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읽기
read 14470 vote 1 2003.12.24 (17:30:02)

‘어떤 책을 읽는 것이 좋을까요?’

이런 질문을 받을 때 마다 나는 당황스럽다. 백범일지, 전태일평전, 이상의 날개, 생떽쥐뻬리의 어린 왕자,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스탕달의 적과 흑, 톨스토이 민화집. 조지 오웰의 파리와 런던에서의 영락시절.. 등을 거론해 보지만 이들 책이 다른 책들 보다 더 우월하다는 근거는 없다. 단지 10대 후반에 읽은 책들이어서 내게 인상적이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 포토만평』..꿈은 이루어질 뻔 한다? 또한 좋으실대로..

읽어야 할 책은 많다. 어렸을 때는 한 10년 동안 무인도에서 갖혀서 세상의 책이란 책은 다 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게 그럴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한 때는 온종일 서점에 죽 치고 앉아서 얌체독서를 하기도 했지만, 방랑생활을 하느라 실제로 책 읽을 시간은 거의 없는 편이었다. 돈 주고 책을 사 읽을 형편도 되지 않았고 이상한 거부감 때문에 도서관에도 가지 않았다.

내게 있어서 책은 ‘읽는다’는 개념보다는 ‘발굴한다’는 개념에 가까운 것이었다. 백과사전류, 전집류, 총류 코너에 있는 책이 주된 관심의 대상이었다. 문고본은 엑기스만 모아놓고 있으므로 당연히 섭렵해야 한다. 그러다보니 특정한 책을 정독하기 보다는 많은 책들을 대충 훑어야 했다.

그 시절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내가 한번 쯤 손을 대지 않은 책이 없다시피 하지만, 제대로 읽은 책도 기억나지 않는다. 방랑을 하게 되면서 읽기 보다는 생각하기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그 시절 특별히 주의를 끈 분야가 있다면 자연과, 환경과, 생물과, 우주에 관한 것이다. 일반인들을 위해 쉽게 풀이한 교양학술서적이나 사진이 많이 들어가 있는 과학상식백과류의 책들 말이다.

이런 책들은 특별히 유명하지도 않으므로 이름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책 이름과 저자를 들어 그 책들을 추천할 수는 없다. 더 중요한 문제는 그런 책들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열심히 읽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읽었다기 보다는 ‘샅샅이 뒤졌다’고 보아야 한다.

그것은 지하의 유물을 탐사하는 것과 같다. 보물찾기를 하는 것과 같다. 구석구석을 탐사하고 속속들이 섭렵했지만 그 내용을 머리 속에 속속 집어넣지는 않았다. 나는 그렇게 광범위한 분야를 섭렵하며 무언가를 열심히 수색한 것이다.

세상 어딘가에 어떤 완전한 것이 있다. 그것이 자연이든, 혹은 우주이든, 혹은 생물이든, 또는 신이든, 또는 과학이든 .. 그 어떤 ‘완전한 것’에서 우선 안심을 얻을 수 있고, 평화를 얻고 자신감을 얻게 되는 것이며.. 거기서 얻은 '손해볼거 없다'는, 혹은 '더 나빠질 이유는 없다'는 확신 덕분에 정치나 사회에서도 혹은 역사에 있어서도 마음 놓고 전진할 수 있는 것이다.

철학이나, 정치나, 사회나, 문화나 역사에 너무 매몰되면 오히려 중심을 잃게 된다. 확신을 잃고, 자부심을 잃고, 약해지는 것이다. 정치는 새옹지마다. 선이 악이 되는가 하면, 복이 굴러서 화가 되고, 승리가 반전되어 패배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거기에 매몰되어서 안된다.

북두칠성이 항상 제 자리를 지키고 있듯이, 저 하늘이 늘 푸르듯이, 태산이 의연하듯이, 태양이 아무리 빛을 낭비하고 있어도 그 밝음이 조금도 훼손되지 않듯이.. 자연과 우주와 진리에 대한 관심이 나를 지탱해주는 근원의 힘이 아닌가 한다.

저자의 이름을 기억할 필요도 없고 타이틀도 알 수 없는 무명의 책이지만.. 나는 뜻도 모르면서 수학책을 보거나.. 의미도 알지 못하면서 경제원론을 읽거나.. 내용을 기억하지도 않으면서 건축공학책을 보거나.. 혹은 각종 기기장치의 작동원리에 관한 설명을 해놓은.. 서점 한 귀퉁이에 먼지 뒤집어 쓰고 있는.. 아무도 읽지 않은 그런 책들에서 가장 많은 것들을 얻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지퍼’는 누가 언제 어떻게 발명했을까? 증기기관차의 압력조절 장치는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 것일까? 자이로스코프의 작동원리는? 자동차의 차동장치가 균형을 잡아주는 원리는? 로타리엔진이 실린더 엔진에 밀리는 이유는? 스털링엔진의 비밀은? 이런 것들 말이다.

