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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2850 vote 0 2011.05.26 (17:49:50)

 

  구조론은 근본이 수학이다. 구조론은 계에 몇 단위의 질서가 구축되어 있는지를 계량한다. 하나의 단위 질서는 곧 하나의 대칭구조다. 공간에서 작용반작용의 방향대칭과, 시간에서 원인과 결과의 순서대칭이 있다. 순서와 방향의 시공간적 대칭이 하나의 질서단위를 이루며, 계에 이러한 질서단위가 다섯개 존재한다. 이 다섯 질서들 간의 서열을 해명하는 것이 구조론이다.

 

  구조론이 옳은지 그른지는 논의대상이 안 된다. 남이 계산하지 못하는 것을 구조론이 계산해낸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리만 기하학이나 허수개념을 비롯해서 새로운 수학이나 수학적 개념이 등장할 때는 으레 그에 따른 철학적 논쟁이 있어왔지만, 현장에서의 효용성에 의해 결판이 나곤 했다.

 

  다 필요없고 남이 계산하지 못하는 것을 계산해 내면 되는 거다. 쓸모를 입증하면 되는 거다. 그러나 보통은 어떤가? 새로운 것이 등장하면 당연히 그에 따른 철학적 논쟁이 일어나는데, 철학적 논쟁이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자의로 철학으로 규정해놓고, ‘철학으로 과학을 재단해서 잘 되는 꼴을 못봤다’는 식으로 바꿔치기 한다. 주객전도가 되는 것이다.

 

  예컨대 진화론이 새로 나오면 그게 영향을 미쳐서 스펜스의 사회진화론이라는 사이비 철학이 따라 나온다. 인종주의 사상이다. 종교인이 진화론을 비판하되 인종주의 철학이 틀렸으니 다윈도 틀렸다는 식으로 환원주의 논법을 구사한다면? 구조론에 대한 비판도 이런 식이다. 구조론은 철학이니까 틀렸다고. 구조론은 환원주의니까 틀렸다고. 잘 들여다보면 그 비판논리 자체가 환원주의 수법이다.

 

  환원주의-연역적 철학 중에서 쓸만한게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수학은 본래 환원주의고 연역이다. 옛날에는 수학자 중에도 철학자들처럼 얄궂은 수학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신의 완전한 수가 있다든가, 소수에 마법의 힘이 숨어 있다는 식이다. 그렇게 수학을 엉터리로 해놓고.. ‘거봐 수학은 틀렸잖아’.. 이렇게 말하면 곤란하다. 그 수학자가 엉뚱한거지 수학이 틀린건 아니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발표하자 그걸로 밑천삼아 엉뚱한 철학을 만들어낸 사람도 도처에 많았다. 스님이 상대성이론과 금강경을 연관시킨다든가 하면서 한편으로 부적을 팔아먹는 식이다. 그 스님의 부적에 효험이 없다고 아인슈타인을 비난한다면 곤란하다. 자신이 구조론을 자의로 환원주의식 꿰맞추기 해석해놓고 그걸 토대로 논리를 전개하면 곤란하다.

 

  구조론은 한 마디로 대칭성을 위주로 과학을 해야 효율적이라는 거다. 이건 과학자들이 수학의 기초 위에 학문을 해야한다는 말처럼 지극히 당연한 거다. 그리고 현재 과학계의 방법론에 그 점에서의 비효율성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대칭성은 뼈대다. 살이 너무 많이 붙어서 혼란이 일어난다.

 

  예컨대 이런 거다. 어떤 사람이 사상의설을 하는데 살이 피둥피둥 찌면 태음인이고, 상체근육을 키우면 태양인이라는 식이다. 그렇다면 밥만 먹어도 체질이 바뀌고 운동만 해도 체질이 바뀌나? 덧붙은 살은 빼고 건조한 뼈만 가지고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거다. 이건 비유다. 부디 오해하지 말라.

 

구조론은 새로 일어난 수학이다. 지금까지 구조론과 같은 콘텐츠를 가진 수학이 없었다. 수학이 새로 바뀌면 거기에 연동되어 과학의 방법론도 바뀌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므로 새로운 수학인 구조론은 타성에 빠진 기존의 과학에게 이러쿵 저러쿵 말할 자격이 있다.

 

구조론이 과학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구조론도 과학이다. 리만기하학은 수학이지만 그 리만기하학에 의해 일구어진 물리학은 과학이다. 구조론도 같은 거다. 전개하면서 수학과 과학에 양다리를 걸친다. 새로운 수학이 기존의 과학을 우습게 만들어버린 예는 역사이래 흔하다. 뉴턴이후 그 당시의 대단한 과학이었던 연금술이 물먹었듯이 말이다.

