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사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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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3953 vote 0 2008.12.29 (12:45:32)


최종결론은 대중 속으로

깨달음이 유의미한 이유는 대중성 때문이다. 언어와 문자 혹은 예법 따위가 특정 계급에 독점되는데 비해 깨달음에는 제한이 없다. 누구나 깨달을 수 있기에 비로소 깨달음인 것이다.


지식만으로는 대중을 통제할 수 없다. 우선하고 대중과 소통할 수단이 없다. 오직 깨달음으로만 대중과 직접 소통할 수 있다. 역으로 대중과의 소통에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면 이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는 의미가 된다.


깨닫는다는 것은 곧 의미를 깨닫는다는 것이다. 그 의미를 전달하는 기표가 되는 문자와 기호의 중간단계를 생략하고 그 본질인 기의가 되는 본질로 바로 쳐들어간다는 의미다.

동양정신의 최종결론은 중간단계를 생략하고 소통이라는 본질에 곧장 다가선다는데 있다. 중계자의 역할을 자처하는 지식인 집단을 배제하고 민중의 삶으로 직행한다는 의미일 수 있다.


정치라면 지도자와 민중이 바로 소통하는 것이 깨달음이며 기업이라면 오너와 종업원이 바로 대화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종교라면 교리를 제쳐놓고 인간의 구원이라는 본질로 바로 쳐들어가기다. 이는 곧 보편성을 의미한다. 진리의 보편성이 그러한 바로가기를 담보하고 있다. 



육조 혜능의 최종결론

불교의 대중화는 간화선이 발달한 당나라 때 육조 혜능에 의해 최종버전이 완성되었다. 일체의 중간 단계를 배제하고 완전한 소통에 도달한 것이다. 육조 혜능이 문자를 깨치지 못한 남쪽 변방의 촌사람이라는 점은 상징성이 크다.


육조 혜능의 일원론적인 가르침이 주자학, 양명학 등에 큰 영향을 미쳐 근세 동양적 지성상을 창출하고 있다. 한국 유교에서 기일원론으로의 통합에도 영향을 미쳤음은 물론이다.


요는 과연 대중과의 의사소통이 가능한가이다. 지식인에게는 언어와 문자라는 수단이 있다. 그 수단으로 지식인 상호간의 소통은 가능하지만 그 수단 때문에 지식인과 대중 사이에 장벽이 형성된다. 그 지식인의 툴을 던져버렸을 때도 여전히 의사소통이 가능한가이다. 가섭이 석가를 향해 미소지음으로써 그 가능성이 입증되었다.


한 떨기 연꽃이 말하는 것은 미(美)다. 미는 소통된다. 어린 아이라도 장미꽃을 보여주면 웃는다. 미는 세계공통의 언어이다. 만약 우리가 미의 원리를 깨달을 수 있다면 나와 그대는 바로 소통할 수 있다.


선불교는 다분히 미학적이다. 미학은 내적인 자기 완결성을 추구한다. 비유하자면 선사의 공안은 도자기 파편 하나를 들고 그 도자기가 깨어지기 전의 완전한 모습을 추적하는 과정과 같다.


추리극의 주인공은 작은 하나의 단서를 들고 그 사건의 전모를 추적하여 재구성하는데 성공한다. 미학은 캔버스 위에 작은 미의 단서 하나를 구현하는 방법으로 그 감추어진 나머지 부분의 전모를 추구한다. 크게 비워놓는 방법으로 오히려 그 나머지 부분이 무위자연의 원리에 의해 절로 채워짐을 구하는 것이다.



미학의 보편성

산경표에서 말하는 백두대간의 논리는 이러하다. ‘산은 물을 넘지 못하고, 물은 산을 건너지 않는다.’ 실제로 백두산 장군봉에서 백두대간 능선을 따라 단 한차례도 물길을 건너지 않고 지리산 천왕봉까지 종주할 수 있다.


백두대간과 거기서 갈라진 지맥들로 이루어진 이 나라의 수천 수만의 봉우리들이 모두 물을 건너지 않은 채로 두 점이 연결되는 루트를 딱 하나씩만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예외는 없다.


마찬가지로 대한민국 안의 모든 강은 두 점이 연결되고 있으며 그 선은 오직 하나 뿐이다. 낙동강과 한강의 수계는 서해와 남해로 하여 하나로 연결된다. 이론적으로는 낙동강에 사는 열목어가 남해와 서해를 거쳐 한강까지 헤엄쳐 갈 수 있다. 


산맥 역시 마찬가지다. 백두대간이라는 하나의 프레임에 의지하여 대한민국 안의 모든 봉우리들이 강을 건너지 않은 채로 단 한 개의 가장 빠른 루트로 연결된다. 능선의 분수령을 연결하는 선을 쭉 이어가면 천하와 두루 만나게 된다.


그것은 무엇인가? 보편성이다. 하나의 대간에서 정간으로 또 지맥으로 점차 가지를 쳐 나감으로써 결국은 모두 만나게 된다는 사실, 그리고 여기서 예외는 전혀 없다는 이 놀라운 사실이 곧 진리의 보편성이다.


