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비과학”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죽은 적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앞으로도 죽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멍청이가 분명하다. 그런데 이와 비슷하게 말하는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있다. 그 사람은 부동산에 투자하여 재미를 보고 있었는데, 필자가 부동산 하락 전망을 이야기하니 그 양반이 한다는 소리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부동산이 떨어지는 거 한 번도 못봤다.” 이렇게 반박하는 것이었다. 마치 그게 굉장한 논거가 되는 것처럼 기세등등하게. 그거야. 당연하지. 한국에서 인구증가가 추세적으로 꺾이는 현상은 단군이래 처음 일어나는 일이다. 그동안 인구는 늘 증가해 왔다.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 계속 증가만 하겠는가? 국토가 한계인데. 무엇인가? 적어도 한국의 학계에서는 그동안 뭔가 새로운 것이 ‘짠’ 하고 나타나는 일이 없었던 거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천만에! 단지 한국에서만 그렇다. 한국에서는 뭐든지 서구에서 발생하여 충분히 검증되고 난 다음에 들어온다. 검증되지 않은 생짜 학문을 한국인들은 한 번도 구경한 적이 없다. (그러나 이곳 구조론연구소에서는 학문이 현재진행형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여기서 하는 이야기는 항상 지구에서 최초다. 이런거 경험해야 한다.) 한국에서는 학문이 현장에서 발생하지 않고 언제나 외부로부터 이식된다. 그러므로 한국의 학자들은 ‘학문은 원래 외부에서 들여와서 이식되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갖게 되었다. 그런 고정관념에 반하는 것은 일단 배척하고 보는 습관을 들이게 되었다. (방시혁처럼 애초부터 삐딱하게 보고 있는 것이다. 원초적으로 자기 포지션을 그렇게 정하게 되는 것. 그 경우 답이 없다.) 한국에 TV가 들어올 때도 이미 외국에 있던 것이 들어온 것이고, 비행기가 들어올때도 이미 발명되어 있던것이 들어온 거다. 없던 것이 ‘짠~!’ 하고 문득 새로 나타나는 일은 적어도 한국에서는 없었던 일이다. 그러나 실상 서구에서는 그게 늘 있는 일이다. 후진국에서는 늘 기존의 있는 것이 이식되어 들어오지만 선진국에서는 없던 것이 새로 발생하곤 한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사실이지 구조론과 같은.. 모든 것을 한 줄에 꿰어내는 연역적 사고의 툴..은 단군이래 지구에서 있어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지금쯤, 다른 때도 아닌 2011년 쯤.. 나타날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런 것이 서구에서 발생한다고 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 아닌가? 새로운 것은 늘 변방에서 뒤통수 치며 들어오곤 하지 않았던가? 상식의 허를 찌르면서 말이다. 생각해보면 일생에 한 번쯤 경험할 일을 우리는 많이도 경험하지 않았던가? 식민지도 처음 겪는 일이고, 625도 처음 겪는 일이고, 민주화도 처음 겪는 일이고, 대통령 직선도 독재타도 이후 처음 겪는 일이고, 인터넷도 처음 구경하는 거고. 새로운 것은 늘 나타나곤 했다.(그러나 인간들은 늘 과거의 경험에 얽매여 있다. 