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을 접하고, 불교를 버려야 하는가? 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잠시 허무와 혼란에 빠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접하면 먼저 접했던 것을 버려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 만도 아니었다.
두 가지가 서로 상호 보완을 해 준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원리로 치자면 같지만 접근하는 방식은 또한 같다고도 다르다고 할 수 없다.
각기 독립성이 있지만 ..어쨌든 연결되어 있다.
서로의 관계는 응용이 가능한 관계였다.
서로에게 유리한 것을 제공했다.
즉 내용보다도 생각의 틀을 확장하거나 바꾸는데, 달리 보는 것에 유리했다고 볼 수 있다.
복잡한 대승불교를 이해하기가 난감해서 바로 치고 들어가기 전법(시절 인연으로 초기경이 한국에 퍼짐)으로 초기불경을 보니 처음 시작을 알 수 있기에 그 뒤로 불교를 하나의 체계로 이해하기가 수월했다. 혼자서도 정리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그 체계를 혼자서 정리하는 법, 나름대로 불교를 보는 나만의 방식으로 이해도를 높일 수 있었다.(이러한 것을 정리하고, 사고하는 방식, 틀, 확장, 극한가지 밀어부쳐보기,..등등)은 구조론의 도움을 받고, 응용을 하였다. 어쨌든 나에게는 도움이 되었다.
그동안과는 다른 책(불경)을 보니 사유의 폭이 확장되었고, 생각이란 것을 정말 하게 된 것도 같고, 그래서 그 사유의 힘이 조금 커져서 구조론을 이해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어쨌든 사람은 일단 생각의 폭, 사유의 깊이를 확장 시켜서 키우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되었다. 구조론을 알면 자신이 갖고 있는 크기를 알게 되기도 하지만, 그 크기를 늘릴 수 있다는 것이 더욱 더 중요하다고 생각되어졌다.
그래서 구조론 역시 바로 치고 들어가기 전법을 구사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구조론을 알려면 '구조'책을 일단 섭렵해야 한다.
그래야 무슨 말들을 하는지 감을 잡게되고, 맥을 읽을 수 있다. 대화가 통하게 되는 것이다.
방대한 쪽을 보지 말고 일단은 덜 복잡한 쪽을 보아야 한다.
족보를 알려면 김해김씨 몇대손 보다는 김수로 한 사람을 대는 것이 더 빠르듯이...( 이 예는 내가 김해김씨여서 그런 것이오.)
구조론의 다양한 응용을 알고 확장되어지는 대화를 알려면 구조를 먼저 알아야 한다.
퍼져가는 방향보다는 퍼져온 방향을 공략해야 한다. 확장되어 가는 쪽을 따라가지 말고 반대로 거슬러 가야한다. 존재론이다. 구조를 제대로 알려면 존재론적 사유를 해야한다. 그러면 인식론은 저절로 알게된다. 맨 꼭대기 구조의 시작된 부분, 구조를 먼저 이해하기, 그리고 의문나는 부분들 질문하기, 그리고 그것을 연계하여 사유하기, 그리고 글로 생각을 펼쳐보기, 응용하기.... 그리고나면 구조가 재미있게되오.
물론..이것은 나의 경우이고, 내 생각이 그렇다는 것이오.
노무현이 한국인이 갈 방향을 혹은 인류가 갈 방향을 다시 이어냈듯이...
구조론이 끊어지고 망각속에 잊혀져 있던 철학을 다시 이어냈다라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오.
모든 철학은 출발점이 있듯이, 끊어진 부분도 있기에 그것을 살려내어 다시 이어내어서 그것을 체계화하고,
인간의 사고의 틀 자체의 지평을 넓혀간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오.
모든 철학은 독립된 입장이 있지만 대체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오.
그것을 구조론이 하나의 틀로 다시 현대어로 더 업그레이드 시켜서 새로운 시선으로 살려내었소.
구조론의 의의는 인간 사유의 한계를 극복해 가고 있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고 보오.
거기서 모든 것이 새롭게 출발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에 그렇소.
불교는 나를 찾아가는 과정의 인식론적인 접근인 경우가 대부분이오..
기독교는 사회와 소통한다는 존재론적인 접근인 경우가 많고..
불교의 인식에 너무 뭉기적 그려도 안되고 너무 슆게 존재론으로 치고 나가도 곤란하단 말이오..
불교를 거쳐가지 않은 기독교은 정확하지 않다?
구조론은 싶소..
구조론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존재론과 인식론의 혼선,틀개넘이 없어서 생기는 혼선이오..