선사(禪師)의 화두는 대한민국 안의 어느 작은 봉우리 하나가 이웃 봉우리와 분수령을 연결하는 루트를 계속 추적한 끝에 결국 백두대간으로 통하는 루트를 발견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고립된 작은 진리의 조각이지만 반드시 전체와 만나게 된다. 우리 모두는 그 방법으로 결국 만나게 된다.


미학(美學) 역시 마찬가지다. 장중한 오케스트라에 편성된 모든 악기들은 지휘자에 의해 결국 하나로 만나게 된다. 그 많은 음표들이 결국은 하나의 논리에 의해 한 줄에 꿰어져 서로 만나게 된다. 전체를 구성하는 부분으로 기여한다. 별도로 떨어져 나감은 없다. 만약 돌출하여 따로 떨어져 나가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미의 실패이다. 그 경우 아름답지 않다.



김용옥 신드롬의 의미

김용옥의 동양고전 방송강의는 대중을 열광시키고 있다. 김용옥 신드롬의 본질은 ‘지식계급과 유리된 대중 일반의 토종학문에 대한 갈구’이다. 본질의 문제는 소통에 있다. 언어와 문자를 통한 대중과의 소통은 불가능하다. 또 필요하지 않다. 대중에게 필요한 것은 삶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오직 미학(美學)으로서만이 소통은 가능하다. 지식은 소통의 방법으로 대중에게 미학적인 삶을 제공할 수 있다. 알아야 한다. 김용옥의 방송을 시청한 대중들은 거기서 알량한 지식을 획득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지식을 기반으로 하여 더 높은 세계와 소통하고자 한 것이다.


미학의 내면화가 제공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문화이다. 또 그 문화를 통한 삶의 질의 향상이다. 이차적으로는 개인의 인격적 완성 내지 상승이다. 또 그 방법으로 공동체로의 다가섬이다.


미학은 사물에 내재한 자기 논리의 완성을 지향한다. 도자기는 그 감추어진 흙의 성질을 완전히 구현하는 완전한 도자기를 지향한다. 음식이라면 그 재료에 숨은 완전한 맛을 지향하고 바둑이라면 그 승부에 숨은 완전한 수(말하자면 신의 한 수)를 추구한다. 마찬가지로 미학은 개인의 삶에서 자기 일관성을 지향한다. 자기다움에의 도달을 통한 자기실현이다.


깨달음은 소통의 방법으로 미학을 성립시킨다. 미학은 문화의 방법으로 대중과의 소통수단을 제공한다. 대중은 그러한 문화과정에의 참여를 통하여 질적으로 업그레이드 된 삶을 획득하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도달해야 할 이상이다. 동양정신이 서구를 앞설 수 있는 유일한 경쟁력이 여기에 있다.


김용옥은 이 사회의 비주류들에게 환영받고 있다. 이 나라 독서시장을 꾸려가는 수백만 독서인구도 대개 학계의 주류보다는 재야의 비주류에 기울어 있다. 널리 인정받는 지식인들의 책은 팔리지 않는다. 그들은 소통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김용옥의 책은 넉넉히 팔리고 있다. 그는 적어도 대중과의 소통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삶에 침투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바야흐로 인터넷시대이다. 새로운 소통의 도구가 주어졌다. 대중의 인문학적 열망에 불을 지르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가능성이 모색되고 있을 뿐이다. 유의미한 성과는 없다. 그러나 바닥에 고인 에너지는 크다. 기어이 지식과 재야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 더 무너져야 한다. 큰 소통이 이루어져야 한다.



강단학계의 라이선스 사업

학문의 기본틀은 ‘논리와 체계 그리고 검증’이라는 프레임이다. 여기서 스승과 제자의 역할분담이 있다. 스승이 먼저 화두를 던져 개념을 제시한다. 제자는 스승이 제시한 개념에 논리를 부여한다.


더 많은 제자들이 나와서 의견이 분분해지면 이윽고 중흥조가 나타나 이설을 정리하고 체계를 부여한다. 그러한 과정은 부단히 제자가 스승을 능가함으로써 얻어진다.


근래에 성립된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을 하나의 모델로 삼을 수 있다. 프로이드는 단지 개념을 제시했을 뿐 충분한 논리를 갖추지 못했다. 그의 논리는 사실이지 미완성이다. 프로이드의 제자였던 무의식의 융이나 성격이론의 아들러에 의해 비로소 논리가 얻어졌다.


제자가 스승을 능가함으로써 정신분석학이 나름대로 체계를 갖추고 하나의 학문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서 스승의 권위손상이 문제로 되지만 진리의 보편성이 문제를 해결한다. 종교와 구분되는 학문 특유의 개방형 프레임 구조를 가질 때 가능하다.


문제는 이 나라 강단학계에서 제자가 스승을 능가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데 있다. 서구 학문의 번역을 위주로 하는 ‘매판 길드’ 구조에서 제자가 스승을 능가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청출어람이 가능하지 않다.


