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사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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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4018 vote 0 2008.12.29 (12:4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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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장 들어라 속물들아!

- 우리들의 대한민국 무엇이 문제인가? -


### 이 장(場)에서는 오해될 수 있는 비유적인 표현들을 의도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속물 혹은 촌뜨기 혹은 부르주아라는 표현은 상징적인 의미로 씌어졌습니다. 오해 없기를 바랍니다.



동굴의 우상

문명이 인류를 교화하기 시작한지도 꽤 오래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야만의 황무지에 버려져 있다. 문명인들은 도시에 모여 살고 있으므로 일러 ‘시민’이라 한다. 야만인들은 동굴 속에 숨어살고 있으므로 ‘동굴인’이라 부른다.


동굴인들을 교화해 보겠다고 나선 사람이 플라톤이다. 플라톤의 그 유명한 ‘동굴의 우상’ 말이다. 플라톤은 동굴인들을 깨우칠 수단으로 철학을 발명했다. 그 철학을 사회에 구현한 것이 문화이다.


그 문화를 담는 그릇이 문명이다. 그 문명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야만이다. 착각하는 사람도 있어서 하는 말이다만 야만은 결코 미덕이 아니다. 야만은 전염병과 같다. 반드시 퇴치되어야 한다.


묻노니 ‘그대는 시민인가?’ 부끄러움 모른 채 벌거벗고 뛰놀던 그 추억의 동굴을 이제는 벗어났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편견과 무지의 동굴에서 벗어나기에 그대 성공하였는가?


아무나 시민일 수는 없다. 여기서의 시(市)는 도시가 아니라 사회 혹은 공동체를 의미한다. 시민은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적극 참여하려는 의사를 가진 사람을 의미한다. 묻노니 그대는 충분히 사회화되었는가?


그대는 그대가 소속하고 있는 공동체의 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가? 그대는 공동체에 내면화된 집단적인 성취동기로서의 공동체의식을 가지고 있는가?



들어라 속물들아!

문제는 이제 막 시골에서 상경한 사람들이다. 자유로운 도시의 공기를 처음 맛보게 된 촌뜨기들이다. 그들은 빠른 시일 안에 자신의 몸에서 시골냄새를 지우고 싶어한다. 그들은 그 어떤 도시의 부르주아 계급 보다 더 부르주아지인 척 한다.


오바하는 것이다. 시민인 척 하지만 아직은 부르주아 계급의 문화에 익숙하지 못한 그들, 그러나 그 어떤 도시인들보다 더 적극적으로 그들이 방금 떠나온 시골을 경멸하기에 분주한 그들을 우리는 속물이라 부른다.


속물은 가히 좋지 않다. 그들은 반드시 말썽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교양이라는 이름의 오리엔테이션이 필요하다.


묻노니 그대는 온전히 속물에서 벗어났는가? 그대는 이 사회에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충분히 적응하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그 벌거벗고 날뛰던 그 동굴의 추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갈등하고 있는가?


야만에서 벗어나 문명인이 되어야 한다. 동굴을 탈출하여 시민이 되어야 한다. 속물에서 벗어나 교양인이 되어야 한다. 무엇이 필요한가? 문화가 필요하다. 그대를 문화로 인도하는 것은 무엇인가? 소통의 수단이 되는 미학이다.



속물을 감별하는 방법

속물을 감별하는 데는 방법이 있다. 아닌 척 하지만 결국은 다 드러나고 만다. 간단하다. 속물이 아닌 척 하며 불필요한 오버액션을 취하는 그 사람이 바로 속물이다. 필요하지 않은 장소에서 쓸데없이 교양을 과시하는 사람이 속물이다.(실은 그러한 기회를 빌어 교양을 학습하자는 의도를 숨기고 있다.)


무엇이 속물인가? 자신이 평등한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여즉 깨닫지 못하고 저 혼자서 생존경쟁 벌이고 있는 사람이 속물이다.


인간은 원래 들판에 버려진 채 발가벗고 야만스러웠다. 문득 부끄러움을 깨달아 문화의 잎사귀로 치부를 가리게 되니 이에 문명이 얻어졌다. (옷을 벗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교양과 미학을 벗었다는 의미, 치부는 생식기를 말함이 아니라 인간의 생존본능을 의미한다.)


무엇이 부끄러운가? 보호받지 못한 채로 들판에서의 아귀다툼과 같은 생존경쟁이 부끄럽다. 동물들의 생태계에서 볼 수 있는 약육강식의 생존경쟁 말이다. (생존경쟁 본능이 그들의 누드이고 알몸이다.)


