라는데 직관적이다. ‘아! 그렇구나.’ 하고 감탄할 사람은 많아도 ‘설마 그럴 리가. ‘하고 의심할 사람은 적다. 벨루가의 인어공주 다리를 본 사람이라면 느낌이 와줘야 한다. 백 마디 말이 필요하랴? 왜 반응이 올까? 패턴을 읽기 때문이다. 인간의 뇌는 자연의 패턴에 반응한다. 뭔가 아귀가 맞아떨어질 때 짜릿하잖아. 느낌 쩔잖아. 경마장에서 복승식 중배당을 맞췄을 때처럼 기분 째지잖아. 콜라와 햄버거처럼 어울리는게 있고 그 반대도 있다. 쭉 올라는 상승효과도 있고 쭉 미끄러지는 상쇄효과도 있다. 소름이 쫙 끼치는 그런거 있다. 촉이 좋은 사람은 더 잘 안다. 이건 머리가 아니라 본능이다. 자연의 패턴에 뇌가 반응하면 그곳에 대칭이 있다. 어떤 만화의 한 꼭지다. 적국의 스파이를 고문하여 실토하게 하는데 마동석같이 무지막지하게 생긴 사람이 등장하더니 스파이를 눕혀놓고 살뜰하게 안마를 해주는 것이었다. 신체의 한쪽 절반만 안마를 하고 딱 멈춰버린다. 스파이는 실토하고 만다. 대칭이라야 한다. 왼쪽 절반만 안마를 받다니 그 불편감을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화장실에 가서 뒤처리를 못 한 느낌이다. 찝찝하잖아.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느낌이다. 대칭이 없으면 불편하다. 대칭에 축이 없어도 불편하다. 축은 있는데 치고 나가는 방향성이 없어도 불편하다. 이 세 가지 감각으로 모두 판단한다. 대칭을 찾고 축을 찾고 방향을 찾아라. 그냥 ‘공산당은 나쁜 놈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불편하다. 공산당이 저쪽에서 나쁘다면 극우는 이쪽에서 나쁘다 하고 대칭을 맞춰줘야 편안하다. ‘북한의 공산당 간부가 여성 당원에게 나쁜 짓을 한다.’ 어릴 때 반공도서에서 읽은 내용이다. 나머지 반쪽을 찾아내고 만다. 타는 목마름 때문이다. 그렇지 않나? 갈증이 느껴지지 않나? 불편하잖아. 칼은 있는데 손잡이가 없으면 불편하다. 볼펜심은 있는데 볼펜대가 없으면 불편하다. 젓가락 한 짝이 없으면 불편하다. ‘공산주의는 당 간부가 여성 당원에게 나쁜 짓을 하고, 자본주의는 사장이 여비서에게 나쁜 짓을 한다.’ 이래야 쾌변의 느낌이다. 그림이 맞아야 양쪽을 동시에 틀어쥐고 내가 핸들링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느낌이 딱 와주는 것이다. ‘좌파는 거짓말로 사람을 속이고 우파는 몽둥이로 사람을 팬다.’ 이렇게 대칭을 맞춰준다. 그냥 좌파가 이렇다 혹은 우파가 저렇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하면 솔직히 괴롭다. 누가 물어봤냐고? 내가 안 물어본 말을 왜 하지? 혹시 돌았나? 걸핏하면 부정부패가 어떻고, 수탈이 어떻고, 착취가 어떻고, 가렴주구가 어떻고 하는게 솔직히 수준 이하다. 상투적인 클리셰다. 감상적인 레토릭으로 사람을 격동시켜 신파 찍는 거다. 에너지를 올려태울 메커니즘을 설명해야 한다. 부패니 착취니 하는건 결과다. 그냥 과일이 열렸다고 말하면 곤란하다. 누가 물어봤냐고? 봄에 심었더니 가을에야 열렸더라. 이렇게 짝을 지어줘야 한다. 시스템이 망한 결과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착취고, 부패고, 수탈이고 이전에 이미 구조가 망해 있었다. 그걸 알아내야 한다. 남베트남은 왜 망했을까? 그냥 자본주의가 어떻고 공산주의가 어떻고 하는건 솔직히 수준 이하다. 공허한 관념놀이에 속지 말자. 사람을 말만 가지고 움직일 수 없다. 눈에 띄는 무언가를 보여줘야 한다. 많은 독립군이 장개석을 따라가지 않고 모택동을 따라간 이유는 모택동이 총을 줬기 때문이다. 이념이고 나발이고 필요 없고 독립군은 총을 손에 쥐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남베트남 몰락의 본질은 종교갈등과 민족갈등이다. 불교국가에 카톨릭이 지배한게 컸다. 카톨릭은 식민지 지배자인 프랑스의 종교다. 그다음은 화교상권의 지배다. 남베트남이 미국을 미워한게 아니고 화교상권의 지배를 미워한 것이다. 서극 감독의 영웅본색 3에 묘사된다. 독일이 유태인을 증오하여 전쟁을 한 것과 같다. 이런 본질에서의 구조적 모순이 쿠데타와 부정부패로 나타난다. 