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글에 리플로 쓰다가 길어져서 별도로 씁니다-
wson / 이런 식의 이의제기는 이곳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이곳은 구조론 사이트입니다. 구조론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이 맞습니다. 예컨대 사마천이 사기를 쓸 때, 역사기술에 있어서의 원칙을 정해서 썼는데 그 이전에도 역사가 있었지만 개판이었죠. 사마천이 '역사를 이런 식으로 쓰면 안 되잖냐. 하고 이의를 제기하는데, '사마천씨 당신이 몰라서 그러는데 원래 역사 이렇게 해 왔어. 다들 이렇게 한다니까!' 하고 반격하면 대화가 안 되는 거지요. 뭐 애초에 논점이 다르니까요. 근데 누가 이길까요? 모든 기득권 엉터리 역사학자들이 사마천을 무시해 버리면 사마천이 지겠죠. 그러나 이기고 지는 걸로 판정을 내려야 하는 걸까요? 제가 기존의 과학이 틀렸다고 하는 것은, ‘대체재가 있다’는 전제 하에 말하는 것이며, 대체재도 없는 사람이 그런 말 하면 안 되죠. 한의사들이 잘 치료하고 있는데, 대체재도 없는 무당이 와서 ‘당신네 한의사들 과학적 이론도 없이 개판이잖아. 음양오행 좋아하시네.’ 하고 시비하면 안 되죠. 그러나 대체재가 있는 양의사가 와서, ‘한의사 당신들 개판이잖아. 음양오행 그거 웃겼어.’ 하고 시비할 자격 있습니다. 결론은 이런 문제에 대한 판단은 대체재가 있느냐, 즉 대채제의 가치를 중심으로 판단해야 하는 겁니다. 구조론을 중심으로 논해야 한다는 거죠. ◎ 양의사 - ‘한의학은 엉터립니다.’ 이건 김병만 코미디죠. 다시 말해서 양의학 시스템이 한의학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양의사가 정당한 것입니다. 한의학이 실제로 어떻든 그런 해명은 이미 논점에서 벗어난다는 거죠. 양의사가 한의학의 사상의설을 비판하면서 예를 잘못들었다고 해도 그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지요. 중요한건 양의학이니까. 양의학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한의학을 한다면 한의학도 과학입니다. 이미 양의학이 있는데 한의학을 한다면 비과학이죠.(물론 보조적으로는 한의학도 사용할 수 있으나, 주객이 엄연. 주객전도 곤란. 양의가 주. 한의는 보조.) 말했듯이 쇠도끼가 출현하기 전에는 돌도끼가 과학이었습니다. 돌도끼의 우수성 여부에 따라 과학이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쇠도끼의 우수성에 따라 돌도끼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 한의학의 운명을 한의학이 자체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양의에도 일부 문제가 있으므로 한의학이 생존하고 있는 것. 양의가 한의의 운명을 결정한다. 결론적으로 ‘사실은 돌도끼가 이렇다’는 해명은 필요없는 거죠. 돌도끼의 운명은 돌도끼가 결정하는게 전혀 아니니까. 그리고 침팬지 관련내용 그거 다 엉터립니다. 침팬지를 관찰하고 자시고 간에 도무지 필요가 없습니다. 침팬지 그런 행동은 인간행동 안에도 다 있습니다. 인간들도 야당은 공격적이고 여당되면 온순하게 태도 바꾸고 공약 엎습니다. 각인이니 명성이니 이런 따위는 대개 쓸데없는 비과학입니다. 침팬지든 인간이든 집단은 의사결정원리 곧 의사결정의 구조적 효율성을 따라 움직입니다. 개가 짖는 이유는 도둑을 물리치기 위함이 아니라, 모르는 냄새를 맡으면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입니다. ◎ 위하여 - 도둑을 물리치기 위하여 ( X ) “외국 여행 중에 본 노랑머리 아이나 검은 피부 아이에 대해서는 망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reputation 인식/축적 과정이 관련되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 이런건 정말이지 바보같은 소립니다. 노랑머리나 검은피부에 대해서는 의사결정에 장애가 있는 겁니다. 경상도 사람이 '우리가 남이가' 하는 것은 reputation 이 인식/축적이 안 되어서 그런게 아니고 의사결정 장애 때문입니다. 말이 안 통해서 그런 겁니다. 10대 소년들이 아빠하고 말 안 하는 것과 정확히 같습니다. 이건 유시민과 민주당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 유시민의 속내 - ‘내가 민주당 가면 지분을 얼마나 줄 것인가? 나 외에도 이해찬, 문재인, 강금실 등 정당한 대접을 못받고 있는 사람은 졸라리 많은데 그 많은 자리를 민주당이 다 보장할 수 있나? 민주당이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개혁노선을 얼마나 수용할 의사 있나?’ 이런걸 내놓고 말을 못한다는 거죠. 그러므로 대화가 안 되는 겁니다. 왜? 이런 말은 먼저 꺼내면 떼 쓰는 거 같아서 정치적으로 불리합니다. 카드 칠 때 자기 패 보여주고 카드 칩니까? 결국 서로 먼저 상대방이 패를 까기 원하기 때문에 유시민이나 민주당이나 대화가 안 되는 겁니다. 노랑머리나 검은피부라도 마찬가지죠. 혹 오해받아서 좋은 일 하고 욕먹을까봐 망설이는 거고, 의사결정이 힘들기 때문에 결단을 못 내리는 거죠. 결론적으로 안해봐서 못하는 겁니다. 노랑머리 아니라 빨간머리라도 그런 일 해 본 사람은 합니다. 순전히 안 해봐서 못하는 거. 연습하면 잘만 합니다. 젊은 침팬지가 암컷을 괴롭힌다는 표현은 비과학적인 표현입니다. ‘괴롭힌다’ 이런 감정적 표현 쓰면 안 되죠. 