힘이 센 자식이 힘없는 부모를 잡아먹는 사태, 힘센 아비가 힘없는 자식을 잡아먹는 생존경쟁이 부끄러웠던 것이다. 그 생존경쟁의 아수라장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인간은 성벽을 쌓아 공동체를 건설하였다.


부르주아(bourgeois)는 그 성벽 안쪽에 사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성벽 너머에 무엇이 있는가? 생존경쟁의 아수라장이 있다. 그 정글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인류는 도시의 성벽을 쌓은 것이다. 그 성벽 안쪽에서 처음으로 가족이 탄생하고, 곧이어 씨족과 부족과 민족이라 불리는 공동체가 차례로 건설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사회이다. 그 사회성을 연장한 극한에 무엇이 있는가? 세계가 있다. 진정한 문화인은 무엇인가? 세계인이다. 세계시민이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인간은 상승할 수 있다. 인간은 낮은 차원의 존재에서 보다 고상한 차원의 존재로 비약하고자 한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깨달음이다. 곧 철학이다. 그것을 일반화하는 것은? 미학(교양)이다. 그 미학을 실현하는 것은? 문화다. 그 문화를 담보하는 것은? 산업화와 정보화로 표상되는 이 시대의 문명이다.


묻노니 그대는 충분히 고상한가?

그대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가?

그대는 들판에서 생존경쟁 하던 낡은 습성을 온전히 버리는데 성공했는가?



참사람이 되어야 한다

인간은 비참한 존재이다. 고로 구원되어야 한다. 먼저 그 동굴을 탈출하여야 한다. 시민으로의 상승이 있어야 한다. 이왕이면 세계시민이 되어야 한다. 무엇으로 가능한가? 보편적 이성으로 가능하다.


보편이란 무엇인가? 어디를 가더라도 막힘이 없이 두루 통하는 진리의 속성을 의미한다. 성별과 국경과 문화권의 장벽을 넘어 두루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가장 큰 그릇에 그대의 인격을 담아낼 때 가능하다. 참사람이 되어야 한다. 무릇 천하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묻노니 그대의 천하는 무엇인가?


교양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동굴인들은 딱 표시가 난다. 동굴인들은 저마다 부족명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부족이 혈거하는 동굴의 표지를 이마에 붙이고 다닌다. 편견과 선입견과 고정관념이라는 차별의 완장을 차고 있다.


어떤 사람이 속물인가? 첫째 사투리를 쓰는 사람이 속물이다.(여기서 사투리가 지방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빌어먹을 ‘운동권 사투리’ 쓰지 말라는 말이다. 유식한 척 외래어 쓰지 말라는 말이다. 특정 종교집단에서 통하는 표현은 쓰지 말라는 말이다. 특정 직업군에서 통하는 은어 쓰지 말라는 말이다.


사투리가 있다. 성별간에도 사투리가 있고 직업간에도 사투리가 있고 계급간에도 있다. 남성어가 있는가 하면 여성어도 있다. 동일한 어휘를 남성과 여성이 다르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분명히 있다. 그런 차이들을 극복하고 두루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어쨌든 공동체의 도시에서는 차별의 표지가 되는 사투리를 쓰지 말아야 한다.


무엇이 동굴인가? 종교가 동굴이고, 성별이 동굴이고, 계급이 동굴이고, 국경이 동굴이고, 인종이 동굴이고, 문화권이 동굴이다. 우리의 자연스러운 소통을 가로막는 그 모든 장벽들이 동굴이다. 극복해야 한다. 사투리를 극복하고 시민의 언어를 사용할 때 가능하다.


참된 시민의 언어는 무엇인가? 제조된 인간의 언어로는 결코 소통할 수 없다. 오로지 자연의 언어로만 소통이 가능하다. 그것은 발명된 것이 아니라 발견된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미학과 철학(깨달음)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미학의 언어는 자연으로부터 발견된 것이다. 깨달음의 언어는 내 안의 것으로부터 각성된 것이다. 이것이 진짜다. 참된 언어에 의해 완전한 소통은 가능하다. 자연과 역사와 문명과 진리와 신과의 소통이 가능하다.



상승하기를 멈추지 말라

범속한 인간이 있다. 이는 논외다. 고상한 척 하는 인간이 있다. 이들이 속물이다. 고상한 인간이 있다. 이는 우리가 도달하여야 할 모범이다. 성공한 사람은 누구인가? 최고의 사람과 친구가 된 사람이다.


우리가 다산(茶山)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그가 초의(草衣)의 친구였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초의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그가 추사(秋史)의 친구였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추사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그가 동시대 사람 모두의 친구였기 때문이다. 


