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의 첫 한 점을 두는 데는 361로의 선택지가 있다. 두 번째 점은 359로 감소한다. 갈수록 선택지는 줄어든다. 앞에 둔 수와 연동시켜야 하므로 실제로는 더 크게 줄어든다. 그것이 방향성이다. 갈수록 자유도가 감소한다. 그러므로 애초에 넓은 땅을 확보하고 게임을 시작해야 한다. 아스날의 챔스리그 진출 희망처럼 감소한다. 방향성이야말로 우주의 제 1원리라 하겠다. 구조론을 이해한다는 것은 의사결정 메커니즘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려고 한다. 왼손이냐 오른손이냐. 진보냐 보수냐. 선이냐 악이냐. 여당이냐 야당이냐. 친일이냐 친중이냐. 틀렸다. 의사결정은 코어를 이동시킨다. 코어는 하나다. 왼손과 오른손은 하나의 동작을 구성한다. 왼손으로 거리를 재고 오른손으로 투척한다. 왼발로 중심을 잡고 오른발을 내딛는다. 두 개의 동작이 각각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합쳐서 하나의 동작이다. 그 안에 축의 이동이 있다. 대칭 2는 축 1에 꿰어져 있다. 만유는 대칭이며 대칭은 코어가 있고 사건은 언제나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아는 것이 깨달음이다. 이때 좁아진다. 마이너스다. 바둑은 둘수록 둘 자리가 감소한다. 의사결정은 코어를 이동시킬수록 이동시킬 수 있는 여지가 사라진다. 의사결정은 공간의 넓이를 시간의 속도와 바꿔치기 하는 것이다. 먼저 넓음을 확보하고 다음 좁음으로 몰아가며 대신 빠름을 획득하여 공간의 손실을 보전한다. 젊은이는 외국을 여행하며 넓어지려고 하고 늙은이는 북한과 대결하며 좁아지려고 한다. 둘은 하나다. 좁히기 위한 넓히기다. 젊은이와 늙은이는 반대방향으로 움직이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합쳐서 한 방향이다. 먼저 넓히고 다음 좁혀서 속도를 얻어야 한다. 그것이 정석이고 수순이다. 공간을 잃어먹는 것이 마이너스 원리다. 모든 의사결정은 마이너스다. 변화 앞에서 세상의 모든 2는 1이다. 그것이 일의성이다. 어떤 일치를 찾아내는 것이 사유다. 생각한다는 것은 일치를 확인하는 것이다. 진보와 보수, 남자와 여자, 여당과 야당 중에서 문명의 일치, 생식의 일치, 국민의 일치를 찾아내야 한다. 2는 접점이 밖으로 드러나 있고 1은 접점이 내부에 감추어져 있다. 둘의 접점이 외부에 드러난 것은 아날로그다. 접점이 내부로 감추어진 것은 디지털이다. 아날로그는 외부에서 누가 두 곳을 조절해줘야 하고 디지털은 내부에 하나의 자동 조절장치가 숨어 있다. 아날로그 2를 디지털 1로 바꾸는 것이 구조화다. 구조화가 진보다. 모든 발전은 조절장치의 숫자를 줄이는 것이다. 키가 없는 옛날 갤리선은 노가 좌우에 하나씩 있다. 최소 두 개의 노를 사용해야 방향전환이 가능하다. 키가 발명되자 키 하나로 두 개의 노 역할을 한다. 경운기는 두 개의 클러치로 방향전환을 한다. 자동차는 한 개의 핸들로 방향전환을 한다.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사건이고 사건을 이끌고 가는 것은 에너지다. 에너지는 방향성이 있다. 에너지는 2를 1로 바꾼다. 효율은 거기서 얻어진다. 은행은 예대마진으로 먹고살고 정치는 권력으로 먹고살지만, 근본은 에너지 효율로 먹고사는 것이다. 원인과 결과는 사건 1이다. 거기에 찾아야 할 하나의 핸들이 숨어 있다. 지배와 복종은 권력 1이다. 그게 별도로 움직이는 둘이라고 생각하므로 통제에 실패한다. 둘은 같은 것이다. 복종을 잘하는 이등병이 병장 계급장 달고 지배하려고 한다. 복종하는 자를 조심해야 한다. 면전에서는 복종하면서 뒤로 전세역전을 노린다. 과거 윤석열이 그랬고 지금 한동훈이 그러고 있다. 장세동으로 망하느니 노태우로 살아보려는 꿍꿍이가 있는 것이다. 선과 악은 사회성 1이다. 사회 안에 또다른 사회를 만들려는 자가 악당이다. 느슨하게 결속된 사회에 불안감을 느낀 자가 단단하게 결속된 사회를 만들려고 하는게 악행이다. 그들에게 국가사회는 소속감이 약하고 조폭사회가 든든하다. 모든 차별의 이유다. 그들은 사회 안에서 자기들만의 또다른 사회를 만든다. 우리는 모든 대립 2를 변화 1로 이해해야 한다. 마주보고 충돌하는 열차를 하나의 선로에 통합시켜야 한다. 그럴 때 도약한다. 양 2는 운동 1로, 운동 2는 힘 1로, 힘 2는 입자 1로, 입자 2는 질 1로 도약한다. 차원의 이동이 일어난다. 각각 움직이던 두 개의 대칭이 하나의 코어에 꿰어져 멋진 하모니를 이룬다. 따로 팔리던 콜라와 햄버거가 하나의 세트메뉴로 통합되어 알바의 노동을 감소시킨다. 1로 보면 방향이 보인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게 된다. 그 방향은 마이너스다. 그것은 확산을 수렴으로 바꾼다. 공간을 시간으로 바꾼다. 거리를 속도로 바꾼다. 정의당과 민주당이 폭넓게 간격을 벌렸다가 그것을 좁히면서 빠른 의사결정 속도를 얻어내야 한다. 그것이 전략이다. 아날로그를 디지털로 바꾸는 일치를 찾는 것이 깨달음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시학에서 갈파한 바와 같다.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보는 것이다. 남들이 둘을 각각 볼 때 둘을 한 줄에 꿰어서 하나로 보는 것이 소실점이다. 소실점은 근경과 원경을 꿰어서 본다. 변화의 방향이 제시되면 대립은 해소되고 화쟁에 이른다. 그때 얻어지는 것은 메커니즘이다. 메커니즘 1 안에 대칭 2가 있다. 두 바퀴가 하나의 축에 꿰어져 있다. 자전거는 크랭크와 뒷바퀴가 하나의 체인에 꿰어져 있다. 새는 한발로 선다. 무게중심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둘 속에서 하나를 찾고, 아날로그에서 디지털을 찾고, 대칭에서 코어를 찾을 때 자동차가 전진해야할 방향은 명백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