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리를 알면 인간이고 의리를 모르면 짐승이다. 인간이 문명의 맛을 본 역사는 길어야 1만 년이다. 유전자로 보면 사피엔스는 아직 짐승의 털옷을 벗어던지지 못했다. 우리의 유전자에는 사바나에서 뛰어놀 때의 기억이 남아 있다. 억지로 문명의 옷을 입고 점잖은 척할 뿐 인간의 마음은 여전히 거친 부족민 생활에 맞추어져 있다. 인간이 쉽게 종교와 주술에 붙잡히는 이유다. 부족민의 삶에는 암시를 걸어 타인의 마음을 조종하는 기술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긴 침팬지도 사람 옷을 입혀 놓으면 제법 사람처럼 보인다. 인간은 어떤 옷을 입고 있는가? 자유와 정의와 평등과 행복과 쾌락과 욕망과 인권과 윤리와 도덕과 선악과 충성과 효도와 양심과 존중과 평판, 체면 따위가 알려져 있다. 별게 다 있지만 장식품이다. 무슨 상관이라 말인가? 본질은 게임인데? 이기면 장땡이고 지면 허당인데. 이기면 자유와 평등을 노래하고 정의를 과시하지만 지면 그냥 음메 기죽어다. 발언권이 없다. 마이크 한 번 잡아보지 못한다. 우리가 게임 속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행복도, 쾌락도, 성공도, 체면도, 평판도 그 무엇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인생은 상대가 있는 게임이고, 게임은 일단 이겨야 되며 이기려면 전략이 필요하고 전략은 의리다. 게시판에서 동물권을 두고 논쟁이 벌어진다. 그런데 평행선을 그린다. 어느 쪽도 상대가 납득할 만한 한 방을 내놓지 못한다. 왜 그럴까? 자기네가 게임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다들 이것을 지식의 문제로 여긴다. 내가 검색해 봤는데 이러고 있다. 웃기잖아. 얼어죽을. 동물은 권력이 없다. 동물권은 동물애호가의 권력이다. 권력은 의사결정권이고 의사결정권은 이긴 사람이 장악한다.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이 다수가 되면 그들이 룰을 정한다. 동물권은 인권에 묻어가는 것이다. 인권이 있느냐를 논하는게 먼저다. 인권 이전에 권력이 있느냐를 따져야 한다. 본질은 역시나 인지부조화다. 동물사랑이라는 태도는 본질이 아니고 그들의 사회적인 발언이라는 액션이 진짜다. 액션이 먹히느냐다. 먹히면 반복하고 먹히지 않으면 뻘쭘해진다. 무대에 올라서 한 곡조 뽑으려는데 마이크가 꺼지면 어색하다. 민망하잖아. 마이크가 켜지고 반주가 들어오고 추임새와 리액션이 터져주면 신이 나서 계속 간다. 태도에 행동을 맞추는게 아니고 행동에 태도를 맞춘다. 마이크와 반주와 리액션이 중요하다. 흥이 살아야 한다. 언론이 보도해주고, 유튜브 조회수가 대박을 치고, 신입회원이 늘어나고, 번개모임 참석자가 미어터지면 매우 좋다. 팩트가 어떻고 하며 핏대 올리면 뭣하냐? 조회수만 터져주면 되는데? BTS 노래 가사에 언급해 버리면 게임 끝이잖아. 뭔 말이 많냐고? 진실을 말하자. 동물권을 주장하는 사람은 그걸로 상대방을 치려는 거다. 공격하고 있다. 왜 그럴까? 거기에 기세라는 플러스알파가 있기 때문이다. 기세를 유지하려는 것이다. 액션이 연결되는 동적환경에 머무르려는 것이다. 양의 피드백이냐 음의 피드백이냐가 본질이다. 동물권은 들판의 동물과 그다지 상관없다. 페미가 될 수도 있고, 성소수자가 될 수도 있고, 다문화가 될 수도 있다. 기세가 본질이다. 누가 키를 잡느냐다. 권력의 문제다. 그것을 동물의 문제로 착각하고 그럼 바퀴벌레는 죽여도 되는가? 모기는 어쩌고? 짚신벌레는 죽여? 이렇게 유치 떨고 있다. 한강 의대생 사건도 그렇다. 기세가 살아있느냐, 기세가 양의 피드백이냐. 유튜브 조회수 싸움이다. 기세가 권력이다. 사실? 팩트?