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으로 본 다중지능
현대인의 관심은 영재교육에 있다. 학부모들은 자신의 아이가 영재라고 믿고 이를 입증하려고 한다. 그러나 IQ 검사는 지능이 높은 아이를 찾아내는데 효과적인 수단이 되지 못한다. 더구나 특정한 분야에서만 두각을 나타내는 창의력있는 영재를 찾아내는 데는 전혀 쓸모가 없다. IQ 210으로 알려진 김웅용 씨는 일본의 측정기관에서 출제된 모든 문제의 정답을 맞추었기 때문에 200점 만점이 되었는데, 그 이상은 측정불가이므로 주최측에서 임의로 10점을 보태어 210으로 발표했다고 한다. 기네스북에 오른 210이라는 숫자는 사실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일정한 수준 이상이 되면 정확히 측정할 수 없다고 보는게 정답일 터이다. IQ검사와 같은 학습능력평가 위주의 일차원적 접근으로는 복잡한 인간의 문제해결능력을 설명하는데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인간의 지적능력은 보다 입체적이고 복합적인 능력이다. 중요한 것은 실제 현장에서의 문제해결능력이다. IQ 검사는 단지 변별할 수 있는 것을 변별할 뿐이다. IQ검사는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하드웨어를 검사할 뿐 후천적으로 형성되는 소프트웨어를 검사하지 못한다. 지능의 상당부분은 뇌의 여러 영역을 종합적으로 운용하는 추상능력에 의해 달성되며, 이 부분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하드웨어가 아니라 후천적으로 결집되는 소프트웨어다. 이러한 뇌 안의 소프트웨어는 뇌 안에서 각 영역들 간의 경쟁에 의해 후천적으로 만들어진다. 에디슨이나 스티브 잡스와 같은 진정한 천재는 선천적으로 능력을 타고난 것이 아니라 독특한 성장환경에 의해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왜냐하면 뇌의 여러가지 능력들 중에서 한 두 가지에 결함이 있는 사람이 그 결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뇌 안의 소프트웨어를 발달시키기 때문이다. 천재의 모든 조건을 갖추어서 가진 능력을 여러 방면에 분산시킨 사람보다 한 두가지 결함이 있는 사람이 그 부분을 포기하고 다른 한 부분에 집중함으로써 오히려 더 뛰어난 성과를 올리게 되는 것이다. 특화된 천재가 진짜 천재이며 진짜 천재는 반드시 다른 분야에 결함을 가지고 있다. 하워드 가드너는 IQ검사 위주의 고전적 지능연구를 비판하고 보다 다차원적인 접근을 시도하여 1983년에 다중지능이론을 제창하였다. 다중지능이론은 IQ 검사와 달리 일률적인 수치를 매기지 않고 다양한 지적 영역을 제시한다는 점이 각별하다. 다음 여덟가지 항목은 하워드 가드너의 지능분류다. . - 언어지능 : 작가, 기자 (셰익스피어, 이상) - 논리수학지능 : 수학자, 과학자 (피타고라스, 갈릴레이) - 인간친화지능 : 교사, 정치인 (김구, 링컨) - 자기성찰지능 : 철학자, 소설가 (프로이트, 성철) - 공간지능 : 건축가, 발명가 (다빈치, 에디슨) - 음악지능 : 연주자, 작곡가 (베토벤, 모차르트) - 신체운동지능 : 배우, 운동가 (박지성, 김연아) - 자연친화지능 : 식물학자, 수의사 (파브르, 윤무부) 고전적 지능연구는 근대사회의 표준적인 관료양성을 목표로 하는 줄세우기식 획일주의 교육을 조장해 왔다는 점에서 비판받을만 하다. 하워드 가드너의 다중지능이론은 고도화된 현대사회의 트렌드에 맞는 창의적인 교육의 비전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교육의 대안을 모색하는 사람들에 의해 각광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말이 그러할 뿐 실제로는 그의 지능분류가 전혀 과학적인 근거가 없다는 점이 문제로 된다. 하워드 가드너의 다중지능이론은 찬심한 아이디어이기는 하나 받쳐주는 콘텐츠 없는 이념적 폭주에 불과하다. 이론이라고 주장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구상에 불과하다. 아마도 그의 하버드 학벌이 아니었으면 아무도 귀기울여주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이지 이런 류의 이야기는 심심한 사람이 5분 만에 혼자 골방에서 뚝닥 지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이제마가 사상의설을 꾸며낸다 해도 주역사상의 음양론에 따른 대칭원리를 적용하여 스타크래프트 종족들 간에 힘의 균형을 맞추듯이 각 항목들 사이의 밸런스를 맞추어야 하므로 적어도 30분 정도의 고민은 필요하겠지만 이건 그냥 줏어섬기기만 하면 되니까 5분의 투자도 과하다 하겠다. 문제는 분류이론이 적용되지 않았다는 거다. 그러므로 이론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분류한다는 것은 구분대상에 인과법칙에 따른 대칭원리를 적용하여 구분지를 나누는 것이다. 축구시합에 포지션을 나누어도 공격수와 수비수, 혹은 오른쪽 윙어와 왼쪽 윙어로 나누듯이 기하학적 대칭원리가 적용되는 것이며, 하나의 축구공이 이쪽 골대에서 저쪽 골대로 향하며 공격과 수비의 인과율을 성립시키는 절차를 거쳐 유도되는 것이다. 이는 농구나 배구, 야구라도 마찬가지다. 하워드 가드너의 분류는 각 포지션들 간에 아무런 유연관계가 없다. 차라리 좌뇌로 우뇌를 구분하는 것이 그나마 해부학적인 근거가 있다고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IQ테스트의 전근대적인 2분법적 접근을 비판하고 거기에 대항하여 하나의 이념적 대립항의 전선을 형성했다는 점은 평가할 만 하다. 아이디어와 방향의 제시 측면에서는 확실히 탁월한 바가 있다. 그리고 그게 다다. 그가 주장한 낱낱의 콘텐츠들은 맹랑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다. 전부 폐기함이 마땅하다. 이런 점은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도 비슷하다. 프로이드의 아이디어 역시 탁월한 바가 있으나 꿈해몽을 비롯한 그의 구체적인 주장들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 철저히 비판되었다. 그는 확실히 새로운 비전을 제시했지만 그 길로 가는 도로를 건설하지는 못했다. 프로이드가 못한 것을 그의 제자였던 아들러와 융이 해냈다. 현대 심리학의 경향은 프로이드의 노선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 마르크스주의 역시 비슷하다. 그의 자본주의 비판은 총론에서 유의미하나 각론은 대개 허튼 소리다. 한의학도 그렇다. 한의학이 양의학의 속좁음을 비판하고 있지만 각론에서는 이론적인 근거가 없다. 양의학의 독주를 견제하는 데나 소용될 뿐이다. 이런 식의 이념적 진지들은 ‘마땅히 이런 것이 있어야 한다’는 도덕적 당위성을 따른 것일 뿐, 실제로 난관을 타개하고 한 걸음 더 진보하여 가는 방법론을 찾아낸 것은 아니다. 현장에 투입되었을 때 그걸로는 전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물론 한의학도 부분적인 성과는 있지만 그 또한 경험의 축적일 뿐 이론의 뒷받침에 의해 가치가 대량생산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해야 한다. 기존의 잘못된 노선을 감시하고 비판하는데는 소용이 있으나, 제 힘으로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는 엉터리 이론들이 많다. 다중지능 개념 역시 현대교육의 나아갈 방향에 관하여 중요한 시사점을 던지고 있으나 각론에서의 콘텐츠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필자의 구조주의 관점이 다중지능 개념을 전면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느 면에서는 다중지능이론의 헛점을 보완하여 이론적으로 완성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하워드 가드너의 다중지능 이론은 우선 구분지를 8가지로 나누는데 대한 필연의 논리적 근거가 없다. 예컨대 8개 항목 중에서 ‘공간지능’이라는 것은 남자들에게 더 유리한 것으로 성차별의 소지가 상당하다. 그림으로 말하면 남자아이들은 비교적 입체적으로 그리고, 여자아이는 상대적으로 평면적인 그림을 그리는 경향이 있다. 좁은 공간에서 주차를 잘 못하는 여성의 비율이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높다. 이는 남자들의 경우 들판에서 사냥을 해야 하므로 공간에서 입체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포착하는데 뛰어나도록 뇌가 세팅되었기 때문이다. 강아지풀을 흔들면 고양이는 바로 달려들지만 개는 전혀 관심이 없다. 남자들의 뇌는 고양이와 같아서 움직이는 것에 잘 반응한다. 장난감을 선택해도 남자어린이는 총이나 칼과 같이 움직이면서 어떤 대상에 물리적으로 타격하며 작동하는 것을 좋아한다. 남자아이의 장난감이 전쟁무기 중심으로 동적인 소재들인데 비해 여자아이의 장난감은 인형이나 소꿉놀이 용품을 중심으로 상대적으로 더 정적인 소재들이다. 이는 임신초기 태내에서 호르몬의 작용으로 남자와 여자, 동성애자의 뇌가 각기 다르게 세팅되기 때문이다. 애초에 뇌구조가 다른 거다. 옛날에는 남녀간에 뇌기능의 차이가 없다는 주장이 우세했으나, 최근에는 태내에서 호르몬 분비의 차이로 인하여 남녀간에 뇌구조의 차이가 일찌감치 결정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렇듯 남녀간에 선천적인 기질의 차이가 있는 특수한 사정을 지능이라고 주장하면 곤란하다. 지능을 논하려면 성별의 차이 없이 두루 적용되는 보편적인 능력을 두고 논해야 한다. 패션이나 가구의 디자인이라면 아무래도 색감이 뛰어난 여성이 유리한 점이 있다. 남자들은 기본적으로 미세한 색깔의 차이에 그다지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여자가 그날따라 신경을 써서 화장을 해도 남자는 이를 잘 눈치채지 못한다. 도무지 뇌가 반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뇌가 반응한다는 것은 긴장한다는 것인데, 남자들의 뇌는 고양이와 같아서 움직이지 않는 것에는 잘 긴장하지 않는다.