스승이 프랑스나 독일에 유학하여 10년 남짓 공부한 것을 제자는 한국의 스승으로부터 1년 만에 터득하고 나머지 9년은 학문의 깊이를 쌓는데 투자하여 스승을 능가할 수 있어야 한다. 스승이 도입한 개념에 제자가 논리를 추가하고 후배들이 나서서 체계를 잡는 형태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왜? 번역이라는 장벽 때문이다.


제자는 스승이 도입한 개념을 자기류로 해석할 수 없다. 제자는 유학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스승을 능가하려면 본인이 직접 유학을 가서 서구에서 인정받은 권위자의 저서를 번역하는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많은 시간과 노력이 낭비된다. 이러한 불필요한 과정이 반복되는 한 학문의 진보는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 학문의 동종교배와 근친상간이 거듭된다. 제자가 스승의 학문을 1센티도 벗어나지 못한다. 표절에 표절을 반복하고 자기복제에 복제를 거듭할 뿐이다. 


다양한 교잡이 만들어지고서야 신품종을 기대할 수 있다. 번역이라는 소통의 장벽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 이 나라에서 학문의 업그레이드는 가능하지 않다. 현재로서 강단학계는 자격증을 팔아먹는 일종의 라이선스 사업에 불과하다.



토종학문을 길러야 산다

학문의 목적은 소통에 있다. 그것은 문자와 종교와 국경의 장벽을 넘는 것이다. 학문은 개인작업이 아니라 인류의 공동작업이다. 학문의 기본틀이라 할 개념과 논리 그리고 체계 사이에 역할분담이 이루어져야 한다.


스승은 번역의 방법으로 소통의 장벽을 제거하면서 동시에 ‘원전해석의 권위’라는 방법으로 그 장벽을 높인다. 소통이 이루어지지만 출입구는 통제된다. 의도적으로 병목현상을 유발시킨다. 스승은 소통의 장벽에 작은 출입문을 개설하고 트래픽을 유발하는 방법으로 권력을 창출한다. 학문은 죽고 권력이 남는다.  


번역의 장벽을 극복해야 한다. 외국 학문의 수입에 의존하지 말아야 한다. 학문도 하나의 브랜드이다. 토종 브랜드를 육성해야 한다. 토종 학문의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 가능한가?


제자가 스승을 능가하지 않으면 학문이 아니다. 거듭된 청출어람으로 하여 류가 만들어지고 계보가 만들어짐으로써 학문이 된다. 대간에서 정간과 지맥이 갈라져 나와야 한다. 개념의 뿌리에서 논리의 줄기가 나오고 체계의 가지가 뻗어나가야 한다.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버전이 나와주어야 한다.


그렇게 생성된 류가 황하처럼 흐르고 한강처럼 흘러서 주류를 형성하고서야 그 반대편에서 비주류가 만들어지는 것이며 양자간의 긴장관계에 의해 학문은 더욱 진보하는 법이다.



21세기의 원효들

전국 방방곡곡의 산야를 돌아보라. 원효와 의상에 관해 전설이 사찰마다 있고 암자마다 있다. 그러나 전해오는 대부분의 설화들은 고매한 의상을 드높이고 원효의 철없음을 비웃는 형태로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있다.


1천년 전 육두품 원효가 당나라에 유학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왕실의 후광을 입은 진골귀족 의상에 밀려 세간의 웃음거리로 전락하고 말았듯이 1천년 후에도 여전히 같은 패턴이 반복되고 있다. 서울대를 못 들어간 김용옥은 20세기의 당나라인 미국에 유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단의 질시에 의해 자동으로 비주류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그 길을 가야만 한다. 토종 학문을 길러야 한다. 누군가는 소크라테스가 되어 화두를 던져야 하고, 누군가는 플라톤의 역할을 맡아 거기에 논리를 부여해야 한다. 또 다른 누군가는 그들의 아리스토텔레스를 자처하며 체계를 세워야 한다.


대중은 갈구하고 있다. 제2, 제3의 김용옥들에게 기대를 품고 뭔가를 바라고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참여이다. 참여의 전제는 소통이다. 대중은 지식이 아닌 소통을 원한다. 소통의 수단은 깨달음이며 그 실천은 한 차원 더 상승된 삶이다.


서강대 이종욱 교수의 저서 ‘역사충돌’은 이 나라 학계에서 새로운 시선을 주장하는 지방대 출신의 비주류가 서울대 학벌을 중심으로 한 매판 길드의 아성에 도전하기 얼마나 어려운지를 증명하고 있다. 이종욱 교수는 숫제 ‘역사전쟁’으로 표현하고 있다. 단지 선배와 다른 의견을 냈다는 이유만으로 논문 게재를 거부당하고 저서의 출판을 방해받았다고 한다. 우리는 지금 그런 나라를 살아가고 있다.