추사는 대안목이었다. 서화를 감정하고 골동을 감정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더 나아가 사람을 감정하게도 된다. 그와 친구가 된다는 것은 그의 평가를 통과했다는 것이며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 모두에게 영광이었다.


천명의 제자를 둔다한들 한 사람의 친구를 사귐만 같지 못하다. 라즈니시나 숭산 따위가 꼴이 우스워진 이유는 그들에게 제대로 된 친구가 없기 때문이다. 제자를 두어 스승으로 군림하려는 즉 친구를 잃는다. 친구를 얻으려면 스승의 위치에서 아래로 내려와야 한다.


다산과 초의와 추사를 친구로 맺어준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차(茶)였다. 차의 미학이었다. 그 미학을 매개로 한 소통이었다. 그 소통과정에서의 울림과 떨림이 널리 공명하여 조선 후기의 선비문화를 완성시켰음은 물론이다.


친구가 되어야 한다. 먼저 역사와 친구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진리와 친구가 되어야 한다. 문명과도 친구가 되고 기어이 신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 친구가 된다는 뜻은? 한 편이 된다는 뜻이다.


역사의 편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 진리의 편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 문명과 그 진보의 편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 언제라도 신의 편에 설 수 있어야 한다.


당신이 그 막히고 차단된 동굴을 벗어나지 않는 한, 그 편견의 동굴, 고정관념의 동굴, 혈연과 지연과 학벌이라는 동굴, 계급과 성별과 인종으로 칸칸이 막히고 차단된 그 부족의 동굴을 떠나지 않는 한 그대는 신의 친구가 될 수 없다.


소인(小人)은 자신의 라이벌과 대결하는 사람이다. 속물은 자신에게 콤플렉스를 준 대상과 승부하려는 사람이다. 그 언저리에서 동기부여 되어 삶의 의미를 찾으려드는 사람이다. 참사람은 오직 진리와 대결하고 신과 대결하는 사람이다. 기어이 진리와 친구가 되고 신의 친구가 된 사람이다. 



왜 미학이어야 하는가?

친구가 되어야 한다. 소통할 수 있어야 친구가 될 수 있다. 소통을 위해서는 언어가 필요하다. 언어의 단점은 분주하다는데 있다. 교양이 언어의 단점을 메워줄 수 있다. 교양에 논리를 부여하는 것이 미학이다. 그러므로 소통의 마지막 수단이 되는 미학을 알아야 한다.


미학은 서로 다른 별개의 둘이 간섭하는 데 따른 문제에 관한 것이다. 자신의 바깥에서 일어난 사태에 개입하고자 할 때 미학의 문제가 성립한다. 타인의 일에 참견하고자 할 때, 나와는 다른 세계에 들어가 보고자 할 때, 낯선 사람과 말을 트고자 할 때 미학의 문제가 제기된다.


자연스러움과 어색함이 있다. 자연스러운 개입이 아름다움이라면 어색한 개입은 추(醜)한 것이다. 미학의 목적은 최소한의 마찰을 부담하고 최대한의 개입에 성공하자는 데 있다. 그대의 내면 깊숙한 곳까지.


자연이 아름다운 이유는? 서로 다른 별개의 둘이 있다. 그 중 하나가 다른 하나의 내부로 침투하려고 한다. 이때 받아들여지지 않는 부분은? 제거된다. 그렇게 제거되고 남은 부분은?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왜 꽃이 아름다운가? 벌과 나비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혹은 암술이 수술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마찰하는 부분이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개입함에 있어서 불필요한 부분이 제거되고 남은 것이 미(美)다. 자연이 아름다운 이유는? 비와 바람과 서리와 이슬이 마찰하면서 불필요한 부분을 하나씩 제거했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너와 내가 만남에 있어서 소통을 방해하는 불필요한 장애들은 제거되어야 한다. 무엇이 제거되어야 할 장애물인가? 편견과 선입견과 고정관념과 계급의 사투리와 온갖 차별의 표지들이 그 장애물이다. 플라톤이 말한 동굴의 우상 말이다. 그 우상을 버려야 한다.



멋진 것은 무엇인가?

젓가락 두 짝이 만나 한 쌍을 이룸으로써 비로소 제 구실을 하듯이 본래 불완전했던 둘이 만나 하나를 이룸으로써 질적인 비약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이때 우리는 그것을 ‘멋있다’라고 표현한다.


그 멋의 성립하는 한 순간에 아우라(Aura)로 불리는 현장성의 울림과 떨림이 있어 천하와 더불어 공명한다. 미(美)는 그러한 방법으로 완전을 추구한다.


