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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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6509 vote 1 2013.09.10 (19:09:03)

    조선의 주인은 누구인가?


    역사는 우연한 사건들의 무질서한 집합이 아니라, 거대한 에너지의 소용돌이다. 강물이 때로는 깊은 소를 이루고, 때로는 거친 협곡을 이루는 것은 강물의 수량과 부근의 지형이 상호작용하는데 따른 복잡한 함수관계가 있다.


    과학가는 거기서 필연성을 읽어내는 눈을 가져야 한다. 거기에 미학적 완전성이 숨어 있다. 반도는 반도대로, 대륙은 대륙대로, 섬은 섬대로 자기류의 완전성을 가진다. 역사가에게는 그 완전성을 읽어내는 눈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과거를 기록하고 되돌아봄은 미래에 대비하고자 함이다. 과거와 미래가 연결되어 용틀임하며 하나의 기승전결을 이룬다는 사실을 알아채야 한다. 과거가 질문하면 미래는 응답한다. 둘은 마주보고 있다. 대화하고 있다.


    과거가 무엇을 질문했는지 알아채면 미래가 무엇을 대답할건지 알 수 있다. 다가오는 미래를 예견하고 대비할 수 있다. 그래서 역사가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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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중국에서 9월 10일로 정해진 스승의 날을, 공자탄신일인 9월 28일로 변경하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한다. 중국은 왜 또 생뚱맞게 이런 일을 벌이는 걸까? 지금 재판을 받고 있는 보시라이가 충칭에서 ‘모택동어록 외우기 운동’을 했다는걸 보면 이해가 될 법 하다. 살아있는 우상의 폭주를 막으려면 죽은 성인이라도 불러내야 할 판이다. 그렇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


    역대 왕조의 시조들에게 공통된 고민은 나라이름 짓기였다. 5대 10국에 5호 16국이면 외어야 할 나라이름이 너무 많아서 중국에 태어나지 않은게 다행으로 여겨질 정도이다. 후당, 후진, 후한, 후주로 보면 나라이름이 실제 역사를 거꾸로 되짚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후後자는 구분이고 국명은 당, 진, 한, 주다.


    늦게 팬 장작이 위로 올라가는 법칙을 따라, 나중에 생긴 나라가 더 옛날 이름을 취한다. 중국의 역사가 주나라부터 시작되니 주에서 더 거슬러 올라갈 수 없다. 그래서 오대가 끝나고 송이 들어선 것이라고 하면 말 되겠다.


    우리나라도 고려보다 조선이 더 옛날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왜 한사코 옛날로 되돌아가려고 할까? 족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보시라이들의 준동을 막기 위해서다. 과거를 불러내어 미래와 호응시켜 완전성을 제시하는 방법으로, 역사의 치고나가는 방향성을 제시하여, 어문 보시라이들의 돌출행동을 막으려는 것이다. 우리가 일베충의 준동을 막는다 해도 마찬가지다.


    식민사관은 조선을 실패한 역사로 규정하고, 그 이유를 당쟁탓으로 돌린다. 반대로 조선은 성공한 역사이며 그 이유는 당쟁 때문이다. 당쟁을 누가 만들었는가? 정도전이 만들었다. 모든 사태의 배후에 큰 그림자 정도전이 있다. 정도전이 조선의 컨셉을 정했을 때 훗날의 당쟁은 예비되어 있었다.


    정도전이 정한 것을 이방원이 엎었다. 조광조가 되살렸다. 말바꾸기 전문의 중종이 뒤통수를 쳤다. 그러다가 선조 대에 퇴계와 율곡이 일어났다. 이들은 비유하여 말하자면 성인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무엇인가? 우리는 당쟁이라고 말하지만 틀렸다. ‘성인聖人의 출현’에 방점을 두어야 한다. 비로소 족보가 만들어졌다. 그렇다. 완전성은 그 족보에 있다. 역사의 방향제시다.


    과거와 미래를 호응시키는 방법으로 집단의 치고나가는 방향성을 제시하려면 족보가 필요하다. 족보를 만들려면 시조가 있어야 한다. 모르겠거든 각자 집으로 돌아가서 족보를 찾아볼 일이다.


    흔히 군사부일체라고 하지만, 임금 입장에서는 어림없는 수작이다. 임금은 천자다. 천자는 신이다. 감히 신과 맞먹으려 든다는 말인가? 주리를 틀고 능지처참을 당할 일이다. 그런데 공자가 성인이 되었다는 말은 임금 위에 올려져 있다는 말이다. 공자는 사대부 집단의 성인이다. 사대부 족보의 꼭지점이다.


    그렇다면 민중의 성인은 누구인가? 관우다. 중국에서 관우는 임금보다 지위가 높아서 아주 신이 되었다. 천자天子가 신의 아들인데 비해 관우는 신 그 자체다. 관성대제라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공자가 뜨면 관우도 뜬다는 점이다. 양자역학의 쌍발생 원칙이 적용된 것이다.


    졸지에 황제는 넘버 쓰리가 되어버렸다. 황제는 천자이니 신의 아들이다. 신이나 진배없다. 그런데 신이 갑자기 나타난다면 뜬금없다. ‘여러분이 보시기에 좀 생뚱맞겠지만 사실은 내가 신이걸랑요.’ 이건 좀 어색하다.


    중국은 워낙 왕조가 자주 바뀌기 때문이다. 오랑캐의 침략에 시달리던 송나라에 와서 중국적 정체성을 회복하고자, 유교주의 르네상스와 함께 관우신앙을 퍼뜨린 것이다. 사대부들이 문인 공자를 띄우자, 무인 관우로 대칭시켰다.


    정확하게는 군사적인 재능이 없었던 송나라 휘종이 면피할 요량으로 관우를 무안왕으로 봉하여 관우신앙을 퍼뜨린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오랑캐의 침략을 받아 황제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마당에 별 수 없다. 이판사판이다.


    신은 원래부터 있어야 한다. 5호 16국에 5대 10국으로 난립한 마당에 임금이 문득 나타나서 ‘뜬금없지만 제가 신인데요.’ 하면 이상하다. 그래서 공자를 신으로 삼아 성인이라고 부른다. 임금은 공자 뒤에 숨어 슬그머니 따라붙는다. ‘나두요.’ 근데 민중은 공자를 모르므로 관우로 균형을 맞춘다. 공자에 관우에 천자로 3위일체가 안성맞춤이다.