지금 유시민을 두고 벌이는 공방도 데자뷰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과거에 있었던 게임의 그 포지션에 다들 가 있다.) “내 일생동안 그런건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다.” <- 천만에! 그런 일은 항상 있어왔다. 미욱한 인간들이 주목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다.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은 늘 일어난다. 지금은 2011년이다. 2011년이라는 해는 지구가 생겨난 이후 50억년 만에 처음 맞이하는 새로운 해다. 이전에 2011년은 없었다. 우일신 하는 것.. 바로 그것이 인간의 존재 이유다. 구조론은 꽤 스케일이 크다. 이 정도 스케일의 아이디어가 지구상에 출현한 일은 그동안 없었다. 그럴만도 하다. 인류역사를 보면 지구에서 문명인은 5억 이하였고, 그 중에서 지적 생산활동에 종사하는 인원은 극소수였다. 고대나 중세라면 백명 중에 한 명 정도가 지적 생산활동에 종사했고, 그 마저도 언어와 문자의 장벽, 인쇄술의 한계, 지리적인 격리로 인한 정보소통의 한계 등으로 인하여 인류의 지적 생산활동은 지리멸렬한 편이었다. 지금과 같은 60억 인류가 너나없이 자기 아이디어를 발표할 기회를 가지게 된 일은 없었다.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던 무대가 지금 펼쳐져 있다. 그때보다 환경이 일만 배 이상 좋아졌다.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뭔가 그럴듯한 지적 혁신이 이루어질만한 타이밍이 아닌가? 필자 역시 백년 전에 태어났다면 이런 이야기를 어디에 가서 하려고 시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일본에서 어떤 다락방 철학자가 발견된 일이 있다. 300년 쯤 전에 어떤 선비가 시골에서 혼자 사색하여, 서구의 근대 자유주의 사상과 맞먹는 현대적인 사상을 일구어 방대한 저술을 남긴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사상을 어디에도 발표하지 못하고 혼자 종이에 쓰다가 죽었다. 그리고 잊혀졌다. 300년 후 낡은 고가의 다락방에서 우연히 300년 전에 기술된 무려 근대적인(?) 사상이 발견된 것이다. 이런 생뚱맞은 일은 있을 수 있다. ### ◎ 과학 - 한 번 발동이 걸리면 자체의 동력에 의해 큰 나무처럼 저절로 성장한다. 맥락을 이해하기 바란다. 필자가 비과학이라고 말한데서 그것이 과학서적에 오르면 절대로 안 된다는 말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과학은 학계의 시스템이며 그 시스템 안에 들어와 있지 않다는 것이다. 에디슨은 발명가일 뿐 과학자는 아니다. 물론 에디슨의 발명도 과학의 관점에서 중요한 기여가 있다. 중요한건 그것이 적어도 과학의 시스템은 아니라는 거다. 중요한건 과학적 사고다. 우리가 과연 과학적으로 사유하고 있느냐 말이다. 측량술로 해도 되는데 굳이 줄자로 재고 있다면 이건 비과학적 태도다. 쇠도끼가 있는데 돌도끼를 쓴다면 그게 비과학이다. 돌도끼도 나름대로 과학성이 있다고 우기면 피곤한 거다. 쇠도끼가 없고 돌도끼만 있다면 과학이다. 그러나 이미 쇠도끼가 출현해 있다면 과학 아니다. 뉴턴 이전에는 연금술도 과학이었다. 이미 새로운 것이 출현했기 때문에 낡은 것이 비과학인 것이다. 이 논리에도 역시 대칭성은 적용되고 있다. 과학은 자체의 동력에 의해 저절로 자라는 시스템이며, 그 이유는 지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라오기 때문이고. 지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라오는 이유는 구조의 대칭성 때문이다. of-by-for라는 구조가 대칭성이다. 