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사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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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4085 vote 0 2008.12.29 (12:42:54)


신인문주의 대 반지성주의

20세기가 집단의 세기라면 21세기는 개인의 세기이다. 20세기가 사회혁명의 세기라면 21세기는 인간혁명의 세기이다. 그러나 21세기의 벽두에 우리가 맞닥뜨린 사건은 부시의 이라크 침공이었다.


부시의 침략이 다 무엇인가? 냉전 이후 세계를 휩쓸고 있는 반지성주의 물결이다. 21세기는 ‘신인문주의’와 ‘반지성주의’ 간의 투쟁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지식인이 전위에 서야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지금 이 시대가 19세기 계몽사상가들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인터넷을 통한 지식의 대중화이다. 


부시의 야만을 허용한 20세기의 그늘은 무엇인가? 미디어의 독점이다. 20세기는 미디어의 세기이다. 미디어를 독점한 자가 대중을 통제할 수 있었던 시대이다.


인터넷의 의미는 무엇인가? 미디어의 독점 구조가 깨졌음을 의미한다. 언론의 독점, 방송의 독점, 스크린과 무대와 스타의 독점구조가 깨지고 있다. 이제 독점은 없다. 이제는 모두가 미디어이고 모두가 스크린이고 모두가 방송국이다.


이제는 모두가 서태지여야 한다. 이제는 개인이 스타이고 개인이 미디어이고 개인이 권력이어야 한다. 전 국민의 스타화, 전 국민의 권력화이다. 인터넷의 쌍방향성이 그것을 가능케 한다.



문제는 과도한 시스템 의존

역사는 이론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필연을 따라간다. 20세기는 소수가 다수를 통제할 수 있었던 반지성주의의 시대였다. 중국의 혁명은 지식인이 앞장섰지만 문화혁명은 분명 ‘지식인 사냥’이었다. 사회주의 역시 일정부분 반지성주의의 혐의를 벗을 수 없다. 

  

사회주의 안의 반지성적 태도는 마르크스의 유물사관, 뉴튼 이래의 기계론적 사고, 곧 요소환원주의적 발상이 그 뿌리가 된다. 그 기저에 자리하고 있는 고대의 원자론적 발상과 기독교의 이항대립적 사고가 문제로 된다. 여기에 인간이 아닌 시스템에의 과도한 의존이 있다.


파시즘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반지성 그 자체이다. 박정희 시대 지식인은 감옥과 이민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한국의 교수가 독일에서 광부가 되어야 했고 미국에서는 접시닦이가 되어야 했다.


사회주의나 파시즘이나 공통적으로 소수가 다수를 통제하는 문제에 집중하고 있다. 그들이 찾아낸 방법은? 인간을 배제하고 시스템에 맡기는 것이다. 그 수단은? 미디어를 장악하는 것이다. 거기서부터 재앙이 시작되었다.


문제는 ‘피드백 기능’의 부재다. 곧 시스템의 결함이다. 피드백은 ‘출력 측의 입력전환’을 의미한다. 그 결정은 결국 인간이 내려줘야 한다. 어떤 시스템이라도 결정적인 시기에는 인간의 개입이 필요하다. 


인터넷은 무엇인가? 쌍방향 미디어다. 피드백 기능이 있다. 이는 인간의 개입을 의미한다. 시스템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의 쌍방향성을 통하여 인간이 시스템을 제어하게 된다.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을 극복해야 한다. 뉴튼 이래의 기계론을 극복해야 한다. 요소환원주의를 극복하고 원자론의 발상, 이항대립적 사고를 극복해야 한다. 세계관을 바꾸어야 한다. 피드백이 없는 선형적 세계관을 버리고, 유기체적 세계관, 관계망의 세계관을 받아들여야 한다.