젊은 침팬지는 자기가 의사결정을 하려고 사태에 개입하는 것입니다. 이건 과학적 표현입니다. ‘우두머리가 되면 온순해진다’ <- 이것도 비과학입니다. 이런 단어 쓰면 안 되재요. 사마천이 역사를 쓰면서 이런 감정과잉 다 지웠습니다. ‘이건 역사가 아냐. 소설이지.’ ◎ ‘괴롭힌다, 온순하다.’ <- 이건 과학자가 쓸 언어가 아닙니다. ‘폭력성’, 이런 말도 잘못된 말입니다. ‘의사결정에 개입.’ 이게 과학적 표현입니다. 젊은 침팬지의 폭력성이 심해지는게 아니라 개입이 수위를 넘는거죠. 의사결정에 더 많이, 더 깊이 개입하는 겁니다. 젊은 침팬지는 순전히 호르몬 작용에 의해, 자신이 무리를 통제하지 못하면 지속적으로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에, 집단의 의사결정에 참여하려고 하는 것이며, 리더가 되면 온순해진게 아니라 스트레스가 줄은 겁니다. 말했듯이 개가 짖는 것은 스트레스 때문입니다. 개는 도둑을 쫓을 생각이 눈꼽만큼도 없습니다. 개는 주변에 모르는 냄새가 있으면 무조건 스트레스 받습니다. 젊은 침팬지의 폭력은 호르몬 작용에 따른 자신의 스트레스를 집단에 전가하는 것입니다. 집단 전체가 스트레스 받게 만드는 것입니다. 스트레스가 일정한 한계에 도달하면 집단이 이심전심으로 의사결정을 하는데 이 과정은 순전히 물리학입니다. 백퍼센트 기계적으로 진행됩니다. ◎ 평판 어쩌구 <- 너무나 초딩스런 발상. 수컷 침팬지는 호르몬 영향으로 의사결정에 참여하지 못하면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으며, 이 스트레스는 지랄발광을 하게 만들어 폭력적으로 표출되는 것이며, 그 스트레스가 집단 모두에 전해져서 일정한 임계를 넘었을 때, 집단은 이심전심으로 의사결정을 하게 되며 그 결과는 젊은 수컷이 리더가 되는 거지요. 그리고 이 수법은 히틀러가 돌격대를 내세워서 베를린 시내에서 시가행진을 하는 방법으로 계속 시민사회에 지속적으로 스테레스를 가한 것이나, 무솔리니가 검은셔츠단으로 계속 시가행진을 한 것이나, 가스통 할배가 서울시청 앞에서 집회를 한 것이나 정확히 같습니다. 탈레반이 테러를 하는 것도 집단에 스트레스를 가하는 방법입니다. 우리의 촛불시위도 마찬가지구요. 침팬지 이야기에 대한 구조론의 결론은 ‘소설 쓰고 있네’입니다. 말도 안되는 접근법입니다. 애초에 방향을 잘못 잡았습니다. 진리는 보편성을 가집니다. 침팬지 무리에서 관찰되는 현상은 인간사회에도 똑같이 관찰되어야 합니다. 침팬지가 집단에 스트레스를 가하는 것을, 구조론은 질로 설명하는데, ‘밀도’라는 표현을 쓰지요. 닫힌계 안에 밀도를 증가시키는 것입니다. 밀도가 일정한 임계에 도달할 때, 한 부분에서 일어난 사건이 무리 전체에 직결로 도달됩니다. 그럴 때 집단의 의사결정이 일어나며 그것이 이심전심입니다. 유마거사가 침묵의 방법으로 스트레스를 가하여, 삼천명으로 하여금 이심전심 주목하게 한 것이나, 김기덕의 아리랑에 초반 십 분간 대사가 한 마디도 안 나오는 거나, 다 마찬가지로 집단에 스트레스를 가하여 주목을 끄는 초식입니다. 아이가 삐쳐서 말 안하고 있는 것도 집단에 스트레스를 가하는 방법이지요. 자기가 스트레스 받으니까 남에게 그 스트레스를 전가하는 겁니다. 아기가 명성이나 평판을 노리고? 천만에. 걍 스트레스 받은 거에요. 반대로 젊은 침팬지가 집단에 상당한 스트레스를 가했는데도 그것이 일정한 임계에 도달하지 않으면, 집단의 한 부분에서 일어난 사건이 무리 전체에 전달이 되지 않습니다. 즉 암컷 일부는 그 사건을 모르고 있거나 무관심하다는 거지요. 젊은 침팬지가 소리를 꽥 질렀는데 그 소리를 듣지 못한 암컷이 있다면? 무리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면? 의사결정이 안 됩니다. 왜? 침팬지 마을에는 강호동이나 유재석이 없으니까요. ◎ 인간들 사회 - 강호동이 소리를 빽 지른다. 혹은 유재석이 능수능란하게 사회를 본다.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주의를 기울인다. ◎ 침팬지 사회 - 젊은 침팬지가 소리를 빽 지른다. 일부 암컷은 주의를 기울이나 다른 일부는 무관심하다. 이 경우 암컷은 늙은 수컷을 지지한다. 젊은 침팬지가 소리를 빽 질렀을 때, 그 침팬지 무리 모두가 그 사건에 주의를 기울이고 주목하게 될때까지 젊은 침팬지의 난동은 계속됩니다. 이걸 명성이나 평판이라고 하면 비과학적인 언어사용이 되고, 구조론으로 말하면 닫힌계 안에서 밀도가 임계에 도달했을 때입니다. 어떤 하나의 행동으로 집단 모두가 주목하게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이 리더입니다. 거기서 의사결정이 일어나는 거죠. 그리고 보통은 젊은이가 늙은이에게 시비를 걸어서 떠들썩한 구경거리를 연출하는 방법으로 명성을 닦고 평판을 얻어 차차로 집단의 주목도를 높여나갈 수 있지만 이건 과학의 언어가 아니죠. 박지성이나 김연아가 많은 광고료를 받는 것은 명성이나 평판 때문이 아니고 단지 시청자의 주목도가 높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주목도는 기계적인 겁니다. 즉 옥동자가 무슨 평판이나 명성 때문에 광고에 나오는건 아니라는 거지요. 백인 쌍둥이 아기가 아다다다다다다다 하는 유투브 동영상이 요즘 광고에 나오던데 그 아기가 무슨 명성이 있고 평판이 있겠습니까? 시청자의 주목도를 높일 수만 있다면 뭐든 상관없습니다. 개도 광고모델 됩니다. 개가 reputation을 얻어서 광고모델 되나요? 천만에. 시청자의 주목도는 기계적입니다. 주목만 끌 수 있다면 떵도 광고모델 됩니다. 욕먹을까봐 안하지. 