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선택설과 구조론의 차이는 예측가능한가 그렇지 않은가에 있다. 생물의 진화가 예측가능하다면 정당의 집권, 사회의 진보, 산업의 발달, 영화의 흥행도 예측할 수 있다.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엔트로피에 의해 예측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밝혀졌음에도 개소리가 난무하는 이유는 엔트로피를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어쩌면 무한동력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우긴다면 어떨까? 우리는 그 사람의 도전이 실패한다는 예측을 하게 된다. 그 예측은 언제나 적중한다. 혹시 모르잖아? 백 퍼센트, 천 퍼센트, 만 퍼센트 확실하다고 장담할 수 있어? 그렇다고 말할 수 있어야 과학이다. 아직도 교회 다니는 사람, 점 보러 다니는 사람이 있다. 무한동력 아저씨와 정확히 같다. 우리는 그들이 백 퍼센트 틀렸다는 사실을 안다. 엔트로피는 수학적 연역이므로 확실하다. 실험할 필요도 없다. 에너지의 의미를 명확히 정의하면 된다. 수학은 처음 1을 정의했을 때 계산할 필요도 없이 모든 문제의 답은 이미 나와 있다. 에너지가 뭐지? 무한동력을 부정하는 그것이 에너지다. 한 방향으로만 이동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에너지라고 한다. 무한동력을 믿는 사람도 내 책상 위의 컵이 사실은 늙고 요망한 당나귀가 둔갑한 것이라고 말하면 피식한다. 조선시대 아저씨라면 진지하게 듣는데 말이다. 조선시대 아저씨에게 라디오를 보여주고 그 안에 요괴가 숨어있다고 말하면 잘도 속아 넘어가는 것이다. 수학이란 간단히 그게 그거다이다. 사람들은 연결시켜서 생각하는 능력이 없다. 엔트로피와 무한동력과 컵 속에 숨은 요괴와 종교와 미신과 무당은 모두 같다. 그게 그거다. 한 줄에 꿰어서 생각하자. 하나가 틀리면 전부 틀리고 하나가 맞으면 전부 맞는다. 사람들이 엔트로피는 잘 알면서 왜 자연선택이 오류라는 사실은 모를까? 사물과 사건의 차이다. 사건 내부에는 다섯 번의 의사결정 단계가 있다. 그 단계들 사이에도 역시 엔트로피가 성립한다. 하나의 사건에는 다섯 번이나 예측기회가 있다. 그냥 엔트로피가 아니라 엔트로피+엔트로피+엔트로피+엔트로피+엔트로피다. 그냥 엔트로피는 시큰둥하지만 다섯 번의 반복되는 엔트로피라면 명확해진다. 그냥 무한동력은 없다는 것과 질은 없고, 입자는 없고, 힘은 없고, 운동은 없고, 량은 없다의 차이다. 단계마다 하나씩 잃는다. 질은 결합하고, 입자는 독립하고, 힘은 교섭하고, 운동은 변화하고, 량은 침투한다는 말은 질은 결합을 잃고, 입자는 독립을 잃고, 힘은 교섭을 잃고, 운동은 변화를 잃고, 량은 침투를 잃는다는 말이다.
하나씩 질서를 잃어먹는다. 그래서 무질서도의 증가다. 엔트로피는 그냥 무질서도의 증가라고 말하지만 구조론은 정확히 무엇이 증가하는지 말해준다. 질 하나가 깨지면서 입자 둘이 만들어진다. 입자 하나가 깨지면서 힘 둘이 만들어진다. 힘 하나가 깨지면서 운동 둘이 만들어진다. 운동 하나가 깨지면서 량 둘이 만들어진다. 1이 깨지고 2가 등장하므로 무언가 증가하는 것이 무질서도의 증가다. 5회에 걸쳐 밸런스가 만들어지고 깨지는 것이다. 전체의 밸런스가 깨지면서 부분의 밸런스가 만들어지고 그 밸런스가 깨지면서 더 작은 밸런스가 만들어지기를 5회에 걸쳐 반복한다. 공을 던지는 투수는 와인드업 자세로 인체 전체의 밸런스를 만들어낸다. 공을 던진다는 것은 상체를 숙여 그 밸런스를 깨는 것이다. 인체의 밸런스를 깨서 상체의 밸런스를 만들고 다시 상체의 밸런스를 깨서 어깨의 밸런스를 만들고 다시 어깨의 밸런스를 깨서 팔꿈치의 밸런스를 만들고 다시 팔꿈치의 밸런스를 깨면서 공을 던진다, 공을 던지는 힘은 사실 거의 팔꿈치를 펼치는 속도에서 나온다. 팔꿈치를 접어야 어깨와 상박의 밸런스가 만들어진다. 에너지란 밸런스를 깨는 것이다. 단 그냥 깨는게 아니라 국소적으로 새로운 밸런스를 만들기를 반복한다. 그 과정에서 속도는 가속된다. 에너지는 깨지는 것이기 때문에 무한동력은 부정된다. 무한동력은 깨졌는데 깨지지 않았다는 말이고 이는 에너지가 아니라는 말이다. 사건은 머리와 꼬리가 있다. 그런데 머리가 이긴다. 꼬리가 이길 때도 있다. 보수가 이길 때도 있다. 51 대 49다. 머리가 이기지만 백 퍼센트는 아니다. 51 대 49로 근소하게 이길 뿐이다. 천만에. 이 짓을 다섯 번 반복하면? 51 대 49 게임을 5회 반복하면? 투수는 51 대 49를 5회 반복하여 만들었다가 다시 깨뜨리곤 하는 것이다. 와인드업 자세는 하체가 상체를 이긴다. 다시 상체가 어깨를 이긴다. 다시 어깨가 팔꿈치를 이긴다. 다시 팔꿈치가 손목을 이긴다. 다시 손목이 공을 이긴다. 만약 51 대 49가 아니고 9 대 1이면 어떨까? 어깨는 굵은데 팔꿈치가 가늘다면? 힘을 충분히 전달받지 못한다. 총은 센데 총알이 깨져버리면? 밸런스가 맞아야 작동한다.
머리가 꼬리를 쉽게 이기면 힘이 전달되지 않고 머리가 꼬리에 지면 자빠진다. 공을 던지고 자빠지는 선수가 있다. 51 대 49가 아니라 49 대 51이 된 것이다. 너무 가벼운 공을 던져도 멀리 날아가지 않는다. 그 경우는 9 대 1이 된 것이다. 타자가 51로 투수의 49를 밀어내야 홈런이 된다. 사람들이 확률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51과 49의 차이를 작게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게임을 5회 반복하면? 이길 놈이 이기고 질 놈이 진다. 총이 총알을 이긴다. 총알이 이기면 총이 터진다. 활이 화살을 이긴다. 화살이 이기면 활이 부러진다.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그런데 말이다. 총이 총알에 질 때마다 품질을 개선하면? 활이 화살에 질 때마다 품질을 개선하면? 5회에 걸쳐 품질개선이 일어나므로 나중에는 총이 총알을 이기고, 활이 화살을 이기고, 기관차가 객차를 이기고, 머리가 꼬리를 이긴다. |
틀렸다는 사실을 안다."
삶이란 부조리하고 오방난장五方亂場한 상황에
대칭을 만들어서 질서를 부여하는 것과 같다
상황의 방향과 질서가 정해지면
에너지의 수렴이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