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이 풀숲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요. 그리고 미(美)가 눈에 보기 좋은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요. 먼저 미학적인 관점을 획득해야 합니다. 저의 미학에 대한 글을 참고하실 수 있습니다.
‘예쁘다≫곱다≫어울린다≫아름답다≫멋있다’로 갈수록 소통의 밀도가 높아지는 것이며, 결국 미는 소통가능성인 것입니다. 결국 예쁜 것이 미가 아니라 멋진 것이 미지요. 이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전태일 열사가 목숨을 내던진 것이나 영화에서 주인공이 연인을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은 예쁜 행동이 아니라 멋진 행동입니다. 어미 사슴이 새끼를 위해 목숨을 거는 것도 예쁜 것이 아니라 멋진 거죠.
인간도 자연의 일부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추구하는 성공이나 명성이나 이런 것도 본질에서 자연의 미와 같습니다. 멋진 남자 혹은 여자를 원하는 것도 혹은 자녀를 낳는 것도 역시 같은 것입니다.
자연을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그러한 추구는 파편화 되고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이지 인간과 자연이 분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모든 가치추구가 결국은 자연의 본성에서 유도된 것입니다.
장인이 걸작을 만든다거나 연주가가 고집스레 나아간다거나 화가가 붓을 놓지 않는다거나 그 본질은 자연과 같지요. 그러므로 좋은 음악을 듣거나 좋은 차를 마시는 것도 자연과의 소통입니다.
자기 안의 이상주의적인 본성을 끌어내는 것이지요. 자기 안의 사랑을 끌어내고 욕망을 끌어내고 열정을 끌어내고 분노를 끌어내는 것입니다. 그것을 끌어내지 못한다면 감성이 무딘 경우지요.
멋진 폭포를 보고도 ‘음 시원하고 좋구나’ 하는 정도면 허무하지요. 이 순간 완전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대로 시간이 정지되었으면 하는 느낌을 가진다면 진리를 위해 목숨을 던질 자세를 얻는 것입니다.
자연의 미를 포착한다 함은 호연지기를 얻어서 그 점에 있어서 절대 양보하지 않는 고집을 얻는 것입니다. 사랑의 극한, 욕망의 극한, 열정의 극한, 분노의 극한, 자유의 극한, 고집의 극한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완전히 홀린듯이 몇 시간이고 며칠이고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그런 경험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인간은 버릴 것과 취할 것을 구분하는 눈을 얻게 됩니다. 양보할 수 없는 지점, 타협할 수 없는 지점의 존재를 알게 됩니다.
자연의 완전성은 물론 소통가능성입니다. 완전해야 통하니까요. 완전히 피지 않은 꽃은 향기가 없습니다. 완전히 맺지 않는 열매는 씨앗을 전하지 못합니다. 완전하지 않은 채로 태어나는 아기는 없습니다.
완전한 목수와 완전한 도공과 완전한 연주자와 완전한 화가는 눈빛만 봐도 통합니다. 김기덕, 이원규, 공지영, 안치환 등이 지리산에 피아산방이라는 아지트 하나 묻어놓고 쑥덕거리는 것은 무엇인가 통하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결국은 깨달음이지요. 자연의 완전성에서 유도하여 내 안의 완전성을 끌어내기입니다. 완전하지 않은 꽃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내 안에서의 온전한 목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완전히 까다로와지는 것이지요.
● 자연의 완전성 곧 진리≫에서 내 안의 완전성 곧 깨달음≫을 유도하고 이를 토대로 사회의 완전성 곧 이상주의≫로 나아가는 거지요. 소통을 매개로 힘을 합쳐 완전한 공동체, 대안의 이상적인 가족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