    무엇인가? 고려만 해도 무신정치가 횡행해서 임금의 권위가 없었다. 변방에서 새로 개국한 조선왕이 신을 자처하려니 중국황제가 신경쓰인다. 대책이 있어야 한다. 중국이 공자와 관우와 천자로 균형을 맞추듯이, 우리도 퇴계와 율곡과 선조임금으로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 구조론의 축과 날개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성인을 굳이 켸켸묵은 역사책에서 찾을 필요가 있나? 살아있는 성인이면 어떠리? 정여립이다. 그렇다. 조선의 성인족보를 보자면 정도전, 조광조, 이퇴계, 이율곡, 정여립, 송시열 이렇게 된다. 실제로 이 양반들이 다 성인이라는 말은 아니다. 이면의 에너지 흐름이 있다는 말이다. 역사의 질문과 응답이 있다는 말이다. 구조 안에 미학적 완전성이 작동하고 있다는 말이다.


    정도전은 조선의 컨셉을 규정한 사람이다. 물론 이방원에 의해 없었던 일로 되었지만, 한 번 만들어진 시스템은 기어코 되살아난다. 사림이 없으면 환관과 외척인데 이건 나라 말아먹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연산군이 개판을 치자 반정을 일으킨 중종이 혹시 ‘성인할 넘 없나’ 하고 주변을 살피다가, 멀뚱한 조광조에게 ‘야! 너 성인해볼래?’ 하고 시킨 거다.


    조광조는 자신이 성인된 줄로 알고 오버하다가 죽었다. 성인이 없으니 나라가 아주 개판이 되어 임꺽정 도당이 들고 일어났다. 선조 대에 다시 성인발굴 운동을 대대적으로 개시하니 퇴계와 율곡이 나왔다.


    ◎ 창안 정도전.. 물적 측면에서 시스템의 설계자.
    ◎ 부흥 조광조.. 잃어버린 정도전의 꿈을 되살려낸 사람.
    ◎ 번역 이퇴계.. 심적 측면에서 중국 시스템을 도입한 사람.
    ◎ 발명 이율곡.. 심적 측면에서 조선 시스템을 창안한 사람.
    ◎ 이단 정여립.. 시스템의 업그레이드를 꾀한 사람.
    ◎ 교주 송시열.. 시스템의 종교화를 시도한 사람.


    중국사에서 사림이 의미있는 역할을 한 일은 없다. 워낙 전란이 잦았기 때문이다. 뭐 좀 해보려 하면 오랑캐가 쳐들어와서 짓밟아버리기 때문이다. 남조시대와 송나라때 약간의 빛은 있었다. 조선에서는 확실히 사림이 의미있는 역할을 했다. 사림의 족보, 성인의 족보를 인정해야 뉴라이트 교과서에 절대로 없는 조선의 진짜 역사가 되살아난다.


    조선왕조 500년은 하나의 컨셉을 가지고 기승전결을 이루며, 밑바닥 에너지의 용틀임에 의하여 줄기차게 내달려온 것이다. 처음 질문을 던진 사람은 삼봉 정도전이고 그러한 역사의 질문에 나름대로 응답한 사람이 조광조와 퇴계와 율곡과 정여립과 송시열이다. 우리가 이 그림을 알아야 한다.


    역사를 평가하는 기준은 개인의 업적을 뒤지는 것이기 쉽다. 그런 식의 파편화된 관점으로는 역사의 큰 줄기를 보지 못한다. 역사의 필연성을 헤아리지 못한다. 박정희도 공적은 있다는 식의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된다. 일본처럼 어문 길로 들어서면 한때 반짝 하다가 오랜 침체를 맞게 된다.


    대한민국은 곧 죽어도 김구 선생의 컨셉으로 간다. 이승만이나 박정희나 전두환은 설사 공적이 있다해도 임시정부를 계승한 대한민국의 컨셉과 맞지 않으므로 안 쳐주는 거다. 우리 헌법이 그렇게 되어 있다. 기승전결로 봐야 한다.


    조선의 컨셉은 정도전에서 나왔고, 조광조가 이를 천하에 밝혔으며, 퇴계가 성인개념을 도입해서 거기에 살을 채웠다. 뼈대에 살이 붙어서 구체적인 형태가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퇴계의 성인은 중국성인이었기에 율곡이 이를 조선화 시켰다. 한 편으로는 송시열이 자기를 높이기 위해 율곡을 이용했다.


    정여립은 죽은 성인이 아니라 살아있는 성인 컨셉을 던졌다. 말하자면 보시라이가 출현한 것이다. 나라가 성인무드로 가자 선조는 스스로 요순임금을 자처하며 성인으로 행세했다. 임진왜란 전까지는 임금성인으로 추앙받았다.


    임금성인과 선비성인의 공존은 불가능하다. 정여립이 죽어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 시진핑이 보시라이를 치는 것은 또한 당연지사. 정여립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 정도전이 처음 컨셉을 던졌을 때 필연적으로 정여립은 나타나게 되어 있다. 띄운 컨셉이 선비들에게 영감을 주고 이에 추종자가 몰려드는 것이다.


    청나라가 지구상에서 문명을 없애버리자, 조선이 지구에 남은 최후의 문명국가로 되었다. 조선인의 기준으로는 그렇다. 이에 구심점 역할을 할 성인이 필요하다 해서 스스로 성인행세를 한 사람이 송시열이다. '성인이 필요해.' '없잖아.' '내가 해보께.' 효종이 죽고 모든 것은 한 여름밤의 꿈으로 끝났다. 송시열이 성인이면 임금보다 높냐? 이 질문은 송시열을 죽게 만들었다.


    중요한 것은 역사를 시스템의 관점으로 보는가이다. 맥락으로 보는가이다. 공자가 성인으로 떠받들여지는 이유는 공자말씀이 지당한 말씀이어서가 아니라, 사림의 족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족보를 쓰려면 당연히 시조가 있어야 한다. 알에서 나오거나 금궤에서 나오거나 뭐 이런게 있어야 한다.


