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사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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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4256 vote 0 2008.12.29 (12:46:20)

불교사상의 일원론

불교 역시 마찬가지다. 점오를 주장한 신수의 북종선이 이원론에 가깝다면 돈오를 주장하는 육조 혜능의 남종선은 일원론에 가깝다. 공간에서 차별한 것이 시간에서 다시 통합되는 발전 패턴을 따르는 데 있어서는 어김이 없다.


유교와 불교 뿐 아니라 세계의 모든 사상이 그러하다. 진보하는 것은 모두 이 패턴을 따르고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진보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다. 퇴행하여 종교가 되거나 아니면 일원론으로 발전하거나 둘 중에 하나이며 그 외의 경우는 없다.


21세기의 대중문화 역시 클래식에서 팝으로, 차별에서 참여로, 폐쇄에서 개방으로, 수직지배구조에서 수평적 네트워크구조로, 독점에서 공유로, 그리고 권위주의에서 대중주의의 일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학문은 개인의 독점물이 아니라 인류의 공동작업이다. 그러한 공동작업을 가능케 하는 것은 무엇인가? 진리의 보편성이다. 이 하나의 방향이어야만 더 많은 사람들이 소통하기에 성공하여 참여할 수 있다.


예컨대 수학은 특정한 인물이 개인적으로 발명한 것이 아니다. 오늘날의 발달한 수학에는 수 천년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창의가 참여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열려있기 때문이다. 개방형 프레임 구조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전제들을 동시에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일원이 아니고 안 된다. 



진보는 시간성의 이해

유교와 불교가 공히 분별지의 이원에서 무분별지의 일원으로 가는 이유는 거기에 시간성의 대입이라는 하나의 공식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퇴계의 이원론은 작용과 수용, 지배와 피지배, 남자와 여자, 천(天)과 지(地), 태양과 달을 공간적 개념으로 구분하여 보는 시각이 된다.


성리학의 성(性)은 곧 요소이다. 요소는 알갱이이다. 알갱이는 원자이다. 원자는 단단하다. 고유한 불변의 속성을 가지고 있어서 원천적으로 구분된다. 성리학은 처음 이러한 다름에 주목하였다. 중화와 만이, 문명과 야만, 남자와 여자, 양과 음, 귀족과 천민의 다름에 주목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율곡의 기발이승일도설은 이(理)를 원인으로 보고 기(氣)를 결과로 본다. 이는 불교의 연기사상과 통한다. 불교의 인연(因緣) 개념 역시 인과율에 기초하여 원인과 결과 사이의 함수관계에 주목하고 있다.


원인과 결과 사이에는 명백히 시간이 개입한다. 원인이 먼저 작용하고 결과가 나중 나타나며 그 사이에 시간이 흐른다. 동일한 하나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봄이 되기도 하고 여름이 되기도 한다. 위가 되기도 하고 아래가 되기도 한다. 음이 되기도 하고 양이 되기도 한다. 변한다.


음이 밤이면 낮은 양이다. 밤과 낮은 시간이다. 시간이 흐르면 변한다. 계절이 순환하듯이 음과 양은 고착되지 않고 변하는 것이다. 불변의 요소가 아니다. 딱딱한 알갱이가 아니다. 원자가 아니다. 모든 것은 가변적이다. 불교의 제행무상(諸行無常)과 같다.


인과율에 따라 원인과 결과는 본질에서 같은 하나여야 한다. 원인이 곧 결과이다. 색즉시공(色卽是空)이자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이는 사물을 분별함에 있어 다름이 아닌 같음에 주목한 바가 된다. 필연적으로 이(理)와 기(氣)는 결국 통합될 수 밖에 없다.


현대의 물리학에서도 마찬가지다. 돌턴이 원자가설을 제기했던 초기 단계에서는 ‘원초적 다름’으로 파악되었다. 그러나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산소와 수소가 본래 다른 것이 아니라 양자와 음전자와 소립자가 어떻게 조직되느냐에 따라 결과적으로 달라질 뿐 본래는 같은 하나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무엇인가? 통일장이론이다.


이론물리학의 최종 결론은 통일장이론으로 정해져 있다. 통일장이론이란 무엇인가? 다름이 아닌 같음에 주목하기다. 원자량의 차이에 따라 구분되었을 뿐 산소나 수소나 헬륨이나 그 에너지의 바탕은 같음이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성리학의 주류는 일원론

요즘 율곡보다 퇴계가 더 조명되는 경향이 있지만 이는 한국 유교의 역사성을 간과한 것이다. 조선 성리학의 주류는 화담 서경덕에서 율곡 이이, 우암 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에 있다.