남베트남은 쿠데타와 부패로 망한게 아니라 종교갈등과 민족갈등으로 인한 내부모순으로 구조가 망해서 결과적으로 쿠데타와 부정부패가 만연하게 되었던 것이다.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게 구조가 망한 것이다. 소수 카톨릭의 지배, 소수 화교상권의 지배가 모순이다. 소수 기득권 세력이 먹는게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인 것과 같다. 중월전쟁이 일어난 이유가 그러하다. 화교탄압이 본질이다. 중국과 국경을 맞대면 언제나 불행한 일이 일어난다. 말레이지아가 화교탄압으로 건국한 것과 같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이 왜 필연인지 알게 한다. 베트남과 화교상권의 충돌이나 우크라이나의 러시아에 대한 증오나 같다. 국토를 가로지르는 러시아 가스관만 쳐다보고 있으면 우크라이나는 희망이 없다. 그냥 미국 나쁘다, 공산당 나쁘다 하고 선언하는건 좀 아니다. 건국과정에서 종교갈등, 민족갈등은 필연이다. 국가를 이끌어갈 주체세력을 건설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는 힘의 공백을 메울 주체가 형성될 때까지 피값을 치른다. 대칭이 있어야 한다. 구조가 보여야 한다. 그냥 대칭은 앙꼬 없는 찐빵과 같다. 콜라 없는 피자다. 치고 나가는 방향성이 보여야 한다. 축이 보이고 더하여 기세의 흐름이 보여야 한다. 다음 수와 다다음 수가 보여야 한다. 구도심에서 신도심으로 코어가 이동하는 라인이 보여야 한다. 주변의 에너지가 모여드는게 보여야 한다. 미래에 관심을 가진 젊은이 중심의 좌파는 무리보다 앞서가려고 하므로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하게 되고, 현재에 관심을 가진 늙은이 중심의 우파는 미래가 없으므로 눈앞의 이익에만 집착한다. 이렇게 말하면 감이 와준다. 뭔가 그림이 되어간다. 대칭의 축이 보인다. 도무지 어디에 줄을 서야 할지 감이 와준다. 좌파는 젊었으므로 미래에 관심을 가진다. 미래를 말하면 아무래도 거짓을 말하게 된다. 미래는 확률이기 때문이다. 봄에 작물을 열 포기 심어도 가을에 수확은 서너 포기만 하는게 보통이다. 중간에 적절한 솎아내기가 들어간다. 좌파는 원래 열 가지를 주장해서 그중에 하나둘을 맞추는 것이다. 다 맞추면 도사지. 좌우로 대칭된 둘이 화살의 머리와 꼬리처럼 한 방향을 가리켜야 안심이 된다. 그러려면 제 3의 무언가가 받쳐줘야 한다. 역사에서 그것은 생산력이다. 정치인은 이념을 두고 싸우지만 그건 그럴듯하게 말을 꾸민 것이고 실제로 싸움이 일어난 이유는 현장에서 일어난 생산력의 변화 때문이다. 이념은 선전 수단에 불과하다. 인간들은 본능적으로 변화를 느낀다. 소실점이 안 맞으면 불편하다. 문제는 불편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다. 어색한 그림을 벽에 걸어놓고 태연한 사람이 있다. 이발소 그림을 벽에 걸어놓고 뽕짝을 음악이랍시고 틀어놓는 사람도 있다. 현대 회화가 난해해지는 이유는 어색함을 피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산수화를 그리는데 사람을 그리면 저 사람은 왜 저기서 저러고 있나 하고 시비를 거는 사람이 있다. 신경이 쓰이므로 사람은 빼자. 하나씩 둘씩 빼다가 보면 마지막에 남는 것이 추상화다. 가장 시비를 많이 당한 그림이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임은 물론이다. 뒤샹의 샘은 시비를 좀 걸어달라고 만든 것이다만. 시비를 걸어달라는 뒤샹, 영문 모르고 시비를 당한 마네, 시비를 잠재운 세잔, 시비 걸고 싶게 만든 피카소, 시비꾼을 약 올린 달리, 시비하려다가 자기도 모르게 환호하게 되는 고흐, 이들 사이에 방향성이 보인다. 한 줄에 꿰어지는 흐름이 있다. 대충 어디쯤에 줄을 서야 할지 감이 와준다. 장단에 맞춰 춤출 수 있다. 추상화는 시비하고 방어하며 관객과 상호작용한다. 시빗거리를 줄이면 미니멀리즘이 된다. 그런데 그게 더 시비 걸고 싶게 한다. 그게 되먹임 효과를 이루므로 그렇게 한 방향으로 계속 간다. 언어에도 그러한 소실점이 있다. 아무도 그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말한다. 