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리트윗에서 옮김] 구조는 과학의 언어다. 구조를 모르면 인간이 얼마나 멍청해 지는지 예를 들기 위해 기사를 퍼왔다. http://j.mp/m8Nr2i 초등학생도 납득시킬 수 없는 멍청한 소리다. 이 기사의 내용이 맞고 틀렸고를 떠나서 애초에 사고방식 자체가 비과학적 사고방식이라는게 문제다. 이런 식은 아니다. 원초적으로 아니다. 접근법이 틀렸다. 이런 식이면 과학자라고 볼 수 없고, 과학의 언어로 볼 수 없고, 과학적 방법론이라고 볼 수 없고, 과학의 범주 안에 있다고 볼 수 없다. 중세의 연금술이나 거리의 약장수 수준이라 하겠다. 이는 에디슨의 방법이 제법 신통한걸 만들어내기는 하지만 그것이 과학의 방법론은 아니라고 테슬라가 지적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금을 찾으려면 지질조사를 해야지 그냥 사람 풀어서 막 돌아다녀보고 운 좋으면 찾지 이런건 아니거든. 인간이 밥을 먹는 이유는 맛을 즐기기 위하여도 아니고, 배고픔을 피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위하여’는 일단 아니다. 돌을 먹을 수 없기 때문에 밥을 먹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의로 선택이 가능한 것은 일단 답이 아니다. 흙을 먹을 수 있나? 흙을 먹을 수 있다면 흙을 먹지 왜 밥을 먹겠는가? 인간이 흙을 못 먹고, 나무를 못 먹고, 풀을 못 먹기 때문에 밥을 먹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선택한 것이 아니다. 원래 그런 거다. ◎ 자의적 선택이 가능한 것은 모두 비과학에 속한다. 과학의 대상이 아니다. 앉은뱅이가 앉아있는 이유는 앉아있는게 편해서도 아니고, 왕따가 두려워서도 아니다. 앉은뱅이라서 그렇지. 과학은 자의적 선택을 배제하고, 구조적인 에너지의 필연을 따라가야 한다. 필연적으로 그 길 외에 다른 길이 없어야 한다. 외부의 통로는 모두 봉쇄되어 있어야 한다. 이것이 구조론의 질 개념이다. 일단 외부를 봉쇄해놓고 이야기 시작한다. 인간이 협력하는 이유는, 협력해야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협력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바둑 고수가 하필 거기에 놓는 이유는 거기 외에 다른 적당한 곳이 없기 때문이다. 선택한게 아니고 필연이다. 그래서 정석이다. 물론 위 인용한 기사의 실험에는 협력이 자의적 선택인 것처럼 해놨지만, 인간은 삶의 일관성의 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에 사실은 선택이 아니다. 협력은 보상받기 위하여도 아니고, 왕따를 피하기 위하여도 아니고, 일단 모든 위하여는 아니고.. 구조의 필연에 의하여다. 구조의 기승전결 법칙에 따른 삶의 일관성 원리에 의하여 한번 도둑질을 하면 평생 도둑질을 하게 되므로 도둑질을 안 하는 것이다. 필자가 9살 때 참외서리를 하면서 할까말까 고민했었다. 그리고 하기로 결정했다. 이유는 과연 내가 지금 한 이 선택이 내 일생에 두고두고 영향을 미치는지, 전혀 그렇지 않은지 실험하기 위해서였다. 즉 어른이 되었을 때 과연 아홉살때의 참외서리가 인생에 긍정적/부정적 영향을 미쳤는지 알아보려고 한 것이다. 결론은 일생에 일관되게 영향을 미친다는 거. 인간은 모듈원리에 따라 어떤 행동에 유형을 사전에 결정해놓고 같은 행동을 반복하도록 뇌가 세팅되어 있으므로 한번 협력하면 계속 협력하고, 한번 배신자는 계속 배신한다. 그 이유는 스트레스 때문이다. 즉 뇌의 긴장상태가 지속적으로 다른 행동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뇌의 긴장이 절대 안 풀리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위 기사의 실험에서 징벌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모면하려고 협력하는게 아니라 협력하지 않으면 뇌가 계속 긴장상태에 있어서 자기가 계속 스트레스를 받아 다른 일에 집중을 못하기 때문에 협력하는 것이다. 한번 참외서리를 하면 계속하게 되고, 그 경우 공부에 집중을 못하게 된다. 즉 참외서리가 문제가 아니라 공부가 문제인 것이다. 인생이 통째로 틀어진다. ◎ 구조론 - 이게 이렇게 되면 저게 저렇게 된다. 