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요즘 나의 심사가 곱지 않다. ‘구조론이 어렵다’는 문제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이거 풀어야 한다. 구조라는 것은 실마리를 잡고 줄줄 따라가다 보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저절로 다 풀리게 되어 있으므로 구조인데 어렵다면 난감하다. 그것은 실마리를 못잡았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화두를 들고 명상한다. 왜? 화두가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화두 혹은 선문답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건 간단한 아이디어에 불과하다. 그것이 아름답다. 쾌감을 준다. 통쾌하다. 남악 회양의 ‘이 뭣고?’ 참 근사하다. 모든 단서를 막아버린다. 자연히 데카르트의 제 1원인으로 관심을 유도한다. 거기에 정상의 풍모가 있다. 쾌감을 느낀다. 궁금한 것은 내가 그런 만큼 다른 사람들도 그런가이다. 화두에 관심없는 사람들은 그렇다치고.. 화두에 관심이 있는, 그래서 화두를 드는, 명상하는 사람들은 어떨까? 정상에서 작은 눈덩이를 굴리면 기슭에서 눈사태가 일어난다. 그들도 나처럼 그런 쾌감을 느낄까? ‘이 뭣고?’가 멋진 것은 그곳이 정상이기 때문이다. 나는 경주 남산을 500번 이상 올랐고 그때마다 정상에서 시원한 바람을 맛보았고 때문에 화두를 들 때 그런 쾌감을 느낀다. 남들도 그럴까? 문제는 그렇지 않다는 거다. 화두는 실마리다. 실마리를 잡으면 줄줄 풀린다. 꼬리에 꼬리를 문다. 정상에서 눈을 굴리면 거침없이 굴러간다. 점점 커진다. 그런데 그 표정이 아니다. 표정들이 그렇지 않다. 나는 그들의 얼굴에서 어떤 쾌감도, 술술 풀린다는 느낌도, 꼬리에 꼬리를 문다는 느낌도, 실마리를 잡았다는 느낌도, 정상에서의 풍경을 즐기는 모습도 발견하지 못했다. 대개 실이 엉켜버린 표정이었다. 화두나 선문답은 그 자체로 톡톡 튀는 아이디어다. 그 아이디어에서 상큼함을 맛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왜 그 화두라는 것을 붙잡고 있는 것일까? 재미도 없는데 왜? 돌았나? 그런 짓을 왜 해? 골똘히 생각하는 이유는 그것이 즐겁기 때문이다. 나는 ‘바’라는 화두를 스스로 만들었다. 이 한 마디에 모든 것이 들어있다. 바는 소(所)다. 소는 장소다. 장소는 위치다. 위치는 포지션이다. 구조론은 포지션 게임이다. 톱 포지션을 잡는 사람이 이긴다. 아는 바 없다고 말한다. 바는 추상적인 공간이다. 그때 나는 ‘바’라는 글자 안에 우주가 통째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손자 군쟁편 풍림화산(風林火山)의 기개.. 질풍처럼 내달리고, 숲처럼 고요하고, 불타듯이 맹렬하고, 태산처럼 의연한 경지가 그곳에 있다.(故其疾如風, 其徐如林, 侵掠如火, 不動如山) 그때 나는 스스로 정한 ‘바(所)’ 자에 전념하고 있었다. 서울 신정동 까치산에서 슬슬 걸어서 수원 세마대 찍고, 송탄, 평택, 천안삼거리 지나 똑바로 동쪽으로 청주 상당산성까지 쉬지 않고 걸었다. 땡볕에 잠시 쉴 수도 없는, 숨막힐 것 같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생각들의 향연. 내가 계속 걸었던 이유는 가슴 떨리는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도무지 가만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학승들이 선방에 가만이 앉아 명상한다는 것은 솔직히 이해되지 않는다. 가만이 궁둥이를 붙이고 있을 정도라면, 흥분하지 않았다는 건데 어떻게 쉬지 않고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게 말이 되나? 질풍처럼 내달리지 않고 불타듯이 맹렬하지 않으면 그것은 진짜가 아닌 것이다. 물론 숲처럼 고요하고 태산처럼 의연할 때도 있으나. 한 자리에 가만이 앉아 몇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는 것은 내게 흔한 일이었다. ‘바’는 장소이지만 공간의 장소가 아니라 추상의 포지션이다. 