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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3202 vote 0 2003.12.01 (19:27:35)

민주당이 내년 총선 캐치프레이즈로  ‘안정 속의 개혁’을 내걸고 있다. 많이 듣던 소리다.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의 입에서 나오던 그 소리다. 독재자들이 DJ를 핍박하기 위해 만들어낸 그 구호다.

그들이 걱정하는 ‘불안정’이 무엇인가? ‘DJ는 의심스럽다’는 빨갱이 덧칠 수법이다. 민주당이 DJ를 배신하는 방식이 이러하다. 그들은 본질에서 DJ와 같았던 적이 한 번도 없다. 단지 대통령 DJ가 그들을 필요로 했고, 그들 역시 DJ의 후광을 필요로 했을 뿐이다.

그 이해관계의 유효기간이 끝남과 동시에 변절은 시작된다.

본질은 DJ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이다. 그들이 이해하는 DJ가 지역 맹주 김대중인가, 역사 속의 김대중인가이다. 내가 아는 김대중은 김구와 장준하를 잇는 김대중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DJ를 가지고 있다. 길은 여기서 갈라진다.

내가 아는 DJ는 김구와 장준하의 뒤를 잇는 DJ이다. 노무현은 김구와 장준하를 계승함에 있어서 김대중이 미처 완수하지 못한 부분을 보완한다. 그러한 방법으로 노무현은 DJ를 완성시킨다. DJ는 장준하를 완성시키고, 장준하는 김구를 완성시킨다. 역사는 흐른다.

추미애버전의 DJ 죽이기
DJ가 원해서 그 길을 간 것은 아니다. 길이 있고 누군가는 그 길을 가야 하는데 아무도 가지 않으므로 DJ가 그 길을 간 것이다. 마찬가지다.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역사의 필연에 의해, 뒤에 올 또다른 누군가에 의해 바통은 물려지고 싸움은 계속된다.  

추미애들은 DJ가 임기 5년 동안 미처 이루지 못한 부분을 극단화한다. 그들은 DJ가 장준하와 만나는 지점을 무너뜨린다. 그들은 김대중과 김구의 접점을 무너뜨린다. ‘안정 속의 개혁’이라는 미명으로.

그렇다. 이승만에게 김구는 안정이 아니었다. 박정희에게 장준하는 안정이 아니었다. 전두환에게 김대중은 안정이 아니었다. 역사는 반복된다.  

대마는 키워서 먹는다고 했다. 무시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말도 있지만 필자는 당분간 추미애를 띄워볼 생각이다. 다른거 없다. 멀끔한 얼굴 하나 들고 설치는 김민새와 본질에서 같다고 보기 때문이다. 진실로 말하면 그들은 한번도 DJ였던 적이 없다.

그들은 DJ가 홀로 걸어간 ‘김구와 장준하의 길’을 걸어 본 적이 없다.


전쟁이냐 평화냐
지난해 대선 이슈 중 하나는 ‘전쟁이냐 평화냐’다. 전쟁도 불사한다는 자들은 이회창을 찍었고 평화를 원하는 사람들은 노무현을 찍었다. 노무현이 당선되었다. 한국인은 전쟁이 아닌 평화를 선택한 것이다. 그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

종로에서 뺨맞은 동맹국(?)이 한강에서 침략전쟁을 벌이고 있다. 동맹국의 침략전쟁을 보조하는 그런 동맹은 세상에 없다. 지난 이맘 때 대선의 정신으로 돌아가자. 한국인은 전쟁의 노무현이 아닌 평화의 노무현을 선택했다.

결론을 내리자. 두 개의 나라가 있다. ‘이승만의 나라 박정희의 나라’가 하나요 ‘김구의 나라 장준하의 나라’가 하나이다. 지난해 대선에서 한국은 후자를 선택했다. 그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

생각하면 역사에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하고 있는 것만 같다. 이회창이 당선되었다면 어떨까? 아찔하다. 지금 쯤 1만여명의 병사가 이라크에 가 있을 것이고, 그 중에 몇 십명은 벌써 희생되었을 것이다.