협력을 안 하면 그 일 외의 다른 일을 모두 못하게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협력하는 것이다. 사회의 징벌이 아니라 자신의 징벌이다. 협력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회의 정보라인에서 소외된다는 것이고, 앞으로 공동체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지 모르게 된다는 것이고 그룹에서 배제된다는 것이다. 뇌가 이를 사전에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점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뇌가 계속 긴장상태에 있게 된다. 뇌의 긴장상태가 방해해서 아무 것도 못하게 되므로 뇌의 긴장을 풀기 위해 협력하는 것이다. 전쟁나면 도망갈까 참전할까를 두고 여론조사를 하면 다들 도망간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실전이 일어나면 도망갔다가도 다시 돌아온다. 뇌가 계속 긴장해서 다른 일에 집중을 못하게 방해하기 때문이다. 도망가서 편안하게 못있고 스트레스 받아서 다시 귀국하는 것이다. 이는 보상을 위해서도 아니고 왕따를 피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양심에 의하여 편하게 못 사는 것이다. 역시 의하여다. 뇌의 긴장상태가 다른 일을 방해하는게 양심이다. 집에서는 혼자 팽개쳐진 아기가 배가 고파 울고 있는 판에 겜중독자라도 겜방에서 겜에 집중이 안 된다. 아기가 굶고 있는데도 겜만 잘 하는 엄마라면 양심불량이다. 가끔 그런 보도 있다. 양심불량 사이코패스 있다. 양심은 구조의 대칭원리를 따라 사건의 기승전결을 이어가려 하는 즉 삶의 일관성을 지키려 하는 것이며 즉 뇌의 에너지 효율성 추구 원리로 실제로 존재한다. 이는 에너지의 필연이고 물리학이다. 자의적 선택이 아니다. 에너지가 없으면 자동차가 달리지 못한다. 기름이 없는데 어떻게 가겠는가? 차가 서고 싶어서 서는게 아니다. 선택이 아니다. 기름이 없으면 저절로 선다. 뇌라는 자동차가 달리려면 역시 에너지가 있어야 하고, 에너지를 얻으려면 효율성을 얻어야 하고, 효율성을 얻으려면 모듈화를 해야 하고, 모듈화를 하면 한번 내린 결정을 반복해서 써먹게 되고, 이를 위해서 뇌가 긴장상태에 있으면서 수시로 심장을 자극하여 쿡쿡 찌른다. 다른 결정을 방해한다. 그게 양심이다. 강호동 이수근이 1박2일에서 조퇴를 하고 근처 식당에서 서성거리는 것은 갈데가 없어서다. 아홉살 때 꾀병을 하고 조퇴를 한 적이 있었는데 갈데가 없더라. 그 이후로 꾀병을 안했다. 이는 인간이 사건의 기승전결 구조 안에 있으므로 일관성의 문제에 부닥치기 때문이다. 징벌을 면하기 위함도 아니고 보상을 받기 위함도 아니고, 대안이 없어서다. 만약 다른 중요한 사건이 있다면 혹해서 갔을 것이다. 위 기사의 투자게임에서도 만약 밖으로 열려있고 나가도 되고, 밖에 더 잼나는게 있으면 다들 먹튀했을 것이다. 문이 잠겨있고 그 공간 안에 갇혀있기 때문에 협력하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협력을 안 한다. 대륙이 넓고 열려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길에 누가 쓰러져 있어도 모른체 한다. 일본인도 어느 면에서는 협력을 안 한다. 일본이 굉장히 크고 열린세계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후쿠시마 사태를 남의 일로 여긴다. 오히려 한국인이 모금하고 난리다. 반대로 일본인이 맹렬히 협력할 때도 있다. 그때는 일본이 작은 섬이라서 튈 때가 없다는 생각때문이다. 일본은 주제에 대국의식을 발휘하기도 하고 섬나라근성을 발휘하기도 하는 것이다. 결론.. 인간은 어떤 이익과 징벌, 당근과 채찍 때문에 자기 행동을 결정하는게 아니라 그거 외에 다른 길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는 것이며, 다른 모든 길이 봉쇄되어 있기 때문에 그 길을 가는 것이다. 그 외에 다른 길이 없는 이유는 일의 기승전결 구조에 따른 일관성 때문이고, 오늘만 날이 아니고 내일, 모레 계속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예비군들은 오늘만 날이기 때문에 협력 안 한다. ◎ 조교 - 선배님들 집합해 주세요. ◎ 예비군 - 메롱. 