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사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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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4433 vote 0 2008.12.29 (12:49:43)



파리떼들의 왕 벨제붑

공산주의가 자산의 집단적인 공유를 주장한다면 파시즘은 봉건적 서열구조에 의한 권력의 공유 시스템을 강조하는 측면이 있다. 둘 다 전근대의 집단주의적 사고방식임은 물론이다.


한국에서 국군의 내무반이라면 어떨까? 병사들은 이등병 때 고생한 사실을 만회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억압적인 위계질서를 추구하는 측면이 있다. 상병들은 일병들에게 행사하는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거짓시늉으로 ‘하늘 같은 병장님’들에게 복종하는 척 한다. 또 일병은 이등병에게 행사하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상병들에게 복종하는 척 한다. 고참은 하느님과 동기동창이라고 말하며 죽으라면 죽는 시늉을 해야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 역시 우스꽝스런 연극행위다.


권위주의적인 가부장제도 하에서, 자신의 알량한 권력을 지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국가 파시즘을 옹호하고 묵인하는 경향이 분명히 있다. 자신이 그 권력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더 큰 추상적 가치를 위하여 기꺼이 희생을 감수하려 드는 측면이 분명히 있다.


노예근성이다. 야만의 시스템이다. 계몽되지 못한 그들은 전근대인이다. 그들은 임의로 특정 세력을 반역자로 규정하여 집단의 폭력을 행사하는 방법으로 자신이 부분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집단의 피라미드형 권력시스템 자체를 강화하려 든다.


중, 고등학교의 교실에는 특정인을 왕따시켜서 위해를 가하는 방법으로 권력을 창출하고 급우들 간에 위계서열을 정하며 거기서 얻어지는 조직폭력배와 같은 집단의식의 쾌감을 맛보려 하는 심리가 만연해 있다. 그 밑바닥에 원시의 본능이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야 한다.


1983년 노벨상을 수상한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은 이러한 원시의 가학본능을 다루고 있다. 파리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악마 벨제붑의 이름을 빌어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파시즘의 야만성을 폭로하려는 뜻이다.

  

왜 이지메를 하는가? 학생들이 못되어 먹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거기에 인류학적인 이유가 작용하고 있다. 은밀한 원시의 본능이 개입하고 있다. 내버려두면 기어이 야만의 시스템이 고개를 쳐들게 된다.

  

전쟁을 벌여놓고 광기어린 집단의 물리력 행사에서 쾌감을 맛보고 희열을 느끼는 미국인의 심리가 그러한 파시즘의 연장선상에 있음은 물론이다. 그들은 내부에서 적을 발견하지 못하면 외부에서 전쟁을 벌여서라도 기어코 적을 조달하는데 성공하고야 만다.



파시즘의 권력승수효과

일본인들은 실생활과 별로 관련이 없는 회사나 공공단체의 집단적인 소유 혹은 그 과소비에서 기쁨을 느끼고 의미를 부여한다. 그 과정에 상당히 연극적인 요소가 있음은 물론이다.


영국인들은 실제로는 거대한 낭비에 지나지 않는 여왕과 그 왕궁을 소유(?)함에 있어서 상당히 만족해한다. 독재치하의 일부 필리핀인들은 화려한 대통령궁에 어울리는 멋진 영부인 이멜다 여사를 소유(?)하는데서 기쁨을 느낀다. 그것은 일종의 연극이며 그 연극은 희극이면서 동시에 비극이다.


어차피 인생은 ‘공수래공수거’라 했다. 그렇다면 권력은 환상일 수 있고 소유 역시 허위의식일 수 있다. 권력이 하나의 추상개념에 지나지 않듯이, 어느 면에서 본다면 자본과 물질의 사적인 소유 역시 추상의 의미가 있다.


야노마미의 모의전쟁이 일종의 연극과 같듯이 군대 내무반의 계급질서가 사전에 약속된 연극적 행위에 의해 유지되듯이 인간의 물질적 소유 역시 일종의 연극과도 같은 방법으로 임의로 물질에다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돌멩이에 의미를 부여한 즉 황금이 된다. 종이에다 가치를 부여한 즉 지폐가 된다. 물론 지폐의 경우는 실제로 가치를 창출하고 신용을 담보한다는 면에서 실질적인 의미가 있지만 특히 정치권력과 관련된 경우 많은 부분에서 허구이다.


화폐가 은행에서 예금통화를 이용한 신용창조의 방법으로 자본의 회전률을 높여 투자승수효과를 유도하고 있듯이 집단의 위계질서를 통한 권력의 파생통화를 창조하는 방법으로 권력의 회전률을 높여 권력승수효과를 만들어 내려는 연극행위가 있다. 이것이 봉건적 계급 피라미드의 작동원리다.