이건 몸과 마음이 가고 싶어하는 진행방향이 틀려서 생기는 일종의 충돌현상이오..
사람이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격는 당연한 거요..
차원과 밀도로도 성명할 수가 있는데..
차원이동 없는 밀도의 채움은 역설적으로 차원을 이동하는데 장벽이 될수가 있소..
차원이동의 순간에 굉장한 에너지가 필요한데 그게 밀도의 발목잡기 신공때문이오..
니가 차원이동하면 내밀도는 다 죽는다..이래 생각하여 둘이 싸우고 있는건데..
결국은 나중에다 합쳐지게 되고.. 썩 먹게 되오..
그 차원안에서의 문제는 차원이동 없이는 해결되지 않는다..
존재론과 인식론의 혼선,틀개넘이 없어서 생기는 혼선...맞는 말입니다.
제가 불교를 비유를 들어 제 경험을 인용한 것 역시 같은 의미 입니다.
인식론을 쫒다보면 혼선이 존재론을 보는 것보다 더 크기 때문입니다.
그 간극을 줄이는 것이 존재론의 방향을 먼저 보는 것이고, 출발점을 먼저 보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인식론만으로는 틀이란 자체를 느끼기도 어렵고, 경계를 넘기도 어렵고 점프하기도 힘듭니다.
혼선이 오기 때문이겠지요. 거기서 많은 사람들이 알든 모르든 뭔가에 대해서 막연한 혼란을 겪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식론 자체는 계속 뻗어가는 형상이어서 그 많은 것을 헤아리다 보면 거기서 지치게 됩니다.
그래서 그쪽을 보지말고 바로 존재론쪽으로 치고 들어가야 인식론적인 방향을 잘 정리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즉 자신의 머리속에서 교통정리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불교에서 나를 찾아가는 방법이 먼저가 아니라 불교가 뭔지를 아는 것이 먼저 입니다.
먼저 불교란, 무엇을 얘기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알아야 그 다음이 생겨납니다.
불교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인식론적인 접근에서 나를 찾아가는 것이지만, 그 인식이라는 거 자체를 보려고 할 때는 존재론으로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고 봅니다. 즉 구별이 모호하지만 혼재되어 있다고 봅니다.
불교 자체에서도 존재를 해부하여 깨닫는 것이므로 존재의 주소는 명확해야 합니다. 다만 그 출발점을 자기 자신을 삼는다는 것이죠. 불교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도 존재론적 접근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불교라고 전제하였을 때 얘기입니다.
하지만 대부분 접하게 되는 것은 불교의 인식론적인 부분입니다. 사람들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지요.
어느것이 혹은 무엇이 불교의 실체인지 감을 잡기도 어렵지요.
불교 역시 뻗어나온 방향이 있으니 먼저 그곳을 공략하라는 의미였습니다
물론 방대해진 불교에서 그 엑기스를 단박에 알아버리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종교적인 관점에서 먼저 접하게 되기에 불교의 본질에 다가서기가 쉽지 않습니다.
법문 백날 들어야 일시적인 처방에 불과합니다. 자신 스스로가 아닌 타인이 느끼고 얻은 것을 잠시 맛본 것에 불과한 것이니까요.
구조론 역시 스스로 구조론 자체에 다가서지 않으면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시간을 투여해서라도 스스로 구조론에 접근해야 한다는 의미라고 이해하여 주시면 되겠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직접 다가서지 않으면 그것에 대한 진수를 맛보지 못하는 것은 다 같겠지요.
자신의 무엇인가를 투여하고 투자해야 그만큼 자신에게 되돌아 온다는 것입니다.
차원을 이동한다 라는 것은 우리의 정신, 즉 관념에서 가능한 차원이므로 이 역시 틀을 먼저 바꿔야 하고, 사고의 용량을 키워야 한다고 봅니다. 틀을 바꾸지 않고 용량을 키운다면 필시 부작용이 따를 것이라고 봅니다.
그것은 스스로가 그 용량을 소화해 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틀을 바꾼다는 것은 비워내는 것과 같다고 봅니다. 뭔가 새로운 것을 채울 자리가 있어야 넉넉해지는 것이니까요.
점프란 그렇게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구조론을 알고 불교를 버려야 하는가? 라고 갈등했던 이유는...?
구조론에 이미 모든 것이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이것만 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였지요.
하나가 들어오니 하나를 밀어내는 자연스런 현상이 일어난 것이지요.
그러나 심리적으로는 불교는 나에게 참 고마운 공부였는데..이것을 어찌 밀어내지...하는 일종의 미안함 이었지요.
