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의미는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 개별과학이 하나씩 독립해 나가고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이 남아있다. 세계관은 객체요, 인생관은 주체요, 가치관은 둘의 상호작용이다. 세계관은 보이는 것, 인생관은 그것을 보는 사람, 가치관은 둘 사이에서 벌어지는 게임이다. 철학은 핸들을 잡는 것이다. 인생관은 인생을 운전하고, 세계관은 환경을 운전하고, 가치관은 문명을 운전한다. 철학의 실패는 운전자와 자동차와 운전기술을 떼어놓았기 때문이다. 인간도 알고 자동차도 아는데 운전을 못한다. 운전도 알기는 아는데 머리로만 알고 할 줄을 모른다. 연애를 책으로 배우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지만 현장에서 부딪혀봐야 아는 것이다. 상대가 있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내가 어떻게 한다고 되는게 아니고 상대와 합이 맞아야 된다. 정답을 찍는다고 되는게 아니고 밀당을 거쳐야 한다. 구조의 톱니바퀴는 맞물려 돌아간다. 떼어놓으면 안 된다. 부분의 합은 전체보다 작다. 부분의 합에는 없고 전체에는 있는 것은? 톱니의 맞물린 정도다. 그것은 외부에서 관찰되지 않는 숨은 플러스알파다. 주체의 인간과 객체인 환경을 떼어놓는 순간 그 숨은 플러스알파는 종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래서? 철학은 인지의 문제가 아니라 행위의 문제다. 행위는 액션이다. 톱니가 맞물려 있다. 거기에 동력이 걸려 있다. 물리력이 작동한다. 인지와 행위가 어긋날 때는 어디에 맞춰야 하나? 당연히 행위에 맞춰야 한다. 왜냐하면 현장에서 돈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철학은 액션이고 액션은 톱니가 맞물려 돌아가므로 임의로 빠져나갈 수는 없다. 기계는 돌아가고 잘못하면 치인다. 인지부조화는 인지와 행위가 모순될 때 불편함을 느껴서 자기합리화를 시도한다고 설명하지만 틀렸다. 태도에 행위를 맞출 수 없다. 훈련된 사람이거나 타인의 도움을 받으면 가능하지만 그 경우는 애초에 문제가 성립되지 않는다. 문제가 있다면 충돌했다는 거다. 사건이 일어나 있고 쫓기고 있는 것이다. 쫓기고 있으면 심리가 아니라 물리다.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도 잡아야 한다. 지푸라기는 잡아봤자 쓸모가 없어. 이런 인지적 판단은 의미가 없다. 그것은 동물의 생존본능이기 때문이다. 늑대에게 쫓기는 사슴과 같다. 사슴은 직진만 고집하다가 당한다. 90도로 꺾어야 살 수 있어. 불가능하다. 방향을 꺾으려고 속도를 줄이면 늑대에게 잡힌다. 그런데 토끼는 된다. 뒷발의 긴 발바닥을 이용해서 기가 막히게 180도 턴을 해낸다. 왜 토끼는 되는데 사슴은 안 될까? 신체구조가 다르다. 인지부조화는 심리가 아니라 물리다. 21세기 과학시대에 왜 종교가 기승을 부리는가? 철학이 답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일제히 종교로 달려가는 것이다. 과학은 지식을 제공한다. 종교는 권력을 제공한다. 지식만으로는 부족하고 플러스알파로 권력이 필요하다. 달리는 사슴은 제 몸에 실린 관성력을 이기지 못한다. 인간이 환경을 이기게 하는 것은 권력이다. 갈림길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은 내가 임의로 결정하는게 아니고 상호작용의 파트너가 결정한다. 포수의 파트너는 총이고, 궁수의 파트너는 활이다. 목수의 파트너는 대패다. 파트너를 이겨야 한다. 이기지 못하고 권력이 없는데 인지부조화 타령은 의미가 없다. 늑대에게 쫓기는 사슴을 비난할 수 없다. 계급배반 투표를 하는 대중을 비난할 수 없다. 대중이 쫓기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바보냐? 일단 성가신 늑대부터 해결해주고 바른말을 해야지 말이다. 권력이 없는 사람은 그럴수록 권력자에게 의지하여 작은 가부장 권력이라도 지켜야 하는게 물리적 현실이다. 상전이 제 배 부르면 종의 배 고픈 줄 모른다. 지식인은 권력이 있기 떄문에 대중의 쫓기고 있는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공자의 정명사상, 의리사상, 괴력난신, 극기복례는 전략이다. 