예컨대 이런 거다. 어떤 사람이 남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치자. 문이 열려져 있는 집에 불쑥 들어갈 수는 없다. 도둑으로 오인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문은 도로 닫혀져야 한다. 닫혀진 대문의 초인종을 눌러야 한다. 무슨 뜻인가? 상대방이 완전한 상태로 있을 때 비로소 개입할 수 있다는 의미다.


교양은 무엇인가? 자신에 대한 타인의 개입을 허용하기 위해서는 본인이 먼저 완전의 미학을 갖춘 채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거다. 그것이 타인에 대한 배려가 된다. 만약 타인이 지금 불완전한 상태에 있다면 그 사람이 완전해질 때까지 개입을 멈추고 기다려야 한다. 그것이 또한 타인에 대한 배려이다.


왜 미학이어야 하는가? 그것이 인간의 본성인 까닭이다. 만약 당신이 우연히 어떤 상황을 목격하게 되었다 치자. 그 대상이 100의 완전에 미달하는 99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치자. 단지 1이 부족해서 멋의 완전성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는 억울한 장면을 목격한다면 당신은 그 1을 채워주고 싶은 참을 수 없는 욕망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럴 때 당신은 사막에서 물을 찾듯이 지독한 갈증을 느끼게 된다. 왜인가? 당신이 그 부족한 1을 채워주었을 때 그 대상은 100의 완전을 성립시키며 멋의 아우라를 뿜어내게 된다. 그 울림과 떨림이 널리 퍼져서 그대에게까지 전달된다. 그대 함께 공명하게 된다. 당신은 기어이 그 멋의 유혹에 넘어가고 만다. 그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이다. 


미학이란 부당한 개입을 억제하고 완전한 개입, 자연스러운 동화를 얻어내자는 것이다. 훈련이 필요하다. 먼저 공동체의 미학을 발견해야 한다. 공동체의 미학에 동화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그대 자신의 미학을 가져야 한다. 비로소 호흡이 맞고 박자가 맞고 리듬이 일치해야 한다. 이때 거대한 공명(共鳴)현상이 일어난다.


격식이 없이, 부담을 주지 않고, 놀라게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다가서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다. 마침내 그 어떤 것도 마찰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경지가 있다. 완전한 소통이 가능하다. 신과 역사와 문명과 진리와 사회와 친구가 될 수 있다. 


미학 없이도 살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더러는 있을 것이다. ‘난 이렇게 살다 죽을래’ 하는 사람도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고립을 피할 수 없다. 천하와 더불어 공명하지 못한다면 동물원에 갇힌 오소리처럼 철책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왔다갔다 하기를 죽을 때까지 반복하게 될 뿐이다.


최고의 사람은? 미추(美醜)를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다. 미추를 구분한다는 뜻은? 타인과의 수평적인 네트워크를 개설함에 있어서 미(美)는 통하는 것이요 추(醜)는 막히는 것이다. 막힘이 없이 두루 통하는 사람이 있다. 멋진 사람이 있다.


### 아우라

아우라에 대해서는 다른 해석이 있을 수 있겠지만 필자는 원전이 가지는 현장성을 의미한다고 본다. 울림과 떨림이 전달되어 이루어지는 증폭과 공명은 전광석화와도 같은 찰나의 순간에 일어나며 현장에서만 가능하다. 원전만이 그러한 현장성을 가질 수 있다.



지금이 그때이다

‘고상하다’ 혹은 ‘천박하다’ 이런 표현은 사실이지 좋지 않다. ‘속물’이라는 표현도 실례가 된다. 무리한 표현임을 알면서도 필자가 굳이 이러한 차별적인 용어들을 써야만 하겠다고 작심한 데는 이유가 있다.


한국인의 단점은 지적되어야 한다. 내 가족만을 포용의 대상으로 삼고 내 이웃부터 경쟁의 대상으로 삼는 한국인 특유의 가족주의가 공동체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더 큰 세계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가족과 민족을 뛰어넘는 더 큰 규모의 공동체를 발견해야 한다.


인간은 상승할 수 있다. 어떤 경우에도 상승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니체는 그것을 권력의지라고 말했지만 그 어법이 좋지 않다. 진정으로 말하면 그것은 미(美)에 대한 열정이며 멋의 아우라에 대한 추억이다.


많은 오해들이 있다. 공동체의 전제를 부정하고 선(禪) 또는 명상을 현실도피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경우이다. ‘오직 모를 뿐'이라거나 'nothing'이라거나 하는 식의 단어 속으로 도피하려드는 요즘의 유행 말이다. 거기에 유마힐이 갈파한 즉 ‘천하가 앓으니 보살도 앓는다’는 뜻에서의 울림이 없고 떨림이 없다. 그런 식으로는 점차 화석이 되어갈 뿐이다.


