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와 같다. 상자를 열면 그 안에서 또 상자가 나온다. 그 안에 또 상자가 있다. 같은 패턴의 무한반복. 사례를 열거할 뿐 책은 두꺼운데 내용이 없다. 마이클 샌델은 아마 정의는 상대적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거다. 마이클 샌델이 찾는 기계적인 정의는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정의는 평등의 종속변수이기 때문이다. 평등이 먼저 와서 일을 벌이고 정의가 뒤에 와서 수습한다. 엔트로피의 법칙에 따라 사후수습은 한계가 있다. 엎어진 물을 90퍼센트까지 주워담을 수는 있어도 백 퍼센트는 절대로 안 된다. 정의는 사후수습이므로 한계가 있고 사전약속이 진짜다. 그런데 사전에 어떻게 약속하지? 그것이 의리다.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와 같다. 의리를 먼저 맺고 정의를 떠들어야 한다. 완벽한 정의가 불가능하듯이 기계적인 평등도 불가능하다. 그전에 자유가 먼저 와서 게임을 주최하기 때문이다. 절대평등은 절대로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사전에 규칙을 세밀하게 정하는 것이다. 철로를 이탈한 전차의 기관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미리 매뉴얼로 정해놓아야 한다. 뒷북으로 수습하는 정의는 어차피 한계가 있다. 살인자를 사형대에 세운다고 해서 그게 정의가 아니다. 귀한 남의 목숨을 빼앗고 천한 제 목숨으로 갚을 수 있나? 불가능하다. 진정한 정의는 죽은 사람을 되살려 놓는 것이다. 아직 그 방법으로 성공한 사람은 없다. 정의는 궁극적으로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물리학의 영역임을 알 수 있다. 엔트로피가 정답이다. 사건은 기승전결로 간다. 가면서 조금씩 퍼진다. 무질서도의 증가다. 퍼지므로 결과가 원인을 이길 수 없다. 퍼진다는 것은 작아진다는 것이다. 파동의 확산과 같다. 태양에서 출발한 빛은 지구에 도달하면 거리의 제곱으로 약해져 있다. 결과는 원인보다 약하다. 그러므로 후건이 전건을 칠 수 없다. 언제나 원인이 결과를 정한다. 그 역은 없다. 원인이 결과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사형대에 선 죄수를 죽이는 것은 교도관이 아니다. 사법제도라는 기계장치에 범죄자가 치인 것이다. 재수가 없어서 억울하게 치였다면 그것은 사고다. 보행자가 고속도로에 난입하면 죽는다. 그건 본인의 잘못이다. 범죄자는 고속도로에 난입한 보행자와 같다. 죽어도 그게 본인의 도박이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고속도로에 난입했다면 그것은 사고다. 사고는 확률이다. 운이 없는 경우다. 버튼을 누르면 드론에서 미사일이 날아간다. 버튼을 누른 사람의 책임은 아니다. 전쟁을 결정한 사람의 책임이다. 이런 것은 공동체가 합의하여 세세하게 규정을 잘 만들어야 한다. 부당한 명령을 내린 상관의 잘못인지, 그걸 실행한 부하의 잘못인지에 정답은 없고 공동체가 합의하기 나름이다. 미리 합의하지 않고 전쟁이 끝난 후에 소급하여 처벌하므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사실이지 이런 것은 정의와 관계가 없다. 이런 것은 법률을 운용하는 기술자의 전문지식에 불과하다. 자유와 평등과 정의는 하나의 사건에서 단계적으로 성립된다. 권력은 게임을 주최하고, 자유가 게임을 선택하고, 평등이 나란히 출발점에 서고, 정의가 시합이 공정하게 운영되었는지 판단한다. 그런데 엎질러진 물이다. 이미 결승 테이프를 끊었다면 완벽한 정의는 불가능이다. 심판운이 없는 경우다. 정의는 평등에 종속되고, 평등은 자유에 종속되고, 자유는 권력에 종속된다. 인과율에 따라 후건이 전건을 칠 수 없으므로 정의와 평등과 자유는 모두 불완전하다. 정의는 평등을 치지 못하고, 평등은 자유를 치지 못하고, 자유는 권력을 치지 못한다. 