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배우는 것 중에 황당한게 룻소와 로크 그리고 홉즈의 사회계약설이다. 이름이 두 글자라서 귀여운 삼총사다. 하여간 나는 계약서 한 장 못 써보고 억울하게 사회에 끌려왔는데 남들은 도장이라도 하나 찍어주고 사회에 잡혀왔는지 그것이 대폭 궁금하다. 계약이라는 것은 표현에 불과하다. 계약이라니? 암묵적 계약 혹은 묵시적 담합을 말하는 것인가? 왜 학자들이 말을 이따위로 하는가? 말주변이 없나? 리바이어던이라니 무슨 개뼉다귀 같은 소리람? 배운 사람이 말을 똑부러지게 못하냐? 학생 시절부터 오래 묵혀둔 사유의 주제다. 사실은 기독교를 정면으로 비판하지 못하고 말을 돌리다 보니 언어가 너절해진 것이다. 하느님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사회는 신의 섭리가 아니고 인간의 주체적인 행위의 결과라구. 사회는 인간이 정하는 거야. 이 말을 못 해서 리바이어던이 출동하고 난리다. 지식인의 비겁을 목도하게 되는 현장이다. 원래 사회는 없었다. 씨족 단위로 동굴에 살았다. 주변에 채집할 식량이 바닥나면 다른 동굴로 옮겼다. 한곳에서 2, 3년을 머무를 뿐이었다. 사냥을 나서는 전사의 무리는 많아야 대여섯이고 어린이와 여성을 합해도 씨족원은 스무 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좁은 곳에 몰려있어봤자 득 될 거 하나 없다. 넓은 곳에 흩어져서 살았던 것이다. 사회는 종교와 함께 발생했다. 이것은 근래에 밝혀진 사실이다. 터키의 괴베클리 테페 유적 말이다. 1만5천 년 전에 갑자기 대집단이 출현한 것이다. 그들이 이겼다. 쪽수가 많았기 때문이다. 쪽수를 유지하려면 종교로 묶어야 한다. 사회는 계약된게 아니고 전쟁과 종교에 의해 자연발생한 것이다. 사회계약설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종교적 약속도 계약이라면 계약이다. 신도들이 교리를 공유한다는 사실이 일종의 약속이다. 그러나 본질이 아니다. 사회가 발전하는 중에 종교가 등장하고 종교가 발전하는 중에 교리가 등장한 것이다. 그것은 사회의 출발점이 아니다. 최초에 방아쇠를 당긴 것은 다른 것이다. 사회란 무엇인가? 이기는 방법이다. 왜 이기는 방법이 출현했는가? 싸웠기 때문이다. 빙하기가 끝나고 지구가 따뜻해져서 대규모 인구이동이 일어났다. 필연적으로 싸우게 된다. 기후변화 > 인구이동 > 전쟁 > 종교 > 대집단 > 농경의 순서다. 인생은 환경과의 상호작용이다. 환경변화가 인간의 행동을 촉발한다. 환경이 변하면 인구이동이 일어나고, 사람이 이동하면 전쟁이 일어나고, 전쟁에 이기려면 종교적 결속이 필요하고, 이에 대집단이 출현하여 식량이 부족하므로 농경을 해야 했던 것이다. 본질은 사회가 비사회를 이겼다는 점이다. 사회가 졌다면 여전히 씨족으로 남아있을 텐데 이겨서 부족으로 확대되고 국가로 확대된 것이다. 갈림길에서는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 누가 결정하는가? 이긴 자가 결정한다. 진 자는 결정권이 없다. 이긴 자는 다음에 또 이길 수 있는 결정을 내린다. 그것이 사회다. 세상은 계약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이길 수 있는 길로 가는 것이며 그것이 어느 면에서는 계약과 비슷하다. 씨족은 어머니의 출산에 의해 저절로 만들어지고, 국가의 형태를 갖춘 사회는 집단의 능동적인 의사결정에 의해 만들어진다. 사회는 이기는 결정을 반복한 결과다. 이겨야만 의사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바뀐 것도 같은 원리다. 부계사회가 더 많은 병력을 모은다. 어원을 알아보면 enemy는 어머니가 다르다는 뜻이다. 어머니가 다르면 죽이는게 모계사회다. 어머니가 자식을 많이 낳아도 전사 10명을 만들기 어렵다. 부계사회로 가서 아버지가 같은 자식을 모으면 백 명도 가능하다. 이기는 사회로 바뀐 것이다. 왜 사회주의인가? 