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사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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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4127 vote 0 2008.12.29 (12:48:19)


중화문명 총력전 성리학

공자의 유교주의는 군주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공동체의 이상적인 모델을 제시하려 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구 진보주의 유토피아관과 일부 상통하는 면이 있다.


주자의 성리학은 노자와 석가가 주장한 개인 관점에서의 유토피아 개념을 받아들여 공자의 유토피아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이 부분은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실제로 성리학은 유교에 빈곤한 형이상학을 도교와 불교에서 상당부분 차용하고 있다.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역사적 필연으로서의 배경이 있다. 당시 송나라는 북방유목민인 여진족의 금과 몽골족의 원으로부터 압박을 당하고 있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중국이야말로 유일한 문명권이었다. 야만이 문명을 통째로 집어삼키려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문명의 총력을 결집하여 맞서지 않으면 안 된다. 주자의 성리학은 도교와 불교사상 일부를 흡수하는 방법으로 중국문명의 내부적인 통일을 꾀하는 한편 북방 오랑캐와 선명한 전선을 그으려 한 데서 얻어진 것이다. 중화와 만이의 이분법으로 구분하는 중화사상이 바로 그것이다.


송나라 때 인도에서 전래한 불교가 중국에서 자생한 유교에 떼밀려 극적으로 배척된 것도 그 때문이다. 오랑캐와 맞서기 위해 사상적 통일이 필요했던 것이다. 당연히 외래사상은 배척된다. 답은 어디까지나 자기 내부에서 찾아야 한다. 그 대신 외래사상의 장점은 유교주의에 받아들이는 방법을 쓴다.  


지금 우리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토착사상에서 답을 구해야 한다. 우리의 자생적 철학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우리 내부에서 재발견해낼 때 진짜가 가능하다.



집단주의의 재앙 2차대전

왜 답은 동양정신에서 찾아지는가? 서구가 이미 실패하고 있기 때문이다. 양차 세계대전은 재앙이었다. 게르만의 집단주의가 낳은 참극이었다. 기독교문명의 오만이 낳은 예정된 비극이었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가 대두되었다. 불교사상에 크게 영향받고 있음은 물론이다.


하나의 문화권이 가진 사상적 전통은 쉽게 바꿀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서구의 그들이 겉으로는 개인주의를 표방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여전히 유목민 특유의 집단주의적 생활양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듯이 그것은 인위적으로 바뀌어지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사상과 문화가 도입된다 해도 그것이 내면화되기까지는 몇 백년의 세월이 걸리기 때문이다.


동양에서 사상은 점차 집단에서 개인으로 발전하고 있다. 묵가와 법가의 집단주의에서 유교의 상대적인 개인주의로 그리고 성리학이라 불리는 신유교의 더 나아간 개인주의로 발전하고 있다.


반면 서구는 그렇지 못하다. 니체의 역설이 제기되기 전까지 또 사르트르의 실존이 선언되기 전까지 그리고 데리다의 해체가 주장되기 전까지 그들은 철저한 집단지향의 게르만족이었고 집단의 구원을 모색하는 기독교도였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전쟁에 몰입하는 이유는 순전히 그 때문이다.


그들의 진보한 바 사회주의 역시 개인의 성실함보다 집단의 전쟁이 더 많은 가치를 창출한다는 유목민의 발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문득 모세와 같은 초인이 등장하여 혹은 느닷없이 예수와 같은 선지자가 출현하여 집단적으로 구원해 줄 것이라는 십자군의 발상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립의 서구와 조화의 동양

물론 동양에서도 여전히 집단주의는 문제로 되고 있다. 특히 중국의 집단주의와 일본의 집단주의는 유별난 데가 있다. 그러나 한꺼풀 벗겨보면 그 내부에 변증법적인 발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최초에 천하를 위하여 내 몸의 터럭 하나를 양보하지 않겠다는 철저한 개인주의의 양주와 개인의 희생을 예사로 아는 철저한 집단주의의 묵적이 대결하고 있었다. 맹자가 이를 변증법적으로 종합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양주의 이기적 개인주의는 도교의 건강술, 혹은 방중술, 중국인 특유의 맛난 음식과 불로장수에 대한 집착으로 퇴행하고 있다. 이는 비판되어야 한다. 묵자의 경우 양주의 극단적인 이기주의에 비해 긍정적인 요소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계승되지 못했다는 점이 아쉽다.


