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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9863 vote 0 2009.05.07 (14: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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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댕의 조각에는 돌출된 뼈와, 접힌 살과, 용틀임하는 근육이 외치는 고함소리들이
생생하게 녹음되어 있다. 그러나 한국의 조각가들은 아직 인체에서 살과 뼈와 근육
의 존재를 발견하지 못한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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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라한 시원의 느낌을 주는 자코메티의 조각은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과 닮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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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의 입체가 울퉁불퉁한 고체의 느낌을 과장한 점에서 야단스런 느낌을 주는 반면 달리의
입체는 빛과 색채의 효과를 이용한다는 면에서 수준의 차이가 있다. 탐스럽게 말린 머리카락과
밝기의 차이로 나타는 등의 육감적인 느낌.



나의 오래묵은 불만은 한국의 조각가들이 왜 ‘접촉’을 표현하지 않느냐다. 그들은 인간의 나신을 즐겨 조각하면서도, 왜 불퉁한 근육과, 도드라진 핏줄과, 늘어진 뱃살과, 앙상한 뼈다귀들이 서로 부딪히고, 접히며, 눌리고, 비틀리며, 처지고, 낑기고, 찢기며, 돌출하고, 움츠리며, 흔들리는 그 살아있음의 현장을 중계하지 않고 죽어서 정지한 돌만 새기고 있느냐다.

왜 그들의 왁자지껄한 목소리, 거친 고함소리, 드높은 함성소리를 듣지 못하고 또 우리에게 들려주려고 하지 않느냐다. 그 어떤 살아있는 것도 한국의 조각가가 손대면 죽어서 돌이나, 청동이나, 나무가 되어버린다.

그 반대여야 하지 않는가? 죽은 나무나, 돌이나, 청동이, 살아서 펄떡펄떡 뛰어다녀야 하지 않는가? 나는 단연코 말한다. 한국의 모든 조각가는 쓰레기다. 그들 중에서 살아있는 것을 조각한 사람은 아직 없다.

물론 일정부분은 필자가 과문한 탓이다. 나의 편견일 수 있다. 아마 어딘가에 한 명쯤 짱박혀 있을지도 모른다. 소문이 들리기를 희망한다.

하여간 그런 생생한 살아있음의 현장을 중계하지 않는, 그런 내용이 없는, 콘텐츠가 없는 조각은 일단 아니다. 안쳐주는 것이다. 그들이 아무리 심오한 주제-환경보호 따위-를 나타내었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아니다. 예술이 아니다.

왜? 콘텐츠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려야 할 생명의 외침들을 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냥 환경의 중요성 따위 주제를 나타내려면 텍스트로 충분하다. 그냥 말로 하지 뭣하러 헝겁에 그리고 돌에 새기나?

구태여 돌에 새기는 이유는 말이나 그림으로는 결코 나타날 수 없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점을 찌르고 들어가야 한다. (텍스트가 1차원이면 그림은 2차원, 조각은 3차원, 퍼포먼스는 4차원이다. 왜 더 높은 경지에 도전하지 않나?)

달리는 텍스트로 옮길 수 없는 것을 그린다. 그것은 무엇인가? 동시성이다.

달리는 ‘관계’를 고민하고 있다. 관계는 서로 다른 둘의 동시성이다. 그 동시성은 텍스트로 나타낼 수 없으므로 그려야 한다. 그래서 그렸다. 달리는 세 중매쟁이를 파견한다. 첫번째 중매쟁이는 원근법이다.

달리는 대부분의 그림에 아스라한 시원의 느낌을 주는 수평선을 배치한다. 그 방법으로 원근을 과장한다. 두번째 중매쟁이는 조명이다. 위 소녀의 뒷모습에서 나타났듯이 달리는 울퉁불퉁한 고체의 느낌이 아닌 조명의 효과로 입체를 나타낸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빛의 효과를 극대화 할 수 있는 구슬처럼 매끈한 소재가 즐겨 사용된다.

결정적으로는 밀도다. 달리는 중력을 그린다. 그가 항상 짚고 다니는 손잡이가 양쪽으로 전개된 T자 모양의 지팡이가 그의 대부분의 그림에 받침대 모양으로 들어가 있다. 혹은 코끼리의 과장된 긴 다리나 기린의 긴 목도 마찬가지다.