젊은 수컷이 난동을 부려도 무리 전체가 긴장하지 않으면 암컷이 늙은 수컷을 지지하는데, 사실은 늙은 수컷을 지지하는게 아니라, 무리 전체가 긴장하지 않으니까 자기도 어쩔 수 없는 거죠. 전쟁이 났는데 젊은 신참 소대장이 ‘1소대 집합’ 이라고 소리를 질러도 정보가 집단 전체에 전달이 안 됩니다. 근데 늙은 하사관이 나지막하게 ‘집합’이라고 하면 익숙한 목소리니까 다 알아듣고 모입니다. 이때 암컷이 늙은 하사를 지지하는게 아니고, 젊은 소대장의 목소리로는 정보가 전달이 안 되어서 어쩔 수 없는 겁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때 병사들의 판단은 자기 생각을 따르지 않고 남의 의사를 따릅니다. 지난 대선에 이명박 찍은 자들은 이명박 지지해서 찍은게 아니고 남들이 이명박을 찍을 거라고 판단해서 찍은 겁니다. ◎ 이명박을 지지해서 투표했다. - 얼마 안 됨. 물론 자기 말로는 지지해서 투표했다고 말은 하더라도 실제로는 당선될걸로 예측했기 때문에 지지한 겁니다. 암컷 침팬지가 늙은 수컷을 지지한 것은 좋아서 지지한게 아니고 다른 암컷이 그렇게 할거라고 판단해서 한 겁니다. ◎ 의사결정의 법칙 - 의사결정은 의사결정이 가능한 방향으로 결정한다. 진보진영에서 옳은 주장을 하고 다수가 지지한다 해도 ‘실제로 그게 되겠나? 절차가 복잡한데 중간에서 에러나서 틀어지겠지. 아마’ 이렇게 판단하면 막상 투표장 가서 한나라당 찍습니다. 다시 말해서 복지를 지지하지만 복지를 안해봤기 때문에 설마 그게 되겠나 싶어서 딴나라당 찍은 거죠. 결론적으로 한국인이 복지를 지지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안해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조건 복지를 경험하게 해야 합니다. 경험하면 무조건 지지합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무상급식은 큰 의미가 있는 거죠. 경험은 행동을 낳으니까. 침판지가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 의사결정원리를 따라 의사결정이 실제로 일어나는 방향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 행동은 기계적이며 물리적으로 실험하여 입증할 수 있고 이미 구조론에서는 입증이 되었죠. ◎ 실험방법 - 방 안에 사람을 가득 몰아넣은 다음 집에 불을 지른다. 이때 불 지른 사람이 ‘불이야’ 하고 소리 지르면 다들 튀어나간다. 그 순간 방화범은 리더가 된 것이다. 자기 말에 모두들 따라 움직였으니까. 젊은 침팬지의 난동도 같은 것입니다. 방화범이 reputation을 얻은건 아니구요. 그저 공동체에 불을 지른 것입니다. 침팬지의 불지르기는 순전히 호르몬 작용에 따른 스트레스 때문입니다. 과학은 물리학, 수학의 언어로 기술되어야 합니다. 구조론의 대칭원리를 중심으로 주장을 풀어가야 한다는 거죠. 닫힌계 안에서 스트레스를 포화상태까지 끌어올렸을 때 질 다음의 입자가 만들어집니다. 열개의 구슬이 흩어져 있습니다. 이걸 하나로 모으려면 두 손으로 에워싸야죠. 두 손을 점점 좁히면 구슬들이 서로 닿게 되는데 마침내 더 이상 좁힐 수 없는 상황까지 손을 좁히면, 구슬집단 일부에서 일어난 일이 구슬무더기 전체에 전달이 됩니다. 즉 압축이 되어 부분에서 중앙까지 직결로 연결되어 정보소통이 일어나는 거죠. 만원버스에 승객이 꽉 차면 그 승객중 한명이 움직여도 버스 전체에 정보가 전달되는 것입니다. 이 단계를 구조론은 입자라고 말합니다. 질에서 입자로 이행하면 무리의 대표자가 탄생합니다. 즉 여러 개인들로 이루어진 무리가 리더를 세워서 하나의 단일한 의식을 가진 단독자처럼 행세하는 것입니다. ◎ 질은 결합한다. - 집단에 스트레스를 가하여 서로간의 관계를 밀접하게 한다. 하여간 이 정도만 하죠. 구조론의 질 입자 힘 운동 량에 다 나오는 이야기구요. 침판지 이야기는 한 마디로 멍청한 소리입니다. 비과학적이에요. 제가 이렇게 말하는데 ‘기존 과학계에서 다 인정되는데 왜 시비냐?’ 이렇게 반격하면 안 됩니다. 쇠도끼가 나오기 전까지는 돌도끼가 과학이라니까요. 구조론이 나왔기 때문에 구시대의 연금술이 과학의 지위를 잃는 겁니다. 결론적으로 과학자들이 침팬지를 관찰하여 귀납적 방법으로 지식을 생산했다는건 개소리고 그냥 히틀러, 뭇솔리니 사실을 이식한 거죠. 연역이죠. 침팬지 사육장 필요없고 1학년 2반 교실에서 늘 일어나는 일입니다. 물론 수학자가 수학책 쓸때 ‘괴롭힌다’거나 reputation라거나 이런 말 보조적으로 써도 되기는 됩니다. 그러나 본질은 공식입니다. 수학자는 공식을 내놔야 수학자입니다. 공식이 알맹이고 나머지는 그저 포장지입니다. 공식이란건 ‘이게 이렇게 되면 저건 저렇게 된다’는 대칭성입니다. 그게 방정식으로 나타나죠. 밑변이 3센티에 높이가 3센티면 면적은 얼마라야 한다는 거죠. 형용사 다 빼고 건조한 공식이어야 한다는 거죠. 구조론은 공식으로 말하며 그 공식은 ‘닫힌계 내부에 가해진 스트레스가 임계까지 도달했을 때 그 질에서 의사결정의 핵, 곧 입자가 형성된다’는 겁니다. 그 다음은 한번 경험한걸 반복하는 거죠.
◎ 닫한계(밑변)*스트레스(높이)=의사결정의 리더 탄생(면적)
*** 닫힌 계가 아니라서, 곧 암컷들이 다른 무리를 선택하여 자유롭게 이주할 수 있는 조건이라면 다 튀었을 것. 이는 이명박보다 나은 후보가 없었기 때문에 이명박이 된 것과 정확히 같음. (침팬지는 생존의 어려움이라는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갇혀 닫힌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며, 그런 마음의 감옥이 없는 고양이 집단에 젊은 숫놈 고양이가 난동을 피우면 암코양이들 전부 사라짐. 리더는 개뿔.)