또 한편으로는 북방 유목민의 엄격한 군율이 전파되어 성립한 진나라의 법가주의와 남쪽 농경민의 유교주의가 대립하고 있다. 문제는 양자의 대결에서 상대적으로 개인주의에 가까운 유교주의가 승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서구라면 어떤가? 양차 세계대전의 재앙을 경험하고서도 그들은 여전히 집단에 의존하는 방법론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부시의 전쟁 책동이 그 단적인 예가 된다. 그들은 여전히 개인의 저축 보다 전쟁을 통한 자원의 약탈이 더 많은 부가가치를 생산한다는 유목민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경우 송나라의 성리학에 이르러서는 도교의 우주론과 불교의 형이상학을 반영하는 형태로 변증법적인 진보를 보여주고 있다. 유교 중용사상의 입체적인 사고와 불교 연기설의 비선형적인 사고가 바탕이 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거기에다 노자의 역설이 가세하고 있다.



돈오돈수의 한국인들

한국인은 운명적으로 개인주의자이다. 그들은 집단노동을 했던 이집트의 노예가 아니었다. 그들은 몰려다니기 좋아하는 초원의 유목민도 아니었다. 그들은 황하 주변의 황토지대에서 단합된 집단의 힘으로 치수를 성공시켜 도시를 건설하는데 성공한 중화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섬으로 고립되어 어디로도 도망갈 수 없었기에 가미가제식 집단의 힘으로 항거하여 목숨의 보전을 꾀했던 일본인과도 다르다. 그들은 또 자원을 약탈하는 방법으로 일거에 대량의 가치를 창출해 본 경험을 가진 미국인과도 다르다.


한국인 그들은 처음부터 월든의 호숫가에 살았던 철저한 자유주의자 소로우였던 것이다. 한국인 그들은 도시가 발달했던 북종선의 신수(神秀)와는 근본이 다른 시골출신 남종선의 혜능(慧能)이었던 것이다. 한국이 서구의 그들에 의해 은자의 나라로 불린 것이 결코 우연은 아니다. 


참고로 말하면 신수의 점오(漸悟)는 봉건적 계급 피라미드 안에서 점진적인 신분상승을 의미하고, 혜능의 돈오(頓悟)는 독립적인 대중들의 수평적 네트워크가 가지는 폭발력을 의미한다. 신수의 사상은 북방 도시의 것이고 혜능의 사상은 남방 시골의 것이었다.


서구의 그들은 여전히 석가의 개인적인 상승이 아닌 교회에서의 집단적인 구원을 희구하고 있다. 부시의 전쟁이 말하는 바 단발성의 자원약탈이 가치를 더 많은 가치를 창출한다는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깨쳐야 한다. 진정한 가치는 공동체의 구성요소가 되는 개인들의 성찰과 이를 토대로 한 독립적인 개인들의 수평적 네트워크가 가지는 다이나믹한 폭발력에서 얻어진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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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장 어느 프랑스 병사의 일기

- 동양정신의 경쟁력은 무엇인가? -


프랑스 병사의 일기

개미당(http://cafe.daum.net/drkims) 게시판에 오른 낮은소리님의 글을 인용합니다.


『몽마르뜨르 언덕 근처의 벼룩시장에서 만난 한국사람에게 들은 이야기다. 그분은 병인양요 때 조선을 침략한 어느 프랑스인 장교의 일기를 소개했다. 


"식료품을 구하러 가까운 마을에 들어갔다. 전투 때문인지 마을은 매우 조용했고 나는 병사 두 사람을 이끌고 어느 집 안으로 들어섰다. 주방으로 보이는 조그마한 안쪽 구석을 뒤져보았으나 여기저기를 살펴보아도 먹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하나 눈에 뜨이는 것은 사람이 쓰는 방 가운데 하나에 책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이다. 다른 민가들도 차례로 들어가 보았다. 역시 먹을 것은 없었다. 허나 놀라운 것은 방 안에서 책을 보는 한 조선인이 있었다는 것이다.


먹을 것이 없는데 어떻게 책을 볼 수가 있나?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그때까지 조선을 미개한 나라로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을 다시 보게 되었다. 먹을 것이 없는데도 책이 이렇게 많고, 또 책을 읽을 수 있다니! 이들은 도대체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일까?"


외세의 침략과 기득권의 횡포에 유린당하며 살아온 우리 민족이다. 우리의 민족성이 원래는 결코 얕볼 수 없는 것이었다. 민초 하나 하나조차도 자신을 닦으려 노력하였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굴복하지 않는 의지가 있었던 것이다.』



히딩크 감독의 충고

민족성에 관한 이야기라면 일단 경계할 필요가 있다. 많은 부분에서 편견이거나 혹은 선입견일 수 있다. 유태인이 어떻고 일본인이 어떻고 독일인이 어떻고 하며 우리는 즐겨 비교하곤 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정신적인 측면에서 어떤 답을 찾으려 들 경우 잘못된 결론을 도출할 가능성이 많다.