그러므로 내일을 내다보지 못하는 바보는 반드시 배신을 때리며, 일관성이 없는 사람은 반드시 배신을 때린다. 반면 순수한 사람은 배신하지 않는다. 순수하다는 것은 일관성을 어겼을 때 굉장히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이다. 김기덕이나 노무현이 그런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배신하면 스트레스를 받아 자신이 죽게 되기 때문에 배신하지 않는다. 김광석, 김현식, 임재범 중에 임재범 하나 살아있는데 순수한 사람은 이래저래 죽을 확률이 높다. 죽기 때문에 협력하는 것이다. 김대중 노무현은 두 분 대통령은 순수의 스트레스 때문에 일찍 가셨지만 김영삼, 이명박은 모질게 안 죽는다. 얘네들은 스트레스 안 받는다. 속 편하게 잘 산다. 일관성을 모르기 때문이다. 아는게 병, 모르는게 약이라는 말도 그래서다. 의하여는 기계적인 메커니즘이며 최종적으로는 물리학이다. 에너지다. 인류는 어디로 가는가? 에너지가 있는 쪽, 효율성이 있는 쪽, 합리적인 쪽으로 간다. 그 길 외에는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왜? 그 외에 다른 쪽은 에너지가 없기 때문이다. 공산주의가 왜 망했는가? 에너지가 없어서다. 한나라당이 왜 망가졌는가? 역시 에너지가 없어서다. 집단의 의사결정이라는 본질로 보면 한나라당 노선은 에너지 과소비 노선이다. 기름이 엔꼬나서 망하는 거다. 사대강에, 세종시에, 뉴타운에, 동남권 신공항에, 과학벨트에 잔뜩 벌여놓고 의사결정을 어렵게 하기 때문이다. 열린우리당도 의사결정을 어렵게 했기 때문에 망가진 거다. 복지라는게 의사결정을 어렵게 한다. 근데 일단 하고나면 오히려 의사결정이 쉬워진다. 그러므로 복지는 처음에는 사람을 피곤하게 하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편하게 한다.
일관성은 구조의 모듈원리에 의해 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이명박으로 계속 이어지며, 지금 이명박 지지율이 합당한 박정희 지지율이라는 거다. 마찬가지로 히틀러>스탈린>김일성>박정희>카다피로 계속 이어지는 것이며 지금 한국에서 김정일 지지율이 합당한 박정희 지지율이라는 거다. 이거 모르고 속 편하게 사는 사람 많다. 그런 바보에 오염되지 않는 것이 깨어있는 자의 중요한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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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렬렬님 글은 일단 어떤 포지션에서 쓰느냐 하는 관점에서 읽기 때문에 wson님의 지적이 읽다가 보면 간혹 걸리는 부분이기는 하여도 저분의 글 쓰는 포지션이구나 혹은 스타일이시구나...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여 제가 그 부분을 이 글에서 관여할 필요는 없지만, 그 부분이 특별히 걸리는 분들도 계실 것이므로...일단은 패스..^^;
그리고 물에 빠진 아이에서 검은 머리는 구해도 노랑 머리는 조금 망설인다...라는 글 중에서..
저는 사람이 죽었을 때를 가정해 본다면...
자기 가족이 죽으면 통곡을 하겠지요. 일단은 너무 슬플테니까..거의 본능, 반사적으로 눈물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잘 모르는 이웃이 죽었다면..그냥 죽었군..사정이 있었다면 안됐다..좋은 곳 가시기를...그도 아니고 더 관심없는 사람이었거나 모른 사람이라면 아예 관심도 안 갈 수도 있고,
그러나 누군가 죽었는데 만난적은 없지만, 매체를 통해서 자주 본 사람이거나 혹은 그 죽음이 사건이 되어 사회적 공감대가 이루어졌다면 또 내일처럼 슬플 거라고 생각되며, 반면에 같은 조건이라고 해도 전혀 슬프지 않을 수도 있다고 보입니다. 여기에는 분명히 자신의 마음이 관여하고 있기에 가능한 감정반응이라고 생각됩니다.
자신이 평소 어찌 생각했느냐도 중요하지만 사회적 공감대도 어느정도 영향을 미칩니다. 감정이 증폭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검은머리는 우리 주변에서 십게 보게되고, 검은 머리는 더 큰 동그라미를 그려서 일단은 아시아 권이기에...
저 검은 머리는 아시아인일 확률이 높고 또한 그 확률의 몇프로는 한국인일 확률도 있겠지요.