발명은 가짜 발견이 진짜 

깨달음의 의미는 소통에 있다. 종교의 독단과 문화권의 편견으로 뇌가 세팅된 사람과는 소통할 수 없다. 그것을 깨부수는 것이 곧 깨달음이다.


이 시대의 지식집단 역시 전문분야의 언어와 방법론의 툴로 뇌가 세팅되어 있다. 좌파는 좌파대로 또 우파는 우파대로 특정 언어공유집단의 OS로 뇌가 부팅되어 있다. 문제는 호환성 부족이다. 또한 깨부수어야 한다.


그 모든 장벽을 극복하고 어디를 가도 막힘이 없이 두루 통하는, 호환성과 확장성을 갖춘, 그래서 누구와도 대화가 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완전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2천5백년전 공자가 주장한 군자(君子)의 의미와 같으면서 또 다르다. 그것이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참사람이다.


부시와 후세인은 소통하지 못한다. 회교도와 기독교도는 소통하려들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의 사랑도, 석가의 자비도, 마호멧의 평화도, 원래는 소통을 위해 발명되어졌다. 공자의 인(仁)도, 노자의 무위(無爲)도 계급과 국경과 문자로 하여 높여진 소통의 장벽을 제거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하나의 장벽이 허물어지면서 동시에 새로운 장벽이 하나씩 들어서곤 한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처음에는 소수의 귀족이 마차를 가졌다. 다음에는 다수의 중산층이 자동차를 가지게 되었다. 지금은 많은 서민들도 인터넷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어쨌거나 인류는 소통의 범위를 조금씩 넓혀온 것이다. 


언어와 문자 그리고 문명의 이기들이 소통의 수단이다. 그러나 인위에 의해 발명된 것이다. 자연에서 발견함이 아니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미학의 의미 역시 발명이 아닌 발견에 있다. 깨달음의 의미 역시 발명이 아닌 발견에 있다. 내 안에 없는 것을 외부에서 조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갖추어 있는 것을 내부에서 각성하는 것이다.


### OS

OS는 프로그램을 실행시키는 컴퓨터의 운영체제다. OS는 컴퓨터의 단계적인 진화경로를 담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는 자궁 속의 아기가 성장하면서 생물의 진화경로를 반복하는 것과 같다. 일반적으로 쓰이는 윈도시리즈는 그 이전의 MS-DOS 위에 얹힌 꼴이어서 그 이전 단계가 가진 한계를 온전히 극복하지 못한다. 또 생물이 이종교배를 거부하듯이 윈도와 매킨토시처럼 운영체제가 다르면 소프트웨어의 호환성에 문제가 발생한다. 인간사회에도 이와 같은 문제들이 있다. 그 이전의 단계가 가지는 어떤 협소함이 그 이후 단계의 발전을 제한하는 것이다.


자연스러움과 어색함

인간은 희로애락(喜怒哀樂) 애오욕(愛惡慾)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 더 세분하자면 감정의 종류는 수백 가지도 되겠다. 그러나 그 모든 감정을 제어하는 핸들은 단 하나 뿐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자연스러움과 어색함이다.


자연스러움은 인간이 자연의 미(美)를 받아들이는 방식이며 어색함은 자연과 호응하지 못하고 마찰하는 것이다. 모든 선(善)은 사회로 나아감에 있어서의 자연스러움이며 모든 미(美)는 자연과 교섭함에 있어서의 자연스러움이다. 모든 악(惡)은 사회로 나아감에 있어서의 어색함이며 모든 추(醜)는 자연과 어울리지 못하는 데 따른 어색함이다. 


인간의 미의식은 나 자신을 자연이 가진 본래의 완전함에 적응시키려는 노력이다. 윤리는 밖으로 사회와의 관계맺기에 있어서의 자연스러움을 추구함이며 도덕은 그러한 미의식의 내면화이다.


자연스러움은 떳떳하고 즐거운 감정을 일으키고 어색함은 부끄러움과 슬픔을 자아낸다. 백가지 감정과 천가지 이해관계를 이 하나의 핸들로 제어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어찌 절묘하지 않은가?


인간은 행복을 원하지만 인위에 의존하는 한 그 부자연스러움으로 하여 끝내 행복해질 수 없다. 인간은 욕망을 달성하기를 원하지만 그 또한 부자연스러움 때문에 결코 온전히 달성될 수 없다.


자연에서의 발견이 아닌 즉 인위에 의존하는 발명의 형태를 가지는 한 결코 인간은 자연스러울 수 없다. 부끄러울 수밖에 없다.



미학은 자연스러움이다

소통을 위해서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것은 프로그램의 공유이다. 우리는 같은 OS를 사용하고 같은 소프트웨어를 사용함으로써 인터넷으로 소통할 수 있다. 미학(美學)이 그 만인공유의 OS가 됨은 물론이다. 


미학은 자연스러움을 추구한다. 자연스러움은 사물에 내재한 자기 논리의 완결성을 지향한다. 모든 사물은 각자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 정체성을 성립시키는 자기 완결성과 자기 연속성에 도달할 때 아름답다.


