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말하지 않는 인생의 비밀
이거 귀한 이야기다. 이런 진짜배기 이야기는 세상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다. 듣고자 해서 나 역시 애타게 찾아다녔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더라. 답답해진 내가 스스로 이야기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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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인생 그 자체다. 오늘 하루를 살아야 하고, 내일도 하루를 살아가야 하며, 모레도 계속 살아가야 한다. 가시덤불 같은 길을 계속 헤쳐나가야 한다. 그것이 중요하다.
직접 얻는 것은 행복이다. 사람의 모든 행위는 행복이라는 초점에 맞추어져 있다. 그러나 실패한다. 왜? 행복은 성취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원인없는 결과는 없다. 그냥 주어지는 행복은 없다.
사람들은 조건을 정해놓고 그 조건에 도달하기만 하면 행복해진다고 믿는다. 복권만 당첨되면 행복해질거라고 믿는 식이다. 행복집이 있고 그 집에 입주해서 살기만 하면 된다는 식이다.
행복을 가능케 하는 물질적, 심리적 조건이 있다고 믿지만 실패다. 그것은 없다. 행복은 성취의 부산물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행복을 얻으려면 먼저 무언가 성취해야만 한다.
운동선수라면 챔피언메달을 성취해야 하고, 수험생이라면 합격증을 성취해야 한다. 그것을 손에 넣어야 행복해질 수 있다. 그런데 무엇을 성취할 것인가이다. 사랑이 전제되어야 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성취해야 한다. 원하는 것이 존재해야 한다. 그것이 사랑이다. 그러나 한국인 대다수는 전공과 무관한 일을 한다. 자신이 진정 원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 마지 못해서 일한다. 안정된 일자리를 얻어 고정적인 임금을 받으려고 원하지 않는 일을 한다. 사랑이 없으면 모든 것이 실패다. 그리고 그 사랑을 위해서는 자유가 있어야 한다.
음악가에게 그림을 그리라고 하고, 화가에게 연주하라고 한다면 곤란하다.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권리가 있어야 한다. 그 권리를 주는 것은 존엄이다. 인생의 성패는 최종적으로 존엄에 달려 있다.
존엄≫자유≫사랑≫성취≫행복의 순서다.
가장 중요한건 존엄이다. 존중받는 것이다. 노예는 존중받지 못한다. 개나 돼지도 존중받지 못한다. 존중받지 못하면 자유가 없다. 그러므로 노예에게 자유가 없으며 우리에 갇힌 개나 돼지에게도 자유가 없다.
존중받지 못하면 자유가 없고, 자유가 없으면 사랑이고 성취고 행복이고 아무 것도 없다. 모두 파괴되고 만다. 존중받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존중받고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 이 부분이 필자가 콕 찍어서 말하려는 인생의 비밀이다. 이 사회의 누구도 말해주지 않는 것. 우리는 충분히 존중받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
인천공항에서 택시를 타려면 일본인 행세를 해야 하는 수가 있다. 외국인에게 바가지를 씌우려는 택시기사들이 한국인 승객에게는 승차거부를 일삼는다. 내나라 내땅에서 한국인이 이등국민 취급을 받는다.
천안함의 진실도 오바마는 이미 알고있을지도 모른다. 아마 국군의 통신을 감청해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뻔히 알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한국인이 과연 한국에서 충분히 대접받고 있는가?
흑인은 피부색으로 차별당한다. 여성은 성차별을 당한다. 중고등학생은 강제로 유니폼을 입히고 머리카락을 잘린다.(이건 범죄 중에도 흉악범죄다. 엄청난 인권침해다. 자신이 선택해서 교칙을 그렇게 정한 학교를 갔다면 모르나 강제로 머리카락을 잘린다면 흑인노예보다 못한 취급을 당한 것이다.)
장애인도 차별을 받는다. 지역차별도 존재한다. 학벌에 따른 차별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차별은 대부분 알고 있다. 충분하지 않지만 지식인에 의해 계몽되고 있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
사적인 공간에서의 은밀한 차별이 문제다. 슬픈 것은 그 중에서는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다는 점이다. 하느님도 해결할 수 없는 차별이 있다. 특히 바보들은 매우 억울하다. 그들은 공공연하게 차별된다.
좀 아는 사람들은 바보들과의 대화를 꺼린다. 멀쩡히 말을 잘 하다가도 바보가 나타나면 입을 다물어 버린다. 그 중에서도 특히 바보 중에 상바보인 딴나라당 바보들은 아주 인간취급을 받지 못한다.
수구꼴통이라면 아예 쳐다봐주지도 않는다. 백안시라고 해서 그쪽 바보들은 말해줘도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런거 있다.
다양한 종류의 차별이 있다. 안생긴 사람도 차별을 당한다. 모임에서 초대받지 못한다. 나이트를 가도 부팅이 안 된다. 백수들도 차별당한다. 취업하고 난 다음에야 알던 이성친구들의 대접이 달라졌다는 사실로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공적공간에서의 공공연한 인종차별, 성차별, 장애인차별, 지역차별, 미성년자 학대를 사회가 비판하고 감시할 수 있지만, 이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며 사적공간에서는 더 많은 차별이 노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문제는 해결책이 없다는 데 있다. 안생긴 사람이 이성으로부터 데이트 신청을 거절당했다고 해서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다. 데이트를 거부한다고 검찰에다 고소장을 제출할 것인가? 다음 아고라 상담게시판에 올려봤자 비웃음이나 당할 뿐.