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고양이처럼 뭐든 흔들어주면 무턱대고 뛰어드는게 남자다. 가슴 큰 여자가 지나가면 어떤 남자라도 눈동자가 돌아간다. 이는 고약한 냄새를 맡았을 때 얼굴을 찡그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물리적인 조건반사이지 반드시 그 남자가 여자의 가슴에 관심이 있어서 그러한 것은 아니다. 이는 남성의 발기와 마찬가지로 뇌의 기능이라기보다는 신체의 생리적 특성이다. 이런 점에서 지능과 지능이 아닌 것은 확실히 구분되어야 한다. 언어지능의 경우 단순히 말을 잘하기로는 여자가 확실히 뛰어나다. 남자아이는 여자아이에 비해 말을 늦게 배우고 말더듬이도 많다. 남자가 말을 안 하고 있는 것은 성격이 과묵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마땅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인 경우가 많다. 여자들은 이를 남자의 침묵시위로 오해하곤 한다. 실은 표현력 부족이다. 그 상황에서 남자도 속으로는 꽤 답답하다. 뭔가 말을 하고 싶은데 가슴 속에서 뭔가 콱 치받으면서 머릿 속이 멍해져서 아무 단어도 떠오르지 않는다. 말을 잘한다고 해서 시나 소설을 잘 짓는 것은 전혀 아니다. 수다장이처럼 말을 빨리 할 뿐이다. 시를 지으려면 소리나 의미에 대칭원리를 적용하여 문장의 맥락에 따른 긴장을 끌어내는 훈련을 해야 한다. 문장구조의 관계망 안에서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능력이 필요한 것이며 이는 언어능력을 초월하는 것이다. 언어능력 뿐만 아니라 보다 다양한 여러 능력들을 종합하여 내는 고도의 추상능력이 있어야 진정한 작가가 될 수 있다. 말하자면 하워드 가드너가 여덟가지로 구분한 능력보다 상부구조의 능력이 있으며 그 능력은 여러 개별적인 능력을 종합적으로 운용하는 능력이고 지능의 차이는 바로 그 부분에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구조로 보면 상부구조와 하부구조가 있다. 하워드 가드너의 구분은 대개 하부구조에 해당하는 것이고 하부구조의 차이는 실제로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그다지 의미가 없다. 구조로 보면 반드시 우회하는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하워드 가드너는 음악지능을 강조하고 있지만 노래를 못해도 작곡을 잘할 수 있고, 작곡을 못해도 작사를 잘할 수 있고, 작사를 못해도 연주는 잘할 수 있고, 연주를 못해도 음악평론을 할 수 있다. 음악지능 따위는 애초에 없으며 작사능력, 작곡능력, 가창능력, 연주능력, 음악평론능력에는 각각 다른 뇌의 능력이 사용된다. 이를 종합적으로 운용하는 추상능력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 추상능력에는 일정한 모형의 툴이 사용되고, 그 모형으로부터 반복적으로 복제되므로 상당부분 후천적으로 만들어진다. 수학으로 논하면 동양인들이 셈을 잘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수학은 아니다. 어쨌든 동양인들이 셈을 잘한다는 사실은 과학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그러나 현대수학은 고도의 추상적 사고를 요하는 점에서 계산력 위주의 산술과 다르다. 리만기하학이래 발달한 현대수학은 단순계산능력보다 주어진 상황에서 일정한 공학적 모형을 뽑아내는 패턴분석 능력이 강조된다. 진정한 수학은 주어진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주어진 상황 안에서 문제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고정된 지구와 고정된 달 사이의 거리를 재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지구와 움직이는 달 사이에서 일정한 공식을 끌어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입체적 모형으로 사유하는 고도의 추상능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추상능력은 수학적 지능을 뛰어넘는 더 높은 차원의 지적 능력이며, 상당부분 후천적으로 형성된다. 수학의 구조는 정의, 분류, 비교, 연산, 측정이다. 이 중에서 상부구조에 해당하는 정의, 분류, 비교를 잘해야 진짜 수학이다. 단순계산은 하부구조의 연산, 측정이며 이건 계산기로 대체할 수 있으므로 안 쳐주는 것이다. 유클리드의 원론은 계산능력과는 상관이 없다. 수학의 본질은 자연에서의 패턴분석과 모형추출이며 그것은 유기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변화무상한 자연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패턴을 포착하여 일정한 공학적 모형을 도출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분석적 사고보다 종합적 사고가 소용된다. 그리고 그 진정한 능력은 하워드 가드너의 8가지 구분에 없는 전혀 다른 능력이다. 인간친화지능도 다분히 근거가 없다. 말을 더듬는다면 아무래도 대인관계가 나빠질 수 밖에 없다. 그 경우 인간친화지능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다. 인간친화를 잘 하는 사람은 대개 말주변이 좋고 우스개를 잘 하거나, 노래나 그림, 춤, 오락, 도박 등 잡기에 뛰어난 사람이 많다. 그들은 낯선 사람과도 금새 말을 붙이는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자신감이 있다. 그것은 지능이라기 보다는 상당부분 숙달된 기술이다. 누구라도 연습하면 대인관계가 향상된다. 그러나 한 인간이 가진 열정은 제한되어 있는데 그 제한된 에너지를 대인관계 하나에 몽땅 쏟아붓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지능의 문제가 아니라 전략의 문제, 일관성의 문제이고 또 습관의 문제, 환경의 문제, 심리성격의 문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잘 하는 하나의 분야에 집중하려고 한다. 실제로 그것이 더 효율적이다. 다방면에 두루 뛰어나기보다 한 분야라도 제대로 해내는 것이 더 낫다. 자신이 불리한 분야를 기피하다보면 그것이 쌓여서 결국 아주 안 하게 된다. 대인관계에 한 가지 약점이 있는 사람이 대인관계를 기피한 결과 습관으로 굳어져서 아주 대인관계를 못하게 된 것이다. 이는 지능의 문제가 아니라 습관의 문제이고 성격의 문제이며, 필요하면 훈련하여 고칠 수도 있다. 한국인들은 존댓말 함정 때문에 형님아우 서열 따지느라 대인관계가 안 된다. 혹시 윗사람에게 반말하는 실수를 저지를까봐 조심하다가 말을 못붙이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남녀간에 내외하는 전통이 있기 때문에 더 힘들다. 이런 부분은 지능과는 상관이 없다. 자기성찰지능이라는 것도 이름은 재미있게 붙여놓았지만 대개 지능의 문제가 아니다. 바보도 어떤 책임감있는 위치에 오르면 일관성을 지켜 대외적으로 신용을 얻으려고 한다. 그러므로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게 된다. 형제 중에서는 맏이가 더 도덕적이고 차남이나 삼남은 혁명가적 기질이 있다. 역사적으로 크게 일을 벌이는 모험가는 차남이하인 경우가 많다. 가문을 지켜야 한다는 부담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성찰은 다분히 환경과 교육에 의해 결정된다. 자기를 이해하는가는 자기 인생 전체를 총괄하는 일관된 전략을 세우느냐이고 이는 자신을 부족의 리더로 여길 때 가능한 것이며, 주변으로부터 비교와 멸시를 당해 자존감이 없는 사람이라면 자기를 성찰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역시 지능의 문제가 아니라 환경의 문제이며 교육의 문제이다. 누구든 교육을 받으면 자기성찰을 하게 된다. 범죄자도 교정을 받으면 성찰한다. 음악지능은 지능이 아니라 재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친화지능이나 자기성찰지능은 지능이 아니라 교양이라고 하겠다. 공간지능, 언어지능, 논리수학지능, 자연탐구지능도 뇌의 다양한 영역을 종합적으로 운용하는 추상능력에 의해 유의미하게 된다. 추상능력이 없으면 공간지능이 있어봤자 일 잘하는 목수가 될 뿐이요, 언어지능이 있어봤자 수다쟁이가 될 뿐이요, 논리수학지능이 있어봤자 도박꾼이 될 뿐이요, 자연탐구지능이 있어봤자 길바닥에 떨어진 동전을 잘 주울 뿐이다. 높은 차원에서의 종합능력이 있어야 이 재주들을 가치있게 사용할 수 있다. 지능의 핵심은 개별적인 능력이 아니라 이들을 고루 운용하는 능력이다. 재능과 지능은 다르다. 절대음감이 있어도 음악적 능력이 없는 사람이 있다. 단지 소리를 듣고 음이름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소리가 몇 헤르쯔인지를 정확히 아는 것이다. 절대음감이 있는 사람은 소리로 들은 것을 눈으로 보듯이 시각화 하는 능력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뇌의 능력이라기보다는 상당부분 귀와 눈의 능력이라 할 것이다. 색맹이거나 시력이 나쁘면 화가가 되기 어려운 것과 같다. 신체운동지능이라는 것도 운동은 소뇌의 영향을 크게 받으므로 애초에 구분이 다른 것이다. 대뇌의 능력이 여러 정보를 합성하는 능력이라면, 소뇌의 능력은 불필요한 정보의 간섭을 배제하는 능력이다. 운동을 잘 하는 사람은 운동에 영향을 미치는 불필요한 노이즈 정보들을 잘 차단한다. 대뇌와 소뇌의 작동방식은 완전히 상반된다. 대뇌는 지적 자원을 쌓아 고급정보를 건축하고 소뇌는 반대로 그건축된 것을 무너뜨리는 형태로 작동한다. 훈련된 선수들은 기계처럼 정확하게 타격해내지만 아무리 연습해도 타고난 곡예사인 물개를 이길 수는 없다. 동물들이 올림픽을 연다면 인간 종은 한 개의 메달도 따지 못할 것이다. 동물이 운동을 잘하는 이유는 대뇌의 불필요한 간섭을 잘 차단하기 때문이다. 파브르나 다윈이 과연 자연탐구지능이 뛰어난 사람일까? 