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사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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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4057 vote 0 2008.12.29 (12:49:00)



한국인의 실험정신

운명적으로 한국은 세계의 테스트 베드(실험장)가 되어가고 있다. 또 한국인들은 그러한 실험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다. 지금의 한국인들만큼 외부 세계에 관심이 큰 민족은 없을 것이다.


유럽이라면 프랑스나 독일이나 비슷해졌다. 밤 9시만 되면 상가가 일제히 철시하는 것이나 여름이 되면 모든 직장인들이 바캉스를 떠나는 것이나 유목민 특유의 집단주의 성향에 있어서 크게 다르지 않다. 외부 세계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탈리아, 네덜란드, 스페인, 포르투칼, 스웨덴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첫째 반도국가라는 점이며 둘째 외부세계에 대한 관심이 컸던 시기가 있었다는 점이다. 섬이지만 반도 행세를 할 때가 많은 영국도 그렇다. 


이탈리아는 게르만의 땅으로 진출하여 로마의 전성시대를 열었고 네덜란드도 한때 대서양을 주름잡던 소문난 설탕장사였으며 지금도 그 기질을 버리지 않고 있다. 스페인과 포르투칼의 식민지 진출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반도문화의 특징은 팽팽한 긴장에 강하다는 것이다. 50 대 50으로 힘의 균형이 이어지는 것을 좋아한다. 되도록이면 약자를 도와 강자와 균형을 유지하려고 한다. 네덜란드와 영국에서 신교도가 득세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반도국가가 그러한 반도기질을 잃고 대륙행세를 하거나 섬으로 고립될 때 퇴행하고 있다. 한국은 운명적으로 긴장과 균형에 강할 수 밖에 없는 나라이다. 무수한 외침을 받았고 또 쉴새없이 대륙의 문물과 사상을 받아들여야 했다.


지금 한국은 운명적으로 동양과 서양 사이의 길목이 되어버렸다. 한동안 일본이 담당했던 역할이 점차 한국으로 옮겨오고 있다. 한국문화의 특징인 세계 최고의 정보유통 속도는 그러한 전통과 환경이 만들어낸 것이다.



가족이 되어버린 한국인들

동기유발에 있어서 두 가지 방향의 지향이 있다. 안으로 평등을 지향하는 부족적 관심사가 있는가 하면 밖으로의 상승을 지향하는 세계적 관심사가 있다. 한국인의 평등의식 역시 콰큐틀 인디언 못지 않다. 다른 점은 유목민의 전통을 이어받은 유럽의 경우 평등의식이 계급 단위의 큰 규모로 나타나는데 비해 한국인의 평등의식은 가족 단위의 작은 규모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일본만 해도 한국과는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다. 지진이라도 일어나면 도시민 전부가 구호에 나서야 한다. 이때 개인행동은 용납되지 않는다. 유목민의 경우는 더하다. 한 사람의 파수꾼이 경계에 실패하면 부족 전체가 몰살을 당하게 된다.


로마인이라면 병사 한 사람이 잘못을 저지를 경우 그 병사를 징벌하는 것이 아니라 1/10의 비례로 추첨을 하여 불특정 다수에게 징벌을 내린다. 로마의 집단징벌 전통을 이어받은 프러시아제국은 한술 더 뜬다. 훈련 중 병사 한 명이 실수를 저지르면 부대원 전체가 처음부터 다시 훈련을 해야 한다.


유럽의 사민주의가 이러한 게르만의 전통을 이어받아 빛을 발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서구사회 특유의 수평적 연대의식과 단체징벌이 있다. 농경민 전통의 한국인은 다르다. 내 논에 물대기의 습관이 남아있다. 단체징벌이 없을 뿐더러 연대의식도 약하다.


한국인이라 해서 연대의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인들은 그것을 정(情)이라고 부른다. 유럽의 연대의식이 계급적 연대라면 한국인의 연대의식은 가족적 연대라는 점이 다르다.

영국에서 프랑스로 도망쳤던 존 로는 사기행각이 들통나자 벨기에로 튀었다. 그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다. 그러나 한국의 운동권 학생들은 다르다. 그들은 가족들의 도움으로 재기에 성공하여 금뱃지를 달고 금의환향하고 있다.


개인이 돌출행동을 할 경우 부족이나 계급에 해를 끼칠 수 있는 위험인물로 지목되어 마을에서 추방당하는 일은 한국에서 잘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심지어는 역적질을 해도 가족이 나서서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 한국의 유교적 전통이다.