율곡의 일원론이 퇴계의 이원론에 비해 더 과학에 가깝다. 퇴계의 이원론은 더 종교에 가깝다. 그런데 20세기에 와서 과학으로서의 유교는 사망하고 있다. 종교로서의 유교는 근근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그 덕분에 종교로서의 유교인 퇴계사상이 조명되고 있을 뿐 퇴계의 이원론이 조선 성리학의 주류는 아니다.


한국의 인문주의는 새롭게 일어나야 한다. 보편성을 잃은 즉 오리엔탈리즘의 종교가 아닌 보편성을 가진 인문과학으로서의 유교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한다. 율곡의 일원론에서 찾을 수 있다.


유교는 2천년간 점진적으로 발전했다. 그 발전에 역사성이 있고 그 역사성이 퇴계의 이원론을 부정하고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문화는 차별에서 통합으로, 구분에서 조화로, 분리에서 공존으로, 클래식에서 팝으로, 귀족문화에서 대중문화로 발전한다. 왜 동일한 같은 패턴을 따르는가? 동일한 하나의 프레임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역사의 진보이다.


왜인가? 모든 논의의 본질은 궁극적으로 소통에 있기 때문이다. 이원론의 인위적인 구분은 결국 소통의 실패를 반영한다. 왜 구분하는가? 왜 남녀를 구분하고 인종에 따라 구분하고, 종교에 따라 구분하고 계급에 따라 구분하는가? 소통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남녀간에, 계급간에, 인종간에, 민족간에 소통이 실패했던 것이다. 이원론적 사고는 소통의 실패에 따른 좌절감을 반영하고 있을 뿐이다. 왜 진리는, 학문은, 역사는 그렇게 구분되었던 것을 다시 통합하는가? 비로소 소통이 이루어졌을 때 그러한 구분이 무의미해진 까닭이다.



진보란 막힌 데를 뚫는 것

진보란 무엇인가? 그것은 막힌 데를 뚫는 것이다. 역사는 인류가 소통을 증대시켜온 과정이다. 서구와 동양이 소통하고 한국과 일본이 소통하고 문명과 문명이 소통하고 있다. 그것이 역사의 진보이다.


이별을 앞둔 연인들이 구리거울을 두 쪽으로 나눠가졌던 뜻은 나중 다시 하나로 합쳐보기 위함이었다. 군인의 암구어(암호)가 문어와 답어의 둘로 나눠지는 까닭 또한 나중 그것을 하나로 합쳐보기 위함이다.


한번 칸이 나누어진 것이 나중 다시 합쳐지기 위해서는 막힌 데를 뚫을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한 인식이 논리학에서는 인과율로 설명되고 불교에서 인연설 혹은 연기법으로 설명된다. 유교에서는 음양의 조화로 설명된다.


노자는 유(柔)가 강(剛)을 이긴다고 말하고 있지만 유가 강을 이기기 위해서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바위에 떨어지는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 데는 천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반대로 강이 유를 자르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칸을 지르고 장벽을 쌓는 일은 한 순간에 가능하지만 그 장벽을 무너뜨리는 데는 천년의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이윽고 때가 되었을 때 그 장벽을 무너뜨리는 것도 한순간이다. 소통할 수 있다면 공명(共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천(天)과 지(地), 위와 아래, 남자와 여자, 음과 양이 있다. 이렇듯 인간이 생각해낸 모든 칸이 나뉘어 구분되는 것은 본질에서 소통되는 것과 소통되지 않는 것의 구분이 된다.


모든 구분은 본래 소통할 목적으로 구분지은 것이며 기어이 막힌 데를 뚫어 소통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러한 구분은 불필요해진다. 그러므로 석가는 이미 피안의 강을 건너고 난 다음에는 타고 온 뗏목을 버리라고 가르쳤던 것이다.(유명한 뗏목의 비유)



발견하기와 뛰어넘기

처음 특정한 지역이나 계급에서 새로운 문화가 출현하면 그것이 전파하여 가면서 곧 국경과, 계급과, 신분과, 언어와, 민족이라는 장벽들을 차례로 만나게 된다. 장벽을 넘기 위해서는 중간계급 사(士)의 도움이 필요하다. 브로커가 필요하고 중간상인이 필요하고 뚜쟁이와 매파가 필요하다.


문화는 본래 소통을 위해 존재한다. 그 소통을 도와주는 중간계급이 문화의 주체가 된다. 그들은 언어와 문자라는 소통의 수단을 훈련하고 있다. 문화가 발전하여 충분한 소통이 이루어진 때 그 중간집단인 사(士)는 필요 없게 된다.


