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박물관에 갔을 때 일이다. 다뉴세문경이 전시되어 있는데 단체관람 온 고등학생들이 지나가며 한 마디씩 한다. ‘뭐야? 청동거울이 뭐 이래? 얼굴을 비추어 볼 수가 없잖아.’ 농담인줄 알았는데 다들 그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다들 거울의 뒷면을 보고 헛소리를 하고 있었다. 왜 뒤집어볼 생각을 못하는가? 거울인데 얼굴이 비추어지지 않으면 당연히 뒷면이 아닌가? 이걸 꼭 말해줘야 아는가? 보시다시피 거울 앞면에는 아무 것도 없다.
구리거울은 녹쓸기 때문에 닦아줘야 한다. 거울을 닦으면 손의 압박에 의해 거울 뒷면의 무늬가 떠오른다. 앞면에 뒷면의 글자나 무늬가 흐릿하게 보인다. 이것을 차단할 의도로 세문을 새긴다. 다뉴는 끈을 꿰는 구멍이다.
깨달음은 세상을 바라보는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확 바꾸어야 한다. 그런데 바꾸었는가? 당신이 여태 거울 뒷면을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확 바꾸었는가? 그런 것 같지가 않다. 여전히 뒷면을 보고 투덜댄다. 가구라면 내가 제일 모르는줄 알았는데(필자가 가구에 관심이 있을 리 없잖은가?) 저보다 모르는 사람이 많다는건 충격적이다. 모르는건 그렇다치고 중요한건 우리편인가이다. 계속 뒷면을 보겠다면 우리편이 아니다. 깨달음은 개인의 닦음에 의해 얻어지지 않는다. 소승적인 수양은 필요없다. 집단의 방향성에 묻어가는 것이다. 6인의 사무라이들을 따라간 농부 키쿠치요처럼 아무것도 모르면서 따라가다가 졸지에 돈오하는 것이다. 실용성을 주장한다면 이 사이트에 올 이유가 없다. 여성들은 하루에 30분을 화장에 투입한다. 실용적이지 못하다. 투자대비 이익이 없다. 심이어 하리수는 손톱 다듬는데만 4시간을 투자한다고. 그런 짓을 왜 해? 제가 여러분께 주문하는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완전히 바꾸라는 것이다. 가구는 소비가 아니라 투자다. 왜 자꾸만 차를 마시려고 하는가? 끽다거! 마시면 쫓겨난다. 가구는 쓰는게 아니고 옷은 입는게 아니다. 츄리닝이 편한 옷이지만 불편하게도 넥타이 매고 양복입고 출근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왜 편한 몸빼를 버리고 불편한 코르셋을 조이는가? 하이힐은 21세기의 코르셋이다. 버리지 못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여러분은 왜 잠옷차림으로 출근하지 않는가? 여름에는 날도 더운데 홀랑 벗고 올누드로 출근하는 것은 어떤가? 다 이유가 있다. 인간은 원래 불편을 감수하는 존재다. 옷은 그 자체로 의사소통의 수단이다. 털없는 원숭이가 짐승을 졸업하고 인간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개인의 상승이 아니다. 원숭이가 아무리 잘 나도 원숭이다. 깨달은 원숭이는 그냥 원숭이다. 다를 것이 있는가? 깨달으면 원숭이가 인간되나? 털없는 원숭이가 돈오하여 원숭이를 졸업하고 인간이 된 것은 집단지능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문명 덕분이다. 그것은 개인의 상승이 아니라 집단적 상승이다. 구원은 오직 집단적 구원만이 있을 뿐이다. 만인이 구원되지 않으면 아무도 구원되지 않은 것이다. 부자와 빈자가 공존한다는가 하는 일은 없다. 본질에서는 모두가 빈자다. 승자와 패자가 공존한다든가 하는 일은 없다. 본질에서는 모두가 패자다. 인류가 문명을 이룬 것은 모두의 구원이며, 문명이 누군가의 독점물이면 그것은 문명이 아니라 야만이다. 노예제도가 있는 나라에서 온 왕자라도 민주화된 이웃나라에서 보면 그 자는 왕자가 아니라 노예다. 중국에는 좋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는게 아니고 다 중국인이다. 그들은 자유민이 아니다. 우리보다 신분이 낮다. 영화 300에는 서구인이 아시아를 보는 시선이 반영되어 있다. 절대 대등하게 보지 않는다. 아시아인 중에 박근혜, 김정은 두 명이 노예의 신분이므로 모두 노예로 본다. 그것이 문명의 본질이다. 닭 중에 어떤 닭이 뛰어나다고 특별히 사람으로 쳐주겠는가? 그래봤자 닭은 닭이다. 절대 사람 못 된다. 