한국에서 공공장소에서 떠드는 아이들이 용서되곤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다 한 가족으로 보는 것이다. 일본은 다르다. 절대로 남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고 누누이 강조한다. 돌출행동을 할 경우 집단을 위험에 빠뜨릴 인물로 지목되어 추방되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지메가 생겨난 것도 그 때문이다. 


한국인의 경우 개인의 실패가 집단의 보호를 받는 측면이 있다. 이 점이 한국적 개인주의의 배경이 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물론 그 점이 지나쳐서 반역자 정형근도 보호를 받고 있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은 유감이지만.  



이유 없는 반항의 이유

제임스 딘이 출연했던 추억의 명화 ‘이유 없는 반항’을 기억하는가? 미국이 한창 잘나가던 전후 베이비붐 세대 이야기다. 물질적인 어려움을 모르고 자란 젊은 세대가 기성세대가 이해하기 어려운 고민에 빠져 잘못을 저지른다는 이야기다.


그토록 풍요한데 그들은 왜 고민하고 일탈하는 것일까? 고등학생 주제에 멋진 자동차를 몰수 있을 정도로 풍요한 데도 말이다. 이차대전을 겪은 전쟁세대는 베이비붐 세대를 이해하지 못한다.


베이비붐 세대의 권력의지는 그들의 평등한 공동체인 학교를 중심으로 형성된다. 학교라는 공동체 안에서 친구들 사이에 좋은 평판을 얻어서 또래집단의 정신적인 리더가 되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모들은 반대로 생각한다. 학교란 성인으로 자라나기 전에 잠시 머무르는 공간에 불과하며 친구는 어차피 헤어질 것이므로 공부나 열심히 해서 밖으로 나가 크게 출세하라고 말한다.


“세상은 생존경쟁의 정글이야! 넌 출세를 해야 해. 고향 친구 따위는 잊어버려. 학비는 내가 대줄게! 빨간색 스포츠카도 사줄게. 부족한 거 있으면 말해!”


소년 짐 스타크는 왜 방황하는가? 그의 성취동기는 물질적 욕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자친구 앞에서 동료와의 우정을 과시하는 데 있다. 동료로부터 인정받아야 성공하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식으로 표현되면 정(情)이다.

예컨대 우리가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마을을 방문하여 ‘당신들은 왜 성공하려고 노력하지 않나요? 당신들은 왜 게으른가요?’ 하고 따져 물어서는 안 되는 것과 같다. 그들의 권력의지는 부족 내부를 지향하고 있다.


그들은 동료와 이웃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평등해지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들이 부자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면 공동체의 평화를 깨뜨리게 된다. 부족 사회에 불필요한 긴장과 마찰을 일으키게 된다. 그들은 이웃으로부터 나쁜 평판을 얻고 따돌림을 당하게 된다.


수렵과 목축 혹은 부족간의 전쟁을 위해서는 부족원 전체가 대규모로 동원되어야 한다. 그들은 부족공동체가 중심이 되는 대규모의 평등주의를 만들었다. 그 평등주의가 수렵이나 목축에는 기여하고 있지만 지금은 사회발전의 장애가 되고 있다. 


한국에는 한국 방식의 평등주의가 있다. 한국의 평등주의는 농경에 동원되는 가족 공동체를 중심으로 작동하고 있다. 가족 공동체의 성원은 많아봤자 몇십 명을 넘지 않는다. 그들은 정(情)으로 뭉쳐있다. 한국인들의 작은 규모의 공동체의식이 사회발전에 장애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인의 성취동기 정과 한

가족 공동체를 중심으로 한 한국의 평등주의는 달성하기 쉬운 목표이다. 한국인들은 가족의 후원을 받아 사회적으로 성공하곤 한다. 누나는 동생을 학비를 대기 위해 하루 12시간의 근로를 마다하지 않는다. 재미교포들은 교회를 중심으로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또 교포끼리의 계모임 등으로 자본을 조달하여 청과물가게를 여는데 성공하고 있다. 


유럽의 경우 그러한 가족의 후원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대신 유럽은 계급과도 같은 더 큰 범위의 공동체의식이 형성되어 있다. 유럽의 발달된 사민주의와 연대의식이 그러한 유목민의 전통에 기초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한국인의 성취동기는 정(情)과 한(恨)으로 설명할 수 있다. 정(情)은 가족공동체 중심의 평등주의를 지향하는 내향형 권력의지일 수 있다. 한(恨)은 더 위로 상승하기를 열망하는 외향형 권력의지가 된다. 


