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추상적 사고에 약하다. 추상은 객체 내부의 질서다. 추상적의 반대로 구체적인 것은 관측자인 인간과 대칭된 것이다. 즉 눈으로 본 것이다. 그것은 주체의 맞은 편에 물리적으로 버티고 있다. 문제는 인간의 언어다. 언어는 주체와 객체의 대칭을 쓴다. 인간은 붙잡은 대칭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인간과의 대칭을 꽉 붙잡고 있기 때문에 객체 내부에서 작동하는 자체의 대칭을 보지 못한다. 내려놓아야 한다. 마음을 비워야 한다. 관측자인 나를 배제해야 진짜가 보인다. 사람이 뱀을 보는게 아니라 뱀의 머리가 꼬리를 보는 것이다. 사람이 밖에서 뱀을 보면 관측자의 위치에 따라 상대적이다. 반대로 뱀의 내부에서 머리가 꼬리를 보면 관측자의 위치가 변하지 않으므로 절대적이다. 머리와 꼬리가 자리를 바꾸는 일은 없다. 그러므로 진리를 볼 수 있다. 구조는 객체 내부의 사정이다. 관측자인 인간과 상관없이 자체적으로 돌아가는 질서를 포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수학이다. 수학은 추상이다. 우리가 사과를 보고 크다거나 혹은 작다고 하는 것은 인간과 대칭된 것이다. 아이가 보면 크고 어른이 보면 작다. 수학이 자로 길이를 재거나 저울에 무게를 달아보고 크다거나 작다고 하는 것은 기준이 되는 1과 대칭된 것이다. 1이 관측자다. 1의 위치는 정해져 있다. 수학은 관측자인 인간이 배제되므로 절대적이다. 구조로 보는 것은 수학으로 보는 것이다. 사건이냐 사물이냐다. 수학의 추상은 사건으로 보고 인간의 구상은 사물로 본다. 관측자인 인간과 대칭시키면 사물이고, 관측대상 내부에서 별도로 상호작용을 찾아내면 사건이다. 육체는 사물이다. 인간이 눈으로 육체를 볼 수 있다. 손으로 몸을 만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마음은? 영혼은? 정신은? 이성은? 사랑은? 그것은 없는 것인가? 아니다. 있다. 그것은 관측자인 인간과 상관없이 객체 내부의 대칭으로 있다. 문제는 헷갈리는 것이다. 인간과 대칭된 걸로 착각한다. 영혼의 무게를 재려고 한다. 인간이 무게가 있으니까 영혼도 무게가 있겠지. 천만에. 수학은 상대적인 관계가 있을 뿐이다. 육신은 외부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외부환경으로부터 독립된 인간 행위의 일관성을 영혼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관측자인 인간과 상관없이 자체의 대칭이다. 하드웨어는 만질 수 있다. 소프트웨어는? 바둑판은 만질 수 있다. 바둑의 기보는? 구조론으로 보면 만유는 사건으로 환원된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구분은 없다. 마음과 육체의 구분은 없다. 정신과 물질의 구분은 없다. 보는 방법의 차이다. 하드웨어는 관측자인 인간과 대칭된다. 소프트웨어는 자체 질서를 가진다. 소프트웨어는 인간과 상관없이 OS와 프로그램의 대칭, 프로그램과 파일의 대칭, 파일과 정보의 대칭으로 자체 스펙트럼을 가진다. 바둑판은 인간과 대칭된다. 기보는 인간과 대칭되지 않는다. 초반 포석이냐 중반전투냐 막판 끝내기냐 혹은 세력바둑이냐 실리바둑이냐 바둑 안에서 일어나는 자체의 대칭이다. 노예는 주인과 대칭된다. 노예와 노예 아들의 관계는? 사람이 연필을 지배한다. 연필은 글자를 지배한다. 사람이 자동차를 운전한다. 자동차 역시 엔진이 바퀴를 통제한다. 결국 같은 것이다. 육체와 정신의 차이는 없고 호르몬으로 보면 똑같다. 이성과 감성, 전략과 전술, 머리와 꼬리, 주체성과 타자성, 진보와 보수, 여당과 야당이 죄다 같은 것이다. 