사회주의가 이기는 주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가? 실제로는 점잔을 빼다가 지는 주의가 아닌가? 의문부호가 붙는다. 어쨌든 소련이 독일을 이겼다. 사회주의가 이길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그다지 이기지 못해서 현실 사회주의가 망한 것이다. 이기는 진보가 진짜다. 사회는 이기는 형태이며, 그것은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형태이며, 사회가 발달하는 원리는 경쟁과정에 지는 집단이 도태되고 이기는 집단이 남는 것이다. 비합리적인 결정을 하면 진다. 결국은 이기는 구조가 남는다. 집단은 이길 수 있는 결정 곧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하는 구조를 갖추어야 한다. 그것은 계약과 비슷하다. 인간은 죽어보자고 말을 안 듣는 동물이다. 왜? 지들도 이겨먹고 싶기 때문이다. 누군들 지고 싶겠는가? 남의 말을 들으면 그 자체로 진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이기는 재미를 줘야 인간들이 말을 듣는다. 옳으냐 그르냐 따지는건 초딩생각이고 살벌한 현장에서는 이기느냐 지느냐가 우선이다. 지면 씹힌다. 옳고 그름을 판단할 기회 자체가 봉쇄된다.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 할 때도 있다. 같은 패턴의 게임이 반복될 때다. 선배들이 왕년에 다 경험해보고 이렇게 하면 이기고 저렇게 하면 진다고 정답을 확정해 놓았다면 그냥 선배들이 알려주는 바른길로 가면 된다. 문제는 같은 게임이 되풀이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치판과 산업판은 언제나 새로운 게임이 벌어진다. 과거에 할배들이 했던 일을 반복하면 진다. 다들 남의 뒤통수를 치려고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고 인공지능이고 간에 예전에 없던 새로운 환경이다. 작금의 정치현실도 마찬가지다. 처음 가는 길이다. 한국은 3만 불 선진국 소득에 10대 경제강국이다. 이전에 본 적이 없는 풍경이다. 언제라도 이긴 자가 키를 잡는다. 이겨서 키를 잡은 사람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집단의 운명을 결정한다. 진 사람은 찌그러져야 한다. 옳고 그르고 간에 핸들을 놓친 사람은 발언권이 없다. 판단할 기회가 없다. 이겨서 핸들을 쥐는게 먼저다. 공부만 해서 세상을 시험공부로 아는 무뇌좌파들은 정치를 고등학교 입시문제로 안다. 준석이가 정답을 모르네. 내가 답을 알려주겠어. 내가 공부한 독일에서는 말야. 초딩 짓이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그 전에 누가 집단의 운명을 결정하는 키를 잡느냐의 문제다. 인간은 도무지 말을 안 듣는다. 일단 말을 듣게 만들어야 한다. 쉽게 이기는 게임을 벌이면 말을 듣는다. 우리가 누굴 이길 수 있지? 북한이가 만만하군. 북한이를 때려주자. 국힘당이다. 일본이가 만만하군. 일본이를 때려주자. 민주당이다. 대중은 단지 이기는 게임을 하고 싶을 뿐이다. 북한처럼 져놓고 이겼다고 선언하는 방법도 있지만 거짓 승리는 오래가지 못한다. 이길 만한 가치가 있는 상대를 골라서 패주는게 제대로 된 정치다. 도덕적 패배주의는 정신승리에 불과하다. 문제는 도덕을 가장한 교활한 속임수다. 패배해야 약해지고 약해져야 말을 듣기 때문에 패배를 원하는 지도자가 많다. 북한이 저러는 이유는 패배하면 궁지에 몰려 독재자에게 대항할 힘을 잃기 때문이다. 독재자는 자기편이 지도록 게임을 설계한다. 이기면 부하들이 오만해져서 폭주하게 되고 통제가 불가능해진다. 전쟁에 이기면 권력이 왕에게서 장군으로, 장군에게서 장교단으로, 장교단에게서 병사로 넘어간다. 장군이 왕에게 충성하고자 해도 장교들이 가만있지 않는다. 장교들이 가만있어도 병사들이 기어코 일을 벌인다. 결국 장군은 왕을 죽인다. 그런 일이 5대10국 내내 반복되었다. 로마의 군인황제 시절도 같다. 