21세기는 다수가 다수를 통제하는 체제로 간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명령이 아니라 공명(共鳴)이다. 정보의 공유에 의한 쌍방향적 소통가능성이다. 권력의 지배가 아니라 코드의 일치를 통한 자발적인 역할분담이다. 공분(公憤)에 의해 동기가 주어지고 공론(公論)에 의해 집단의 의사가 결집된다. 시스템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



조선의 선비와 한국의 네티즌

펜은 칼을 이기지 못하였다. 역사 이래 지식인이 사회를 지배한 시대는 없다시피 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펜은 칼 혹은 자본을 보조하는 역할에 불과하다. 그러나 전혀 승리의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고대 신정국가라면 일정부분 지식인(사제, 승려)집단이 지배하는 측면이 있다. 조선의 유교사회라면 어떤가? 조선은 이씨의 나라가 아니라 선비의 나라였다. 선비집단을 일종의 지식인집단으로 볼 수 있다. 조선은 일정부분, ‘지식인 사회의 공론’에 의해서 질서가 유지된 측면이 있다.


물론 그것은 희미한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하다. 그러나 분명히 그러한 가능성을 보였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지식인의 공론을 통한 ‘보편적인 상식의 합의’에 의해 운영되는 사회가 현실에서도 가능함을 증명하고 있다.

  

종교도 국경도 넘어서야 한다. 지식이 대중화된 사회는 가능하다. 전 인류가 지성인이 되는 사회는 가능하다. 그것이야말로 백범이 말한 ‘대한사람이면 모두가 성인(聖人)이 되는’ 문화국가의 비전이라고 나는 믿는다.


바야흐로 인터넷시대이다. 네티즌이라는 새로운 선비집단이 출현하고 있다. 그들이 계급적 정체성과 이념적 동질성의 확보를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단단한 자기 정체성의 구심점이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다.



긴 칼 옆에 차고

보안법 철폐에 반대하며 시청 앞에서 데모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입을 모아 대통령을 비난하고 있다. 이유는? 화가 났기 때문이다. 무엇이 그들을 화나게 했을까? ‘자유’가 그들을 화나게 했다. 전근대의 그들에게 자유는 버림받음이고, 독립은 고립이고, 개인은 곧 소외됨이다. 그들은 국가보안법이라는 ‘이동식 감옥’ 안에서만 마음이 편한 것이다.


150년 전 모든 흑인 노예들이 링컨의 노예해방에 찬성했던 것은 아니다. 일부 노예들은 해방된 이후에도 마음씨 좋은 백인 주인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농장 주변을 서성거렸다고 한다.


그들은 단지 주인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다. 면화를 심으라고 하면 면화를 심었고 밀을 심으라고 하면 밀을 심었다. 무엇을 경작할 것인지 또 수확한 농작물을 어떻게 판매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일이 없다.


해방이 되었다. 이제 주인님은 아무런 명령도 내려주지 않는다. 당장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알 수가 없다. 이 터무니없는 자유라니. 그들은 자유에 치이고 자유에 짓눌리고 자유에 쓰러졌다.


묻노니 당신은 우리에게 주어진 이 엄청난 자유를 감당할 자신이 있는가?


신은 죽었다고 말한 사람은 니체이다. 초인도 죽었다. 슈퍼맨도 죽었다. 영웅도 죽었다. 이제는 사람마다 참사람으로 깨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긴 칼 옆에 차고 거문고 하나 걸머메고 천하를 유랑하던 사나이 ‘백호 임제’가 생각난다. 진정한 자유인의 표상이다. 그 헌걸찬 기개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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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장 달마사전

-달마는 이렇게 말하였다-



달마

보리달마(菩提達磨)는 중국에서 불교를 대중화시킨 인물이다. 중국 선종(禪宗)의 창시자로 남인도 혹은 페르시아에서 왔다고 한다. 강설불교(講說佛敎)를 비판하고 좌선을 강조하였다.


후일 그의 법통을 이어받은 육조 혜능(慧能)에 이르러서는 중국 전통 종교인 노장사상의 영향을 수용하여 인도의 불교와는 완전히 다른 중국적인 불교로 거듭나게 되었다.