우리나라에서 노무현정부의 정치개혁은 명백히 수구세력들에게 정신적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 ‘21세기경제학’의 최용식님 표현을 빌면 수구세력 입장에서 지금 대한민국은 거대한 권력의 신용수렴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자본이 수표와 어음 혹은 부동산투기 등의 형태로 파생통화를 유발하여 신용을 창조하듯이 70년대의 우리는 군대 내무반에서 ‘줄빳다’의 방법으로 권력의 파생통화를 생산하곤 했던 것이다.

  

부동산 투기가 토지문서라는 형태로 일종의 파생통화를 양산하여 거품경제를 만들었듯이, 파시즘에 기초한 권력의 파생통화들 역시 거품권력을 생산한다. 참여정부의 탈권위주의가 독재정권이 만든 군사문화의 거품권력이라는 고무풍선을 터뜨려 버렸음은 물론이다.



소유의 형태가 권력의 형태이다

소유가 빈곤했던 원시사회에서는 그랬다. 수렵이나 채집경제 하에서 어차피 사적인 소유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형편이었다. 소유의 차별이 권력의 차별을 만들어낸다면 역으로 권력을 창출하는 방법으로 소유를 창출할 수도 있다. 


스스로 임무를 부여하여 이웃과 동맹을 맺고 임의로 적대자와 적대세력을 만들고 그에 맞서는 권력을 창출하는 방법으로 얻어진 추상적인 가치들을 소유할 수 있었을 뿐이며 당시에는 그것이 어쩌면 유일한 소유였던 것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국기에 대한 맹세’와 ‘국민교육 헌장’ 따위를 소유하고 부자가 된 듯이 득의양양했던 것이 70년대 우리의 자화상이다.


그러나 이제는 21세기다. 낡은 것이 가고 새것이 온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문명에 걸맞는 새로운 문화가 창안되어야 한다. 이제는 산업화시대를 넘어 정보화시대이다. 인류는 국가나 권력이 소유 혹은 공유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추상적인 개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군대와 법률이나 제도 또한 소유되는 것이 아니며 국기나 국화, 급훈, 가훈, 사훈 따위를 잔뜩 정해놓고 부자가 되었다고 여기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를 깨닫기 시작했다.


산업화는 갈수록 개인화의 일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기차보다는 버스를 타게 된다. 버스보다는 승용차를 지향하게 된다. 더 개인적인 소유, 더 개인적인 소비, 더 개인적인 문화를 지향한다. 물론 공동체문화는 여전히 지향되고 있지만 그 공동체 역시 철저히 개인의 취미와 기호에 따른 동아리 형태의 개인화된 공동체를 추구하는 형태로 성격이 바뀌고 있다.


교실마다 급훈을 정하고, 가정마다 가훈을 내걸고 도시의 상징꽃과 상징새를 지정하는 ‘정하기 게임’을 통해 부자가 된다는 허위의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문명화된 사회에서는 그 모든 것이 망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심지어 소유 그 자체도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최종적으로 남는 것은 관계이다. 인간관계가 본질이다.


물질적 소유는 인간관계를 수월하게 달성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에 불과하다. 권력의 소유는 상대적으로 우월한 위치에서 인간관계라는 목적을 달성하려는 의도를 감추고 있다. 그렇다면 지름길을 찾을 수도 있어야 한다. 물질적 소유라는 거추장스런 형식을 버리고, 봉건적 위계질서 방법의 권력공유라는 어색한 연극행위를 떨쳐버리고 인간관계라는 본질로 바로 쳐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무엇인가? 사랑이다. 인간관계가 곧 사랑이다. 인간은 결국 관계맺기를 원하는 것이다. 권력이든 혹은 그 권력을 살 수 있는 돈이든 그것이 다 관계맺기에 실패하는 인간들의 허위의식에 가득찬 구차스럽기 짝이 없는 연극행위에 불과하다. 



권력의지에서 사랑의 의지로

니체는 ‘권력의지’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솔직하지 않다. 진실로 말하면 그것은 사랑에의 의지다. 인간은 사랑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관계맺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 것이다.


소유는 결국 권력의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권력은 관계맺기의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권력이란 힘의 우위를 이룬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관계맺기를 강제하는 수단이다. 그것은 실패한 사랑의 패자부활전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모든 권력은 변형된 짝사랑일 수 있다. 그 모든 것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사랑이다.


사랑하기에 도달하기가 쉽지 않으므로, 원하는 사람에게 다가가기 위한 수단으로 인간은 권력을 소유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또 그 권력을 구매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자본의 소유에 집착하는 것이다. 


인간이 창출하는 가치들 중 생존에 필요한 부분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대부분은 문화적인 비용으로 지출된다. 그 문화비용은 결국 관계맺기에 드는 비용이다. 사랑하기에 드는 비용이다.