뚜쟁이는 사라져야 한다. 중간상인은 없어져야 한다. 그들이 도리어 소통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언어와 문자와 기호들도 넘어서야 한다. 모든 예술, 모든 문화, 모든 사상과 종교와 철학은 소통을 방해하는 그러한 중간의 장벽들을 허물어 없애기 위하여 존재한다.


클래식의 의미는 문화를 이해하는 귀족집단과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민계급을 구분하는데 있다. 더 고상한, 더 완벽한, 더 수준 높은, 더 엄격한 가치를 발견함으로써 이에 접근하지 못하는 대중들과 무제한으로 접근할 수 있는 자기네를 차별하자는 것이 클래식의 목적이다.


클래식은 완벽한 화음, 완벽한 조화, 완벽한 음질, 완벽한 세계가 있다고 믿는다. 문학에서도 마찬가지다. 고전주의는 완벽한 형식미를 추구한다. 완벽한 운율의 정형시를 추구한다.


미술이나 건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불교미술이 도입된 신라 초기의 불상과 석탑은 완벽한 균형미를 추구한다. 불국사의 석가탑과 석불사의 본존불이 그러하다. 가람의 배치 또한 마찬가지다. 완벽한 좌우대칭의 균형미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팝은 그 반대이다. 국경을 넘어, 계급을 넘어, 인종을 넘어, 무차별적인 소통을 추구한다. 클래식이 쌓아놓은 차별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것이 팝의 진실이다. 비로소 문화의 대중화가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역사는 클래식에서 팝으로, 이원론에서 일원론으로, 공간적 구분에서 시간적 통합으로, 자기완성의 소승에서 대중소통의 대승으로, 돈오점수에서 돈오돈수로 가는 일정한 패턴이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학문은 인류의 공동작업

학문과 비학문의 구분기준은 내부에 자기 정체성을 담보하는 자기 연속성 및 자기 동일성의 체계가 갖추어져 있느냐다. 스승이 만든 뼈대에 제자가 점차로 가지와 살을 붙여나갈 수 있게 하는 생장점이 있는 개방형 프레임 구조로 되어 있어야 한다.


수학이나 과학이라면 지속적인 발전이 있다. 그러나 종교라면 스승이 만든 논리에 제자가 1획도 더하거나 뺄 수 없다. 닫혀 있다. 그러므로 종교는 교주 1인의 개인작업이 된다. 반면 학문은 인류의 공동작업이며 그것을 가능케 하는 대전제가 진리의 보편성이다.


소크라테스는 미완성이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시민을 향하여 던진 것은 하나의 화두였다. 그것은 하나의 개념(concept)에 지나지 않았다.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화두를 받아 거기에 논리(core)를 부여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논리에 체계(approach)를 부여하였다. 비로소 학문이 이루어졌다.


논리를 부여하였다는 것은 안으로 미학적인 자기 완결성을 부여한다는 뜻이며 체계를 부여하였다는 것은 밖으로 뻗어나갈 접근성의 가지를 친 것이다. 비로소 정체성(core)의 안과 접근성(approach)의 밖이 갖추어진 것이다.


화두의 발견, 곧 개념의 정립은 학문에 있어서 하나의 씨앗이다. 안으로 논리부여는 그 씨앗이 땅속으로 뿌리를 내린 것이며 밖으로 체계의 형성은 그 씨앗이 대지를 뚫고 솟아나 하늘을 바라고 가지를 뻗은 것이다. 이러한 전제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학문이 아니다. 


뉴튼 이래의 근대과학 역시 이러한 개방된 프레임 구조를 가지고 있다. 동양사상 역시 마찬가지다. 수운 최제우가 유불선 삼교를 통합하고자 한 것은 애초에 그 통합의 단초가 되는 개방성이 동양사상에 공통적으로 내재해 있었기 때문이다.



동양정신의 경쟁력은?

소크라테스와 마찬가지로 공자 역시 미완성이다. 공자의 화두에 맹자의 논리와 주자의 체계가 차차로 가지를 치고 살을 붙여서 전개한 바 제자가 몰려들어 흐름이 형성되고 전통이 만들어졌다.


반면 예수나 석가의 작업은 개인작업에 가깝다. 아무도 예수의 개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거기에 살을 보태지도 못한다. 예수의 문은 닫혀 있고 석가의 문은 반만 열려있다. 소크라테스와 공자의 문은 확실히 열려있다.