젊은 침팬지가 가한 스트레스가 무리 전체를 완전히 긴장시켰을 때 저절로 리더가 된 것이며, 이때 암컷의 개인적 지지의사 따위는 상관없는 것이며, 한번 경험한 것을 반복하는 원리에 따라, 곧 구조의 효율성에 따른 의사결정 모듈원리에 따라, 암컷 침팬지들은 그저 이미 경험한 젊은 수컷의 리더역할 인정을 반복할 뿐이라는 거죠. 이건 밑변*높이 해서 면적 구하는 공식과 같은 겁니다. 수학이 기호를 쓰고 공식을 쓰는 것은 효율성 때문. 과학도 마찬가지. 얼마전 동물농장이라는 TV 프로그램에서 본 것인데, 주인이 죽은 후에도, 주인이 생전에 쓰던 담요 곁을 절대 떠나지 않고 있는 충성스런 강아지를 간단히 제압해서 단번에 버릇을 바꾼 전문가 왈, ‘개가 뭘 알아서 돌아가신 주인에게 충성을 바치는건 아니고 단지 자신에게 익숙한 행동을 반복할 뿐’이라고 설명하더군요. 개 전문가도 다 아는 상식을 과학자들이 침팬지 갖다놓고 코메디 쓰다니 너무 웃긴거 아닙니까? 코메디야 코메디. 인간이나 침팬지나 단지 자신에게 익숙한 행동을 할 뿐입니다. 경험한건 반복하고, 경험 안 하면 안 합니다. 왜? 그게 의사결정 에너지가 덜 드는 효율적인 행동이니까. ◎ 익숙한 행동을 반복한다. - 과학의 언어 ◎ 주인에게 충성을 바친다. - 비과학적 언어.
돌아가신 주인에게 충성하는 개 드라마는 많고 영화로도 가끔 나오죠. 그거 다 엉터립니다. 개가 그 이야기 들으면 웃습니다. 개는 그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행동 아닌 다른 행동을 결단하지 못 하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갇힌 것이며 충성스럽다고 칭찬할게 아니라 전문가 불러서 그 무형의 감옥에서 풀어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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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쓴 댓글이 있기 때문에 의무감으로 다시 댓글을 달겠습니다.
그러나 김동렬님 말씀대로 역시 여기는 구조론 사이트이기 때문에 가능한 짧게 쓰겠습니다.
저 나름대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김동렬의 구조론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적어도 과학 분야, 특히 진화학 분야의 구조론의 적용에 대해서는) 저로서는 도저히 구조론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 수가 없습니다.
제가 들은 침팬지의 예와 reputation에 관한 이야기는 김동렬님의 전 글 내용 중의 '과거 선택(?) 혹은 행동의 무한 반복'이라는 단순 '일관성'에 대한 반론의 예일 뿐입니다. 즉 동물 행동은 주변 조건을 인식한 그 개체의 주체적인 의지(?)에 의해 얼마든지 바뀌고 선택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선택되는 행동의 폭도 그 동물이 원래 갖고 있던 본능(?)의 여러 선택지들 중 하나일 뿐이겠지만요.
호르몬이 먼저인지 개체의 조건 인식이 먼저인지 더 얘기하고 싶지도 않지만 (호르몬과 같은 생리적 변화만으로 대부분의 동물 행동을 해석할 수 있다는 과감한 발상도 놀랍지 않을 수 없지만),
적어도 저 침팬지 행동의 관찰 결과들을 '비과학'이라고 쉽게 단정지울 수 있다고는 결코 쉬이 생각하지 못하겠습니다.
'괴롭힌다', '온순해진다', '폭력성', 'reputation', 이런 초딩스러운 간단한 용어들은 모두 40년 50년씩 야생 침팬지 무리들을 관찰해온 결과로 그들의 반복되는 행동 패턴들을 설명하기 위해 차용된 단어들입니다.
다른 일체의 선입견들은 가능한 최대로 배제하고서요.
'의사결정 개입'과 같은 용어들을 끌어와야하는 일체의 사전 논리 체계들도 모두 철저히 배제하고서요. 적어도 그 침팬지 무리의 다양한 행동들을 일관성있게 해석하는데는, '의사결정 개입'과 같은 다른 논리들은 전혀 불필요했으니까요.
그리고 이 reputation의 개념은 침팬지 뿐만 아니라 집단을 형성하는 대부분의 동물 종들의 행동들을 해석하는데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에 동물행동학에서 잘 정착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 사회에 적용하는데는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매력을 느끼면서도 조심스러워하지만).
이 모든 성과들이 다 소설일 뿐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계시다면, 사실 더 얘기하는 것도 의미없는 노릇이지만,
소위 현재 통용되는 과학적 연구방법이란 것에 지나치게 얽매여있는 저로서는,
개인의 몇 가지 경험만을 들어 ABO 혈액형의 성격 구분 가능성을 언급하는 것에 비교한다면야 그 많은 우둔한 과학자들의 수십년에 걸친, 소위 과학적 방법론의 검증들을 거친 그들 경험들이 훨씬 더 과학적인 결론이라고 보일 수 밖에 없네요.
사기 이전의 역사에 앞서는 사기의 역사로서, 한의학에 앞서는 양의학으로서, 돌도끼에 앞서는 쇠도끼로서의 구조론.
사실 바로 그런 김동렬님의 구조론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제 노력이 부족해서인지, 제 개인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형편에 이르러 너무나 아쉽습니다.
wson /
개와 고양이의 차이는 닫힌계냐 열린계냐로 전적으로 결정됩니다.
관찰하고 자시고 간에 필요도 없어요.
수학자는 1+1=2 하나로 끝내지
과연 이게 복숭아에도 사과에도 바나나에도 적용되는지 관찰하지 않습니다.
침팬지 이야기 할 필요없고
그 이야기에 가장 본질인 '닫힌계'가 빠졌기 때문에 들여다 볼 필요도 없는 겁니다.
실험을 하기 전에 '바운더리 컨디션'을 확인하지 않았으므로 자동으로 패스.
논의가치 없음.
하여간 TV 동물농장에 늘 나오는
동물훈련 전문가 아저씨가 침팬지 사육장에 가서
단번에 침팬지 행동을 바꿔버리면 그 과학자들 뻘쭘해질 것.
몇 십년간 주야장창 연구한 성과를 아저씨가 단번에 해체해서 0으로 환원.
떠 본거였소? 개인의 능력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아쉬운 것은 누구에게 아쉬운 건가요?
단순합니다. 작용이 있어 반작용이 있을 뿐.
괴롭힌다. 온순해진다. 폭력성 등의 단어는 눈에 보이는 결과일 뿐입니다.
얼마전 MBC뉴스데스크에서 실험이랍시고 학생들이 PC방에서 한창 게임중일때, 두꺼비집을 확 내려버리고, 학생들이 분개하자 그 반응을 게임의 폭력성이 아이들을 난폭하게 만들었다고 보도하는 것과 침팬지 원숭이 얘기가 뭐가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이들에게도 식자들은 '폭력성' 이라는 단어를 쓰겠지만, 그것은 결과일 뿐 원리가 아닙니다.
