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개는 없다.
구름이 달을 자르다.
면도칼로 눈알을 자르다.
안구는 황소 눈알로 대체
잘린 손목을 막대기로 건드리다.
손바닥 위의 굴에서 쏟아져 나오는 개미들.
피아노 위에 놓인 당나귀 시체.
줄에 끌려나오는 두 남자.
나방의 등에 보이는 해골
왜 별 특징없는 사진만 두고 이야기 하느냐는 이의제기가 있었다. 유명화가의 작품을 분석해 달란다. 일단 수긍하지만 유쾌하지 않다. 그림을 이야기하지 않는 첫번째 이유는 필자가 그림을 모르기 때문이다. 예컨대 영화라면 유명한 고전들은 무수히 모방되었다. 모방작을 먼저 보고 나중에 원작을 보면 원작의 느낌이 전해지지 않는다. 역사를 따라가야 하는 것이다. 그림을 알려면 그림의 역사를 충실히 쫓아가야 한다. 누가 먼저고 누가 나중인지 알아야 평가가 가능하다. 어쨌든 나는 평론가가 아니며 평가하려는 것이 아니다. 필자는 구조원리에 기초하여 미학의 어떤 본질을 풀어낼 뿐 개별 작품의 가치를 평가하지 않는다. 개별작품의 가치는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나는 시대를 초월하여 불변하는 본질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것은 일정부분 그림 자체의 가치를 떠나 있다. 어쨌든 내가 이곳에 올린 사진들은 전혀 걸작이 아니다. 나는 좋은 작품을 선별하여 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냥 시간 나는 대로 서핑하다가, 눈에 띄는 대로 올리는 것이며, 여러분들은 낱낱의 사진에서 무언가를 찾으려 하지 말고 전체의 흐름에서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 살바도르 달리 이야기가 나왔으므로 부뉴엘과 달리의 단편영화 '안달루시아의 개'를 논해봄직 하다. 지난번 글에서 말했듯이 완전히 다른 두 종류의 인간유형이 있다. 이 작품을 보고 쾌감을 느끼는 사람은 일단 '현대인'이다. 쾌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당연히 '원시인'이다. 왜 쾌감을 느끼지 못할까? 나는 그 인간들의 뇌 속이 궁금하다. 쾌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이 그림들에서 어떤 감동과 교훈, 주제의식 따위를 찾으려 하기 때문일 게다. (부뉴엘은 시사회 때 이 작품을 보고 분노하여 공격해올 원시인 무리들에 대항하기 위하여 호주머니 양쪽에 돌멩이를 가득 채우고 갔다고 한다. 일전불사의 태세다.) 그런 돌멩이들은 진짜 '마구 때려주고' 싶다. 두 종류의 돌멩이들이 있다. 하나는 먹물 평론가들인데 그들은 부뉴엘과 달리 두 감독들이 ‘아무 의미없다’고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온갖 의미를 찾아내는 쓰레기들이다. 그들의 논리는 단순하다. 이 영화가 걸작임은 확실하다. 그 시절 파리의 명사들은 다 봤으니까. 그러므로 당연히 대단한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정치적 성향은 극좌에서 극우까지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그들은 이 영화에 줄에 묶여 끌려가는 사제 복장의 남자가 등장했다는 이유로 사회의 억압을 비판했다고 말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리비도, 이드 운운하며 프로이드의 언설로 거추장스런 장식을 가하기도 한다. 물론 둘 다 개소리다. 또 하나의 돌대가리 유형은 ‘아무 의미도 없다’는 부뉴엘과 달리의 농담을 금과옥조로 여기며, 그것을 강령으로, 도그마로, 교리로 삼고 거기서 삼위일체와 십계명과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찾아내며. ‘아무 의미도 없어서 좋아. 아무 생각없이 그냥 보고 그냥 느끼는 거야.’ 이런 개소리 하는 쓰레기들이다. 그들이 이 영화에서 진정 무언가를 느낄 가능성은 없다. 물론 이 영화에는 중대한 의미가 있다. 의미없는 예술은 없다. 