선종(禪宗)은 이론 중심의 불교를 극복하고 미학을 통하여 진리의 정수에 바로 쳐들어가게 하는 데 의미가 있다. 불교가 한결 쉬워진 것이다. 그 덕분에 누구나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교종이 엄격한 클래식 음악이라면 선종은 응용과 변주가 가능한 팝 음악과 같다. 그러나 근래에 이르러서는 선종의 탐미주의가 지나쳐서 도리어 클래식한 종교로 퇴행한 측면도 있다.


석가의 제자 500비구 중에 깨닫지 못한 사람이 없고 달마의 법통을 이어받은 무수한 조사들과 그 문하의 사람들 중에 깨닫지 못한 사람이 없다. 그러나 지금 한국불교에 있어서는 깨닫는 일이 일종의 금기로 되어 있다.


이는 선종의 본의와 상관없이 한국 사회의 병폐를 반영한 즉 교단 내부의 모순에 따른 구조적인 문제이다.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노마 군이 있기 앞서 구보 씨가 있었고 구보 씨가 있기 전에 달마 선생이 있었다. 짜라투스트라가 어떻게 말하였던 간에 그것은 니체의 언설에 불과하다. 어쨌든 달마는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공동체

인간의 행동은 동기유발로부터 시작된다. 동기유발은 사회적인 관계맺기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것이 곧 ‘사회화’이다. 관계맺기는 욕구와 행동 그리고 보상이라는 형태로 성립한다.


공동체는 인간의 욕구가 투영되고 행동이 이루어지며 보상이 주어지는 하나의 단위가 된다. 작게는 가족이 하나의 공동체이다. 사회화의 진전 정도에 따라 관계맺기의 규모는 점차 확대된다. 크게는 국가나 민족 혹은 세계가 하나의 공동체가 될 수도 있다.


인간은 공동체에 인정받으려는 욕구를 투영하고 또 한 단계 더 위로 상승하려는 행동을 통하여 자기실현이라는 보상을 얻는다. 인간의 행복은 궁극적으로 자기실현에 의해서 달성될 수 있다.


모든 인간은 무의식으로 내면화 된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있다. 공동체의식이 부족한 사람이 있다면 이는 인격적으로 미성숙한 경우이다. 사회화의 실패에 따른 반사회적 일탈이 된다. 범죄나 자살이 그러하다. 


니체의 권력의지나 마르크스의 소외이론은 공동체적 관점에서의 동기유발 측면에 대한 나름대로의 접근일 수 있다.



개인주의

공동체에 참여하기 위한 동기부여 측면에서 유의미하다. 요는 어떻게 공동체에 소속감을 느끼고 참여하도록 동기를 부여할 것인가이다. 인간의 원초적인 두 가지 욕망이 답하고 있다. 하나는 생존의 욕구이며 둘은 자기실현의 욕구이다.


생존욕구는 자기 내부의 생리적 요구에 대한 반응이다. 식욕이나 성욕과 같은 생리적 본능 또는 죽음의 두려움이나 정신적 고통과 같은 심리적 조건반사다.


자기실현욕구는 자기 바깥세계와의 의식적인 관계맺기다. 자신이 소속된 공동체로부터 인정받고 한 단계 더 위로 상승하려는 의지다. 사랑이나 도덕, 명예심 따위가 이에 해당한다. 이는 공동체 문화를 통하여 훈련되어야 한다.


개인주의는 바깥세계와의 관계맺기를 통한 동기부여를 꾀할 때 자신이 인정받고자 하는 대상 혹은 상승하고자 하는 세계가 동기부여의 주체가 되는 개인과 밀접해야 한다는 견해이다.


결론적으로 개인주의는 공동체와 그 문화에 참여함에 있어서의 동기부여는 개인이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집단주의

동기부여가 개인이 아닌 집단을 위주로 이루어지는 경향 또는 그러한 견해이다. 그 기저에는 집단적 보상개념과 집단적 징벌개념이 자리하고 있다.