이러한 구조가 있어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새로운 지식이 창출된다. 이게 없으면 단편적인 경험의 수집에 불과하다. 질서있는 지식이 과학이다. 질서없는 지식은 지식이라도 과학이 아니다. 과학은 지식을 대량복제하며 이는 of-by-for의 포지션 구분으로 가능하다. 자연을 관찰하여 개별적 사실을 수집하고, 그 팩트의 벽돌을 쌓아 과학이라는 건물을 얼기설기 얽는 것이 아니라, of-by-for라는 원심분리기로 돌려버리면, 각자 포지션이 지정되어 제 위치를 찾아가는 형태로 지식이 대량복제되는게 과학이다. 과학의 핵심은 포지션 지정이며 of-by-for가 바로 포지션이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봄여름가을겨울, 즉 원형이정, 인의예지라는 구조를 사용했다. 계절에 사계절이 있듯이, 인생도 소년, 청년, 장년, 노년이 있고, 일생에도 생노병사가 있고, 씨앗, 떡잎, 꽃, 열매가 있고.. 이런 식으로 하나의 패턴을 계속 복제하는 것이다. ◎ 원형이정 - 봄여름가을겨울 - 인의예지 - 생노병사 - 씨앗떡잎꽃열매 - 소년청년중년노년 - 태양태음소양소음.. (같은 패턴의 대량복제로 지식창출.) 문제는 이런 불법복제술이 대개 엉터리라는 것. 그러나 지금까지 그게 다 엉터리 복제였다고 해서 구조론이 엉터리라는건 시시한 통박에 불과하다. 반대로 생각하자. 지금까지 엉터리가 계속 나왔으니 이제 진짜배기가 하나쯤 나올만한 타이밍이 아닌가? 지금까지 부동산이 계속 올랐다고 해서, 앞으로도 부동산이 계속 오른다는게 말이나 되나? 인구가 줄어드는데도? 우리때 60만이었던 한 학년 학생 수가 조만간 20만으로 줄어든다는 보도가 있던데. 1/3 급추락이다. 지금껏 계속 허탕쳤다고 해서 구조론이 허탕이라는 말은 터무니 없다. 그것은 계속 허탕친 자의 습관에 불과하다. 나는 그 허탕이라고 알려진 여러 연역법 중에서 일관된 하나의 방향성과 공통분모를 추출하여 구조를 해명했다. 탈레스가 일원론을 발표하고, 플라톤이 이데아 어쩌구 하며 떠들어댄 이후로 무수한 허탕들이 있어왔지만, 그 안에서 공통된 패턴을 발견할 수 있다. 일관된 지향성이 있다. 그것이 내가 해명한 구조다. 지금까지 지구에 문명인이라곤 인구 5억 이하가 대부분의 시기였고, 그 중에서 지적 생산활동에 종사하는 인원은 1/100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 적은 숫자의 인원들도 모두 지리적으로 격리되거나 문자와 인쇄술이 없어서 자기 의견을 발표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다락방에서 쓸쓸히 쓰고 죽어갔던 것이다. 그때는 그랬으니까 이제는 달라질 수 있지 않은가? 하긴 뭐 필자도 짜증나서 지구와 결별해 버리려고 시도한 적이 여러번이었으니 그때 결별했다면 구조론은 없는 거지. ◎ of 옆>여기, 출발점, 원인 구조의 대칭성은 근대과학의 기반인 인과율에서 비롯된다. of는 어원으로 보면 ‘옆’이라는 뜻인데 여기다. 여기가 어디냐? 출발점이다. for는 어원으로 보면 ‘앞’이라는 뜻인데 여기(of)서 앞 까지는 조금 거리가 이격되어 있다. 그곳에 무엇이 있나? 과녁이 있다. 도착점인 것이다. ◎ 출발점 of - 도착점 for 그 사이에 무엇이 있는가? by가 있다. by의 어원은 ‘바로’인데 지금이다. 지금 무엇을 하나? 방아쇠를 격발한다. 출발점과 도착점 사이에 방아쇠의 격발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제어다. 이것이 구조론이다. 이들은 원인과 결과, 시작과 끝, 입력과 출력, 앞과 뒤, 밤과 낮, 빛과 어둠 등으로 다양하게 전개된다. 보통은 원인과 결과만 알고 그 중간의 제어를 모른다. 감기에 걸린 원인은? 감기인플루엔자 때문에. 이건 of다. 손을 안 씻었기 때문에, 혹은 감기환자와 만났기 때문에. 이건 by다. 그래서 감기에 걸렸다면? for다. 