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사슬은 한 줄로 이어져 있다. 일원론이다. 쇠사슬 한 마디는 두 개의 구멍으로 되어 있다. 이원론이다. 쇠사슬은 무수히 많은 마디로 되어 있다. 다원론이다. 나무는 한 개의 줄기로 서 있다. 일원론이다. 줄기에서 가지가 나와 둘로 갈라진다. 이원론이다. 무수히 많은 가지가 있다. 다원론이다. 존재의 엔진은 하나다. 의사결정의 갈림길은 둘이다. 외부환경은 여럿이다. 관점의 차이다. 관측자가 어느 지점을 바라보느냐다. 안을 보면 하나고, 밖을 보면 여럿이고, 안과 밖의 경계를 보면 둘이다. 자동차의 운전석은 하나고, 핸들을 꺾는 방향은 둘이고, 바깥 풍경은 여럿이다. 인간은 일원을 점유하고 이원으로 대응하며 다원을 바라본다. 각각의 관점에서는 일원론도 맞고, 이원론도 맞고, 다원론도 맞지만, 그게 장님코끼리 만지기다. 통제가능성으로 보면 일원론이다. 줄기를 베면 가지가 따라오지만 가지를 베면 줄기가 따라오지 않는다. 쇠사슬에 마디가 많지만 한 줄로 연결하지 않으면 쓸 수가 없다. 일원론 속에 이원론이 포함되고, 이원론 속에 다원론이 포함되는 것이다. 정답은 일원론이다. 이원론과 다원론은 사건의 일부를 본다. 그것은 으뜸 원元이 아니라 버금 차次다. 다多는 잡雜이다. 일원론, 이차론, 다잡론이 맞다. 숫자는 1로 시작된다. 언제나 1이 으뜸이다. 집은 하나이니 일원이고, 대문간은 좌우로 길이 갈라지니 이차이며, 골목은 언제나 다잡하다. 사건은 원인 1에서 시작하여 상호작용 2로 갈라지고 결과의 다로 복잡해진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원인의 1로 되돌려야 한다. 세상에는 일원의 꽁무니에 따라붙는 이차와 다잡이 있지만 거기에는 핸들이 없다. 사건은 일원의 원인에서 격발하여 이차의 상호작용을 거쳐 다잡의 결과에 이른다. 다원의 결과는 이미 게임이 끝난 상황이므로 이길 수 없다.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 하나의 팀은 일원이고, 공격수와 수비수는 이원이고, 받쳐주는 선수는 다원이다. 원팀을 이루고서야 시합에 나설 수 있다. 정답은 일원론이다. 우리는 주어진 여럿을 둘로 압축하고 다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이기느냐 지느냐다. 일원이 이긴다. 단 이원을 품은 일원이어야 한다. 다원을 품은 이원이어야 한다. 하나의 가정이 일원하면, 두 부부가 이원하고, 여러 자녀가 다원한다. 일은 일원에서 시작되고 이원의 의사결정을 거쳐 다원으로 종결한다. 사건의 시작은 언제나 일원이다. 일원이 먼저다. 게임의 주최측은 일원론이고, 선수단은 이원론이고, 관객은 다원론이다. 카지노는 일원이고, 돈을 따거나 잃는 것은 이원이고, 빌붙어서 먹고 사는 사람은 다원이다. 카지노를 장악해야 한다. 일원을 거치지 않은 이원은 언제나 역설에 빠진다. 의도와 반대로 된다. 얻고자 하면 잃고 잃고자 하면 얻는다. 자체 엔진이 없이 외력에 휘둘리기 때문이다. 자체 엔진을 갖추고 일원론에서 출발할 때 의도는 달성된다. 궁수가 활을 이겨야 화살이 사슴을 이긴다. 이원론은 거꾸로 사슴이 화살을 이기고 활이 궁수를 이기는 경우다. 그럴 수도 있다. 궁수의 실력이 형편없다면 말이다. 차가 운전자를 이기고 도로가 차를 이길 때도 있다. 음주운전을 한다면 말이다. 교통사고가 났다면 말이다. 그럴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 운전자는 차를 이길 때까지 핸들을 잡지 말아야 하며, 차는 도로를 이길 때까지 소비자에게 판매하지 말아야 한다. 살다보면 이원론적인 선택을 강요당할 때도 있고 다원론적인 상황도 경험하곤 하지만 그것은 대개 일이 글러먹은 경우다. 잘못된 것이다. 상대가 잘못되면 요행수로 이길 수도 있다. 그러나 요행수는 지식이 아니다. 공부를 안했는데 운으로 대학에 붙을 수도 있지만 그런 것을 바라고 학교에 다니는 것은 아니다. 플랫폼에 들어오는 기차 한 대는 일원론이다. 기차는 앞이나 뒤로 움직이는 이원론이다. 객차는 여러 대가 붙어 있는 다원론이다. 기관사인 당신이 가야할 자리는 하나의 기관차다. 승객이 가야할 자리는 다원의 객차다. 지식은 한 명의 기관사를 위한 것이다. 당신은 기관사라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공부할 이유가 없다. 지나가는 뜨내기 승객이라고? 꺼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