수렵과 목축 혹은 전쟁이 가치창출의 주요한 수단이 되는 유목민 사회에서 특히 집단보상과 집단징벌의 개념이 발달해 있다. 반면 농경문화에는 집단보상이나 집단징벌개념이 약하다.


예컨대 특히 한국인들의 심리적 동기로 볼 수 있는 정(情)이나 한(恨)은 개인적 보상개념으로 볼 수 있다. 


동기부여의 주체가 되는 집단의 단위가 대규모 집단으로 발전하는 경우 큰 문제를 낳는다. 양차 세계대전을 촉발하고 있는 범게르만주의나 범슬라브주의의 충돌을 예로 들 수 있다.


또 부시의 이라크 침략을 방조한 범기독교공동체도 있을 수 있다. 집단주의가 초국가 단위로 팽창하여 인간의 지성에 의한 통제가 가능한 범위를 벗어날 때 재앙을 낳는 것이다.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의 부족사회에서 집단주의는 소규모 공동체를 중심으로 나타난다. 우리나라에도 가족공동체 중심의 집단주의가 있다. 영국이나 일본 혹은 인도네시아와 같이 고립된 섬나라에도 섬나라 특유의 집단주의가 있다.


미국이나 중국의 경우 공동체의 규모가 초국가 단위로 커져서 특이한 행동양식을 보이는 경향도 있다. 어느 경우든 집단적 보상개념과 집단적 징벌개념이 집단주의의 핵심이 된다.



권력의지

권력의지는 상승하려는 욕구에 대한 니체의 표현이고 인간소외는 인정받으려는 욕구에 대한 마르크스의 표현이다. 역시 공동체의식이 바탕이 되며 사회화를 위한 동기부여라는 본질은 같다.  


내향형 권력의지와 외향형 권력의지가 있다. 내향형 권력의지는 가족이나 부족과 같은 작은 규모의 평등한 공동체 내에서 동료의 존경을 받고 평판을 얻으려는 수평적인 공동체의식이다.


외향형 권력의지는 국가나 세계와 같은 더 큰 세계로 나아가고 또 경쟁하며 기여하려는 바 수직적인 공동체의식이다.


공동체의식은 집단무의식의 형태로 내면화되어 개인이나 사회의 인격적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다. 우리민족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공동체의식은 정(情)과 한(恨)으로 설명될 수 있다. 정은 가족 내부를 지향하고 한은 바깥세계를 지향한다.


정(情)과 한(恨)은 토지에 매인 농경민의 집단무의식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능동적이지 못하다는 아쉬움이 있다. 더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의식으로 바꿔야 한다. 반면 유목민의 집단무의식으로 작용하고 있는 집단적 보상과 집단징벌의 개념은 파시즘으로 흐를 위험성을 안고 있다.



깨달음

귀납적 사고의 한계를 극복하고 있는 연역적 사고를 의미한다. 철학 혹은 지혜와도 같다. 외부에서 주입된 단순지식과 달리 자기 내면에서 각성된 즉 다른 분야에도 응용될 수 있는 열린 지식을 의미한다.


귀납적 지식은 특정한 사실에 대한 판단이 가능할 뿐 그로부터 응용하거나 확장할 수 없다는 점에서 닫힌 지식이 된다. 반면 연역적 지식은 호환성과 확장성을 갖추고 있어서 다른 분야에도 얼마든지 응용할 수 있다.


예컨대 세계관이나 가치관 따위를 들 수 있다. 이는 연역적 사고이다. 특히 가치관은 자신의 삶에 있어서의 일관성을 담보한다는 점에서 연역적이다. 하나의 행동이 다른 행동에 영향을 미쳐 그 삶 전체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연역적 사고는 인간의 사유체계에 통일성을 부여한다. 그러한 통일성을 가능케 하는 것이 소통이다. 그 소통을 담보하는 것은 진리의 보편성이다. 모든 철학, 모든 사상, 모든 깨달음은 보편적 소통을 위해 창안되고 있다.