과학은 원리를 말해야 맞습니다. 사례연구를 통하여 인과관계가 드러나는 경우도 있지만, 사례를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다고해서 그것이 원리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노가다가 되는 것 입니다. 결과에 원인을 끼워맞추는 귀납의 한계 입니다.
(호르몬과 같은 생리적 변화만으로 대부분의 동물 행동을 해석할 수 있다는 과감한 발상도 놀랍지 않을 수 없지만), ..
만약 양의사가 한의사 한테 가서 '니들은 무슨 약재가 그리도 많냐. 나는 메스 하나로 끝낸다'고 말하면, 그게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요. 어떻게 메스만으로 병을 고칩니까? 그런데 사실 메스만으로 병을 고칩니다. 물론 붕대도 있고 소독약도 있고 별거 다 있지만 본질은 메스지요.
호르몬이라는 단어에 집착할 필요없이 한의사는 환자 바깥을 보고 병을 알아내고 양의사의 메스는 환자 뱃속으로 칼이 들어갑니다. 안에서 답을 찾느냐 밖에서 답을 찾느냐 그게 핵심이죠. 호르몬은 안에 있는 겁니다. 안을 봐야 한다는 거죠. 안이 '의하여'니까.
양의사는 한의학을
'전부 폐기하라'고 언성을 높이고 있는게 사실이고
한의사는 '미쳤냐?'고 응수하고
현장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지요.
기존의 방법과 시스템을 전량 폐기하고 대수술을 해야 하는거 맞습니다.
초등학생 때도 저는 이해를 못했으니까, 이게 초등학생도 납득을 못할 구조이니까.
뭐 개별적인 사실을 문제삼자는게 아니라
원초적으로 '이건 아니잖아' 하는 거.
복잡하게 얽힌 실의
실마리를 찾지 않고 중간에서 엉망으로 풀고 있다는 느낌.
교과서부터 잘못입니다.
왜 초등학교 1학년 국어에
나, 너, 우리, 우리나라, 대한민국 이런게 나오는 건지.
그때 미술시간에는 왜 그리는 기술을 안 가르쳐 주었는지 (그냥 그려라고 윽박질렀음. 요즘도?)
뭐 이런 시시콜콜한걸 따지자면 한이 없고.
시스템 차원에서 손을 봐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수학은
셈이 아니라 모형으로부터 이야기를 풀어가야 하는 거고.
과학일반은 분류학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국어시간에는 문학작품 위주가 아니라
언어 안의 대칭성을 위주로 하는 생각의 기술을 가르쳐야 합니다.
언어는 말이고 말은 생각에서 나오는 거니까.
동시, 동화, 소설 이런게 왜 국어책에 나와야 하는지.
과학수업은 물리, 물질, 물체, 사물, 에너지, 시공간 이런걸 위주로 이야기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사회수업도 그냥 국가 제도 법률 공공기관 이런걸 가르칠게 아니라
개인 가족 집단 공동체 세계 이런걸 위주로 출발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먼저 '와꾸'를 짜야 한다는 거죠.
와꾸가 없으니 방향성이 없어서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죠.
톱질하는 방법, 대패질하는 방법, 이런 쓸데없는거나 배우고.
과학의 와꾸가 뭐냐 이거죠.
와꾸가 없이 그냥 침팬지 어쩌구 하면
이 사람들이 지금 노점상 하는거 아냐 <- 뭐 이런 느낌
위신도 안 서고, 모양도 안 나고.
모형을 중심으로 모든 이야기를 풀어가야 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막론하고
인문 사회과학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와꾸는
그 어떤 것이 성장하고 발달하고 진보하고 점점 커지는 질서입니다.
그게 모든 과학의 와꾸가 되는 거죠.
먼저 그걸 제시하고 난 다음에
그 와꾸를 정치에, 경제에, 사회에, 문화에, 자연과학에 적용해야 하는 거죠.
하여간 현재 과학은 와꾸가 없습니다.
포드시스템 안 쓰고 두서없는 삽질이나 하는 거죠.
전기공학이나 일부 이론물리, 제한된 이론가들이 존재할수 있는 대기과학, 유체역학쪽에서는 김동렬님의 말씀이 맞을겁니다.
연구비가 없으면, 연구할수없는 풍토...그걸 한탄하기전에, (딱 이건 민노나 진보쪽 수준).
연구비를 타고 넘으면서, 과학을 신뢰하는 긍정. 그게 그렇게 쉬운일은 아닌데.
나아가야할 방향.
확실히 연구비 많아도, 자신이 하는 일을 디자인할수 없는 실험실들의 수장들은 비관적이라더란 사실.
[엉뚱할 수 있지만] 한의학, 양의사에 대한......절박하고 심각한 생각....
- 동렬님 책과 글 읽으면서 한의학에 대한 불신을 가끔 접해요...
- 개인적으로 피부질환을 가지고 있는데, 현재로선 많은 피부질환이 난치성 많아요.
- 피부는 겉으로 드러나기 땜에 사회성 떨어지고 소외되고, 스트레스 지속되고... 우울증 생기고,,, 때론 배우고 고민하고 생각하고 꿈꾸는 것도 사치라는 생각이 들 때도 가끔 있죠. (마음이 말라가게 되니까 건강해야 생각도 있다.. 이런 생각도 ㅋ)
-양의 피부과 치료는 불가한 상태(즉시 개선시키지만 주기가 짧아지고 서서히 최악의 상황으로 인도)
-결국 다른 대안이 없으니 한의원을 찾게 됨.
-한의원들도 난치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지만 악화를 막는 정도...
-한의원들은 수많은 저마다 원인을 제시. 그에 따른 처방들을 내리더라구요.
* 폐가 약함
* 사상체질-습한 체질
* 열이 많음
* 구조적인 턱관절이나 목관절 이상에 따른 호르몬불균형
* 쓸개약화 등, 동물성 지방음식 분해능력이 없음(완전한 체식) : 음식문제 (음식은 연관관계가 실제 높음)
* 피부면역역 약화, 신체면역력 약화
그러나 완벽하게 하나로 통하는 '이게 원인이고 치료방법은 이거다'라는 결과는 없습니다.
아토피, 피부염 등 난치성질환이라면 어떤 하나가 원인일까요?
체질, 음식, 환경, 면역력 등이 복합적으로 결합된 원인일까요?
