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뉴세문경은 뒷면 아니면 앞면이다. ◎ 광속은 무한 아니면 유한이다. ◎ 그림은 의미 아니면 맥락이다. ◎ 가구는 이태리 아니면 핀란드다. ◎ 그림은 아카데미즘 아니면 인상주의다. ◎ 만화는 극화 아니면 병맛이다. ◎ 영화는 텍스트 아니면 이미지다. ◎ 노래는 뽕짝 아니면 K팝이다. ◎ 음악은 고전주의 아니면 낭만주의다. ◎ 푸코의 진자는 적도 아니면 북극이다. 필자를 황당하게 하는 것은 ‘그림이 어렵다’고 말하는 것이다. 도무지 무엇이 어렵다는 거지? 의미를 알 수 없다고? ‘그림에 의미는 없다.’고 말하면 ‘의미없는 의미를 찾자니 더욱 어렵다’는 식으로 나온다.
말문이 막힌다. 어깃장인가? 왜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하지? 왜 그림에 의미가 있어야 하지? 의미를 전하려면 글로 쓰지 왜 그림을 그려? 옛날엔 글자를 몰라서 의미를 그렸지만.
옛날 민화처럼 불로장수를 빌고, 가정화목을 빌고, 과거급제를 비는 그림, 의미가 있는 그림은 그림이 아니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그땐 글자를 몰라서 그렇게 했던 거고. 이젠 세상이 바뀌었다.
이런 그림은 글자를 모르는 시대의 그림이다. 이런 식의 옛날 그림은 화단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사라졌다.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컬러영화 시대에 흑백영화가 사라지듯이 사라진 것이다.
이건 현대의 그림이다. 확고한 자기 포지션이 있다. 눈은 눈의 위치가 있고 손은 손의 위치가 있다. 그 위치는 절대적이다. 포지션은 상호작용의 포지션이다. 그림 안의 의미는 없고 그림 바깥의 상호작용할 맥락은 있다.
이 그림이 진짜인 이유는 패션과 가구와 건축과 사상과 문화와 영화와 음악과 상호작용하기 때문이다. 그 세상과 상호작용 하는 분명한 자기 위치가 있는 것이다. 세상과의 상호작용이라는 본질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상호작용하는 만큼 살아있다. 살아있지 않으면 죽은 것이며, 죽은 그림은 더 이상 그림이 아니다. 지금 시대에 뽕짝은 널리 세계와 상호작용하지 않으므로 죽은 음악이다. 흑백영화처럼 잊혀지고 만다. 버려야 한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지은 한시는 우리시도 아니고 중국시도 아니기에 사라진다. 일제강점기 총독부의 업적은 우리의 업적도 아니고 일본의 업적도 아니기에 영원히 지워진다. 완전히 소거된다. 왜? 국적없는 가짜니까.
적당히 타협하고 얼버무릴 생각은 버려야 한다. 이런 것도 있고 저런 것도 있는거 아니냐는 식으로 눙치고 넘어간다면 곤란하다. 그런 소리는 수구꼴통들이나 하는 소리다. 글 배운 선비라면 태도가 분명해야 한다.
다뉴세문경은 뒷면이 아니면 앞면이다. 뒷면에는 얼굴이 비쳐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뒤집어야 한다. 거울을 뒤집어볼 생각은 아니하고 ‘뭔가 말못할 거시기하는 머시기 사정이 있겠지.’ 하는 식으로 얼버무리면 곤란하다.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아인슈타인이 특별한 천재는 아니다. 단지 배짱이 있었을 뿐이다. 아인슈타인은 물리학자도 아니었고 수학자도 아니었다. 대학원 시험에서 떨어져서 통계청에서 일하다가, 남들이 거울 뒷면을 보면서 웅성거리고 있는 것을 보고 슬그머니 뒤집은 거다.
필자가 주문하는 바는, 용기있게 거울을 뒤집으라는 거다. 앞에 예시한 다뉴세문경, 광속, 그림, 가구, 음악, 만화, 영화, 노래는 모두 ‘이게 아니면 저거다’의 상대성이다. 아인슈타인은 바로 이 법칙을 적용하였다. 극한테스트다.
극지에서는 중간지대가 사라진다. YES 아니면 NO다. 전쟁이 일어나면 적군 아니면 아군이다. 결단을 내릴 수 있다. 거울을 뒤집을 수 있다. 왜 아인슈타인은 거울을 뒤집었는가? 남이 안 하니까 한 거다. 쉽게 풀렸다. 진공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아무 것도 없다면 거짓말이고 진공이 있다. 거기에 무엇이 있기에 진공인 것이다. 무엇이 있나? 기본적으로 중력파(?)가 있다. 만약 그것이 없다면 진공조차도 없게 된다. 진공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진공’이 있는 것이다. 무엇인가? 상호작용의 대상이 있다는 말이다. 빛이 진공을 가로질러 간다면 빛은 진공과 상호작용한다. 그렇다면 빛의 사정은 아니고 그것은 진공의 사정이다.