수평선과 원근법으로 나타낸 아스라한 시원의 느낌은 시간의 길이를 나타낸다. 조명효과를 활용한 입체의 느낌은 공간의 느낌을 살린다. 자 모양 받침대는 중력의 느낌 즉 밀도를 나타낸다. 바람이 팽팽하게 들어찬 풍선의 팽만감이다.

이 세가지 중매쟁이가 매질 역할을 해서 달리의 그림 속에서 여러 소재들이 무리없이 공존할 수 있게 된다. 특히 중력의 느낌 때문에 그림이 산만해지지 않고 통일성을 가지게 된다. 그 어떤 것이든 밀도를 주면 통일성을 획득하게 된다. 팽팽한 근육, 묵직한 중량감이 그것이 하나의 단일체라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밀도를 주지 않은 평면적인 그림은 아무래도 산만하다.

달리는 존재가 곧 사건이며, 사건은 연쇄고리로 전개되며 그러므로 최초에 온 자가 센세이션을 일으켜서 뒤이어 무수한 사건들을 낳는 씨앗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 그는 실제로 무수히 사건을 일으켜 보였다.

둘 이상이 공존하지 않는, 공존하지 않으므로 구조가 없는, 밀도를 주지 않은, 조명을 주지 않은, 원근을 주지 않은, 그래서 텍스트에 가까운 평면적인 회화, 조각은 1차원 예술이다. 글자로 써도 될 것을 쓸데없이 그려서 시야를 어지럽힌다.

그것이 글자로는 나타낼 수 없는 것임을 먼저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둘 이상의 공존과 그것을 가능케 하는 중매쟁이. 그로 인한 동시성을 나타내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가 무너지면 전부 무너지는 구조가 아니면 안 된다.

http://gujor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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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을 보고 시간 의미를 말하는 사람은 많아도 축 늘어진 효과로 중력을 나타낸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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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장미가 중력을 나타내며 중력이 계에 '통일성'을 불어넣는다고 생각한다.
배경의 아스라한 시원(始原) 의 느낌은 시간의 길이를 나타낸다. 이 장미는 오랫
동안 명상해 왔음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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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의 그림에 무수히 자 모양 받침대는 그가 늘 짚고 다니는 손잡이가 양쪽으로 갈라진 지팡이와 연결된다.
나는 이 받침대들이 중력을 나타내기 위해 배치된다고 생각한다. 허공에 떠 있는 것의 묵직한 무게감에 의해 계
는 산만함을 극복하고 통일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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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코끼리의 긴 다리 역시 중력을 느끼게 한다. 무게감에 의해 그림 속의 여러 요소가 흩어지지 않고
하나의 몸통에 단단히 결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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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누구보다도 원근법을 중시했다. 원근이 없는 평면적인 그림은 관계를 타내지 못한다.
원근을 무시하면 이발소그림이 된다. '원근 필요없어. 그냥 자유롭게 그리면 돼' 하는 현대의
경향은 위험하다. 그것은 탐구의 포기, 도전의 포기, 과학의 포기, 예술의 포기가 된다. 예술은
원래 어떻게 둘을 하나 안에 집어넣느냐의 문제에 대답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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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근효과와, 빛의 효과, 그리고 묵직한 중량감이라는 세 중매쟁이를 동시에 매질로 활용하고 있다. 이질적인 것의
공존이 가능하게 하고 있다. 여러 요소들이 원근, 빛, 질량이라는 세 중심에 의해 통일되어 산만함을 극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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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수염에 달린 꽃을 보고 괴짜라고 말하기 좋아하지만 나는 입체를
나타내었다고 생각한다. 이 안에 원근과 조명, 중량감, 그리고 김홍도의 그림
에서 늘 찬탄하게 하는 공간의 구성이 반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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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작업에서 최적화된 공간의 구도를 포착하지 못하고, 구도의 천재 김홍도를 생각하지 못하고,  '괴짜가 별짓
다하네' 하며 탄식하는 사람과는 정말 한 마디도 대화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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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dallimz

2009.05.07 (20:2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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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직한 중력이 느껴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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