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은 과학이다. 이렇게 말하면 반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과학을 모르기 때문이다. 과학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과학을 어려워 할 필요는 없다. ‘A면 B다.’ 이것이 과학이다. 그렇다. ‘A면 B다.’는 규칙이 들어있으면 곧 과학이고 미학인 것이다. 결국 미학을 논한다는 것은 ‘A면 B다.’를 논한다는 것이다. 어떤 그림이든 그것이 있으면 가치가 있고 그것이 없으면 가치없다. 위 작품은 화장지 두루마리를 다 쓰고 남은 심으로 다양한 얼굴표정을 연출하고 있다. 무엇을 느끼는가? 표정이 재미있다? 그래서 아름답다? 과연 아름다운가? 예쁘고 곱고 귀엽고 아름다운 표정은 아니지 않는가? 아니 그래도 아름답다고? 그렇다면 아름답다는건 뭐지? 뭐가 아름다운 거지? 바로 그렇다. 아름답다는 것은 ‘A면 B다.’의 규칙이 장착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있어서 아름다운 것이다. 우리의 눈길을 끈다. 신선한 충격을 준다. 아이디어를 준다. 영감을 준다. 쾌감을 준다. 향기를 더한다. 아우라가 있다. 두고두고 인상에 남는다. 벅차오르는 충일감이 있다. 전율함이 있다. 똑떨어지는 무언가 있다. 문자향 서권기 있다. 무엇인가? ‘A면 B다.’ -≫ 종이가 두꺼우면 다양한 표정이 연출된다. 왜 두루마리 화장지 심인가? 작가는 적당한 두께, 적당한 강도, 적당한 형태 그러므로 최적화된 소재를 찾아낸 것이다. 사람 얼굴에 가까운. 그렇다. 얼굴은 뼈 위에 살가죽이 씌워져 있다. 그 가죽은 적당한 두께를 가지고 있다. 점토로 부족하고, 통가죽으로도 부족하다. 두꺼운 종이가 그 뻣뻣함으로 하여 얼굴의 뼈 역할을 하고 그 부드러움으로 하여 가죽 역할도 겸한다. 얼굴보다 더 얼굴같다. 얼굴 표정을 부각시키기에 적당하다. 무엇인가? 미학의 본질은? 간단하다. 선이 굵은 그림이어야 한다. 여기서 ‘선이 굵다’는 것은 ‘배우가 선이 굵은 연기를 한다’고 할 때의 그 선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선 두께만으로 판단해도 대충 7~80퍼센트 들어맞는다. 그러므로 대략 3초 안에 작품의 수준을 판단할 수 있다. 척 보고 안다. 선이 굵다는 거. 선이 굵은 배우, 선이 굵은 영화, 선이 굵은 애니메이션도 있다. 심지어 선이 굵은 연주, 선이 굵은 투자, 선이 굵은 발레, 선이 굵은 도시도 있다. 검색해 보면 다 나온다. 이중섭, 고흐, 마티스, 피카소, 박수근, 김홍도 이 양반들 다 굵은 선으로 재미 본 사람들이다. 고행석과 허영만은 선이 굵고 이현세는 상대적으로 선이 가늘다. 김홍도는 선이 굵고 신윤복이 김홍도 보다 선이 가늘다. ### 만화들을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만화를 고를 때 선의 굵기만 보고 골라도 70퍼센트 이상의 높은 확률로 좋은 만화를 고를 수 있다.(글, 그림이 다를 수 있다는 점에 유의. 글, 그림이 같고 문하생이 아니라 본인이 직접 그렸다면 90프로 이상 맞다.) 재미없는 만화의 특징이 있다. 눈동자 전체를 크고 까맣게 칠한다거나, 코 옆부분을 선이 아닌 면으로 처리하거나, 이유없이 칼라를 많이 쓰거나(그것도 주로 어두운 갈색을 쓴다.) 주인공 얼굴을 모자쓴 넘, 긴 생머리, 파마머리, 주먹코, 노랑머리, 대머리, 안경잽이 등 겉으로 드러나는 외관상의 특징으로 설정하는 만화는 일단 재미없다. 이유없이 주인공을 털보나 외국인 얼굴로 그리는 경우 재미없다. 특히 이현세처럼 여자 얼굴을 못그리는 만화는 재미없다. (여자얼굴이 똑같아서 머리색깔로 구분한다. 여자 등장인물이 적다. 가끔 안경잽이 하나 추가된다.)