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내가 마이크 잡는게 중요하지. 좋아요 눌러주는데. 본질은 의리다. 종교인은 자기네들끼리 의리로 뭉쳐 있다. 동물애호가는 그들끼리 의리로 뭉쳐 있다. 의리로 권력을 만들고 위세를 부린다. 부럽지? 니들도 부러우면 일루와서 편먹어. 사이비도 쪽수가 많으면 기성종교가 된다. 원불교는 원래 사이비였는데 요즘은 대접을 받는다. 삼성이 밀어주니까. 대순진리회인지 증산도인지는 한참 시끄럽더니 요즘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이기면 모르몬교도 못 건드린다. 유타주를 장악했다. 쪽수가 받쳐주니까. 라즈니쉬는 모르몬교를 흉내내다가 망했다. 졌으니까. 동물애호가도 쪽수가 많으면 국회의원 낸다. 동물당 의석 나온다. 예컨대 이런 거다. 어떤 노동자는 노조에 가입하지 않아서 불이익을 받고 있었다. 입이 한 발이나 왔다. 미국은 자유의 나라인데 왜 노조만 설치고 나는 비정규직에 찬밥이냐고? 억울해. 공정하지 않잖아. 자유의 나라에 노조에 가입하지 않을 자유는 없냐? 탈북여성도 화가 나 있다. 자유의 나라 미국에서 미국찬양도 못하게 하냐? 자유를 찾아 천신만고 끝에 어렵게 미국 왔는데 왜 정치적 올바름 공격으로 나를 사냥하려 드느냐? 탈북자가 만만하냐? 그렇다. 만만하니까 사냥 들어간다. 탈북여성은 아직 미국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자유가 곧 전쟁이다. 탈북여성이야말로 만만한 먹잇감이 아니고 무엇이던가? 사냥하려고 올가미를 던진다. 반미를 주입시키고, 서방에 대한 혐오를 강요하고, 소수자와 원주민 우대를 강요한다. 탈북여성은 왜 자유의 나라에 자유가 없냐고 항변한다. 그게 자유라는 것을 모르겠어? 다들 너를 사냥하는 자유를 누리고 있는 거라고. 너도 어디서 미국으로 갓 건너온 만만한 바보를 하나 찍어서 사냥해버려. 의리라는 본질을 모르므로 이렇게 된다. 자유가 사냥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페미든, 성소수자든, 노조든, 비건이든, 동물애호든, 사이비종교든, 음모론이든 해먹는 공식은 같다. 의리로 뭉쳐서 권력을 만들고, 권력을 가져야 자유가 있고, 평등과 정의는 후렴으로 따라붙는 것이다. 가장 핫한 것에 기세가 있다. 요즘 뭐가 뜨지? BTS가 뜬다고? 아미에 가입하면 의리로 결속되는 거냐? 굿즈를 사야 한다고? 그게 십일조냐? 의리를 모르면 졸지에 사냥당한다. 북한은 국가에서 관제 의리를 제공하고 미국은 자유롭게 사제 의리를 조직한다. 관제 의리에 익숙한 탈북여성이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트럼프 장군의 노래로 개사해 부르면 다 되는 줄 알았지. 트렌드를 알아야지. 미국은 연방을 까는게 트렌드라고. 모르겠어? 권력은 어딘가에 각을 세워야 만들어지는 거라구. 민주당은 일본을 까고 국힘당은 전라도를 까는데 미국에서는 어디를 까야 뜨겠어? 북한? 그거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몰라. 연방을 까야 주목받지. 변방은 중심을 까야 뜬다. 아시아는 서방을 까야 뜬다. 이소룡은 백인을 까서 흥했다. 해외 영화제에서 상 받으려면 자기 나라를 까면 된다. 의리를 모르는 자가 눈치를 보며 센 쪽에 붙으려다가 탈북여성처럼 꼴이 우습게 된다. 미국에 충성하면 뜨는 줄 알았는데 정작 미국인이 비웃는다. 국뽕만 한다고 뜨겠느냐고? 의리를 조직해야 진짜다. 의리는 언제라도 변방에서 중심을 치는 것이다. 에너지의 방향을 확산에서 수렴으로 바꾸는 것이 의리다. 방향판단 잘해야 한다. 강물은 흘러서 결국 바다로 간다. 바다를 바라보는 관점이 있어야 한다. 변방에서 중심을 바라보는 눈을 얻어야 한다. 가장 핫한 것. 트렌드의 중심, 유행의 중심, 변화의 중심, 에너지의 중심, 문재인이 가장 핫하다고? |