관계맺기가 필요하다. 사람과의 관계 그리고 세상과의 관계 또 주어진 환경과의 관계, 그 모든 것과의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그리고 독립적인 관계맺기에 성공해야 한다. 소유와 권력이라는 우회적인 짝사랑의 방법을 통하지 않고 곧바로 쳐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존엄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종속을 면하고 대등한 관계가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필요한가? 집단에의 권력적 의존을 벗어나 철저한 개인주의다. 온전한 인격적 독립이다. 먼저 개인이 독립해야 한다. 우스꽝스런 연극에 지나지 않는 그 권력의 시스템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인격적인 상승을 얻어야 한다. 기어이 자유에 도달해야 한다. 비로소 사랑할 수 있다. 온전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개인이 사랑의 1단위이다

필자가 말하는 개인화를 통해 인류가 더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21세기에는 문제가 일어나도 개인 차원에서 일어나고 그 문제의 해결책도 개인의 인격적 상승에서 모색하게 된다.


봉건적 피라미드 형태의 위계서열구조는 빈곤과 허위의식이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하다. 개인이 계몽되고 또 여유를 얻을수록 봉건적 위계질서가 창출하는 권력의 연극적 속성이 가지는 무가치함이 폭로되고 만다.


온전한 자유는 무엇인가? 필요에 의한 사용이 있을 뿐이다. 그 필요는 최소한의 필요일 것이다. 인간이 투자하는 노동의 대부분은 필요와 그 필요에 따른 사용의 수준을 넘어서 허상을 쫓고 있는 것이다.


왜 개인주의가 필요한가? 사랑의 1 단위가 개인이기 때문이다. 사회의 박애(博愛)는 그 개인의 사랑이 집적하여 이루어진다. 개인간의 사랑이 온전하지 못할 때 그 박애의 공동체는 붕괴되고 만다.


먼저 인격적인 독립을 얻을 일이다. 독립한 다음에 사랑할 일이다. 사랑하는 방법으로 환원하기다. 개인이 얻은 것을 공동체에 되돌려주기다. 소유와 권력의 형태를 벗어난 이것이 온전한 진짜이다.


이때 서로는 서로의 삶을 침해하지 않는다. 서로는 서로의 삶에 불필요하게 참견하지 않고 부당하게 간섭하지 않고 이유 없이 개입하지 않는다. 내 마음대로 행동해도 누구도 불행해지지 않는다. 비로소 사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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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장 미국 인디언 사회의 비참

- 왜 공동체의 동기유발이 중요한가? -



미국 인디언 사회의 비참

미국의 인디언사회는 여전히 비참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왜일까? 교육을 받지 못해서? 아니면 여전히 백인들의 착취가 심해서? 아니면 인디언들이 인종적으로 열등해서? 아니다.


인디언들이 불행한 이유는 그들의 역사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왜 역사가 중요한가? 문제는 동기부여에 있다. 한 나라의 역사는 다른 나라의 역사와 비교된다. 그러한 비교가 열등감과 자부심을 낳는다. 그것으로 동기유발이 된다.


역사 혹은 민족이나 전통과 같은 개념들을 함부로 쇼비니즘적인 사고로 몰아붙인다면 옳지 않다. 진정으로 민족의식을 그리 가볍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인생을 덜 살아본 사람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왜 인디언 사회가 낙후되었을까요? 인디언사회 뿐 아니라 아프리카나, 남미나, 에스키모나 다 마찬가지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제대로 된 역사가 없다. 따라서 이웃 나라와 비교되지 않는다. 비교되지 않으므로 열등감도 없고 자부심도 없다. 동기유발이 되지 않으므로 어떤 사업에도 착수하려 들지 않는다. 


우리에겐 우리의 역사가 있다. 우리의 역사는 일본이나 중국과 비교된다. 우리는 열등의식이 큰 만큼 자부심도 크다. 그 열등감과 자부심이 충돌하는 모순에서 우리의 성취동기가 유발된다. 우리는 곧 사업에 착수하곤 한다.


독립, 민족, 자주, 정체성, 이런 단어들을 결코 우습게 생각해서 안 된다. 이런 개념들은 공동체의 동기유발을 위해 필요하다. 니체가 권력의지를 말했다면 그러한 의지가 집단적인 형태로 표출될 수도 있다.


이를 막연히 부정적으로만 본다면 이는 광범위한 기층민중을 얕잡아보는 지식인의 오만일 수 있다. 그들 민중들은 집단의 힘을 빌어 한 단계 위로 상승하고자 한다. 거기에 부정적 측면과 긍정적 측면이 있다. 그것이 파시즘으로 나타난다면 부정적이다. 반면 공동체의 동기유발로 나타난다면 긍정적인 현상이다.


