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슭은 복잡하지만 정상은 단순하다. 기슭에서 출발할 때는 온갖 주의, 주장이 난무하며 서로 얼굴을 붉히게 되지만 정상에서는 모두 만나 하나가 된다. 정상은 뾰족하며 그 자리에는 하나의 정답만 들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백가쟁명, 백화제방의 좋은 시절은 오래가지 않는다. 종국에는 생산력의 혁신에 의해 모두 정리된다. 우후죽순처럼 일어났던 IT벤처는 대거 정리되고 구글과 아마존이 최후에 살아남았다. 문명은 언제나 한 방향으로 수렴된다. 맑은 물이든 흐린 물이든 결국 바다로 흘러간다. 종국에는 진보도 없고 보수도 없다. 피아구분의 편가르기는 판돈을 올리는 장치에 불과하다. 상호작용을 증대시켜 시장의 파이를 키우는데 기여한다. 더 많은 선수가 게임에 참여하도록 유인하는 장치다. 진보와 보수의 치열한 쟁투에 의해 게임은 흥행하고 돈은 주최측이 가져간다. 인간의 문제는 하나다. 그것은 나를 버리는 문제다. 동시에 나를 키우는 문제다. 불교의 제법무아는 나를 버리라는 가르침이다. 공자의 군자사상은 나를 확대하라는 가르침이다. 둘은 같다. 나를 버리고 나를 얻는다. 거짓 나를 버리고 참된 나에 이른다. 뒤로 물러나서 마음을 비우고 내려 놓아라거나 반대로 중앙으로 쳐들어가서 권력을 휘어잡고 세상을 바꾸라거나 같은 이야기다. 이해가 안 된다고? 도대체 나를 버리라는 거야, 붙잡으라는 거야? 사물로 보는 관점을 버리고 사건으로 보는 관점을 얻으면 그게 같은 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사물의 나를 버리고 사건의 나를 취하는 것이다. 노무현이 버린 것은 사물의 노무현이고 노무현이 붙잡은 것은 사건의 노무현이다. 나를 불쏘시개로 삼아 광장을 불태우고 그 에너지로 더 많은 나를 복제한다. 그것은 주체와 타자의 문제다. 인생에서 계속 부딪히는 문제다. 피아구분의 문제다. 도무지 누가 내 편이고 누가 적인가? 동물의 영역본능과 서열본능을 극복하는 문제다. 권력의지의 문제다. 정치업자들이 노상 모여서 쑥덕거리며 종파놀음 하고 진영놀음 하는 프레임 싸움의 문제다. 세상에 허다한 주의 주장이 난무하고 있다지만 의미 없다. 빗자루로 확 쓸어버려야 한다. 다양한 정치노선이 있다지만 개소리다. 결국 니 편이냐 내 편이냐다. 생산력의 변화에 의해 용해되고 흡수된다. 트로츠키주의냐 스탈린주의냐 열심히 싸우다가 결국 영국 공산당에게 기술을 배워서 밥 먹는다. 결론은 밥이다. 혁신이 문명의 본질이다. 정치의 편가르기는 긴장을 끌어올리는 동원장치다. 무관심한 군중을 자극하여 호르몬을 끌어내고 무의식을 조종하는 기술이다. 군중을 정치게임에 참가시키는 동원기술에 불과하다. 종교든 정치든 문화든 산업이든 본질은 동원이다. 구석구석에 짱박혀 있는 인간들을 광장으로 끌어내고 거기서 하나의 인격을 도출한다. 뇌 바깥에 또 다른 뇌를 만든다. 바깥뇌 개념이다. 기세에 태워 스스로 굴러가게 하는 것이다. 시장원리처럼 광장원리가 작동하면 문명은 기세를 타고 자체엔진으로 굴러가는 것이며 무슨 주의타령 하는 논쟁은 필요가 없다. 다 뻘짓에 삽질이다. 자유의지냐 결정론이냐, 주체성이냐 타자성이냐는 같은 이야기다. 자유의지가 주체성이고 결정론이 타자성이다. 공자는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었다. 그는 세상일에 일일이 참견한다. 공자의 가르침대로 세상을 바꾸겠다고 함부로 들이대다가 목숨을 잃을 것인가, 아니면 김삿갓처럼 유유자적하며 세상을 조롱하고, 풍자하고, 야유하다가 고금소총 따위 야사에나 등장하며 지리멸렬해질 것인가? 방향이 다르다. 주인이냐 종놈이냐다. 주인은 되도록 나의 책임을 크게 하고 종놈은 되도록 남 탓을 열심히 한다. 주인의 주체성은 권력이 클수록 더 많은 이익을 얻는다는 말이고 종놈의 타자성은 권력이 커봤자 그 수익은 주인이 가져간다는 말이다. 종놈은 결국 남 좋은 일 하는 것이다. 종놈은 타자성이 맞고 결정론이 맞다. 어차피 종놈의 운명은 결정되어 있다. 