그래서 제 나름대로 공존의 방향을 찾은 것이지요.
굳이 밀어낼 필요가 없이 제가 제 사고의 틀을 바꾸면 되는 거였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어느정도 충돌이 있었지만 지금은 제 안에서 조화롭게 공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만 서로 우열을 논할 수는 없지만 불교를 이해하고 정리하고 받아들이는데 구조론 적 틀이 그 틀을 규정하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구조론 자체가 틀이기 때문이라고 생각되고, 그것이 더 편리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구조론으로 틀을 형성하고 내용은 그에 맞게 정리되는 것이라고 생각되기도 하구요.
그래서 굳이 어려울 것이 없다고 여겨지는 것이기도 하구요.
더이상 충돌은 없고 서로 막힘이 있을 때 도움을 준다고 생각됩니다.
이것은 저의 경우이므로...다른 분들의 견해는 다를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어르신들이 아홉수..조심해라..합니다만..
1234 채워 나가다가 아홉이 되면..이거 참..
꽉 찬 것 같은데..더 갈데가 없어요.
다시 내려갈 수도 없구..올라가자니 사다리가 없구..
9 다음은 10 입니다..
근데 9의 입장에선 10이 안보이죠..
9에게는 10이 뭐로 보이느냐..
1로 보이거나 0으로 보인다 이거죠..
1로 보일 때는 한참 후퇴인 것 같고..새로 시작하는 것 같아 한심하죠.
0으로 보일 때는 이거 무섭습니다..죽음이거나 무기공이죠..
1과 0을 동시에 봐야 합니다.
도약이죠. 도약은 오히려 균형입니다.
9와 10은 차원이 달라지는 것이니
10대와 20대 30대는 차원이 달라지는 것이므로, 즉 노는 차원이나 관계의 차원이나 자신을 책임지는 차원이나 등등 많은 것이 바뀌게 되는데, 19,29, 39 등의 아홉수도 차원이 달라지는 시기이므로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다른 차원으로 이동,혹은 도약함에 있어서 그 아홉수에서 이루어짐으로 아홉수의 정신적 역량이 중요한 것이므로 아홉수는 에너지 상태에 따라 다음 차원을 어떻게 끌고 갈지를 결정한다고 생각되오.
20대에 들어서도 10대와 다를 것이 없다면 퇴보이고, 30대인데도 20대와 다를 것이 없다면 퇴보이고, 30대인데도 20대와 사고의 역량이 다를 것이 없다면 퇴보이겠지요. 즉 나아질 것이 없는 삶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아홉을 지나 다른 차원의 나이대로 진입한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는 것이므로 에너지가 많이 소요되는 시기라는 생각도 들고, 그래서 1~8까지 쌓여진 시간의 역량들을 총 집결하게 하는 시기이므로 에너지 소요도 많지만 에너지 자체도 많아지게 되는 시기라고 생각되어져서 그 에너지를 관리함에 조심해야 한다라는 생각도 들구요. 잘못하면 실수가 많아질 수도 있으므로... 힘 조절을 해야 한다라는 의미인 것 같기도 하고...이미 8에서 아홉을 준비하고 있었으므로 아홉은 표면상으로는 큰 의미없이 지나갈 수도 있다고 보이나 아홉자체는 도약을 위한 에너지 그 자체라고 보이며 변화하기 위한 숫자라는 생각도 듭니다.
아홉은 반드시 10으로 도약해야 하는 숫자이고, 9는 10으로 제대로 도약해야 균형이 맞아지는 것이라고 생각도 되고... 이렇게 본다면.. 도약하면 균형은 저절로 맞아진다는 것이고 도약이 안되면 (물론 한해가 바껴서 나이먹는 그런 거 말고...)절망이겠지요.... 하지만 아홉수라는 여러번의 기회들이 있으니 너무 절망은 성급..1부터 다시 채워가면 되는 것이니..그렇다고 기회가 많다고 하여 너무 미루지도 말고^^
나이는 거저 먹는 것이 아니라 힘들여 에너지들여 먹는 것이고 보면...나이값 해야 한다는 말도 틀린 말은 아니네요.ㅋㅋ...이런 아홉수에 딱 걸렸네....^^;
1과 0이 아닌 10을 10으로 보겠소. 균형을 이룬 수로 보겠소. 1과 0이 같이 있어야 10이 되는 것이니 그리고 ^^ 같이 있어야 그 나이가 되는 것이니
담님의 권 구조담에서 동기부여를 받아서 내 생각을 써 보았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