한국인들은 ‘마치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있었던 듯이’ 노무현을 선택했다. 그렇다면 천명이다.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때로 역사가 두렵다. 나는 그 천명이 두렵다.

국군 장병 기십여명의 희생이 문제가 아니다. 본질은 이라크인들이 ‘한국’을 적대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일본은 이차대전의 원죄로 두고두고 욕을 먹고 있다. 일본은 아마 100년 후에도 그 허물을 벗어던지지 못할 것이다.

100년전 일본이 간 그 잘못된 길을, 100년 후 우리가 쫓아갈 것인가이다.  

100년 전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이 한일합방을 원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들의 언론이 그렇게 보도했고 그들의 지식인들이 그렇게 날조했다. 그들은 조선에 군대를 보내 극소수 불순분자(?)와 폭도(?)를 진압했다. 일은 순조로왔고 잘못된 것은 없었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 대다수 일본인들은 조선인의 진심을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다.

100년 후 한국은 미국의 침략전쟁에 동원되고 있다. ‘이라크인이 원해서’라고 둘러대면서 말이다. 100년전 한국인들은 한일합방을 원했던가? 3천만 조선인이 모두 한일합방에 찬성인데 테러분자 안중근이 홀로 반대하였던가?

당시 대다수 일본인들은 그렇게 믿었다. 과연 실제로 그러하였던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오판했던 것이다. 그들은 조선인들이 고려 광종 이후 1천년 만에 중국의 속국에서 해방시켜준 은혜를 감사히 여길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정말로 일본인들은 그리 어리석게 믿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가 이라크인을 돕는다고 엉터리로 믿듯이 말이다.

까놓고 진실을 말하자. 100년전 조선인들이 일본을 환영하지 않았듯이(당시 일본인들의 99프로는 조선이 일본을 환영한다고 믿었다.) 지금 이라크인들은 국군을 환영하지 않는다.

‘미국의 은혜’ 운운하는 얼치기들이 있다. 광종 이후 천년 중국의 속국에서 해방시켜준 일본의 은혜는 왜 말하지 않는가? 다른가? 3만명의 일본 젊은이들이 러시아의 동토에서 죽었다. 조선을 집어삼키려는 러시아로부터 조선인을 보호하기 위해서 말이다. 러시아를 물리쳐준 일본의 은혜에 감사한가?

지금 한국인 중 일본의 은혜에 감사하는 사람은 없다. 마찬가지다. 100년 후 통일한국의 7천만 겨레 중에서 625 때 도와준 미국의 은혜에 감사하는 사람은 한명도 없다. 100년 후 후세인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준 부시에게 감사하는 이라크인은 단 한명도 없다. 그것이 역사다.  

무엇인가? 우리는 독립의 역사만 알고 있을 뿐 친일의 역사를 알지 못한다. 100년전 못난 선조들이 청의 속국에서 해방시켜준 일본의 은혜를 갚기 위해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므로 지금 ‘미국의 은혜' 운운하는 것이 바로 이완용의 논리라는 사실 또한 알지 못한다.

왜? 변화는 보이지 않게 서서히 일어나기 때문이다.

월남전이 처음부터 수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엔 일이 잘 풀릴듯이 보였다. 이윽고 숨은 변수들이 활동을 개시하면 모든 것이 꼬여버린다. 100년 전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이 처음부터 조선인을 압살하려 했던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조선에 호의를 가진 일본인도 있었다. 그러나 상황은 일변하고 만다. 독립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이등박문이 저격된 것이다.

“조선인들은 은혜를 원수로 갚나?”

일본은 분노하고 그 결과는 초토화작전으로 나타난다. 독립군의 저항 또한 거세진다. 이렇게 하나하나 꼬였갔던 것이다. 친일파 입장에서 보면 그러하다. 일본이 은혜의 손길을 베풀었는데, 은공도 모르는 조선인들이 저항을 해서 대동아공영권의 원대한 계획이 꼬여버렸다.