가족으로부터 인정받고 싶다는 심리가 한국인을 부지런하게 한다. 그 목표는 쉽게 달성될 수 있으므로 가족 중심의 평등주의가 더 큰 세계로 비상하려는 외향형 권력의지와 마찰하지 않는다. 유럽이라면 다르다. 가족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대신 사회보장제도라는 안전판이 있다.


한국의 386세대가 그 이전세대에 비해 더 진취적인 이유는 학생운동의 경험으로 공동체 의식을 쌓았기 때문이다. 학교 공동체의 경험도 중요하다. 가족 중심의 이기적인 행동을 극복하게 한다. 이들이 평등을 지향하는 공동체의식을 가지고 서로 협력할 때 그 시너지 효과는 크다.


미국 베이비붐 세대라면 다르다. 공동체의 정서가 한국과 달리 진취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들은 반전운동에 참여했고 마리화나를 피웠으며 록음악에 열광했던 히피 세대들이다. 뉴에이지 그룹이 있는가 하면 각종 명상그룹도 번성하고 있고 채식운동도, 라마교 선풍도, 우드스톡 페스티벌도 있다. 이들의 공통된 특징은 전혀 진취적이지 못하다는 점이다.


서구의 경우 공동체 문화에 기반한 집단적 체험이 히피로 상징되는 퇴행현상을 보이고 있는 이유는 유목민의 전통을 버리지 못한 그들에게 있어 그 평등의 단위가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그들은 진취적이지도 못하고 참여적이지도 못하다. 바깥에서 겉돌고 있다. 그들은 은밀히 우경화되어 가고 있다. 평등을 지향하는 내향형 권력의지가 상승을 기대하는 외향형 권력의지와 전혀 조화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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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장 세계의 테스트 베드 한국

- 문화강국 한국의 비전을 말한다-



세계의 테스트 베드가 된 한국

중국은 인구로서 일등이 되었다. 일본은 경제로서 일등이 되었다. 미국은 군사력으로 일등이 되었다. 우리는 무엇으로 일등이 될 수 있을까?


한국은 세계 IT업계의 테스트베드(연구실험실)가 되어가고 있다. 세계의 일류기업들이 한국에서 신제품의 시장성을 테스트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잘 팔리는 제품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잘 팔린다는 것을 보증한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이 가장 신제품에 쉽게 적응하고 또 빨리 반응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한국인들이 신제품의 트렌드를 정확하게 읽고 있는 셈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한국인들이 특별히 휴대폰과 인터넷을 즐겨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 선택과 집중이다. 한국은 지정학적 요인에 의해 숙명적으로 선택과 집중을 하게 되어 있다. 왜인가? 사천만의 적당한 인구규모 때문이다. 일본의 일억 이천은 적지 않다. 일본이라면 무슨 책을 쓰더라도 삼천권 이상이 팔린다. 다양한 책이 서가를 장식하게 되어 있다. 한국은 그렇지 않다. 적어도 삼천권은 팔아야 비용을 건질 수 있는데, 그 삼천권 팔기가 한국에서는 쉽지 않다.


미국은 멕시코와 캐나다를 포함해서 인구 사억이 넘는 거대시장을 가지고 있다. 유럽은 인구 이십억의 막강한 시장이다. 한국은? 시장이 너무나 협소하다. 다양하게 구색을 갖출 수 없다.


일본에서 만화가 한 사람이 단행본 한 권을 내는 데는 빨라야 육개월이 걸린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만화가 한 사람이 한 달에 무려 열 권을 그려야 한다. 왜? 만화 대본소가 전국을 다 합쳐도 이천여 곳 정도 밖에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대본소 한곳에서 한 달에 열권을 소화해 주어야 그나마 식구들 밥값이나 챙겨줄 수 있는 것이다.


운명적으로 한국에서는 백화점을 포기하고 전문점을 해야 한다. 선택과 집중을 아니할 수 없다. 한국이 IT업계의 테스트 베드가 되고 있는데는 이러한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


흔히 냄비근성이라고 비하하여 말한다. 잘못된 태도이다. 너무 빨리 달아오르고 너무 빨리 식어버린다고 말한다. 잘못된 이해이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모두가 장점이 된다. 곧 선택과 집중이다. 어쩌면 한국인에게 그것은 숙명이다. 한국인들은 협소한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한가지 목표에 전력투구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대한사람 모두 성인이 되자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최고 문화 건설의 사명을 이루려면 대한사람 모두 성인(聖人)이 되어야 한다. 대한사람이라면 간 데마다 신용을 받고 대접을 받아야 한다. [백범 김구 나의 소원]』


우리에겐 꿈이 있다. 백범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의 꿈을 말하고 있다. 백범은 그것을 높은 문화의 힘에서 찾고 있다. 그 높은 문화를 가능케 하는 것은 철학의 힘이다.