2002년 월드컵에서 히딩크 감독이 말한 바 있다. 허구헌날 정신력 타령이나 일삼는 한국 팀이야말로 실제로는 가장 정신력이 약한 팀이라고. 왜인가? 우리는 정신력이라는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악으로 깡으로’, 이건 정신력이 아니다. 프로는 오직 실력으로 말한다. 이를 악물고 덤비는 아마추어의 방법으로 약간의 성적 향상을 기대할 수 있지만 이는 아주 실력이 떨어지는 선수가 중간 정도의 실력으로 향상하기를 원할 때나 써먹는 방법이다.


고수끼리의 대결에서는 오히려 평정심이 요구된다. 이를 악물고 싸우면 평정을 잃는다. 평소실력을 잃고 도리어 패배하게 된다. 프로의 정신력과 아마추어의 정신력은 그 차원이 다른 것이다.


이렇듯 심리현상과 관련하여 세간에 나도는 속설들은 대개 실제와는 정반대인 경우가 많다. 정신분야는 거대한 역설의 공간이다. 편견과 고정관념을 버리고 한층 더 과학적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컨대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한국인과 일본인의 민족성을 비교하되 일본인은 찰흙과 같아서 단결이 잘 되는 반면 한국인들은 자갈과 같아서 개인은 뛰어나지만 단결이 안되어서 좋지 않다는 식의 말이 있었다. 그러나 이는 파시즘적 발상이다. 박정희 독재가 세뇌공작 차원에서 퍼뜨린 말이겠다.


21세기가 요구하는 것은 일본식 집단주의가 아니라 한국식 개인주의다. 우리에게는 찰흙과 같은 단결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자갈과 같은 독립성이 필요하다.



고구려는 왜 망했는가?

고구려가 멸망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지도층이 단결되지 않았다거나, 혹은 말갈족과 우리민족 사이에 융화가 없었다거나 혹은 연개소문의 자식들이 골육상쟁을 벌였다거나 하는 식의 잡다한 부분에서 답을 찾는다면 비과학적인 태도이다.


마찬가지로 의자왕이 방탕했기 때문에 백제가 망했다거나 혹은 신라의 화랑들이 용감했기 때문에 ‘삼한일통’을 이루었다거나 하는 식의 접근은 잘못된 것이다. 식민사관이거나 혹은 승리자의 편에서 역사를 기술하는 왕조시대의 발상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도 비판되어야 한다. 유교사관은 동중서의 천인감응설과 관련이 있다. 역사를 하늘의 뜻으로 보는 태도이다. 하늘이 봉건왕조의 집권을 추인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승리자의 입장에서 역사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승리자를 선(善)으로 놓고 패배자를 악(惡)으로 단정한 다음 그 패배자의 악을 정신적인 요소에서 찾으려 드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본질은 따로 있다. 국가와 민족이라는 작은 개념에 얽매이지 말고 더 시야를 넓혀야 한다. 인류문명의 흐름이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수나라 문제는 대운하를 건설하여 강남의 쌀을 화북으로 운송하고 있다. 갑자기 식량이 크게 증가한 것이다. 이는 곧 왕권의 강화를 의미한다. 왕과 귀족 사이에서 힘의 평형이 무너진다. 이에 따른 정치적 긴장이 유발된다.


왕은 내부의 정치적 긴장을 해소할 목적으로 강력한 군대를 창설한다. 군대창설의 명분을 벌기 위해 전쟁을 도발한다. 수나라는 고구려를 쳤기 때문에 망한 것이 아니다. 대운하의 건설에 따른 정치적 긴장 때문에 망한 것이다.


당나라는 대운하 덕분에 증가한 식량을 탐내어 북쪽에서 남하한 선비족이 건설한 왕조이다. 당나라는 싸움마다 패배했지만 식량의 증가로 보급이 충분해졌기 때문에 거듭된 패전에도 불구하고 원정을 그만두지 않는다. 로마군단처럼 장기전으로 가는 것이다. 


로마가 강한 이유는? 아피아가도를 비롯한 도로 덕분에 신속하게 전선에 군대를 투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당나라는 대운하를 통한 군량의 확보 덕분에 장기전 수행능력을 갖게 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고구려는 대운하건설의 여파에 당한 것이다. 중심부 문명의 팽창에 의해 변방의 문명 하나가 무너진 것이다.


###  삼한일통

삼국통일은 후대의 개념으로 발해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측면이 있다. 통일신라 당시에 실제로 사용된 개념은 삼한일통이다. 신라가 아닌 고려가 우리나라를 통일했다는 관점을 존중해야 한다.