모든 사물에 내면화된 자기만의 논리가 있다. 흙으로 빚은 도자기에는 흙의 논리가 있다. 흙의 논리는 흙으로 하여 100프로 완결되기다. 만약 쇠붙이나 플라스틱 따위를 그 흙에 접합하고자 한다면 흙의 논리는 깨어진다. 흙의 균형은 무너진다. 흙의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만다. 그 도자기는 깨부숴져야 한다.


나무로 만든 가구에는 나무의 논리가 있다. 나무의 논리는 나무로서 완결하고자 한다. 한 개의 쇠못도 허용하지 않으려 한다. 그 나무에 쇠못을 박을 때 그 나무는 내적인 완결성과 연속성을 잃고 아름다움을 잃어버린다.


클래식은 클래식 특유의 이항대립 구조가 연출하는 호흡을 가지고 있다. 그 호흡이 완급을 조절하며 극적인 긴장을 이끌어낸다. 그 긴장의 끝내 무너지지 않는 극점에 이르고서야 자연스러움이 묻어난다. 반면 팝에는 더 다양한 요소들이 가세한 데서 얻어지는 조화가 있다. 그 조화가 빚어내는 역동성이 어떤 극점에 도달할 때 일어나는 증폭효과에서 팝의 자연스러움이 묻어난다.


미학이 인간의 궁극적인 소통의 수단이 되는 이유는 미를 판별하는 자연스러움과 어색함의 감정이 인류공통의 원초적 언어이기 때문이다. 갓난아기 때부터 그랬다. 자연스러울 때 웃었고 어색할 때 울었다. 인간에 의해 고안된 어떤 사상과 이념과 문화도 이 원초적 언어를 능가할 수는 없다.



자연은 왜 아름다운가?

백악산의 바위는 수백만 년 몰아친 비바람에 깎이고도 살아남은 것들의 집합이다. 그 결과로 둥글둥글한 지금의 모습을 얻었다. 둥글다는 것은 물리적 등방성-대칭성이 적용되고 있다는 의미다. 이는 곧 외부환경과의 마찰에 견딜 수 있는 형태로의 최적화를 의미한다.


자연은 최적화되어 있으므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최적화된다는 것은 외부 환경과의 마찰이 최소화되었다는 의미다. 자연이 아름다운 이유는 외부환경과 마찰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아름다운 것은 스스로 완성되어 있다. 완성된 것은 마찰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아름답지 못한 것은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마찰하는 것이며 부당하게 개입하는 것이며 참견하고 침해하고 때로 충돌하는 것이다. 더럽다는 것, 마찰할까 두렵다는 것이다.


지구가 둥근 이유는 무엇일까? 작용 반작용의 법칙과 같은 물리적 등방성-대칭성의 원리가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등방성이란 무엇인가? 마주치는 두 힘이 평형을 잃고 한쪽으로 기울 때 이를 지켜보던 제 3의 요소들이 일제히 약자의 편에 가담하여 보완하는 방법으로 마침내 50 대 50의 균형을 이루고 마는 원리다.


인간이 상상해 낸 우주 괴물 ‘에일리언’이라면 어떨까. 괴물은 일단 못생겼다. 아름답지 않다. 에일리언의 신체구조는 비효율적이다. 신체의 비례들은 전혀 최적화되어 있지 않다. 에일리언은 외부와 극도로 마찰하는 구조로 되어있다. 전혀 자연스럽지 않다. 그러므로 아름답지도 않다. 


생명체는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가장 최적화된 생물이 가장 효율적인 생물이며 가장 효율적인 생물이 살아남기 때문이다. 에일리언과 같이 비효율적인 신체구조를 가진 생물은 자연히 도태될 수밖에 없다. 아름답지 않은 동물들은 대개 멸종하고 있다.


그러므로 지구상에 살아남은 모든 생물은 아름답다. 풀도 나무도 꽃도 아름답다. 바다도 하늘도 산도 들판도 아름답다. 아름답지 않고서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자연스럽지 않으면 자연에서 버틸 수 없기 때문이다.


왜 이 시대에 개인주의가 필요한가? 밤하늘의 별들이 일정한 거리로 간격을 벌리고 서로 마찰하지 않듯이 부당하게 타인의 삶에 개입하고 참견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래야만 아름답기 때문이다. 왜 집단주의가 문제인가? 지금 마찰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중용은 가운데에 있지 않다

중용(中庸)은 미를 추구한다. 중용의 사상이 그대로 미학의 사상이다. 유교의 예법은 중용의 미학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다. 중용은 최적화를 의미하며 이는 자연스러움을 의미한다. 요는 최적화에 실패한다는 데 있다. 중용을 가운데서 찾으려 들기 때문이다.


중(中)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용(庸)은 평상(平常)을 뜻한다. 평상(平常)은 보편성을 뜻한다. 평상(平常)에는 또 시간적인 진행의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중용은 가만히 머물러 있는 것의 한가운데가 아니라 일하며 움직여 나아가는 것의 자연스러운 경지를 의미한다.