권력은 인권이다. 인권을 침범하는 자유는 없다. 사람은 권력이 있고 개는 권력이 없다. 개는 자유를 주장할 수 없다. 자유가 없으면 평등을 주장할 수 없다. 평등이 없으면 정의를 주장할 수 없다. 무한정한 자유를 주장한다면 보수꼴통이다. 인권이 인정하는 권력범위 안에서 자유가 있다. 실력과 매력과 활력과 지력과 체력이 모두 권력의 다른 모습이다. 체력이 없는 환자가 자유를 주장하며 병원을 뛰쳐나가면 곤란하다. 지력이 없는 자가 자유를 외치며 서울대에 입학하겠다고 우기면 넌센스다. 매력이 없는 사람이 결혼을 요구하며 농성을 한다면 피곤하다. 권력 만큼 자유가 주어진다. 사회는 상호작용 게임이다. 상대가 있는 게임이라는 사실을 간파해야 한다. 게임 안에서 자유, 자유 안에서 평등, 평등 안에서 정의가 순서대로 작동하는 것이며 게임을 주최하는 것은 권력이다. 여기서 주체성과 타자성의 문제가 제기된다. 권력은 주도권이며 주도권은 주체성이다. 타자성은 권력이 없다. 뭐든 안티나 하고, 반대나 하고, 발목이나 잡고, 수동적이고, 소극적으로 행동하고, 매사에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사람은 권력이 없다. 선점하고, 선제대응하고, 선수를 치고, 먼저 의견을 내고, 먼저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움직인 사람에게 권력이 있다. 그들이 게임을 개설하는 주최측이기 때문이다. 게임은 주인이 있다. 리사이틀의 주인은 가수다. 권력은 전략이다. 주체성은 어디서 싸울 것인지 전장을 결정하고, 타자성은 전장 안에서 먹히는 전술을 구사한다. 주체성을 만드는 것은 의리다. 의리가 근원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최종보스이며 권력과 자유와 평등과 정의는 게임이 벌어진 후에 시합을 진행하고 수습하는 것이다. 유비 삼 형제의 도원결의가 먼저다. 백인이 처음 흑인을 만났을 때 흑인을 같은 종의 인류로 봐야 할지 아니면 별종의 생물로 분류해야 하는지 헷갈렸다. 흑인도 하느님이 창조했으므로 인간이다. 흑인과 결혼해서 아기가 나오면 같은 생물 종의 인간이고 안 나오면 다른 종의 동물이다. 따위의 논의가 있었다. 한국인들은 개가 인간의 친구인지 소나 돼지와 같은 음식인지를 논쟁하고 있다. 의미없다. 그것은 의리가 결정하는 것이지 DNA가 결정하는게 아니다. 의리가 있는 자와 없는 자가 거기서 갈린다. 도덕과 윤리는 의리를 해석하는 언어에 불과하다. 도는 의리의 자연법칙이다. 덕은 의리에 대한 인간의 태도다. 친은 유전자에 새겨진 의리의 본능과 호르몬이다. 륜은 자연법칙에 따른 친의 해석이다. 동물도 많은 경우 근친 간의 결합은 피한다. 그렇게 해야 동물의 무리생활이 유지된다는게 륜이니 곧 천륜이다. 선은 의리를 따르는 태도다. 악은 의리를 저버리는 짓이다. 근원에는 오직 의리가 있을 뿐이며 나머지는 다양한 상황에 의리를 적용하여 해석한 것이다. 세상은 게임이며 게임은 이겨야 양의 피드백에 의해 시스템이 돌아가게 되며 이기는 방법은 의리다. 동물도 의리가 있으므로 생태계의 시스템이 돌아가는 것이다. 의리 없이 어미가 자식을 잡아먹고 수컷이 암컷을 잡아먹는다면 생태계는 유지될 수 없다. 엔트로피의 법칙에 의해 점차 확산되어 게임은 반드시 오염되므로 새로 룰을 정해서 부단히 새로운 게임으로 갈아타고 다시 나란히 출발점에 서는게 진보다. 같은 게임을 반복하면 원심분리기가 작동하여 계급대로 줄을 서고 이기는 사람만 계속 이겨서 의리가 깨진다. 같은 게임이 반복되면 반칙하는 사람이 이긴다. 내가 반칙을 열심히 해서 거의 다 이겨놨는데 왜 이제 와서 다른 게임으로 갈아타느냐고 항의하는게 보수다. 진보와 보수의 상호작용은 영원히 지속된다. 세상을 환경과 상호작용 게임으로 보는 눈을 얻어야 한다. 도덕이든 윤리든 선악이든 자유든 정의든 평등이든 인권이든 박애든 모두 게임의 운영에 대한 것이다. 게임을 잘 운영해야 다음 게임에 초청된다. 거기에 의미가 있다. 개별적으로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통짜덩어리로 보는 눈을 얻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