종놈의 살길은 죽어보자고 안티하고, 말대꾸 하고, 반사놀이 하고,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라고 하고, 책임을 떠넘기고, 안아키 짓을 하고, 백신 음모론 퍼뜨리고, 관종 짓을 하고, 종파놀음 하고, 노선투쟁 하고, 정치적 프레임 걸기 하고, 하극상을 벌이고, 주인을 배신하는 것이다. 변희재 종놈과 진중권 종놈이 그 수법으로 떴다. 윤석열 종놈과 최재형 종놈의 운명은 정해져 있다. 그들에게는 결정론이 적용된다. 주체성이냐 타자성이냐. 내 역할을 크게 할 것인가, 남의 역할을 크게 할 것인가? 자유의지냐 결정론이냐, 몸은 편하지만 스트레스 받는 주인의 길을 갈 것인가 몸은 고되어도 마음은 편하게 종놈의 길을 갈 것인가? 한 번 방향이 정해지면 그 길로 계속 가게 된다. 사건의 톱니는 맞물려 돌아가기 때문이다. 첫 단추를 잘 꿰어야 한다. 기세가 걸려 있기 때문에 방향이 정해지면 일사천리로 쭉 간다. 종놈은 결국 종놈 짓을 한다. 배신자는 결국 배신한다. 내가 50년 넘도록 주의 깊게 지켜봤는데 개가 깨달아서 인간이 되는 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개는 개고, 일베는 일베고, 꼴통은 꼴통이고, 배신자는 배신자다. 소인배에게 인간의 도리를 가르쳐봤자 먹히지 않는다. 공자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죄다 한 줄에 꿰어야 한다. 사물로 보면 주체성과 타자성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지만 사건으로 보면 둘은 통합된다. 진보는 머리고 보수는 꼬리다. 머리는 꼬리를 떼어낼 수 없다. 자유의지는 머리고 결정론은 꼬리다. 주체성은 전략이고 타자성은 전술이다. 전략은 전술을 떼어낼 수 없다. 이 둘 사이를 관통하는 것은? 권력의지다. 동물에게는 그것이 영역본능과 서열본능으로 나타난다. 이게 좌파에게 더 문제가 된다. 우파는 원래 동물이므로 그냥 서열을 정한다. '돈대로 줄 서.' 이 한마디면 해결이다. 재용이 맨 앞에 선다. 돈 많잖아. 투덜이 홍준표도 납득한다. 좌파는 동물적 서열본능을 버리고 합리적으로 해결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자신이 뱉은 말에 코를 꿰는 것이다. 서열이 없으면 의사결정할 수 없다. 평등하게 원탁에 앉아서 서로 눈치를 본다. 의사결정을 못해서 스트레스를 받는다. 면전에서는 말을 못하고 궁시렁대며 뒷담화를 깐다. 모두가 불만에 찬 상태가 된다. 평등하게 한다더니 결국 얼굴 보고 뽑더만. 여자라고 뽑더만. 명문대만 뽑네. 시민단체 출신은 가산점 받냐? 왜 능력대로 안 뽑지? 누구도 납득할 수 없다. 서열 없애고 평등하게 대접했더니 윤석열과 최재형이 기득권 끼고 하극상을 저지른다. 실무자는 별도로 현장권력이라는 플러스알파가 있기 때문에 평등하게 가면 기술자가 다 먹어버린다. 일본처럼 망한다. 기술자와 전문가가 권력을 쥐면 시스템이 망한다. 기수가 말을 이끌어야 하는데 평등하게 가면 말이 기수를 낙마시킨다. 평등하게 간다면서 너는 왜 내 등에 올라타고 편하게 가냐? 꼬리가 머리를 흔드는 왝더독 현상이 일어난다. 총칼을 든 군인과 맨손뿐인 민간인이 평등하게 가기로 하면 군인이 먹어버린다. 검찰발 쿠데타가 일어난다. 리더가 리더십을 발휘하여 교통정리를 해줘야 하는 것이다. 능력대로 서열을 정해야 하는데 쉽지 않다. 보수는 사물이고 진보는 사건이다. 사물은 결정론이고 사건은 자유의지다. 사물은 미리 서열을 정해놓고 사건은 주어진 일의 성격에 따라 서열이 정해진다. 서열을 부정하면 안 된다. 식당에서는 요리사가 서열 1위다. 고객이 큰소리를 치면 요리사는 음식에 침을 뱉는다. 이때 고객의 대응수단은 물리적으로 없다. 주방에 감시카메라를 설치하면 인권문제로 소송을 건다. 이건 물리적 현실이므로 받아들여야 한다. 결정은 대통령이 하지만 실행은 실무자가 한다. 빈 라덴 체포작전을 실행할 때는 오바마도 뒤에서 얌전히 지켜보고 있어야 한다. 진보는 이런 것을 훈련해야 한다. 주어진 임무에 따라 그때그때 서열을 바꾸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