정지해 있는 것에서 중심을 찾기는 쉽다. 그러나 일하며 나아가는 것에서 평상(平常)을 찾기는 어렵다. 그것은 부지런한 광대가 줄타기의 곡예를 부리며 절묘한 평형을 유지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쉬운 듯 결코 쉽지 않다.


우리는 자연의 물리적 등방성과 대칭성의 원리에서 중앙을 발견할 수 있다. 문제는 운동이다. 달리는 자동차의 중용은 그 자동차의 중앙에 있지 않다. 날아가는 화살의 중용은 그 화살의 가운데에서 발견되지 아니한다.


자동차의 중용은 엔진이다. 화살의 중용은 화살촉이다. 운동하는 물체의 힘의 중심은 그 물체의 중심보다 앞쪽에 있다. 중용은 물체의 중간이 아니라 힘의 중심, 운동의 중심, 에너지의 중심에 있다.


중심의 심(心)은 네트워크의 핵심(core)을 말한다. 중용은 돌아가는 판 전체를 장악하고 컨트롤 할 수 있는 위치를 의미한다. 선박이라면 브릿지와 같고 비행기라면 조종석과 같다.


전체를 제어하기 위해서는 넓은 시야를 가져야 한다. 무리의 가운데에 끼어 있어서는 전모를 볼 수 없다. 변화의 흐름을 읽을 수 없다.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야 한다. 한걸음 앞서 변화를 받아들이고 대중과 함께 커다란 세를 이루어 도도하게 나아갈 때 중용의 평상을 얻을 수 있다.



동양화의 의미

동양화라면 아무래도 산수화가 으뜸이다. 산수화는 산과 물을 그리고 있다. 곧 주역이 강조하는 음과 양의 균형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산수화의 백미는 구도의 배치에 있다.


능호관 이인상의 설송도를 말할 수 있다. 한 겨울에 눈을 덮어쓴 소나무가 두 그루이다. 한 그루는 곧추 서고 한 그루는 옆으로 누웠다. 음양의 조화를 나타내고 있다.


미는 중용에서 취할 수 있다. 미는 균형에서 얻어지고 균형은 중용에서 찾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운데서 중용을 찾으려 하는 즉 실패이다. 왜인가? 전체가 100이라면 그 100의 절반은 수면 아래에 잠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중용의 균형은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의 균형이어야 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균형이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시간의 흐름이다. 그러므로 여백이 필요하다.


가운데는 비워두어야 한다. 여백은 시간의 기록이어야 한다. 한 마리 학이 날아간 시간상의 거리를 나타내기 위하여 여백이 필요하다. 여백이 있어서 동양화는 서양화와 달리 정지화상을 극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용은 정지한 것의 기계적인 균형이 아니라 움직이는 것의 시간성까지를 포함한 즉 미처 무대 위로 오르지 못한 그 이면의 가치들까지 포함한 돌아가는 판 전체의 균형을 의미한다.


능호관의 설송도는 그 눈이 쌓이는 시간의 거리를 기록하고 있다. 이렇듯 보이지 않는 것들을 포함하기 위해 동양화는 가운데를 비워두고 여백을 두며 음과 양의 조화를 추구한다. 곧추 선 것과 누운 것의 조화 그리고 움직이지 않는 산과 움직이는 물의 균형이 소용된다.


근래 우리 화단에서 주장되는 한국화의 경향으로 말하면 동양화 본래의 가치들을 잃어버리고 있다. 그들은 이제 아무도 캔버스 위에 시간을 기록하려 들지 않는다. 그들은 여백을 잊어버리고 캔버스에 사물을 빽빽하게 배치하곤 한다.


그들은 동양화가 정지한 것과 움직이는 것 사이에서 성립하는 팽팽한 긴장감을 통하여 서양화의 정지화상이 빚어내는 갑갑함을 떨쳐버리고 한결 자연스러운 동화상의 경지에 근접하고 있다는 본질을 망각해 버렸다.



중용은 최적화이다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하나의 극이다. 완벽한 아름다움은 완벽한 극점이다. 피라밋의 꼭지점과 같다. 극에 서면 전체가 보인다. 천칭의 바늘이 가리키듯 한 치의 어김도 없이 지극한 경지에 선다. 극을 넘어서는 초극의 경지다.


미학은 내면화된 논리에 기초한 자기 완결성을 추구한다. 공자의 예법에는 공자의 미학이 깃들어 있다. 공자의 미학이 공자의 이상주의다. 공자의 이상은 군자의 이상이다. 군자는 공자의 미학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어지간히 결벽증이거나 완벽주의자들이다. 물론 논어에서 공자는 각별히 융통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숙명적으로 공자는 타협을 거부하는 깐깐한 샌님이다. 그는 결코 그의 미학을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완벽한 그림은 태산보다 높고 완벽한 음률은 에베레스트보다 뾰족하다. 가장 높기에 만인의 눈에 띈다. 만인이 동시에 그 그림을 보고 그 음악을 듣고 공감한다. 비로소 증폭이 있고 공명이 있다. 울림과 떨림이 전달된다. 시간을 장악하는 향(香)과 공간을 지배하는 기(氣)가 가감 없이 전달된다. 그렇다면 통할 수 있다. 비로소 소통이 이루어진다.