그래서 어떤 친근함이 망설임을 줄여주는 것이라고 보이며,
반면에 노랑머리는 일단은 한국도 아시아도 아니라는 판단이 서는 것이기에 조금은 멀다라는 느낌에서 망설이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같은 것과 다른 것을 구분하는 정도라고 생각되며, 또한 친근한 것과 친근하지 않은 것, 또는 서로 같은 것을 공유한 것과 하지 않는 것, 또는 관심과 무관심...등의 어떤 심리적인 유대와 공감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자기 주변에 어린아이가 굶고 있는지 관심이 없다해도 , 티비에 나온 아프리카 어린이들이 굶주린 것을 보면 마음이 아프고 연민이 느껴져서 눈물이 나는 것..역시 어떤 공감대라고 보이며, 인간의 마음을 자극하기에 그런 것이기라고 생각됩니다. 어디쯤에서 자신의 마음이 반응 하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생각이나 행동이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됩니다.
망설이다가, (다소 자극적인 본문 글의 제목에 반응하여) 한번만 더 댓글을 달아보고자 합니다.
위 기사에는 과학과 과학의 해석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특정 행동과 관련된 특정 뇌 영역의 활성화 확인까지가 과학적 방법론에 기초한 과학적 결과이고, 그 뒤의 얘기들은 이 결과에 기초한 해석(기껏해야 가설 수준)입니다.
산페이, 듀펜버그의 실험까지가 과학이고, 보이드의 주장은 말 그대로 주장일 뿐입니다 (보이드까지도 온전히 과학의 영역으로 간주하는 정신나간 과학자는 극히 드물 것.)
기사의 내용을 온전히 믿는다면 (솔직히 우리나라 과학 기사들의 허무맹랑함에는 전혀 신뢰할 수 없지만), 보이드라는 학자가 실제로 저렇게 얘기했다면, (비록 그의 주장의 다른 근거들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의 여러 얘기는 논리비약이라는 비판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할 것 같습니다. 소위 연구자들 중에서도 연구 활동보다는 정치 활동에 더 열심인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 (그랜트 등의 이유에서도), 제 감상이지만, 저렇게까지 다소 자극적인 해석들을 쏟는 것들을 보아 아마 저 보이드 역시도 정치 활동에 더 열을 올리는 경우(기자들이 좋아하고 많이 옮기는 부류)에 가깝지 않을까 싶습니다.
김동렬님의 (현대 과학 비판에 대한) 이 글은 결과적으로 타겟을 제대로 잡고 계시지 못합니다.
전에도 몇번 말씀드렸다시피, 과학의 대중적 해석이 잘못되었다고해서 과학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다윈의 진화론을 얼치기 사회학자나 몇몇 정치가들이 악의적으로 응용한 전례들이 있었다고 하여, 그의 진화론의 과학적 가치는 조금도 손상되지 않습니다.
(물론 다윈도 그랬듯이, 과학자들의 부족한 사회적 책임의식에 대해서는 마땅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스스로 부족한 이해들을 잘 알고 있는 과학자들이 섣불리 대중에 대해 책임지려고 했을 때, 그 대중 이해의 성공 여부를 떠나, 오히려 여러 사회적 부작용을 일으켰던 경험들로부터 스스로 위축된 것도 있습니다. 가령 윌슨의 사회생물학의 경우처럼.)
김동렬님 말씀대로 한국 사회에는 주류 학문이 부족합니다. 대부분의 지식이 서양 학문에서 들어왔습니다. 소위 자연과학의 경우에는 그 편중이 더욱 심하여, 아예 영어로만 해석할 수 밖에 없는 정도입니다 (자연과학의 미국 집중 현상은 한국 뿐만 아니라 현재까지의 전세계적인 흐름입니다.) 그래서 한국 과학자들은 대중의 이해에 더욱 소극적인 편입니다. 그러다보니 그 반대로 터무니없는 대중 과학들(?)이 어지러운 것 또한 한국의 현실입니다. 심지어 학부 기초 유전학조차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의사도 부지기수입니다 (황당한 현실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수차례 경험한 바이기도 합니다).
김동렬님께서 현대 과학의 세계에 김동렬님의 구조론을 적용해보고 싶으시다면, 진심으로 김동렬님께 그 적용 대상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라도 먼저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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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한 기사에 관해서는, 먼저 reputation(명성)이라는 개념에 대해 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동물 행동학에서 나온 reputation이라는 용어는, 한 개체가 여러 선택 가능한 행동들 가운데서 어떤 특정 행동을 선택할 확률은 다른 개체의 반응에 의존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여러 케이스의 관찰과 실험을 통해, 오랜 기간 동안 과학적 방법론에 기초한 충분한 데이터를 축적한 결과로 정착한 개념입니다.