만약 인디언들이 진작에 미국으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인 정부를 가지고 있다면 어땠을까? 지금보다 훨씬 더 발전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충분한 동기유발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내향형 공동체의식

북아메리카 콰큐틀 인디언의 사례가 인류학적 관점에서 분석해볼 만하다. 마을의 유력자들이 포틀라치(potlatch)라 불리는 축제에서 자기 재산을 이웃들에게 나눠주거나 혹은 불태워버리는 것이다.


자신의 집에 불을 질러 홀랑 태워 버리는 경우도 있다. 이때 더 많은 재산을 불태운 사람이 마을의 지도자로 떠오른다고 한다. 더 많이 불태우기 경쟁이 벌어지는 것이다. 아직도 이와 유사한 풍속이 곳곳에 남아있어서 북미지역의 인디언사회가 발전하는데 장애가 되고 있다. 긍정적으로 본다면 이는 인디언 특유의 평등주의에 바탕한 부의 재분배라 하겠다.


이와 비슷한 풍습은 세계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다. 뉴기니아 마링족의 돼지도살축제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서 평등주의 가치관에 기초하고 있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재산을 버려서 이웃과 평등해지는 대신 명성을 얻고 마을의 지도자로 떠오르는 것이다.


동기유발은 궁극적으로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으려는 욕구에 기인한다. 문제는 인정받으려는 욕구의 단위다. 도무지 누구로부터 인정받을 것인가이다. 가족이 있고 부족이 있다. 그리고 국가가 있고 세계가 있다.


가족이나 부족공동체로부터 인정받으려면 경쟁을 버리고 평등을 앞세워야 한다. 자신을 낮추고 겸손을 보여야 한다. 부를 과시하며 부족 위에 지도자로 군림하려 들어서는 인정받을 수 없다.


콰큐틀 인디언과 같이 평등주의의 방법으로 가족이나 부족과 같은 소규모의 공동체에 다가가려는 태도를 내부지향적인 태도라 할 수 있다. 반면 더 큰 세계로 나아가 널리 인정을 받으려는 욕구도 있다.



외향형 공동체의식

콰큐틀 인디언 젊은이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부족 내부를 지향하는 길이다. 포틀라치 축제에 열심으로 참여하여 자기 재산을 전부 나눠주거나 불태워 버리는 것이다. 이 경우 부족민으로부터 존경과 찬사를 받겠지만 부족 내부의 사소한 문제에 매달리다가 에너지를 낭비하게 되어 사회적으로는 크게 성공하지 못한다. 대신 부족의 지도자로 떠오를 수는 있다.


둘은 부족을 떠나서 더 큰 외부세계를 지향하는 길이다. 이 경우 자본을 축적하고 힘을 길러야 한다. 이웃에 재산을 나눠주거나 불태워서는 세계와의 경쟁에서 승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경우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할 수는 있겠지만 대신 인디언 사회와는 완전히 결별하게 되는 아픔이 있다.


평등주의 가치관을 가진 부족민들이 포틀라치 축제에 참여하지 않은 그의 성공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부족의 가치관을 버렸다는 이유로 부족의 배신자로 낙인찍히게 된다.


평등주의 가치관에 기반한 가족 혹은 부족공동체 지향의 내향형 권력의지가 있는가 하면 경쟁의식에 기반한 국가 혹은 민족 단위의 외향형 권력의지도 있다. 문제는 국가가 없는 인디언 사회의 경우 외향형 권력의지의 표출이 봉쇄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콰큐틀 인디언이 열심히 노력하여 자신의 미래를 개척하는 길은 대개 닫혀있다고 볼 수 있다.



검은 얼굴의 백인들

동기유발은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으려는 욕구에 기초한다. 그런데 도무지 누가 평가하여 그의 성공을 인정해줄 것인가이다. 인디언 공동체 안에서 인정받아야 진짜다. 미국이라는 국가가 인정하는 권력은 인디언 사회 안에서는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다수 인디언들은 미국이라는 나라에 관심이 없다. 미국인들이 자기나라 일에만 관심을 쏟을 뿐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듯이 그들은 자기네 부족사회에 관심이 있을 뿐 미국사회에 대한 관심은 적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그들의 충성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비교하되 이웃 마을과 비교한다. 그들은 경쟁하되 이웃의 친구와 경쟁한다. 그들의 열등감을 자극하는 일도 그들에게 자부심을 주는 사건도 대개 이웃 마을과의 소소한 마찰에서 일어난다. 그 정도의 작은 스케일로 성공은 무리다.