우리의 아피아 가도는?

역사를 이해함에 있어서 민족성과 같은 정신적 측면에서 답을 찾으려 들 경우 거꾸로 된 분석을 내놓는 예가 많다. 반면 지정학적 요인에서 답을 찾으려 들 경우 옳은 분석이 될 경우가 많다. 


일본이 한국보다 먼저 개화에 성공한 이유는 무엇일까? 일본의 항구 나가사키가 영국의 상선이 필리핀과 홍콩을 거쳐 미국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기 때문이다.


본질은 무엇인가? 인류문명의 진보이다. 문명을 만드는 것은 기술이다. 역사를 움직이는 동력은 새로운 생산기술의 보급에 있다. 특히 야금기술의 발전이 미치는 영향이 컸다.


기병을 위한 등자의 발명, 말과 배를 이용한 빠른 운송, 도로와 운하의 개설, 새로운 농사기술의 등장, 종교와 사상의 전파들이 국가와 문화권의 장벽을 뚫고 소통을 이룸으로써 역사의 향방을 큰 틀에서 결정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악으로 깡으로’ 덤비겠다는 식의 정신력 차원에서 답을 구하려 드는 아마추어여서 안 된다. 실력으로 이겨 보여야 한다. 우리 민족의 저력은 우리 민족의 ‘지적 자원’과 ‘지적 인프라’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한다.


로마인들이 더 부지런했다거나 혹은 중국인들이 더 단결이 잘되었다거나 했던 것은 아니다. 로마에는 아피아가도가 있었고 당나라에는 대운하가 있었다. 그것은 자원의 소통을 가능케 하는 물적 네트워크다.


우리에게 로마의 아피아 가도와 중국의 대운하에 필적할만한 인프라는 무엇인가? 우리는 너른 영토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지적 영역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우리에게는 지적 자원의 소통을 가능케 하는 지적 네트워크가 있다.  



연암선생의 법고창신

“옛 것을 배우면서도 능히 변화할 수 있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면서도 충분히 법도에 맞을 수 있다.”


‘르네상스’가 서양에서 들어온 말이라면 '법고창신(法古創新)'은 연암 박지원의 말이다. 그 의미는 실로 다르지 않다.


서구인들은 고대 희랍의 전성시대를 동경했고 동양인들은 중국의 요순시절을 동경했다. 과거지향의 보수적인(?) 발상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동일하다. 그런데 서구의 르네상스는 근사한 아이디어로 알려져 있고, 동양의 요순타령은 고루하기 짝이 없는 낡은 생각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렇다면 문제가 있다.


요는 이상주의다. 서구에는 서구의 이상주의가 있고 우리에겐 우리의 이상주의가 있다. 그 이상주의가 옳은가 혹은 과연 이 시대에 맞는가를 논하기 앞서 비록 어설픈 형태이나마 이상주의가 존재하는가가 중요하다.


마땅히 이상주의가 있어야 한다. 잘못된 이상주의는 바른 이상주의로 수정할 수 있다. 그러나 원초적으로 이상주의가 없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동남아나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들이 뒤쳐지고 있는 이유는 민족의 기질에 문제가 있거나 혹은 정신력이 형편없기 때문이 아니라  이상주의라는 지적 인프라가 갖추어져 있지 않아서 동기유발에 실패하기 때문이다.


산업화를 위해서는 석유나 석탄, 철강과 같은 자원이 있어야 하듯이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는 언어와 문자 그리고 이상주의가 지적 인프라로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로마가 아피아가도를 가졌듯이 구체적으로 경쟁력을 담보할 수 있는 ‘창의력의 자원’으로 가지고 있어야 한다.  



공자를 죽이면 나라가 살까?

송나라의 전성기 이후 중국에서 유교주의는 퇴조하고 있다. 남송에서 특히 유교주의가 부흥하게 된 데는 그 시점에 한족(漢族)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당하고 있었다는 사정이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금나라와 몽골이 북방을 위협하고 있었던 것이다. 송은 살아남기 위해 국가 자원의 총동원을 필요로 했다. 총력을 결집할 수단으로 민족주의 성향의 이데올로기가 찾아진 것이다.


전한의 동중서 때도 마찬가지다. 한(漢) 고조가 중원을 평정한 이래 중국은 끊임없이 흉노족의 위협에 시달리곤 했다. 동중서의 건의에 의해 중국을 사상적으로 통일하고서야 한무제의 전성시대를 열어젖힐 수 있었던 것이다.