생기를 잃은 즉 향기가 사라진다. 향기를 잃는 즉 죽음과도 같다. 싱그러움 잃지 말아야 한다. 선도를 유지해야 한다. 긴장해야 한다. 눈빛이 형형하게 살아있어야 한다. 언제든지 출동명령이 내려지면 조건반사적으로 튀어나갈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물론 마음의 여유도 있어야 한다. 이등병처럼 얼어있을 필요는 없다. 능숙하고 자연스러워야 한다. 다만 정신차리고 있어야 한다. 


언제 신이 그대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지금이 그때이다’ 하고 오더(order)를 내릴지 모른다. 그 순간 당신은 소유한 모든 것을 내던지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임무를 받아 나서야 한다. 그럴 자세가 되어 있는가이다. 이미 출동신호가 내렸는데도, 그대를 위하여 준비된 죽을 찬스를 만났는데도, 기어이 시대의 부름을 받았는데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신발끈이나 매고 있다면 자격이 없다.  



출격준비는 되어 있는가?

예컨대 이런 것이다. 그대의 눈앞에서 한 아이가 막 자동차에 치이려고 한다. 신은 1초의 머뭇거릴 여유도 주지 않는다. 망설임 없이 몸을 날릴 준비가 되어있는가? 마땅히 그럴 수 있어야 한다.


훈련되어야 한다. 상황을 당하여 ‘과연 지금이 그때일까?’하고 생각하면 늦는다. 만약 당신이 대통령의 경호원이라면 저격범의 총구를 발견하는 즉시 반사적으로 몸을 날릴 것이다. 그럴 기회는 실로 많지 않다. 그 한 번의 조건반사적인 출동을 위하여 수천 수만 번의 이미지 트레이닝을 해야 한다.


자 눈을 감고 생각해 보자. ‘지금이 그때이다.’ 신은 그대에게 오더를 내렸다. 출동이다. 그대 출동하는데 성공했는가? 이미 저격범이 대통령을 향하여 총구를 겨누었는데도 ‘과연 이것이 실제상황인가? 남들은 어떻게 하고 있지?’ 하고 두리번거리고 있다면 자격 없다. 


그 순간 그대는 온전히 혼자이다. 그 누구를 바라보아서도 아니 된다. 아기가 습관적으로 애절한 눈빛을 지어 엄마를 바라보며 동정을 구하는 식의 그 어렸을 때의 습관을 버려야 한다.


명상가는 많지만 대개 눈빛이 풀려있다. 깨어있는 매 순간 새벽의 선선한 한기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대 자유인일 수 없다. 스승이 되고자 하는 즉 자유는 저만치 도망가고 없다. 미(美)에서 멀어지는 순간 자유는 사라지고 없다.



성(聖)과 속(俗)

인간은 상승하고자 한다. 속(俗)에서 벗어나 상승한 즉 성(聖)에 이른다. 성인(聖人, saint)의 어원을 따져보면 ‘완전한 사람’이라는 뜻을 만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반대편에서 속인(俗人)은 불완전한 사람이 되겠다. (하기야 누군들 불완전하지 않겠느냐마는 완전함에 대한 열망을 포기하는 즉 삶은 끝난 것이며 그 향기는 사라지고 만다.) 


원래는 천신에게 제물로 바쳐지는 동물을 의미했다. 제물로 바쳐지기 위해서는 몸에 상처가 없어야 한다. 여기서 health(건강)이라는 말이 나왔는데 원래는 몸에 상처가 없다는 뜻이다. 상처가 없도록 한다는 의미에서 ‘heal(치료)’이 나왔음은 물론이다. 


완전무결하게 치료(heal)된 것이 훌륭한(holy), 혹은 완전한(whole)이고 ‘가득+훌륭’(catholic)한 것이 카톨릭이다.(카톨릭을 ‘보편’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치료(heal)를 위해 제물을 물에 씻는 것이 세례다. 세례 받아 씻어진 것이 성인(saint)이다. 결론적으로 완전한, 훌륭한, 흠이 없는 그리고 보편적인 것을 두루 의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반대편에서 흠이 있는 것은 무엇인가? 희생제단에 제물을 바친다는 것은 아직 사용되지 않았다는 의미가 된다. 사용되어서 안 된다. 사용되기 전의 ‘스탠바이’ 상태로 대기 중이어야 한다. 이미 사용된 적이 있는 것이 곧 속(俗)된 것이다. 