이는 필자가 ‘이게 아니면 저거다’를 적용하 것이다. 필자가 중학생때 생각한 거다. 숫자 0과 같다. 아무것도 없다면 아무것도 없음이 있다. 상호작용이 가능하면 무언가 있는 것이며 없으면 없다고도 말할 수 없다.
빛의 속도가 얼마일까 하는 생각은 유치하다. 진공의 속도는 얼마일까를 생각해야 한다. 진공의 온도는 영하 270도다. 빛의 속도는 진공의 온도(상호작용 총량)가 결정한다. 대략 이렇게 보는게 맞다.
고속도로는 시속 120킬로고, 국도는 60킬로, 학교앞은 30킬로다. 그것은 자동차의 사정이 아니고 도로의 사정이다. 광속이 일정한 것은 고속도로 탓이지 자동차 탓이 아니다. 이게 아니면 저거다. 자동차탓 아니면 도로탓이다. 진공에서는 깃털이나 사과나 일정한 속도로 떨어진다. 깃털은 느리게 떨어지고 사과는 빠르게 떨어져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왜 일정한 속도로 떨어질까? 간단하다. 진공에서 깃털과 사과는 떨어지지 않았다. 분명히 말한다. 아인슈타인은 지구가 태양을 도는게 아니라 공간이 휘었다고 말했다. 같은 원리로 깃털이나 사과가 떨어지는게 아니라 진공이 떨어진다. 아니면 깃털과 사과가 같은 속도로 떨어질 리가 없잖은가? 강물에 나무토막을 던졌다. 그 강물은 낙동강이고 던진 지점은 안동댐 밑이다. 그 나무토막이 상주, 달성, 남지, 삼랑진 지나 물금에 도착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그것은 나무토막의 속도일까 강물의 속도일까? 정답 - 강물의 속도다. 파리 한 마리가 KTX를 타고 부산까지 갔다면 그 속도는 파리의 속도인가 KTX의 속도인가? 나무토막은 부산을 방문하지 않았다. 파리는 KTX를 타고 여행하지 않았다. 나무토막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파리도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강물의 속도이고 KTX의 속도이다. 갈릴레이가 깃털과 사과를 동시에 떨어뜨렸다. 같은 속도로 떨어졌다. 그렇다면? 사과는 떨어지지 않았다. 깃털도 떨어지지 않았다. 지구는 태양을 돌지 않았다. 진공이 떨어졌다. 진공이 태양을 돌았다. 떨어진 것은 진공온도 영하 270도다. 그것은 무엇인가? 상호작용이다. 빛의 속도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다양하게 관측했는데 여러가지 다양한 값이 아니라 한 가지 일정한 값이 나왔다. 이상하다. 왜 깃털과 사과가 같은 속도로 떨어지지? 왜 일정한 값이 나오지? 간단하다. 다뉴세문경을 뒤집어야 한다. 깃털은 떨어지지 않았다. 시간은 없다. 공간도 없다. 없는 것을 없다고 말해야 한다. 인상주의 이전의 그림은 그림이 아니다. 아닌걸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이태리가구와 핀란드 가구는 공존할 수 없다. 하나를 버려야 한다. 이태리 가구는 가구가 아니다. 야구공을 던졌다. 배트를 휘둘렀다. 야구공이 배트에 맞고 외야까지 날아간 이유는? 전자기력 때문이다. 자연계의 모든 운동은 전자기력에 의해 설명된다. 야구공 때문도 아니고 배트 때문도 아니고 야구공을 구성하는 분자의 전자기력과 배트를 구성하는 분자들 사이의 전자기력이 서로 밀어내는 반발력 때문이다. 이게 과학이다. 과학은 중간과정을 모두 소거하고 본질을 본다. 전자기력 하나로 전부 설명해야 한다. 그렇다면?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의 지점에서 광속이 달라야 하는데도 일정하게 관측되었다면 공간과 시간이 휘어졌다고 말하는게 아인슈타인 어법이다. 이건 발상의 전환이다. 아인슈타인은 문법을 바꾸었다. 판단기준을 바꾼 것이다. 관측된 값은 같다. 숫자는 그대로다. 시간과 공간은 휘어지지 않는다. 없는게 어떻게 휘어지나? 시간은 없고 공간도 없다. 아인슈타인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단어의 뜻을 바꾼 것이다. 낙동강에 던진 나무토막이 부산까지 가면 그것을 나무토막의 속도가 아닌 강물의 속도로 봐야 한다. 아인슈타인은 나무토막이라는 단어가 있던 위치에 강물이라는 단어를 집어넣은 것이다. 단어를 바꾸었다. 관점을 바꾸었다. 세상을 바꾸었다. 깨달음은 이와 같다. 언어를 바꾼다. 관점을 바꾼다. 세상을 바꾼다. 시간과 공간이 휘어질 리가 없다. 진공의 흐름이 휘어진 것이다. 진공의 온도가 다른 것이다. 진공의 온도를 상호작용 총량으로 본다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은 상호작용 총량이 변한 것이고, 광속이 일정한 것은 상호작용 총량이 일정한 것이다. 진공에 중력파가 가득차 있다면 광자와 중력자(?)와의 상호작용 총량이 일정한 것이다. 