더 큰 꿈을 가져야 한다. 작은 지역사회 안에서 친구와 경쟁할 것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나라 전체를 상대하여 경쟁해야 한다. 그러나 인디언들에게 그럴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국가가 없기 때문이다.


예외적으로 성공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결국은 실패한다. 만약 어떤 인디언 젊은이가 부족사회를 떠나 인류와 세계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을 때 인디언사회와 완전히 결별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출세와 성공이 부족 특유의 평등주의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이웃들에게 나눠주거나 집을 불태워버릴 의사가 없기 때문에 설사 성공한다 해도 부족민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다. 결국 부족을 떠나게 된다.


이 점은 미국 흑인사회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성공한 흑인들은 흑인사회에서 인정받으려 들지 않는다. 그들은 흑인사회를 떠나 백인마을에 거주하며 백인들과 사교한다. 부시정권에 괴뢰하고 있는 파월과 라이스가 대표적이다. 그들은 흑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흑인사회 입장에서 그들의 성공은 별 의미가 없다.


파월과 라이스의 성공이 동료 흑인들의 경쟁심을 불러 일으켜 더 많은 흑인들이 파월이나 라이스와 경쟁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결국 모든 흑인들의 분발을 촉매한다든가 하는 긍정적 효과는 잘 일어나지 않는다.


파월과 라이스의 성공은 그들 개인의 성공으로 끝난다. 그러므로 흑인사회와 인디언사회는 백인사회에 고급 두뇌를 지속적으로 약탈당할 뿐이다. 흑인 독립국과 인디언 독립국을 건설하지 않는 한 그들의 미래는 밝지 않다. 



일본인들의 내부지향성

왜 역사가 필요한가? 왜 민족이 필요하고, 또 민족적 정체성이 필요하고, 또 민족적 자부심이 필요한가? 동기유발을 위해서다. 이것이 없으면 우리는 인디언 사회처럼, 혹은 미국의 흑인 사회처럼 인재를 약탈당하고 실패하게 된다.


부족이 있고 국가가 있고 세계가 있다. ‘수신제가 치국 평천하’라 했다. 한국인들은 먼저 가족으로부터 인정받은 다음 국가로부터 인정을 받고 더 나아가 세계를 향하여 원대한 목표를 세울 수 있다. 


인디언은 불행하다. 그들에게는 중간의 하나가 빠져있다. 그들은 부족원들에게 인정받으면서 동시에 세계로부터 인정받을 수 없다. 부족과 세계 사이에서 징검다리가 되어줄 국가가 없기 때문이다. 수신제가와 평천하 사이를 연결할 치국이 없다. 결국 바깥세계와의 큰 승부는 포기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기본적으로 부족사회의 바깥이 어떻게 돌아가든지 흥미가 없다. 출세하겠다는 야망이나 미국이라는 국가에 이바지하겠다는 생각 따위는 없다. 그들의 머릿속에 든 생각이라곤 부족공동체 내부에서 어떤 평판을 듣느냐는 것 뿐이다.


일본인도 마찬가지다. 일본이라는 섬 자체가 하나의 우주요 세계요 전부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고립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일본 안에 있는 300여 개의 소국(小國)들 사이에서 서로 경쟁하고 있었다.


그들은 예로부터 바깥세계와 경쟁해 본 경험이 없다. 그들은 조선이나 청나라와 경쟁한 적이 없다. 침략을 당해본 일이 없다. 일본이 그들의 우주이고 일본이 그들의 전부였다. 이것이 이어령 교수가 말하는 일본인 특유의 축소지향성이다.



너무나 진지한 한국인들

일본인들은 일찍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였지만 곧 무시해버렸다. 오늘날 일본에서 교회는 결혼식을 하는 장소 정도로만 인식되고 있다. 그들은 일찌감치 불교를 받아들였지만 여전히 신도(神道)를 버리지 않고 있다.


그들은 임진왜란 때 포로로 끌려온 강항(姜沆)으로부터 조선의 성리학을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무라이의 변발을 버리지 않았다. 이 점이 특히 한국과 비교가 된다. 일본인들은 기본적으로 외부세계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이다. 설사 관심을 둔다 해도 조금도 진지하지 않은 것이다.


한국인들은 다르다. 그들은 처음 불교를 받아들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화랑도를 버렸다. 그 과정에서 이차돈의 순교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고려 말에 와서 성리학을 받아들였을 때 곧 불교를 버렸다. 20세기에 와서 기독교를 받아들인 지금 한국사회 안에서 첨예한 긴장이 조성되어 있다.


한국인들은 매우 진지하다. 처음 불교를 받아들일 때부터 진지했고 유교를 받아들일 때는 아주 사생결단이었고 오늘날의 기독교도 상당한 갈등을 야기하고 있다. 갈등을 봉합하려는 노력 또한 경주되었다. 유불선 삼교에 기독교와 마르크스교가 가세하니 오교일체를 이루고 있다. 그 포용력의 크기만큼 긴장감도 크고 진지함도 크다.


