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사건으로 보는 관점이 있어야 한다. 쉽지 않은 모양이다. 구조론을 익혀서 확실히 사건의 관점으로 보고 있다는 확신이 들게 하는 사람이 없다. 사건을 보는 것은 크게 보는 것이다. 크게 보는 것은 전제를 보는 것이다. 무한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런 물음이 있다면 그전에 집합론은 무엇인가? 그전에 수는 무엇인가? 그전에 언어는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뭔가 이상하다면 그 단계에서 답을 찾지 말고 한 단계 위로 올라가야 한다. 전제의 전제의 전제를 찾아 정상에 오른 다음 하나씩 타파하여 아래로 내려와야 한다. 그런 절차를 거치지 않고 결론부터 들이댄다면 대화가 안 되는 장면이다. 문제는 방향이다. 방향은 확산 아니면 수렴이냐다. 수렴이면 뭔가 맞고 확산이면 일단 틀렸다. 뭔가 발산되고 있다면 틀린 것이다. 이런건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눈이 어느 쪽을 보고 있느냐다. 무한은 유한의 반대다. 유한이 있는데 왜 무한이 없겠는가? 그런데도 이런 물음이 있다는 것은 칸토어의 집합론에 하자가 있다는 방증이다. 집합이라는 개념의 정의에 문제가 있는 거지 무한은 있다. 러셀의 역설이 대표적인 개소리다. 이발사가 제 머리를 깎으면 내가 깎은 것이 아니고 이발사가 깎은 것이다. 개소리가 나오는 이유는 주체인 나로부터 말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주관의 관점을 쓰고 있다. 누구 맘대로? 과학은 객관이어야 한다. 돼지셈을 피하려면 나는 하고 주어를 앞에 붙이면 안 되고 이발사 아무개는 하고 말을 시작해야 한다. 애매한 것은 대개 언어의 문제이며, 공자의 정명사상에 답이 있는 것이며, 말을 똑바로 하면 해결되는 것이며, 대개 주체의 문제를 대상의 문제로 치환하는 속임수를 쓰는 것이며 그래서 구조론이 있는 것이다. 구조론은 말을 똑바로 하자는 거다. 사건은 주체와 대상 사이에서 일어난다. 주체와 대상은 구분되어야 한다. 집합론은 대상화의 오류에 빠져 있다. 반대로 동양사상은 대부분 주체화의 오류에 빠져 있다. 사물은 대상화된 것이다. 사건으로 보는 안목을 얻어야 한다. 대상화든 주체화든 둘 다 잘못이다. 주체냐 타자냐? 주체냐 객체냐? 주체냐 대상이냐? 답은 상호작용이다. 주체도 틀렸고 객체도 틀렸다. 상호작용에는 방향성이 있다. 여러 사건을 한 줄에 꿰는 것이다. 앞 사건에 뒷 사건이 연동되므로 답은 명확해진다. 반대로 속임수를 쓰는 사람은 연결을 깨서 헷갈리게 하는 수법을 쓴다. 뭐든 내려놓아라거나 마음속에 다 있다거나 하며 정신승리를 주장하는게 주체화의 오류다. 전통적으로 말싸움에 이기는 방법이 있다. 상대가 뭐라고 하면 '그래. 네 팔뚝 굵다'를 시전하고 그다음은 '너는 내 아들이다.' 하고 선언해 버리는 것이다. 조선 시대에 유행했던 수법이다. 원래는 '네 똥 굵다.'였는데 거기에 더하여 '너는 내 아들이다.'를 2단 콤보로 넣어주면 완벽하다. 주체화의 오류를 이용하는 수법이다. '네 똥 굵다'는 말은 객관적 기준이 아니라 자의적 기준을 들이댄다는 말이다. '너는 내 아들이다' 하는 말은 나 역시 자의적 기준으로 받아치겠다는 말이다. 말이 안 통하는 인간들이 많다. 객관적 말하기를 배워야 한다. 존재는 사건이며 사건은 주체와 대상의 연결이지 대상 그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관측자와 관측대상 사이에 연결하는 라인을 숫자 1로 정의하는 것이다. 우리는 눈앞에 있는 사과나 호박을 1로 정의한다. 틀렸다. 반드시 관측자가 있다. 수는 관측자인 주체와 관측대상인 객체를 연결한다. 자연수는 일대일 짝짓기다. 대상이 무한히 늘어나면 주체도 무한히 늘려서 무한히 짝을 지을 수 있다. 그러므로 무한은 있다. 러셀의 개소리는 교사도 학급에 포함되는가 하는 물음이다. 이런 것은 시험을 치르느냐, 도시락을 주문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그때그때 다르다. 목적에 따라 다르다. 시험 칠 때는 교사를 빼지만 도시락은 교사도 먹어야 한다. 존재론에서 항상 떠드는게 이런 거다. 인간 밖의 객관적 실재가 존재하느냐 하는 물음이다. 등신 같은 물음이다. 관측자인 인간과 짝짓는게 존재다. 북극의 북쪽에 뭐가 있느냐는 식으로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객관적 실재는 존재한다. 내가 눈을 감으면 우주는 없다. 이런 말이 그런 식의 개소리다. 관측자는 당신이 아니다. 당신이 눈을 감아도 누군가는 그것을 보고 있다. 상호작용이 존재하면 관측자는 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면? 없다. 그런데 남이 안 봐도 자신이 보고 있으므로 관측자는 항상 있다. 하여간 말을 배배 꼬아서 등신같이 하는 자는 때려죽여야 한다. 강물이 흐른다. 강물은 없고 물이 있는 거라구. H2O가 있는 거지. 사람이 있으면 있는 거다. 사람이 있는게 아니고 세포들의 집합이 있는 거지. 이런 식으로 어깃장을 놓는 녀석은 언어를 파괴하고 대화를 거부하는 자이므로 '그래 네 똥 굵다.'로 일차 저격한 다음 '너는 내 아들이다.'를 구사하여 확실히 때려죽여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