바를 알면 구조를 다 아는 것이다. 국수가락처럼 한 줄에 다 따라나온다. 링컨의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에서 of, by, for가 바다. 포지션을 지정한다는 거다. 어원을 우리말로 옮기면 ‘옆, 바로, 앞’이다. 옆은 붙어 하나, 바로는 직접, 앞은 높으니까 위한다는 거다. ‘국민하나가, 국민직접, 국민위하여’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people은 빼버리고 of, by, for만 놓아도 의미는 살아있다. 국민으로 하나되고 국민으로 바로되고 국민앞으로 되면 그게 민주주의다. 이렇게 압축해 가다보면 정상의 이뭣고에 도달한다. 구조란 그렇게 of, by, for만 남겨놓고 나머지 단어들을 지워버린 것이다. 그 지점에서 글자는 그림으로 비약한다. 텍스트는 이미지로 발전한다. 머리 속에 하나(of)가 그려지고 바로(by) 연결시켜, 앞으로(for) 놓는 모양이 그려진다. 흩어진 개인을 모아 하나로 합쳐서, 다이렉트로 연결하여, 앞에 세우면 그게 민주주의다. 이건 그림이다. 북한 남한 전라도 경상도 여자 남자 쪼개면 of가 훼손되고 조중동 뉴라이트 끼어들면 by가 훼손된다. 강남 기득권 재벌 나서고 국회의원 나서면 for가 훼손된다. 그림이 깨지는 거다. 입체적 모형이 깨지는 거다. 그냥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하여로 읊조리면 속일 수 있지만 그림은 속이지 못한다. 텍스트는 속여도 이미지는 못속인다. 텍스트는 쪼개져 있지만 이미지는 붙어있기 때문이다. 옆(사실은 몸체.. 영어로 옆은 허리, 허리는 몸이다.)과 바로(다이렉트로 이어져 있다는 뜻)와 앞(높다는 뜻)은 한덩어리다. 이렇게 생각을 쭉 이어가다 보면 걸음을 멈출 수 없다. 화두, 선문답이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그림이 나와주기 때문이다. 국어사전 5만 단어가 바 한 글자 안에 모두 들어간다는 느낌.. 어찌 오르가즘이 없겠는가? 달마실 게시판에 그림을 퍼나르는 이유도 단지 재미있기 때문인데 가끔 그림을 텍스트로 해석하는 분이 있으면 당황스럽다. 그건 재미없는 방식인데. 잊지 말아야 한다. 원래 그림에서 글자가 나왔다. 나는 명상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건 저절로 되는 건데 작심하고 한다면 이미 틀린게 아닌가? 구조가 어렵다고 한다. 시계 바늘이 저절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한다. 이미 태엽이 감기지 않았다면 어쩔 것인가? 원래부터 충전되어 있어야 하는거 아닌가? 열정이, 치열함이, 분노가, 포지션이.. 괴로워서, 슬퍼서, 힘들어서, 숨막혀서.. 이건 진짜 아닌 거다. 괴로우면 술마시고, 슬프면 개그콘서트 보고, 힘들면 쉬고, 숨막히면 여행을 가야지. 즐겁지 않다면, 뇌가 간질간질하지 않는다면, 흥분되지 않는다면, 정상에서의 짜릿함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매혹되지 않는다면, 술술 풀리지 않는다면, 통쾌함이 없다면 중독되지 않았다면 할말없다. ### 구조를 깨닫는다는 것은 소실점을 간파하는 것과 같다. 구조론이 어렵다면 결국 의사소통의 문제인 거다. 내가 오프라인에서 강원을 열고 직접 대면한 상태에서 가르치면 쉽게 이해할지도 모른다. 초등학생 때 소실점 이론을 1분만에 알아먹었다. 완전히 이해했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단원 김홍도 역시 소실점이론(사면측량화법)을 배웠고 그의 책거리 그림에 반영되어 있는데 약간 틀렸다는 거다. 그는 잘못 배운 것이다. 소실점은 누구라도 1분만에 배울 수 있는 간단한 지식인데 왜 조선시대 화가들은 300년 동안 줄기차게 배우고도 제대로 깨닫지 못했을까? 뭔가 의사소통의 장벽이 있는 것이다. 소실점이 단지 관찰자의 시점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소실점의 진짜 의미는 그림을 객관화, 과학화 한다는 데 있다. 