송나라는 북방 오랑캐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이론무장을 필요로 했다. 지식인의 합의에 의한 공론창출 시스템을 구축하여 한족(漢族)을 단결시킴으로써 금나라 여진족의 침략을 막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도출된 것이 성리학이다.


명나라 이후 한족 정권이 안정되자 목표상실로 유교주의는 단순한 권력자의 통치술로 퇴행해 버렸다. 반면 임진왜란 후 조선은 청나라와 대결하면서 반청운동을 위한 이념으로 유교주의를 발전시켜 왔다. 유교주의의 최종버전은 한국에서 완성되었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말해지는 시대이다. 그러나 관점을 달리해 볼 필요가 있다. 500년 전 유교주의가 주장했던 가치들이 과연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가를 논하기 앞서, 그 시대의 배경을 이해하고 하나의 성공모델로서의 유교주의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사서삼경 따위는 잊어도 좋다. 지금에 와서 삼강오륜 따위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 그러나 조선왕조의 유교주의는 막강한 청나라의 위협에 맞서 조선사회의 총력을 결집하는데 성공했던 점에 있어서는 충분히 분석할 만한 가치가 있는 하나의 성공모델이 된다.



성공모델로서의 유교주의

조선의 선비들은 이상주의자였다. 적어도 그들에게는 사회적 참여의 동인(動因)으로 기능하는 이상주의가 있기는 있었던 것이다.


르네상스가 번영했던 희랍의 과거를 재현하려 했다면 조선의 선비들은 요순시절의 이상을 재현하고자 했다. 일단의 지식인들이 부단히 학습하고 날마다 토론한 바 지식인사회의 공론을 창출하는데 성공하였고 또 그러한 공론에 의해 지배되는 민주적인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일정부분 성공했던 것이다. 그 성공이 명나라의 팽창주의에 맞선 저력이 되고 또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의 침략에 맞서 항쟁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고 막강한 청나라의 위협에 맞서 국체를 유지한 비결이 되었던 것이다.


동서고금의 역사를 두루 비교해 보아도 그러하다. 일부 신정국가를 제외하고 또 일본과 같은 고립된 섬나라를 제외하고 하나의 왕조가 무려 500년씩이나 해먹는 경우는 없다시피 하다. 왕이나 귀족이 권력을 독점했다면 조선은 벌써 망했을 것이다. 그들은 선비라 불리는 일단의 지식인 무리와 권력을 나눠 갖는 합리적인 시스템을 개발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껍데기를 버리고 알맹이를 취하자. 유교주의의 본질은 이상주의다. 그 이상주의로 하여 조선왕조는 의미 있는 성공을 거두고 있다. 거기에 점수를 주어야 한다. 비록 양반계급에 한정되기는 했지만 그들은 민주적인 공론창출의 시스템을 완성하고 있다. 이 점을 결코 과소평가 해서 안 된다.


성리학의 의의는 무엇인가? 중국인에게 있어 불교는 외부에서 유입된 것이고 유교는 자기네의 것이다. 남의 나라 것으로 실패한 것을 자기네의 것으로 다시 시도하여 성공한 것이다. 



동양정신의 대안은 있는가?

김지하도 있고 박노해도 있고 윤구병도 있다. 혹은 율려사상이라 하고 혹은 생명사상이라 하고 혹은 공동체운동이라 한다. 다양한 논의와 모색들이 있다.


문인들 중에 더욱 많다. 생태시 혹은 환경시 또는 생명시라 이름 붙여지는 진지한 시를 쓰는 일단의 문인들이 있다. 


문제는 이들 새로운 모색들이 실상 개인의 성찰이라는 동양정신의 본령을 잊고 집단의 구원이라는 기독교적인 관점에 기울어 있다는 사실이다. 스스로 노예를 자처하며 어디선가 나타나 구원해줄 모세를 기다리고 있다면 문제가 있다.


요는 동양정신의 경쟁력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이다. 본질인 깨달음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깨달음을 통한 소통이 배제된 생명사상이나 율려사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탈기독교화에 성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이 그토록 강조해 마지않는 생명이란 것이 무엇인가? 생명이란 본시 독립된 낱낱의 세포들이 네트워크의 방법으로 소통함으로써 질적인 비약을 이루어 더 큰 단위의 삶을 창출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소통이 없으면 곧 생명이 없는 것이며, 공명(共鳴)이 없으면 곧 소통이 없는 것이며, 깨달음이 없으면 그 소통의 대전제가 되는 독립이 없는 것이다.