감기에 걸린 원인은 감기인플루엔자 때문이기도 하고, 손을 안씻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감기환자와 접촉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냥 피곤해서이기도 한데.. 이렇게 이유가 여럿이다. 이유가 여럿이면 과학이 아니다. 하나의 이유를 찾아야 한다. 태어난 사람은 모두 죽는다. 여기서 탄생은 이미 of다. 태어난 그 자체로 죽음의 원인이 된 것이다. 근데 아직 안 죽었잖아? 그러나 언젠가는 죽는다. 감기바이러스가 들어와도 감기에 안 걸릴 수 있잖아? 확률적으로 걸린다. 탄생이 죽음의 원인이므로 모두 죽는다는 것이 백프로 확정된 사실이지만 실제로 죽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by다. by가 작동하지 않으면 감기인플루엔자가 몸에 들어와도 감기에 안 걸릴 수 있다. 아니 걸렸지만 발병은 하지 않을 수 있다. 시험에 떨어진 이유는? 공부를 안했기 때문이다. 이건 필연이다. 그런데 내 친구 아무개는 나와 같이 오락실에서 밤새며 놀았는데 어떻게 합격했지? 그건 by다. by는 상대적이며 타이밍과 장소를 결정한다. ◎ 의하여 :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 of(옆-출발점)
*** 의하여, 통하여, 위하여를 한국말로 직역하면 곤란하고 포지션만 봐야 한다. 의하여가 1번, 통하여가 2번, 위하여가 3번인 것이다. 항상 이 순서대로 간다. ### 불확정성이론이나 초끈이론 따위에 구조론의 대칭성 개념이 일부 쓰이는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조금의 답도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방법이 전혀 없기 때문에 과학자들이 어쩔 수 없는 지경에 몰려서야 그 방법을 쓰는 것이다. 그 외의 다른 분야에서 구조론의 대칭성이 쓰이지 않는 이유는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답이 나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게 문제. 이게 비과학. 쇠도끼 두고 돌도끼 쓰는 것. 쇠도끼가 없을 때는 돌도끼도 과학이지만, 이미 쇠도끼가 나왔으므로 돌도끼는 비과학이다. 축구시합에서 구조론의 대칭성원리가 적용된 포메이션을 쓰는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시합에 지기 때문이다. 물론 옛날에는 그냥 군대식 축구를 했다. 그때는 포메이션이 없어도 펠레만 있으면 이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상대가 포메이션을 안 쓰니까 자기도 안 쓰는 것이며 상대가 쓰니까 자기도 쓰는 것이다. 그렇다. 이제 구조론이 대칭성을 써서 현장에서 실제로 효과를 보고 있으니까 다른 데서도 이 도구를 써야 한다. 칼들고 싸우던 시대에 누가 총들고 나서면 다들 총으로 바꿔야 하는 것이다. 칼로도 된다고 우기면 곤란하다. ‘안 해도 되면 안 한다. 어쩔 수 없는 궁지에 몰려야 겨우 한다.’ <- 이게 문제다. 이런 식의 태도가 비판되어야 할 실용주의이며, 경험적 태도이며, 비과학적 태도인 것이다. 과학적 태도란 필요해서 하는 게 아니다. 경험이 아니고 실용이 아니다. 연역이어야 한다. 필자가 민주당을 비판하는 것도 그렇다. 극한의 궁지에 몰리면 약간 개혁하는 시늉을 하고, 딴나라당 실정으로 운좋게 선거에 몇 번 이겨서 배가 불러지면 얍삽하게 없었던 일로 하고. 그러므로 우리는 유시민 가물치라도 풀어서 민주당 미꾸라지 집단에 계속 긴장을 불어넣어야 하는 것이다. 내 눈으로 경험해야만 움직이겠다? 집값이 폭락하는 꼴을 내눈으로 봐야만 인정하겠다? 지구가 망하고 난 뒤에 지구온난화 대책을 세우겠다? 핵이 터지고 난 다음에 핵문제에 대비하겠다? 