즉 관찰자의 시점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점으로 하나의 기준을 삼고 그 기준에 연동시켜 통일성을 갖춘다는 것이며 이는 거기에 대응되는 조형의 세계, 그림 안의 세계, 화폭에 담겨진 세계 그 자체의 구조 역시 통일성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이는 조선시대 군담소설로 비유하여 설명될 수 있다. 원래 소설은 누구 목격자가 있고 그 목격자가 어디서 보거나 들은 즉 ‘카더라통신’에서 시작된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로부터 이 규칙이 깨져서 전지적 작가 시점이 도입된다. 이것이 최초 문학에서의 소실점 발견이다. 전지적 작가시점이 도입되면 소설의 이야기 그 자체도 전지적 구조를 가져야 한다. 전지적 작가 시점이 도입된 이후의 근대소설과 군담형식의 고소설은 구조가 완전히 다르다. 성격이 180도로 달라지는 것이다. 차이는 명백한 것이다. 조선시대의 숙영낭자전, 전우치전, 따위 군담소설은 가상의 목격자를 설정하기 때문에 전지적일 수 없고 그 때문에 명백히 상상력과 표현의 제한을 갖게 된다. 작가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목격자에 포지션을 두게되므로 목격이 가능한 부분만을 표현하게 되고 따라서 스토리가 주인공의 동선을 따라가게 되므로 서술과 묘사의 여지가 없다. 화자가 알 수 없는 부분은 배제되어야 하니까. 글의 수준이 낮은지는 금방 알 수 있다. 특히 자전적인 글은 글이 '인물의 동선을 따라간다'는 것이 딱 보이기 때문이다. 늘 하는 말이지만 누구든 3분만 대화해보면 90프로 파악된다. 수준은 속일 수 없다. 초등학생 일기는 명백히 동선을 따라가는 것이다. 서술과 묘사가 없다. 서술과 묘사가 없기 때문에 글감이 없어져서 일기쓰기에 애를 먹는다. 특히 ‘나는 오늘’로 시작해버리면 글감의 90프로가 배척된다. ‘나는 오늘 학교갔다>집에갔다>놀이터갔다>학원갔다’. 이런 식이면 말이다. 작중 화자인 ‘나’의 움직이는 동선 바깥에 있는 사정은 일기에서 배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객관화 해야 한다. 나의 바깥으로 성큼 걸어나와서 객관화 하지 않으면 조금도 발전할 수 없다. 작가의 시점이 있고 그 시점에 갇혀버리는 것이다. 문제는 그 시점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를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는 오늘’을 지우지 않으면 그림일기에 해를 지우지 않으면 그 시점의 존재를 발견할 수 없다. 물론 그 시점의 존재를 이미 발견했다면 해를 그려도 상관없다. 문제는 일기가 보고서가 된다는 점이다. 그림도 보고서가 된다. 작가는 보고자의 입장에서 목격하고 들은 것을 증언하는 형태로 그리게 된다. 즉 그림이 텍스트가 되는 것이다. 이미 소실점을 발견했다는 서구의 그림도 실제로는 소실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은 품격이 있다. 아테네학당이라면 수많은 인물이 등장하지만 다 자기가 봐야 할 곳을 바라보고 있다. 인물의 시선에 신경썼다는 거다. 이후 그림이 퇴보해서 등장인물이 다들 다른 곳을 바라보게 된다. 다들 경직되고 뻣뻣해졌다. 왜 갈수록 그림이 퇴보하는가? 점점 뻣뻣해진 것은 큰 문제다. 그럴수록 통일성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19세기까지 서구에서도 소실점을 진정으로 이해한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21세기인 지금 소실점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한 사람이 지구에 몇이나 있을까? 르네상스 이후 서구의 그림은 명백히 근대소설에서 군담소설로 퇴행했다. 세잔과 마네와 쿠르베가 되살리기 전까지. 리얼리즘이라고 하지만 리얼은 ‘사실’이 아니라 과학이다. 과학은 결국 통일성(소실점)의 과학이다. 그것은 전지적 작가 시점을 획득하는 문제다. 목격자의 시점에서 본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자연이 제 스스로 존재하는 자연 그 자체의 내재한 질서를 따라가는 것이 진짜 리얼리즘이다. 그것이 과학성이다. 