    그래서 공자다. 공자가 처음 학문의 시스템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문명의 등불이 켜진 것이며, 말하자면 제법 알에서 짠~~~! 하고 나온 느낌이 된다. 공자가 뜨면 균형을 맞추도록 관우도 떠준다. 중국의 관우신앙은 우리의 상상이상이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의하면 아무리 궁벽한 촌락이라도 관제묘는 반드시 있었다고 한다.


    공자와 관우가 만들어내는 아우라 안에서 황제가 기능하는 것이다. 맨날 오랑캐에게 줘터지는 우스운 황제니까 말이다. 쪽 팔려서 말이다. 중국사 5천년 중에 한족의 집권시기는 얼마 되지 않는다. 거의 오랑캐가 먹었다.


    조선사를 이해한다 함은 조선의 독립적인 컨셉을 이해하는 것이며, 그것은 송나라가 오랑캐에 짓밟히며 남쪽으로 도망쳤을 때, 주자가 문명과 야만의 개념을 정립하여, 선비집단의 공론에 의한 정치시스템을 제안하고, 이를 중국적 정체성으로 규정한데 따른 것이고, 이 개념을 조선에 토착화시킨 사람이 퇴계다.


    조선에 맞는 이상국가를 만들고자 한 사람이 정도전이다. 만약 이방원이 없었고 정도전의 요동정벌이 성공했다면 정도전과 이성계는 공자와 관우 역할을 나누어 맡았을 것이다. 효종의 북벌이 실패하자 성인은 필요없게 되었다. 송시열이 죽고 이후로는 성인 비슷한 것도 출현하지 않았다.


    문제는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책은 지금도 여전히 일본의 컨셉을 그대로 옮겨놓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인들은 조선의 이러한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다. 일본에 없는 소식이기 때문이다. 식민사관을 비판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자세히 살펴보면 정확하게 식민사관에 중독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의 컨셉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식민사관의 극복은 불가능하다. 조선의 컨셉을 알아채지 못하면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규정한 백범의 컨셉을 알아챌 수는 없는 일이다. 해방이후 한국사는 백범의 질문에 응답하는 역사다. 장준하와 김대중과 노무현이 응답했고 우리는 또 그 응답을 이어갈 것이다.


    무엇인가? 정도전, 조광조, 퇴계, 율곡, 정여립, 송시열은 각각의 인물이 아니라, 하나의 컨셉을 공유하고 이를 전개시켜 커다란 족보를 이룬 사람들이다. 이들은 한 가지 사건의 맥락 안에 있다. 기승전결로 이어가며 커다란 그림을 그려낸다. 그대가 그 그림을 보았는가이다.


    조선의 그림을 본 사람만이 대한민국의 그림을 알아챌 수 있다. 오늘날 서구정신을 규정하는 밑바탕은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이라는 컨셉이다. 성경은 창세에서 말세까지 일직선으로 달려가는 그림이다. 헬레니즘은 아프로디테의 석상과 같은 미학적 완전성의 컨셉이다. 영감의 원천이 되며 이심전심의 소통을 낳는다.


    오늘날 일본인들이 입고 다니는 옷은 당나라때 중국옷이다. 그들은 중국을 극복하지 못하고, 아직도 중국글자를 쓴다. 거기서 일본의 한계는 결정되었다. 조선인은 중국인 되기를 거부하고 조선만의 디자인을 만들어낸 것이 우리의 한복이다. 원래 없었고 조선시대에 새로 만들어낸 디자인이다. 


    그게 그냥 되는게 아니고 반드시 족보가 있어야 된다. 중국과 차별화 하고 오랑캐에 저항하자는 정신이 우리에게 있었기에 된다. 그러한 역사의 성취를 우리가 인정해야 한다. 왜? 우리가 앞으로 밥먹고 살려면 제조업만으로 부족하고 디자인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거기서 밥이 나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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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조업 시대는 갔습니다. 앞으로는 생각으로 밥먹고 살아야 합니다. 혼자 생각으로 안 되고 팀을 꾸려야 합니다. 스티브 잡스가 만들었던 드림팀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생각연구에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3.09.10 (20:02:32)

일본과 중국을 한국인은 대상화 하는데 익숙해 있다고 보이는데,
이는 일본에 문물을 전해줬고, 식민지로 당했기에 그리된것 같은데...


중국은 공산화 되면서부터이나,
더 들어가보면
조선시대에도 일반민중 사이에는 떼국놈이란 말을 써왔고...

한국인이 일본과 중국을 대상화하게 된것은, 조선시대에 본격화 된것 같다고 보는데, 임진왜란 병자호란이 가장 주된것 같다는.... 어쩌면 그래서 더 독자적 노선을 걸으려 했던것 같고, 임난 병난후의 조선 선비들 태도를 보아도 그렇고...

어쨌든, 이건 심한 수치심이 일본과 중국을 대상화하는 방향으로, 상처받은 자존감을 회복할 필요가 있어서 문화에 그런 기조가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네요.

일단은 대상화 하는 것에서 벗어나야 더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볼수 있을듯해요. 그런데 현재 이런 방향으로는 대상화에서 빠져나오기 어려울듯.

지금은 대상화를 하면 할수록 더 한국인만 비참해지는 상황... 나라상황이 이러하니 더욱더... 대상화 시키는 것에서 벗어나야 자존감이 회복되는 시기인듯...

박그네가 하야하면 바로 회복되겠지만....
[레벨:4]AcDc

2013.09.10 (22:12:59)

조선은 구한말 직전까지도 일본을 미개한 왜인으로 인식했으며

문명의 중심이던 명나라를 숭상했던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명나라가 청에 의해 멸망하면서 조선인들의 의식은 이제 문명국은 

조선밖에 없다는 절박함을 가지죠. 그게 소중화로 나타납니다.


18세기쯤 되면 조선인들은 중국인들을 미개하고 냄세나는 야만인으로 인식합니다.

우리가 중국인들을 '냄새나는 짱개'로 생각하는 의식의 근원은 적어도 18세기 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단순히 식민지배 만을 받았다면 상관없겠지만

조선은 특수하게도 봉건에서 근대화로 넘어가는 시기에 일본에 의해 식민지배를 받으면서 

근대문물들을 이식 받았다는 점입니다.