물론 문인들이 구사하는 시와 산문의 단어선택이나 주제의식에 있어서는 다분히 불교적인 색채를 띠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한꺼풀 벗겨보면 대개 기독교의 논리에 불교의 어휘를 차용한 것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식의 비약이다. 이는 개인의 차원에서 가능하다. 생명이든 율려든 공동체는 집단을 버리고 더 개인으로 돌아가야 한다. 먼저 개인에서 출발하라! 이것이 서구의 방식과 차별화되는 동양의 방식이다.



오리엔탈리즘의 혐의

세 가지 흐름으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서구정신의 틀 안에 동양정신을 가두어 놓고 서구의 잣대로 동양을 재평가하자는 발상이다. 서구의 진보주의를 대전제로 삼은 채 동양사상에서 일부 진보적인 측면을 발굴해 보겠다는 식이다.


이 경우 공자가 돌연 진보주의자로 평가되는가 하면 노자가 자유주의자로 인정되기도 한다. 이는 서구의 가치관을 전제로 삼는다는 점에서 비뚤어진 오리엔탈리즘의 시선이라 하겠다. 


두번째 흐름은 프랑스 등지에서 유행한다는 라마교 선풍이나 혹은 미국에서 유행했던 라즈니시의 코메디나 혹은 최근에 등장한 숭산선사의 매질놀이 또는 박노자가 찾아보았다는 무릉도원의 미학들이다.


이 역시 상업주의에 기초한 오리엔탈리즘의 혐의를 벗어날 수 없다. 한마디로 장삿속이다. 서구문명을 본질에서 긍정하면서 서구가 산업화에 매진하면서 빠뜨린 나머지 부분을 동양정신에서 찾아내자는 것이다.


서구를 주(主)로 놓고 동양을 종(從)으로 딸리게 한다. 동양의 특수성이 가지는 활력으로 서구의 보편성이 가지는 무미건조함을 보완하자는 것이다.


그들은 겉으로 서구의 산업화를 매섭게 비판하지만 동양정신의 보편성을 부인한다는 면에서 한계가 있다. 결국은 서구의 장식품을 벗어날 수 없다. 달라이 라마든 숭산이든 박노자든 동양정신의 보편성을 부인한다는 면에서 진짜가 아니다. 


세번째 흐름은 서구정신은 일단 논외로 하고 동양정신에서 인문주의의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기다. 예컨대 감히 칠조(七祖)를 거론하는 김용옥의 패기만만한 태도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이 있다.


동양정신의 경쟁력은 깨달음에 있다. 문제는 김용옥이 모범적인 번역가를 자처할 뿐, 여전히 깨달음의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이 세번째 길이다. 유교든 도교든 불교든 동학이든 깨달음이라는 동양정신의 본령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불교와 도교와 유교가 경쟁하면서 커다란 정신사의 흐름을 이룬 채로 진보해 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정리하자. 두 가지 진실하지 않은 태도가 있다. 하나는 완성이 10이라면 서구를 6으로 놓고 거기에 부족한 4를 동양에서 조달하자는 생각이다. 틀려먹은 발상이다. 둘은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격으로 서구와 동양을 5 대 5로 공평하게 나누어 균형을 추구하자는 태도이다. 역시 틀렸다.


반대로 생각해야 한다. 본질은 인문주의다. 서구의 경쟁력은 인문주의가 아닌 자연과학에 있다. 인문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동양의 큰 그릇에 서구의 작은 가치를 담을 수 있을 뿐이며 그 역의 경우는 성립하지 않는다.


동양정신의 경쟁력인 깨달음이 인문학의 대전제이며 거기에 부족한 논리학과 수학의 부분을 서구가 보완하고 있을 뿐이다. 서구의 자연과학은 애초에 차원이 다른 것으로 비교대상도 아니다.



왜 깨달음이어야 하는가?

1989년에 공개된 후 아직도 진위논쟁이 끝나지 않은 김대문의 화랑세기 필사본을 참고해 보자. 16세 풍월주 보종공은 우주의 진기를 살펴 커다란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한다. 깨달음이야말로 동양정신의 본령인 것이다.


특히 한국에서 그러하다. 유교도, 불교도, 도교도, 심지어 화랑도까지도 한국에서는 깨달음의 가르침이 되어 있는 것이다. 왜인가? 이유가 있다. 난해한 이론은 문자와 국경의 장벽을 넘지 못한다. 바로 거기가 출발점이다. 어떻게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넘을 수 있는가이다.


깨달음의 기본개념은 언어와 문자의 장벽을 넘어 소통하는데 있다. 인도의 선(禪)보다 중국의 선이, 또 중국의 선 보다 한국의 선이 더 불립문자(不立文字) 돈오견성(頓悟見性)의 원칙에 철저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선(禪)의 의미는 불교의 대중화에 있다. 지식은 소통의 제 1수단으로 발명되었지만 이는 아는 사람끼리나 통하는 사전에 약속된 기호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진짜가 아니다. 지식의 방법으로는 대중과 소통할 수 없다.