40년전 월남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이 처음부터 300만을 학살할 목적으로 침략한 것은 아니다. 은혜의 손길을 베풀고자 했다. 선의를 가지고 접근했다. 마찬가지다. 당 태종도 연개소문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 준다는 구실로 고구려를 침략하지 않았던가?

부시가 선의를 가지고 후세인의 압제로부터 이라크 민중을 구하려 해도, 무력을 사용하는 한 역사는 그 의도를 순순히 달성시켜 주지 않는다. 부시의 선의는 이등박문의 선의, 당 태종의 선의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는 그 선의를 악으로 기록한다. 그러므로 역사를 알아야 한다. 역사 앞에서 겸허하지 않으면 안된다.

상황은 일변한다. 이라크를 도우려는 노무현의 선의는 악으로 변한다. 현재를 보지 말고 미래를 보아야 한다. 미래를 보는 방법은 역사를 읽는 것 뿐이다. 역사는 깨우쳐주고 있다. 지금 1의 이라크인이 부시를 반대한다면 1년 후 모든 이라크인이 부시를 반대한다고.

그렇다면 선택해야 한다.

이승만의 나라인가 김구의 나라인가?
박정희의 나라인가 장준하의 나라인가?

2002년 12월 한국인은 '김구의 나라, 장준하의 나라'를 선택했다. 그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  

이라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
이라크인의 진심은 무엇일까? 지금은 이라크인 자신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하나 뿐이다. 상황은 순식간에 변한다는 것이다. 그 변화를 조정하는 힘은 역사의 필연법칙이다.

지금 이라크인은 부시를 지켜보고 있다. 100년전 조선인들이 이등박문을 지켜보았듯이 말이다.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쏜다. 그 순간 조선인은 결정한다. 일본을 거부하기로. 마찬가지다. 7살 이라크 소녀가 미군의 총에 죽는다. 이라크인은 결정한다. 미국을 거부하기로.

왜?

그들은 지금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역사 속의 위대한 이라크를 회복시켜 줄  한 명의 지도자를. 지도자는 반드시 나타난다. 문제는 그 지도자가 데뷔하는 방식이다.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쏘는 방식으로, 백범 김구와 상해 임정을 데뷔시켰듯이, 이라크는 미군을 향해 알피지세븐을 당기는 방식으로 그들의 지도자를 데뷔시킨다.

왜?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지도자이고, 지도자의 카리스마를 만드는 방법은 그것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사의 필연이다.

진실을 말하자. 지금 이라크인들에게 물어보면 후세인도 싫고 부시도 싫다고 말한다. 언뜻 모순된다. 우리는 착각한다.

“아 이라크인들은 후세인도 싫어하고 부시도 싫어하는구나.”

천만에! 여론조사로 알 수 없다. 이라크인의 진심은 역사만이 알고 있다. 이라크인이 원하는 것은 지도자이다. 지도자를 만드는 방법은 미국을 때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국을 거부한다. 이것이 역사의 방식이다. 이것이 이라크인의 진심이다.

수습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파병은 전적으로 잘못된 결정이지만 수습할 기회는 있다. 문제는 철학이다. 철학이 하루 이틀에 사이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5년은 너무 짧다. 노무현의 철학은 퇴임 후에나 정립될 것이다. 이후 4년을 지금 저지른 잘못을 수습하는데 허비하지 않기 바란다.

철학은 노무현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대정신이 만들고 역사가 만든다. 노무현은 그 하나의 변곡점 위에 서 있다. 대통령이 임기 5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철학있는 지도자'로 떠오를 수 있는 기회는 없다시피 하다. 파병문제가 그 드문 기회 중의 하나임은 분명하다.

역사는 면면히 이어진다.
역사에 우연은 없다.

김구가 못하면 장준하가 하고
장준하가 못하면 김대중이 하고
김대중이 못하면 노무현이 하고
노무현이 못하면 우리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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