논어의 첫머리가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면 불역열호(不亦說乎)아’로 시작되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가르침이 아닌 배움으로 시작하기다. 이는 밖으로 문을 열어젖힘을 의미한다. 유교의 천(天)은 불교의 범(凡)과 통한다. 역시 보편주의를 의미한다. 일인의 독점이 아닌 천하의 공유이다.  


공자가 주(周)나라 모델의 이상주의와 요순 모델의 유토피아론을 끌어오는 것도 같은 원리다. 여기에 시간의 흐름이 있다. 아쉬운 것은 공자의 시간개념이 미래로의 전진이 아닌 과거로의 퇴행으로 오해된 점이다.


물론 유교에도 많은 폐단이 있다. 그러나 논쟁을 거치면서 장점은 살아남고 단점은 제거된다. 유교의 단점이 지금까지 온존하였다는 것은 내부에서 논쟁이 부족했다는 것이며 이는 종교화되었다는 의미다. 반대로 한국 유교의 일원론은 500년간 선비들의 치열한 내부토론을 거치면서 단점을 하나씩 제거해온 끝에 이룩된 것이다.


인류가 고안한 모든 사상은 진보 혹은 보수로 해석될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의 말세개념은 보수적이지만 구원개념에서 일부 진취적 요소를 발견할 수도 있다. 기독교에 일원론적인 요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열려 있는가이다. 열려있다면 부단한 내부논쟁에 의하여 자연히 진보의 측면이 부각되고 보수의 측면이 퇴조하게 되어 있다.



공자 유교의 위대성

서구가 진보하던 시대에는 기독교 역시 진보적인 시각에서 해석되었고 서구가 암흑에 빠져 있을 때는 기독교 역시 보수적인 시각으로 해석되었다. 유교 역시 양면성이 있다. 보편의 뼈는 취하고 삼강오륜의 살은 버려야 한다.


공자의 위대성은 종교적 편향으로 기울지 않고 학문의 객관성에 중심을 세웠다는 점이다. 더욱이 현실참여를 통한 문명의 진보라는 본질을 파악한데 있다. 동시대의 어떤 사상과 비교해서도 앞서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불교의 경우 석가는 현실을 긍정하는 현실주의자의 입장에 섰다. 그러나 현실을 부정하는 바라문교의 그릇된 전통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했다. 내세구원을 추구하는 기독교사상에는 현실참여에 의한 문명의 진보라는 본질이 결여되어 있다. 그들은 역사를 공부하지 않았던 것이다.


현실을 긍정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공동체 개념의 전제다. 인간의 성취동기를 내세가 아닌 현실에서 찾자는 거다.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상승할 대상이 찾아진다. 국가와 민족 그리고 문명이 그것이다. 이와 같이 공동체 개념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이 공자가 소크라테스 보다 노자나 석가, 예수 보다 우뚝한 부분이다.


공자의 인(仁)이 의미하는 것은 문명의 주체가 개인이 아닌 공동체라는 점이다. 인(仁)은 개인과 공동체를 연결하는 징검다리다. 반면 예수의 사랑이나 석가의 자비는 공동체 개념의 전제가 없기 때문에 성취동기로서의 흡인력이 약하다. 


인(仁)은 인(人)+이(二)이다. 두 사람 이상의 공존이다. 두 사람 사이에 무엇이 필요한가? 의사소통이다. 공자의 인은 수평적 커뮤니케이션의 관점에서 파악해야 한다. 반면 예수의 사랑과 석가의 자비는 일방적이다.


예수의 사랑과 석가의 자비는 나에게서 너에게로 일방적으로 전해하는 것이며 이는 주관성의 에고(ego, 小我)를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반면 공자의 인(仁)은 주관성을 배제하는데 성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칸트의 이성과 가깝다.



공자 미학의 엄격성

공자는 인(仁)의 근거를 심리적 동기에서 찾고 있다. 염치(廉恥)의 강조가 그러하고 맹자의 성선설이 그러하다. 기독교나 불교와 달리 타인을 돕겠다는 식의 인위적인 목적을 배제하는데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유교에서 발달하고 있는 예법은 미학의 논리에 충실하다. 미학은 자기 일관성을 추구한다. 선비가 일관된 삶을 위해서는 인(仁)하지 않을 수 없다는 식이다. 그것으로 도달하려는 것은 자기다움이며 자연스러움이다.


자연스럽지 못한 것은 무엇인가? 어색한 것, 떳떳하지 못한 것, 비굴한 것, 부끄러운 것이다. 공자의 인(仁)은 당당한 것, 태연한 것, 떳떳한 것, 흔들림이 없는 것,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아름답고 고상한 것이다.