성(聖)은 미처 사용되지 않은 채로 준비된, 완전한, 갖추어진, 훌륭한, 흠이 없는, 치료된, 보편적인 즉 역할을 할 준비가 되어 있으나 아직 역할이 특정되지 않은 것이다. 반대로 속(俗)은 이미 여러 번 사용되어진, 낡은, 준비되지 않은, 갖추어지지 않은, 훌륭하지 못한, 흠이 있는, 이미 역할이 특정되고 고정된 것이다.


무엇인가? 긴장하고 있어야 한다. 싱그러움을 유지해야 한다. 왜? 신에 의하여, 역사의 부름에 의하여, 언제 출동명령이 내려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역할이 특정되지 않았다는 것, 그러므로 보편적이라는 것은 내게 어떤 임무가 주어질지 모른다는 것이며 동시에 어떤 임무이든 소화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뜻이다.



아저씨 아줌마로 안 된다

정신 차리고 있어야 한다. 향기로 유혹하고 있어야 한다.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한다. 시대정신의 주문에 의하여 언제 어디서 내게 소집명령이 하달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젠가 쓰여져야 할 존재이다. 쓰여지기 위하여 대기상태로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세속에 가담하여 고정된 역할 맡지 말아야 한다.


속(俗)된 것은 무엇인가? 역할이 특정된 것이다. 역할이 특정된 바 꼴불견은 아줌마다. 또 아저씨다. 아줌마, 아저씨 되지 말아야 한다.(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오해 없기를.)


아줌마란 무엇인가? 맡은 역할에 안주하는 것이다. 아줌마는 걱정이 없다. 왜? 든든한 남편이 있고 똑똑한 자녀가 있기 때문이다. 더는 위로 상승할 필요가 없다. 자기 할 일을 다한 사람이다.


아줌마는 누구를 유혹할 이유도 없고, 누구에게 잘 보이려 애쓸 이유도 없다. 긴장할 이유도 없고 저 자신을 돌아볼 필요도 없다. 이미 적당한 역할을 얻었으며 그 역할을 해내기만 하면 된다.


아저씨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안하무인이다. 그들은 말년 병장처럼 긴장이 완전히 풀려버렸다. 그들은 남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식당에서 큰 소리로 떠들어댄다. 그들은 좋은 직장을 가졌다. 그들은 사회에 충분히 기여하고 있다. 큰소리 칠만 하다. 그래서 그들은 어디를 가든 거리낌이 없다.


그들에겐 내세울 직장이 있고, 사랑스런 아내가 있고, 인정해주는 동료와 선후배가 있고 자랑스런 아들, 딸이 있다. 그러므로 더는 위로 상승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그 역할을 버려야 한다. 남편 역할, 직장상사 역할, 선후배 역할 버려야 한다. 아내 역할, 엄마 역할 버려야 한다.


인간을 회복해야 한다. 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누군가를 유혹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소임을 맡아 뛰어들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고독한 인간으로 돌아와야 한다. 신 앞에서 혼자임을 깨달아야 한다. 신 앞에서 바쳐질 제물로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정신차려야 한다. 5분대기조로 깨어있어야 한다. 



이상주의자가 되라

만약 그대가 일생에 딱 한번 쯤 좌석 하나에 몇십만원이나 한다는 오페라 극장에 갈 일이 생겼다 치면 어렵더라도 턱시도 정장을 구해볼 일이다. 왜? 그대가 그 어렵게 얻은 비싼 자리에서 혹 그 자리를 빛나게 할 유명인사라도 만난다면, 그가 정치인이건 혹은 연예인이건 혹은 화가나 소설가이건 간에, 그대가 그 사람을 향해 짓는 표정이 비굴하거나 혹은 들뜬 표정이 되거나 간에 자연스럽지 않았다면 그대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理想)은 이상주의 자신의 미학과 고집과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 미학은 현실과 온전히 독립하여 별도로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실에서 받아들여지는 일상성의 잣대로 이상을 판별하려 해서 안 된다.


이상을 판단하는 데는 이상주의 자신의 잣대를 사용해야 한다. 이상주의는 이상주의 자신의 내재적인 자기 완결성과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 이상 자신의 자기 연속성과 내적인 상호간의 긴밀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실을 고민할 것이 아니라 이상을 고민하여야 한다.


물론 이렇게 고민하느니 아예 그 자리에 가지 않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된다. 그러나 어떻게든 그 자리에 가게 되었다면 격식을 갖추어 가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그 오페라극장은 현실의 공간이 아니라 이상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로마에서는 로마의 법을 따르라 했다. 어쨌든 실수로라도 그대가 이상공화국의 주(駐)현실대사관이라 할 오페라극장에 들르는 우를 범했다면 거기서는 마땅히 이상공화국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 그곳은 이상의 영토이기 때문이다.



