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과의 관계설정에서 에너지가 나온다
지구촌에 70억은 너무 많고 2억이 적당하다고 한다. 2억 정도면 인류 모두가 행복을 누리며 쾌적하게 살 수 있다고. 일본인의 지혜 마비끼를 떠올릴 수 있다. 간단히 68억을 죽이면 된다. 만약 이렇게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 자가 실용주의자다. 틀렸다. 문제는 해결되기 위해 존재하는게 아니다. 다수의 문제는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다. 문제의 해결과정에서 인류가 전진했느냐가 중요하다. 컴퓨터 게임과 같다. 한 단계를 깨고 나면 또다른 스테이지가 주어진다. 하나의 문제가 해결되는 즉시 인류는 또다른 문제를 만들어낸다. 미투는 옛날에 없었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자 새로운 문제를 발굴해낸 것이다. 어떻게든 문제를 발굴하고야 만다. 그것인 인간이다.
인간은 무엇을 원하는가? 보통은 행복을 말한다. 틀렸다. 마리화나를 피우면 바로 행복해진다. 그냥 대마초를 합법화 하면 되는데 어디서 행복을 찾는다는 말인가? 부작용 없는 마약을 제조하면 된다. 왜 WHO는 인류를 쾌락으로 인도하는 마약을 공급하지 않는가? 아놀드 슈바제네거는 약물로 몸을 만들었다. 그래서 불행해졌는가? 그래서 건강을 해치고 일찍 죽었는가? 피둥피둥 잘만 산다. 그런데도 왜 인류는 스테로이드를 금지하고 있지? 어떤 지혜로운 한의사는 첩약에 비아그라와 스테로이드를 써서 명의가 되었다고 한다. 이런 실용적인 방법이 있을 줄이야? 그렇다. 인류는 어리석기 그지없는 동물이다. 행복해 지고 싶다고? 진심이라면 복제 비아그라를 무한정 허용케 하라. 아주 밥에 비벼 먹어라. 스테로이드 먹고 근육맨 되거라. 부작용이 걱정되거든 아놀드 슈바제너거를 보라. 대마초 합법화를 요구하고 부작용 없는 마약의 개발에 매진하라. 더 간단한 방법을 써라. 그것은 인간 68억 명을 죽이는 것이다. 왜 당신은 쉬운 길을 가지 않는가? 왜 당신이 존경하는 존 듀이의 실용주의를 실천하지 않는가? 왜 쉬운 길을 놔두고 어려운 길을 찾고 있는가? 당신은 바보인가 아니면 양심에 찔려서인가? 당신의 양심은 무엇인가? 인류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당신의 양심이란 말인가? 어쨌든 당신은 사이코패스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사이코패스라면 벌써 68억을 제거하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마비끼당을 창당했을 것이다.
인류는 스스로 난관을 조성하고 자청하여 불행의 길을 가는 동물이다. 스스로 문제를 만들고 문제의 해결을 시도하니 패턴이 반복되는 컴퓨터게임과 같다. 게임을 이기는 방법은 게임을 그만두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원래 게임하는 동물이다. 어떻게든 난관을 조성하고 또 그것을 극복해 보인다. 그리고 의기양양해 한다. 그 결과로 얻는 것은 문제해결능력의 상승이다. 인간이 원래 그렇다면 받아들여야 한다.
인간은 불행해 하면서 도전을 멈추지 않는 동물이다. 에너지가 있기 때문이다. 에너지는 집단과의 관계설정에서 나온다. 게임을 진행하면서 동료를 만들고 친구를 사귀고 파트너를 얻는다. 만날 사람을 만난다. 거기서 에너지를 얻는다. 문제의 해결은 필요없다. 개인적인 행복도 필요없다. 에너지가 중요하다. 에너지가 있으면 어떻게든 하루를 살 수 있다. 에너지를 주는 집단과의 관계설정이 중요하다.
