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어는 피를 보면 물어 뜯고 인간은 약점을 보면 칼을 휘두른다. 윤석열은 사람을 믿기 좋아하는 문재인의 약점을 본 것이다. 우파인 윤석열, 최재형을 믿고 좌파인 장하성과 시민단체 세력을 믿은 것은 문재인이 아마추어리즘을 들킨 것이다. 장하성과 시민단체 세력은 사람이기 때문에 쪽팔림을 알고 찌그러져 있고, 윤석열과 최재형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짐승의 이빨을 보이고 있다. 문재인은 왜 그랬을까? 주변에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원래 정치를 할 생각조차 없었다. 운명에 의해 소환된 것이다. 우리는 원래 소수파였다. 애초부터 열세를 안고 출발한 싸움이다. 한경오도 조중동도 우리 편이 아니다. 엘리트 집단 내부에서 노무현 세력은 1퍼센트 이하였고 문재인 시절에 와서 5퍼센트까지 확장했을 뿐이다. 장하성과 시민단체 세력은 용병 뛰고 전리품 챙겨간 것이다. 그동안 우리가 압도적으로 이기지 못했지만 소수파로 다수를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했다는 사실을 위안으로 삼아야 한다. 어쩌다가 우리가 권력의 중심에 서버렸는지를 생각하자. 20세기는 이념의 세기다. 21세기는 다른 것이다. 동서 양 진영의 냉전은 20세기 유물이다. 좌파든 우파든 20세기 유물로 싸우고 있다. 칼로 싸우는 좌파와 창으로 찌르는 우파가 격돌하는 가운데 총을 든 자가 나타났다. 소수였지만 강력했다. 구체적으로는 IT 산업의 생산력 혁신이다. 새로운 계급이 출현한 것이다. 열린 진보, 이기는 진보가 나타났다. 그들은 예전에 없던 별종이다. 그들은 1퍼센트로 출발하여 5퍼센트까지 성장했다. 쪽수가 딸려서 별수 없이 외부세력과 연대했다. 리스크를 안고 출발한 것이다.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한 번은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였다. 소주성은 원래 안 되는 거지만 표를 준 20대가 권력을 쥔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우리가 그들에게 무언가를 내줄 수 있다는 포지션에 서는 것이 중요하다. 정치는 경제원리를 따라갈 뿐이고 우리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다면 투표는 무슨 의미가 있나? 소주성은 권력이 내 손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정치적 제스처다. 달라고 하면 주는 시늉은 해야 한다. 권력이 유권자에게 있으니까. 시장원리가 작동하여 그것을 무효화 시키더라도 말이다. 그것이 정치의 동원하는 원리다. 어쨌든 칼자루는 게임의 주최측인 내가 쥐어야 한다. 내가 칼자루를 쥐었다는 사실을 공표하려면 빈 도마라도 내리쳐서 시끄럽게 소리를 내야 한다. 국민이 권력을 쥐는가, 기술자가 권력을 쥐는가? 무신의 난과 비슷한 법기술자의 난이다. 정치 허무주의를 촉발하고 있다. IT세력이 발언권을 얻은 이유는 외부로 뻗어나갈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런데 구글과 아마존이 장악하고 있다. 네이버와 다음은 외부진출을 포기한 모양이다. 내부는 교착된다. 한동안 우리에게 유리했던 축구장이 다시 원위치 된다. 내부는 50 대 50이 되고 외부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그 가능성 때문에 이겼고 충분히 외부로 뻗어나가지 못해서 졌다. 국내에서 하는 복지제도나, 최저임금이나, 기본소득은 표를 준 유권자에게 전리품을 분배하는 것에 불과하다. 한풀이 하고 기세를 올렸다. 똑똑한 놈이 기대만큼 똑똑하지 못하니 힘센 놈에게 눈길이 가는 것이다. 그놈이 깡패라서 탈이지만. 정치는 원래 이렇게 간다. 머리는 꼬리를 달고 가야 한다. 머리가 못해도 꼬리는 머리를 따라와야 한다. 머리가 앞에서 못했으니 이번에는 꼬리가 앞장을 서겠다고 하면 넌센스다. 우여곡절을 거쳐 다시 권력은 머리에게 돌아가게 되어 있다. 6월 29일이다. 그는 아마 노태우의 629가 부러웠던 게다. 당선되어봤자 노태우 신세가 뻔한데. 폭주 노인 하나를 막지 못하네. |
1% 에서 5% 확장한 것을 국민은 50% 얻은 것으로 착각해서 윤석열 같은 희대의 괴물을 탄생시켰습니다.
역대 최악이 대선후보를 계속 나아가게 만들 것이냐, 대선전에 끌어내릴 것이냐
국민의 수준에 달렸다고 봅니다. 대한민국이 용의 머리를 달고 갈 자격이 있는 수준인지
아니면 좀 더 고생해야 하는지. 윤석열이 당선이 아닌 윤석열의 후보완주 여부에 달렸다고 봅니다.
이런 수준의 사람이 출마하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