그들을 자연에 내버려두면 생존의 달인 베어 그릴스처럼 잘 살아남을 것인가? 천만에! 전혀 아니다. 파브르나 다윈이 자연을 탐구한 이유는 우연히 남들이 그 길을 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길에서 금덩이를 주웠다면 그는 황금탐구지능이 뛰어난 사람일까? 아니다. 다른 사람이 그 금덩이를 주워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주워간 것이다. 또 자연탐구라는 개념은 아무래도 밖으로 나돌아다녀야 하는 남자들에게 유리한 개념이다. 그렇다면 여자들은 자연탐구지능이 떨어지는 것일까? 야생의 자연을 잘 탐구하는 사람이 집안의 미묘한 분위기를 잘 탐구할까? 어린이집에서 아이들 사이에 어떤 마찰이 일어났는지, 누구와 누구가 불화이고 누구와 누구가 친한지, 누가 아픈지, 누가 우울한지 잘 알아낼까? 어린이집은 인공구조물이므로 자연이 아니다? 천만에! 어린이집이라면 그 어린이집이 하나의 자연이며 생태계다. 자연탐구가 아니라 환경탐구가 맞을 것이다. 그 환경에는 인공적인 환경도 포함된다. 강아지도 집안의 미묘한 분위기를 잘 포착하는 능력이 있다. 때로는 강아지가 사람보다 뛰어날 때도 있다. 왜 이들은 8 가지인가? 하워드 가드너가 그냥 멋대로 정한 것이다. 세분하면 백 가지가 될 수도 있고 천 가지가 될 수도 있다. 3 가지나 5 가지로 구분할 수도 있지만 좀 있어보이는 척 하려고 하다보니 8이라는 숫자가 나온 것이다. 하워드 가드너의 분류는 과학적인 근거가 없는 엉터리지만 다중지능이라는 개념 자체는 큰 틀에서 유효하다. 기존의 IQ 테스트는 테스트할 수 있는 것만 테스트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지적 능력의 상당부분은 테스트 자체가 불가능하다. 객관식 문제로 출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 공간지능 - 남자와 여자, 동성애자가 다르다는 점에서 선천적이고 본능적인 기질의 차이가 있다. 기질의 차이에는 보상관계가 있으므로 뇌의 어느 한쪽이 발달하면 다른 쪽은 그만큼 약하기 마련이다. 성별에 따라 공간을 잘 이해하는 대신 색채에 둔하다든가 할 수 있다. ◎ 언어지능 - 아나운서는 말만 잘해도 되지만 작가로 성공하려면 말하기 능력 외에 문맥 안에서 발음과 의미와 주제들 간의 대칭성을 발견하고 그로부터 고도의 긴장을 끌어내는 추상능력이 필요하며 이는 언어지능을 초월한 상부구조에서의 다른 능력이다. ◎ 논리수학지능 - 입체적 모형을 통하여 패턴분석을 해내는 추상능력이 수학능력보다 더 중요하다. 추상능력은 상당부분 후천적으로 결집되며 한번 모형이 만들어지면 같은 스타일의 아이디어를 반복적으로 복제한다. ◎ 인간친화지능 - 대인관계는 신뢰획득을 위한 일관성이 중요하므로 전략적 선택에 따라 일관되게 대인관계에 에너지를 쏟아붓거나 일관되게 대인관계를 기피하게 된다. 이는 상당부분 습관과 성격, 환경의 문제이다. ◎ 자기성찰지능 - 자기성찰은 상당부분 지능이 아닌 교양에 해당한다. 환경의 문제, 교육의 문제이다. 좋은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거나 공동체 안에서 중요한 임무를 맡으면 누구라도 자기성찰을 하게 된다. ◎ 음악지능- 시각지능, 청각지능, 발성지능, 후각지능, 감정지능, 동적인식지능, 요리지능, 위생지능으로 세분하면 수십가지가 되므로 구분이 무의미하다. 선천적인 기질의 문제이며 보상관계에 따라 하나가 발달하면 하나가 부진하다. ◎ 신체운동지능 - 대뇌가 아니라 소뇌에 지배되며 대뇌와 소뇌는 작동방식이 상반되므로 해당없다. 지능이 아니다. 신체능력만으로는 의미없다. 최고의 스포츠 스타들은 일반적으로 지능이 뛰어난 것이 보통이다. ◎ 자연탐구지능 - 어떤 대상에 흥미를 느끼고 주목하는 것은 정서적 센스가 작동한 것이며 이런 능력은 도박이나 잡기에 두각을 나타내게 한다. 학자로 성공하려면 거기에 더하여 종합적인 추상능력이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음악지능, 신체운동지능 등은 지능이 아니라 재능에 가까운 것이고, 재능은 이 외에도 종류가 무수히 많다. 굳이 구분하자면 감정지능, 게임지능, 미술지능, 도박지능, 조형지능, 색채지능, 모방지능, 발성지능, 시각지능, 요리지능, 위생지능, 가사지능 등으로 무수히 찾아진다. 그러므로 이 부분은 논외로 함이 마땅하다. 인간친화지능, 자기성찰지능은 지능이 아니라 다분히 교양에 가까운 것이다. 공간지능, 언어지능, 논리수학지능, 자연탐구지능은 그 각각의 지능보다 뇌의 다양한 부분을 종합적으로 운용하는 추상능력에 의미가 있다. 말더듬이도 좋은 시를 쓸 수 있다. 셈을 잘 못하는 사람도 계산기를 사용하여 훌륭한 수학자가 될 수 있다. 공간구조에 대한 이해가 떨어지는 길치라도 뛰어난 건축가가 될 수 있다. 자연에 대한 관찰력이 떨어져 잃어버린 동전을 못 찾는 사람도 얼마든지 곤충학자가 될 수 있다. 하워드 가드너의 구분은 모두 하부구조에 속하는 것이고 사회적 성공에는 상부구조의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부구조의 운용은 하나의 결점을 다른 부분으로 보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에디슨은 전기와 관련하여 무수히 많은 발명을 했지만 전기 자체에 대해서는 그다지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이었으므로 그 방면의 전문가인 테슬라에게 의존했다. 에디슨은 자연탐구에 능한 사람도 아니고, 논리수학에 능한 사람도 아니었다. 에디슨은 발명회사를 차려놓고 많은 직원을 동원하여 포드시스템과 같이 발명을 대량생산하는 발명시스템을 만들었다. 이건 전혀 다른 것이다. 에디슨이 많은 발명을 하루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뇌에 발명에 대한 입체적 모형을 세팅해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하나의 원본 모형으로부터 다양한 응용모형이 도출된 것이다. 이쪽에서 입력하면 저쪽으로 출력되는 형태로 그 모형이 작동하여 발명을 대량생산한 것이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자신의 뇌에 일정한 모형을 세팅해놓고 패턴분석을 적용하여 비슷한 작품을 대량생산한다. 그것이 심하면 매너리즘에 빠져 자기복제, 자기표절로 치닫게 된다. 천재들은 천재의 특별한 수단을 갖추고 있으며 어떤 이유로 그것을 한번 손에 넣은 다음 마술처럼 아이디어들을 대량으로 토해낸다. 관건은 지능이 아니라 그 툴이다. 과연 그 연장을 손에 넣었느냐가 중요하다. 웹툰 만화가 조석은 언어를 살짝 비트는 유머를 반복적으로 구사한다. 문장을 거꾸로 읽는다거나, 세로로 읽는다거나, 혹은 이리저리 뗏다 붙였다 하는 식이다. 만화가 고행석의 주인공 구영탄과 홍콩 영화배우 주성치는 같은 캐릭터다. 소림당구로 알려진 주성치 영화 도성타왕은 불청객 시리즈와 줄거리까지 흡사하다. 시골에서 괴력을 가졌으나 물정을 모르는 순박한 천재가 문득 도시로 올라와서 해프닝을 일으킨다는 설정이다. 고행석과 주성치는 자신의 뇌에 같은 모형을 세팅해 놓고 있는 것이다. 지능이란 입체적 모형을 세팅하는 능력이며 대부분의 천재들은 이 모형으로부터 같은 패턴의 아이디어들을 대량으로 복제하는 수법을 쓴다. 하워드 가드너가 말하는 여러가지 잡다한 재능들은 그 모형의 하부구조를 구성할 뿐이다. 인간의 지능은 인터넷 네트워크와 같아서 고정된 하나의 루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경로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그 여러 루트들 중에서 쓸모있는 자원들을 추려서 입체적으로 구성하는 추상능력이 중요하다. 만화가 양영순의 최근작 덴마는 그의 실패한 과거 작품에 사용되었던 여러 아이디어들을 집대성하고 있다. 양영순은 뇌 속에 하나의 커다란 입체적 모형을 세팅해 놓고 여러 작품들을 시도하면서 그 모형을 구성하는 부품들을 하나씩 축적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무수히 실패했지만 그 실패한 아이디어들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고스란히 모아두었던 것이다. 천재들은 대부분 이러한 능력이 있어서 커다란 밑그림을 그려놓고 유년기부터 거기에 맞는 아이디어의 부품들을 하나씩 축적해가고 있다. 이를 위하여 유년기에 모든 아이디어의 주머니가 되는 커다란 밑그림을 그려놓는 것이 추상능력이며 이는 후천적으로 발달된다. 추상(抽象)의 추는 뺄 추다. 여러 개별적인 사건들에서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부품을 하나씩 빼놓는 것이다. 다른 곳에 또 써먹기 위해. 코미디언이라면 어릴때 우스개를 잘해서 누구로부터 칭찬들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 사건에 자극받아 누군가를 웃기는데 성공할때 마다 그 아이디어들을 수집해 놓았을 것이다. 그 러면서 먹히는 아이디어의 패턴들을 모아 자기만의 스타일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것이 입체적 모형이며 대부분 이 모형안에서 반복적으로 아이디어가 복제된다. 이렇듯 개별적인 능력을 종합적으로 운용하는 상부구조의 추상능력이 중요하므로 하부구조의 개별적인 능력은 인간이 동물보다 못하다. 앵무새는 한번 듣고 소리를 그대로 복제할 수 있다. 새들은 남의 소리를 잘 복제하기 때문에 새들의 세계에도 사투리가 있다고 한다. 같은 종류의 새라도 서식지에 따라 울음소리가 다른 것이다. 인간은 오히려 그러한 여러가지 능력들이 퇴화되어 버렸다. 언어에 의존하기 때문에 여러 감각들을 사용하지 않게 되었고 따라서 정확히 듣고, 정확히 보고, 정확히 냄새맡고, 정확히 느끼려 하지 않는다. 그러한 동물의 다양한 능력들은 중요하지 않다. 오직 뇌에 입체적 모형을 세팅해 두었느냐가 중요할 뿐이다. 구조론적 관점에서 지능을 분류하자면 일단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5단계로 분류할 수 있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구분은 인과율에 따른 사건의 기승전결 전개과정대로 구분한 것이다. 우선순위가 앞서는가 뒤따르는가다. 각각의 항목들은 순서에 따라 입체적 모형을 구축한다. 앞의 질과 입자가 상부구조가 되고 뒤의 운동과 양이 하부구조가 된다.
