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둘러쌓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아이의 성향(내향성, 외향성)이 결정됩니다. 흔히 선천적으로 그랬다고 하지만, 선천적인지 아닌지는 쉽게 알수가 없지요. 왜냐면 태어나서 수많은 요소들에 의해서 아이가 영향을 받게 되는데, 선천적이라고 말하려면 적어도 태어나서 자극받는 수많은 요소들을 먼저 점검해보고 나서야 얘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육은 아이가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모른척하고(알아도 모른 척 할 때 도움 될 때가 많습니다. 열을 잘못해도 3-4번은 모른척해야 더 잘 성장한다는 것이 통설)
기다려주고(지금 당장 성장하지 않는 것 같아도 식물의 줄기를 잡아 끌어올릴 수는 없는 것이지요)
지켜보고(감놔라 배놔라 하고 싶지만 아이가 하는 모습 그대로를 지켜봐주면서 과정 자체를 격려해주는 것)
안내해주고 (스스로 길을 찾는 시도를 해봐도 찾을 수 없을 때, 정말 하고 싶은 것을 할 때 그것을 이루는 과정을 보여주기)
함께가고( 혼자서도 일을 해보고, 같이 해보는 것도 해봐야죠. 함께하며 합의하고 시너지를 이루는 성공의 경험을 하는 것)
보여주고(강요받기 보다 내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서 그것이 바람직할 때 닮으려는 행동 취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
때로는 일을 맡겨주고(위임이야 말로 독립적인 어른이 되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스스로 계획하고 실행하는 능력을 길러줌)
때로는 이끌어주어야(이끌어 주는 것은 신중하고 조심스러워야 하며, 아이의 독립성을 해치지 않는 즐거운 것이어야 함)
합니다.
부모님들이 말합니다.
'우리아이는 너무 반항적이예요'
지시와 명령으로 일관할 때 아이의 반항심이 더 커집니다. 마치 "나는 삐뚤어질테야"라고 선언한 듯이 부모님의 뜻과는 정반대로 행합니다. 외부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받지 못하고, 좋은 것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려 하다보니 아이가 성장의 장에서 벗어나 고립되기 쉽습니다.
'우리아이는 말을 참 잘들어요'
아이가 말을 잘들으니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이것도 문제가 됩니다. 아이가 지나치게 순종적인 경우 창의성이 떨어지고 문제해결력이 떨어지니니까요. 누군에게 지시와 명령을 받지 않으면 잘 움직이지 않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의 삶을 자기 스스로 결정하기 보다는 남에 의해 결정되는 경험이 축적되어 자기 주도적인 삶을 살지 못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자기 삶을 살지 못하고 부모님의 눈치를 보게 됩니다.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신경쓰게 되어 삶이 위축됩니다.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가 뭘까요?
선진국은 개인의 자유와 창의가 최대한 보장됩니다. 후진국은 규율과 질서가 강조됩니다.
선진국에도 규율과 질서가 내재되어 있지만, 그것은 개인의 자유와 창의를 최대한 발휘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입니다. 후진국으로 갈수록 불필요한 규제가 강화되고, 선진국으로 갈수록 자유와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다양한 사회적 매커니즘이 자리잡아 있습니다. 곧 후진국은 불필요한 규제가 많고, 선진국은 꼭 필요한 규제가 많다는 점입니다.
무엇을 규제하느냐가 선진국과 후진국의 본질적인 차이입니다. 규제의 목적이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것이냐, 인간을 수단과 방법으로 여기느냐에 따라 인류문명의 발전과 퇴보가 좌우됩니다.
아이에게 어떤 소통방식으로 다가갈 것인가?
참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끊임없는 혼란과 미확신 속에서도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육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선은 내가 강조하는 것을 아이에게 주입하겠다는 고집만 조금 버리셔도 아이와의 관계가 회복되고
부모님께서 강조하는 것이 쉽게 아이의 인생에 흡수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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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나를 대했던 태도가 내가 자녀를 대하는 태도를 결정하겠지요.
그 결대로 흐르는 것이 괜찮다면 그대로 가면 될 것이나, 부모가 나를 대했던 태도가 지금에 맞지 않는다면(아마 그때 나에게도 맞지 않았을 것입니다만), 재설정이 필요하겠지요.
부모가 나를 대했던 그 태도가 결정한 것은, 내가 나를 대하는 태도입니다. 내가 나를 대하는 태도를 한발 떨어져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나를 대하는 태도를 확인하는 것이 재설정의 시작입니다.
내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내가 자녀를 대하는 태도를 결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