중국의 황제들은 장군이 이기면 조용히 불러서 죽인다. 악비가 죽은 이유다. 한두 번 일어난 비극이 아니다. 눈치 있는 장군들은 거진 다 이겨놓고 병을 핑계로 드러눕는다. 이런 짓을 잘해서 끝까지 살아남은 인생의 승리자는 안녹산의 난을 진압한 곽자의 한 사람뿐이다. 승리한 장수를 죽이는 비겁한 짓은 중국사 5천 년 내내 반복되어 왔다. 이기면 불안하고 져야 안심된다. 롯데에서 짤린 허문회 감독이 팀이 이기면 불안해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지면 두 발을 뻗고 잤다고 말하는 이유다. 언제나 패배하고 영원히 야당에 머무르기를 원하는 자들이 정의당이다. 승리를 두려워하는 비겁한 자들이다. 한사코 지는 길로만 가는 이유는 그래야 소수 패거리의 힘으로 조직을 장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기면 부하들이 폭주하여 통제불능이 되는 문제가 생기지만 그래도 일단 이기고 보는게 상호작용의 원리다. 뒷감당은 뒤에 생각하고 일단은 이겨야 한다. 역사는 도전과 응전이다. 이긴 후의 문제는 또 응전하면 된다. 한번 이겨서 끝나는 게임이 아니고 계속 싸워야 한다. 단기적인 승리에 급급하면 안 된다. 장기전을 위한 단기적인 져주기 게임도 필요하다. 역량이 안 되는데 억지로 이기면 전선이 넓어지고 공세종말점에 이르러 대반전이 일어난다. 작게 이기고 크게 진다. 전투에 이기고 전쟁에 진다. 가진 역량 안에서 이기되 지더라도 싸움기술이 늘어나는게 중요하다. 이번에 지더라도 다음에는 이길수 있다는 전망을 주는게 중요하다. 한 계단씩 밟고 올라가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전망과 비전과 이상과 대안과 낙관주의가 필요하다. 사회의 본질은 의리다. 의리가 최후에 싸움을 이기게 한다. 환경을 이용하든 도구를 이용하든 다른 부분은 외부에서 조달하므로 상대가 맞대응을 하지만 의리는 내부구조를 쥐어짜므로 상대의 맞대응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회는 계약된게 아니라 의리된 것이다. 원래는 종교가 의리를 생산했다. 공자의 의미는 종교가 아닌 형태로 의리의 생산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 데 있다. 다른 모든 사상가들은 이겨서 집단의 운명을 결정하는 의사결정권을 쥔다는 문명의 본질과 먼 헛소리를 늘어놨을 뿐이다. 21세기 과학의 시대에도 봉건시대의 사회통합 기술인 종교가 여전히 목청을 높이고 있다면 비극이다. 심지어 음모론의 형태로 원시인의 주술본능에 기초한 사회통합 기술이 현장에서 먹힌다면 추태다. 인류의 꼬라지가 추하다. 이게 뭐하는 짓이냐? 너희가 인간이 맞아? 의리를 배워서 봉건시대의 종교관습을 극복하고 원시인의 주술본능을 극복하며 그러고도 이기는 싸움을 해야 한다.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 조조의 속임수로 이길 수 있지만 일회용이다. 위진남북조 이래 한족이 북방민족에게 연전연패한 시초가 조조의 승리 지상주의다. 적을 이기려면 무리가 말을 듣게 만들어야 하는데 그 방법은 아군의 머리를 깨고 손발만 남겨두는 것이다. 머리는 생각을 하므로 개기는 수가 있지만 손발은 말을 잘 듣는다. 머리를 제거하고 손발만 남겨두니 잠시 이기고 계속 진다. 이후 중국은 천 년 동안 줄곧 오랑캐들에게 털렸다. 조조가 한 번 이기려고 다음에 이길 수 있는 잠재력을 망가뜨렸다. 의리를 깨고 배신을 가르쳤다. 이후 중국인은 배신의 민족이 되었다. 한간이 연이어 등장했다. 언제나 이길 수 있는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 그것은 상대를 달고 가는 민주주의다. 상대가 강해져야 우리도 강해진다. 51 대 49다. 상대를 51을 쫓아오는 49로 만들어야 한다. 이준석의 등장은 나쁘지 않다. 일단 판을 흔들고 보는 것이다. 혼란해지면 똑똑한 넘이 이긴다. 민주당이 이길 자격이 있다면 이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