◎ 질 - 정신차리고 긴장하는 능력, 지금 무엇이 중요한지 아는 능력. ◎ 입자 - 여러 정보를 종합하여 하나의 핵심적 의제를 도출하는 능력. ◎ 힘 - 외부의 작용에 맞서 대항하며 하나의 핵심에 집중하는 능력. ◎ 운동 - 눈치보며 분위기를 파악하고 융통성있게 대처하는 능력. ◎ 양 - 절대음감, 단순기억, 신체능력, 계산능력 등 절대적인 능력. 하워드 가드너의 다중지능 개념은 가중치 판단이 없다.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가벼우며, 무엇이 앞서고 무엇이 뒤따르는지의 구분이 없다. 또 상당부분은 동물에게도 있는 단순능력이다. 개별적인 지적능력들은 그 자체로는 큰 의미가 없다. 여러 능력을 조합하여 시너지 효과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 진짜 능력은 팀을 구성하고 다른 사람의 능력을 이용하는 등 주어진 지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능력이다. 단순히 잘 기억하고, 잘 말하고, 잘 듣고, 잘 보고, 잘 냄새맡고, 잘 느끼는 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 이 개별능력들을 조합하여 현장에서 주어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거짓말하기 시합에서는 늦게 말하는 쪽이 유리하다. 어떤 사람이 일백마리의 돼지가 하늘을 나는 모습을 보았다고 거짓말을 하면 자신은 일천마리의 코끼리가 날아가는 모습을 보았다고 뻥치면 된다. 무조건 나중에 말해야 한다. 기계가 고장났는데 여러 사람이 고쳐보겠다고 나섰지만 아무도 고치지 못했다. 필자는 그저 지켜보고 있었는데 어쩔수없이 마지막으로 나서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어디를 살펴보고 있는가를 지켜보고 있다가 그들이 미처 챙기지 못하고 놓친 부분을 살피자 바로 고칠 수 있게 되었다. 필자가 마치 다 알고 있었다는듯이 3초만에 문제를 해결하자 사람들이 감탄했지만 필자가 뭔가를 알고 한 것은 아니다. 그저 다른 사람의 행동을 관찰했을 뿐이다. 입체적 모형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 가능하다. 사건의 기승전결 구조를 머리 속에 그려놓고 있다가 사건의 전개방향을 대입해 보는 것이다. 무조건 먼저 나서는 것이 좋을 때도 있고 최대한 마지막에 나서는 것이 좋을 때도 있다. 불이 났을 때는 더 크게 불을 질러버리는 방법을 쓸 수 있다. 연기가 나면 동네사람들이 몰려와서 불을 꺼줄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도 정답을 갖고 있지 않은 문제라면 무조건 먼저 나서서 크게 판을 벌이는 것이 좋다. 대형사고가 터지면 일이 커져서 어떻게든 답이 찾아지게 되어 있다. 혼자 수습하려고 골머리를 싸매다가 오히려 일을 망치게 된다. 특히 정치판에서는 이 전략이 먹힌다. 무조건 크게 문제를 제기하고 떠들썩하게 판을 벌리면 장기적으로 유리하게 판세가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일단 저질러 버리는 것이며 그 수습은 저절로 되어가는 에너지 흐름에 맡기는 것이다. 이것이 먼저 나설때의 잇점이다. 중요한 점은 필자가 이러한 부분에 대한 데이터를 유년기부터 꾸준히 수집해 놓고 있다는 거다. 양영순이 아이디어를 수집하여 놓늣이 다 수집해놓고 있다. 누구나 하는 경험이지만 필자는 유년기의 사소한 경험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나중 써먹어야지 하고 의도적으로 기억해 두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문제를 잘 해결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런 경험들을 사소한 일로 여기고 기억해두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머리 속에 입체적 모형을 구축하지 못하는 것이며 따라서 아이디어를 복제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구분은 인과율을 적용하여 사건의 기승전결 전개를 따라가면서 우선순위로 구분한 것으로, 사건의 출발점이 되는 즉 동기부여를 하는 질적인 능력이 가장 앞서며 다른 능력들은 거기에 종속된다. 지능이 떨어지는 사람들은 아주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다. 뇌가 형편없는 것이 아니라 대개 뇌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 이유는 뇌가 잘 놀라지 않기 때문이다. 뇌가 긴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뇌가 충격받지 않기 때문이다. 뇌가 동기부여 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디어가 자꾸만 떠올라서 잠을 이루지 못하게 되는 뇌간지름증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열등감을 느끼거나, 화가 나거나, 매혹되거나, 부러워해야 동기부여가 된다. 뇌가 자극을 받아야 한다. 지능이 높다는 것은 뇌 자체의 하드웨어적 능력이 뛰어난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뇌 안에서 뛰어난 소프트웨어를 만들었다는 것이며 이는 뇌 안에 패턴분석을 위한 입체적 모형을 세팅했다는 것이고, 그것을 전매특허의 수법으로 써먹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사소한 일에도 크게 긴장하고, 놀라고, 자극받아서 그 아이디어의 소스들을 수집해 두어야 한다. 곤충학자가 되려면 곤충들의 생태에 흥미를 느껴야 한다. 그러려면 뇌가 그 부분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 그러나 곤충의 모습에 반응하는 뇌가 따로 있을 리 없다. 자연친화지능 따위는 없다. 그런 따위는 허튼소리에 불과하다. 곤충들에게 흥미를 느끼는 사람은 곤충 아닌 다른 것에도 흥미를 느낀다. 필자가 곤충이나 동물을 좋아하는 것은 벌레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사건의 기승전결 전개에 흥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 흥미를 곤충에게도, 동물에게도, 장난감들에게도, 시냇물에게도, 봄바람에게도 적용하여 보는 것이다. 필자는 개미들이 냄새로 길을 찾는데 흥미를 느끼고 이동하는 개미떼를 몇 시간이나 관찰한 적도 있고, 사시나무 떨듯이 떠는게 어떤 것인가 하고 바람에 떠는 잎새들을 몇 시간이고 관찰한 적도 있다. 개미나 나뭇잎에 흥미가 있다기 보다는 문제와 답이 서로 호응하는 대칭원리 그 자체가 긴장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처음 무언가 발견하고 의문을 품으며 차차로 탐구하여 마침내 궁금증을 해결함으로써 문제와 답, 원인과 결과, 시작과 끝의 아귀가 맞아떨어지게 하는 것으로 인과법칙을 충족시키는 그 자체에 흥미를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 답을 찾아서 문제를 풀었기 때문에 즐거운 것이 아니라, 인과법칙의 성립 자체가 즐거운 것이며 그 인과법칙이 하나의 패턴이 되고, 거기에 부품들이 더해져서 점차 고도화 되어 입체적 모형을 구축하게 됨으로써 나만의 스타일을 꾸려낼 수 있었던 그 자체에 기쁨이 있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뇌 안이 모형이 진화하기 때문이다. 단지 답을 찾고자 한다면 책을 읽어보면 된다. 개미가 어떻게 길을 찾는지, 사시나무가 어떻게 발발 떠는지는 책에 씌어져 있다. 구태여 필자가 자연에서 탐구한 것은 답을 알고자 해서가 아니라 뇌 안에 모형을 만들어놓기 위해서였다. 두고두고 써먹을 패턴을 발견하려 한 것이다. 퀴즈대회라도 나가지 않는 이상 그냥 답을 찾는다는 것은 의미없다. 필자는 수학을 못하지만 모든 문제에 답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아귀가 척척 맞아떨어진다는 점에 대해서는 매우 흥미가 있다. 수학문제의 답은 몰라도 되지만 그 안에서 작동하는 질서체계에 대해서는 흥미를 가져야 한다. 전율할 수 있어야 한다. 열정을 불사를 수 있어야 한다. 긴장하고, 자극받고, 매혹되고, 흥미를 느낌으로써 동기부여 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매혹되기, 분노하기, 부러워하기, 흥미있어하기, 떳떳해하기, 긍지와 자존감 가지기들은 사건의 전체과정을 이해할때라야 가능하다. 일제가 침략을 해도 사건의 전체과정을 모르면 분노하지 않는다. 관심이 없다. 자극받지도 않는다. 사건의 기승전결 전체과정을 이해해야 비로소 뇌가 반응하고, 그래야 관심이 쏠리고, 그래야 동기부여가 되고, 그래야 매혹되고, 그래야 열정을 쏟는다. 그래야 그것이 계속 상기되어서 머리를 맴돌게 된다. 그럴 때 작은 단서들도 수집해놓았다가 나중 어떻게든 써먹게 된다. 그냥 노래를 잘 불러서는 동네가수가 되고 만다. 음악계가 어떻게 돌아가는 판인지 그 큰 그림이 머리에 들어와야 비로소 커다란 비전을 얻고, 높은 목표를 세우게 되며, 잘못된 것에 분노하게 되고, 잘 된 것에 매혹되게 된다. 뇌가 반응하는 지점이 있는 것이며 그것이 질이다. MBC 예능프로그램 ‘나는 가수다’가 많은 시청자의 호응을 얻게 된 것은 단지 출연한 가수들의 노래실력들이 뛰어나서가 아니다. 좋은 노래는 세상에 많다. ‘나는 가수다’ 프로그램이 가요계의 판도가 돌아가는 전체적인 밑그림에 대한 단서들을 던져주었기 때문이다. 정상에서는 전모가 보이는 법이다. 고수들을 총출동시켜 놓으면 그런게 보인다. 맨유팀에 박지성이 없더라도 맨유의 경기를 보면 뭔가 그림이 그려지는게 있다. 아 이바닥은 이런 식으로 돌아가는구나 하고 영감을 느끼게 되며 그것은 K리그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권투나 레슬링이면 일단 덩치가 커야 한다. 체격이 큰 선수들의 느린동작에서 그런 영감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체격이 작은 선수의 동작은 너무 빨라서 머리에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크로스 카운터가 딱 걸렸다 하는 그런 감이 딱 와주지를 않는다. 골프라도 공이 홀컵을 살짝 핥고 느리게 들어가야 전율하게 된다. 머리에 그림이 그려지느냐가 중요하다. 단지 실력이 뛰어나고 게임에 승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챔피언 보디를 보여줘야 관객이 영감을 받을 수 있다. 골프에는 타이거우즈의 체격이 제격이고 역도에는 장미란 체격이 제격이고, 육상이라면 우사인 볼트가 제격이고 그런거 있다. 체격이 제격일 때 그림이 나와주는 것이다. 관객은 게임의 승부보다 그 그림의 획득에 진정한 관심이 있다. 그러므로 승리에 집착하지 말고 챔피언 보디를 갖춘 미학적인 스타를 길러야 한다. 그것이 스포츠가 진정으로 관객에게 무언가를 주는 것이다. 질의 영역은 그 뇌 안의 그림을 그리는 능력이다. 이는 뇌 안의 잡다한 기능이 내부적으로 잘 돌아가느냐가 아니라 뇌가 뇌 바깥의 사정과 활발하게 소통하느냐에 달려있다. 그 그림은 대개 밖에서 에너지가 투입되는 형태로 얻어지기 때문이다. 뇌 바깥의 여러 자극들이 뇌를 일깨워 일하게 만드느냐다. 아무리 지능지수가 높아도 자극받지 않는 뇌는 소용이 없다. 