저의 경우 다양한 원인들에 의해 요소들이 결합해 발현되는 것이 아닐까 이런 결론을 내리게 돼요.
한편으로 구조론으로 건강문제를 연구하고 해결하고자 노력했던 적도 있었는데...
아직 답을 찾진 못했죠...
때론 동렬님의 메시지가 작은 희망을 꺽기도 하는데..ㅋㅋ
의사들도 한의사들도 못찾는 해답을 저는 그래도 찾고 연구해야 하니까..
계속 노력해볼게요.
구조론으로 난치병 연구방법이나 혹 도움이 될만한 조언이 있다면... 얼씨구..... !!!
한의학의 여러 논리들은
90프로 거짓말로 보면 됩니다.
이건 명백한 비과학이자 일종의 주술이죠.
한의학의 여러 치료효과들은
한의학의 장점이 아니라 양의학의 실패로 보는게 맞습니다.
만약 한의학이 앞으로 발전한다 해도 그것은
한의학의 진보가 아니라
한의와 양의를 넘어서는 신의학으로 보는게 맞습니다.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도 핵심 원인은 절대로 하나입니다.
어떤 회로가 끊어져 있는데 그 회로를 이어주면 됩니다.
구조론은 항상 5개의 길이 있으므로
어떤 하나의 회로가 붕괴되어도 그 주변을 강화하면 어느 정도 치료는 됩니다.
그러나 상당한 치료가 된다고 해서
그 붕괴된 하나의 회로가 멀쩡한건 아니죠.
한의로 양의를 이긴다는건 무리고
한의와 양의를 넘어서 새로운 의학은 가능하다는 관점으로 보는게 맞습니다.
앞으로 30년 안에 질병치료는 거의 유전공학으로 변하겠지요.
한편으로는 원자력공학으로 변할거고.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도 핵심 원인은 절대로 하나입니다.
어떤 회로가 끊어져 있는데 그 회로를 이어주면 됩니다.
구조론은 항상 5개의 길이 있으므로
어떤 하나의 회로가 붕괴되어도 그 주변을 강화하면 어느 정도 치료는 됩니다.
그러나 상당한 치료가 된다고 해서 그 붕괴된 하나의 회로가 멀쩡한건 아니죠."
구조론을 접하면서 그동안 누누이 밝혀왔고 아래 동렬님 생각인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도 핵심 원인은 절대로 하나입니다."라는 말에 공감하여
희망과 신념으로 그동안 연구하고 자료조사하고 해답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점차 자신이 없어져 가는 차에...
다시 한번 확신을 주시니까
의사나 한의사가 찾아주지 못하는 해답을 찾기위해 나선 이상,
끝까지 연구하고 그 핵심원인을 찾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핵심원인이 절대로 하나라는 것은 희망의 메시지거든요... 감사합니다...
죽을 병도 아니면서 좌절하게 만드는 난치성 질환들이 가끔 있는데,,, 그 원인 찾으면 부자 될 것 같아요 ㅋ
여기 회원님들... 건강하세요.. 동렬님두... 건강하세요...
구조론 맨 앞에... 오는 건.. 건강이거든요.^^
외부환경 : 내부의 면역체계와 상호작용을 하면서 신체의 밸런스를 유지시킵니다.
일본의 사례에서, 전쟁 중에 꽃가루 알레르기 면역질환이 급격히 감소된 사례가 있습니다.
면역체계 : 면역체계는 자체적으로 환경과 밸런스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환경적 스트레스가 과도하면 신경쇠약에 걸리고 면역력이 약화되어 잦은 병치레를 하지만,
반대로 스트레스가 너무 적어도 면역체계의 밸런스가 붕괴되어 자기면역반응을 일으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가공식품 : 음식의 화학첨가물, 불완전한 식품(백미, 백분)에 의한 영양불균형 초래.
운동부족 : 대사순환장애로 세포기능, 조직기능이 저하되어 유해물질의 배출이 안됨.
환경과 면역체계의 밸런스가 핵심이고, 음식과 운동은 부수적인 요인으로 생각됩니다.
즉 아토피를 비롯한 모든 자기면역질환은 지나치게 안전하고 정갈한 현대의 도시생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그래서 거칠고 가공되지 않은 환경에서 자연식품과 활동을 하면 치료되지 않을까 하고 추측해봅니다.
양의의 토대는 인과율이고
한의의 토대는 밸런스이론이라 할 수 있는데
문제는 이 밸런스 개념이 허준선생이 만들어낸 최신이론이었다는 검다.
이제마의 사상의설도 전통적인 한의학 이론이 아닙니다.
구한말에 나온 최신이론임다.
우리나라에서 주자학이 자리잡은 것이 화담 퇴계 율곡이 활약한 16세기 이후임다.
다시 말해서 수 천년 역사의 전통의학 이론이 아니고
주자학이 한국에서 자리잡으면서 전통적인 향약방을 주자학적 관점에서 재해석한 것임다.
왜냐하면 전통 한의학은 유교가 아니라 도교였기 때문임다.
도교의학을 유교의학으로 바꾸면서 교통정리를 한 것이 동의보감임다.
그러므로 이론의 관점에서 한의학은 퇴계이후 나온 것이고
그것도 도교에서 유교로 바톤체인지를 하면서 생 어거지로 나온 것임다.
이러한 본질을 알고 봐야 함다.
말하자면 도교의학을 물리치고 새로 등장한 유교의학인 검다.
하긴 도교나 유교나 거기서 거기지만.
물론 밸런스 개념은 동양에서 수천년 전부터 있었지만 퇴계 이후 재조명 된 거죠.
어쨌든 한의의 본질은 장기들 사이의 밸런스 개념인데
실상 허파와 간과 심장 사이에 밸런스가 있을 리 없으니
밸런스를 적용할만한 것은 심리-스트레스 분야겠죠.
침이나 뜸의 물리적 자극이 인체내의 호르몬 작용에 밸런스를 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분명한건 심장과 허파와 간과 대장 사이에 밸런스는 없다는 검다.
자동차를 분해해 봐도 밸런스는 서스펜션이나 운전석에 필요한 거지
엔진과 밧데리의 밸런스
연료탱크와 머플러의 밸런스
뒷좌석과 차동기어의 밸런스 이런건 없죠.
밸런스가 잘못되어 자동차가 고장날 부분은 지극히 적다는 거죠.
자동차를 뜯지 않고
발로 툭툭 차서 고칠 수 있는 부분은 지극히 적습니다.
인체에서 밸런스 개념으로 치료할 수 있는 부분은
- 허리운동을 해서 척추 신경통을 완화한다.