어중간해서 안 된다. 적당해서 안 된다. 최적화여야 한다. 그것은 첨예한 것이다. 전축의 바늘이 레코드판과 만나듯이 그것은 1바이트의 순수한 정보만이 통과할 수 있는 하나의 극점이다.


이동하는 무리의 중심은 그 무리의 선두에 있어야 한다. 때로는 전위에 서는 것이 중용에 서는 것이다. 그래야지만 그 움직여지는 판 전체를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것들까지 포함하기다.



노자의 도교적 미학

길 잃은 한 마리 양이 있다면 그대 어이할 것인가?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비난하고 바른 길을 가는 다수의 양을 찬양할 것인가? 길 잃은 양의 목에 줄을 묶어 끌어올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대는 선한 목자가 아니다. 선의가 항상 선한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설사 그 목자가 가시밭길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서 마침내 그 한 마리 양을 구하는데 성공하였다 해도 참되지 않다. 개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경우 어떤 형태로든 반드시 보상을 구하게 된다. 개입하는 즉 마찰하고 마찰하는 즉 손실하며 그 손실은 어떤 형태로든 보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노자라면 어떤가?  그는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는 고삐를 묶어 잡아오지도 않는다. 대신 길 바깥에서 또 다른 길을 하나 만들어 낸다. 유교가 비난하는 방법으로 혹은 기독교가 개입하는 방법으로 소통을 시도하지만 참되지 않다. 반드시 손실이 있고 그 손질의 보전을 꾀하므로 뒷탈이 남는다. 


교차로의 병목현상이라면 어떨까? 공자의 방법은 신호등을 세우는 것이다. 공자는 그 신호등의 이름을 예(禮)라 하였다. 공자는 학교를 세우는 방법으로 보행자들에게 그 신호등의 이용법을 가르쳤다.


예수는 숫제 경찰을 투입하여 운전자를 감시하려 든다. 공자가 인쇄된 책과 팜플렛을 나눠주는 방법을 쓸 때 예수는 다수의 목자들을 투입하여 맨투맨으로 마크한다. 노자라면 어떤가? 길 바깥에 길 하나를 더 닦는다. 병목현상이 해소된다.


공자의 미학도 깐깐한 편이지만 노자의 고집이 더 세다. 노자의 도교가 더 미학의 원리에 충실하다. 단지 공동체의식의 결핍에 의해 보편성을 잃은 결과로 후학들에 의해 계승되지 못했을 뿐이다. 완전한 소통은 가능한가? 충분히 가능하다. 고집 센 노자의 미학이 그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모나리자의 미소

여인의 눈동자는 비스듬히 측면을 바라보고 있다. 만약 모나리자가 그대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다면 그대는 모나리자가 그대를 공격하려는지 의심하여 불편해 하며 어색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것은 그대 이성의 판단이기 이전에 본능이다.


그대는 스스로 의식하지 못한 채 자신도 모르게 방어태세에 돌입할 것이다. 그대의 시선과 모나리자의 시선은 충돌할 것이며 둘은 보이지 않게 눈싸움을 벌일 것이며 마침내 그대는 당혹해 할 것이다.


필요한 건 관계맺기다. 여인의 시선이 그대를 정면으로 겨냥하고 있지 않으므로 그대 안도할 수 있다. 여인과의 관계를 설정함에 있어서 그대 자신의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다. 그대는 고개를 돌리고 떠나버릴 수 있다. 그대는 한참 더 바라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지 그대의 의사에 따라 결정할 수 있다.


그것은 찰나이며 전광석화 같은 스쳐감이다. 그것은 하나의 극이면서 또 그 극을 넘어섬이다. 미(美)는 그 극에 도달함이며 깨달음은 그 극을 넘어서기다. 극에 도달함으로 불충분하고 초극에 이르러 그 돌아가는 판 전체를 장악하고 통제함에 있어서 비로소 완전하다. 


완벽한 극은 그 완벽함으로 인하여 만인의 눈에 띄게 된다. 그러므로 극은 만인으로 하여금 서로 통하게 한다. 그 극이 양극단의 맞서는 극이 아니고 양극단을 동시에 아우르는 중용의 극이어야 함은 물론이다.


천칭의 두 날개가 팽팽한 긴장 가운데 균형을 이루듯이 천칭바늘 끝처럼 위태로운 가운데 균형을 찾아가기다. 허공에 매달린 지진계의 추처럼 언뜻 위태로워 보이지만 세상이 흔들려도 자신은 흔들리지 않는다. 세상 어디에도 의지하지 않으면서 세상의 흔들림을 기록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모나리자의 여인이 그 미소에 공명하여 은근한 미소로 화답하는 사람의 숫자를 세는 방법으로 기록하듯이 말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지구상에 10명도 채 안 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아니다. 사실을 말하면 단 한 사람도 없다. 왜냐하면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일정부분 틀렸을 수 있으니까.