일본인들의 진지하지 않은 태도는 일견 대범함으로 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오교가 공존하는 한국에 비해서 일본은 신도(神道) 일색으로 협량하다. 외부세계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를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명치 이후 한동안은 일본인들도 바깥 세계에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우호적인 접근보다는 공격적인 태도로 일변하였다. 거기에 섬이라는 지정학적 이유가 작용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일본인들은 너무 빨리 외부 세계와의 경쟁에서 승리하였고 너무 빨리 자기네의 한계를 인식해 버렸다. 2차대전의 교훈이 그 한계를 분명히 한 것이다. 지금 그들은 일본의 한계를 깨닫고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고 있다. 더 이상 일본과 외국을 비교할 이유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섬나라가 되어버린 미국

미국도 마찬가지다. 독립한 미국의 14개 주가 각각 하나의 독립국과 같다. 이들끼리 서로 경쟁할 뿐 바깥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 먼로 독트린이다.


많은 미국인들은 월드컵에 무관심하다. 자국 내에서 벌어지는 미식축구나 프로야구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들은 해외여행에도 관심이 없다. 미국 내에 가볼 만한 곳이 더 많기 때문이다.


세계가 반대해도 침략전쟁을 강행하는 미국인들의 심리는 무엇일까? 그들에게 미국은 국가가 아니라 곧 우주이고 세계이다. 그러니 다른 나라들이 도무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전쟁광 부시에게 국명을 지워버린 세계전도를 걸어놓고 거기서 한국을 찾으라고 하면 10초 안에 찾을 수 있을까? 아마 고개를 두어 번은 갸웃할 것이다. 미국인들은 외국의 여러 나라들보다는 차라리 외계인이나 UFO에 더 관심이 있다. 그들은 아시아보다 화성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다. 냉전 시기에는 그들도 외부 세계에 관심이 있었다. 소련과 중국이 라이벌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에서 밀리고 월남전에서 패배했기 때문이다. 그때는 미국도 평등한 하나의 국가였던 것이다.


먀샬계획을 수립하여 유럽을 지원하고 세계 곳곳에 평화봉사단을 보내고 외국의 인재를 발굴하여 유학 명목으로 미국에 초청하였다. 그때가 미국의 좋았던 시절이다. 그러나 소련은 붕괴했고 냉전은 끝났다. 더 이상 지구상에 그들과 경쟁할 나라는 남아나지 않았다.

그들이 미국을 이웃나라들과 수평적으로 경쟁하는 하나의 국가로 인식하지 않는 한, 또 미국을 국가라는 하나의 경쟁단위로 주목하지 않는 한, 국가 단위의 성취동기가 동기부여로 작용하지 않는 한 미국의 미래는 없을 것이다.



청나라는 미국의 미래다

18세기의 중국이 미국의 미래다. 누르하치의 건국 이래 강희제, 건륭제, 옹정제의 전성기를 거치면서 청나라는 눈부시게 발전했다. 사상 최강의 국가가 탄생한 것이다. 그 시점에서 청나라는 세계의 부의 7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청나라는 도자기와 비단을 수출하여 막대한 은을 벌어들였다. 식민지에서 약탈해온 유럽의 은이 고갈되었을 정도이다. 당시 청나라에 얼마나 은이 흔했는가 하면 은자루를 흔드는 직업까지 생겨났을 정도이다.


노동능력이 없는 노파들은 은화를 가득 채운 가죽부대를 흔드는 일로 소일거리를 삼았다. 모퉁이에서 떨어지는 은가루를 모아 은화를 하나 더 찍어내는 방법으로 호구지책을 삼을 정도로 은이 흔했던 것이다.


청이 쇠퇴한 이유는 외부세계에 무관심해졌기 때문이다. 명나라 영락제 때 정화의 남해원정 이후 그들은 외부세계에 대한 관심을 끊어버렸다. 루신(魯迅)이 아큐정전(阿Q正傳)에서 묘사하고 있듯이 그들은 국가 단위의 경쟁의식이 없다.


그들에게 있어서 중국은 인류의 문명권 전체이다. 중국 바깥은 발을 들여놓아서 안 되는 야만의 세계이다. 그들의 의식 속에는 중국과 수평적으로 경쟁하는 국가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문명과 야만이 있을 뿐이며 문명이 곧 중국이고 야만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근간에 문제가 되고 있는 동북공정도 그러한 오만의 연장선 상에서 나왔음은 물론이다.