안 보고 알아야 과학이지, 겪어보고 알면 그게 과학인가? 지구 망하는거 경험하고 난 다음에 어쩌려고? ◎ 간단한 문제 - 경험으로 접근한다. 이것이 잘못된 거다. 진리는 보편성을 가진다. 어떤 경우에도 같은 도구를 사용해야 한다. 새가 강물에서 한쪽 다리를 드는 이유에도, 하품을 하는 이유에도, 만유인력에도 구조의 대칭성은 쓰인다. 전부 한 줄에 꿰어지는 것이다. 필자는 초등학교 3학년 때 ‘물새가 한쪽다리를 드는 이유는 체온을 절약하기 위해서’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접하고 ‘이게 어찌 과학일 수 있는가’ 하고 의문을 품었고 지금도 그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말도 안 된다. 근처에 가지도 않았다. 애초에 과학이 이런 식으로 기술되면 안 되는 거다. 그 말이 맞고 틀렸고를 떠나서 기본적으로 태도가 글러먹은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이유를 줏어섬기면 분량이 터무니없이 늘어나는데 그게 무슨 과학인가? ◎ 비과학 - 새가 똥을 싸는 이유는? 똥이 마렵기 때문이다. 똥이 마렵기 때문에 똥을 싼다는 식으로 설명하면 굉장히 분량이 늘어난다. 중구난방이 된다. 무질서해진다. 복잡해진다. 미로에 갇혀버린다. 쾌도난마로 상황을 정리해버려야 하는데 거미줄처럼 복잡한 실타래에 얽혀버린다. 보편성을 얻어야 과학이다. 모든 것에 공통되는 하나의 법칙으로 설명해야지 개별적으로 하나하나 줏어섬긴다면 곤란하다. 언제까지 그러고 살 테인가? 삼국사기 쓰던 김부식이 김유신 손자가 썼다는 김유신전을 어디까지 역사에 반영해야 하나 하고 고민하던 거와 같다. 김해 김씨 문중의 압력은 꽤나 받았을테고. 김유신 손자가 김유신전기를 개떡으로 써놓은 것이다. 전설과 신화와 도술이 판친다. 실제로 삼국사기에는 말도 안 되는 도술이 일부 나온다. 흑인은 피부가 검다. 백인은 피부가 희다. 이건 과학이 아니다. 흑인이나 백인이나 세포핵 주변에 멜라닌 색소가 포진하고 있고, 햇볕을 받으면 색소가 표면으로 떠오르고 햇볕이 없으면 핵 주위로 가라앉는다. 이건 과학이다. of (핵 주위의 멜라닌 색소) - 의하여 과학 아닌 것을 과학이라고 우기는 그 자체를 나는 용납할 수 없었던 거다. 민간요법으로 환자를 치료할 수 있지만 그건 의학이 아니다. 기도요법으로 병을 낫게 한다고 버젓이 간판을 건 교회가 있지만 그게 교회지 병원 아니다. 물새가 두 다리로 서면 물고기에게 발견될 확률이 두 배로 높다. 또 바람이 불거나 물살이 세면 휘청댄다. 체중이 두 다리에 분산되므로 바람에 휘청댈 확률이 열배로 높고, 따라서 물고기가 눈치채고 도망간다. 새가 한 다리로 서야 하는 이유는 그 외에도 매우 많다. 이유가 이렇게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는 것이고 그것은 과학이 아니다. 과학은 단 하나의 이유로 전부 한 줄에 꿰어야 한다. of는 단 하나다. 그것은 감기인플루엔자다. by는 매우 많다. 손을 안씻었다거나, 잠을 못자서 피곤하다거나, 감기환자와 접촉했다거나다. 이렇게 이유가 잔뜩 많으면 안 되는 거다. 새발의 피라는 말이 있다. 새 발에는 피가 거의 흐르지 않는데 물론 체온을 절약하는 방향의 진화다. 물새는 원래 찬물에 서 있도록 만들어진 생물인 것이다. 펭귄이 남극의 추위를 견디듯이. 독수리는 다리에도 털이 있다. 독수리는 다리에도 피를 보낸다. 그 이유는 발로 사냥을 하기 때문이다. 발을 많이 쓰기 때문이다. of-by-for. 모든 사건은 이러한 구조로 되어 있고, 이러한 축과 대칭의 구조를 드러내야 과학이라 할 수 있다. 원래는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5단계지만 넘 복잡하니까 일단 3단계로 설명하는 거다. 이 중에서 원인과 결과는 다 알 것이다. 중간에 제어가 있어야 한다. 제어는 시간개념이 들어간다는 점이 각별하다. 