 

과학에 대한 구조론의 입장은 자연과학이든 사회과학이든 구조의 대칭성을 따라가며 건조하게 논리를 전개하는 것이 지적, 물적 비용을 더 적게 들인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지는 구조론을 배운 사람들이 구조론을 적용하여 효율을 생산해내느냐에 달려 있다. 실제로 비용이 절감되었다면 구조론이 맞는 거다.

 

갈릴레이가 맞고 뉴턴이 맞는 것은 갈릴레이와 뉴턴의 방법으로만이 인간이 달에다 로켓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구조론으로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분명히 있으므로 구조론이 맞는 거다. ‘난 여태 그런 이야기 들어본 적 없다’는 항변은 불필요, 원래 새로운 것이 나올 때는 항상 그런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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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론은 대칭성을 위주로 전개된다. 대칭은 다섯이 있다. 점, 선, 각, 입체, 밀도의 대칭이 있다. 이들 사이에 우선순위의 질서가 있다. 그 질서를 아는 것이 구조를 아는 것이다. 세상 모든 문제의 해답 또한 이 안의 질서에 있다.

 

점이 대칭을 이루려면 선이, 선이 대칭을 이루려면 각이, 각이 대칭을 이루려면 입체가, 입체가 대칭을 이루려면 밀도가 전제조건으로 필요하다. 선이 없는 상태에서 점 둘이 대칭을 이루지 못한다. 반드시 선이라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자연에서 구조 단위의 전개순서는 밀도, 입체, 각, 선, 점의 순서가 되며 밀도 쪽이 사건의 원인측이 되고, 점 쪽이 사건의 결과측이 되어 인과율을 성립시킨다. 각각 질, 입자, 힘, 운동, 량으로 나타난다.

 

◎ 질 – 밀도의 대칭(원인측)
◎ 입자 - 입체의 대칭
◎ 힘 – 각의 대칭
◎ 운동 - 선의 대칭
◎ 량 – 점의 대칭(결과측)

 

구조론의 효용은 위 다섯 대칭 중에서 지금 어느 단위의 대칭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보고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아는 것이다. 지금 밀도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면 다음에는 입체싸움으로 변한다. 정치판이라면 지금 어느 레벨에서 싸움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보고 다음 어느 레벨에서 싸움이 일어날지 아는 것이다.

 

정치판에서 이회창처럼 악재가 터져서 낙마하기도 하고, 이명박처럼 악재가 터지면 오히려 더 표가 결집되는 일도 일어난다. 그 차이는 어느 레벨에서의 대칭이냐에 따라 결정된다. 이회창이 경상도 사람이었다면 병역문제, 호화빌라 등 이회창의 모든 악재는 오히려 호재가 된다. 이인제나 손학규가 민주당에서 물을 먹는 이유도 이와 정확히 같다.

 

구조를 알면 이런 것을 손금보듯이 알 수 있다. 복잡하게 머리 굴릴 일 없이 그냥 척 보고 안다. 기관차를 점검하는 기사는 망치로 때려보고 고장부위를 안다. 계에 밀도가 걸려있기 때문에 비중만 보면 알수 있다.

 

◎ 기존의 과학-이게 이렇게 되면 저게 저렇게 되고 이 논리를 복잡하게 추적하여 마침내 답을 알아낸다.

 

◎ 구조론 – 상부구조가 하부구조를 통섭하므로 어느 레벨에서 문제가 일어났는지만 보고 다른 정보들은 모두 기각시켜 버리므로 1초만에 바로 안다.

 

보병이 싸우면 숫자가 많은 쪽이 이기고, 기병이 싸우면 방향전환이 빠른 쪽이 이기고, 포병이 싸우면 화력을 집중하는 쪽이 이기는 식으로 레벨에 따라서 승부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바로 알 수 있다. 야구는 투수놀음이라는 말이 대표적이다. 실점을 안 하는 완벽한 투수가 있다면 승부는 볼 것도 없다. 점수를 안 주므로 일단 안 진다. 타력의 차이는 기각이다. 논외다.

 

과학의 기술은 이러한 계의 대칭성을 위주로 하여 건조하게 기술되어야 한다. 감정적인 표현 들어가서는 안 된다. 뼈만 있고 살은 없어야 한다. 과학에 낭만적인 표현은 곤란하다. 물론 표현의 자유는 있으니까 부수적으로 그런 표현이 들어갈 수도 있다. 옛날에는 수학에도 낭만이 있고 마법이 있었다. 수학이 발달하자 그런 군더더기들이 불필요해져서 지금은 없다. 지금 과학에 그런 군더더기가 있다는건 그만큼 낙후했다는 것, 즉 앞으로 발달의 여지가 있다는 거다.

