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news.v.daum.net/v/20210717000302997
군내 나는 쌍팔년도 사랑타령이다. 기레기 제목장사나 사이비 철학팔이 사랑장사나 도긴개긴이다. 수준 이하 벌거숭이 타령 지껄이다가 창피하니까 실존주의 도배해서 물타기를 시도한다. 아무 데나 실존주의만 갖다붙이면 품격이 생기나? 먹물행세 하는 똥양아치다. 한국에 널린 쓰레기다. 사랑은 사회적인 신분상승 혹은 심리적인 신분상승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것은 동물적 행동이기도 하고 이성적 행동이기도 하다. 동물이 하면 짝짓기고 예수가 하면 사랑이다. 사랑은 한마디로 자유의지다. 자유의지는 환경과의 게임에서 이기려는 것이다. 동물은 영역본능, 서열본능이다. 동물은 성장하며 영역을 넓히고 서열을 높여서 환경을 극복하려고 한다. 자신이 의사결정을 주도하려고 한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사랑의 본질은 미성년자에서 성인으로의 신분상승이다. 의사결정 대상에서 의사결정 주체로 도약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권력이 있어야 한다. 권력을 만들어야 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권력을 생산한다는 것이다. 자유를 행사하고 존엄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상대방의 신체를 탐닉하는 것은 일종의 불안장애다. 혹은 동물적 생식활동이기도 하고. 많은 경우 무리에서 소외되어 겉돌며 불안한 사람이 자신이 무리의 일원이라는 점을 확인하려는 것이다. 유아가 엄마에 애착을 가지는 것과 같다. 엄마가 근처에 있어야 안심하고 놀이행동을 한다. 성생활이 사랑의 매개가 될 수는 있으나 매개일 뿐이다. 성생활은 성생활이지 사랑이 아니다. 동물의 마운팅을 보면 알 수 있다. 성행위를 흉내내지만 실제로는 서열확인, 가족확인, 호르몬 교환이다. 소설에 묘사되는 19세기 프랑스식 사랑은 신분제 사회에서 근대사회로 넘어오는 과도기에 사회적 신분상승을 위해 귀족집안 여성의 주변을 배회하거나 반대로 만만한 하녀를 지배하려고 걸떡대거나 하는 것이다. 자기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 주변을 맴도는 것은 영역본능이다. 자기보다 신분이 낮은 사람을 지배하려는 것은 서열본능이다. 본질은 주체의 관점을 획득하는 것이다. 선제적이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이고, 긍정적이고, 공격적이고, 전략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가? 그것이 주체의 관점이다. 반대로 상대의 공격을 맞받아치고, 소극적이고, 수동적이고, 부정적이고, 방어적이고, 전술적인 기동을 하는 것은 타자성 행동이다. 선제적인 의사결정은 실천에 따르는 비용문제 때문에 당장의 손해를 유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확실한 미래의 더 큰 이득을 바라고 손해를 감수하는가의 문제다. 손해 보지 않겠다는 사람은 사랑할 수 없다. 물론 호르몬이 작동하여 발정한 동물처럼 선제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도 있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성행위다. 생식본능에 불과하다. 피해를 감수하는 이성적인 판단으로 선제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도 있다. 사랑은 자신에게 미션을 부여하는 것이다. 세상과의 관계의 긴밀도를 높여 재설정하는 것이다. 세상과 겉도는 자가 아니라 톱니가 맞물려 돌아가는 자가 되는 것이다. 자연인처럼 혼자 살면 겉도는 거다. 사랑은 톱니가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며 그것은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며 그 스트레스를 극복할 만큼 긍정적인 호르몬을 만들어내느냐의 승부다. 사랑은 주체의 관점을 획득하고 능동적, 선제적, 긍정적, 공격적, 전략적 태도를 견지하여 집단의 의사결정 중심을 장악하는 것이다.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며 그 대가는 스트레스, 금전적 손실, 물리적 피해다. 사랑은 리스크를 감수하고 영역을 확대하며 서열을 상승시켜 가는 것이다. 집단의 의사결정 중심에 서는 것이며 주변적 존재에서 중심적 존재로 올라서는 것이다. 호르몬에 의한 동물적인 사랑이나 이성적인 사랑이나 본질적 차이는 없다. 인간이 사랑할 줄 모르기 때문에 호르몬과 생식본능이 사랑의 매개가 되지만 본질은 의리다. 처음에는 동물적 본능으로 사랑을 배우게 되지만 나중에는 이성적으로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동물적 본능으로는 3개월 정도 호르몬이 유지될 뿐이다. 그 이상이라면 특별한 호르몬 체질이다. 주체와 타자의 문제, 피아구분의 문제, 환경과의 게임 문제, 환경과의 게임에서 갑이냐 을이냐는 영원히 인간을 따라다니는 인생의 본질적 모순이다. 게임에 이길 것이냐, 이득을 취할 것이냐에서 이득을 선택하면 게임에 지고, 승리를 선택하면 손해를 본다. 승리를 선택하면 당장 물질적 손해를 보지만 대신 다음 게임을 자신이 정할 수 있다. 다음 게임을 내가 정해봤자 이득이 없다면 현찰을 챙기는게 맞다. 사랑을 포기하는게 맞다. 바보들은 사랑해봤자 얻는게 없다. 부족민들은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해서 얻는게 없기 때문이다. 계획이 있는 사람, 자체동력이 있는 사람, 에너지가 있는 사람, 미션을 얻은 사람은 자신이 게임을 지정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매력을 느낀다. 자신이 다음 게임을 정하고 죽어버릴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랑을 주제로 많은 소설이 탄생하는 것이다. 반대로 눈앞의 현찰 이득을 선택하면 일단 살아남지만 종속되고, 지배되고, 길들여져서 사육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손해 보고 이기는 것은 사랑이고 이득 보고 지는 것은 배반이다. 그것을 남녀관계를 떠나 일반화하면 의리가 되고 그 의리게임의 주체는 이성이고 게임종목은 자유의지다. 게임의 결과로 얻는 것은 권력이다. 권력이 인간과 인간 사이를 긴밀하게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 간격을 좁혀서 끈끈하게 한다. 인간은 사랑으로 많은 것을 희생하고 손해 보며 마지막에 자신이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권력을 얻는다. 사이코패스는 사랑을 못 하므로 사람을 죽여서 권력을 느끼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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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의사 아내들이 남편의 사회적 위치만으로 대리만족을 하지만, 이 미인대회 출신 여성은 그 이상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