이상주의란 무엇인가?

아마 그런 일은 잘 일어나지 않겠지만 만의 하나라도 뜻밖에 그대가 대통령의 초대를 받아, 혹은 다른 어떤 이유로 일시적으로 아주 중요한 자리에 위치하게 되었을 때 그대의 표정이 비굴해지거나 안절부절 하거나 혹은 들뜨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어차피 인생은 별거 아니다. 세상 또한 별거 아니다. 어쩌면 인생은 지푸라기 같은 것이다. 어쩌면 세상은 한바탕 나비의 봄꿈과 같은 것이다. 긴장할 이유는 조금도 없다. 어차피 인생은 공수래공수거가 아니던가?


그러나 그대 긴장한다. 그대는 잘도 주어진 상황에 적응한다. 그대는 굳이 그러할 필요가 없는 곳에서도 매우 긴장한다. 그대는 굳이 적응할 필요가 없는 경우에도 매우 적응하려 든다. 갈 곳을 잃은 해방된 노예처럼 그대 안절부절 한다.


그대 자유가 낯설다. 그대 자유가 어색하다. 그대 자유가 무섭다. 문득 세상이 낯설다. 어디로 가야하지? 얼떨결에 해방된 노예인 그대 도피하려 한다. 준비되지 않은 자유로부터 말이다.


왜 이상이 필요한가? 그대의 자유 또한 훈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대 왕이 아니지만 왕의 마음으로 오늘 하루를 살아볼 일이다. 그대 예수가 아니지만 예수의 마음으로 오늘 하루를 살아볼 일이다. 그대 부처가 아니지만 부처의 마음으로 주어진 하루를 살아볼 일이다.


이상은 아득히 먼 곳에 있지만 이상의 마음으로 오늘 하루를 살아볼 일이다.



안녕하세요 하느님

이곳은 칸 영화제의 시상식장이다. 그대는 지금 레드카펫을 밟으며 행진하고 있다. 그대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수백 대의 카메라 앞에서 미소를 지어 보여야 한다. 그대 10억 명의 시청자를 향해 환한 웃음을 지어야 한다.


이상이 현실이다. 이곳이 그곳이다.


오늘 길에서 우연히 만난 한 사람의 친구 앞에서 짓는 그대의 미소가 마땅히 그래야 한다. 그대는 현실에서 한 사람의 친구를 만나고 있지만 실로 10억 명의 시청자와 수백 대의 카메라를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야 한다.


(오늘이 그 날이다. 마침내 역할이 주어지고야 말았다는 말이다.)


마땅히 그렇지 않다면 그대의 인생은 실패다. 왜냐하면 오늘 그대는 길에서 우연히 만난 ‘예수’와 인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늘 그대는 길에서 우연히 만난 ‘부처’와 인사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몇십만원이나 되는 거액을 지불한 오페라 극장에서 우연히 유명인사 히딩크씨를 만나고도 그대 불행히도 정장차림이 아니었던 이유로 어색해 하며 쭈뼛거리며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결국 인사하지 못했듯이 말이다.



내일도 그대는 길에서 우연히 부처를 만날 것이다. 노자도 만나고 공자도 만날 것이다. 예수도 만나고 마호멧도 만날 것이다. 노무현도 만나고 유시민도 만날 것이다. 그대 싱긋 웃어 보이고는 태연히 그 가던 길을 계속 갈 수 있어야 한다.


“안녕하세요. 하느님.”


정신 차리면 보인다. 그대 마음의 턱시도가 준비되어 있다면 말이다.



꽃피는 팔도강산

공중파 방송에서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중계했던 시절을 기억하는가? 미인대회도 이제는 옛날 일이 되었다. 그 사이에 무엇이 달라졌을까? 여권이 신장되었다고? 아니다. 요는 ‘국가와 민족의 발견’이다.


예전에는 ‘국가’라는 개념이 사람들의 의식 속에 뿌리내리지 않고 있었다. 특히 유럽에서는 카톨릭의 지배로 해서 국가보다 종교가 더 큰 울타리로 생각되었다. 독일이라면 신성로마제국 안에 작은 도시국가들이 있어서 자치도시의 시민으로 존재했을 뿐 국가의 존재를 실감하지 못하고 살았던 것이다. 유럽에서 민족국가는 나폴레옹전쟁의 결과로 생겨난 것이다.