필자가 보는 선이 굵은 만화(위)와 필자가 보지 않는 선이 가는 만화들(아래) (선의 굵기가 일정하거나 좌우대칭이 지나치거나, 표정이 도식적이거나, 기하학적으로 그린 것도 일치와 연동의 과학성이 반영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선이 가는 것으로 친다.)
전형적으로 선이 가는 만화들.. 참혹하다. 아이디어는 좋은데 그것을 표현해지 못해서 쩔쩔매는 작가의 마음이 전달되어 올 때 같이 울어주고 싶다. (선이 가는 만화의 특징 중 하나는 눈의 정확한 좌우대칭이다.)
선이 굵은 비타민의 멜랑꼴리는 자기표절이 난무하는 불성실한 만화이지만, 그래서 안티가 많지만 기본적으로 표정이 재미있으므로 독자가 많다. 이철의 사분요리는 무척 성실할 뿐 아니라 아이디어도 기특하지만 얼굴이 기하학이라서 4컷 이상 나가주지 못한다. 그래서 사분요리가 되었다.(눈동자가 보는 방향이 없다. 그래서 눈이 정확한 좌우대칭이다.)
눈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조석 마음의소리.. 뻔한 소재가 반복되지만 재미가 있다. 그의 전매특허인 6각형 눈은 다른 만화가들에게도 전파되고 있다. 그림체가 받쳐주지 않으면 절대 그릴 수 없는 만화다.
자람의 빨강고양이는 필자가 최고로 꼽는 만화, 양영순의 선이 굵은 그림체를 처음 보았을 때 만큼이나 탄성을 질렀다. 이 만화는 수준이 높은데 그림체가 받쳐주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하다. (눈동자의 움직임에 따라 입의 위치가 달라진다. 연동된다. 그러므로 선이 굵다. 입이 눈을 따라가므로.) ### 왜 선이 가는 만화는 재미가 없을까? 선이 ‘굵다/가늘다’는 말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흔히 ‘선이 굵은 연기’라고 한다. 무엇인가? 연동된다는 뜻이다. 앞에서 두루마리 화장지 심의 두꺼운 종이로 다양한 표정을 연출한 예와 같다. 선이 굵으면 서로 연동된다. ‘A면 B다.’의 법칙이 성립한다는 거다. 작가 자신이 주장하는 조형적 질서가 작품에 내재해 있다는 거다. 선이 굵다는 것은 코와 귀와 눈과 턱과 뺨이 하나의 줄기에 꿰어져 있어서 그 중 하나가 움직이면 전체가 동시에 반응한다는 의미다. 하나가 변하면 전체가 변한다. 그 하나는 무엇인가? 그래서 과학이다. 그러므로 미학이다. 특히 선이 가는 만화는 섬세한 표정을 나타내지 못하므로 내용이 인물의 내부적인 심리를 따라가지 않고 외형적인 사건을 따라가게 된다. 심리묘사가 안되므로 일단 재미없다. 작가에게 아이디어가 있어도 그 아이디어를 표현할 수단이 없다. 무엇인가? 중요한 것은 사물에 표정이 존재하며 인간이 그 표정을 흉내내는 방법으로 타인의 감정을 읽는다는 것이다. 웃음은 전염된다. 웃는 얼굴을 보면 자기도 모르게 따라웃게 되며, 드러내어 웃지 않더라도 마음 속으로 웃게 되며 그러한 모방을 통하여 인간은 타인의 감정을 읽고 사물의 본질을 포착하는 것이다. 무생물이라도 마찬가지다. 자연에도 표정이 있다. 틀거리가 있다. 줄기와 가지가 있다. 본류와 지류가 있다. 연동되어 있다. 굵은 선 역할을 하는 그 무엇이 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그것을 읽는다. 모딜리아니의 눈동자 없는 여인이 말하는 것은 이 여인이 바깥의 어떤 사물을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거다. 여인은 자기 내부를 들여다보고 있는 거다. 작가는 여인의 마음을 그린 거다. 남녀의 뇌가 다르다. 뇌과학에 의하면 여자어린이는 주로 수평적인 눈높이에서 사람과 꽃과 집을 밝은 색으로 그린다. 남자어린이는 주로 공중에서 내려다 본 눈높이에서 자동차나 로켓 따위 움직이는 것을 그린다. 이 패턴은 정형화, 도식화 되어 있다. 