백범은 유교, 불교, 기독교, 도교, 동학, 사회주의들을 두루 섭렵하고 있다. 모든 종교와 철학과 사상들의 장단점을 비교한 끝에 한국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있다. 백범은 다양성과 포용력을 갖추고 있는 한국 특유의 철학적 전통에 기대를 걸었던 것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보장되는 완벽한 사회’는 서구 사민주의 복지국가의 유토피아다. ‘대한사람 모두 성인(聖人)이 되는 것, 대한사람이라면 간 데마다 신용을 받고 대접을 받는 것’은 백범의 이상이다.


서구의 그들에게는 그들만의 유토피아가 있듯이 우리에겐 우리들만의 유토피아가 있을 수 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옛 선조들이 꿈꾸던 이상향이 있다. 우리가 꽃피울 수 있다.


우리가 세계에서 가장 앞설 수 있는 분야가 있다.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경쟁력있는 분야가 있다.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지적 인프라가 그 토대가 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한국이 IT업계의 테스트 베드가 되고 있는 것이 우연이 아니라 지정학적 이유에 의한 필연이듯이 이 또한 우연이 아니다. 다른 나라는 할 수 없고 오직 한국만이 할 수 있다.


서구의 그들이 지닌 보석은 빛나고 있으나 차갑다. 우리의 이상은 비록 아직은 빛나지 않고 있으나 가공되지 않은 원석과 같으니 거기에 싱그러움과 탐스러움이 있다. 보이지 않으나 마음으로 전해져 오는 향기가 있다. 저절로 미소짓게 하는 따스함이 있다. 우리 안에서 재발견 될 수 있다.



위기의 강단 인문학계

많은 사람이 같은 꿈을 꾸면 꿈은 현실이 된다. 우리가 다 함께 꿀 수 있는 꿈은? 하나 밖에 없다. 그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어야 한다. 우리 안에서 다시 찾아진 것이어야 한다.


근래 들어 ‘인문학의 위기’가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그러나 진실로 말하자면 강단학계의 위기일 뿐이다. 달라진 것은 없다. 대학의 증가세가 최근 감소세로 돌아선 것이 입증될 수 있는 변화의 전부이다.


얼마 전에 있었던 김용옥의 텔레비전 방송을 통한 동양학 강의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고 있다. 토종 인문학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날로 높아가고 있다. 거기에 희망이 있다. 위기는 대중과 유리된 강단학계의 위기일 뿐이다.


남의 나라 학문의 번역과 수입을 위주로 하는 매판 학문의 위기, 학벌 수입업자의 위기, 학벌을 신분상승의 자격증으로 삼는 ‘라이선스 브로커’들의 위기일 뿐이다. 김용옥의 강의와 출판의 성공으로 입증되고 있다. 대중의 교양을 목적으로 하는 토종 인문학에는 광범위한 수요가 있다. 인문학은 결코 위기가 아니다.


대중은 교양을 원하고 있다. 문제는 소통이다. 현재로서 강단학계와 대중 사이의 소통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소통을 위해서는 진짜가 아니면 안 된다. 강단학계의 그것은 결코 진짜가 아니다. 보편성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구에서 수입된 그것이 우리의 대중과 소통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학문적인 보편성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짜가 아니었던 것이다. 보편성을 입증하려면 우리 안에서 서구의 그것과 동일한 것이 재발견되어야 한다. 우리의 피와, 넋과, 얼과, 삶과 교감하는 것이어야 한다.



작은 그릇에 큰 그릇을 담을 수 없다

두개의 그릇을 구해서 직접 실험해 볼 수 있다. 작은 서구의 그릇에 큰 동양의 그릇을 담을 수 없다. 이는 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왜인가? 서양의 진보주의는 평면 위에 그려지는 선형적 사고이다. 반면 동양의 비선형적 사고는 평면을 초월하고 있어서 다면적이고 입체적이다.