유교는 도학(道學)으로 말해져왔다. 도(道)는 길이다. 루트이다. 그것은 요소들 상호간을 연결하는 기본 프레임을 의미한다. 길은 서로 연결된다는 의미에서 소통을 뜻하기도 한다.


주자의 성학(性學)은 요소(要素)로서의 근본을 탐구한다는 의미가 있다. 여기서 요소는 성(性)으로 표현된다. 예컨대 ‘인의예지’가 그러하다. 오행론의 오행(五行) 역시 일종의 요소들이다. 요소는 루트를 구성하는 각각의 인자들이다. 


왕양명의 심학(心學)에서 심(心)은 중심 혹은 핵심을 의미한다. 즉 겉이 아닌 ‘속’이다. 이는 도(道)로 연결된 루트들의 교차점을 의미한다. 심(心)의 라우트가 성(性)의 요소를 연결하여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있다.


인간의 사고는 원자 혹은 요소 또는 성(性)으로 대표되는 원자론의 귀납적 사고에서 도(道) 혹은 심(心)으로 대표되는 관계망의 사고 곧 연역적 사고로 발전하고 있다. 깨달음은 연역적 사고를 낳는 관계망의 세계관을 의미한다.

불교의 인연설이나 혹은 유교의 조화설, 헤겔의 변증법은 연역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원시적이기는 하나 ‘관계망의 세계관’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노자의 무위자연개념에서 발견되는 역설적 사고도 이 범주에 속한다.


철학은 요소 중심의 원자론적 사고에서 흑백논리를 위주로 하는 이항대립적 사고를 거쳐 변증법적 사고로 발전한다. 근대에 이르러서는 뉴튼의 고전역학에서 비롯한 기계론적 사고, 요소환원주의적 사고가 징검다리가 되고 있다. 이는 귀납에서 연역으로 가는 중간단계로 볼 수 있다.


굳이 ‘깨달음’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첫째 귀납이 아닌 연역임을 분명히 하고, 둘째 학습이 아닌 각성임을 강조하고, 세째 지식이 아닌 소통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미학(美學)

미학은 작품성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다. 미학은 어떤 대상을 외부와 분리하여 하나의 독립된 계를 설정하고 일체의 외부요인을 차단한 상태에서 그 독립된 대상의 내적인 자기 일관성과 완결성을 추구한다.


음식의 미학이라면 그 음식의 가격이 얼마인가에 구애받지 않고 완전한 맛을 추구한다. 바둑의 미학이라면 승부를 떠나 이상적인 한 판의 완전한 바둑을 추구한다. 스포츠의 미학이라면 승부에 연연치 않는 완전한 게임을 지향한다.


이렇듯이 어떤 대상을 완전히 독립된 개체로 보고 그 주어진 범위 안에서 내재적인 자기 완결성과 일관성을 찾아가는 것이 미학이다. 그러므로 미는 완전 혹은 완성을 의미한다.


미학은 자기 정체성을 형성하는 자기 동일성과 연속성 그리고 자기 일관성과 완결성 및 구성요소 상호간의 긴밀성에 의하여 담보된다. 이러한 전개 과정에서 성립하는 균형에 의해 극도의 긴장이 얻어지고 그 긴장의 극한에서 미(美)가 성립한다.


예컨대 송두율의 ‘내재적인 접근법’을 빌어 설명할 수 있다. 그는 ‘어떤 사회에 대한 평가를 함에 있어서 외부에서의 요인을 배제한 채 그들이 스스로 정한 목표와 논리에 얼마나 충실했는가를 기준으로 평가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렇듯 외부와 격리한 채 내재적인 논리와 목표를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 미학이다. 누구나 각자 자기 자신의 미학을 가져야 한다. 자기만의 목표와 논리와 가치기준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세계와 더불어 공명할 때 아름답다.