출발점의 사수가 도착점의 과녁을 향해 쏘는데 안 쏘고 미적거리는 수가 있다. 바로 지금 쏘아야 하는 것이다. 지금은 신호수가 신호탄을 쏘았을 때다. 그게 통과점 by다. ### 다 필요없고 수학으로 해결봐야 한다. 그런데 1+1=2 이건 산수지 수학 아니다. 과학이 아닌 거다. 경험에 불과하다. 사실 1+1=2에는 많은 전제와 함축이 들어 있다. 그걸 이심전심으로 알거나 경험으로 아는데, 이심전심으로 알면 혼자 알 뿐 타인에게 전달이 안 되고, 경험으로 알면 타 분야에 응용이 안 된다. ‘내게 300만원의 빚이 있는데, 거기다가 다시 300곱으로 빚을 증가시키면 어떻게 9억원의 큰 재산이 된다는 말인가? 이해할 수 없다. 어느 선생님도 내게 그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았다.’ (스탕달) 이런 착각이 일어나는 거다. 수학의 출발점은 어디인가? 그것은 공간의 두 점을 연결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상대방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우주공간에서 모르는 A와 B를 연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첫째 점을 찍어서 자기 위치를 정해야 하고, 다음 그 점을 선으로 전개시켜야 한다. 다음 그 선을 360도로 회전시켜 면을 만들어야 한다. 그 면을 다시 꺾는 방향으로 360도 회전시켜 입체를 만들어야 한다. 이렇게 전후좌우상하로 무한전개하면 다 걸린다. 모든 방향이 스크린 되는 것이다. 어느 지점에 있어도 결국 도달되는 것이다. 태양처럼 사방으로 무한히 빛을 비추면 어느 지점에 있어도 결국은 도달되듯이. 이러한 과정을 통해 공간에 좌표가 만들어지고 1+1=2는 그 좌표 안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거 없이 그냥 경험으로 1+1=2 하면 과학 아니다. 연금술이다. 최종적으로 밀도가 필요하다. 있어도 그냥 통과해 버리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구조론의 질 개념은 그 밀도가 성립하는 조건을 의미한다. 즉 어디에 뭔가 있기는 있는데, 손으로 그것을 집으려 하면 그냥 손이 통과해 버린다면? 있어도 손에 잡히지 않는 거다. 그렇다면 그게 없는 거다. 있다는 것은 반응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존재가 반응하게 하는 조건은 무엇인가? 그것이 질이다. 반드시 밀도차가 있어야 반응한다. 밀도가 같으면 그냥 통과다. 우주에 물질이 있다고 치고.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면? 진공이라고 하지만 뭔가 보이지 않는 것이 그 안에 꽉 차 있을 수도 있다. 근데 전혀 반응을 안 한다면 그게 없는 거다. 빛이 우주의 진공 속을 직진한다면 그 진공 안에 빛이 직진하도록 반응하는 것이 있는 것이다. 그게 없다면 빛은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는게 아니라 이쪽에서 소멸, 동시에 저쪽에서 발생 이렇게 된다. ◎ 질은 담장 안 왜 이런 구분이 필요한가 하면 어떤 집이 있는데 집배원이 배달을 왔다. 행인에게 묻는다. ‘홍길동 집이 어디요?’ ‘이 담장 안이오.’ 근데 건물이 없다. 집이 없잖아? 집은 어제 불타버리고 없소. 그렇다면 홍길동집은 없군. 배달취소. 그런가? 아니다. 그때 침낭 속에서 한 인간이 나타난다. ‘집은 없어도 여긴 내집이오.’ 집이 없는데 어떻게 네집이지? 무엇인가? 질 개념으로 보면 담장 안이 집이고, 입자 개념으로 보면 지붕 밑이 집이고, 힘 개념으로 보면 머무르는 호텔방이 집이다. 이걸 낱낱이 구분하지 않으면 그 집에 개집이 있으니, 네집과 개집 합쳐서 집이 둘이로군? 당신은 집을 두 채나 가졌으니 세금을 두 배로 내시오. 