입체(立體)로 된 동양의 그릇에 서구의 면과 선(線)을 담을 수 있으되, 선으로 된 서구의 그릇에 면이나 입체로 된 동양을 담아내기는 불능이다. 결론적으로 동양적 사고가 서구의 사고에 비해 한 차원 더 위의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기독교 헤브라이즘 사상에서 유래하고 있는 서구의 유토피아관이 창세에서 말세까지 혹은 해방에서 혁명까지 직선적인 일방향의 진행을 주장하는 단선적인 세계관에 기초하고 있다면 동양의 유토피아관은 ‘역설’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 변증법적이다. 한 단계 더 높은 입체적인 사고를 필요로 하고 있다.


물론 종교화되어 있는 유교나 도교 혹은 불교의 교리를 떠나 또 서구의 산업화 과정에서 얻어진 뉴튼 이래의 자연과학을 떠나 총체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러하다. 그 사회의 상식 있는 지성인의 합의에 바탕한 공론 차원에서의 성공모델을 논할 때 한하여 그러하다.


말하자면 기독교 사상은 2000년 전 예수 한 사람의 기특한 생각이 아니라 기독교 역사 수천년 간 서구의 지성들이 벽돌 하나씩을 보태어 이루어진 거대한 서구정신의 총화일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유교주의 또한 공자 한 사람의 견해가 아니라 수천년 간 무수히 많은 선비들이 벽돌 한 장씩을 보태어 건설한 동양정신의 총화이다. 거기에 숨어있는 패턴과 로직과 매커니즘들을 규명하여 성공모델을 정립할 수 있다. 공자든 노자든 석가든 하나의 그 시대의 성공모델로 평가할 때만 유의미한 것이다. 



공자와 노자 석가의 유토피아

공자의 유토피아는 군주를 중심으로 한 주류질서의 것이다. 여기에는 황하가 범람하여 만들어진 강변의 황토지대에 도시를 건설해 놓고 치수의 방법으로 도시를 보호하려 했던 중국 도시 농경민의 집단주의가 숨어있다.


우(禹)임금이 이루었다는 황하의 치수는 결코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만리장성과 대운하는 혼자서 건설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인구도 많은 중국인 특유의 집단주의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반면 남쪽 변방 초(楚)나라 출신인 노자의 유토피아는 백성의 입장에서 본 비주류의 이상 혹은 아웃사이더 이상주의에 가깝다. 도시가 아닌 시골사람의 입장이라 하겠다. 비교하면 노자의 유토피아가 더 개인주의에 가깝다.


석가는 왕족 출신이다. 그는 집단생활을 경험한 적이 없다시피 하다. 석가의 유토피아는 철저하게 개인의 내면에서 해답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노자의 가르침보다 더 확실한 궁극의 개인주의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중국에서 발달하고 있는 대승불교는 상대적으로 집단주의적인 속성이 강하다. 이는 도시가 발달한 중국의 특수성이 반영된 결과로 볼 수 있다. 대승불교 중에도 교종이 더 군주의 입장, 주류 질서의 입장을 반영하고 있다. 반면 달마 이후 육조 혜능으로 완성을 본 선종(禪宗)은 더 개인주의에 가깝다.


선종 안에서도 신수(神秀)의 북종선(北宗禪)이 상대적으로 도시를 중심으로 한 주류질서 위주의 집단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면 혜능(慧能)의 남종선(南宗禪)은 더 아웃사이더이고 더 시골 지향의 철저한 개인주의라 할 수 있다. 같은 당나라 때의 중국 안에서도 북쪽은 상대적으로 도시가 발달하고 있는데 비해 당시만 해도 중국의 남쪽지역은 충분히 개발되지 않은 변방의 정글이었던 것이다. 



육조 혜능의 완성과 조계종의 퇴행

육조 혜능의 법통을 이은 임제(臨濟) 의현(義玄)에 이르러서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베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베라’고 까지 말하고 있다. 석가가 말한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의 가르침 그대로이다.


이는 더 나아갈 수 없는 극한의 개인주의를 말한 바 된다. 여기서 선(禪)의 종지는 모델에 있어서 온전히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육조 혜능에 이르러서 궁극의 도(道)가 하나의 기본형으로 그 틀이 완성된 것이다.


그런데 선종 역시 후대로 내려갈수록 점차 집단주의로 퇴행하고 있는 측면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의 조계종 또한 선종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나 일정부분 집단주의적 퇴행을 겪고 있음이 분명하다.