또 자극받더라도 창의적인 모험에 자극받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지나친 영재교육이 오히려 천재를 둔재로 만들 수 있다. 두뇌가 아무리 우수하다 해도 외부로부터 충분히 자극받지 않으면 열정을 쏟아붓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극은 유년기에 행해져야 한다. 천재라도 유년기에 쓸데없는 미적분 문제 푸느라 뇌가 충분히 자극받지 못하면 동기부여가 되지 않아 외부로부터의 단서들을 수집하지 않게 되고, 그 경우 뇌 안에 입체적 모형을 세팅하지 못하여, 자기만의 스타일을 만들기 위한 패턴분석을 시도하지 않게 되므로 뇌가 도무지 일하려들지 않아서 둔재가 되는 것이다. 지능이 높다는 것은 하드웨어가 우수하다는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하드웨어는 삼성이 우수하지만 소프트웨어로는 애플을 따라가지 못한다. 뇌의 소프트웨어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뇌 안에 스스로 건설해야 하는 것이고 그것도 유년기에 행해져야 한다. 유년기에 열정을 쏟을 대상이 포착되어야 한다. 노벨상 수상자들은 대부분 20대 때에 중요한 성과를 이룬다고 한다. MBC나 KBS 방송국 PD들이 진보적인 성향을 보이는 이유는 좌파들이 작당해서 그러한 것이 아니라, 20대 때에 방송 센스가 최고도로 발휘되기 때문이다. 방송국에 젊은 PD들이 많기 때문이며, 30대 중반만 되어도 촉이 둔해져서 월가의 트레이더는 더이상 일할 수 없게 되고, 40대가 되면 이미 매너리즘에 빠져서 자기표절을 반복하게 되고, 50대가 되면 창의쪽으로는 아주 쓸모없게 된다. 현장에서는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나서 관리직이나 하게 된다. 창의적인 인재는 대개 20대에 두각을 나타내는 법이며, 필자의 구조론은 9살때 처음 동기부여되어 결의한 것이고, 꾸준히 아이디어들을 수집한 결과로 17살때 이론의 뼈대를 만들 수 있게 되었고 24살때 완성했다. 여섯살, 일곱살이면 충분히 뇌가 중요한 소프트웨어를 만들만한 나이다. 단서를 수집하여 모형을 얽어야 한다. 반복적으로 써먹을 툴을 만들어야 한다. 그 중요한 때에 쓸데없이 산수문제나 풀고 있다면 천재도 바보로 되는 것이 당연하다. 충분한 동기부여를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개미가 그저 시시한 개미로 보인다면 곤충학자는 될 수 없는 것이다. 개미가 개미 이상으로 위대하게 보일 나이는 아홉살 이전이다. 외부로부터 자극받아 동기부여되는, 열정을 쏟게 되는, 하루종일 그것만 골똘히 생각하게 되는, 사소한 단서라도 주워모아 나중 써먹을 요량으로 반드시 기억하여 두게 하는 질의 포지션이 가장 중요한 상부구조이며 기승전결의 기(起)로 작동한다. 이로부터 사건이 전개되는 순서에 따라 입자와, 힘과, 운동과, 양으로 펼쳐지는 것이며 하워드 가드너의 다중지능은 상당부분 말단부의 양에 해당하는 것으로 양적인 능력은 따지자면 종류가 무수히 많고 그다지 의미가 없다. 질에서 각을 세워서 동기부여가 되고, 입자에서 자기의 대응전략을 얻고, 힘에서 난관을 돌파하고 치고나가는 방향성을 얻게 되며, 운동에서 일정한 자기 포지션을 얻고, 양에서 최종적으로 그것을 표현한다. 하워드 가드너의 다중지능 개념은 상당부분 양의 단계인 표현력일 뿐이다. 이 단계에서는 이미 사건이 종결되므로 의미없다. 언어지능은 말대꾸나 잘하고, 논리수학지능은 셈이나 잘하고, 자연친화지능은 길거리에서 고물이나 잘 줏고, 인간친화지능은 사기나 잘치고, 신체운동지능은 싸움이나 잘하고, 자기성찰지능은 남의 일에 참견하여 훈계나 늘어놓게 하고, 음악지능은 노래나 부르고 이런 식이면 허망한 거다. 상부구조가 건설되어야 한다.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로 논해야 한다. 입체적 모형을 세팅해야 한다. 그것은 오직 추상능력 하나로 가능하다. 다 필요없고 이 하나로 해결봐야 한다. 지능이란 무엇일까? 뇌에 투입된 빛과 소리와 냄새의 자극을 복제하여 저장해 두었다가 이를 뇌 안에서 재현하는 능력이다. 뇌에 저장된 복제본을 필요한 때 꺼내쓰는 것이다. 이 부분은 본래 언어능력에 크게 의지한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그날 있었던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말을 잘 못하는 원시인이 하루종일 초원을 돌아다니다가 뭔가 신나는 일을 경험했다면 그것을 친구에게 말해주고 싶어서 얼마나 입이 근질근질 했겠는가? 학교에서 돌아온 초등학생은 그날 있었던 일을 전부 엄마에게 말하는 것이 보통이다. 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하다. 지적능력의 상당부분은 이 원리에 의해 계발된다. 경험한 것을 타인에게 말하고 자랑하여 보상을 받는 것이다. 타인이 자기의 말에 귀기울여주고, 동의해주고, 공감해주고, 맞장구쳐주고, 칭찬해주면 만족감을 느끼게 되며 특히 어린이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가장 큰 보상이다. 동물들은 입이 없으니 말을 할 수 없고 따라서 말을 할 필요가 없고 따라서 그날 있었던 일을 대개 기억하지 않는다. 단지 소중한 먹이를 얻었거나 혹은 공격을 받았거나 하는 등 생존과 관련된 것만을 기억할 뿐이다. 언어가 없으면 기억하고자 해도 대개 기억할 수 없다. 언어와 감정이 뇌에 저장된 기억을 도로 불러내는 장치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인간의 지능은 그날 자신이 본 것을 기억하였다가 다른 사람에게 말해주려는 욕구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누구도 자신의 경험을 온전히 타인에게 전달할 수는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입으로 하는 말은 의미없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기 경험을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두 사람이 같은 경험을 공유했을 때 뿐이다. 진정한 사랑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참된 사랑을 설명한다는 것은 백 퍼센트 불가능이다. 이는 연속극이나 영화나 소설 따위에 묘사된 사랑이 얼마나 저급한지 보면 알 수 있다. 방송작가나 소설가 중에 진짜 사랑을 해 보고 사랑타령을 한다고는 믿을 수 없다. 거의 가짜다. 경험하지 않은 것을 전달하려면 비슷한 다른 경험을 원용하는 수 밖에 없다. 이를 위해서는 서로 다른 사실 사이에서 공통분모를 뽑아내는 능력이 소용된다. 이것이 추상능력이다. 인간 지능의 가장 큰 부분은 추상능력, 추론능력, 추리능력이며 그 외의 부분은 의미없다. 시각적 기억력이 뛰어난 사람은 답을 외어서 객관식 시험문제의 정답을 맞힐 수 있겠지만 공무원 시험에나 잘 붙을 뿐, 또 승진시험에나 유리할 뿐, 그걸로 현장에서 실제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같은 실수를 반복적으로 저지른다. 서로 다른 두 사건이 실은 같은 사건임을 꿰뚫어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중지능의 여러 요소들은 큰 의미없다. 오직 개별사건을 종합하여 하나의 범주로 묶어내는 추상능력 하나가 소용될 뿐이다. 문제는 이 부분을 테스트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도형이나 기호 따위를 늘어놓고 비슷한 것을 찾으라는 식으로 IQ테스트를 하지만 추상능력 중 극히 일부의 능력을 테스트할 뿐이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첫번째 대응은 그 사건에 내가 물리적으로 대응할 것인가 여부다. 그 사건이 중요한가를 아는 것이다. 눈 앞에서 사고가 벌어져 사람이 다쳤는데도 모른척 하고 그냥 지나가는게 개인에게는 낫겠지만 두고두고 후회하게 된다. 혹은 사이코패스라서 전혀 후회하지 않고 잘 살기도 하는데 그런 사람은 큰 일을 못한다. 왜냐하면 어떤 일의 중요도를 판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공하려면 지금 상황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알아야 한다. 그 현장에서 다친 사람을 구하거나 혹은 구하지 못하여 나중 크게 후회하는 사람이 성공한다. 무엇이 중요한지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긴장하는 능력이다. 사건의 가중치를 판단하는 능력이다. 외부로부터 자극받고 분노하고 흥미있어 하는 능력이다. 중요한듯 해도 실은 내가 나설 일이 아닌 경우가 있고, 사소해 보여도 내 인생 전체를 관통하며 두고두고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 있다. 세살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격으로 이후 완전히 잘못되어 버릴 수 있다. 그 차이를 아는 능력이다. 나라가 망했는데도 전혀 긴장하지 않고 태연한 친일파들은 나라를 구하는 큰 일을 할 수 없다. 뇌가 그 부분에 반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분노할 일에 분노할 수 있어야 하고, 슬퍼할 일에 슬퍼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사건에 큰 충격을 받아야 한다. 사소한 일에만 분노한다면 자격이 없다. 모욕을 당해도 부끄러운줄 모르는 사람은 평생 남의 노예로 살게 된다. 책임지지 않는 노예노릇이 어느 면에서는 더 편하기 때문이다. 부끄러운줄 아는 사람이 거기서 벗어나고자 노력을 한다. 그것이 중요한 것임을 아는 것이다. 서울역 앞에 노숙자가 많은 이유는 노숙자 노릇이 몸은 고되어도 마음은 편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존감을 잃고 부끄러운줄 모르게 되면 마음편한 길을 찾아 서서히 환경의 노예가 된다. 친일파가 되고, 친미파가 되고, 박정희나 이승만과 같은 독재자를 찬양하게 된다. 그게 마음은 편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만유인력을 처음 배웠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주변을 돌아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혀 충격을 받은 것 같지 않은 표정이었다. 이후 세상에 필자와 말이 통하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필자는 사과가 떨어지는 이유를 사과가 무겁기 때문으로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실은 만유인력 때문이라고 하니, 그렇다면 내가 사물을 보는 방법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느낀 것이다. 사과가 무겁다는 것은 사과 자체의 성질이다. 사물을 바라볼 때 그 대상 자체의 내재한 속성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관점 자체가 틀려먹은 것이다. 어떤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의 답은 당연히 그 대상 자체에 있다고 여기는 세계관 자체가 틀려먹었다는 말이다. 그 대상 자체에는 답이 없다. 