- 웨이트 트레이닝과 하드 트레이닝으로 신체의 밸런스를 강화한다. - 이건 꼭 한의라고 할 수는 없고.
- 침 뜸 심리적 안정으로 호르몬의 균형을 기대해본다. - 막연한 희망.
한의원에서 주로 하는 이야기가 환경, 면역체계, 음식, 몸의 밸런스 등인데...
그래서 도저히 답을 찾을 접근법도 유용한 답도 찾을 수 없는 것 같아요...
제각지 한의사마다 원인도 다 다르고 처방도 다 다르고..
(제가 한의사라면 실험군, 대조군, 설문, 음식기록, 검진기록 몇달만 조사하면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재미있게도 그런 연구 하거나 질문하는 곳 아직 못봤어요.
그냥 이런저런 것이 우리가 보는 원인이니까 한약, 침, 반신욕, 음식조절 등등 하라 이런식)
가령 아토피를 가진 분이 자연으로 가면 100명 중 99%는 완치된다던지...
그런 결과가 나와야 하는데....
현대 의학에서 아직 발견하지 못했지만, 뭔가 우리 몸에 핵심 원인의 고장으로 어떤 병이 생긴다는
가설을 더 믿고 싶어요... 그 원인을 찾아보고 싶어요.. ㅋ
몇년전에 나름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았는지 허리도 아프고, 동네병원가니 부정맥이 의심된다하여 세브란스 갔는데...
마침 그때가 황사가 심한날들이 계속 되었고, 호흡이 곤란하기도 하였던 차였는데..불면증도 심했고,...전체적으로 건강이 상당히 나빠져 있었던 것 같은데...
병원가서 심장 검사 받고 폐검사 받고 했는데 아무 이상이 없다고 나옴...
그리고 알레르기 반응 검사를 했는데 천식으로 나옴...
천식으로 세달간 약물치료하고, 나니 증상이 많이 호전 되었음.
그런데 천식은 고치기 어렵다는데...세달만에 좋아졌고 그 뒤로도 천식 증후는 없음.
생각해보면 이 모든 것의 원인은 스트레스였다고 생각됨. 그때는 어떤 자극을 받으면 피부가 아팠음.
지속적인 스트레스가 면역체계를 약하게 만들었던 것 같고, 허리..뼈는 스트레스에 약하다고 생각되고, 허리가 아픈 증상을 보면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을 때 꼭 허리가 아픔 , 더구나 황사바람에 그대로 노출되면서 호흡기에 무리가 왔다고 봄.
그리고 그런 스트레스를 어찌 해소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구조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음.
그때 느낀 것은 정신도 언제나 새로운 것이 필요한 것을 느꼈음.
매일 밥을 먹어야 영양을 충당하듯이, 정신도 영양제가 필요하다는 것.
몸도 마음도 정신도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느꼈소.
그리고 그런 사실을 체득하며 정신에게 에너지를 주려고 생각해보니 그것은 일종의 정보였고, 새로운 지식이나 혹은 소통의 변화였다고 생각되오.
그러나 그동안도 정신에게 에너지를 주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고 보오.
그런데 구조론이 나의 정신에 에너지 역할을 했다는 것은, 내가 받은 스트레스들이 그동안의 것들로는 해결이 안되었다는 것이었소. 나에게는..,그리고 우리가 살다보면 한두번씩은 부딪히는 것들이 어느 순간에 자신에게 꽂히게 되어 피해갈 수 없게 만드는 것들이 있다라는 생각도 드오. 그럴때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고 생각되오.
빠져나갈 길이 있어야 하는데 길이 보이지 않을 때 그 막막함이란 것에 대해서도....모두가 어쩌면 익히 알고 있는 사실들이라고 생각되오.
스트레스를 받게 된 원인에 대해 생각했소. 스트레스 받는 것도 상당히 복합적이라는 것을 알게되었고, 하나의 스트레스가 풀리지 않았는데 지속적으로 다른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그 강도가 더 세진다는 것도 알게 되었소. 그동안 막연하게 내버려두었던 생각들과 결과들의 원인을 찾고 분석했소.
그리고 옳고 그르고 혹은 맞고 틀리고 방향이 옳은가 그른가 나란 사람에 대해서 관계에 대해서 개인과 공동체에 대해서 ..그 외 등등 ... 내 스스로 이해를 하게되고,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 작동원리를 이해하게되니 스트레스에서 어느순간 벗어나 저만치서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나를 보게 되었소. 언제 그런 스트레스들이 나를 괴롭혔는가? 라고 생각할 정도로 그것에서 벗어나 있는 나 자신을 보며, 사람이 이해가 되면 모든 것에 대해서 답을 찾게된다. 그런데 이해가 되지 않는 상태에서 무엇인가를 강요하듯이 혹은 짜 맞추듯이 밀어 넣는다면 그것은 결국 그냥 참아라, 방법이 없다라는 것이기에 절대로 스트레스는 풀리지 않는다고 생각되어졌소.
정신에게 에너지를 준다는 것은 도구를 준다는 것인데, 생각할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고, 관점의 변화와 함께 사고의 틀을 바꿔줌으로 해서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한다는 것이라고 생각되어졌소. 정신을 청소해야할 때 정리해야 할 필요성을 스스로 인식하게 될 때 정신의 정리정돈은 일어나게 되고, 그럼으로 인해서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생각되어졌소. 원인이 해결되니 몸의 이상 증상들은 저절로(물론 허리는 병원치료를 했지요) 해결되듯이 좋아졌다고 생각되었고, 특별히 어디가 크게 아파서 그런 것은 아니었소. 이건 제 경우이니 다른 분들은 또 다를 수 있지요.
일단은 스트레스가 몸의 면역체계를 무너지게 하는 것에 일조를 하는데, 스트레스의 원인은 사소할지라도 어떤 사건들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그것에 대해 분명하게 알아야 하고, 그 원인들이 생긴 원인에 대해서도 조금은 더 거슬러 올라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되어졌소. 그러면 어디쯤에서 시작 되었는지 어느정도 알 수 있다고 생각되며, 그것이 작동한 과정에 대해서도 스스로 이해를 해야 한다고 생각되오. 어쨌든 그런 강도 높은 스트레스들을 연타로 맞은 것은 지금 까지의 내 인생에서 최대 위기였소.^^;..한편으론 이런 사실들을 통해서 나에게 취약한 부분들이 무엇인가? 혹은 내가 약해질 때 어디를 먼저 침투하게되는가를 알게 되었다고 볼 수 있으니 그런 점들을 주의해야 하는데..건강이 좋아지면 또 등한시하게 되오.