시간이 일정하다는 것은 시계바늘이 일정하게 움직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계바늘은 상호작용하기 때문이다. 즉 시계추는 왼쪽과 오른쪽을 왔다갔다 하기 때문에 왼쪽으로 빨리가면 그만큼 오른쪽으로 빨리와야 한다. 변화가 상쇄되어 제자리걸음을 하게 된다. 빛이 광속 이상을 가속하면 제자리걸음을 하게 된다. 자동차가 빨리달릴수록 바퀴가 지면에 미끄러지기 때문이다. 자동차는 시속 500킬로 이상을 달릴 수 없다. 그 이상을 달리면 지면과의 마찰력이 사라지기 때문에 자동차가 날아서 비행기가 된다. 물론 실제로는 기술자의 영역이므로 마찰력이 세고 열에 강한 특수타이어를 제작한다면 500킬로 이상도 달릴 수 있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일정한 한계가 있다. 모든 상호작용의 영역에는 이런 식의 절대성이 있다. 그 지점에서 모든 2는 1로 환원된다. 그러므로 2는 없고 1은 있다. 2를 1로 바꾸어 전모를 한번에 보는 것이 깨달음이다. 선한 정도와 악한 정도 둘을 판단하는게 아니라 선악비 하나로 판단하기다. 그 지점에서 2원론은 깨지고 1원론으로 되돌아간다. 양반이 상놈을 차별한다. 2원론이다. 상놈이 양반의 밥에 몰래 침을 뱉는다. 양반만 손해다. 다시 1로 되돌아간다. 절대로 차별할 수 없게 되는 지점이 있다. 세상에는 이런 것도 있고 저런 것도 있는게 아니다. 진보도 있고 보수도 있는게 아니다. 이태리가구도 있고 핀란드가구도 있는게 아니다. 레미제라블에서 자베르의 마지막 대사처럼 자베르는 장발장과 공존할 수 없다. 선비라면 당당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 제논의 궤변과 같다. 발이 빠른 아킬레스는 한걸음 앞선 거북이를 추월할 수 없다. 쏜 화살은 날아가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주 안에 전진은 없다. 전진이 없으므로 자리바꿈이 있다. 화살은 과녁으로 날아간 것이 아니라 과녁과 자리를 바꾼 것이다. 빛은 진공 속을 날아가지 않는다. 자리를 바꿀 뿐이다. 자리를 바꾸는 속도는 정해져 있다. 진자의 등시성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빨리 가면 빨리 와야 하므로 제자리걸음이 된다. 초속 30만킬로를 넘는 속도는 모두 제자리걸음이 된다. 그 제자리걸음을 질량이라고 한다. 광속은 빛이 영하 270도의 우주온도와 자리바꾸는 속도다. 필자가 주문하는 것은 세계관을 완전히 바꾸라는 것이다. 박찬호의 성적이 부진한 이유는? 전자기력 때문이다. 김병현이 재기하는 이유는? 전자기력 때문이다. 다 전자기력 때문이다. 과학자가 그렇다면 그런거다. 세상은 하나의 이유로 통짜덩어리로 한꺼번에 설명되어야 한다. 떨어지는 깃털은 떨어지지 않는다. 실제로는 진공이 지구중심으로 흐른다. 쏜 화살은 날아가지 않는다는 법칙 때문이다. 우주온도 영하270도가 떨어진다. 진공이 날아간다. 우주온도 영하 270도가 날아간다. 상호작용 총량이 결정한다. 아인슈타인은 수학자도 아니고 물리학자도 아니고 단지 통계청 직원이었기 때문에 용기를 내서 아닌 것을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거울을 뒤집을 수 있었다. 이태리가구를 던져버릴 수 있었다. 당신이라고 뒤집지 못하란 법이 있는가? 상식적으로 지구가 태양을 돌 리가 없지 않은가? 깃털이 떨어질 리가 없지 않은가? 파리가 부산까지 갈 리가 없지 않은가? 복잡한건 몰아서 한넘에게 독박을 씌워야한다. 그게 과학이다. 우주 안의 모든 자연현상은 전자기력 때문이고(통일장이론에 의해 나머지 부분은 모두 전자기력으로 통일된다.) 광속은 상호작용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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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작용, 세계관, 통짜덩어리, 세계관, 용기
나와 상호작용 하는 부분들 - 상담심리학, 대화법 책들, 초등교사 커뮤니티, 학교 직원들, 아이들, 아내.
그리고 구조론 모임.
지향하는 바는 인간에 의하여 인간다운 세상을 만든다. 단기적으로는 내가 근무하고 있는 학교변화,
장기적으로는 학교 변화 모델 전파로 도시 빈민지역 학교 변화하기.
학교가 변하려면 뜻있는 교사주도의 콘텐츠를 마련하여 주도하고, 학부모들의 세력규합, 지역사회 단체의 협력.
나의 장점 - 겁이 없다. 어떤 곳이 좋은 곳이라면 혼자서라도 간다. 누구라도 부딪힌다.
학교가 생쥐라면, 나와 상호작용하는 대부분은 기차, 구조론이 철도.
갈때까지 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