예컨대 일본이 잘되는건 일본인의 기질 때문이고, 유태인이 잘 사는건 유태인의 민족성 때문이고, 독일이 발전한건 독일인의 국민성 때문이라는 식으로 그 자체의 내재한 속성에서 답을 찾으려 한다면 이는 만유인력의 법칙에 맞지 않으므로 전부 틀린 것이다. 아직도 수구꼴통 중에서는 민족성 타령 하는 바보들 있는데 초등학교 되돌아가서 만유인력 다시 배우고 와야 한다. 남자는 남자답고 여자는 여자답고 일본인은 일본인답고 독일인은 독일인답고 흑인은 흑인답고 백인은 백인답고 하는 식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세계를 바라본다면 이미 눈이 비뚤어지고 만 것이다. 틀려먹었다. 애초에 번짓수 잘못짚었다. 사과는 빨갛고, 연탄은 검고, 종이는 희고, 불은 뜨겁다고 알면 그 사물 자체의 내재한 속성을 보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 그게 틀렸다고 하니 그렇다면 근본적으로 사물을 보는 방법을 바꾸어야 한다. 그러나 누구도 그 이야기를 내게 해주지 않았다. 내게는 만유인력이 우주가 통째로 뒤집어진 사건인데 지구의 그들은 그리도 태평스러웠던 거다. 나의 우주는 뒤집어졌는데 그들의 우주는 전혀 뒤집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후로 세상과 친하지 않게 되었다. 하긴 구한말 조선왕조 사람들은 나라가 망해도 아무 생각없이 잘 살았다. 나라가 망하고, 을사조양으로 국권을 빼앗기고 십오 년, 한일병합으로 영토를 유린당하고 십년 세월이 흘러 1919년에야 뒤늦게 비명을 질렀다. 3.1만세를 부른 것이다. 칼에 찔렸는데 10년만에, 혹은 십오년만에 아프다고 말한 셈이다. 만유인력을 배우는 순간 사물자체의 고유한 속성을 가지고 판단하는 관점 자체가 틀렸다는 판단을 해야 한다. 그것이 추상하는 능력이다. 흑인이 검어보이고 백인이 희어보이면 아직 비뚤어진 시력이 교정되지 않은 것이다. 흑인이 검어보이지 않을때까지, 백인이 희어보이지 않을때까지 사유를 밀어붙여야 한다. 예컨대 한의학은 전부 사물 자체의 속성으로 판단한다. 어떤 것은 성질이 차고 어떤 것은 성질이 뜨겁다는 식이다. 사물 자체의 속성으로 판단하는 것은 전혀 과학이 아니다. 검은 것은 검고 흰 것은 희다는 식이라면 그것은 과학이 아니다.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만유인력이 바로 그러한 이야기다. 그래도 여전히 당신의 우주는 뒤집어지지 않았다는 말인가? 만유인력의 관점을 도입하면 외부로부터의 에너지 입출력에 따른 인과법칙에 의한 종합적인 관계망의 질서 안에서 각자의 주어진 포지션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 예컨대 여덟사람이 모여 있다면 그 중에 한 넘은 길쭉이요, 한 넘은 뚱뚱이요, 한 넘은 넙죽이요, 한 넘은 땅꼬마요, 한 넘은 헐랭이요, 한 넘은 쥐새끼요, 한 넘은 말상이요, 한 넘은 짱구라고 판단할 수 있다. 이는 각자의 내재한 속성으로 본 것이다. 각자 타고난 것이 그렇게 생겨먹었다. 검은 것을 검게 보고 흰 것을 희게 본 것이다. 그러나 포지션으로 보면 한 넘은 공격수, 한 넘은 수비수, 한 넘은 골키퍼다. 한 넘은 구단주요, 한넘은 감독이요, 한넘은 코치요, 한 넘은 선수요, 한넘은 심판이요, 한 넘은 관객이다. 이건 전혀 다른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박찬호라도 축구장 가면 선수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관객이다. 완전히 달라진다. 검은 것이 희게 되고 흰 것이 검게 된다. 어떤 사물을 바라볼 때 전체적인 얼개의 구조 안에서 각자의 위치를 가지고 전부 한 줄에 꿰어 이야기해야지 그냥 편하게 각기 그 자체의 성질로 말하면 안 된다. 그렇다. 불은 뜨겁지 않고 물은 차갑지 않다. 그것은 착각이요 넌센스다. 실제로 과학자들은 차가운 불을 만들어보일 수 있다. 붉은 색은 붉지 않고, 푸른색은 푸르지 않다. 왜? 색맹이니까. 왜? 외계인은 자외선과 적외선도 볼 수 있으니까. 지구인 기준으로 말하지 말라. 그건 비과학적이다. 바둑판의 검은돌이 검을 필요는 없으며, 흰 돌이 흰빛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냥 OX로 대체해도 된다. 그것은 구분을 위한 기호에 불과하다. 붉은 색과 푸른색과 노란색을 통일하는 전체의 파장 안에서 각자의 포지션을 가지고 이야기해야 정답이다. 결국 지능이 높은가 낮은가는 이렇듯 전체의 판도와 윤곽을 끌어낼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전체의 판도와 윤곽 안에서 각자의 위치를 지정하여 알 수 있는가에 달려있으며, 한 번 그것을 보는 눈이 얻어지면 이후 쉽게 판단하게 된다. 전체가 나아가는 방향성을 알고 그 전개 안에서 지금 어디까지 와 있는지 또 앞으로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혹은 지금 속도를 내야 하는 타이밍인지, 아니면 완급조절을 해야 하는 타이밍인지를 아는 것이다. 음악가는 음악의 전체적인 구도 안에서 각자의 위치를 알 수 있다. 김태원 쯤 되는 대가의 안목이면 어떤 아마추어 음악가라도 척 보면 어느 포지션에 와 있는지 알 수 있다. 전체적인 구도의 얼개가 머리 속에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안다는 것은 결국 이렇듯 머리에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고 있느냐다. 지능이란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는 능력이며 이는 추론능력이다. 만유인력을 처음 배웠을 때 나는 태어나서 내가 지금껏 사물을 보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과정 전체가 완전히 비뚤어졌음을 알았다. 만유인력은 실은 공간이 휘어서 지구가 비뚤어졌다는 것인데, 내게는 우주가 비뚤어지고, 생각이 비뚤어지고, 소통이 비뚤어지고, 채널이 비뚤어진 것이다. 그럴 모르는 지구의 인간들은 고장난 라디오처럼 잡음이 심한 잘못된 채널로 억지 소통하며 버럭버럭 인상을 쓰고 악을 쓰고 그러고들 있었다. 우주에 만유인력이라는 하나의 기준이 있다면 사유에도 그러한 하나의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사소한 일에서 내 인생 전체를 바로잡을 어떤 단서를 얻는 것이다. 이것이 어려워 보이지만 각자 자기 전문분야에서는 쉽다. 누구라도 자기 분야에서는 그 분야의 만유인력을 알 수 있다. 농사를 짓는 농민이라면 농업의 만유인력이 있을 것이요, 흙을 굽는 도공이라면 불조절의 만유인력을 알고 있을 것이다. 다들 자기분야 안에서는 전체적인 그림을 머리 속에 그려놓고 있는 것이다. 단지 그것을 전면화하여 우주 전체로까지 확장하는가의 문제가 걸려있을 뿐이며, 인간은 대개 언어의 도움을 얻어 그 문제를 해결한다. 교육받는다는 것이 그것이다. 부분의 지식과 전체의 지식을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이다. 세상을 다 알려면 그렇게 교육받아야 하지만 각자는 자기 분야 안에서의 만유인력만 찾으면 된다. 결론적으로 지능의 핵심은 서로 다른 분야를 총괄하여 이를 종합하고 새로 도출하는 능력인데 다중지능 개념은 거꾸로 이를 낱낱이 떼놓은 것이며, 떼놓기로 하면 백 가지로도 뗄 수 있고, 천 가지로도 뗄 수 있는데 왜 하필 8개냐다. ◎ 기존의 IQ개념 - 여러 지적 능력 중에서 측정하기 편한 몇 가지만 측정하므로 편협하다. ◎ 다중지능 개념 - 별로 중요하지 않은 여러가지를 일일이 줏어섬기는데 그 각각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 ◎ 구조론적 관점 - 여러 능력이 아니라 추론능력 하나가 중요하며 그 하나는 각자의 다양한 전문분야 안에서 찾을 수 있다. 기존의 IQ개념은 전체 백 중에서 50만 강조하고 나머지 50을 버리는 잘못된 것이며, 다중지능 개념은 그 잃어버린 나머지 50을 찾는다며 이러저리 헤집어놓았을 뿐 도리어 종잡을 수 없게 된 것이며, 구조론적 관점은 각자 자신의 뇌가 반응하는 자기 전문분야 안에서 하나의 중심을 찾아 100을 완성하는 것이다. 우리가 다양성을 강조하는 것은 그 다양성 안에 중요한 한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각자 자신의 만유인력이 있기 때문이다. 언어에서 그 하나를 발견하면 작가가 되고, 건물에서 그것을 발견하면 건축가가 되고, 색채나 형태에서 만유인력을 발견하면 디자이너가 되고, 소리에서 그것을 발견하면 음악가가 되고, 기계에서 그것을 발견하면 기술자가 된다. 어느 분야라도 그것이 없는 경우는 없다. 3천식객을 거느렸던 제나라의 맹상군이 진나라 소양왕의 의심을 사서 위기에 처했을 때 좀도둑 전문가와 닭울음소리 전문가의 도움을 얻어 살아날 수 있었다. 맹상군이 다양성을 존중하여 점잖은 선비가 아닌 이상한 사람까지도 수하에 거느렸기 때문에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다양성 존중의 대표적인 예가 된다. 그러나 좀도둑이나 닭울음소리 내는 사람이 주인공이 되겠다고 나선다면 곤란하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필요한 때 한번 써먹는 조연이다. 각자에게 적합한 포지션을 할당하여 주고 그들이 나설 타이밍을 일러줄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기승전결의 전개과정을 통일하는 입체적인 모형이 구축되어 있어야 한다. MBC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의 멤버는 7명이지만 작가와 PD까지 고려하면 숫자는 더 많아진다. 이들은 보통 평면 위에 한 줄로 길게 늘어서 있지만 이는 카메라 위치 때문이고 실제로 구성은 보다 입체적이어야 한다. 주연과 조연이 구분되어야 하며 그날의 주연은 매번 바뀌어야 한다. 유재석이 잘하지만 항상 유재석이 주연이어도 곤란하다. 이들은 팀이어야 하고 팀원 중에서 공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패스를 받아 드리블을 담당하며 그날의 주연으로 떠오르는 것이며 그럴때 나머지는 뒤에서 지원사격을 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거기서 사건이 도출되고 기승전결의 아귀가 맞아떨어지는 입체적인 그림이 그려질 때 드라마는 빛이 난다. 그냥 막연히 다양성을 존중한다면서 차례로 줄지어 한마디씩 내뱉는 식으로 나열이 되면 지루해질 뿐이다. 서열대로 가서 독불장군 한 사람에게 카메라가 집중되어도 재미없다. 7인은 팀이며, 팀은 외부에너지의 작용에 대항하며 유기적으로 작동하는 것이고, 하나의 나사가 빠져도 곧 약한 고리가 끊어져서 전체적으로 붕괴하게 된다. 그러한 팀의 위기를 드러내고 나머지 멤버들이 지원하여 그 끊어진 약한 고리를 다시 이어붙일 때, 팀의 위력은 폭발적으로 되살아나는 것이며 관객들은 거기서 영감을 얻으려 한다. 무한도전 멤버들이 만드는 팀의 입체적 모형에서 연역하여 자기 뇌 안의 추상모형을 얻는 것이다. 그것이 진짜 가치다. 각자의 뇌가 반응하는 지점이 다르다. 팀 안에서 각자의 맡은바 포지션이 다르기 때문이다. 남자의 뇌가 반응하는 지점이 다르고, 여자의 뇌가 반응하는 지점이 다르고, 동성애자의 뇌가 반응하는 지점이 다르다. 이는 지적능력의 차이가 아니라 포지션의 차이에 불과하다. 