사실이지 우리의 선조들은 향촌 공동체에 소속감을 느꼈을 뿐 국가의 존재를 별로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그 시절 우리의 할아버지들은 우리나라와 일본을 비교하려 들지 않았다. 그들은 노벨상을 꿈꾸지 않았고 월드컵도 올림픽도 열망하지 않았다. 집성촌인 아랫마실 강가들과 웃마실 박가들 사이의 사소한 갈등에만 관심이 쏠려 있었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70년대 공중파 방송에서 미인대회를 중계한 이면에는 국민들에게 국가의 존재를 상기시키고자 하는 권력 측의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는 말이다.


전국체전을 개최하여 각 지방의 존재를 알린다. ‘꽃피는 팔도강산’을 불러 각 지방의 이름을 외우게 한다. 그렇게 한 줄로 늘여 세운 지방들의 중심에 중앙정부를 놓는 방식으로 국가주의를 선전한다. 그 연장선상에서 전국노래자랑과 전국미인대회가 열렸던 것이다.


‘전국’이라는 말만 들어도 괜히 가슴 두근두근 하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묻노니 그대는 여전히 전국 미인대회가 그리운가?



슈퍼맨은 죽었다

전근대가 있고 근대가 있고 탈근대가 있다. 전근대는 국가가 국민들의 일상에 영향을 미치기 이전 시대이다. 향촌 공동체를 중심으로 억압적인 봉건체제가 지배하고 있었다.


근대는 향촌공동체가 해체되고 국가가 국민의 실생활의 중심에 자리하게 된 시대이다. 국가가 국민의 삶에 일일이 참견하는 시대이다. 명목상 자유를 얻기는 했으나 그 자유가 내 것이 되지는 않은 시대이다. 이집트를 탈출하여 노예신세를 청산하기는 했으나 여전히 독립하지 못하고 슈퍼맨 모세를 따라 40년간 사막을 헤매고 다녔던 유태인들처럼 말이다.


슈퍼맨의 근대를 청산하고 탈근대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여전히 강남으로 우르르 몰려들어 땅값이나 올려놓고 있지 않은가? 주말마다 떼로 몰려다니며 고속도로 진입로에 트래픽을 유발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렇게 우리가 우르르 몰려다니는 한 누군가는 길목을 장악하게 되고 그것으로 권력을 창출하게 되고 그 만큼 개인의 자유는 제약되고 마는 것이다.


일찍이 자동차왕 포드가 시스템을 만들어 근대를 집약했다. 그 이전에 마르크스가 예견하고 있다. 무엇인가? 결론은 병목을 잡는 놈이 먹는다는 룰이다. 진도 나가야 한다. 슈퍼맨이 장악한 채 세금을 걷고 있는 그 병목을 뚫어야 한다.

전근대가 신의 시대라면 근대는 슈퍼맨의 시대이고 탈근대는 인간의 시대이다. 우르르 몰려다니지 않는, 트래픽이 잘 분산된, 독립적인 개인들의 수평적 네트워크가 지배하는 시대이다.


21세기는 독립적인 개인들의 수평적인 연대가 지배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이심전심에 의해 움직이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조직되지 않는 형태로 조직하고 통제하지 않는 방법으로 효율을 추구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강단학계의 문제

강단학계 일각의 탈근대 담론이 여전히 서구사상에 대한 종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로 된다. 문부식, 임지현, 진중권, 김규항, 박노자들이 저마다 나서서 한마디씩 던지고 있지만 정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들도 나름대로 개인을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개인은 조선일보에 기고해도 무방하다는 식의, 혹은 조선일보 기자와 선배님 후배님 하며 맥주잔을 부딪치며 철학(?)을 토론한들 어떠리 하는 식의 파편화된 개인들이다.


깨어나야 한다. 네트워크를 발견해야 한다. 소통이 이루어져야 한다. 천하와 더불어 공명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이 필요한가? 그들이 숭배하는 서구정신이 본질에서 기독교사상의 한계를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간파해야 한다.


문제는 소통이다. 그 폐쇄된 강단을 벗어나고 그 음습한 살롱을 벗어나야 한다. 널리 대중과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시대의 양념이 되기를 거부하고 보편가치를 지향해야 한다. 대중을 두려워하고 대중을 경멸하는 한 미래는 없다.


토착이론이 나와야 한다. 자생철학이 정립되어야 한다. 왜인가? 그래야만 대중과의 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겉으로 아웃사이더를 표방하고 있지만 정작 소외된 대중들을 위로하지는 못한다. 바깥에 있지만 안으로 뛰어들 생각 없이 겉돌고 있다. 대중과 호흡을 일치시킬 수 있어야 한다. 공동체의 울림과 떨림에 함께 공명할 수 있어야 한다.


널리 인정된 인류 보편의 가치를 우리의 내부에서 다시 재발견해 낼 때 진정한 것이 얻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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