우리가 이분법적 사고를 버려야 한다. 구조론은 일원론이다. 사건과 사물은 하나다. 단, 사건이 사물보다 크다. 사건은 전체고 사물은 부분이다.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 진보와 보수는 하나다. 그런데 진보가 보수보다 크다. 전략이 전술보다 크다. 어디든 깊이 들어가면 관측자인 인간과 별도로 내부적으로 돌아가는 자체 원리가 있다. 시장원리다. 자체의 논리는 일원론이다. 시장은 밸런스 일원론이다. 인간이 중간에 끼어들어 수요와 공급의 이분법을 만든다. 시장은 수요 편이나 공급 편을 들지 않고 균형 편을 든다. 그래야 양의 피드백으로 시장이 팽창하기 때문이다. 피파는 한국 편이나 일본 편을 들지 않고 균형 편을 들어야 월드컵 중계권을 비싸게 팔아먹는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광장 일원론이 지배한다. 정치는 진보 편이나 보수 편이 아니고 광장의 파이가 커지는 편이다. 자본의 시장원리와 같이 광장원리가 정치를 지배하고 있다. 정치는 광장이 커지는 쪽으로 발전한다. 의사결정에 참여자 숫자가 늘어나는 쪽으로 움직인다. 동원의 원리다. 선악 이분법 버리고 사회성 일원론으로 갈아타야 한다. 진보 보수 이분법 버리고 문명의 팽창 일원론으로 갈아타야 한다. 우주는 사건 일원론이다. 인간이 끼어들어 사물 이분법이라는 착시를 만든다. 문제는 필자가 말하지 않아도 인간들이 이 점을 간파하고 있더라는 거다. 레토릭이 딸려서 말로 표현하지 못할 뿐이다. 인간들이 영혼이니, 정신이니, 이성이니, 이데아니, 마음이니, 사랑이니 하는 말을 쓸 때는 사실이지 사건의 일원론적인 성질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선악이든 진보보수든 판돈 올려서 시장의 파이를 키우는 동원장치다. 어차피 막판에는 생산력이 결정한다. 무슨 주의 주장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트로츠키주의니 스탈린주의니 하고 열심히 다투다가 결국은 영국 기술 빼 온다. 동원이 핵심이다. 시장원리도 광장원리도 파이를 키우는 동원의 원리다. 동원되지 않으면 상호작용이 감소하여 생산력이 위축된다. 그 경우 어떤 노선, 어떤 주의, 어떤 종파와 붙어먹든 공산당처럼 망하고 조선왕조처럼 정체된다. 봉건왕조의 한계다. 우리는 이게 다 노론 때문이다, 이게 다 고종 때문이다 하고 남 탓하지만 소인배 짓이다. 결국은 생산력 차이다. 금광이 터지고 외국인이 들어와야 한다. 봉건체제는 동원체제이며 생산력이 없는데 동원을 어떻게 하든 의미 없다. 무슨 주의, 무슨 노선, 무슨 사상 하는 것은 동원방법론일 뿐 생산력의 혁신이 받쳐주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예수는 엄마도 있고 아빠도 있고 형제도 있다. 그냥 보통사람이다. 예수가 처녀생식으로 태어났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초딩이다. 산타 할아버지나 기다리는 사람과는 진지한 대화를 할 수 없다. 애들은 가라. 사물의 예수가 아니라 사건의 예수다. 세상을 사건으로 보는 관점을 얻어야 한다. 신은 사물이 아니다. 상식적으로 아니잖아. 예수는 사건이다. 예수 이전에도 스토리가 잔뜩 있고 예수 이후에도 스토리가 잔뜩 있다. 예수는 그 스토리의 정점일 뿐이다. 사람들은 그 스토리의 연결성을 믿는 것이다. 신은 사건이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인간들은 직관적으로 안다. 신이 눈, 코, 입, 귀, 똥구멍 다 있고 수염 난 영감쟁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피곤하다. 에휴! 말귀를 못 알아먹네. 