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가 진짜다. 공자의 잘못도 있지만 그것은 문자의 보급이 충분하지 않았던 봉건시대의 한계다. 공자탓은 곤란하고 봉건시대의 한계를 비판해야 한다. 봉건시대는 사회의 상호작용 단위가 개인 대 개인이 아니고 가문 대 가문이었다. 가문의 마찰과 결속과 서열에 따른 군더더기가 붙은 것이 충, 효, 예다. 현대사회에 없는 봉건시대 곁가지는 논외로 하고 본질을 봐야 한다. 공자의 의미는 문명과 야만을 가른 것이다. 인仁은 인간다움이고 인간다움은 문명다움이다. 우리가 1만 년간 쌓아온 문명의 관성력을 인정해야 한다. 인간의 유전자는 1만 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다. 우리는 1만 년 전의 사피엔스로 태어나서 갑자기 타임머신 타고 1만 년 후의 미래로 와버린 것이다. 미래로 갔으면 미래사회에 적응해야지 원시인 행동을 고집한다면 피곤하다. 잘못된게 너무 많아 하나하나 짚어주자니 내 입만 아프고 스승이 큰 방향을 정해주면 그것을 나침반으로 삼아 각자 자신의 길을 헤쳐가야 한다. 그것이 공자의 정명사상이고, 의리사상이고, 괴력난신이고, 극기복례다. 이 넷을 관통하는 것은 한마디로 문명이냐 야만이냐다. 문명으로 방향을 잡고 그쪽으로 계속 가면 된다. 야만으로 가는 자는 동물이므로 상대해주지 말자.
첫째 정명사상 - 말을 똑바로 할 것 이 네 가지 원칙만 지키면 대략 동서남북을 분간할 수 있다. 원칙을 지키며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높여가면 저절로 답이 찾아진다. 네 가지 원칙은 게임의 기승전결 각 단계다. 문명이라는 게임에 선수로 뛰려면 일단 사람의 말을 배워야 한다. 말을 못하면 답이 없다. 그냥 말을 하면 되는데 말도 못하는 자가 대부분이라는게 인류의 비극이다. 말을 배워서 선수로 뛰려면 먼저 팀을 골라야 하는게 피아구분이다. 쉽게 득점 올리는 방법은 자기편 골대에 슛하는 것이다. 의리는 인간이 환경과의 상호작용에 따른 주도권 게임에 임하여 쉽게 득점할 요량으로 자기편 골대에 슛하는 소인배의 배신을 삼가고 인내심을 가지고 동료에게 패스를 연결하는 것이다. 작은 싸움에 점수 따려고 애쓰지 말고 문명 단위의 큰 싸움판에 가담해야 한다. 천하의 편, 인류의 편, 지성의 편, 문명의 편, 진보의 편, 자연의 편, 역사의 편, 신의 편에 가담하는 것이 의리다. 대의에 명분이 있다. 큰 임무에 내가 가담해야 할 소속팀이 있다. 거기에 함께 할 동료가 있고 지켜야 할 가치가 있다. 게임에 임하여 정명으로 선수등록을 하고, 의리로 소속팀을 골라서, 괴력난신의 제압으로 미션을 성공시키면 이긴다. 문명의 중심으로부터 출격하여 변방에서 일어나는 괴력난신의 준동을 진압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게임의 미션이다. 문명은 중앙이 변방을 제압하고 전체와 부분을 연결시켜 커다란 물줄기를 만드는 것이다. 거꾸로 괴력난신에 제압되면 패배다. 우리가 중앙의 문명팀, 진보팀, 천하팀에 소속되어 변방의 괴력난신을 잡으러 온 전사라는 본분을 망각하면 안 된다. 인생은 미션의 수행이 중요할 뿐 보상이 필요한게 아니다. 보상을 받으려고 하는 이유는 게임의 목적을 모르기 때문이다. 남의 게임에 용병으로 뛰려니 보상이 필요한 것이고 자기 게임을 운영하는 주최측은 원래 보상이 필요없다. 월드컵은 우승팀이 받지 피파가 받는게 아니다. 우리는 게임의 주최측인 피파의 포지션에 서야 한다. 인간의 여러 심리현상은 신이 인간을 길들이는 도구다. 도구에 낚이지 말자. 환경에 길들여지지 말자. 호르몬과 무의식의 명령에 낚이지 말고 미션을 수행하라. 자기가 설계한 게임의 주최측이 되어 게임의 목적을 정확히 안다면 보상이 필요없고 따라서 호르몬에 낚이지 않고 무의식에 휘둘리지 않는다. 그것이 극기복례다. 우리는 군자팀에 들어서 소인배팀의 괴력난신을 처단하러 온 것이다. 그리하여 문명의 커다란 물줄기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집단의 나아가는 방향성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러한 게임의 본질을 모르므로 막연히 불안하고, 스트레스를 받고, 패닉에 빠지고, 히스테리를 일으키고, 발작을 하게 된다. 그것은 동료를 자극하여 되돌아오는 반응을 보고 판단하려는 것이며 그 이유는 자신이 어떤 게임을 뛰는 어느 팀 소속의 선수인지 주제파악이 안 되기 때문이다. 지금이 전반전인지 후반전인지 모른다. 어느 골대가 우리편 골대인지 모른다. 