 

과학은 건조한 공식을 앞에 세워놓고 이야기해야 한다. 공식이 나와야 진짜배기 과학이 시작되는 것이다. 해석은 어디까지나 뒤를 따르는 것이다. 본말이 전도되어서는 곤란하다. reputation <- 이런 단어가 앞선다면 격이 떨어지는 거다. 딱 보면 ‘이 분은 낮은 레벨에서 놀구 있군.’ 이런 판단이 서는 것이다. 왜냐하면 reputation은 위 질, 입자, 힘, 운동, 량 중에서 힘과 운동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평판은 상대적인 기준이다. 다른 걸로 대체가 안 되는 절대적인 기준을 들이대야 한다. 질로 갈수록 절대적이고 양으로 갈수록 상대적이다.

 

한의사에게 아토피를 물으니까 기(氣)나 열(熱) 이런걸 이야기 한다던데 이 또한 실체와 기능 중에서 기능에 해당한다. 물론 한의사들은 기를 실체개념으로 주장하지만 잘 들어보면 기능에 해당함을 알게 된다. 상부구조와 하부구조 중에서 하부구조에 속하는 운동이나 양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건 격이 떨어지는 것이다. 어느 팀이 이기느냐는 거의 투수력에 의해 결정되는데 정신력 어쩌구 하며 자꾸 딴 이야기 나오면 피곤한 거다.

 

● 질문- 왜 밥을 먹는가?

 

◎ 맛이 있어서 먹는다. - 양에 해당한다.
◎ 배가 고파서 먹는다. - 운동에 해당한다.
◎ 고기가 없어서 먹는다. - 힘에 해당한다.
◎ 살기 위해서 먹는다. -입자에 해당한다.
◎ 열량이 소비되므로 먹는다. - 질에 해당한다.

 

질에 해당하는 답변을 내놓아야 한다. 신진대사에 의해 열량이 소비되기 때문에 밥을 먹는 것이다. 물론 맛있어서 먹는다고 대답을 할 수도 있지만 의미없는 답변이다. 그건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맛이 없어도 먹을 때는 먹어야 하는 것이다. 절대적인 답변을 내놓아야 한다.

 

절대적인 답변은 24시간 먹는 거다. 밥먹는 시간에 먹는건 먹는게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안의 세포들은 왕성하게 먹어조지고 있다. 내가 태어난 이후 먹지 않은 순간은 단 1초도 없었다. 밥먹기는 24시간 일어나며 탄생부터 죽음까지 줄곧 진행되는 것이며, 내가 임의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극도로 굶주리게 되면 세포들은 내 몸의 근육을 먹어치우기 시작한다.

 

먹지 않아도 먹는 것이다. 이 레벨에 올라가야 진짜배기 답이 나와준다. 다시 말해서 침팬지가 특정 시점에 특정 행동을 했다거니 하는 보고들은 점심시간에 밥을 먹는다는 주장처럼 비과학적인 보고인 것이다. 밥을 점심시간에 먹나? 천만에. 태어난 이후 단 한 순간도 밥을 먹지 않는 때는 없었다. 절대성이다.

 

◎ 외계인 - 지구인간이 밥을 먹는 이유를 알아왔습니다. 이유는 점심시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 외계인 대장 - 님 맞을래요?

 

사과가 왜 떨어지지? 바람이 불어서 떨어졌다. 이런 수준의 멍청한 소리인 거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24시간 중력은 작동하고 있다. 물론 바람이 불어서 그 시점에 그 사과가 떨어진 것은 맞다. 그러나 이는 과학적인 이해가 아니다.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사과가 떨어지고 있는 절대성의 레벨에 도달해야 뭔가를 아는 것이다. 시간과 장소 들어가는 상대성은 논외다.

 

이명박이 아닌 이유는 상대성이 작동하는 즉 특정 시간과 장소에만 맞는 주장을 하기 때문이다. 실용주의는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만 상대적으로 맞고 합리주의는 항상 맞는다. 원칙과 상식은 항상 필요한 거고, 실용은 그게 먹히는 타이밍이 있다. 항상 맞는 것을 이야기해야 한다.

