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록
read 11472 vote 0 2008.02.15 (00:08:54)

짐짓 지나가는 말로

왜 이러세요. 이거 당신한테 하는 이야기 아니오. 이 글은 도움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이 글이 님을 위한 글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글은 글 자신의 논리를 따라갈 뿐이니까. 그리고 타인의 인생에 개입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좋지 않으니까. 사람들이 진짜 원하는 것과 겉으로 원한다고 말하는 것은 언제나 다르니까. 속마음은 자기 자신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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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오셨습니다. 솔직한 고백 보기 좋습니다. 이곳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발목 잘리기 싫은 사람들이 케피소스 강가로 하나 둘 도망치다 보니 우연히 만들어진 작은 마을이자 피난처입니다. 님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으나 이곳에 비슷한 경험을 가진 사람이 많으니까 일단 본전은 될 것입니다.

인생에 얻을 수 있는 것은 세 가지 밖에 없습니다. 자부심, 친구, 의미지요. 이곳은 천재도 있는 곳이 아니고 천재만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자부심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비슷한 사람이 모여 있으니 친구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빈 터에 처음 울타리를 치고 길을 내고 집을 짓고 새로 시작하는 곳이므로 대대손손 전해진다면 거기서 의미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곳은 대놓고 정답을 말하는 곳입니다. 남이 모르는 정답을 특별히 알고 있어서 그 정답을 말하는 곳이 아니라, 자기 안의 정답을 본인이 스스로 끌어낼 수 있게 하는 진정한 의사소통의 언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언제라도 정답을 말하는 곳입니다. 말해도 되는 곳입니다. 눈치보지 않아도 되는 곳입니다. 신을 말하고, 진리를 말하고, 자유를 말하고, 사랑을 말하고, 소통을 말하고, 미학을 말해도 되는 곳입니다.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말들입니다.

보통은 그렇지 않지요. 신을 말하면 감히, 진리를 말하면 어쭈, 자유를 말하면 얘가, 사랑을 말하면 꼴값, 소통을 말하면 건방, 미학을 말하면 코웃음 이렇게 되지요. 신을 말하면 불경죄, 진리를 말하면 건방죄, 자유를 말하면 오만죄, 사랑을 말하면 눈꼴신 죄, 소통을 말하면 잘난척 죄, 미학을 말하면 결벽죄, 이렇게 되고 말지요. 그러나 이곳에서는 대놓고 말합니다. 그것이 정답이니까 말합니다.

물론 그 정답이 님의 문제해결에 도움이 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때로 문제를 해결하기 원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 그 자체를 소유하기를 원하니까요. 문제의 해결은 가난한 그 사람의 유일한 재산일 수도 있는 그 문제를 빼앗는 결과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옛날로 치면 지식인은 글을 못 쓰면 폐병이라도 앓아야 하고, 미녀는 시집을 못 가면 백혈병이라도 앓아야 하고 뭐 그런게 있지요. 가진 것 없는 사람이 고민 하나 없고 비밀 하나 없다면 너무 슬프니까.

어쨌든 이곳은 단도직입적으로 정답을 일러줍니다. 물론 때로는 정답이 없는 문제도 있습니다. 고칠 수 없는 병도 있지요. 그 병은 ‘이미 정답을 알고 있다병’입니다. 용한 의사라도 스스로 진단하고 스스로 처방하는, 그래서 의사는 단지 환자가 원하는대로 처방전만 써주면 된다고 우기는 환자는 치료하지 못합니다.

물론 그 경우에도 전혀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환자를 치료하는 방법은 그 환자에게 다른 환자를 붙여주는 것입니다. 보통은 종합병원 대기실에 하루종일 죽치고 있다가 대기하고 있는 다른 환자를 꼬셔서 즉석에서 의사노릇을 하게 되는데 그 방법으로 몇 명의 환자를 고치게 되면 그 병은 저절로 낫습니다.

이를 나쁘게 볼 필요는 없습니다. 프로이드도 그런 환자 중의 한 사람이었지요. 스스로 진단하고 스스로 처방하고 그러다가 진짜 의사가 되어버린 사람, 종합병원 대기실에서 탄생한 명의. 이건 비유입니다. 이 이야기를 비판으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이 말은 님 한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이 아니라 실은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입니다. 남의 병을 치료해야 자신의 병이 낫습니다. 저 역시 남의 병을 치료하는 방법으로 저 자신의 병을 치료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인류를 구원하겠다 선언하고 나서면 사기꾼입니다. 자기 자신을 구원하다 보면 결과적으로 남도 구원하게 되는 것이고, 남을 구원하다 보면 얼결에 자신도 구원되는 것입니다. 구원을 전염시키는 거지요. 인간의 병은 원래 그렇습니다.

님이 스스로 환자라고 주장하는 한 낫지 못합니다. 님이 의사가 되지 않는 한 낫지 못합니다. 님은 자신의 병을 알고 있습니다. 진단도 처방도 나와 있습니다. 님은 이미 답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입니다. 전혀 의사의 말을 들을 자세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정 의사의 말을 듣기 싫으면 본인이 스스로 의사가 될 밖에요. 스스로 진단하고 처방하면서도 의사가 되기를 거부하고 계속 환자 노릇만을 고집하겠다면 정말 피곤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어리광이지요. 이곳에서 다 치료되는데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는 어리광병은 치료되지 않습니다.