이거 곤란하다. 개집은 집이라도 집이 아니고, 홍길동집은 집이 불타고 없어도 집이다. 이런걸 구분하기 위해 구조론이 있는 거다. ◎ 질은 어미를 부르면 새끼가 따라온다. 이런 걸 일일이 말로 설명하자면 졸라리 피곤한 거다. 그냥 질 입자 힘 운동 량으로 대체하는 거다. 결론적으로 우주를 설명하는 기본은 of by for의 대칭성인데 과학자들은 그것이 반드시 필요한 상황까지 가서야, 그 상대성이론 등에서 대칭성을 약간 쓸 뿐이고 실제로는 대개 경험으로 때려잡고 있으니 황당한 연금술이 아닌가 이 말이다. 하긴 상대성이란 말을 대칭성으로 대체해도 약간 의미가 통하겠다. 정리하자. 과학은 지식이 저절로 자라는 시스템이다. 저절로 자라는건 지식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때문이다. 꼬리에 무는 꼬리가 대칭성이다. 대칭성은 of by for다. 이러한 대칭성의 구조를 충족시키려면 의하여(원인-출발점) 바로(제어-격발) 위하여(결과-도착점)이 하나의 세트 단위로 작동해야 한다. 그러므로 생물학에서 진화와 관련하여 ‘뭐를 하기 위하여 어쨌다’는 식의 기술은 김유신 손자가 할아버지 전기쓰듯 개판인 것이다. 과학적 사고를 해야 한다. 세상을 보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 구조로 보아야 한다. 하나의 존재는 하나의 의사결정 단위다. of by for다. 이게 세트로 갖추어야 하나의 존재다. 퍼즐이 조립되는 이유는 요철(凹凸)이 있기 때문이다. 그게 없으면 레고블럭도 조립이 안 된다. of by for를 갖추어야 요철이 있는 것이다. 그냥 마구잡이 주장은 혼란을 부를 뿐이다. 이런 질서는 언어에도 적용된다. ‘답답’을 발음하면 실제로 가슴이 답답하고, ‘시원’을 발음하면 실제로 가슴이 시원하다. 호는 뜨거운 호빵을 호하고 부는 것이요 흡은 흡연자가 연기를 흡하고 빨아마시는 것이다. 답답은 입을 닫아붙이는 것이라 말만해도 답답하고, 시원은 공기를 션~하게 쉬익 들이마시는 것이라 말만해도 시원한 거다. 반대로 말하면 영어를 학습할 때도 이 규칙을 적용하여 답답하게 혹은 시원하게 발음해야 한다. 그런거 없이 답답하지 않게 답답을 발음하고, 시원하지 않게 시원을 발음하므로 학습효과가 없는 것이다. 이런건 경험적으로 알아낸게 아니고, of by for의 규칙을 적용하여 이 글을 쓰기 5분 전에 방금 ‘답답-시원’의 차이를 알아낸 것이다. 지식을 대량으로 복제한 것이다. 필자의 부바키키 프로젝트는 이런 식으로 시스템적 지식을 적용하여 성공한 대표적인 예다. 입증이 되는데 누가 군말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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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f는 고정된 소속, 포지션을 나타내는 말이고(공간)
by는 조금 더 동적인 현장의 냄새가 나는 것이며 (시간)
of에 속한 사람이 by라는 통로를 이용하여 for로 가는 것이오.
어원으로 봐도 of는 옆인데 자기와 나란히 있는 것이며 여기가 출발점이오.
by는 거리가 이격되지 않고 자기와 바로붙어 바로앞에 있는 것이고
for는 거리가 약간 떨어져 전방에 있는 것이오.
of에서 by를 통하여 for로 가는 것이오.
우리말의 의하여와 ~의가 비슷하게 쓰이기 때문에 용어의 혼란이 있소.
of the people - 국민의 국민주권
by the people - 국민에 의한 국민자치
for the people - 국민을 위한 국민복지
주권에서 자치를 거쳐 복지로 가는게 맞소.
원래 의하여 - 위하여 두 단어만 쓰다가 세 단어로 늘리니 혼란이 있소.
어떤 경우
of the people - 국민주권에 의한
by the people - 국민자치를 통한
for the people - 국민복지를 위한
으로 해도 의미가 통하지 싶소.