 

대칭은 ‘이게 이렇게 되면 저게 저렇게 된다’는 공식이다. ‘가로 얼마에 세로 얼마면 면적은 얼마가 된다’는 공식과 같다. 이러한 대칭의 전개순서와 방향을 실마리로 삼아 모든 문제를 풀어가야 하며 예외는 없다.

 

침팬지의 무리라도 예외없이 공식은 적용된다. 침팬지의 행동을 결정하는 첫 번째 원인은 애초에 질이 성립되고 있느냐, 즉 계에 밀도대칭이 일어나고 있느냐다. 닫힌계라야 한다. 침판지를 가두는 우리가 없을 때와 있을 때, 그 우리에서 침팬지가 한 마리일때와 두 마리일 때, 그 우리 안에서 암컷과 수컷의 성비가 얼마일때에 따라, 침판지의 행동이 다르게 결정되는 것이다. 그것이 질이다.

 

침판지가 평판을 얻으려 한다거나 하는건 2차적인 것이며 그야말로 소설을 쓰는 것이다. 물론 동물에 따라 차이가 있다. 두 마리의 고양이와 두 마리의 개는 분명히 다르다. 고양이라면 영역을 반씩 나눠갖고 서로 노려볼 것이고, 개라면 영역을 공유하며 서열을 정할 것이다.

 

중요한건 이러한 고양이와 개의 행동차이가 순전히 우리의 면적, 우리 안에 위협세력이 있는지, 또 우리 안에 경쟁자 무리가 있는지 등의 바운더리 컨디션에 따라 전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의 내막을 모두 알아버리면 과학자들은 뻘쭘해질 것이다.

 

reputation은 24시간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이건 덧붙여진 살이고 건조한 뼈대를 봐야 한다. 뼈대는 바운더리가 좁은가 넓은가다. 긴장이 가득차면 바운더리는 좁아지고 긴장이 엷어지면 바운더리는 넓어진다. 즉 긴장도에 따라 침팬지가 그 공간을 넓게 혹은 좁게 여기는 것이다. 거기에 따라 자기행동이 결정된다.

 

간단하다. 물리학이다. 힘이 세면 그쪽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집단에서는 의사결정의 단계가 힘이다. 에너지다. 의사결정단계가 복잡하면 에너지가 많이들고 의사결정 단계가 적으면 에너지가 적게든다. 침팬지는 어떤 경우에도 의사결정 에너지가 적게 드는 쪽으로 행동하며 그 의사결정에너지의 크기는 바운더리의 크기, 개체수, 경쟁무리의 존재, 수컷의 난동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

 

좁은 공간에 두 침팬지 무리가 전투중이라면 모두 공간이 좁다고 여기고 긴장은 심각해지며 의사결정속도는 매우 빨라진다. 여기에 따라 함수관계가 성립하는 것이며 그 함수관계를 계산한 수학공식을 들고나와야 제대로 된 과학인 것이다. 그래야만 복잡하게 관찰하지 않고 단번에 파악할 수 있다.

 

버릇이 나쁜 개를 길들이려면 개주인은 매우 노력을 하지만 TV에 늘 나오는 아저씨는 단번에 제압해버린다. 즉 개를 길들이는데 들이는 에너지비용이 훨씬 절감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인 것이다. 그 분은 개를 관찰하지 않는다. 그냥 다 안다는 듯이 바로 제압 들어간다. 솜씨좋은 개장수 아저씨처럼 단번에 맹견을 제압하고 복종시켜 버린다.

 

이게 이렇게 되면 저게 저렇게 된다는 대칭성 원리에 따라서 모두 결정되어 있다. 낙동강 모래알의 숫자가 몇 개인지 세어볼 필요는 없다. 모래의 진흙의 비율만 조사하면 된다. 최소화의 원칙은 어김없이 적용되어야 한다. 즉 과학은 되도록 간단히 기술되어야 하는 것이다.

 

감기라면 인체와 바이러스의 세력싸움이다. 거기에는 위생, 운동, 난방, 휴식, 투약, 격리 등의 여러 조절장치들이 있다. 좀 더 세분하여 더 많은 사항들을 주워섬길 수도 있다. 과학은 이를 되도록 ‘조절’이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최소화 되어야 한다. 복잡한 현상을 단순하게 기술해야 한다.

 

모든 병은 어딘가 끊어져서 일어난다. 감기 역시 바이러스와 인체의 세력조절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흐름이 끊어져서 일어난 것이다. 위생, 운동, 난방, 휴식, 투약, 격리 등 매우 많지만 본질은 조절 하나다. 사용하는 단어 숫자를 줄이자는 거다. 조절 하나로 위생, 운동, 난방, 휴식, 투약, 격리를 대체하는 거다.