그것이 구조론이다. 피타고라스가 대장간 앞을 지나가다가 처음 화음을 발견했다. 내 귀에 들리는 소리는 다른 사람 귀에도 들리는 법이다. 이전에도 화음을 들은 사람이 있겠지만 그들은 그냥 지나쳤다. 그들은 가던 길을 계속 갔다. 대장간 아저씨라고 해서 귀가 먹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서 어쩌라고? 거기서 어떤 질서를 찾아내고 그것이 우주의 어떤 법칙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 사람은 피타고라스다. 바흐가 그것을 정리했고 베토벤과 모짜르트가 그것을 연주했다. 다빈치가 처음 그림의 소실점을 그렸고, 내가 처음 언어의 소실점을 말했다. 언어에는 담론>명제>주어>명사>동사로 가는 다섯 개의 대칭구조가 숨어 있다. 대칭, 대칭의 대칭, 대칭의 대칭의 대칭으로 계속 좁혀져서 한 점에 도달한다. 소실점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레온 알베르티, 레오나르도 다빈치 세 사람의 합작이다. 그것은 세상을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보게 한다. 천동설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프톨레마이오스 세 사람의 합작이다. 그들은 적어도 세상을 어떤 하나의 각도에서 바라보게 하였다. 동양은 이론이 없었다. 이론이 없었기 때문에 한 번 서양의 우위를 인정하게 되자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도 열심이었다. 지켜야 할 무언가가 없기 때문이다. 동양의 천원지방설은 진지한 이론이 아니다. 그냥 한 번 씨부려 본 것이다. 서양은 천동설이 있었으므로 대척점에 지동설을 세울 수 있었다. 동양은 천동설도 없고 지동설도 없고 관심도 없었다. 더 참담한 것은 관심을 가지게 유인하는 장치가 없었던 거다. 유클리드의 원론이 없었기 때문이다. 서양 학자가 우주론을 이야기해줘도 그래그래. 신기하긴 하네. 붉은털원숭이들도 묘한 재주가 하나는 있군. 하고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았다. 대척점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게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거짓이라도 소실점이 있어야 바로잡을 수 있다. 진보주의가 그렇다. 틀린 이상이라도 이상주의가 있어야 한다.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으려면 말이다. 소실점이 필요하다. 점점 압축되어 가는 그림이라야 한다. 마네가 이상한 짓을 하면 저것이 돌았냐? 이런다. 우산으로 쿡쿡 찌른다. 세잔이 새로운 그림을 보여주면 저것들이 뭔가 있기는 있나벼. 하고 고개를 끄떡거린다. 뒤샹이 변기를 보여주면 일제히 말문이 터진다. 다들 한마디씩 참견하게 된다. 셋을 일직선으로 연결하면 보이는 것이 있다. 감이 딱 와주는 것이었다. 한 방향으로 모아지는 탄착군 말이다. 그게 있어야 한다. 천동설의 소실점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프톨레마이오스 세 사람이 필요하고, 그림의 소실점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레온 알베르티, 레오나르도 다빈치 세 사람이 필요하고, 지동설의 소실점은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뉴턴 세 사람이 필요하다. 점점 좁혀져 가는 그림이다. 비로소 사람들이 그 뒤에 가서 줄을 선다. 한 사람이 떠들면 대중은 웃어넘긴다. 두 사람이 떠들면 힐끗 쳐다보기는 한다. 세 사람이 떠들어야 세상이 바뀐다. 대칭과 축과 축의 이동이라야 한다. 세상은 사물이 아니라 사건이다. 관측자가 외부에 있는 오브젝트가 아니라 관측자가 내부에 있는 이벤트다. 이것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다. 구조론은 대전환을 이야기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로 시작한다.