특정직업군에 동성애자 비율이 많은 것은 확실하며 그 이유는 동성애자의 경우 남자와 여자의 장점을 동시에 갖고 있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성차별을 하거나 동성애자를 차별하면 다양한 능력을 고루 사용하지 못하여 그 사회가 경쟁력에서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이다. 후진국의 경우 새로운 기술을 창의하기보다 선진국이 개발한 기술을 따라잡는것이 더 효율적이다. 누군가가 서구에 유학하여 신기술을 배워와서 재빨리 보급하는 것이 개별적으로 창의하여 판을 어질러 놓는 것보다 더 이득이다. 그러므로 창의력이 뛰어난 사람보다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성실하게 임무를 수행하는 관료형 두뇌를 가진 사람이 후진국에서는 크게 활약을 한다. 확실히 한국에서는 창의적인 인재보다 말썽을 일으키지 않고, 대인관계가 원만하며, 인맥이 넓고, 윤리적으로 뛰어난 사람이 대접을 받는다. 그러나 이는 한국이 그동안 GDP로 2만불 이하의 후진국이었기 때문에 먹히는 논리다. 선진국이 되면 다른 나라에서 배워올 것이 없다. 이젠 스스로 창의해야 한다. 판이 어질러져도 폭넓게 간격을 벌려야 한다. 지금 공부하는 십대들이 성인이 되면 한국 앞에 어느 나라도 없을 것이다.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앞서가게 된다. 이에 창의적인 인재가 필요한 법이며 동성애자라도 한 가지 재주가 있다면 떠받들어야 한다. 그런 시대가 된 것이다. 튀는 재주가 있으면 다른 허물은 덮어주는 미덕이 강조되는 시대가 온다. 다 필요없고 이제는 창의적인 인재가 필요할 따름이다. 창의하려면 전체의 그림을 머리 속에 그릴 줄 알아야 한다. 팀이 돌아가는 모습을 그릴 수 있어야한다. 팀 안에서 이심전심으로 손발이 척척 맞아야 한다. 그것은 매우 어렵지만 자기 전문분야 안에서는 쉽다. 자기 뇌가 잘 반응하는 부분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어떤 사람의 뇌는 소리에 잘 반응하고, 어떤 사람의 뇌는 색깔에 잘 반응하고, 어떤 사람의 뇌는 움직이는 것에 잘 반응하고, 어떤 사람의 뇌는 맛이나 냄새에 잘 반응한다. 그러므로 각자 자기의 뇌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대상을 찾아내고 그 안에서 전체적인 그림을 얻어내는 추론능력을 키워가야 한다. 그 안에서 작동하는 숨은 만유인력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막연하게 다양성을 주장하며 잡다하게 이것저것 나열식으로 줏어섬긴다고 해서 되는 것은 없다. 다중지능은 사실 전혀 근거가 없다. 8가지 분류 안에 음악지능이 들어있다는 것은 웃긴 것이다. 음악만 해도 작사와 작곡이 다르고, 가창력이 다르고, 연주자는 또 다르다. 김태원이 잘하는 것과 이승철이 잘하는 것은 다르다. 음악지능이 있으면, 미술지능이 있어야 할테고, 미술도 그리는 것과 색칠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입시미술의 석고상 그리기는 입체적으로 그리는 남자에게 유리할 지도 모른다. 연필그림이 아니라 색칠하기로 하면 여자의 합격률이 올라갈지도 모른다. 석고상그리기 하나만으로 평가한다면 특정 손기술이 강조된다는 점에서 공정하지 않는 것이다. 다양한 포지션을 존중해야 한다. 뇌의 작동에는 보상관계가 적용되므로 어느 한 가지 능력이 발달하면 다른 능력은 그만큼 줄어든다. 시력을 잃으면 대신 청력이 발달하게 되고, 청력을 잃으면 입모양을 보고 말을 알아듣는 능력이 생겨나는 것과 같다. 뇌 안에서 뇌세포들 간에 생존경쟁을 벌이기 때문에 이는 필연적인 현상이다. 바둑고수 이창호는 군에서 전투화 끈을 빨리 매지 못해서 고생했다는 말이 있고, 아인슈타인도 자기 집을 못 찾아서 대학사무실에 전화해서 ‘혹시 아인슈타인 교수 집이 어딘지 아십니까?’하고 물었다는 등의 이야기가 있는 것을 보면 부분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다. 이것저것 다 잘하는 만능인도 있지만 대개 약점이 기술적으로 은폐된 것이다. 음악지능, 미술지능이 있으면 오락지능, 도박지능, 우스개지능, 잔소리지능, 말대꾸지능도 있을 것이다. 말대꾸만 9단인 사람도 있더라. 추론하는 것이 진짜이며 그 추론은 모든 분야에 두루 적용된다. 그리고 추론능력은 지혜가 축적되어 나이가 들수록 점점 향상된다. 그냥 막연히 추론하는 능력을 기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산수문제를 열심히 푼다고 해서 추리력이 상승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논리학을 공부한다고 해서 추론능력이 향상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사실 논리나 수학은 추리와 상관없다. 추론은 패턴인식에 의해 얻어지며 패턴은 그림이면 그림, 소리면 소리, 움직임이면 움직임, 냄새면 냄새, 맛이면 맛 다 다르다. 최근 논리학이 주목받고 있으나 논객들이 쓸데없는 말다툼 하는데만 소용될 뿐이다. 추론은 상대방의 주장을 반박하거나, 자기 논지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주어진 자원에서 공통요소를 뽑아내는 것이며 이는 사건이 전개되는 기승전결 전체과정의 이해에서 얻어진다. 정상에서 전모를 보는 시야를 얻어야 하며 그 시야는 전문분야의 달인이나 고수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자기분야에서 통달해야 진짜배기 추론을 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의 뇌가 반응하는 분야에서 기승전결의 전체과정을 경험하고 이해하면 추론할 수 있게 된다. 요리를 잘 하는 사람은 밭에 난 야채만 보고도 식탁에 앉은 사람의 반응을 바로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요리를 못하는 사람은 그저 만들어진 음식에 조미료나 뿌려대고 있을 것이다. 사건의 기승전결이 중요하다. 밭에서 자라는 야채가 기(起)라면 조리된 음식에 조미료를 가하는 것은 결(結)이다. 추론능력은 사건의 앞부분에 미리 개입하는 것이다. 남들이 만들어놓은 판에 가세하는 것이 아니라 독립적으로 자기만의 판을 꾸릴 수 있는 것이다. 역시 돌아가는 판 전체과정을 이해해야 가능하다. 팽이를 잘 치는 꼬마는 친구가 팽이를 쥐는 손동작만 보고도 친구의 팽이가 어떻게 될지 미리 안다. 기를 보고 이어지는 승과 전과 결을 그냥 아는 것이다. 그것이 추론이다. 경험있는 농부라면 봄에 이웃농부가 밭에 파종하는 것만 보아도 가을의 수확량을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이 추론이다. 추론이 진짜배기다. 추론능력도 지혜가 축적되어 갈수록 향상되지만 일부는 타고나는 것이다. 촉이 살아있는 20대 때는 직관적인 추론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선물시장에서는 젊은이가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복잡한 패턴을 순간적으로 압축할 수 있다. 문화예술분야도 마찬가지다. 20대의 전성기에 패션을 잘 소화하게 되고 나이가 들면 자기 스타일이 굳어져서 복제품을 내놓게 된다. 젊은이의 추론은 변화의 흐름을 직관으로 읽는 것이고 여기에는 타고난 센스가 사용되지만, 나이든 이의 추론은 일정한 모형을 세팅해 두고 스타일을 복제하는 것이어서 상황의 변화에 잘 대처하지 못한다. 대신 베테랑의 경험이 쌓여 있으므로 크게 실패하지도 않는다.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보수화 되는 이유는 촉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자기 아이의 지능을 계발하고 싶은가? 먼저 이것 저것 시켜보고 자기 아이의 뇌가 잘 반응하는 전문분야를 찾아라. 그리고 그 분야의 기승전결이 진행되는 사건의 전체과정을 두루 경험하게 하라. 어떤 대상의 내재한 속성에서 고정된 답을 찾으려 들게 하지 말고, 전체적인 구도 안에서 각자의 포지션을 찾아내는 훈련을 하게 하라. 여러 친구가 힘을 합쳐 팀을 이루고 공통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연습을 하게 하라. 그 과정에서 남이 창안한 지혜를 슬그머니 자기 것으로 가져오는 훈련을 하게 하라. 그러한 남의 것 가져오기도 입체적 모형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림을 그린다면 그냥 모델을 가져다놓고 그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처음 계획을 세우는 단계부터 소재의 선택, 모델의 선정, 그리기의 진행, 그린 후의 전시와 평가, 그에 따른 포상과 칭찬, 그리고 뒷이야기까지 돌아가는 일 사이클의 전체 과정을 체험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이 예술을 하는 이유는 원래 남에게 자랑하기 위한 목적이었던 만큼 하나의 일을 마치고 타인에게 자랑하며 거기에 귀기울여주고, 박수쳐주고, 공감해주고, 동조해주고, 그럼으로써 그것을 의미있게 완성시켜 주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리기 작업은 그 전체과정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 하루하루가 박수받고 동의받는 삶이어야 진짜다. 이러한 기승전결 진행의 각 단계 중에서 어느 단계이든 뒤집을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는 실력이 딸리는 사람은 소재의 선택을 기발하게 잘하는 방법으로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다. 또는 밑그림을 못그려도 색칠을 잘하여 만회할 수 있다. 또는 그림을 못 그려도 거기에 이야기를 보태어 첨가함으로써 또다른 형태의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작품에 공감해주는 것만으로도 좋은 참여가 된다. 기승전결의 각 단계에 각기 만회하는 방법이 있는 것이다. 누구든 포지션이 돌아오는 그 한 순간에는 자기가 주인공이 될 수 있다. 구조로 보면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5회에 걸쳐 패자부활전이 일어난다. 자신이 잘해내지 못한다 해도 좋은 팀을 구성하면 그 안에서 맡을 포지션이 분명히 있다. 팀 안에서 동료의 협력을 구하여 다시 한번 재도전의 찬스를 얻을 수 있다. 한번 삐끗했다고 해서 낙방하고 배제되는 일은 없다. 그림을 잘 못그려도 얼마든지 뛰어난 예술가가 될 수있다. 영화라면 시나리오작가부터 감독과 스태프와 배우와 평론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참여의 방법이 있다. 그 팀 안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잡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보통은 어떤가? 모델도 주어져 있고 소재도 정해져 있고 아이는 그냥 그리기만 한다. 평가기준도 정해져 있다. 평가는 선생님이 하고 칭찬은 학부모의 역할로 되어 있다. 이렇게 역할이 완전히 나누어져 있으며 한 가지 역할만 반복하게 된다. 창의력이 발전할 틈이 없다. 전체의 구도를 보지 못하게 된다. 추론할 수 없게 된다. 진짜라면 평가하는 선생님의 역할, 칭찬하는 학부모의 역할까지 어린이가 도맡아야 한다. 창의란 어떤 일이 전개되는 이전단계에 개입하는 것이다. 예컨대 요리로 대결한다면 주어진 재료를 부엌에서 지지고 볶으면 된다. 