궁극의 도(道)는 무엇인가? 그것은 해방을 넘어서는 온전한 자유이다. 그러나 조계종의 승려들은 아직도 초대형 사찰에서 집단생활을 고집하고 있다. 그들에게서 자유를 갈구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없다. 사미와 사미니들은 스승을 시중드는 하인 노릇에 만족하며 1천5백년 전 조사들이 던져둔 공안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건 아니다. 


석가의 온전한 개인주의를 잊어버린 불교는 진짜가 아니다. 육조 혜능의 자유를 잃어버린 선(禪)은 진짜가 아니다. 더욱 최근에는 숭산, 현각 등 황당한 하인들이 나타나 불교계를 어지럽히고 있다. 불교를 대중화한다는 명목아래 종교적인 퇴행을 유발하고 있다.


물론 불교는 운명적으로 종교다. 그러나 진실로 조사의 가르침을 따르기로 한다면 종교의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가르치고 배우는 차원을 넘어서야 한다. 오히려 조선후기 들어 발달하고 있는 유교의 일부 측면에서 그러한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진보하고 있는 동양사상

요는 진보다. 여기서의 진보는 문명의 진보만을 말함이 아니라 인간에 있어서의 자유의 진보, 개인에 있어서의 깨달음의 진보이고, 인간의 존엄성의 구현에 의한 인격적 상승에 있어서의 진보이다.


왜 서구의 그것이 창세에서 말세로 이어지는 기독교의 단선적인 세계관을 고수하고 있는데 비해 동양의 그것은 입체적이고 다면적이고 유기체적이고 비선형적일 수 있는가? 진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구사상은 진보함이 없다. 마르크스조차도 그 혁명의 방법론에 있어서 철저하게 예수의 아이템을 차용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지난 2000년 간 전혀 진보가 없다고 볼 수 있다.


반면 동양사상에 있어서는 상당한 진보가 있다. 특히 송나라의 성리학에 이르러서는 다분히 불교와 도교의 성취들을 반영하고 있다. 구한말 혜강 최한기의 기일원론으로 최종완성을 본 한국의 성리학에 있어서는 심지어 기독교적인 요소의 일부까지 포용하고 있다.


거기에 역설이 숨어있고 비선형성이 내재해 있다. 시골사람의 개인주의와 도시사람의 집단주의를 통일하는 중도가 있고 흑과 백의 양극단을 아우르는 중용의 지혜가 있다.


얼마든지 비선형성을 획득하고 있다. 그 토대가 되는 세계관에 있어서 특히 그러하다. 음양오행의 원자론적 세계관에서 기일원론의 관계망의 세계관으로 발전함이 있다. 그 과정에서 성립하는 패턴과 거기에 내재한 로직과 매커니즘의 전개가 하나의 모델로서의 성공이 된다.



니체의 역설과 데리다의 해체

요는 사회 안에서 성립하는 권력 피라미드 안에서 일정한 위치를 점한다거나 혹은 회사나 가족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권력의 서열구조에 의존함을 탈피하는데 성공하고 있는가이다.


예컨대 마르크스의 사회주의라면 겉으로 소외를 말하고는 있으나 근본적으로 게르만의 종사제도 전통에서 비롯한 집단주의의 한계로 하여 그러한 공동체 내의 수직적 권력 피라미드를 온전히 부인하지는 못하고 있다. 이는 기독교가 겉으로 인간 해방을 주장하고는 있으나 교회라는 권력 피라미드 자체를 온전히 해체하는데는 실패하고 있는 것과 같다.

봉건적 신분질서에 의존하는 형태로의 사회적인 신분상승을 꾀한다거나 혹은 가부장제 안에서의 지위상승을 기대한다거나 혹은 종교단체 안에서의 사제나 스승 역할에서 얻어지는 권력적 지위에 안주한다거나 하는 데서 벗어나 온전한 개인의 자유를 얻었는가이다.


서구사상으로 말하면 근래에 와서 헤겔이 변증법을 말한 바 있고 또 니체가 역설을 말한 바 있고 또 얼마 전에 타계한 데리다가 해체를 말함으로써 겨우 그러한 단선적인 사고를 극복하려고 시도한 증거를 만들어 내는데 성공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겨우 개인주의 관점의 출발점에 선 정도로 평가할 수 있거니와 인도에서 있었던 2500년 전 석가의 성취와 중국에서 있었던 2000년 전 노자의 성취에 도달하려면 아직도 까마득하게 멀었다고 말할 수 있다.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

서구정신의 시원으로 말하면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을 그 뿌리로 들어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는 착각일 수 있다. 실제로는 게르만의 종사제도 전통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다만 게르만족은 문자로 기록된 고대의 문명을 가지고 있지 못하므로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영국인이든 프랑스인이든 이탈리아인이든 막론하고 철저한 유목민 게르만족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헤브라이즘은 모세가 이집트에서 노예의 무리를 인도하여 나온 데서 시작된다. 노예는 언제라도 개인이 아니라 집단이다. 그들은 철저하게 집단으로만 존재한다. 개인의 인격적 정체성 따위가 있을 리 없다.