의미없는 쓰레기는 있다. 달리 본인의 표현을 빌면 “유화 오일은 어떻게 섞어야 하지요?” 내가 이렇게 질문을 던지면 그 얼빵한 진보주의 성향의 교수들은 애매하게 얼버무리며 대답을 회피했다. “이보게나. 각자 알아서 자기 소재를 찾아야 한다네. 회화에 법칙이란 없어. 나름대로 해석하라구. 눈에 보이는 것은 접어두고 자기 나름대로 해석해야 해. 영혼을 집어넣어야 하는 것이지. 회화에서 중요한 것은 작가의 기질이야. 기질.” “교수님. 기질은 내가 당신보다 한수 윗길이니 제발 와니스와 오일의 혼합분량이나 가르쳐 주쇼.” “용감하게 밀고나가요. 학생! 큰 알맹이를 보고 가되 그런 자잘한 세부는 무시해도 좋아. 아무런 규칙이나 제약조건에 구애받지 말라구. 내 수업에서는 각자 자기 기질에 따라 작업해야 해.” 어리석은 작자들 같으니. 이런 치들이 회화교수라구? 엄밀성이 모든 구조질서의 첫번째 조건이며 형태를 찍어내는 것은 그 '제약'이라는 진리를 깨닫게 하려면 도대체 얼마나 더 많은 혁명과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말인가! 어리석은 작자들. 나는 교수들에게 데생과 원근법, 색채에 관한 과학에 근거한 정확한 지식을 얻고자 했다. 그러자 그들은 나를 진보주의의 적으로 간주했다. 교수들은 나를 예술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달리는 대단히 진지하고 능숙하지만 얼음처럼 차가워요. 그의 작품에는 감정이 없습니다. 개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순전히 머리로만 작업하는 지식인입니다. 하지만 예술을 하려면 뜨거운 가슴이 있어야지요.” 이렇게 말은 했지만 곧 나의 입체파 작품을 몇 점 보고는 모두 열광적인 나의 추종자가 되어버렸다. 달리를 가르친 엉터리 진보주의 교수님 말씀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 아닌가? 머리 속에 든 것이라고는 없으면서 선문답 하는 평론가들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달리가 ‘구조질서’ 따위의 표현을 썼다는 거다. 필자가 강조해온 ‘과학적 탐구’에서 달리를 따를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달리야말로 엄마 뱃속에서 구조론을 깨치고 나온 사람이라 하겠다. 예술은 과학이다. 이 점을 빼놓고는 기본적으로 대화가 안 된다. 고흐, 세잔, 달리, 피카소, 이중섭, 김기덕, 김홍도 모두 대단한 과학자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다작이다. 다작하는 이유는 탐구하기 위해서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걸작 안달루시아의 개에는 분명 의미가 있다. 문제는 그 의미가 그림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림을 벗어나 정치적, 사회적 문제의식으로 가면 이 영화는 졸작이 되고 마는 것이다. 구조론으로 말하면 의미는 연결이다. 무엇을 연결하는가? 안달루시아의 개에 나오는 주요 장면들은 다른 영화에도 무수히 등장한다. 개미가 손바닥에서 나오는 장면은 마약환자들이 주로 보는 몸에서 벌레가 기어다니는 환각이다. 양들의 침묵이나 올브보이에도 안달루시아의 개를 연상하게 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구름이 달을 가르는 장면은 흔히 하는 상상이다. '현대 예술은 어디로 가야하는가?' 그 방향성을 잡아준 것이 부뉴엘과 달리의 의미다. 두 사람은 확실한 의도를 가지고 작업을 했으며 결국 그들의 뜻대로 되었다. 이후 예술은 그 방향으로 갔다. 부뉴엘과 달리가 그려놓은 밑그림대로 흘러갔다. 그것이 바로 의미다. 그보다 더 큰 의미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의미가 있는데 왜 사람들은 의미가 없다고 말할까? 