창의한다는 것은 요리재료가 부엌에 도달하기 전 그 이전단계를 공략하는 것이다. 남들이 부엌에서 지지고 볶을 때 자신은 시장에 가서 더 싱싱한 재료를 받아오는 식이다. 아니면 아예 자신이 직접 씨앗을 파종하여 기르는 것이다. 사건이 진행되는 기승전결 단계 중에서 타인들이 결에 개입할 때 전에 개입하고, 타인들이 전에 개입할 때 승에 개입하는 식이다. 남보다 한 단계 앞질러 이전단계로 치고나가야 진정 창의할 수 있는 것이며 그러려면 기존의 룰을 깨야하고 룰을 깨려면 전체과정을 알고 있어야 한다. 구조론적 관점은 다양성 안에서 한 가지 핵심을 끌어내는 것이다. 창의력이 존중되는 시대에는 다 잘할 필요없고 그냥 하나만 잘하면 된다. 그 다음에는 자신의 하나와 다른 사람의 하나를 잘 접목하면 된다. 스티브 잡스는 그저 머리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지혜를 잘 조합하는 사람이었다. 전체적인 그림을 머리에 그려가지고 방향을 제시하며 선장 노릇을 한 것이다. - 사건의 기승전결 전체과정을 경험하라. - 외부로부터 침투해 들어오는 에너지 작용과 소통하라. - 정신차리고 긴장한 채로 외부의 자극을 받아들여 동기부여 하라. - 자신있는 한 분야에서 핵심이 되는 만유인력을 찾아라. - 협력하여 팀을 꾸리고 그 안에서 자기 포지션을 찾아라. - 대상에 자체의 속성으로 판단하지 말고, 전체의 구도 안에서 각자의 포지션으로 바라보는 훈련을 하라. - 다른 사람의 지혜를 내게로 가져오도록 하라. - 사건의 이후 단계에 미리 대비하거나 혹은 이전 단계로 앞질러가라. - 선천적 하드웨어보다 후천적 소프트웨어가 더 중요하다. - 중요한 단서를 수집하여 두었다가 나중 이용하라. - 다 필요없고 추상능력 하나로 승부하라. - IQ는 학습능력이며 진짜배기는 지적 자원을 운용하는 추상능력이다. - 추상능력은 단서기억-패턴분석-모형구축이며 후천적으로 향상된다. IQ 개념은 편협해서 많은 사람을 좌절하게 한다. IQ가 천재를 입증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바보를 변별할 뿐이다. 다중지능 개념은 이념적으로 바른 방향이나 각론에서의 콘텐츠가 없어서 허무하다. 혹은 사기성 있는 집단에 의해 악용되고 있다. 이미 약장수들이 달려들어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구조론적 관점은 다(多) 안에서 하나를 찾고, 하나를 길러 다(多)를 꽃 피우는 것이다. 한 뿌리에서 다양한 줄기와 가지가 뻗어나니 백 가지 꽃이 제각기 아름답다. 또 다양한 지류가 차차로 합류하여 하나의 큰 바다로 모여든다. 여럿이 공존하나 멋진 팀을 이루므로 산만하지 않고, 심플하게 하나로 출발하나 대상의 내재한 속성으로 따져서 차별하지 않고 관계맺기로 인연을 이루어 크게 날개를 펼치니 얼마든지 풍성하다. 그 핵심이 되는 하나는 만유인력이다. 어느 분야를 가나 반드시 돌아가는 판도 안에 그것이 있으며 그 하나를 잡으면 족하다. 그 다음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진다. 상식적으로 생각하자. 지구촌 인류는 60억이고 인터넷에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온갖 재주가 모여 있다. 내 안에 재주를 충전하여 집어넣기보다 인터넷에 널려 있는 다른 사람의 재주를 활용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더 낫다. 다른 사람의 재주를 빼 쓰려면 방법은 하나 뿐이다. 다른 사람이 내 재주를 빼가게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이것저것 다 잘하는 무난한 공무원이 되기 보다는 어느 하나라도 특화시켜 놓는 것이 낫다. 그래야 다른 사람이 내 재주를 빼쓰기 위해 내게로 다가오는 것이며, 그럴 때 그 사람의 재주를 슬쩍 내 쪽으로 돌려놓으면 된다. 은근히 빨대를 꽂아놓고 빼 쓰는 것이다. 이는 서로에게 이득이다. 좋은 모형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고수들은 일생동안 그 모형을 완성해 간다. 그것은 보통 스타일이라고 말해지며 온갖 아이디어의 원천이 된다. 문학이든, 영화든, 드라마든, 패션이든, 코미디든, 오락이든 모든 형태의 문화는 그 각자의 스타일을 완성하기 위한 아이디어 소스를 공급하는 용도로 존재한다. 물론 후진국인들은 도무지 창의하지 않으므로 문화가 단순한 소비상품으로 전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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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탁월하고 명쾌하고 구조적인 교육론을 본바가 없다!
21세기 미래 교육 최고의 교육철학이 될 것이다.
산만하게 외국이론 배끼고 이것저것 갖다붙인 교육의 대안이라는 것들이
결국 방향을 잃고 한계에 부딪히게 될 수 밖에 없게 된 지금.
새로운 시대의 커다란 물꼬를 터주는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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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ㅎㅎ 만유인력을 처음 배웠을 때, 나도 놀라고 감탄스러워서 눈물이 다 났었는데~ㅎㅎ
원자, 분자 배울때는 개념설명 듣다가 관련된 상상에 빠져서 수업시간에 삼천포(?)의 세계로 가버리고~
그래도 여지껏 미명속에서 갑갑하게 헤매었는디~ ㅋㅋ 큰 차이가 있네요.
덧붙여 하워드 가드너의 '다중지능이론'은
기실 전혀 과학적이거나 구조적이지 못하다.
그 아이디어라는 것도 사실은 무슨 명리학이나 사상의학이나 성격테스트 분류 같은 거와 거의 다를 바가 없다.
결국 가드너의 이론이 교육에 미친 영향이라는 것은 사람들에게 과학을 빙자한
성격테스트, 점보기 같은 뻘짓을 하나 더 보태게 하는 것밖에 안된다.
그 이론의 출발자체가 질이 없고, 철학이 없고, 엉터리 개념의 조합일 뿐.
있는 건 하버드라는 권위와 감각적 아이디어... 빈곤한 배를 채워주는 것 질없는 양의 식사.
But그런데! 너무 길다.
굉장히 재미있지만 알아먹게 명확하게 짧게 쓴 기획이 하나 더 있어야 한다.
나열된 예시들이 중복이 아니라 명확한 강조가 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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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공부하는 십대들이 성인이 되면 한국 앞에 어느 나라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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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입니다.
지금 공부하는 십대들은 학교숙제에, 학원에, 부모-교사들의 잔소리에 매몰되어 있다.
여학생들의 머리모양은 모두 한결같고, 중고등학생은 서로 다른 교복에 노스페이스 점퍼를 입고 다닌다.
독서에 미친 아이, 만들기에 미친아이, 공부에 미친아이, 여러 다른 것에 미친 아이들이 많이 있는데 정작 학교교육, 가정교육, 학원교육은 입시에 미친 학생들로 만들려고 하니... 대학의 서열화도 모자라 이제 고등학교의 서열화, 나아가 중학교까지 서열화시키려고 하는 입시 망국병에 대학생들은 용기도 없이 동기도 없이 세상공부, 전공공부보다 영어공부, 종이쪼가리 스펙쌓기만 하는데...
우리 교육의 희망은 우리나라 10대 후반 20대 초반 축구선수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의 변화무쌍한 조직력과 창의성은 우리나라 감독들이 만든 것이 아닌, 유럽축구보고 자기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우리나라가 아닌 외국에서 꽃을 피운다. 학교에서도 다양한 교수법의 등장으로 주입식 수업보다 소통능력, 문제해결능력, 창의성 신장을 돕는 수업이 확산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민주화 이후 다양한 경험을 했던 십대들이 입시지옥의 현실에서 자유로운 사고와 활동이 위축되고 있는데, 과연 우리 10대들이 커서 우리나라를 세계에서 가장 앞선 국가로 만들 수 있다는 근거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이런건 전체를 보고 판단해야 합니다.
제 때가 80년대인데 대학진학률이 10퍼센트였습니다.
이탈리아는 지금 무려 30퍼센트나 된다는데 대학진학률이 너무 높다고 비판..
그런데 한국은 60퍼센트입니다.
그때의 상위 10퍼센트와 지금의 물타기 된 60퍼센트를 곧바로 비교하면 안 되지요.
그럼 한국의 대학진학률이 왜 비정상적으로 높은가?
이 본질을 가지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방금 서태지 이야기 써놓고 왔는데 그 안에 답이 있습니다.
분노가 크고 그만큼 에너지가 크다는 거죠.
유럽아이들과 한국아이들이 처한 환경의 다양성이 어느 쪽이 높습니까?
유럽 - 평균적인 중산층 소득수준의 아이들이
평균적인 동기와 욕망을 가지고 평균적으로 다양하게 논다.
한국 - 빈자와 부자가 뒤섞여서 온갖 모순과 갈등을 경험한 다양성을 가진 아이들이
한 교실에서 획일적으로 공부한다.
교실에서 노는 다양성보타 태생의 다양성이 더 구조의 질입니다.
평균적인 중산층 자녀만 모여있는 유럽보다
빈자와 부자가 같은 대학 다니는 한국이 더 질적으로 다양합니다.
* 빈자는 대학 못다니고 부자만 대학다닌다.- 망합니다.
* 빈자와 부자가 같은 대학에서 분노를 일으키며 충돌한다.-흥합니다.
* 다 같은 중산층이 같은 대학다닌다(독일은 10대때 이미 진로선택. 대학 안감)-망합니다.
진정한 다양성은 한국이 더 높습니다.
교육이 잘못되었지만 그건 교육이 비효율적이라는 거고
즉 막대한 교육비 투자한 것에 비해 본전을 못건진다는 거고
구조론적으로 보면 한국이 유럽보다 백배 더 우수한 상태입니다.
한국의 구조론적 우수함은 미일중러 사강에 끼어 있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며
한국의 비정상적으로 높은 대학진학률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한국인은 5000만 한국시장 안에서 직장을 구해야 하지만
유럽인은 15억 서구세계 전체에서 직장을 구하죠.
한국은 구조적으로 성공하지 않으면 죽게 되어 있는 나라입니다.
이는 본질적인 지정학적 모순 때문이며 이 모순을 해결하려면 한국 땅덩이를 떼서 유럽으로 떠매고 가서
유럽 가운데 박아놓거나 아니면 미국의 한 주로 들어가거나 혹은 일본과 합방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어떤 방법도 불가하므로 이대로는 성공할 수 밖에 없습니다.
구조적으로 한국은 오직 세계에서 1등이 가능할 뿐 2등은 바로 죽음입니다.
비정상적으로 높은 진학률은 생존하기 위해서이며 유럽에서는 그럴 필요조차 없죠.
학교교육이라는 보수적인 중심이 없다면
좌도,우도 의미가 없어보입니다.
서열싸움.
일부러 줄메긴거 아니라는데?
유식해보이는 쪽이 떳떳하다.
공무원의 투잡욕심
돈 있어도 굽신,없어도 굽신
잘생기면 죄인?
지잡대출신자들과 신정아교훈
학구파보다는,
'실용파인데 기본적인학구파'를 선호하는 나로서는
이러한 '편견들에 물타자' 가 내 인생의 슬로건이 아닌가 싶다.
그냥 살아도되는데..
21세기 교육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