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된다. 시큰둥한 사람과는 대화하지 않는다. 이게 몸으로 반응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화음이 귀에 들리지 않는 사람은 피타고라스도 포기한다. 나는 구조론을 원래부터 알고 있었다. 벌거숭이 임금님과 같다. 내가 본 것을 남들도 봤겠지만 다들 긴가민가하고 그냥 넘어간 것이다. 왜? 레토릭이 딸려서. 지구가 둥글다는건 그냥 보면 보인다. 그것을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나는 맨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서른 가지 이상의 증거를 댈 수 있다. 시력이 좋은 사람은 목성의 네 위성을 맨눈으로 볼 수 있다. 칼리스토는 운이 좋으면 일반인도 볼 수 있다. 화음은 딱 들으면 들린다. 소실점은 딱 보면 보이는데 5천 년 동안 동양인 중에는 본 사람이 없다. 그들은 진지하지 않았다. 시큰둥했던 것이다. 조선의 선비들이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도 그냥 잊어버렸다. 지구가 둥글고 움직인다는 말을 묵자가 처음 했지만, 실용주의자인 중국인들은 지구가 돌면 쌀이 나오냐 떡이 나오냐 하고 비웃었을 뿐이다. 구조론은 언어감각이다. 말을 조리 있게 하자는 제안이다. 어색하지 않게 말이다. 왜냐하면 쪽팔리니까. 세상의 모든 변화는 하나의 원리를 공유한다. 그것은 축과 대칭 그리고 축의 이동이다. 좌파는 축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축이 없다고 주장한다. 권도형의 탈중앙화가 그렇다. 탈중앙화라고 하면 뭔가 있어 보인다. 그런데 구조론과 맞지 않다. 우주 안에 코어가 없는 존재는 없다. 무게중심, 운동의 중심, 힘의 중심은 반드시 있다. 세차운동을 관찰하면 중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팽이가 기우뚱하는 것이다. 그런데 중심이 있다. 중심이 이동하고 있을 뿐이다. 중심은 숨어 있어야 한다. 겉으로 드러나면 가짜 중심이다. 민주주의는 코어가 숨어 있다. 독재는 겉으로 드러나 있다. 과일의 씨가 겉으로 드러나면 좋지 않다. 외부충격에 취약해진다. 시장원리는 균형의 형태로 코어가 존재한다. 분명히 코어가 있다. 탈중앙화 말만 들어봐도 딱 거짓말이잖아. 찐빵의 탈앙꼬화. 자동차의 탈엔진화, 생물의 탈생명화, 유치한 말장난이다. 존재는 언제나 대칭을 만들고 대칭된 둘의 간격을 최대한 벌린 다음 그것을 조금씩 좁혀서 가속도를 얻는다. 공간의 거리를 시간의 속도로 바꾼다. 우주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의 법칙이다. 여기서 벗어나는 일이 있다면 외부에서 간섭한 것이다. 자연에서 저절로 일어나는 자체의 변화는 하나의 법칙을 공유한다. 자전거는 좌우 어느 쪽을 선택하지 않는다. 좌우로 비틀대는 폭이 좁아지며 그 에너지는 속도로 옮겨간다. 중심을 잡는다. 민주당은 속도가 느려진 결과 망한 것이다. 일본은 쓰나미의 충격에 속도를 잃었고 한국은 코로나19 충격에 속도를 잃었다. 비틀대는 자전거처럼 자기들끼리 내부총질하는 시즌이 된다. 김대중 시절의 인터넷 붐, 노무현 시절의 벤처붐, 문재인 시절의 스마트붐처럼 속도를 일으키면 좌우의 흔들리는 진폭을 좁아지며 중앙으로 수렴되어 코어를 강화한다. 그럴 때 흥한다. 중도진보가 흥한다. 자전거가 좌우로 흔들리는 폭을 좁히는 것이 중도, 페달을 밟아 전진하는 것이 진보다. 패턴이 있다. 인간은 자연의 패턴에 반응한다. 뇌에 반응이 온다. 저릿한 느낌이 있다. 호르몬이 나와준다. 사람을 흥분하게 한다. 정해진 공식이 있다. 대칭을 이루고 코어를 움직여 공간의 거리를 시간의 속도로 바꾼다. 결이 있다. 정해진 길을 간다. 소실점이 있다. 지동설이 있다. 하나의 기준점이 있다. 중앙은 반드시 있다. 탈중앙화는 원초적인 개소리다. 중앙을 도출하고 그것을 주변부로 밀어내며 계를 장악하는 정도를 높이는 것이 진보다. 오브젝트로 보는 눈을 버리고 이벤트로 보는 눈을 얻어야 한다. 그것을 볼 수 있다. 언어의 소실점이 보인다. 개소리인지 아닌지는 1초 안에 분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