식민사학으로 갈것도 없이 근대화라는 의식 자체를 일본에 의해 주입되었고 

조선시대 지식층이 명나라를 동경하듯 구한말 지식층이 (현재까지도) 일본을 동경하는것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사람들이 일본은 우경화와 식민지 사죄를 안했기 때문에 반일한다고 하지만

이것을 다르게 돌려 말하면 일본이 독일처럼 사죄만 한다면 눈치볼것 없이 

일본을 더욱 동경하고 따르겠다는 의미가 되는것이죠. 


이런 의식은 식민사학보다 훨씬 무섭습니다.


문제는 한국은 한국의 정체성이 없다는겁니다.


일본 문물을 맹목적으로 탐닉하는것으로 모자라 일제강점기를 합리화하는것은 

비단 뉴라이트만의 것이 아니죠.


요 몇년간 난리치는 한류라는 것도 또한 일본이 프랑스에서 들여와 일본식으로

재해석한 '아이돌'의 개념과 기획사 시스템을 90년대에 그대로 들여와서

발전시킨것에 불과합니다.


소녀시대 음반이 프랑스에서 10장 팔린것은 당연한 일이며

원더걸스가 미국 대형 마트에서 음반 구걸하는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3.09.11 (00:15:44)

한국인이 일본문화를 접하고나서 느끼는 감정은 애증에 가까운 것이라고 봅니다.
왜냐... 일본은 본토를 점령당한적도 없고, 근대화가 우리나라보다 먼저 진행되었고 그 상태로 쭉 진행할 수가 있어서, 동양문화와 서양문화에 탐닉할 시간이 충분하게 있었지요.
그러다보니 그들의 성취도는 높았지요. 100년전에 일본인들의 글이나 사상은 벌써 현대적은 것이어서 지금과도 큰 차이가 없다는게, 한국인을 좌절시키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경술국치 이전의 시대로 대략 올라가보면, 18~19세기 20세기초에는 조선에도 연암, 다산,추사,초의, 경허 등의 현대적 감각을 가진 지식인이 있었지요. 단지 이들을 이어갈
시대적 상황이 따라주지 않았다는게 안타깝고 아픈거지요.

100년전 혹은 200년전은 큰 차이가 없었는데, 조선말기부터 20세기 중반까지... 한반도에서 한국인들이 주체적인 문화적 경제적 성취가 어려웠고, 학문적 쌓임이 일어나지 않았지요.

그러다보니, 일본을 접한 한국인들에게는 그 간격이 너무 크게 여겨져서 선망과 두려움과 좌절을 동시에 겪은거라고 여겨집니다. 서양에 다녀온 이들도 마찬가지였다고 보이구요. 밖을 보다가 한국을 보면 답이 안나왔기에 갈등 역시 컸다고 여겨집니다. 지레 질리게 되는거죠.

식민사관보다 더 무서운 것은 가져와야 할 것을 가져오지 못하는 거라고 봅니다. 동경과 주체적 수용은 다르다고 여깁니다.

통일신라시대 원효의 대승기신론소...그리고 승려들의 당나라 유학...그리고 중국에서 선불교 쇠퇴..고려로 선불교가 옮겨옴. 문화나 사상이나 흐름이 있는데, 그것을 어디에서 받아내는가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왜냐 이 흐름으로 보면 전체적으로 보기 때문에 구별이 없지요.
유학의 흐름도 그렇구요.
일본에서는 다도를 받아내어 발전시켰고, 이러한 미학이 삶에 적용되어 삶과 문화전반으로 퍼져서 현재 일본인들의 삶의 방식과 정신성, 그리고 양식에도 스며들어들어서 일본문화를 이룬거지요.
한국도 선불교 유교가 스며들어 삶의 양식과 문화와 정신성에그 영향을 주었고, 한국문와를 일궜지요.

그런데 지금 일본에 대하여 한국이 식민사관을 걷어낸다 하여 일본에 대하여 두려워 할 필요가 있을까? 일본문화에 대해 한국인의 생각에 대한 태도를 굳이 저어할 필요가 있을까 싶어집니다.

문화는 흐르고, 한국은 예전 선불교나 유교를 받아 내어서 독창적 문화로 흘렀듯이, 이제 일본의 문화에서 한국이 받아 내야 할게 있다면 받아내야 한다고 봅니다. 쉽게말해서 받을것 받는 것이고, 어차피 흐르는 것을 그냥 받는것 뿐이라고 여겨집니다.

한국은 이제 그 준비를 해야 하는거지요. 받아서 어떻게 주체적인 문화를 새롭게 만들어 나갈지 그 고민을 해야 하는 거라고 봅니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흐를 수밖에 없는 구조이고, 한국은 그것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100년전의 그리고 그후 동안 그들이 쌓아온 문화적 성취를 한국은 활용할 필요가 있고, 새롭게 업그레이드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현재는 고여 있는것과 같으므로.... 문화사적인 것은 전체 흐름의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고 여깁니다. 이러한 역량이 결과적으로 삶에 침투되어야 하고 양식을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 양식의 수준을 높여야 현재 한국사회의 문제가 풀린다고 봅니다. 그리고 다시 확산시키는 거지요. 문화수출...

지금 시대에 그러한 일을 해주어야 한국의 미래도 밝아지지 않을까...싶습니다.
[레벨:4]AcDc

2013.09.11 (01:03:45)

세계관이란것이 상당히 강력한 프레임입니다.


성리학에서의 이상적인 세계관은 사농공상으로 왕은 왕답게 사대부는 사대부답게 

농민은 농민 답게 자신의 위치에서 벗어 나지 말며 농부가 근본이고 태어난 지역을 

평생 벗어나지 않고 잘 살수 있다는 그런것들이 있지요.


그래서 혁명도 역성혁명이 할수 있는 최고 라는 것입니다. 사대부들에 의한 소위 의회정치는

꿈도 꾸지 못했기에 만만한 왕족을 골라잡아서 옹립하는것이 그 세계관내에서 할수 있는

최고의 경지였던 겁니다. 그 이상의 의식은 차마 상상을 할수가 없어요. 


사대부계급에 의한 의회정치도 상상할수 없는 성리학적 세계관에서 민중들에 의한 

의회정치는 존재하는지조차 모르는 그런 개념입니다.


의회정치나 공화정 이런 수단은 그에 맞는 세계관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그런 세계관이 없는 상태에서 의회나 공화정을 가져오면 자식들이 대를 이어 정치하는

일본처럼 되는것이죠.