어떤 훌륭한 정치가라도 이 중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런 공약을 내놓지 않고, 어떤 잘나빠진 사회학자라도 이 중요한 대목에 이르러서는 아무런 학설도 주장하지 않는다. 그들은 모른체 한다. 그래서 인생이 힘들어졌다.
차별의 반대는 무엇인가? 존중이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결국 타인으로부터 존중받으려는 것이다. 겉으로 보면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는듯 하지만, 실제로는 존중받으려고 할 뿐이다.
예컨대 교회를 찾는 신앙인들도 그러하다. 겉으로는 천국에서의 행복을 바래서 십일조를 내고 주기도문을 외는듯 하지만, 실제로는 그곳에서는 배척당할 염려가 없기 때문에 안심하고 찾아가는 것이다.
안생겼다는 이유로, 백수라는 이유로, 고졸이라는 이유로 교회에서 몰아내는 일은 없다. 키가 작다는 이유로 루저로 몰리는 일은 적어도 교회나 사찰이나 성당에서는 전혀 없다. 그래서 교회가 번성한다.
까만 밤하늘을 수놓는 빨간 교회 십자가 행렬을 보라.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그 교회 십자가의 숫자만큼 이 사회에 차별과 배척과 편견이 존재한다. 교회지붕의 빨간 십자가는 차별당하는 약자의 신음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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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도, 사랑도, 성취도, 행복도 웃긴 소리다. 명성도 재물도 권세도 지푸라기와 같은 것이다. 그 모든 것은 차별당하고 배척당하는 약자의 울분과 그에 대한 보상에 불과하다. 아우성이며 몸부림이다.
그렇다! 인간은 돈이라는 형태의 비명을 지르고, 권세라는 이름의 몸부림을 치며, 명성이라는 이름의 아우성을 지른다. 그것은 상처다. 어떤 인간은 돈을 앞세워, 어떤 인간은 명성을 앞세워, 어떤 인간은 권세를 앞세워 호기롭게 허세를 피우지만 내겐 인간실존의 처절하고도 적나라한 현장으로 보일 뿐이다.
존중받으려면 세력을 얻어야 한다. 돈을 벌려고 하는 것도 존중받기 위해서다. 그러나 돈만 가지고는 충분히 존중받지 못한다. 설사 존중받는다 해도 몇 푼의 돈이 아쉬운 떨거지들에게나 존중받을 뿐이다.
정주영이 정치에 발을 들이민 것도 세력을 얻기 위해서다. 흥부가 아들을 스물넷이나 낳은 것도 세력을 얻기 위해서다. 인터넷 동호회에 가입하는 것도 세력에 가담하기 위해서다.
예술가나 문학가가 명성을 탐하는 것도 세력을 얻기 위해서다. 세력을 얻어서 세계의 중심으로 다가서려고 한다. 그것이 인간의 본능이고 삶의 진실이다. 당신은 얼마만큼 세상의 중심에 다가서 있는가? 부인할 수 없는 인간 삶의 진실이다. 누구라도 피해갈 수 없는 냉혹한 평가이다.
친구를 사귀든, 결혼을 하든, 동아리에 가입하든, 돈을 벌든, 라이선스를 따든 어떻게든 세력을 얻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대접을 받는다. 젊어서는 있는 세력에 가담해야 하고 나이 들어서는 그 세력의 중심으로 치고올라가야 한다. 그렇게 세상의 중심으로 다가서야 한다.
세력 안에서 중심으로 치고올라가거나, 변방에서 독립적인 세력을 만들거나, 이미 세력을 가진 사람과 친구가 되거나 뿐이다. 그 외에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이야기 탐탁치 않게 여기는 사람 많을 것이다. 그러나 진실이다.
물론 정당과 같이 인위적으로 조직된 세력이 능사는 아니다. 가담자가 많아질수록 의미는 엷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가 진보한다는 것의 본질이 누구든 창의력만 있으면 자신의 세력을 만들 수 있다는데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1000명의 독자를 가진 블로거라도 그러하다. 월든의 소로처럼 호숫가에 홀로 살아도, 로빈슨 표류기처럼 무인도에 고립되어 있어도 마음은 세상의 중심과 연결되어 있어야 오늘 하루를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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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차별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세력 대 개인의 문제인 경우가 많다. 남자는 직장이다 뭐다 해서 등산이며 낚시며 취미생활이다 뭐다 해서 세력을 이루고 있는 경우가 많고 여자는 아기를 키우느라 개인으로 고립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 문제를 남자와 여자의 문제로 보는 한 답은 나오지 않는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시도가 도리어 더 나쁜 결과를 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여성도 사회로 진출하여 세력을 이룸으로써 세력을 가진 남자와 대등해졌을때라야 해소된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갈등이 실제로는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니라 세력과 개인 사이에서의 갈등이다. 우리는 극소수의 질이 나쁜 사람이 문제를 일으킨다고 믿고 선한 독재자의 환상에 빠져 있지만 실제로는 세력과 개인이 공존할 경우 어떤 경우에도 상황은 나빠질 뿐이다.