당나라 때 신수의 북종선과 대립했던 육조 혜능의 남종선(南宗禪)이 언어와 문자를 초월하는 심법인(心法印)을 주장한데 이어 한국의 조계종이 한 걸음 더 나아가 성철의 돈오돈수(頓悟頓修)에 이르기까지의 흐름이 역시 그러하다.


어떻게 소통할 수 있는가이다. 육조 혜능의 심법인은 대중과의 소통가능성을 문제로 제기한 데 의미가 있다. 인문주의의 본질은 결국 소통의 문제에 응답함이며 이에 대한 동양정신의 최종결론은 깨달음이다.


국경과 언어와 문자와 종교와 계급과 문화권의 장벽을 넘어 두루 소통하기 위해서는 오직 독립된 인격이라는 의미에서의 깨달음이 소용될 뿐이다.



인문주의란 소통이다

자동차에 비유할 수 있다. 설계는 매우 복잡하지만 운전은 비교적 간단하다. 자동차의 발명은 와트의 증기기관 이후 수백 년 동안 무수한 천재들의 공동작업으로 이루어졌지만 운전은 학원에서 보름만에 배울 수 있다.


문명이 자동차의 발명과 제작이라면 깨달음은 자동차의 운전이다. 인문주의란 문명이라는 자동차의 운전을 가르치고 신호등을 설치하며 교통체계를 바로잡아 사고를 예방하고 트래픽을 줄이는데 그 의의가 있다.  


선불교의 의미는 자동차의 운전은 쉬워야 한다는 데 있다. 아무리 성능이 우수한 자동차라도 운전하기 어렵다면 의미가 없다.


어떤 차가 가장 좋은 차인가? 초보자도 쉽게 운전할 있는 차가 좋은 차다. 무엇에 의해 담보되는가? 진리의 보편성에 의해 담보된다. 언어와 문자와 문화와 국경의 장벽에 걸려 그 자동차의 운행이 정지된다면 보편성을 잃은 것이다.


가짜는 어떻게든 표시가 난다. 라즈니시류가 그러하듯이 스승이 제자를 착취하는 시스템으로 되어 있다면 가짜다. 좋은 자동차라면 옆 좌석에 조수를 태울 필요가 없다. 제자가 스승에게 봉사하는 즉 조수가 운전수의 옆 좌석에 앉은 것이며 그것이 운전하기 어려운 구식 자동차라는 증거가 된다. 


스승에 의한 착취가 존재하는 이유는 언어와 문자라는 장벽 때문이다. 번역이라는 관문이 특히 문제로 된다. 문자해석권을 가진 스승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경우 필연 집단주의로 기울어진다. 진리는 가고 권력만 남게 된다.


당나라 신수가 주장하는 북종선의 점오(漸悟)란 무엇이며 우리나라 지눌의 돈오점수(頓悟漸修)란 또한 무엇인가? 그것은 스승이 제자를 평가하는 시스템이다. 봉건적 계급 피라미드를 만들어 놓고 이등병에서 시작하여 병장까지 한 계단씩 밟고 올라가라는 말이다.


제자는 번역이라는 관문을 통과할 수 없으므로 문자해석권을 가진 스승에게 의존하라는 말이다. 권력의 담벼락이 개입한다. 이래서는 진짜가 아니다. 소통할 수 없다. 철저한 개인주의라야 진짜다. 점오의 버스에 승객으로 의존하지 말고 돈오의 승용차를 손수 운전할 수 있어야 참되다.



문자를 넘어 보편성을 얻기

타고르가 ‘동방의 등불’에서 노래하고 있는 즉 ‘지식은 자유스럽고 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는 곳’은 어디인가? 참된 소통이 이루어지는 그것은 집단의 조직과 거기에서 파생된 권력이 아닌 개인의 깨달음과 그러한 개인들의 네트워크에 있다.


무릇 철학과 사상이란 세계를 하나의 보편된 그릇으로 통일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세계가 두루 알아들을 수 있는 하나의 언어가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에서 목도하곤 한다. 그 철학이, 그 사상이 도리어 세계를 좁다란 담벽으로 조각조각 갈라놓고 있다는 사실을.


사회주의도 좋고 진보주의도 좋다. 그러나 통합이 아니어서 안 된다. 깨달음이 아니고서는 불능이다. 생각하라! 자유의 이름으로, 혹은 진보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가슴들이 조각조각 찢어졌던가를.