조선이 붕괴되기 직전에 그런 세계관이 만들어졌고 그것이 '동학'입니다.

전봉준의 동학혁명은 그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것이 아니라 단순한 역성혁명이었지요.

전봉준 자신도 사대부였기에 그 성리학적 세계관을 극복할수 없었습니다.


전봉준에게 '일군만민'을 포기하라는것은 현대인에게 '민주주의'를 포기하라는 소리인겁니다.


그 동학농민혁명이 의견이 분분한 이유도 동학혁명이 단순한 역성혁명이었기 때문입니다.


1. 고종 주위 간신배를 제거하고 일군만민의 나라를 만들자.

2. 고종은 사실 성군이 아니라 꼴통이었음.

3. 대원군 이하응을 왕으로 옹립하자.


이것이 동학농민혁명의 현실이자 한계였지요.

 


사실 일본의 근대화라는것도 수천년간 이어져온 서구문명을 단 100년만에 소화시키기에는

턱없이 짧은 시간이라서, 극히 일부만을 소화하고 나머지는 무비판적으로 수용했지요. 


흔히 '일본식 용어'라고 하는 수많은 근대문물을 나타내는 단어들도 사실은 중국의 고서에서 

인용한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일본인들이 소화하고 재해석해서 새롭게 만들어낸 단어들이 아닌것이죠.


그래서 일본도 외래어들이 많습니다.


일본이 서구 근대문명을 빨리 습득할수 있었던것은 동양문화권내에 비주류였기 때문이었죠.

일본은 독자적인 세계관이랄게 없었기에 서구근대문물의 슥득에 꺼리낄게 없었습니다.

반면에 조선은 주류에 속했고 소중화 이후부터는 화이관을 바탕으로 성리학적인 세계관의 

극단까지 가게 됩니다.


조선은 붕괴될수 밖에 없던 태생적인 운명이 되는겁니다.


상이한 서구문명이 들어오면서 동양문명의 중추를 자임하던 조선은 사실 서구문명을 

흡수하는것이 아니라 내부적인 성리학적 세계관 자체가 붕괴될수밖에 없었던 운명이었죠.


양란 이후 조선은 형이상학적인 유심론에 빠져들어가면서 현실과 동떨어집니다. 

그 학살을 당하면서도 천주교도들이 끊임없이 늘어났던것은 조선이 성리학의 극단까지 갔지만 

한계를 봤고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극대화된것 이었지요.


조선은 사실 대한제국이 세워질 무렵에는 조선을 지탱해 왔던 모든것들이 붕괴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제가 안타까운것은 이 시기가 우리나라의 정체성을 새롭게 하는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는 점입니다.

이 아슬아슬한 시기에 일본이 침탈하여 일본식 근대문물을 주입하면서 식민지배를 받게 되고


그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잘 아시겠지만 경제개발과 반공으로 찍어누르며 모순을 억제하는 기형적이고 정체성이 없는

껍데기만 남은 나라가 되었지요.


한국이 이런 상황인것은 지리적 고립이나 경제적인 문제도 있겠습니다만

사실은 정체성이 없는 모순으로 인해 내부에서부터 붕괴 되어간다고 생각합니다.


전에는 서슬퍼런 권위주의로 억눌었지만 민주정부 10년동안 권위주의가 해체되면서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고 봅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3.09.11 (01:52:05)

AcDc님의 견해를 종합하면...나라를 새로 세워야 한다입니다.
그럴 수 있으면 좋겠지만, 나라를 새로 세우는 것도 통일도 지금은 크게 현실성이 없지만, 어떤 나라를 꿈꾸는가에 따라서 지난역사와 현실을 재해석 해낼수 있다고 봅니다.

지금은 정치가 문제이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한번도 뭔가에 대해서 제대로된 의사결정을 한적이 없다는 겁니다. 늘 끌려다닌거죠. 그래서 피곤한거라고 봅니다. 해보자는 사람도 끌려가는 사람도... 결과에 대해서 책임지기 싫으니 그런거겠죠. 그래서 알아서 다 해주겠다는 사람을 좋아라 하는 건지도 모르지요.

저는 그것을 바꿔야 한다고 보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치적 결단성이 조금 약하다고 보입니다. 이 결단만 하면 방향을 바꾸는데 문제가 없는데...그게 안되고 있다고 여깁니다. 금세 양비론이 되거나, 안되는 이유를 수백가지를 내밀거든요.ㅋ
[레벨:2]제리

2013.09.11 (08:49:27)

좋은 글 추천합니다

[레벨:3]코페르니

2013.09.11 (09:25:24)

동양사의 얼개를 볼 수 있는 글이다.

식민사관에 찌들어 조선을 바로 보지 못했으나, 역사학자들의 고증과 새로운 시각으로 우리 역사를 볼 수 있는 틀이 되는 것 같다.

역사는 도전과 응전이며, 역사는 역사를 보는 시각에 달려있다라는 명제는 동서고금의 진리인 듯하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근대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고, 식민통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조선의 찌질함을 강조하였고, 소위 민중사관은 혁명의 당위성을 위해 조선양반사회의 모순을 극대화하였다.

그럼, 조선시대에 유학과 유교의 의미는 무엇인가? 고려시대까지의 왕권신수설과 무인무단정권의 폐해의 마지막 자락에서 왕권과 사대부의 균형을 이루려는 정도전의 나라였다는 것이 구조론이 조선을 바라보는 시각인 것 같다.

발생에서 부터 몰락까지 일원화된 역사의 큰 줄기를 보여주는 것이 서양에서 기독교의 생성과 발전과 몰락을 보는 느낌이다.

다만 실학이라고 후대사람들이 규정한 정약용과 그 친구들은 유학과 과학과 서양종교를 결합하려는 이단의 무리들로 그동안 폄하되기도 하고, 과잉평가되기도 한 측면이 있다.

사색당파의 문제는 상대당의 구족을 멸하는 결과까지 초래하는 문의 전쟁으로, 일본 쇼군과 사무라이들의  사생결단의 전쟁들과 유사하다.

위 댓글들에서 보면 우리나라의 일본과 중국에 대한 피해의식과 대상화의 문제는 공감가는 바가 있다.