사과를 그린다면 사과가 내눈에 이렇게 보였다는 보고서가 아니어야 한다. 사과 자신이 스스로 이렇게 스스로 존재했다(세잔의 형태나 마네의 빛이나 쿠르베의 사실)를 그려야 진짜다. 이건 전지적 시점을 얻어야 획득되는 것이다. 내가 하느님이다 하는 관점을 터득하지 않으면 절대 도달할 수 없다. 이순신의 난중일기는 훨씬 수준이 높다. 왜일까? 그건 누구에게 보여주는 이야기가 아니므로 동선을 따라갈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일기는 자신을 위해 쓰는 것인데 실제로는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형식으로 쓰게 된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남에게 보여주는 그림을 그리게 된다. 가짜다. 그림 그 자체의 주장에 귀기울이지 못하게 된다. 그림을 사주는 고객의 입장을 고려하는 즉 가짜가 된다. 보고서가 된다. 흔히 자유방임교육이 창의성을 향상시킨다고 믿지만 그렇지 않다. 격이 높은 그림을 무수히 보지 않으면 본능적으로 수준이하의 그림을 그리게 된다. 자신의 관점을 보지 못하면 그 관점을 깨지도 못하는 것이다. 자기도 모르게 그림의 의도와 목적, 그림을 평가하는 사람의 시선에 갇혀버린다. 결국 보고서가 된다. 이건 본능이기 때문에 극복하려면 훈련해야 한다. 관점 발견하기와 관점깨기는 훈련되어야 한다. 예컨대 시를 쓴다면서 자기 안에 떠오른 감상을 그대로 주워섬기는 경우가 많은데 최악이다. 반드시 객관화 하는 절차를 거쳐야 시가 된다. 과학성이 반영되어야 하는 것이다. 모든 예술이 그러하다.
‘그 소리 들으니 슬프다’.. 이건 시가 아니다. 미묘한 차이가 있다. 내가 슬프냐 소리가 슬프냐의 차이다. 내가 슬프다면 시가 아니라 보고서다. 소리가 슬프다면 과학이다. 그는 적어도 소리의 세계를 탐구해 본 사람임이 틀림없다. 어떤 분이 미국의 유명 디자인 학교에 갔더니 90프로가 게이더라는 말이 있는데 사실인지 모르겠으나 게이들이 더 그 분야에 소질을 보인다고 한다. 여성이나 남성이라는 포지션이 창의력을 제한한다. 자신이 어떤 포지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우치지 못하면 포지션을 향상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실제로 네이버 만화들의 그림체를 비교해보면 작가가 남자인가 여자인가에 따라 확연히 그림체가 다르다. 왜 만화가의 성별에 따라 그림체가 달라질까? 그것이 단순히 취향의 차이일까? 아니다. 취향의 차이도 있겠지만 결국 포지션에 갇혀버리는 것이다. 그걸 깨지 않으면 결코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없다. 초등학생에게 아무런 규제없이 자유롭게 그려라고 하면 모두 보고서 형식으로 획일적으로 그린다. 자신이 획일성 속에 갇혀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이들에게 좋은 그림을 많이 보여줘야 반응이 있다. 본 만큼 아는 것이다. 그리든 쓰던 자연과 인간 두 세계가 만나는 것이다. 내 안에 시선이 있고 심이 있듯이 자연 안에도 시선이 있고 심이 있는 것이다. 자연의 것을 관객에 전하는 중간자 입장에 서면 결코 자연의 심을 발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연동의 법칙에 지배되기 때문이다. 자연이 톱포지션을 차지해 버렸기 때문에 자신은 그 자연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하위포지션을 차지한 결과로 자연에 연동되어 구속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껍질을 깨고 날아오르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자연을 바라볼 때 자연도 나를 바라본다. 그 자연의 눈을 포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소실점을 발견하라는 말은 그 나를 바라보는 자연의 눈을 깨달으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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