~의와 ~의하여는 자리를 바꿔도 구조는 그대로 유지가 되오.
구조로 보면 의하여, 의, 위하여보다
의한, 통한, 위한이 더 정확하게 의미전달이 된다고 보오.
의하여 > 통하여 > 위하여로 정리하는게 낫겠소.
좋소.
의하여 > 통하여 > 위하여
에너지가 가는 길 이구려.
어떠한 자연적 사실, 혹은 과학적 사실을 발견했다고 했을 때...
인간이 혼자서 그것을 간직하거나 대화할 상대가 없다는 것, 즉 털어놓을 뭔가가 없다는 것은
굉장한 스트레스 혹은 긴장을 갖고 살아야 한다는 의미일 수도 잇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이 뭔가에 대해서 서로 공유하게 되거나 그것이 서로 통하게 될 때, 그런 혼자만의 긴장이나 스트레스는 해소될 수 있다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것은 뭔가에 대해서 발견하거나 알게 된 사람들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갖고 있거나 이겨내고 있는 것과 같다고 생각됩니다.
뭔가 막연하게 알아도 정확하지 않아서 스트레스를 받지만, 뭔가를 알고도 말을 해줄 대상이나 소통이 안된다면 그것 역시 외로운 것이고, 어떤 답답함이나 스트레스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인간의 정신이 나름대로 안정되게 유지되어 왔던 것은 서로 말을 해주고 전달해주고 공유하여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집중되는 스트레스나 긴장을 해소 시키며 왔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구요.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무게를 여럿이 혹은 집단이 나눠갖거나 짊어지는 것과 같기 때문에 그 무게를 분산시킴으로 인해서 인간이 안정됨을 유지해 왔던 것은 아닐까라는 하는 생각도 들구요.
이러한 말을 해줄 대상들과 혹은 사회의 소통이 활발해질 수록 인간은 어떤 긴장에서 벗어나기도 한다고 보이며,
누군가 알게된 사실들을 누군가들이 다시 검증하거나 공유하는 과정에서 일시적인 부딪힘들을 있을 것이나 결과적으로는 인간에게 몰리는 어떤 정신적 긴장이 해소되어 인간들이 보편적으로 정신을 안정화 시키게 되었다고 생각해보게 됩니다.
어떤 작은 비밀이라는 것에 대해서 혼자만 알고 있는 것보다 공유할 대상들이 있을 때 인간은 안절부절함에서 벗어나 어떤 안정감을 갖기도 한다고 보기 때문에, 큰 사실들에 대해서도 인간은 공유하여 풀어갈 때 안정감을 느낀다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자신의 말을 타인들이 알아 들었을 때 자신이 생각한 것에 대해서 조금은 더 확신을 갖거나 틀린 것이 아니라고 생각되기도 한다고 보이며, 좀 더 체계화 시킬 수도 있는 것이라고 보이며, 혹은 알아듣지 못할 것을 우려하기도 하지만, 의외로 인간은 어찌되었든 소통이라는 기본구조를 가지고 있음으로 알아먹을 수도 있다는 것이고 알아먹기도 한다는 그것에 있어서 예술이나 과학이나 문명이 발전한 것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합니다.
어원으로는 잘 모르겠지만, of >by > for 가 아니라, by > of > for 가 아니오? 난 그리 믿고 여태 살아왔는디...
일전에 김훈을 만났을 때, 내가 "왜 사는가?" 라고 질문하고 나서 시시한 대답을 듣고, 내가 생각한 답이
1) 무엇에 의하여 사는가? - 에너지- by - 과거 - 입력
2) 1과 3 사이에 어떤 관성이 존재하는가 - 밸런스 - of - 현재 - 제어
3) 무엇을 위하여 사는가? - 방향성 - for - 미래 - 출력
이거 였소. 무턱대고 왜 사는가? 가 아니라 그것을 생각하기 위한 또 하나의 구조. 그 안에 by > of > for 가 있었소. by = 의하여 가 '에너지'가 아니라 '제어'가 되는지 알고 싶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