추상은 추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구조론으로 보면 우주 안에 사물은 없다. 만약 사물로 된 신이 있다면 그게 때려죽일 외계인이다. 그런 신은 없는게 낫다. 진지해 지자. 신은 있다. 사건의 방향성으로 있다. 사건은 우연으로 촉발되어도 필연으로 전개된다. 산불은 우연히 일어나도 봄날의 날씨에 따라 필연적으로 번진다. 풍속과 습도와 인화물질의 삼박자가 맞아버리면 그때부터는 우연이 아니다. 양간지풍에 푀엔현상이면 돌이킬 수 없다. 사건의 시작은 우연인데 결말은 필연이다. 인간에게는 결말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 필자는 극장에서 주인공이 위기에 처하면 시계를 본다. 아직 30분 남았으니 안 죽겠군. 이 통밥이 틀린 적이 없다. 인간은 사건의 최종적인 필연성을 믿는다. 스토리의 연결성을 믿는다. 그것이 추상개념이라서 언어가 헷갈리므로 그냥 신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사건은 갈수록 커진다. 에너지를 수렴하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에너지를 끌어내기만 하면 결국 판돈은 똑똑한 사람 주머니로 흘러간다. 끝가지 버티는 자가 먹는다. 작은 계곡물이 차례로 합수하여 바다에 이를 때는 큰 강물을 이룬다. 그 직전에 포기하면 아깝잖아. 사건은 우연으로 시작하지만 필연으로 발전한다. 광복 하루 전인 8월 14일에 변절하여 친일파 되면 억울하잖아. 우리는 사건이 우연히 시작되었으므로 결말도 우연으로 끝날 것으로 믿고 포기한다. 그런데 판돈이 걸리면 필연이다. 한강 의대생 사건도 어쩌다 판돈이 걸려서 그렇게 된 것이다. 초심자의 행운으로 따는 것은 우연이고 도박중독으로 오링되는 것은 필연이다. 마음이나, 영혼이나, 이성이나, 정신이나, 사랑이나, 이데아나 같은 말이다. 사랑은 깊어지고 정신은 집중된다. 마음은 순수하고 영혼은 순결하다. 같은 말이다. 어떤 단어를 쓰든 결국 정상에서는 하나가 된다. 바다까지 흘러가면 하나가 된다. 마음이니 영혼이니 하며 말을 꺼낼 때는 다른 뜻으로 꺼낸 것이지만 사건은 커지고 정상에서는 신으로 수렴된다. 사랑이 깊다고 하든, 정신을 집중했다고 하든, 영혼이 순결하다고 하든, 이데아가 찬란하다고 하든, 강물이 모여서 바다로 가면 그게 믿음이 깊다는 말이다. 신은 그 바다의 깊이다. 그 정상의 높이다. 신은 일원론이다. 의사결정의 최종보스는 최종단계에 분명히 자리 잡고 있다. 직관적으로 안다. 인간에게는 믿음이 필요하다. 정신에는 집중이, 마음에는 순수가, 사랑에는 깊음이, 동료에게는 의리가, 이성에는 에너지가 필요하며 당신이 어떤 단어를 쓰든 운으로 시작해서 필연성으로 끝난다. 태어난건 우연이라도 죽는 것은 필연이다. 신은 이성이고, 이성은 에너지고, 에너지는 집중력이다. 사건이 연결되면 하나로 모인다는 말이다. 신은 그 방법으로 인간에게서 에너지를 끌어낸다. 그것을 믿음이라 하든 사랑이라 하든 순결이라고 하든 상관없다. 정상에서 모두 만난다. 당신은 집중하여 에너지를 끌어올리는 방법을 알고 있다. 절에 가서 삼천 배 하든, 교회 가서 기도를 하든, 인도에 가서 요가를 하든 본질은 같다. 인간의 언어가 분주할 뿐 사건은 갈수록 명확하다. 신은 존재하는 것으로 제 역할을 다 하는 것이다. 등대는 거기에 있으면 된다. 북극성은 자리만 지키면 된다. 신이 왔다갔다 하며 인간을 헷갈리게 하면 좋지 않다. 신은 인간을 돕지 않는다.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돕도록 기회를 제공할 뿐이다. 가공할 신의 위력을 알고 싶다면 종이 한 장을 백 번 접어서 두께를 재보면 된다. 사건의 단계를 지나며 점점 커지는 힘을 믿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