 

구조론의 해답은 질이다. 질에 도달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그런데 질을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질은 24시간 작동하고 있는 거다. 정치나 인문 사회과학으로는 되도록 의사결정단계를 줄이려고 하는 힘의 방향성이 질이다. 모든 문화, 예술, 정치, 경제, 사회 등이 의사결정단계를 줄이려 한다.

 

자본주의는 CEO에게 맡겨서 의사결정 단계를 줄이려 하고 공산주의는 독재자에게 맡겨서 그 단계를 줄이려고 한다. 자연과학에서는 에너지가 지름길을 가는 원리다. 이 역시 단계를 줄이려고 한다. 한 단계를 줄일때마다 효율성이 얻어지고 그 효율성이 자연을 작동시키는 에너지원이 되기 때문이다.

 

어느 분야든 계가 존재하고 그 안에 밀도가 걸려있으며 그 밀도는 뭔가 단계를 줄이려고 하고 그 방향으로 일제히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물질의 질은 무엇인가? 우주 안에 밀도를 주고 있는 그 무엇이다. 그러나 보통 우주를 논할 때는 진공이라는 표현을 쓴다. 진공은 아무 것도 없다는 거다.

 

그러나 무언가 있다. 과거에는 에테르 어쩌고 하며 뭔가 있다고 했고 요즘은 초끈 어쩌고 하는데 분명한건 밀도가 걸려있다는 사실이다. 그게 무엇인지는 아직 규명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과학자들이 찾으려고 하는 최종입자는 힉스입자 어쩌구 하지만 입자 이전의 무엇이 있다. 입자는 만유척력이 대칭된 것이다. 즉 입자가 있다면 이미 뭔가 둘이 대칭되어 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므로 힉스입자가 최종입자라면 그 이전에 뭔가 더 있어야 하는 것이다.

 

구조론에 관심이 없어도 서양의 구조주의 철학 정도는 들어봤을 것이다. 구조주의가 최근 학계의 큰 조류임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구조론은 거기에다 콘텐츠를 채워넣은 것이다. 구조주의 철학자들이 구조론은 몰라도 구조론의 관점은 가지고 있다. 축과 대칭 위주로 관찰해야 한다는 정도는 그 사람들도 알고 있다.

 

구조론은 몰라도 되지만 축과 대칭 위주로 이야기가 돌아가며 세상이 굴러간다는 정도의 상식은 알고 있는 것이 좋다. 현대인들이 그 축과 대칭이라는 뼈대에 덧붙여진 너무나 많은 살들과 불필요한 군더더기 장식들에 파묻혀 허우적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구조는 어떤 경우에도 지름길을 제시한다.

 

복잡하게 말하는 것을 단순화 시킨다. 열마디 할 말을 한 마디로 줄인다. 핵심을 짚어내고 곁가지를 쳐낸다. 예측의 수준이 향상된다. 50 50으로 팽팽한 전쟁터에서 1프로만 올려도 전투를 계속하면 결국 승리한다. 도박장에서 돈을 딸 확률이 51프로이면 배팅을 계속하면 언젠가는 판을 휩쓴다. 구조론은 적어도 1프로 향상시킬 수 있다.

 

 

 

PS.. 

옛날에 송두율 교수가 북한에 대해서 '내재적인 관점' 어쩌고 하며 두둔했던 기억이 있는데, 그에 대한 찬반을 떠나서 송두율의 내재적인 질서도 서구 구조주의 철학에 영향을 받은 구조적인 관점이라 할 수 있다. 이건 마르크스주의와 다르다. 마르크스주의로 본다면 북한은 반사회주의 집단이다. 전혀 사회주의 이론과도 맞지 않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인류의 진보라는 전체적인 보편질서에 꿰어맞추기를 하려고 했던데 비해, 구조주의 인류학자들은 부족민 사회에도 그 사회 특유의 고도화 된 내재적인 질서가 작동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말하자면 축과 대칭의 원리로 계 내부의 질서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구조주의 철학자의 관점이 필자가 주장하는 '이게 이렇게 되면 저게 저렇게 된다'는 구조적인 관점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방법이다. 결론적으로 송두율은 북한을 아프리카 부족민사회 취급하고 있다. 그렇거나 말거나 문화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이 관점이 인류학적 관점, 혹은 학문적인 입장에서는 상당히 유의미한 보고다. 특히 아랍-아프리카의 낙후성을 이해하는 데는 꽤나 쓸모있는 도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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