내가 탄 배의 행선지도 모른다. 그래서 불안하다. 불안하므로 동료를 자극하고 돌아오는 메아리를 탐색한다. 무의식을 이기고, 호르몬을 이기고, 유아틱한 퇴행본능, 어리광 본능, 타인을 자극하여 반응을 끌어내려는 관종본능을 극복해야 한다. 정명 – 언어가 문제다. 거짓말하는 사람은 사실이 아니라 언어를 비튼다. 같은 언어를 다른 뜻으로 사용하므로 대화가 안 된다. 말을 비트는 자는 진정성 있는 대화를 거부하는 자이므로 어른들의 대화에 끼워주지 말아야 한다. 은총이니 섭리니 내세니 천국이니 영혼이니 하는 말은 뜻이 없는 말이다. 언어가 아니다. 은총이 뭐지? 그런거 없다. 그런데 같은 종교인들 사이에서는 신기하게도 말이 통한다. 두 아기가 옹알이로 대화하는 동영상이 있다. 뭔가 통하고 있다. 그런 짓을 하면 안 된다. 그것은 인간이하의 행동이다. 1만 년 간 힘들게 쌓아온 인류의 문명을 부정하는 반문명, 반지성의 유아기적 퇴행행동이다. 의리 – 인간은 대칭을 세워 의사결정하는 동물이다. 게임에 임하여 맨 먼저 가는 대칭은 피아구분이다. 우리편이냐 적군이냐다. 여기서 인격의 큰 울타리가 결정된다. 주체성과 타자성의 문제다. 주체성보다 타자성이 편하다. 주체성은 비용이 든다. 바른길을 가는 사람은 길을 개척하는 비용이 들지만 나쁜 길을 가는 사람은 남들 뒤에 묻어가면 된다. 배신하면 쉽게 성공한다. 그리고 망한다. 긍정보다 부정이 쉽고, 찬티보다 안티가 쉽고, 의견제시보다 말대꾸가 쉽고, 선제대응보다 받아치기가 쉽다. 선은 새로 프레임을 만들어야 하는데 악은 기존에 깔려 있는 프레임을 이용하면 된다. 악이 선보다 쉽다. 쉬운 길을 가다 보면 이미 배신되어 있다. 괴력난신 - 인간의 모든 행동이 사실이지 권력행동이다. 사람마다 의견이 다른게 아니고 권력이 다른 거다. 없는 권력을 새로 만들기 어렵고 기성권력을 이용하기는 쉽다. 거짓말은 그냥 하면 되는데 진실은 그 진실을 담는 운반상자까지 함께 만들어야 하므로 비용이 든다. 쉽게 이목을 끌고, 인기를 얻고, 추종자를 모으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법은 변방에서 암약하며 근거 없는 개소리를 시전하는 것이다. 음모론부터 시작해서 UFO에, 초능력에, 점쟁이에, MSG에, 신토불이에, 유기농에, 환빠소동까지 사설권력은 무수히 많다. 종교집단도 괴력난신의 일종이고 시민단체도 괴력난신의 비과학에 휩쓸리기 쉽다. 극기복례 – 유전자에 새겨진 호르몬의 명령을 자신의 판단으로 착각하면 곤란하다. 왠지 의심이 들고 왠지 걱정이 드는 것은 집단과의 결속을 요구하는 호르몬의 작용 때문이다. 공사구분 해야 한다. 공적 영역에서 주관적인 개인의 감정을 강조하는게 하지마라는 자기소개다. 인간은 별수 없는 동물이다. 짜증이 나는 이유는 무의식적으로 동료에게 암시를 걸어서 상대방을 조종하려는 마음 때문이다. 스트레스는 동료와의 거리가 멀어져서 간격을 좁히려는 무의식의 작용이다. 심리적으로 불안할 때는 무의식을 극복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 공적인 공간에서 공적인 행동을 하는게 극기복례다. 정명사상, 의리사상, 괴력난신, 극기복례 이 넷을 관통하는 것은 첫째, 권력문제이고, 둘째, 공사구분 문제다. 사적영역에서 개인의 취미생활로 무슨 짓을 하든 상관이 없으나 공적영역에서는 반드시 집단의 권력문제가 제기되므로 가릴 것을 가려야 한다. 변방에 사는 촌놈이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면 중앙에 보고해야 한다. 그래서? 네가 촌놈 주제에 감히 권력을 넘보겠다는 거냐? 이렇게 된다. 중앙의 권력을 내줄 수 없으므로 변방사람의 문제제기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실을 던졌는데 권력으로 받는다. 이러한 권력의 끼워팔기가 문제다. 변방에서 온 이상한 사람들이 쉽게 권력을 만드는 방법은 괴력난신이다. 그런 자들 때문에 도매금으로 몰려서 박해받는 사람이 촌놈 노무현이다. 메인스트림을 이룬 중앙의 기득권들은 신분이 낮은 변방의 촌놈 노무현이 중앙의 권력을 탈취하려고 각처에서 준동한다고 의심하여 싫어하는 것이다. 어디를 가나 은밀하게 권력이 끼어들어서 방해하고 있다. 교묘한 속임수로 권력을 탐하는 변방의 어설픈 무리와 권력을 내주지 않으려고 변방사람을 괄시하는 메인스트림의 낡아빠진 무리가 다투어 추태를 부리고 있다. 인간은 추악하다. 꼴불견이다. 환멸이다. 못 배운 자는 전두환 되고 배웠다는 자는 진중권 된다. 유명한 자는 조영남 되고 무명한 자는 타진요 된다. 