속물(俗物)

속물은 외부 세계와의 소통이 단절된 채 자기 세계에 갇힌 사람이다. 그들은 사회와 소통하지 않는다. 세계와 자연과 신과 신의 진리와 소통하지 못한다. 그들은 고립되어 있거나 혹은 불필요한 마찰을 일으킨다. 


그들은 자기만의 미학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지식의 응용력이 되는 깨달음이 없다. 그들은 세계 앞에서의 신성한 긴장감이 없다. 그들은 동료와 불필요한 생존경쟁을 벌이려 든다. 그들은 편견과 고정관념과 선입견이라는 사투리(소통의 단절 의미에서)를 쓴다.


그들은 남들이 어떻게 보든 상관없다는 생각을 가졌거나 혹은 남들을 지나치게 의식하여 전전긍긍하기도 한다. 그들은 물리력 앞에 아부하거나 혹은 세계 앞에 굴종적인 태도를 취한다. 어느 쪽이든 자연스러운 관계맺기에 실패하고 있다.


그들은 독립적인 인격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자신과 세계와의 관계맺기에 대한 주체적 자각이 없다. 그들은 공동체 내에서 인정받지 못하며 더욱 세계인으로 상승하지도 못한다.


그들은 ‘자기실현’이라는 절대평가를 통한 행복을 맛보지 못한다. 타인과의 비교라는 상대평가를 꾀하지만 그것으로는 근본적으로 불행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화두(話頭)

화두(話頭)는 말을 풀어가는 첫 머리로서 이는 연역적 사고를 위하여 필요하다. 데카르트의 견해로 말하면 모든 논리 전개에 있어서의 대전제가 되는 제 1원인이 화두가 된다.


연역하기 위해서는 전제가 필요하다. 전제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일체의 사실을 의심해야 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언명은 존재야 말로 의심할 수 없는 제 1원인 곧 화두가 된다는 데카르트의 견해이다. 


화두(話頭)를 공안(公案)이라고도 한다. 이는 공부안독(公府案牘)의 줄임말로 사전에 미리 정해져 있는 규칙을 의미한다. 곧 전제로부터 의거하여 진술을 전개하는 연역법의 규칙성을 의미한다.  


예컨대 김성동의 소설 ‘만다라’에 등장하는 ‘병안에 든 새’의 화두를 말할 수 있다. 병 안에 든 새를 어떻게 꺼낼 것인가? 병에 손을 대지 않아야 함은 물론이다. 손을 대지 않는다는 뜻은 귀납의 단서를 배제한다는 뜻이다. 귀납할 수 없는 형태의 논리구조를 제시하기다. 귀납추론에 필요한 일체의 단서가 배제되었으므로 연역할 수 밖에 없다.  


연역의 의미는 사물을 관찰하여 숨은 규칙성을 찾아내는 귀납추론과 달리 자신이 능동적으로 규칙을 만들어 간다는 데 있다. 이 경우 논리학의 문제와 맞닥뜨리게 되며 거기서 모든 시스템에 공유되는 하나의 프레임을 발견하게 된다.


인간이 현실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자연과 인공의 모든 체계가 실은 하나의 프레임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지식의 응용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고 곧 인식의 비약을 이루게 된다.

  


세계관

세계관은 가치관을 담는 그릇이다. 자신이 속한 세계의 본질을 해치지 않으면서 어떻게 다른 세계의 가치들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동양의 열린 세계관과 서구의 닫힌 세계관이 있다.


열린 세계관은 자신의 생각과 다를 경우 어떻게든 이를 합리화하여 다양한 사상을 받아들이려 하며 닫힌 세계관은 자신의 생각과 충돌할 경우 이를 배척하려고 한다. 


기독교적 세계관은 창세에서 말세까지 일직선의 단선형 시간구조를 가지고 있다. 고대 원자론의 세계관과 거기서 유도된 요소환원주의적 세계관 또는 근대의 자연과학이 반영된 기계론과 결정론의 세계관들이 닫힌 세계관들이다. 