국가라는 중간단계가 없으므로 그들은 높은 수준의 성취동기를 가질 수 없다. 요즘 중국의 젊은이들이 그러하다. 민주화 열기는 반짝 하다가 식어버렸다. 지금 그들은 돈벌이에나 관심을 가질 뿐 이웃나라와 경쟁하여 승리한다거나 혹은 인류사에 기여해 보겠다든가 하는 생각이 없다. 


알아야 한다. 경쟁대상을 잃고 비교대상을 잃고 관심을 잃고 진지함을 잃고 동기유발의 요인을 잃어버리는 일 만큼 큰 손실은 없다는 사실을.



존 로의 자본주의 실험

18세기 초 프랑스에서 ‘뱅크 제너럴’을 설립한 ‘존 로’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원래 직업은 사기꾼 비슷한 것이었다. 먼저 영국에서 일을 벌이다 들통이 나자 프랑스로 튀었다. 미시시피 주식회사라는 유령회사를 차려놓고 속임수로 은행권을 남발했다.


당시만 해도 금본위제가 지배하던 시대였다. 그는 요즘의 수표나 어음과 같은 정도의 효력을 가졌던 은행권으로 금화를 대체할 심산이었다. 그는 한때 파리시장을 겸임하며 프랑스를 구한 영웅으로 떠받들어졌으나 나중 사기극이 들통나서 외국으로 도망하였다.


문제는 존 로의 사기극에 말려들어 돈을 투자한 많은 시골귀족들이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었지만 대신 그 사건을 계기로 유럽에서 자본주의가 발생하고 이후 프랑스가 크게 발전했다는 것이다.


존 로의 사기극은 단순한 속임수가 아니라 일종의 거대한 자본주의 실험이었다. 그의 실험은 절반의 성공을 낳았다. 금화를 지폐로 대체한 것은 위대한 발상의 전환이었다. 결국 지금은 세계 모든 나라가 금화를 지폐로 대체하고 있다.


어쩌면 그는 자본주의를 반쯤은 발명한 것이다. 그가 없었더라면 세계 각국은 아직도 금본위제를 고수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자본주의는 마르크스와 같은 뛰어난 학자들에 의해 정교하게 설계된 것이 아니라 몇 가지 우연한 사건들의 교집합에 의해 자연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 과정에 많은 시행착오가 있음은 물론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왕조시대의 중국이라면 결코 이런 거대한 실험을 할 수 없다. 4억 명의 목숨을 책임지는 황제가 이런 무모한 실험을 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유럽은 다르다. 무수히 많은 나라들로 쪼개어져 있다. 위험부담을 감수하고 실험할 수 있다. 한 나라의 성공사례가 다른 나라에 전파된다.


많은 작은 나라들이 각자 자기만의 실험에 돌입하였다. 많은 실험들이 실패하지만 그 중 몇몇 성공사례들이 전파되어 유럽의 부흥을 이끌어낸 것이다. 즉 18세기 유럽은 거대한 국가들의 경쟁시장이었던 것이다.


중국도 한 때는 그랬다. 2천년 전 춘추전국 시대가 그렇다. 그때 중국은 많은 소국으로 쪼개져 있었다. 한 나라에 경이나 대부로 등용되어 모험적인 정치실험을 했으나 실패하고 목숨의 위협을 당하며 추방되었던 사람이 다른 나라에서 부국강병에 성공하여 재상으로 출세한 일은 얼마든지 있었다.


지금은 불가능하다. 지금 중국은 대륙이면서 섬이 되어 있다. 노나라에서 사고치고 도망간 사람이 제나라에서 재기한다든가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한번 실험에 실패하면 중국땅 안에서 도망가 숨을 곳이 없다. 존 로의 자본주의 실험과 같은 목숨을 건 실험은 중국에서 불가능하다. 이래서는 발전도 불가능하다. 



중국의 사회주의 실험

유럽은 많은 나라들이 경쟁하고 있는 거대한 대륙이다. 이에 반해 중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은 점차 섬으로 고립되어가고 있다. 점차 외부세계에 대해 배타적이고 폐쇄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문화혁명은 중국의 거대한 실험이었다. 그 후과는 상상외로 컸다. 충격먹은 중국은 아마 500년 안에는 그런 끔찍한 실험을 반복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명치실험 이후의 일본도 마찬가지다. 최근 일본의 경쟁력이 쇠퇴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명치시대의 기백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에도시대 일본은 외부세계에 관심이 없었다. 도쿠가와 막부가 쇄국정책을 실시했기 때문이다. 100년 전 일본은 돌연 눈을 떴다. 주위에 많은 경쟁할만한 나라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중국이 전부인줄 알았는데 중국 이외에도 거대한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우친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일본의 눈에는 그 많은 나라들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다시 본래의 섬나라 일본으로 돌아갔다.