김기덕 감독 이야기를 하면 이해하는 듯 한데 영화관객의 입장이 아니라 감독의 입장에서 보라고 백번쯤 말해도 소비자 입장에서 본다. 일기 쓸 때는 ‘나는 오늘’을 배제하라고 백번쯤 말해도 나를 개입시킨다. 누가 당신 입장 물어봤느냐고? 왜 자기 이야기를 하는가? 필자가 핀란드 가구나 명품가방, 메이커 있는 옷 따위를 소유할 리가 없지 않은가? 미쳤나? 깨달음은 무조건 생산자 입장에서 말해야 한다. 누가 점 하나 찍어서 17억 벌었다면 우리는 점 백개 찍어서 1700억 벌자는 생각을 해야 한다. 핀란드 가구가 뜬다면 우리는 더 좋은 것을 만들어야 한다. 핀란드 가구의 아이디어는 상당히 일본의 젠 스타일에서 건너간 것이다. 그 젠 스타일도 상당부분 이우환 화백이 17억짜리 점 하나 찍어서 만든 것이다. 요즘 뜬다는 일본가구 ‘무지’도 이우환 화백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핀란드 가구가 남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일 수 있었다. 일본인들이 가구를 못만들 때 우리가 잽싸게 더 좋은 것을 만들어서 더 비싼 값을 받을 생각을 왜 못하는가? 싸이가 10억뷰를 돌파한 시대에 우리도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충분히 할 수 있다. 건축, 가구, 회화, 패션, 화장은 모두 연동되어 있다. 화장품은 한국이 알아주는 편이다. 적어도 아시아에서는. 한국 여성들이 유별나게 화장에 미쳐있기 때문이다. 좋은 현상이다. 하리수가 손톱 소제만 4시간 한 덕분이다. 우리는 하리수에게 감사해야 한다. 더 나아가 건축, 가구, 회화, 패션 모두 우리가 주도해야 한다. 왜 못하는가? 이우환 화백의 ‘조응’ 가격 17억이 비싸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170억도 싼 가격인데 말이다. 바보냐? 비싸게 부를수록 이익이다. 뉴스에 가끔 등장하는 제일 비싼 산삼 한 뿌리 5천만원, 제일 비싼 황소 한 마리 5천만원, 제일 비싼 참치 한 마리 3억 뭐 이런거 있는데 보통 농장 하는 형님이 소를 팔고 식당 하는 아우가 소를 산다. 물론 돈은 형님이 낸다. 자기가 팔고 자기가 산다. 신문에 가끔 나는 산삼가격을 진짜로 믿는 바보가 있나? 그거 산 사람이 판 사람이다. 이런건 일본에서 유행일 듯 한데 한국도 아마 비슷한거 많을거다. 어떻게 보면 부동산 가격도 다 자기가 팔고 자기가 사는 자전거래거고. 가격은 비쌀수록 좋은 거다. 어차피 위조지폐 발행하는 건데. 미국이 양적완화 하는 것도 대놓고 위조지폐 찍어내는 거고. 그거 모르나? ◎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 가격은 얼마가 적당한가? 정답 - 비쌀수록 좋다. 확대해석하자면 아이폰 디자인도 이우환 화백의 점 하나에서 나온건데 아이폰이나 맥북은 비싸도 군말없이 사들이면서 그 아이디어의 저작권 원본은 왜 무시하느냐 말이다. 비싼 것이 정상이고 비싸야 이득이다. 왜 북유럽가구의 비싼 가격을 보고 가슴 벅찬 희망을 품지 못하는가 말이다. 세상에 눈 먼 돈이 널렸다는 소식에 서부의 골드러시 소문을 들은것처럼 부푼 가슴이 되어야 하는게 당연한거 아닌가 말이다. 답은 뻔하다. 투자가 아닌 소비의 관점을 가졌기 때문이다. 세상을 보는 각도를 180도로 바꾸라. 이건 필자가 누누이 이야기하는 바다. 당연히 투자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 당연히 영화감독 관점에서 봐야 한다. 김연아가 피겨를 하는데 ‘저건 틀렸지’ 하니까 ‘너는 김연아 만큼이나 하나?’하고 받아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과는 대화를 하지 말아야 한다. 왜 나를 개입시키나? 우리는 집단지능을 건설하고 있다. 우리의 사업이다. 김연아의 피겨는 김연아의 것이고 그것을 소재로 삼아 한국인의 아이큐를 올리는 것은 우리의 역할이다. ‘너는 김연아만큼 타면서 비판해라.’ 이건 자기를 개입시킨 것이며 이때는 ‘누가 물어봤냐?’로 막아야 한다. 왜 너와 나를 개입시키지? 끽다거랬더니 그 차를 낼름 마시는 사람과는 대화를 할 수 없다. 누가 당신한테 그런 말 했냐? 끽다거! 내가 한 말도 아니고 너에게 한 말도 아니며 지금 우리가 마주한 이 장면의 주제요 타이틀이 끽다거다. 모르겠는가? 부디 이르노니 일기를 쓸 때는 ‘나는 오늘~’을 쓰지 말라. 자기 마음을 들이대지 말라. 나는도 말고 너는도 말라. 우리의 공동작업은 한국인 아이큐 올리기다. 