동북아문명의 변방이기도 하고, 중심이기도 빼앗긴 고토 만주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에 있어서, 동북4국은 역사논쟁을 벌이고 있으나 이 문제는 유럽이 제 민족의 이동과 제 왕조의 융성과 멸망으로 복잡한 경계를 그리고 지운 역사를 볼 때, 공통의 역사와 공통의 문화가 아닌가 생각을 해 본다.

만주는 한 때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땅이었고, 일본 큐슈, 나라지역과 중국 산동, 요동반도는 백제의 식민지였다는 생각들은, 당나라, 몽고가 한때 한반도를 식민지화하여 도독체제나 다루가치체제를 구축하였고, 일본이 총독체제를 구축한 때가 있었다는 사실와 마찬가지로 역사가들이 역사관에 따라 부풀려지기도 하고, 축소되기도 하는 생물과 같은 것이 아닐까.

신라, 고려의 불교의 나라, 조선의 유교의 나라가 사라진 현대한국에서 기독교의 나라가 생겼다가 망해가는 모습을 본다. 기독교의 나라가 사라진 곳, 공백, 진공상태에서 어떠한 나라가 세워질 것인가. 서양에서는 모든 근거와 믿음이 해체된 포스트모더니즘이 한 때 유행했었는데, 지금 한국이 그런 상태인 것 같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 아무도 모른 채, 하루하루 밥벌이에 허덕이고, 연예인의 신변잡기에 그저 시간을 보내는 공허한 상태. 국가대항 축구대회나 스포츠요정의 공연에 과잉몰입하는 가짜 애국주의의 파편들.

이 시점에서 큰 틀에서 크고 넓게 보는 구조론의 시각은 유효한 관점을 제공하는 것 같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3.09.11 (11:02:05)

역사학자들이 흔히 놓치는게

당시에 가장 결정적인 것은 양반의 수탈 이런게 아니라

오랑캐의 침략과 흉년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랑캐가 침략하면 기본 백만이 죽고

흉년이 크게 들어도 인구의 2할이 죽습니다. 

양반, 계급 이런건 본질을 놓치는 겁니다.

 

오랑캐를 막으려면 우리가 오랑캐가 아니라는 증거를 만들어야 해요.

거란, 홍건적, 몽골의 침략에 시달리다가 국토가 거덜난 상황에서

오랑캐가 아닌 증거를 만들어보자고 한게 정도전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가뭄이나 홍수 이런건데

임금이 제사를 잘 지내야 가뭄이고 홍수고 없어지는 겁니다.

정도전은 오랑캐를 막고 흉년을 막는 구조를 고안한 것입니다.

이게 가장 중요한 본질이에요.

 

그렇지만 말이 그렇고 실제로는

퇴계와 율곡이 나오기 전 까지는 조선이 오랑캐가 아니라는 증거가 없었습니다.

성인이 나와야 비로소 오랑캐가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곡과 퇴계가 성인후보로 받들어지고

정여립이 '성인을 뭘 멀리서 찾냐. 내가 있잖아. ' 하고 나선 거죠.

 

그러다가 오랑캐에 된통으로 짓밟히고

다시 오랑캐에 맞서자는 운동을 하는데 그 중심은 송시열.

성인이 있어야 오랑캐를 막는다는 거죠.

그래서 송시열은 공자 맹자 주자 찜쪄먹는 송자가 된 거죠.

퇴계 율곡도 못해본 성인이 된 겁니다.

 

조선의 본질은 성인에 있습니다.

이걸 빼면 조선은 남는게 없어요.

이걸 인정해야 합니다.

 

중국, 일본과 다른 한국인의 기질적 차이도 여기서 오는 겁니다.

 

 

[레벨:30]스마일

2013.09.11 (11:33:06)

역사는 얘기는 항상 재미 있는 것 같아요.

 

저는 구조론을 모를 때,

사람이 사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을 3가지로 나누고 그것에 대해서 알아보자 이런 생각을 했어요.

 

첫번째 사람이 동물적인 삶을 벗어나야 한다면, 경제를 알아야하고

두번재 기후를 알아야 한다는 것

문명의 발상지 앗시리아(초승달 지역) 현재는 사막지역이잖아요.

그런데 문명이 싹틀 때는 그곳도 온대지방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기후가 사람의 삶에 무시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변이라는 것,

또 태양의 밝기의 세기가 지구의 삶에 엄청나게 영향을 준다는 것,

이런것을 생각하니까 기후가 참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세번째 현대는 어떻게 이루어졌나?

 

요새 궁금한 것은 현대는 어떻게 이루어졌나를 찾다보니까, 역사책을 보게 되더라구요.

또 근대의 시작이 서양이다보니, 서양의 역사책을 읽게 되는데,

왠지 로마사에 한번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정작 한국사는 왕들의 순서 밖에 모르는데,

한국사도 읽어야 겠지요?

 

프로필 이미지 [레벨:28]오리

2013.09.11 (11:18:26)

시스템 관점으로 본 조선 역사.


주요 국가 역사를 이런 관점으로 정리하는 시리즈로 나오면 좋겠습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3.09.11 (19:17:08)

한반도에서 삼국시대 혹은 사국시대(가야포함)를 보자면, 나라가 각각 독립국이다보니 각자 바닷길 개척을 통한 무역이 활발했음. 고려시대도 바닷길 무역이 원활했다고 보임.

그런데 조선시대로 와서는 바닷길을 거의 포기한 상태임. 해로를 통해 무역을 거의 하지 않고, 한다해도 중국과만 뱃길 교류를 하는데, 또 이런 이유가 중국을 통해서 그당시에는 모든 문물이 흐르기 때문인거 같음.



그런데 이미 세계는 바닷길을 통한 해양세력이 뜨는 시기이고, 육로 무역은 해양제국주의국가들보다 뒤떨어진 시대상황이 되버림.

한반도에 육로로 무역을 통하여 들어온 서구문명과 일본열도에 배를 타고 와서 직접개항을 요구하며 무역을 하자는 것에서, 그 긴장도가 훨씬 큰 곳은 일본열도 였다고 보임. 이들은 바로 변화하지 않으면 안되는 위기의식을 한반도보다 더 강하게 인식하였다고 보임.

반면 한반도는 완만하게 진행. 신기한 서구물건을 보는 호기심 정도...생존과 관계된 그런 심각한 위기의식은 없었다고 보임.