이해하는 척 하는 것이다. 왜인가? 아인슈타인이 옳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이전의 뉴튼이 확실히 틀렸기 때문이다. 기존의 세계가 확실히 틀렸기 때문에 새로운 세계가 ‘미지의 가능성’의 형태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반면 사람들은 기존의 세계에 대한 환멸이 없으면 새로운 이론이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해도 쉽사리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 패러다임을 교체하기가 귀찮으니까. 이 버스에서 내려서 새 버스로 옮겨 타기 싫으니까.


그것은 극(極)이다. 뉴튼의 극이 있는가 하면 아인슈타인의 극이 있다. 극은 둘 뿐이다. 이거 아니면 저거이다. 제 3의 선택지는 없다. 그러므로 갈릴레이가 ‘지구는 돈다’고 날마다 외쳐도 사람들은 여간해서 기존의 인식틀을 바꾸지 않는다. 세계관을 바꾸면 거기에 연동되어 있는 모든 것을 다 바꾸어야 하기 때문이다.


왜 아인슈타인인가? 2차대전의 충격 때문이다. 뉴튼의 결정론적 세계관에 대한 믿음이 이차대전의 환멸로 깨져버린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또 전쟁에 준하는 재앙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기존의 질서에 의문을 품지 않는다. 어차피 극이기 때문이다. 그 극과 극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이다.


2차대전의 환멸을 겪고서야 인류는 반성하고 있다. 뉴튼이 틀렸음이 확인되었으므로 사람들은 썩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미지의 가능성’의 형태로 아인슈타인을 선택할 뿐이다. 옳고 그름의 논의는 필요 없다. 어차피 극점이기 때문이다.


기어코 전쟁이 일어난다. 재앙이다. 문명사 차원의 위기일 수 있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혹시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고 의문을 품는다. 전쟁은 또 일어난다. 인간들이 자신의 믿음에 의혹을 가질만한 상황은 온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하게 된다.


그 때를 대비하여 대답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오만한 서구의 세계관에 대해 ‘그건 아니오!’ 하고 말할 수 있는 창의적인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철학의 목적은 소통에 있다

자동차를 발명하기는 어렵다. 발명된 자동차를 제작하기는 쉽다. 제작된 자동차를 운전하기는 더욱 쉽다. 운전되고 있는 자동차에 승객으로 동승하기는 너무나 쉽다. 이렇듯 쉬운 것이다. 우리의 삶은 대개 쉬운 것이다.


깨달음 또한 마찬가지다. 발명하기 어렵지만 공명하기 쉽다. 모나리자를 그리기 어렵되 감상하기 쉽다. 그 미소에 화답하여 미소지어주기 어렵지 않다. 깨달음은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다.


원리는 2500년 전 석가에 의해 발견되었다. 2000년 전의 공자에 의해 시범 제작되었다. 500년 전의 율곡에 의해 운전되었다. 21세기의 우리는 그저 편한 승객으로 동승하기만 하면 된다. 어렵지 않다.


21세기가 요구하는 것은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우리가 승객으로 동승해야 할 그 버스를 교체하는 일이다. 필요한 것은 의사결집이다.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 울림과 떨림에 공명하기만 하면 된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인류가 종교와 문화와 언어와 전통의 차이를 넘어 이상적인 소통의 방법을 찾아내는데 있다. 대한민국의 모든 산이 예외 없이 백두대간이라는 하나의 프레임과 단 하나의 루트만으로 연결되듯이 보편성이라는 진리의 프레임이 만인에 의해 공유되고 있다.


미학 또한 마찬가지다. 내가 아름다움을 느낄 때 그대도 아름다움을 느낀다. 내가 어색해 하고 부자연스러움 느낄 때 그대도 마찬가지로 어색해 하고 부끄러워 한다. 생각하라! 그대의 일상적인 행동을 결정하는 소인의 99프로는 떳떳함 혹은 부끄러움이 아니고 다른 무엇이었더란 말인가?


이에 우리는 공명할 수 있다. 복잡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산이 물을 건너지 않고 백두산과 바로 통하는 단 하나의 루트를 가지듯이 떳떳함과 부끄러움이라는 단 하나의 미학적 잣대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호흡과 맥박의 주파수에 동조할 수 있다. 그 방송국의 주파수와 사이클을 일치시킬 수 있다.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차피 극이기 때문이다. 선택은 단 하나 뿐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단지 부끄러움과 떳떳함 중 하나를 선택하기만 하면 된다.


진리와 더불어 공명할 수 있다. 그대 존엄할 수 있다. 비참을 극복할 수 있다. 이 하나의 나침반만으로 인류는 소통할 수 있다. 공동체와 소통하고 자연과 소통하고 우주와 소통하고 신과 소통하고 진리와 더불어 소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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