동양의 세계관은 대개 열려있다. 세상을 원자 알갱이의 집합이 아닌 하나의 네트워크로 보는 관계망의 세계관이 그러하다. 인연설로 대표되는 불교의 연기론적 세계관이 그러하다. 인연(因緣)은 거대한 하나의 네트워크다. 조화를 중요시하는 유교의 중용의 세계관과 노자의 역설적인 세계관도 그러하다.


이들 동양적 세계관들은 흑백논리와 같은 이항대립적 사고를 위주로 하는 서구의 단선적 세계관과 달리 비선형적, 입체적, 다면적인 사고를 가능케 하는 개방형 프레임 구조를 가지고 있다. 거기서 확장성과 응용가능성이 얻어진다. 


동양정신 특유의 이러한 보편성이 서구에 전해진 것이 헤겔의 변증법적 세계관이다. 또 근대과학의 성과를 반영하고 있는 아인시타인의 상대성의 세계관이나 최근에 말해지는 양자역학의 세계관도 일정부분 개방성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예측가능성을 위주로 하는 뉴튼 이래의 기계론적 세계관과 달리 자원의 무한공급을 전제로 상대적인 비효율성과 불확실성을 감수하는 보다 융통성이 있는 유기체적인 세계관을 이루고 있기도 하다.


이밖에 창조론이나 진화론 혹은 자연발생설, 정신분석학, 무속 따위도 일정부분 세계관의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반야(般若)

범어(梵語)로 프라즈냐(prajna)라고 한다. 분별지(分別智)를 극복하고 있는 무분별지(無分別智) 혹은 통합지(統合智)를 의미한다. 분별지가 귀납적 사고라면 무분별지는 연역적 사고이다. 반야는 곧 연역법이며 깨달음은 곧 연역적 사고다.


우리가 사물을 이해하는 기본 원리는 뉴튼의 고전역학으로 설명되는 물리적 대칭성과 등방성의 원리다. 주위의 사물에서 관찰할 수 있다. 앞과 뒤, 좌와 우, 겉과 속, 안과 밖, 위와 아래로 항상 이항대립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다.


이에 우리는 사물을 이항대립구조로 분별하여 파악하게 되었다. 이를 토대로 귀납추론을 전개하여 지식을 축적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귀납추론은 낮은 수준의 과학적 분석(分析)에 사용될 수 있으나 보편적 진리와는 거리가 멀다.


문제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와 운동이다. 밤이 낮이 되고 낮이 밤이 된다. 봄은 가을이 되고 여름은 겨울이 된다. 모든 것은 변화하며 변화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러한 변화가 귀납법의 분별지를 무용지물로 만든다.


시간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원인과 결과로 통합하여 보는 시각을 얻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원인이 먼저고 결과는 나중이며 그 사이에 시간이 흐른다. 즉 동일한 하나의 개체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원인과 결과로 표상하기에 각기 다른 양상을 나타낼 뿐 본질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사물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앞과 뒤는 없다. 위와 아래도 없다. 겉과 속도 없다. 안과 밖도 없다. 그 모든 것은 운동이 만들어낸 허상이다. 그 기저에 원인과 결과가 작용하고 있다. 원인과 결과를 하나로 연결하는 것은 관계이다.


물리적 등방성과 대칭성을 이루는 위와 아래, 앞과 뒤는 사물의 본성에 고착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과의 상대적인 관계에 의해 이차적으로 성립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변화와 운동이 일어나면 그 관계는 역전된다. 아래가 위로 변하고 겉이 속으로 변한다.


귀납적 사고에 따른 분별지의 오류를 극복하기 위해 사물을 원인과 결과, 실체와 관계, 요소와 효과, 본질과 현상, 내포와 외연의 네트워크로 파악하는 관계망의 세계관이 필요하다.