그들은 집단의 힘으로 이집트를 탈출하였고 또 집단의 힘으로 솔로몬의 전성시대를 열어젖혔던 것이다. 그들은 집단으로 느부가넷살왕에 의해 바빌론에 끌려갔고 또 집단으로 석방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러므로 그들은 강한 지도자를 숭배한다. 노예를 구원할 사람은 모세와 같은 초인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권위와 조직과 계율에 안주하려 든다. 배움이 없고 자발성이 없는 노예들은 24시간 통제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종교적인 구원 역시 개인의 영역이 아닌 집단의 것이다. 그들은 개인의 선행에 의해서가 아니라 지도자의 자질에 의해서 집단적으로 구원되곤 한다. 십자군전쟁이 그러한 발상의 연장선상에 있음은 물론이다.


반면 희랍의 헬레니즘에는 그래도 상당히 개인주의적인 요소가 있다. 그리스의 도시 국가 안에서 시민은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민주주의에도 역시 일정부분 집단주의적인 요소가 있다. 도시의 그것은 소로우가 발견한 월든 숲에서의 온전한 자유와는 그 성질이 다른 것이다.


게르만족 특유의 종사제도 전통 역시 다분히 집단주의다. 우리가 별수 없는 유교주의자들이라면 서구인들은 별수 없는 기독교도임과 더불어 별 수 없는 게르만족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 필요가 있다.



게르만의 종사제도 전통

프랑스에서 피서철이 되면 두어 달 동안 파리는 통째로 텅 비어버린다고 한다. 모두 남쪽으로 휴가를 떠난 것이다. 한 사람이 휴가를 가면 모두가 휴가를 간다. 집단주의의 지극한 경지라 할만하다.


영국에서도 밤 9시만 되면 도시는 사실상 철시상태에 들어간다고 한다. 미국에서도 LA 등 서부 해안지방과 뉴욕을 비롯한 동북부 일부지역을 제외한 중남부지역 대부분에 있어서 그러하다.


프랑스를 여행하는 여행자는 금요일에 미리 식료품을 구입해 두어야 한다. 주말동안 가게에서 물건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토요일이 되면 일제히 야외로 나가고 일요일이 되면 일제히 교회로 몰려간다. 그들은 너무나 기계적이다. 그들은 너무나 집단의 규율에 충실하다.


중세 유럽에서는 마을마다 빵 굽는 가마가 하나씩 있었다. 모든 마을 사람이 일정한 시간에 빵가게 앞으로 몰려와서 갓 구운 빵을 배급받아야 한다. 빵을 받아가기 위해서는 한 곳에 마을을 이루고 집단으로 모여 살아야 한다.


우리나라처럼 산기슭에 흩어져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단이 원초적으로 없었던 것이다. 마을 공동의 빵가마 없이는 빵을 구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여행자는 유럽의 도시들에서는 아침마다 빵가게 앞에 길게 줄을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빵굽는 가마는 봉건 영주의 통제를 받는다. 즉 권력이 마을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단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특별히 권력지향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들은 어떤 경우에도 집단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단이 있다는 법가주의적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중국에서 집단의 장악과 통제를 위주로 하는 법가주의적 태도가 상대적으로 개인주의적인 유교주의에 의해 해체되었던 사실과 비교가 된다. 거기다가 노자의 도교는 한 술 더 떠 유교에 숨은 집단주의 경향에까지 맞서왔던 것이다.


반면 서구에서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사회주의 운동 역시 권력지향적인 법가주의적 발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 사람이 파업을 하면 모두가 파업에 동참해야 한다. 이는 긍정할만한 연대의식으로 권장되고 있다. 유럽에서 좌파정당이 성공하고 있는 비결이 된다. 그러나 반대로 한 사람이 그만두면 일제히 그만두어 버리는 폐단도 있다.