혹성탈출 시리즈: 콰이 강의 다리 원작 소설도 쓴 프랑스 작가 피에르 불(1912~1994)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미국 영화 시리즈. 원래 소설은 2차대전 당시 동남아시아/태평양 전선에서 연합국 백인군인들이 수감되어 있고, 황인종(일본 제국 군인)이 지배하는 포로수용소의 경험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런데 '콰이 강의 다리' 원작 소설도 그렇고 원작자의 경험에 의구심을 품는 의견이 많았다. 현재 공식적으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작가는 연합군으로 참전해서 포로가 된 게 아니라 프랑스가 독일군에게 점령된 후비시 프랑스영역이던 인도차이나가 일본군에게 접수되었을 때 잠시 억류된 것이라고 한다.이때 자기 백인들보다 훨신 열등하다고 생각한 황인종인 일본인들의 압도적인 전력으로 오히려 자기들이 지배 아래에 놓이자 여기서 원작의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https://namu.wiki/w/%ED%98%B9%EC%84%B1%ED%83%88%EC%B6%9C%20%EC%8B%9C%EB%A6%AC%EC%A6%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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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가 권력을 가지려면
1.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지능이 더 좋아지거나 인간이 멍청해져야 한다.
2. 패거리를 모아야 한다. 사실 1번과 본질적으로는 같은 이유. 이길 수 있느냐가 권력의 관건이기 때문.
이런 점이 영화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2011)"에 잘 묘사되어 있음. 단 영화에서는 원숭이가 창과 말 등의 구석기 무기로 총을 든 인간과 싸워 이기는데, 가능할 리가 없잖아. 근데 감독이 이렇게 연출한 것은 예전 혹성탈출 시리즈에서는 원숭이가 갑옷을 입던 장면이 어색했기 때문인듯.
어쨌건 이 영화의 감독은 원숭이가 자신을 키워 준 인간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것을 보여주는데, 여기에 이중적인 감정이 교차하는 모순이 잘 드러남. 인간과의 옛 유대냐 원숭이와의 새로운 의리냐 그것이 문제로다 하는 것. 이렇게 된 것은 인간이 원숭이에게 치매치료제를 주사했고 그 결과 원숭이가 말을 할 정도로 똑똑해졌기 때문.
이런 걸 인간 사이의 관계로 묘사했다면 임팩트가 약했겠지만, 감독은 인간과 원숭이 사이를 묘사함으로써 더욱 잘 드러낼 수 있는 것. 비슷한 걸 다루는 "엑스마키나"라는 인공지능 영화도 있음. 이건 인공지능이 인간 창조자에게서 독립하는 영화. 프랑켄슈타인 류라고 할 수 있음.
이런 영화에서 다루지는 않았지만 다뤄야 할 진짜가 있는데, 그건 애당초 왜 창조자가 자신보다 더 우수한 피창조물을 만드느냐는 것. 피창조물이 더 우수하니깐 젤 먼저 창조자를 죽이잖아. 근데 사실 창조자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어, 창조자도 제3자를 이기려고 피창조물을 만든 거지. 결국 창조자는 죽고 피창조물이 바로 그 제3자도 이길 텐데, 보통의 영화는 창조자를 죽이는데서 끝남. 다만 혹성탈출은 시리즈라 권력탈취의 전 과정을 다 보여줄 수 있는 거고.
결론: 동물권을 주장하려면 원숭이가 동물권을 주장하는 사람을 죽일 수 있도록 먼저 천재가 되는 주사를 놔줘야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