생쇼를 경쟁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인간의 본질적인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인간도 별수 없는 동물이며 누구도 호르몬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다. 권력의 프레임을 부정할 수 없다. 피아구분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잘못된 언어를 바꾸지 않을 수 없다. 낱낱이 대응해서는 답이 없고 모조리 퍼부어서 커다란 용광로에 녹여내야 한다. 문명 단위의 큰 그림을 그리지 않을 수 없다. 천하를 갈아엎는 큰 전쟁을 벌여야 한다. 우리는 언어를 지키고, 피아의 대립각을 확인하고, 권력의 세련된 디자인을 성공시키고, 호르몬과 무의식이라는 동물적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 권력이 미워도 권력구조 안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권력을 부정하는 허무주의로의 도피는 곤란하다. 21세기 환경변화에 맞게 상호작용하는 더 세련된 권력으로 교체할 뿐이다. 변방에서 별도로 점방을 열고 사설권력을 도모하는 3류 찌질이 행동을 삼가야 한다. 우리는 종교의 퇴행과 학계의 편협을 극복하면서도 양쪽을 동시에 아우르는 제 3의 길을 제시해야 한다. 막연히 권력을 부정하고, 피아구분을 부정하고, 환경과의 상호작용 게임을 부정하고, 좋은게 좋은거다 하는 노자부류의 도피행동은 곤란하다. 좋은게 좋은게 아니다. 원인이 좋으면 결과도 좋으나 과정을 무시하고 좋은 결과만 추구하면 뒤에 청구서가 날아온다. 노자사상은 몽고에 털리면 몽골도 중국, 청나라에 털리면 만주도 중국, 한복이 뜨면 한복도 중국 소수민족 의상이라고 우기는 정신승리다. 강자가 능동적으로 움직여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고 약자가 소극적으로 환경변화에 적응하는 것이다. 공자의 가르침은 한마디로 존엄이다. 존중받으려면 존중해야 한다. 괴력난신은 자신을 모욕하는 짓이다. 사건은 기승전결로 간다. 세상은 위와 아래가 있다. 먼저와 나중이 있다. 머리와 꼬리가 있다. 언제라도 꼬리가 머리를 따라가야 한다. 하극상은 무리다. 민주주의 쪽수싸움에 머리가 꼬리의 비위를 맞춰주다가 길을 잃어버린 것이 서구 민주주의 제도의 한계다. 머리가 머리답지 못하다. 머리가 앞서가면서 길을 열고 공간을 벌여주면 꼬리가 어련히 알아서 쫓아오겠는가 말이다. 머리가 존엄을 잃은 것이 서구의 몰락이다. 의리를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직 인간이 덜 된 것이다. 타자성의 논리가 앞서고 주체성의 논리를 잃었다. 남이 움직이면 뒷다리 잡고 매달리며 안티할 생각만 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앞서 가며 길을 열어갈 생각은 하지 못하는게 의리를 배우지 못한데 따른 주체성 빈곤을 들키는 것이다. 중국의 잘못에 지적질은 하는데 모범은 보여주지 못하는게 트럼프 행태다. 일본이 잠시 서구에 없는 뭔가를 보여줬지만 금방 주저앉은게 공자의 진면목은 배우지 않고 껍데기만 흉내냈기 때문이다. 일본은 군자의 의리로 나아가지 몫하고 소인배의 의리로 주저앉았다. 정신력을 강조하며 필부의 용맹을 보여준 것이다. 귀축미영 구호에 남탓으로 떴다가 요즘은 탓할게 없는지 동면을 선택했다. 사람들이 공자를 따르지 않는 이유는 운전할 자동차가 없기 때문이다. 차도 없는 주제에 운전은 배워서 뭣하느냐다. 공자는 강자의 사상이고 권력자의 기술이다. 권력이라곤 쥐뿔도 없는 약자 주제에 공자가 주장하는 강자의 사상을 배워서 뭣하지?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약자가 약자의 무리에 속해 있으면 계속 약해질 뿐이다. 강자가 되어 오만하게 굴면 사방에서 태클이 들어온다. 한국은 기어이 강자의 대열에 들어섰다. 이명박근혜 소인배 행동으로 깝치다가는 한 방에 훅 간다. 강자가 되면 미션을 수행하여 약자의 존중을 받아야 한다. 머리가 되면 꼬리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 언어를 바로잡고, 팀을 바로 들고, 미션을 바로 수행하고 그러면서도 눈앞의 보상을 욕심내지 말고 자연스럽게 다음 게임으로 연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지구촌 인류호의 브리지에 들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