석가의 인연법이 그 단초가 된다. 헤겔의 변증법이나 유교의 중용, 음양오행설의 상생상극론도 원시적 수준이긴 하나 같은 범주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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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자연을 낳고 자연은 미를 낳고 미는 소통을 낳는다. 전광석화 같은 소통이 이루어질 때 그 울림과 떨림의 증폭이 이루어져서 널리 천하와 공명하게 된다. 그 순간 1사이클이 완성된다.







이어가기




요즘 세상의 트렌드는 어떤 것인가? 보보스족이라는 신조어가 보인다. 웰빙이 붐이라는 말도 있더라.


보보스(bobos)라면 ‘부르주아+보헤미안’의 합성어이다. 경제적 실리와 정신적 풍요의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겠단다.


빌 게이츠와 같이 성공한 인간들이 여피족의 자기과시보다는 개인의 삶의 질에서 가치를 발견하기로 한 모양이다. 일단은 좋다. 그러나 어설프다.


보헤미안은 떠도는 사람이다. 무리를 떠나 혼자서 가는 것이다. 서구의 그들도 이제는 혼자 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나 보다. 그러나 부족하다.


혼자 가는 것으로 부족하다. 보헤미안은 막연한 떠돌이가 아니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공동체의 씨앗을 뿌리고 은밀히 네트워크를 건설한다.


그들은 토지가 아니라 루트를 장악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흩어져 있지만 동시에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무엇인가? 대중과의 소통이 아니면 안 된다.


우리 부르주아가 못되지만 그래도 정신의 사치는 누려볼 만하다. 보헤미안이 되자. 독립하면서 소통하자. 루트를 장악하는 방법으로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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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빙이라는 것도 그렇다. 진짜가 아니다. 잘 먹고 먹은 만큼 운동하고 시간 나면 여행하고 그러다 심심하면 명상하고 이런 건 진짜가 아니다.


진짜는 삶이다. 잘 살려면 잘된 ‘삶’이어야 한다. 삶이란 무엇이며 그 삶의 반대편에서 죽음은 또한 무엇인가?


삶은 채워져서 충만한 것이다. 죽음은 텅 비어있는 것이다. 잘 산다는 것은 그 삶을 미학적으로 채워넣어 완성시키는 것이다.


아름다워야 한다. 아름다움으로 채워 넣는 것이다. 진실해야 한다. 진실로써 채워넣는 것이다.


그러한 채워넣음들에 의하여 후회 없는 것이어야 한다. 가득 채워넣어 충만해야 한다. 그것이 잘된 삶이다. 


삶은 커다란 자루와 같다. 그 자루에 채워넣기 어렵다. 대개 빈곤하다. 삶의 자루는 비어있기 다반사이다. 그래서 죽음이다. 그 비워진 공간만큼 죽음이다.


잘 먹고 열심히 운동하고 부지런히 여행하고 심심하면 명상하고. 그건 아니다. 그것은 그 삶의 자루가 텅 비어 있어서 느끼는 허기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진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루를 살더라도 진짜가 아니면 안 된다. 삶이어야 한다. 생생한 삶 그 자체여야 한다. 죽음이어서 안 된다. 비어 있어서 안 된다. 


심심할 땐 시간보내기로 명상도 좋다. 일거리가 없을 땐 여행도 좋다. 오래 살려면 운동도 좋다. 유기농 채소도 좋다. 그러나 진짜가 아니다. 진짜는 따로 있다.


진짜는 무엇인가? 그것은 ‘인생의 세 친구’를 사귀는 일이다.


첫 번째 친구는 나 자신이다. 먼저 자기 자신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 자신과 친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두 번째 친구는 신이다. 먼저 신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신의 진리와 친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신의 창조한 바 되는 세상과 친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세 번째 친구는 사람이다. 먼저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사람의 모둠살이가 만들어낸 바 사회와, 역사와, 문명과도 친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차단되고 유폐된 에고(ego)의 골방을 나와 대중의 바다로 뛰어들 수 있어야 한다.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으로 하여 채워넣을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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