전략은 권력을 만든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의리라는 톱니가 맞물려 돌아가게 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숨은 플러스알파를 생산한다. 객체와 주체와 상호작용을 한 방에 해결하는 것은 전략이다. 인생관, 세계관, 가치관을 한 줄에 꿰어낸다. 철학은 인지의 문제가 아니라 행위의 문제고, 행위는 상대가 있고, 상대를 제압하는 것은 인지적 태도가 아니라 물리적 에너지다. 그것이 권력이다. 권력을 조달하는 것은 전략이다. 남녀 커플이 연애를 해도 필연 주도권 싸움을 하게 된다. 신혼부부라도 서로 쥐여살지 않겠다며 신경전을 벌인다. 이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능력이든, 매력이든, 활력이든, 재력이든 그게 결국 권력이다. 필연 충돌하게 되며 의리로 해결해야 한다. 먼저 져주고 나중에 이기는 전략에 의해 의리가 가동된다. 서로 먼저 이겨먹으려고 하면 커플은 깨질 수밖에 없다. 총이 있으면 쏜다. 칼이 있으면 휘두른다. 펜이 있으면 쓴다. 그것은 기술이다. 총도 없고, 칼도 없고, 펜도 없으므로 전략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철학이 소용되는 것이다. 젊은 커플도, 신혼부부도 결정적으로 그것이 없다. 도구가 없다. 깨질 위험은 항상 존재한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톱니, 의리라는 톱니가 맞물리지 않으면 안 된다. 톱니가 맞물려 돌아가면 액션을 취해야 하고, 액션이 계속 연결되다 보면 또 하루가 흘러가는 것이다. 액션이 끊어지는 순간 커플은 깨져 있다. 전략과 전술은 다르다. 철학과 기술은 다른 거다. 기술은 도구를 사용하고 철학은 그 도구를 만든다. 전술은 전장 안에서 답을 찾고 전략은 그 전장을 선택한다. 어디서 싸울 것인지를 내가 정한다. 서양철학사의 허다한 철학자와 사상가들은 철학의 문제를 기술의 문제로 착각한 것이다. 칼이 있다. 칼을 어떻게 쓰지? 총이 있다. 총을 어떻게 쓰지? 펜이 있다. 펜을 어떻게 쓰지? 그래서 나온 것이 형이상학, 논리학, 도덕학, 윤리학, 심리학 따위 개풀 뜯어먹는 소리다. 그들은 칼을 분해하고 총을 조립한다. 사람을 분해하기도 한다. 삽질이다. 차가 없으면 운전할 수 없고 의리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백지상태에서 차부터 만들어야 한다. 도구를 사용하는 기술이 아니라 도구를 만드는 철학, 전투를 이기는 전술이 아니라 전장을 선택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어디서 싸울 것인가? 명량에서 싸워야 이긴다. 의리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여 차를 만든다. 해남과 진도를 연결하여 이길 수 있는 구조를 만든다. 핸들링이 가능한 상태로 만든다. 의리가 없으면 무질서한 군중을 핸들링할 수 없다. 백신이 있어도 접종을 못하고 있는 일본이 그렇다. 주체인 인간이 객체인 대상을 통제하는 문제가 아니라 주체와 객체가 어우러지는 게임판을 만들어야 하는 문제다. 목수는 연장이 없고, 작가는 펜이 없고, 가수는 청중이 없고, 배우는 무대가 없다. 도구가 없으므로 기술은 소용없고 전략이 필요하다. 목수가 오전 내내 연장을 벼르더니 오후에 집을 한 채 뚝닥 지어놓았다고 한다. 철학은 연장을 벼르고 기술은 그 연장을 사용한다. 연장을 벼른다는 것은 상호작용한다는 것이다. 인생은 상대가 있는 게임이다. 게임의 판을 짜는 문제다. 왜 안생기는가? 권력이 없기 때문이다. 매력도 없고, 활력도 없고, 체력도 없고, 능력도 없고, 지력도 없다. 상대방을 자기쪽으로 끌어당기는 인력이 없다. 철학은 권력이다. 권력이 없어서 못한다. 권력을 만들어야 한다. 매력을 만들고, 능력을 만들고, 활력을 만들고, 기세를 일으켜야 생긴다. 의리로 권력을 만든다. 첫 게임을 져주면서 톱니가 맞물리게 하여 다음 게임을 잡는 것이 전략이다. 의리 없이 첫 게임부터 기싸움에 이기려고 하므로 톱니가 맞물리지 않고 척력이 작용하여 커플이 깨지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권력이 필요하다. 권력을 설계하는 것은 전략이다. 서양 철학자들의 잡다한 지식은 권력을 구성하는 요소들 중에 하나다. 현재로는 종교가 더 많은 것을 주고 있다. 권력철학이 필요한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