반면 석가와 예수의 구원은 일방적으로 선언된 인위적인 목적의 성격이 강하다. 공자가 예법을 말하되 미학의 논리를 내장하고 있는 것과 다르다. 자연에서 미추를 끌어오고 미추에서 선악을 끌어오고 다시 선악에서 도덕을 끌어오는 전개과정이 생략된 것이다. 


공자의 최종목표는 이상주의 관점에서 천하(天下)에 도달하기다. 천하(天下)란 무엇인가? 천인감응(天人感應),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커다란 소통이다. 자연에서 미추를, 미추에서 선악을, 선악에서 도덕을 유도하여 곧 실행함으로써 하늘과 통하는 것이다. 진리와의 소통, 신과의 소통이 이루어졌다. 



널리 소통을 구하다

공자가 꿈꾼 이상향은 문명이 발달한 사회이다. 그 문명은 문화적 가치에 의해 고양된 정신의 문명이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사이에 이상적인 소통이 이루어지는 사회이다. 그러한 소통을 가능케 하는 코드는 인(仁)이다.


노자는 산골에 은둔하였고 예수는 시골뜨기였다. 석가는 왕궁에서 태어났지만 궁은 고립된 공간이다. 그는 도시와 광장의 문화를 체험하지 못하고 숲 속을 헤매 다녔다. 그들은 문명의 중심에 서 보지 않았다.


공자는 춘추(春秋)를 저술한 사람이다. 역사를 공부하고 있다. 인과율이 지배하는 시간의 흐름을 추적하고 있다. 공자가 활약한 시대야말로 중국 역사상 가장 역동적인 시대였다. 공자는 그 황하문명의 역동성을 기록한 것이다.


공자는 인류가 차차 진보하여 마침내 야만을 극복하고 문명을 이룩하였다는 사실을 최초로 자각한 사람이다. 문명과 야만의 차이는 소통의 차이이다. 그 시대에 소통은 도(道)로 표현되었다. 공자는 특히 윤리(倫理)라는 소통수단을 개발하고 도(道)라 불리는 지적 네트워크의 건설에 착수하였다. 구체적인 결실은 학교의 설립이었다.


천륜(天倫)이 있고 인륜(人倫)이 있다. 천륜은 밖으로 천하와 소통하는 수단이고 인륜은 안으로 가족과 소통하는 수단이다. 천륜이 외향적 권력의지의 반영이라면 인륜은 내향적 권력의지의 반영이다. 공자는 천륜과 인륜이라는 두 가지 소통수단을 이용하여 문명권의 범위를 넓혀 가는 것을 정치의 목적으로 삼았다.


문명이 한 개인의 돌연한 깨달음(석가)이나 어떤 영웅에 의한 돌발적인 뒤집기(출애굽 사건의 모세)가 아니라 인류의 공동작업에 의한 보편가치의 추구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점을 공자는 말하고 있다.


공자의 위대성은 공자 개인의 위대성이 아니다. 개인으로 보면 공자 역시 일신의 영달을 쫓아 군주를 찾아다닌 소피스트들 중의 하나였을 뿐이다. 위대한 것은 공자가 첫 단추를 꿴 학문의 전통이다. 그 학문이 일으킨 동양문명의 체계이다. 공자의 튼튼한 뼈대에 맹자와 정주와 왕수인과 율곡과 혜강과 수운이 한 단계씩 업그레이드할 수 있었던 것이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소크라테스가 던진 화두에 플라톤이 논리를 부여했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체계를 세웠다. 그 전통의 맥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 근대과학으로 발달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동양문명이 피라미드라면 공자는 그 꼭지점이다. 위대하다는 것은 피라밋을 두고 하는 말이지 꼭지점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그 피라밋이 가진 저변의 넓음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피라밋의 밑변에서 무엇이 보이는가? 대중이 보인다.



분쟁의 해소를 시도하다

공자가 살았던 시대는 실로 난세였다. 분쟁은 주로 결혼관계로 인한 토지상속의 곤란함 때문에 발생하였다. 화폐제도가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자는 결혼관계에 관한 세칙을 정하는 방법으로 토지분배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분쟁의 차단을 시도하고 있다. 그 결과는 위계질서의 강조로 나타났다. 화폐제도가 발달한 오늘날 위계질서의 강조는 잘못된 접근법이지만 2500년 전 당시에는 실질적으로 분쟁이 감소하고 있다. 