의미라는 단어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또는 의미가 감동, 교훈, 주제의식, 흥미, 재미 따위의 포장된 형태로 있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포장된 의미가 의미인가? 포장되어 있으면 상품이지 의미가 아니다. 의미란 간단히 다른 사람의 뇌 속에서 같은 패턴을 끌어내어 연쇄반응을 시키는 것이다. 핵분열에서 최초 한 원자의 분열이 이후 모든 원자를 분열시키듯이. 하나가 둘을 낳고 둘이 넷을 낳고 넷이 천하를 모두 낳는다. 그것이 의미다. 그들은 바로 그것을 노리고 정확히 겨냥하여 뇌관을 때렸다. 방아쇠가 공이를 쳤고 공이가 뇌관을 쳤고 뇌관이 장약을 쳤고 장약이 탄환을 쳤다. 타겟에 명중했다. 그리하여 세상이 바뀌었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 연쇄반응이 히스토리다. 진정한 의미는 히스토리의 형태로 존재한다. 그런거 없이 그냥 도덕교과서에 나오는 교훈, 감동, 재미를 훔쳐다 덧칠해놓은 쓰레기는 예술 아니다. 왜? 과학성이 없으니까. 달리가 강조한 엄밀성, 구조질서, 형태의 제약이 없으니까. 무엇인가? 첫번째 온 사람이 설계도를 놓고 두번째 온 사람이 기초를 놓고 세번째 온 사람이 기둥을 세우고 네번째 온 사람이 벽체를 올리고 다섯째 사람이 지붕을 마감하는게 의미다. 의미는 인류의 집단지능, 집단지성을 확립하기다. 21세기 인류문명의 양식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부뉴엘과 달리는 첫번째 와서 그 기초를 놓았다. 뒤에 온 사람이 그 기초 위에 기둥을 놓고 살을 덧붙인다. 이 작품의 의미를 당대의 사회변혁에서 찾거나 심리학에서 찾으면 달리가 비난한 교수들처럼 어리석다. 분명히 말한다. 의미가 있다. '의미가 없으니 아무 생각없이 그냥 볼 수 있어서 좋다'는 쓰레기들이 원시인이다. 의미를 사회비판, 정신분석학 따위에서 찾는 쓰레기들이 원시인이다. 그들이 뻘짓을 하는 이유는 이 작품에서 아무런 쾌감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 쾌감을 느끼지 못할까? 내가 느끼는 것을 그들은 왜 느끼지 못할까? 부뉴엘과 달리가 상상속에서 또는 현실에서 경험한 것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부뉴엘과 달리의 상상은 사실이지 누구나 할 수 있고 또 누구나 하는 상상이다. 이미 그 상상을 저축해놓은 사람은 쾌감을 느낀다. 그 쾌감이 의미다. 왜 영화를 보는가? 즐겁기 때문에 보는 것이다. 즐겁지 아니한가? 즐겁지 않은 사람이 원시인이다. 그들은 우리와 상상을 공유하지 않는다. 우리가 상상한 것을 그들은 전혀 상상하지 않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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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확신을 오만으로 나타낸 사람이고 사람들은 그 확신을 천재의 광기로 치부하기를 즐겨
하고 달리 자신도 세간의 그러한 경향을 받아들인 사람이오.(속으로는 조소하면서도)
큰 범주에서 세상과 사물을 보는 방법,원리획득,본질을 읽고 머리속에 그려보는.
저 또한 심미안에서 사진,그림 그 자체보다는 구조적원리를 찾으려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유일하게 지구의 중력을 그렸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그리지 않았지요.
왜 아무도 그리지 않았을까요?
평면적인 그림을 그려서는 지구의 중력을 나타낼 수 없지요.
중력이 표현된 그림과 그렇지 않은 그림의 가치차이는
어느 의미에서 '전부 : 0'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경험이 없는 데서 노하우가 있을 리 없으며, 경험과 노하우가 없는 데 훈장질 외에 뭘 가르침씩이나...
현실에서의 경험, 그 경험 또한 치열하지 못하면 배우는 것도 가르치는 것도 대략 난감일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