유럽에서 68 학생혁명은 단발성의 투쟁으로 끝나버렸다. 우리나라의 학생운동 역사가 1929년 광주학생의거 이후 70년의 장구한 역사를 가진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한국의 끈기가 농경민 특유의 개인주의에 기초하고 있는 반면 유럽의 끈기부족은 유목민 특유의 집단주의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의 개인주의

유목민들은 본질적으로 집단주의일 수 밖에 없다. 유목민에게 있어 가치의 창출은 개인의 노동이 아니라 집단의 전투에서 얻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유목민들에게 있어 개인이 열심히 일해서 소득을 증대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들이 책임지고 있는 양떼를 적의 약탈로부터 방어하는 데는 개인의 노력이 아닌 집단의 연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중국이나 아세아에서 한 명의 병사가 잘못을 저지르면 그 병사를 앞으로 불러내어 곤장으로 징벌한다. 로마병사가 잘못을 저지르면 그 병사를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병사가 소속된 백인대의 1/10인 열 명을 무작위로 추첨하여 목을 벤다.


프러시아 병사 한 명이 훈련 중에 잘못을 저지르면 그 병사를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대신 그 연병장에 모인 병사 전원을 처음부터 다시 훈련하게 한다. 서구에서 집단징벌은 노동운동에서도 상당히 강조되고 있다. 그 때문에 중소기업 노동자를 살리기 위한 대기업 노동자의 양보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유럽의 사회주의 운동에서 이러한 집단 징벌의 요소들을 무수히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집단을 통제하는 방법을 태생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반면 농경문화에 익숙한 우리는 아직도 집단적 징벌 개념이 희박하다.


내 논에 물대기와 같다. 내가 노력하여 내 수익을 창출한다. 유목민인 게르만족의 소득증대가 집단의 전투력에 달려있다면 농경민인 우리 민족은 소득증대가 오로지 개인의 성실성에 달려있는 것이다.


이런 점은 중국에서도 비슷하게 적용이 된다. 상대적으로 유목민적인 성향이 강하고 일찍부터 도시가 발달했던 북쪽의 진나라에서 집단의 통제를 기본으로 하는 법가주의가 발달하고 있는 것이 그 예가 되겠다.



일본의 집단주의

일본 역시 상당한 집단주의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일본 역사에서는 한 사람의 백성이 잘못을 저지르면 그가 소속한 마을 전체를 징벌하는 경우를 무수히 발견할 수 있다. 일본인 특유의 남에게 폐를 끼쳐서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나 이지메 문화가 이러한 전통에 기초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일본은 섬이다. 섬은 완벽하게 고립되어 있다. 패배한 쪽이 어디로 도망갈 곳이 없다. 그러므로 전투는 한쪽이 완벽하게 섬멸될 때까지 중단되지 않는다. 물러설래야 물러설 곳이 없는 패자가 끝내 물러서지 않으려 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본에서는 예로부터 집단 간의 충돌을 경계하는 문화가 발달되어 있다. 강한 쪽에 극단적으로 힘을 몰아주는 방법으로 대규모의 충돌을 예방하는 것이다. 그것이 일본식 집단주의다.


일본 뿐 아니라 영국이나 인도네시아 등 지리적으로 고립된 섬나라에는 공통적으로 이와 비슷한 집단주의적 성향을 발견할 수 있다. 섬으로 고립되어 더는 도망갈 곳이 없다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가미가제식 극단적인 집단주의가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대부분의 일본 야구팬들이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팬으로 되어 있는 것이 그 예이다. 그들은 재빨리 어느 한쪽의 편을 들어줌으로써 단번에 승부를 결정짓는 방법으로 전쟁을 조기에 종식시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역사와 전통으로 볼 때 그 어떤 나라에 비해서도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하다. 물론 같은 우리나라 안에서도 제주도와 같은 섬 지역에는 그 지역만의 특별한 집단주의 문화가 남아있다. 제주 4.3항쟁과 같은 집단적인 민중봉기가 결코 우연은 아닌 것이다.


서구의 마을이 풍차 방앗간을 중심으로 혹은 마을 공동의 빵가마를 중심으로 혹은 마을 공동우물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고 모여있는데 비해 우리나라의 마을들은 산기슭에 흩어져 있다는 점이 다르다. 이는 한국의 개인주의다.


일본의 마을들도 큰 도로를 중심으로 둥글게 모여있다는 점에서 우리와 다르다. 일본이 일찍부터 도시를 발달시키고 있는 것도 그와 관련이 있다. 조선시대 서울인구가 삼십만 안팎이었던 데 비해 전성기 에도의 인구가 백오십만을 넘었다는 사실만 비교하여 보아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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