김동렬님 말씀대로 과거의 한 행동의 결과가 일관성을 갖고 유지되는 경향도 있을 것입니다. 그와는 다른 얘기이겠지만, 이런 행동 선택에서도 '각인' 효과가 작용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에 관한 연구는, 제가 대충 어림짐작해봐도 연구 설계가 어렵기 때문에, 축적된 결과들이 충분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예는 있습니다. 신체적으로 건장하지만 아직 젊기 때문에 집단 최고위에 오르지 못한 수컷 침팬지는 새끼를 갖고 있는 암컷을 괴롭힙니다. 특히 그 수컷 침팬지가 집단 최고위 자리에 도전하는 기간 동안은 그 폭력성이 더욱 심해져서, 많은 암컷들이 기존의 늙은 수컷을 오히려 지지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폭력들로부터 암컷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하는 우두머리는 점차 지지를 잃게되지만). 그러다가 결국 집단 최고위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그 폭력적인 수컷의 행동은 급격히 온순해져서 이전과는 정반대로 오히려 암컷과 새끼들의 열렬한 보호자로 돌변하게 됩니다. 그 새끼들이 꼭 자기 핏줄이 아닌 전임 최고위 수컷의 자식들이라고 해도.
이 모든 과정들은 앞서 얘기한 저 reputation으로 해석하는 것이 훨씬 더 일관적으로 보입니다. 즉, 최고위 과정까지 점차 점증하는 폭력성은 전임 최고위 수컷의 reputation을 깎고 자신의 evil reputation (notoriety)를 높이는 과정이며, 그 후에 정반대로 나타나는 행동들은 암컷들의 지지를 확보하여 어렵게 차지한 최고위 자리의 기반을 다지고 최고위 수컷의 권리인 생식을 시도하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동물들에서 이타적 행동들이 관찰되고 확인되고 있습니다. 이 많은 이타적 행동들은 하지만 명백히 집단 혈연 관계에 의존한다는 것도 매우 잘 검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의존 관계의 과정에 대한 각인 등의 효과는 아직 충분히 확인되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의 일부 요소로서 reputation 개념을 유력하게 사용하고 있기도 합니다 (게임 이론).
인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씨족 집단 안에 있을 때의 이타적 동료애 행동들과, 그보다 넓은 집단으로 옮겼을 때의 이타적 행동들은 차이가 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엇비슷한 예를 들자면 한국에서는 물에 빠진 아이를 보고 지체없이 뛰어드는 사람도, 외국 여행 중에 발견한 노랑머리 아이나 검은 피부 아이에 대해서는 좀 더 망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여러 종류의 이타적 행동들의 발현 과정에서도 그 개체의 집단 내 성장 과정 중에 성숙되는 reputation 인식/축적 과정이 관련되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동물 행동의 경향성은 있겠지만, 그것의 여러 가능한 선택지라는 것은 없다...라는 결론까지는 무리한 논리비약으로 보입니다. 인간이 아니더라도 특정 동물 행동들은 조건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지고, 심지어 같은 조건에서도 확률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는 예들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으니까요.
(다시 한번 확인하지만, 과거 선택에 의존한 특정 행동의 경향성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용한 기사에 나온 연구는 동물행동학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충분한 의미가 있는 결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로 관찰과 그리고 매우 제한된 조건에서의 보상과 선택이라는 틀에서 reputation 등의 개념을 설정하고 접근했던 행동 선택의 과정에, 이 선택 행위에 관계되는 구체적 실물체 중의 하나인 특정 뇌 영역의 활성이라는 부분까지 접근 영역을 넓혀보았다는데 가장 큰 의미가 있어보입니다.
그런데 인용한 기사의 연구의 가치는 딱 여기까지입니다.
그 뒤에 기사에서 나온 (산페이, 듀펜버그의 실험에 참여한 것 같지는 않은) 보이드의 얘기들은 그냥 무시해버려도 됩니다. 기사만 읽어보아서는, 기껏해야 그냥 양념 정도입니다. 물론 간이 너무 심하면 먹었던 음식도 토해버릴 수 밖에 없겠지만, 그냥 좀 많이 쳐진 정도는 먹을 때는 좀 고역이어도 일단 뱃속에 들어가면 다 거기서 거깁니다. 극단적으로 말해, 유명해지고 싶어서 환장한 이의 애교 정도로 보고 넘겨도 무방해보입니다. 정말 책임 요리사가 간을 한 것인지, 발로 기사 쓰는 기자가 요리한 것인지는 확인해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원재료는 그래도 제대로 살 오른 닭고기 정도는 되어보이니까, 돌로 요리한 것까지는 아니니까, '백해무익 요리'라고까지 소리칠 필요는 없어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