세계인의 아이큐 올리기다. 핀란드 가구는 아이큐를 올린다. 한국여성의 지나친 화장은 한국 여성의 아이큐를 올린다. 패션감각은 프랑스의 아이큐를 올렸다. 그래서 일은 독일이 하고 돈은 프랑스가 가져간다. 생산력은 독일이 프랑스의 두 배인데 국민소득은 비슷하다. 독일인의 근면성을 부러워말고 프랑스인의 바캉스를 본받으라. 북유럽 사람이 똑똑한건 가구가 좋기 때문이다. 이태리인들이 경제위기를 만난 것은 멍청한 이태리가구를 쓰기 때문이다. 그런 가구 쓰는 사람과는 얼굴도 마주치지 말라. 가구로 공간을 약탈하는 사람은 피하라. 가구로 공간을 죽이는 자는 공공의 적이다. 아는 사람은 공간을 비운다. 심지어 도배도 안 한다. 시멘트 벽을 그대로 노출시킨다. 가구는 구석에 조그만 것을 가져다 놓는다 그것도 앉으라는 것은 아니다. 그곳에 멈추라는 표시로 가져다 둔 것이지 그 의자에 앉으라는 것이 아니다. 그 차를 마시지 말라. 그 의자에 앉지 말라. 그 공간을 탐내야 진짜다. 그 공간에 손님이 찾아오게 유혹해야 진짜다. 공간의 매력이 진짜다. 이우환 화백이 점 하나 찍고 크게 비워둔 것은 점을 그린게 아니고 공간을 그린 것이다. 아이폰이 버튼을 하나로 몰아버린 것은 공간을 조성해 둔 것이다. 그 둘은 본질에서 같다. 모르겠는가? 세상을 바라보는 각도를 바꾸라. 필자는 늘 같은 질문을 내고 정답도 늘 같은 것인데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건 슬픈 것이다. 어떻게 집이나 가구나 패션이나 화장에 전혀 관심이 없는 필자보다 모를 수 있다는 말인가? 방향을 틀어 우리편에 가담하라는 거다. 그 물건을 사들이라는게 아니고 인류의 아이큐를 높이는 우리편에 가담하라는 말이다. 이태리 가구 쓰면 뇌 썩는건 확실하다. 뽕짝 부르면 뇌 썩는건 확실하다. 뽕짝 좋다. 그런데 뇌가 썩는다. 좋은건 좋은게 아니다. 설탕이 좋다고 계속 먹나? 초컬릿이 달다고 계속 먹나? 위장이 썩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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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얘기. 위 고딩들은 좀 나은 단계.
첫단계는 전시물이 거울이라고 했음에도 '그냥 저렇게 생겼나 보다' 하고 그냥 넘어감. 거울 개념이 아예 없음.
둘째 단계가 '거울인데 표면이 매끄럽지 않네'. 거울의 개념은 있으나 한쪽면만 바라봄.
셋째 단계가 '거울인데, 왜 표면이 저렇지? 아, 반대편이구나.'
첫단계는 중딩 국사시간의 나.
둘째 단계는 고딩때의 나.
셋째가 대학 들어가서 과외하다가 애들 국사책 보면서 문득 '거울 면이 왜 저렇게 거칠까' 생각하다 보니,
아하 이건 뒷면이라서 !!
생각없이 바라만 보는 단계에서 생각하고 바라보나 반전을 생각하지 못하는 단계로, 나아가 반전을 알아차리는 단계로. 그 다음 거울을 바라보는 나를 배제시키는 단계로 간다.
세상을 바라보는 입장은
나를 배제한 생산자의 관점, 인류구원의 관점으로 !
자꾸만 되돌아가는 고개를
화살은 이미 쏘아졌다고 되뇌며 잡아가고 있습니다.
몇 년 전에 홍대앞 어느 유명하다는 튀김집에 갔는데 어떤 아주 기분나쁘게 생긴 색희가 츄리닝을 아래위-_-로 입고 007가방(!?)을 들고 애인을 데불고(꼴에 애인씩이나!) 온 것을 보고 아주 기분이 나뻤던 적이 있소.
지금도 그넘의 고추 있는 부분이 볼록-_- 튀어나왔던 몰골이 기억이 나오.
당시 엄청 불쾌하면서도 확실한 이유를 몰랐는데 김동렬 선생의 이 글을 읽고 보니 확실히 알겠소.
그 색희는 그따우 옷을 입고 공공장소에 옴으로써 주변인 모두를 모욕하고 있었던 것이오.
그 녀석이 요번에 ㅂㄱㅎ 찍었을 거라는데 5,000원 걸 용의가 있소
아닐 수도 있소.
실험정신이 왕성한 젊은이일지도.
부대껴봐야 아는 거죠.
글 감사합니다. ^^
소비자 입장이 아닌 투자자 입장에서 봐라~~
구조론 행자 입장에서 비슷한 것을 많이 생각합니다
경제정책을 볼때 "공급측면이 아닌 수요측면을 봐라"
아들 교육시킬때 "독자입장이 아닌 동등한 작가입장에서 봐라"
남의 창작물을 볼때 "감동을 받지말고 영감을 얻어라"
구조론 대열에 한 5년간 있었더니 저절로 깨달아지는 생각들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새로운 글을 보면 머리를 치는 것이 많으니,
아무래도 구조론 대열에 묻어가야 하는 수준인가 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