호르몬의 이상에 의해 여자아이임에도 불구하고 남자아이의 뇌를 가져서 남자아이의 그림을 그리는 경우도 있다. 대부분의 만화가가 그렇다. 남자만화가일 경우 남자 그림체를, 여자만화가일 경우 여자그림체로 그린다. 그 규칙을 보기 좋게 뛰어넘는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특히 남자만화가의 경우 남자 얼굴은 다양하게 그리지만 여자얼굴은 도식적으로 그린다. 그 이유는 특히 유년기에 여자어린이의 표정을 마음속으로 따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흉내내지 않기 때문이다. 인종적으로도 그렇다. 백인은 백인의 표정을 잘 읽고, 동양인이나 흑인의 표정을 무뚝뚝하게 받아들인다. 동양인은 흑인이나 백인은 항상 같은 표정을 짓는다고 여긴다. 다른 인종의 얼굴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한국인들은 아랍인의 얼굴은 다 형제처럼 닮았다고 생각하고, 아랍인은 ‘한국인들은 왜 얼굴이 다 똑같니?’ 하고 물어온다. 자신과 다르면 표정을 덜 흉내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얼굴이 다르다는 사실 그 자체가 인식의 표지가 되어 그리로 주의가 쏠리기 때문이다. 남녀 간에도 얼굴이 닮은 사람끼리 잘 친해지는 경향이 있다는 통계가 있다. 닮은 사람끼리 표정을 잘 읽는다. 의사가 잘 통한다. 미학은 이러한 도식을 깨는 것이다. 도식이 있기 때문에 그 도식에 갇혀있지 말고 그 도식을 넘어서야 한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이를 위해서는 만물의 연동되어 있음을 파악해야 한다. ‘A면 B다.’의 과학성을 파악해야 한다. 이것이 이렇게 되면 저것은 저렇게 되어야 한다는 논리다. 음식에는 맛이 들어있어야 한다. 맛이 없으면 양념을 써서 맛을 내야 한다. 마찬가지로 그림에는 ‘굵은 선’이 들어있어야 한다. 물론 선을 쓰지 않고도 선을 드러낼 수 있다. 선은 두 사물의 접점이다. ‘접점의 문제’를 해결하는 다양한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일치와 연동을 드러내면 그것이 곧 굵은 선이다. 음식에 맛이 있어야 하듯 반드시 그것이 있어야 한다. 자동차가 있으면 도로도 있고 신호등도 있어야 한다. 연동되어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코가 이쪽으로 가면 눈은 저쪽으로 가는 공식이 있다. 그것을 잘 드러내는 것이 선이 굵은 그림이다. 이중섭의 소는 통째로 굵은 선이다. 뼈와 살이 연동되고, 머리와 꼬리가 연동되고, 앞다리와 뒷다리가 연동되고, 소의 기운과 소의 걸음걸이가 연동되고, 소의 마음과 관객의 마음이 연동된다. 세상 모두가 한 줄에 꿰어져 있음을 알게 한다. 그럴 때 인간은 기쁨을 느낀다. 신선한 쾌감을 느낀다. 그 안에 과학이 있다. 굵은 선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톱 포지션에 있다. 그곳을 차지하면 모든 것을 얻고 그곳을 차지하지 못하면 실패만 계속될 뿐이다. 선을 굵게 했기 때문에 좋은 그림이 된 것이 아니라 눈동자의 움직임에 따라 입모양이 변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표현하려 하기 때문에 선이 굵어진 것이다. 자연을 관찰하여 전체를 한 줄에 꿰는 그 무엇을 알아채고 그 얽혀있는 그물의 벼리를 잡아당길 때 갈피들이 딸려오면서 선이 굵어지는 것이다. 그것을 포착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미학이고 과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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