사실 이런 책들은 타인에게 권하기 어렵다. 재미라고는 없기 때문이다. 카센터를 할 사람도 아닌데 자동차의 구조와 원리에 대해 쓴 책을 권할 이유는 없다. 나 자신부터 그런 책을 열심히 찾아다니기는 했지만 사실은 ‘열심히 읽었다’기 보다는 ‘부지런히 뒤적거렸다’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

하지만 그런 책들이 나의 주의를 끌었고, 내용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모험가가 무인도에서 보물을 발굴하듯이.. 혹은 고고학자가 유물을 발굴하듯이.. 서점 한 귀퉁이에서 깨알 같은 활자로 씌어진 문고본 더미들에서 먼지 뒤집어 쓰고 있는 그런 책들을 열심히 수색하고는 했다.

간혹 보물을 건지기도 한다. 곰팡이가 자란 김찬삼의 여행기나 혹은 이름 없는 누드크로키 강좌나 혹은 무슨 비행기의 역사나 .. 뜻 밖의 횡재가 되는 이런 책들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은 이루 다 형언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봤자 그림만 대충 보고 말았지만.

거기서 무언가를 배우고 느낀 것은 아니다. 다만 내 관심의 분야가.. 내 인식의 지평이 약간 더 확대되었을 뿐이다. 아마추어 햄을 하는 사람이 미지의 사람과 통신 한 다음, 교신증의 엽서를 주고 받듯이.. 이 세상 광대한 지식의 영역 곳곳에 내 작은 흔적을 남겨두는 기쁨이 있는 것이다.  

기기장치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 확실한 진리들에서.. 어떤 환경의 변화에도 굴하지 않는 힘을 얻을 수 있었다고 본다. 정치, 철학, 사회, 문화, 문학, 역사들의 지식도 물론 중요하지만 거기에는 참과 거짓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 오히려 용기를 잃고 진정성을 잃고 마음이 흐려질 위험이 있다.

자연과, 과학과, 기기와, 수학과, 물리와, 우주와, 생명과 신에게서 나는 가장 많은 것을 얻었다. 그 내용을 일일이 기억하고 이해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어떤 확실한 판단기준의 존재가 나를 지켜주는 가치관의 수호신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파이터가 벽을 등지고 서듯이.. 나는 그러한 분명하고, 확실하고, 엄정한, 절대의 진리들에 의지하려 했던 것이다. 배후가 걱정되지 않으므로 마음껏 전진할 수 있다. 앞만 보고 달려가기 위해서.


정치에 매몰되어서 안된다. 결코 정치를 100으로 놓고 판단해서 안된다. 그대 정치에 집착하면 정치에 배반당할 것이다. 정치는 언제나 새옹지마다. 선이 악이 되는가 하면, 복이 굴러서 화가 되고, 승리가 반전되어 패배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그대 정치에 집착해서 안된다.

세상에는 옳거나 그르다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맞다와 틀리다도 있고, 있다와 없다도 있고, 같다와 다르다도 있다.

‘맞다/틀리다’는 어떤 척도를 두고 하는 말이다. '같다/다르다'는 척도가 없이 통째로 대질하는 것이며, '옳다/그르다'는 그 이전의 원인과 그 사후의 결과까지 감안해서 하는 말이다. '있다/없다'는 애초에 발언권이 있거나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대의 말이 훌륭하기는 하지만, 그대는 애초에 발언권이 없으므로 그대의 정당한 주장은 기각될 것이다. 그대의 말이 맞기는 하지만 그 척도는 유효기간이 어제까지였으므로 그대의 맞는 말은 배척될 것이다. 물론 그대의 생각이 옳기는 하지만, 지금 이시점에서는 현실적 적용이 이르므로 그대의 옳은 말은 일정기간 수용이 유예될 것이다.

그대는 이런 식으로 부단히 배반 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열심으로 '옳다/맞다/같다/있다' 해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진리는 더 높고, 더 크고, 더 깊고, 더 원대한 곳에서 비추이고 있다. 태양이 수억년간 그 빛을 아낌없이 낭비해도 조금의 거리낌이 없듯이 말이다.

이 거대한 역설의 수레바퀴에 치이지 않으려면 현실보다 한 걸음 먼저 움직이지 않으면 안된다. 정치는 정치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반 걸음 쯤 발을 빼고 뒤로 물러나서, 불변의 진리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그저 용기있게 바른 말을 할 뿐이며, 대화와 타협과 포용은 현실정치를 책임진 그들이 챙길 일이다.

또한 의연하게 앞만 보고 가는 수 밖에.

즐거운 크리스마스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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