그리고 우리나라를 보면 전통이라고 강조를 많이 하지만, 정작 전통은 200년 내외에서 현재 상태로 완성된 것들이 많고, 그리고 그것에서 크게 변하거나 발전하거나 달라진 것이 없소. 최근에야 다양한 시도들로 변화가 일고는 있다고 보이지만,
한옥을 생각해보면 예전에 지어졌던 집들말고 한옥이 변화된 것은 없다고 보입니다.
예전 방식으로 그대로 집을 짓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집이라는 것은 계속해서 조금씩 변화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느리지만 조금씩 조금씩....조선시대 한옥의 양식이 완성되었지만, 그 뒤로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변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변화할 시간이 없었다라고 생각됩니다.
구한말을 비롯해서 일제에서...전쟁을 겪고, 산업사회를 지나오면서 한옥은 등한시 되었기에 새롭게 그 시대에 맞춰 변화할 시간들이 없었던 것이라고 보이며, 예전 어른들도 산업사회로 접어들어 지붕고치기 사업 이전에는 집을 잘 고치지 않거나 예전 방식의 집의 원형에서 생활의 편리를 안으로 끌어 들이지 못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산업사회로 오면서 집의 개량은 조금은 집 자체의 질은 저하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집의 멋이 없어져 버린 것이지요.
그런 이유들로 인해서 요즘에 맞는 한국의 한옥집이 완성되지 못하고, 전통의 한옥 아니면 어정쩡한 한옥이 되어 버렸다고 생각됩니다. 전통 한옥집은 있어도 전통에서 현대를 잇는 한옥집은 없는 것이라고 보아야 하지만, 지금부터 현대에 맞는 한옥집을 점차로 생각해 간다면 한옥은 또 변화하겠지요.
전통 한옥과 현대에 맞는 한옥이 공존했다면 지금보다는 아파트로 도배되는 대한민국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해보게 됩니다.
한가지 더 얘기하자면....
동렬님 글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은
놀라지 말고 당황하지 말기 였소.^^
생각해보면.... 어떠한 사건들에서...그동안 접해보지 못한 것과 그런 것에 대해 별로 연습이 안되어 있는데...
감자기 부딪히면 당황하게되고, 스트레스는 놀라서 생기는 것이라고도 생각되어졌소.
그러니 일종의 놀라서 생기는 증상들이 많다고 생각되어지오.
또한 자신이 놀랐다는 것에 대해서 위로받고자 하고, 동조해 주기를 바라기도 하지만, 놀랐다는 그 자체에 스스로가 심한 모욕감을 느끼게 되어 자신을 학대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어지기도 했소. 대처가 안되니 더 불행해지는 것이라고 생각도 되어졌고.... 대처가 되고 해결을 한다면 두려워 할 것은 없다고도 생각되어졌소.
언제라도 놀라지 말고 담대하게 맞기....
세상에 대해서도 뭔가 크게 잘못 생각하고 살았던 것 같으나, 사실은 그것이 맞는데...
일순간의 가려짐으로 인해서 그것이 크게 보여 또한 오해하게 되오.
거짓으로 대하는 사람과 거짓으로 세상을 가려버리는 것에 대해서 진실을 알지 못하면 어떠한 것으로 이기거나 해결 할 수는 없다고 보오.
또한 세상에는 모든 것 그 자체를 거짓으로 일관할 수는 없다고 보이나, 방향이 그렇게 흘러버려서 인간 역시 그렇게 된다는 것이고 보면...
놀라지 말고 당황하지 말자라는 말..그 말만큼 인간에게 큰 말은 없다고 생각되기도 했었소.^^
과학하는 사람들은 '과학'이나 '과학적'이라는 말을 어떻게 쓰는 지 모르지만 나같은 일반인에겐 그들보다 엄격하게 생각될 수 있다. 동물행동학이나 최근의 뇌학 등 흥미롭고 그럴듯한 이론들이 많지만 여전히 초보수준 아닌가? 리처드 도킨스는 일반인에게도 잘 알려졌지만 그의 이론이 과학이라고 불리우기엔 모자람이 많은 듯. 다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하나로 꿰야 과학이라면 지금의 생명과학은 모자람이 너무 많지 않나. 특히 영장류 인간에 대한 정보를 과학의 지점에 집적하기엔 현재의 과학적 접근방식들은 너무 파편적이라는 생각.
기존의 과학적 접근논리가 불완전하다면 완전성을 향해 찾아볼 건 다 찾아봐야지. 그래서 얻을 거 얻고 버릴 거 버리고. 왜 불완전한 논리의 언어들을 고수한 채 구조론을 이해 못하겠다고 떼를 쓰는지 이해 안감.
무언가 얻어서 가면 되지..그게 없음 말고..그러는 거지..떼를 쓰면 안되지.
제가 한의학 양의학 모두 배워봤는데 철도끼와 쇠도끼 비유가 가장 적절합니다.
◎ 의사결정의 법칙 - 의사결정은 의사결정이 가능한 방향으로 결정한다.
이건 상담현장에서 요즘 뼈저리게 느끼고 있소.
아이가 비행을 저지르는 이유?
부모를 엿먹이기 위해서?
친구를 괴롭히는게 즐거워서?
아니, 아이가 비행을 저지르는 건, 달리 할 수 있는게 없어서임.
그렇게 밖에 자신의 의사를 전달할 수 없어서임.
암튼, 구조론은 진짜 과학의 언어임.
위하여에서 의하여로 바꾸니 세상이 달라짐.
더 이상 인간을 원망할 일이 없음.
예를 들어, 예전 같으면 도로에서 막 운전하는 인간들을 보고 욕도 하고 화도 내는데,
이젠 도로가 좁은 것을 보게 되고, 버스 운전기사 아저씨의 노동조건이 열악한 것을 보게 되고, 막 운전하는 것이 도로의 조건, 운전자가 처한 상황에 '의한' 것임을 헤아리게 됨.
근데, 구조론적인 사고는 원래부터 내가 하고 있던 것임을 발견함.
원래부터 하고 있었는데 그게 구조론적인 사고인 걸 몰랐음.
구조론이 과학의 언어라고 하지만, 내게는 자비의 언어임.
어떤 사람이 못된 짓을 하는 건, 그 사람이 못되서가 아니라 좋은 짓을 할 줄 모르기 때문임.
그렇게 관점을 바꾸니, 그냥 다 불쌍함. 저절로 연민의 마음이 흘러나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