당나라 때만 해도 중국 양자강 남쪽은 버려진 오랑캐의 땅이었다. 육조 혜능이 오조 홍인을 뵈었을 때다. 대사는 혜능을 꾸짖어 말했다.


“너는 본래 영남 사람이요 또한 남쪽의 오랑캐인데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단 말이냐?”


이는 다시 원효의 깨달음으로 메아리 되어 돌아온다.


“나는 본래 신라 사람이요 동쪽 변방의 오랑캐인데 어찌 깨달을 수가 있다는 말인가?”


여기서 문명세계와 버려진 오랑캐의 땅을 가르는 담벼락은 곧 언어와 문자이다. 언어와 문자의 벽을 깨부수지 못한다면 그 철학과 사상의 존재이유는 없다. 역으로 모든 철학과 사상의 출발점은 언어와 문자의 벽을 깨는 것으로 시작된다. 깨친다는 말은 깨부순다는 뜻이다. 깨부수어야 하는 것은 곧 언어와 문자의 좁다란 담벼락이다.


왜 한국에서는 모든 사상이, 또 철학이, 또 학문이 반드시 깨달음의 철학으로 되었는가? 그 사상이 애초에 발원한 인도나 중국에서 우리나라까지 오면서 무수한 장벽을 만나곤 했던 것이다. 언어와 문자의 장애물에 무수히 시달린 끝에 그 장벽을 깨부수지 않고는 애초에 이 나라에는 철학이고 학문이고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2003년 이 시대에도 마찬가지다. 강단학계의 한계는 서구 기준의 언어와 문자로 된 좁다란 담벼락에 갇혀버린 데 있다. 그 담벼락 부수지 않고 이 나라 토종 인문학의 미래는 없다.



대항이론으로서의 동양정신

학문의 정통성은 독자성과 고유성에 기반한 역사성에서 얻어진다. 역사성은 보편주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동양사상이 그러한 학문으로서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는가이다.


역사성이란 스승이 제안한 개념에 제자가 논리와 체계를 부여하는 형태로 오랜 세월을 거쳐 학문의 진보가 이루어지며 그 과정에서 계보가 형성되는 형태로 학문의 상호보증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보편성이야말로 진리의 속성이다. 종교와 학문이 구분되는 곳이 바로 이 지점이다. 스승을 능가하는 제자가 나오지 않을 때 학문은 보편성을 잃고 역사성을 잃고 진리에서 멀어진다.


기독교는 예수 이후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하고 있다. 회교는 마호멧 이후 제자리걸음이다. 마찬가지로 육조 혜능 이후 큰 진전이 없는 점은 종교로서의 불교의 한계이다. 반면 유교는 다르다. 공자의 언설을 맹자가 보증서고 있고 맹자의 언설을 주자가 보증하고 있다. 종교의 편협을 극복하고 있다.


종교와 학문은 확연히 구분된다. 종교는 논리를 부여하고 체계를 정립하고 내용을 추가하는 형태로의 진보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학문의 계보가 형성되지 않는다.


뉴튼 이래 발달하고 있는 서구의 근대과학이 보편주의에 기반하고 있는 반면 이에 대한 대항이론으로 모색되고 있는 동양적 담론들은 상당부분 특수주의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로 된다.


문득 출현한 스승이 일방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선언할 뿐 그 제자가 스승보다 한걸음 더 전진하여 스승의 언설에 논리와 체계를 부여한다든가 하는 형태로의 진전이 없다. 그러므로 동양적 담론들은 역사성을 얻는데 실패하고 있다.


강단학계 일각에서 모색되고 있는 대항이론들은 서구의 산업화 공세에 대한 방어 목적의 소극적인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오리엔탈리즘의 한계가 있다. 재야 학계의 신비주의적인 태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뉴튼 이후의 삼백년 안팎의 짧은 사이클로 보아서 그러할 뿐 오천년의 긴 역사를 종합해 보면 반드시 그러한 것은 아니다. 


요는 대항이론으로서의 동양사상이 서구정신과의 대립각을 어느 지점에 세울 것인가이다. 산업화를 전후로 한 시기의 서구의 근대과학에 대항을 모색할 때 동양정신은 대개 특수주의로 기울고 만다. 이는 음양오행사상이나 침구술이나 주역이나 한의학 따위에 기대어 보려는 태도이다. 실패하고 만다.


더 시야를 넓혀야 한다. 오천 년 학문의 역사를 한 줄에 꿰는 넓은 시야로 보아야 답이 보인다. 그것은 서구의 자연과학에 대립각을 세우고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포용하는 인문학의 큰 그릇을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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