일본은 섬이다. 섬은 고립되어 있다. 존 로가 사기치고 도망가 숨을 곳이 없다. 구석에 포위되면 죽음뿐이다. 적이 침략해오기 전에 선제 타격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이것이 섬나라의 법칙이다.


동경만에 흑선이 출현하자 위기를 느끼고 러시아를 가상적으로 삼아 선제 공격을 가한 것이 일본의 개화실험이었다. 일본은 개화에 성공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제 그런 위기를 느끼지 않게 되었다. 아무도 먼저 일본을 건드리지 않는다. 외부에서 먼저 일본을 공격할 일이 없으므로 일본이 먼저 외부에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어졌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10년 전만 해도 러시아가 미국의 경쟁대상이었다. 러시아와 경쟁하고 있을 때 미국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퇴조 이후 미국은 쇠퇴기의 로마가 갔던 길을 걷고 있다. 경쟁대상을 잃을 때 자기정체성도 같이 잃어버린다.


섬나라가 되어가는 한국

한국은 반도국가다. 그러나 북한으로 막혀 있어서 이제는 섬이나 마찬가지로 되었다. 이대로 섬으로 주저앉아서는 곤란하다. 외부 세계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다행히 한국에는 아직 섬나라의 특징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섬나라의 특징은 너무 빨리 힘의 평형이 깨어지고 어느 한쪽으로 급격하게 기울어 버린다는데 있다. 일본이라면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프로야구를 제패하고 있다. 미국이라면 양키즈가 압도적이다.


힘에서 밀리는 쪽이 도망가서 숨었다가 다시 재기를 도모할 안전지대가 없기 때문에 너무 빨리 힘의 평형이 무너져서 곧 흥미와 진지함을 잃어버리고 시니컬하게 되는 것이 섬나라의 병폐다. 일본의 문학이나 영화가 전반적으로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채 냉소적인 경향을 띠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국은 다르다. 유불선 삼교에 기독교와 마르크스교가 가세하여 오교일체가 되어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고 있다. 쉽사리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다. 자민당이 독주하고 있는 일본과 달리 우리당과 한나라당이 팽팽하게 대결하고 있다. 이렇듯 절묘한 평형이 지속되며 긴장이 유지되는 것이 반도국가의 특징이다.


반도국가의 장점은 경쟁에서 패배한 쪽이 도망가서 숨을 안전지대가 있다는 점이다. 영국은 섬이지만 일본과 달리 오랫동안 대륙에 의존하고 있었다. 100년 전쟁만 해도 그렇다. 무려 100년 간이나 대륙과 양다리를 걸쳤던 것이다. 영국은 섬이면서도 전성기의 네덜란드와 같은 반도국가의 특징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등장 이후 관심이 미국으로 옮겨가면서 점차 고립을 자초하고 있다. 본래의 섬나라로 퇴행하고 있는 것이다. 영국은 반도국가의 특징을 나타낼 때 번영했고 섬나라의 특징을 나타낼 때 쇠퇴했다.


이탈리아는 반도이다. 그들이 대륙에 관심을 가졌을 때 번영하였다. 그리스의 도망자들이 이탈리아에서 재기하기도 했고 이탈리아의 패배자들이 스페인으로 건너가서 재기를 도모하기도 했다. 그 결과로 이탈리아는 번영했다.


그러나 훈족의 왕 아틸라의 침략 이후 대륙에 대한 관심을 잃고 점차 섬으로 고립되어 갔다. 알프스로 막힌 북쪽은 관심을 끊고 남부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식민하면서 작은 자기세계 안의 골목대장이 되었다. 반도 안에서 조그마한 자치도시를 여럿 거느리면서 하나의 고립된 소우주를 만들어버린 것이다.  


섬나라 근성을 극복해야 한다. 안전지대를 두어야 한다. 경쟁체제를 유지해야 한다. 프랑스에서 실패한 사람이 독일에서 재기를 노릴 수 있듯이 호남에서 실패한 사람이 영남에서 재기를 노릴 수 있어야 나라가 발전한다. 


때로는 무모한 실험에도 나서야 한다. 실패한 사람이 도망가서 숨을 수 있는 소도(蘇塗)가 제공되어야 한다. 실제로 한국은 그러한 측면이 있다. 유교주의 전통에 기초하여 가족공동체의 보호를 받는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운동권 학생이 감옥을 여러 번 드나들고도 크게 출세하는 것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현상이다. 60년대 전공투의 일본이나 68학생혁명의 유럽에서는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없다. 가족공동체가 소도의 역할을 해주고 있는 것이다. 유불선 3교에 기독교, 마르크스주의까지 5교일체의 팽팽한 긴장을 겪어본 경험이 그러한 약자보호의식의 배경이 되고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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