형이 죽은 후 아우가 형수를 취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상속문제를 두고 조카와 분쟁이 발생한다. 유목민의 말과 양떼는 분배하기 쉽다. 유목민사회에서 형사취수제가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반면 농경민의 토지는 분할하기가 곤란하다. 형사취수제는 살인극의 파국으로 귀결되는 예가 많다. 유교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21세기 이 시대는 어떤가? 화폐경제의 발달 덕분에 토지분배의 곤란함이 유발하는 문제들은 대개 소멸하고 있다. 공자가 예법으로 해결하려 한 문제들이 21세기에 와서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알아야 할 사실은 공자가 예법을 통하여 신용을 창출하는 방법으로 분쟁을 줄이고자 시도했으며 이 방법이 2500년 전에는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이다. 공자의 예법은 유효기간이 지났지만 신용을 창출하는 방법으로 분쟁을 해결하려 했던 그 개념과 논리는 여전히 유효하다.



분별에서 소통으로

근대주의가 구체화한 것이 지성(知性)이라는 개념이다. 이 개념을 최초로 구상한 사람은 공자이다. 공자가 말한 군자(君子)는 곧 지성인(知性人)을 의미한다. 참된 지성인의 상은 어떤 것인가? 인문주의의 미래는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하는가에 달려 있다. 시대에 맞는 지성인상의 정립이 필요하다.


문제는 서구의 지성인상이 너무나 저급하다는데 있다. 깨달음이 없어 소통이라는 본질에서 멀기 때문이다. 서구적인 의미의 지성은 종교적 편향에 기울지 않고 과학적인 교양을 갖추어 사리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을 의미할 뿐이다. 


모든 학문은 이원에서 일원으로, 분별지에서 통합지로, 클래식에서 팝으로, 엘리트에서 대중화로 간다. 지성(知性) 역시 대중화되어야 한다. 가능한가?


중국에서 유교의 대중화에 실패한 것이 공자의 한계이다. 양명학에 의해서 서민화가 시도되었지만 청대의 고증학에 밀려 좌절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유교주의는 공자가 실패한 부분을 상당히 보완하고 있다. 사(士)계급의 전유물이었던 유교주의를 서민일반에 이르기까지 대중화한 것이다.


중국 유교의 한계는 무엇인가? 역시 깨달음의 부족이다. 깨달음이 없으면? 소통되지 않는다. 겉으로 도학을 표방하고 있지만 도(道)에 철저하지 않았다. 그들은 지나치게 현실적이었다. 통치술로 변질되었다.


서구적 의미의 지성은 지식인 집단 안에서만 유의미하게 작동한다. 대중과의 소통이 없다. 천하와 호흡을 공유하지 않는다. 그것으로는 문명권의 차이를 뛰어넘는 보편성을 기대할 수 없다.


과학지식으로 무장하고 종교의 편벽을 극복한 정도의 분별하는 지성상을 버려야 한다. 과학은 종교와 맞서지만 인문주의는 누구와도 맞서지 않는다. 그 모든 것을 담아낼 뿐이다. 소통하는 지성상이 필요하다.



강희제가 본 선교사들

17세기 청나라의 전성시대를 열었던 인물이 강희제다. 서구 선교사들과 상당히 대화하고 그 내용을 기록하여 남기고 있다. 중국에 파견된 선교사라면 서구에서도 특별히 선발된 엘리트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강희제의 눈에 비친 서구의 지식인들은 도무지 대화가 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강희제에 의하면 그들은 편협하기 짝이 없는, 편견과 극단적 사고에 빠진, 전혀 지성적이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속 보이는 어거지를 쓰고 있었고 도무지 상대방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의 의식 속에 깨달음은 없었다. 그들은 중용의 도를 알지 못하였다. 중용이란 무엇인가? 소통의 관점에서 파악하기다. 선교사들의 일방주의는 쌍방향적 소통이라는 대전제를 파악하지 못한데 따른 것이다.


소통이 쌍방향적이라면 선교는 일방적이다. 먼저 상대방과의 소통에 성공하고 난 다음에 선교하는 것이 맞다. 불행하게도 강희제의 소통 시도는 실패로 되었다. 강희제와 면담한 선교사들 중에는 근대적 지성인이 없었다. 이는 17세기만 해도 동양지성이 서구지성보다 수준이 높았다는 의미가 된다. 하기야 17세기까지 유럽에서 마녀사냥이 자행되었다는 점에서 놀라운 일은 아니다.  