육로를 통해 들어온 서구문물은 간접적 영향에 가깝다면, 해로를 통해 들어온 서구문물은 직접적 영향에 가까워서 바로 써먹을 수 있는 서구문물이 들어옴.

정치 사회 제도 교육...서구의 시스템이 들어온 것. 개별적인 사물이 아니라 사건에 합류하게 된것. 그 시대의 흐름에 바로 편승하게 됨.

해양제국주의시대로 세계가 재편되면서 일본이 먼저 근대화되고 그 압력은 한반도를 통해서 중국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고 보이는데, 조선이 일본이나 해양의 변화에 너무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 패착이라고 생각됨.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하고(내부에 전체로 다 퍼지지는 않았다 하여도 중심축이 변화에 성공하면 이미 방향성이 생겨버림), 나서 그들이 할일은 뻔함. 막부와 제국주의가 만나서 낳을 것은 뻔함.. 뻔한 수순으로 감. 침략적제국주의 실현. 그런데 조선은 세계정세에 너무 안일한 대응을 할 수밖에 없는데, 조선은 이미 시스템이 있고, 직접적 무역의 압력이 일본보다 한참 후였다는게 문제,
우려를 표한 이들도 있었으나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일본은 어느날 갑자기 보니, 변신해 있는 것과 같은 충격을 주었다고 보임. 그냥 평범한 것이 어느날 보니 몬스터로 변신해 있었던 것임. 그 변신의 시간동안 조선은 일본에 관심이 없었고, 육로무역만 하고 있었음.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3.09.11 (20:30:23)

추가하자면,

이렇게 정작 타국이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거나, 국내에서 뭔가 변화하자라고 하면 또 그 변화하자는 사람들을 반대하는데 총력을 기울임....그리고나서 오히려 타국이 뭔가 우월하거나 우월하다 여기면 바로 사대주의로 빠져버림.

국내에서 변화하자 하면 싫다고 발악을 하면서, 외부의 좋은것을 보면, 금세 좌절하여 그쪽에 붙어버림.

결국 시간을 잡는 의사결정이 안되고, 의사결정을 방해하기 때문에, 시간이 흐른 후에는 병폐가 발생함. 그 병폐는 그 땅에서 사는 이들이 다 뒤집어 쓰게됨.

뭔가 내부에서 외부의 변화를 직면하는 변화로서의 직접적인 변화는 하기 싫어하고, 외부에서 변화가 오면 그저 갈아타기만 하는 류들이 진짜 매국노임. 그래서 이들은 한번도 변화한적이 없음. 그 내면을 바꿔본적이 없다고 보임. 그저 무임승차만 함. 그래서 상황을 주도할 수 없기에 맨날 의탁하려 하고기대려 하는 사대주의를 숭상하는 것이라고 보임. 결국 안에 쌓인 것을 바깥에 퍼주는 부류들...지금 보수들이 하는 행태가 딱 그짝 아닌가...? 싶은데... 바퀸척만 하고 바뀌지 않은 자들....

일본 우익도 그점에서는 마찬가지... 바뀐척만 했기에 일본의 현재 모습이 연출된것. 바뀐척만으로는 언젠가는 한계상황에 봉착...왜? 더이상 생장점이 없기 때문에... 남의 것으로 어느정도 까지는 가더라도 스스로 밀어올린 생정점 없이는 더이상 방향을 찾기가 애매해져서 갇혀버림. 정체됨을 피할수 없다고 보임. 이러면 현상유지 하다가 퇴행하게 됨. 업그레이된 자가발전 시스템이 없기 때문. 외부가 정체되면 대신 생각해줄 머리를 잃어버린 것과 같아서 스스로 생각시스템이 돌아가지 않기때문. 즉 남의 머리에 얹혀가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것. 바뀐척만 하는 것은 자기 생각머리가 없는 것과 같음.

일본이 서구문명으로 빠르게 근대화 했지만, 얹혀가는 것이 많았음. 더이상 방향성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한계에 다다른것. 업그레이된 자가발전 생각머리가 없다는 것. 서구가 대신 생각해주는 것이 현재 멈춰진 상태에서 일본도 멈춘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일본이 멈추니 한국보수들 생각도 멈춘것. 그러니 계속 퇴행적 행동을 하는것. 박그네만 봐도 국정원만 봐도...계속 못된 행동 반복하고 있음. 한번도 바뀐적이 없음.
[레벨:4]AcDc

2013.09.12 (01:09:29)

그나마 경제나 상업부분에서 관대했던 명나라에서도 골수 사대부들 입장에서는

자신이 태어난곳을 떠나서 상업활동하는것 자체를 극히 꺼렸습니다. 성리학적 이상향이라면 

요순시대마냥 농부가 땅을 파먹으면서 자신이 태어난곳에서 평화롭게 살다 죽는것이죠.


그나마 다른 이념들에 관대했던 명나라도 이정도였는데 칼같던 조선에서는 어림도 없었습니다.

명나라가 망하고 난뒤에는 성리학적 세계관에 대한 원형 숭상이 극히 심화되었지요.

원리주의처럼 말이죠.


명태조 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우고 난 이후 해금령을 내린것이나 (정화함대 이후)

태조 이성계가 조선이 건국한 이후 해금령을 내린것도 이런 맥락이 아닌가 합니다. 


성리학을 비교적 늦게 받아들인 도꾸가와 막부 부터는 해금령 비슷한것을 하긴 하지만

통상까지 막지는 않았지요. 이후 도꾸가와 막부의 통제력이 상실되면서 느슨해 진 틈을 타

각지의 번국들이 독립적으로 움직이지요. 이것이 이후 메이지 유신으로...