우선 하고 싶은 말은 놀라지 말라는 것입니다. 놀랄 일은 어디에도 없습니다.화를 낼 일도 아니고 씩씩거릴 일도 아닙니다. 흥분할 일이 아닙니다. 핏대 세우지 마세요. 그런 것들은 다 님이 님의 드라마를 각색하기 위하여 여기저기서 주워모아놓은 요소들에 불과합니다. 님이 애지중지 하는 보물이지요. 그 점을 직시해야 합니다. 이곳은 대놓고 말하는 곳이니까요.

인생 별거 아닙니다. 지푸라기 같은 것이지요. 죽음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삶과 죽음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습니다. 삶이 죽음보다 낫다는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 오늘 죽는 내일 죽든 달라지는 것은 하나 뿐입니다. 그것은 지금 내 이야기가 공허해진다는 것이지요.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어지니 말을 이어갈 수 없는 거지요. 어쨌든 청중이 있어야 말할 수 있으니까 한 사람이라도 죽는 것 보다 사는 것이 낫습니다. 변사 입장에서는 그렇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사람 잘 안 죽습니다. 이건 제 경험입니다. 영하 16도에 이불 안 덥고 논바닥에서 노숙해도 안죽더군요. 그렇다고 흉내내지는 마십시오. 실험할 일은 아니니까. 그리고 설사 죽는다 해도 그게 대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님의 드라마를 이어가지 못했다는 사실 뿐. 큰 고통은 큰 소재이고 큰 이야깃거리인데 그 이야기 완성하지 못했다는 아쉬움 뿐. 지식인이 폐병에 걸리고 미녀가 백혈병에 걸렸으면 그걸 소재로 삼아 그럴듯한 영화라도 한 편 찍어야 할 판인데 그냥 중단하면 허망하다는 거죠. 그것이 신이 내게 내 준 큰 숙제가 되고 큰 비밀이 되는 건데 그것도 자랑이라면 자랑인데 만인의 시선을 주목시킬 만큼 큰 소식이 되는 건데 마이크 잡고도 한 마디 말 남기지 못하면 애처로운 거죠. 신의 비밀 전령의 아쉬움은 그게 다.

그리고 어른이 된다는거 참 좋습니다. 어른이 못되고 죽는건 실패지요. 왜냐하면 그게 알고보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거든요. 두려움이라는 거추장스런 보호막을 걷어버리면 그만인 거죠. 별거 아닙니다. 편리 그것이 어른입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편리하게 생각하는 거지요. 돈이 없다. 곤란하다. 이건 어른이 아니지요. 안 먹으면 된다. 이게 어른입니다. 남들이 손가락질 한다. 창피하다. 이건 어른이 아닙니다. 무시하면 된다. 이게 어른이지요. 그렇게 편리하게 결정하는 거지요. 뭐 자기가 선택하고 자기가 책임지는 거니까. 피해를 봐도 자기가 당하고. 자기 위에 아무도 없으니까. 꾸지람 할 사람 없고 감시할 사람 없고 뭐라고 그럴 사람 없으니까. 그게 어른인 거죠. 단지 혼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원래부터 혼자였으니까.

그리고 그냥 사는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쌀 한 말만 있으면 몇 개월은 살 수 있습니다. 시골에 빈 집은 널려있구요. 외국으로 가도 되구요. 토굴을 파고 산 속에서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 가끔 TV에도 나오지요. 한 달만 일하면 1년 정도는 혼자 살 수 있습니다. 자유지요. 이미 자신이 어른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남들에게 인정받으려는 어린이의 욕망을 버리기만 하면 됩니다.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아쉬움 때문에 어른이 못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른이 아니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온전히 혼자가 되어보는 것이 좋습니다. 아무도 미워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될테니까요.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벌레 한 마리, 조약돌 하나 그 속에 온전한 우주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우주와 친하게 되면 인간들이 사는 그 세상에 대한 관심은 엷어집니다. 이 우주와 저 우주 사이에 자신이 임의로 하나를 선택할 수 있게 되면 자기가 주인공인 거지요. 깝치는 자들 앞에서는 언제든지 저 우주로 훌쩍 떠나버리면 그만이니까 누구도 내게 스트레스 줄 수 없지요. 자신의 우주를 갖지 못하고 이 우주 안에서 이 많은 인간들과 비벼대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골치아픈 거지요. 먼저 자신의 우주를 완성시키고 와서, 자신의 이야기를 품은 다음에, 신의 비밀 지령을 완수한 다음에, 내 맘대로, 내가 하고 싶은 만큼만, 내 의도대로 움직여지는 만큼만, 아주 쬐끔, 발가락 끝만 살짝 이 우주에 담그는 거지요. 인간들이 어쩌나 보려고 말입니다. 그리고 낄낄거리는 것.

여기까지가 서론이고 본론은 당신이 알아서 덧붙여 적어보시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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