유교, 불교, 도교, 심지어 화랑도사상에 이르기까지 천하와의 소통을 열망하는 깨달음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발달된 형태를 두고 말하자면 화담 서경덕이나 혜강 최한기 선생의 사상이 이상적인 지성인상에 근접하고 있다.


자연과학은 논외로 하고 인문주의의 관점에 한정하여 볼 때 근대적 지성인상은 동양에서 먼저 확립되었으며 그 최초의 단초는 공자가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근본주의로의 도피

원래 유교에는 형이상학이 없었다. 깨달음은 형이상학이다. 주자가 불교가 독점하고 있던 형이상학을 상당히 받아들여 신유학(新儒學)을 제창한 것이 성리학이다. 주자의 문제는 불교를 받아들인 혐의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근본주의바람을 일으킨 데 있다.


무슨 말이든 공자의 가르침으로부터 끌어대는 논법을 구사하는 것이다. 전례가 없는 새로운 학설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공자의 견해를 재해석한 것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포장하고 있다. 이는 공자가 자신의 유토피아관에 보편성을 부여하기 위해 요순의 이상정치를 과장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주자가 불교와 교류한 혐의를 은폐하기 위해 근본주의로 퇴행시키는 바람에 유교는 본래의 개방성과 역동성을 잃고 편협해졌다. 조선에서 주자학이 더 편협해진 이유도 불교의 영향을 받아들인 약점에 발목이 잡혀 도둑이 제 발이 저린 격이다.


불교와 도학은 발상법이 같다. 보편주의라는 프레임을 공유하고 있다. 불교를 공부한 사람이 더 쉽게 성리학의 정수에 접근할 수 있었다. 그 약점을 은폐하기 위해 선비들은 불교나 도교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곤 했다.


폐단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새로운 학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이단의 혐의를 피하기 위해 근본주의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나라에 인문학 발전이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근본으로 돌아가기로 하면 항상 최초 번역자가 권위를 가지게 되고 후학들은 스승의 벽을 넘어설 수 없다.



형식에서 내용으로

일체의 형식은 본래 언어를 대체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공자 예법의 형식미 집착은 그 시대의 의사소통 장애를 반영하고 있다. 어느 시대 어느 문화권이든 소통의 장애가 발생하는 곳에는 형식미가 고도로 발달하는 특징이 있다. 


중국은 거대하다. 나라 안에서 대화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만다린을 쓰는 북경사람과 광동어를 쓰는 홍콩사람은 문자로 필담을 나누어야 한다. 형식과 겉치레에의 집착은 그러한 소통장애를 반영하고 있다.


발달된 화폐경제가 유교 예법의 위계질서에 따른 분쟁해결을 대체하듯이 각종 미디어가 발달한 현대에 와서 그러한 형식에의 집착은 쓸모가 없다.


공자의 예법은 가짜다. 공자가 그 예법으로 도달하려 한 신뢰가 진짜다. 같은 맥락에서 공자가 주장한 요순시대의 이상은 문제가 있지만 공자가 요순시대의 이상을 빌어 도달하려 한 이상적인 공동체의 구상은 여전히 유효하다.


해체해야 한다. 화폐경제의 발달이 봉건적 위계질서를 해체하듯이 21세기의 발달된 미디어를 앞세워 형식위주의 예법을 해체해야 한다. 그렇다면 대신으로 무엇을 제공할 것인가이다. 동기부여와 소통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법가와 유가 그리고 도가

논어 위정(爲政)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도지이정(道之以政) 제지이형(齊之以刑) 민면이무치(民免而無恥) 도지이덕(道之以德), 제지이예(齊之以禮), 유치차격(有恥且格)’이라 했다. 형벌로 통치하지 말고 예(禮)로 통치하라는 말이다.


노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예(禮) 조차도 초월하여 바로 소통하라는 말이다. 여기서 ‘형》예》도’의 진보라는 일정한 패턴이 발견된다. 공자 사상의 핵심 코드는 인(仁)이다. 노자의 무위는 그 인을 극한까지 연장하고 있다.


춘추시대의 전쟁은 소규모의 사(士)계급이 평지에서 사각형 방진을 치고 전차전을 벌이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진(秦)나라는 북쪽 변방에 치우쳐 있다. 야금기술이 발달한 유목민의 영향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진시황은 북방 유목민 특유의 집단주의와 발달된 야금기술을 이용해서 평민계급 위주의 강력한 군대를 창설하고 있다. 당시만 해도 전쟁무기는 청동기 위주였고 제련기술 부족으로 가공하기 어려워 악금(惡金)으로 불리었던 철은 농기구로만 사용되었다.