일본은 서구문명중에서도 자본과 산업만을 잘써먹었지만 나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

일본 제국 시기에서도 일본 주류 경제학계에서도 일본은 봉건자본주의에 불과하다는 말들이

나올 정도였으니까요. 서구 공화정을 흉내내본 다이쇼 데모크라시도 금방 없어지고 


본성을 들어내지요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3.09.12 (05:29:52)

서구문명을 다방면에 잘 써먹었지요.
또한 일찍 서구와 교류했기에 자신들 문화를 적극적으로 알렸구요.
그당시 일본인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하는게 당연한거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본문화를 동양문화의 대표문화 그러니까 일본문화 =동양문화로 서구에는 알려지게 된거 같아요.
자신들 문화는 동뱡문화의 엑기스를 다 가지고 있다 생각해서 동양문화의 진수, 동양에도 수준높은 문화가 있다라 알린 것. 그래서 결과적으로 일본문화가 곧 동양문화라 생각한 서구인들에게 동양은 곧 일본이라는 인식이 심어진것 같다는. 어쨌든 일본의 젠은 다도에도 영향을 미쳤고, 다도미학은 일본의 건축(궁,사찰, 일반건축) 정원 회화 복식 생활양식 등등 거의 모든것에 영향을 미쳤고, 이는 다시 서구로 가서 젠문화를 형성하여 서구의 디자인에 영향을 끼쳤음.

해양에서 뻗은 흐름은 일본을 기점으로 지구전체에 영향을 끼쳤으나, 이제 다시 돌고돌아 육로가 다시 개척될 시점인 것임. 아마도 한반도가 경제력이나 문화적 성장이 없었다면 육로는 별 의미가 없을 것이나, 이제는 육로를 다시 연결하고 길을 여는데 의미가 생겨버림. 어디가 축이냐에 따라, 또는 남은 길은 이제 육로만 남아 있기 때문. 육로라면 당근 한반도가 유리한 고지.

이리 생각되네요.^^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3.09.12 (05:40:22)

일본에 특별히 있는것은 없었으나, 도자기와 다도가 있어서 일본이 서구에 먹혀든것.
일본에서 도자기가 발달할 수 있었던것도 다도의 영향. 일본인들의 생활양식 전반의 틀을 잡아준것도 다도미학.
유형의 형태로 퍼포먼스 형태로 남아있는 다도가 일본을 먹고살게 하고 자존심을 세워준것과 같음. 다도에서 나타난 다양한 미학이 일본인들의 삶에 영향을 줌. 수준을 올려준 것임. 이것이 서구인들에게 일본문화의 미로 비춰져서 서구인들이 수용했던 것이라고 보임. 물론 일본인들도 서구문물을 정신없이 받아 들였지만.
[레벨:3]코페르니

2013.09.12 (08:24:29)

일본의 도자기, 다도문화도 사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도공들의 장인정신이 빚어낸 것.

그 이전에도 고려청자, 그 이전 백제, 신라 도자기들을 보면 미학적인 완성도가 뛰어났었죠.

한반도에 그전부터 있어왔던 전통과 문화가 천대받고, 멸시받던 것이 일본으로 가고, 외국으로 가면 꽃을 피우고, 융성한 문화가 되는 것은 문화의 접합과 창조과정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요.

그럼, 한국의 도자기, 다도문화와 선불교와 성리학의 전통이 완성될 즈음 일본으로 전파되고 흡수발전과정에서 일본 특유의 마무리 터치문화를 거쳐서 상품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듯.

예전에 이면우교수의 "X이론을 만들자"가 그런 류를 보여주는 것이었는데.

요즘 얘기되고 있는 창조경제와 안철수식 새정치도 그런 식의 융합과 창조를 말하는 것인데, 좀 뜬구름 없기는 해요.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3.09.12 (08:53:29)

일본이 백자를 만들고 난 이후에 ...타이밍 맞춰 네덜란드 무역선이 일본에 오고...ㅋㅋ
이미 백자는 중국과 한국에서는 만들어진 이후에 일본은 백자 만들기에 성공...
일본문화에는 일본다인들의 지대한 공이 스며들어 있다고 봐야지요. 일본다인들이 추구한 미학이 일본문화 전반에 스며들어 갔으므로...

*예전 글 인용

* 일본 다도 형성 : 중국 선불교 선사인 원오극근의 다선일미 법어를 일본 승려 구큐조류가 받아서 돌아갔고, 백운수단 의 법손자인 허당선사가 이은 화경청적 (경산차=경산다연)을 일본 승려 원통대 응국사(난포조묘)가 가지고 돌아갔다. 이 두개의 선차어가 만나서 근세 일본다도는 완성되게 되었다. 또한 여기에 조선의 매월당 김시습의 초암차가 일본에 건너가서 무라 다슈코(1422~1502)가 초암다법을 창안하 면서 그 정신을 다케노죠오(1502~1555)와 센 리큐(1522~1591)가 이어 와비차로 대성 하면서 오늘날까지 그 정신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현재 초암차 전래 를 부정하고 있는 상태며, 원오극근 선사의 묵적이 법어가 아니라 인가장이라고 하고 있는 중이며, 중국은 인가장이 아니라 단순히 법어라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드는 생각은 일본다도는 다선일미와 화경청적으로 정신적 충족을 채웠다면 그 다도를 구현할 문화적 형태의 완성인 다실은 초암차와 조선의 차문화를 받아 들였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되기도 한다. 즉 조선의 정신적 차 문화가 스며들어 구형된 초암과 기물을 통하여 정신과 물질이 결합된 다실을 구현한 것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
일본다도는 이 다실을 통하여 정신을 구현하는데, 이 다실 꾸미는데서 미학이 급속도로 발전함. 하나하나에 정신성을 부여하기 때문에 고도의 절제된 미가 필요해짐. 그 결과 심플해짐. 여기서 축적된 미학은 일본인들의 삶의 양식에 영향을 미침...그 결과 삶과 문화전반의 수준 향상. 삶을 업그레이드 시킨 것임. 이런 기반이 형성되어 일본이 개항하고 나서도 일본문화를 가지고 서구속으로 들오갈 수 있었다고 보임.

일본에서 일본다도가 주는 중요한 점은 삶의 양식에 침투하여 수준을 높였다라는 것이 중요함. 다실안에 다도가 갇힌 것이 아니라 다도미학이 삶과문화 전반에 확산되어서 일본인의 국민성에 영향을 끼친점. 전반적으로 상향 평준화를 이루어낸점. 미학이 삶에 파고들어갔다라는 것이 중요함. 쓸모가 발생한 것임.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지점은 이 대목. 미학이 삶에 침투하는 그 지점...미학이 삶에 침투하면 생활양식이 바뀌므로 인해서 삶의 질이 향상됨. 삶의 질이 향상되면 정신성도 같이 올라감. 즉 교양의 상향 평준화를 이루게 됨.

미학이 왜 우리에게 필요한가에 대한 예시가 된다고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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