막연히 기득권 세력을 해체한다고 해서 답은 나와주지 않는다. 노동자가 조합을 결성하여 세력화된 사용자의 횡포에 맞서듯이, 기존의 세력을 해체하는 방법만으로는 약하고 부단히 새로운 세력을 결성하여 대응함으로써 해소된다.
사회의 건강한 정도는 세력의 횡포가 있을 때 그에 맞서는 새로운 대안세력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결집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그 신흥세력이 새로이 결성되지 않고 낡은 세력이 장기집권 하는 사회라면 동맥경화에 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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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력인가? 세력이라는 표현은 표피적이다. 중요한건 다음 단계의 계획이 있는가이다. 우일신 할 수 있느냐이다. 방향성이 있느냐이다. 일관성이 있느냐이다.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가 있느냐이다.
그것을 얻으려면 일정한 방향성을 가져야 하며 외부에서 지속적으로 에너지가 공급되어야 하며 우일신 할 수 있어야 한다. 매일 매일 그날의 존재의미를 찾아야 한다. 그것을 얻을 때 인간은 존엄하며 세상으로부터 존중받는다. 그것을 얻을 때 세력이 만들어진다.
정리하면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지만 본말이 전도되어 있다. 행복은 말이고 본은 존엄이며 그 사이에 자유와 사랑과 성취라는 연결고리가 있다. 존엄은 존중받는 것이며 사회에서는 세력이라는 형태로 나타나지만 본질에서 그것은 진보하는 세상의 중심과 연결되어 있는가이다. 그 중심으로 다가서고 있는가이다. 우일신할 수 있느냐이다. 오늘 다음 내일의 계획이 있느냐이다. 지속가능한 다음 단계의 목표가 지속적으로 나와줄 수 있느냐이다.
천하의 마음이 움직일 때 내 마음도 함께 움직이고, 내 마음이 움직일 때 천하의 마음도 함께 움직이는 것, 그것이 최고의 경지다. 나머지는 개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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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간의 존엄과 가치. 이 말은 듣기만해도 가슴 깊이에서 울컥하고 찡하고 아리게 올라오는 것이 있소.
내 지금 여기 이 순간 이런 모습으로 서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지나간 역사 속에서 진보의 노를 숨가쁘게 저어 왔던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고 있소.
요즘 나의 어지럼증과 고민들은 '지속가능한 다음단계의 목표속에 우일신 할 수 있느냐'는 질문으로 압축될 수 있을 것 같소.
삶이 녹녹치 않은 것은 당연한 얘기일테고...
세상의 중심과 연결되는 굳건한 세력...............................
이거네.
우일신. 우일신. 우일신.
우이씨!
귀한 이야기요.
순서가 있다.
시종이 있다.
일관하는 이 있고, 일신하는 이들 있으니,
존엄한 지성 세력이 일어나, 다른 시대를 이끌 때가 되었나 보오.
새로운 학교가 나와줘야 하오.
존중하라.
좀 다른 얘기지만, 작년인가? 처음 옥천에서 구조론연구소 모임있었을 적에, 교육관련하여 이상우님과 얘기했던 대화내용 중에 현재 교육의 문제점이 학교이사단, 교직원, 교육관련공무원은 조직화 되어있는데, 학생, 학부모들은 조직이 되지 않아서 해결이 되질 않는다고 얘기했소. 교육의 생산자들이 소비자들을 철저하게 배제하는데서 문제가 해결될 리가 없소.
조선시대 이전에는 훈장이 서당과 그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사고까지 책임을 질 수 있었는데, 현재는 교사가 할 수 있는 범위가 극히 줄어들었소. 교사차원에서 한계, 교육행정차원에서 한계, 학교 이사단 차원에서 한계가 있소. 학생도 세력화 되어서 한마디하고, 학부모도 세력화 되어서 한마디 해야지 교육문제가 해결되오.
이때 학부모의 생각이 학생의 생각을 대신할 수 있다거나, 학생이 어리기 때문에 학부모나 교사가 대신해야 한다는 것은 대략 순진한 것이고(학생의 의견이 공공의 신뢰를 획득한 사례는 강의석군의 종교의 자유 1인시위와 촛불시위를 비롯해 무수히 많소), 학생이라는 거대 조직이 학생을 대변해주는 똑똑한 어른(교육문제전문가 혹은 변호사)을 고용할 수 있어야지 세력 대 새력으로서 뭔가 대화가 통하게 된다는 결론이오. 이것은 밸런스의 문제.
내가 오래전에 생각한 교육문제해결능력을 주변사람들 한테 얘기를 하였으나, 대부분 받아들이질 못하였소. 이것은 수준의 문제. (이상우님과는 통하였소. 오해는 마시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