청동은 희소할 뿐 아니라 명검으로 단련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사(士)계급만 무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목민들이 야금기술을 발달시킨 덕분에 진나라는 철제무기로 평민을 무장시켜 강력한 군대를 창설할 수 있었다.


공자가 태어난 산동성 곡부는 목축으로 유명했던 북방의 진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농경이 발달한 남쪽나라였다. 유목민의 집단주의와 농경민의 개인주의가 대결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의 예는 농경민의 것이고 진나라의 법은 유목민의 것이다. 유목민의 집단주의는 특히 전쟁에 강하다. 징기스칸의 몽골군대 역시 유목민 특유의 엄격한 법률로 승승장구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공자 또한 초나라 출신의 노자에 비하면 북방사람이다. 당시만 해도 양자강 이남은 개발되지 않은 정글지대로 오랑캐 남만(南蠻)의 땅이었던 것이다.   


유목민의 법가가 집단의 통제를 위주로 한다면 농경민의 유가는 교육을 통한 개인의 계발을 위주로 한다. 산골 출신의 도교는 한술을 더 떠서 깨달음을 통한 직접적인 소통을 위주로 한다.


여기서 형(刑)》예(禮)》도(道)로의 진보라는 일정한 패턴이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패턴이 그대로 적용되어 중국에 비하면 더 산골이라 할 한국에서 기일원론으로 완성되고 있다.


무엇으로 통치할 것인가? 형(刑)은 제도이고 예(禮)는 미학이며 도(道)는 소통이다. 비유하자! 형(刑)을 위주로 하는 제도의 변혁이 마르크스의 입장이라면 예(禮)를 위주로 하는 미학은 18세기 부르주아 자본주의의 허례허식이다. 도(道)의 소통은 20세기의 미디어의 역할과 같다. 



소통이 깨달음이다

깨달음 곧 소통이라는 화두는 불교와 도교, 유교가 공유하는 동양정신의 거대한 지적 자산이다. 불교의 깨달음은 진리에 맞섬이며 도교의 깨달음은 실존적인 삶에 맞섬이며 유교의 깨달음은 사회적인 실천에 닿아있다.


여기서 유교가 이상주의를 분명히 하고 있다는 점이 각별하다. 도교의 이상주의는 사실이지 모호하다. 이상주의의 빈곤은 동기부여의 빈곤이자 공동체의식의 빈곤이며 상승하고자 하는 권력의지의 결핍이다.


석가는 인간의 계발을 주장하고 있다. 공자는 사회적인 커뮤니케이션 수단의 공유를 주장하고 있다. 노자는 삶의 질을 주장하고 있다. 특히 도교의 이러한 특징은 장자에 와서 더 구체화된다. 이들 각각은 불완전하지만 하나로 합쳤을 때 완전하다.


하나의 방송국을 여러 개의 라디오가 공유하고 있다. 석가는 각각의 라디오가 ‘진리’라는 이름의 방송국과 사이클을 일치시켜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공자는 그 방송국에서 송출하는 프로그램을 잘 선택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노자는 최종적으로 그 방송국에서 보내오는 음악을 즐기자는 것이다. 


영역은 다르지만 본질은 같다. 우리가 죽음을 앞에 두거나 혹은 이혼과 같은 일로 상처를 입었을 때는 불교의 가르치는바 진리로서의 깨달음이 필요하다. 또 우리가 어떤 조직의 책임 있는 위치에 올랐을 때 혹은 어떤 이유로 타인의 삶에 개입하게 되었을 때는 유교의 깨달음이 필요하다. 또 우리가 주말을 가족과 함께 보내거나 혹은 이웃 간에 소소한 마찰을 일으켰을 때는 도교의 깨달음이 필요하다. 그 모든 것은 결국 소통이다.


불교는 죽음 앞에서 진리와의 소통을 말한다. 공자는 동기유발의 측면에서 공동체와의 소통을 말한다. 노자는 일상성에 있어서의 사적인 소통을 말한다. 초월이 필요한 신과의 소통에 있어서는 불교의 가르침이, 상승이 필요한 정치적 소통에 있어서는 유교의 가르침이, 수평적인 친구사이의 소통에 있어서는 도교의 가르침이 유용하다.


깨닫는다는 것은 맞선다는 것이다. 먼저 소통을 가로막는 장벽과 맞서야 한다. 불교의 맞섬은 신 앞에서의 실존적 고독과 맞섬이요, 유교의 맞섬은 리더의 고독과 맞섬이요, 도교의 맞섬은 삶에 있어서의 다양한 편린들과의 맞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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