문명의 목적
문명의 목적은 집단이 최선의 의사결정구조를 갖추는데 있다. 행복이나 쾌락은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본능이 인간을 유인하는 미끼다. 동물은 죽음의 공포만으로 되는데 인간은 영리하므로 더 많은 보상이 필요한 것이다. 어린이는 부모의 칭찬이라는 보상 때문에 공부하지만 공부를 하다보면 깨닫게 된다. 왜 공부해야 하는지를. 처음에는 행복과 쾌락이라는 보상 때문에 문명의 길을 가지만 나중에는 깨닫게 된다. 문명의 진짜 목적을 집단의 완성에 있다는 사실을. 팀과 하나가 되는데 있다는 사실을. 최적화된 의사결정구조를 건설했을 때 집단은 완성되는 것이다.
집단이 처한 환경이 다르므로 인종과 지리와 전통에 따라 다양한 의사결정구조가 등장한다. 그 본질은 하나다. 그것은 지식의 공유다. 한 사람이 아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될 때 집단은 막강해진다. 그리고 강한 집단이 살아남는다. 문제는 방해자다. 인종이 다르고, 피부색이 다르고, 성별이 다르고, 사투리가 다르고, 종교가 다르고, 나이가 다르고, 관습이 다르다는 사실이 장벽이 되어 지식의 공유를 방해하고 있다. 우리가 믿는 자유와 평등과 민주는 그 장벽을 제거하는 장치다. 그러나 많은 경우 자유와 평등과 민주의 이름으로 또다른 장벽이 만들어진다.
텍사스 사람들은 총을 들고 앞을 막아선다. 그들은 자유의 이름으로 장벽을 만들었다. 우리는 그들과 지식을 공유할 수 없다. 평등의 이름으로 남의 아이디어를 훔치는 자들이 있다. 초졸과 대졸이 같은 그룹에 속해 있다면 일방적으로 초졸이 대졸의 아이디어를 훔친다. 대졸은 초졸의 아이디어를 훔칠 수 없다. 그 경우 대졸은 입을 다물어 버린다. 억지 평등이 또다른 장벽이 된다. 민주도 때로는 장벽이 된다. 그룹에서 가장 뛰어난 자에게 발언권을 줘야 지식이 공유된다. 민주의 이름으로 다수가 시간을 끌어 뛰어난 소수를 지치게 만드는게 보통이다. 애를 먹이는 것이다.
일본 만화가들은 학동사의 주선아래 데즈카 오사무를 필두로 10여명이 토키와 장에 모여 지식을 공유했고 그걸로 일본 애니메이션의 르네상스를 열었다. 일본 만화의 양산박이라고 불린다. 한국의 바둑은 충암사단이 키워냈다. 2008년에 충암고 출신으로만 프로기사 100명에 합쳐서 500단이라고 한다. 인상주의 초기에 화가들은 살롱에 모여 지식을 공유했다. 일론 머스크가 특허를 공개한 것이나 구글이 인공지능 엔진을 공개한 것이 그러하다. 지식의 공유에 의해 인간은 한 단계 위로 도약하는 것이다.
문제는 방해자다. 인간의 본능이 가장 큰 방해자다. 인류는 원래 100명 정도의 소부족으로 생활하도록 만들어졌다. 사피엔스의 역사 30만년 동안 인류는 그렇게 살아왔다. 문명은 1만 5천년 전에 종교가 탄생하면서 인구 1천명이 넘는 대부족의 출현으로 인해 갑자기 찾아온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문명중독에 걸려 그러한 사실을 망각한데 있다. 우리는 여전히 정글에 흩어져 사는 부족민으로 태어난다. 교육에 의해 문명인 행세를 할 수 있지만 맞지 않는 옷처럼 어색하다. 수시로 본능이 살아나서 히피족이나 펑크족 행동을 하게 된다. 본능대로 했을 뿐인데 많은 흑인은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다. 호주 애보리진의 수감비율은 비원주민의 15배나 된다. 한국인은 다를까? 아슬아슬하다. 언제든 그렇게 될 수 있다. 우리는 1만 5천년 전의 부족민에서 그리 멀리 떠나오지 않았다. 교육에 의해 겨우 무마되고 있을 뿐이다.
진정한 교육은 호르몬의 공유로 가능하다. 인종이 다르고, 성별이 다르고, 배경이 다른 사람이 같은 집에서 생활하며 서로의 냄새와 땀을 공유할 때 진정한 도약이 일어난다. 보통은 한 공간에 모으는 과정에서 온갖 장벽들이 등장하여 좌절하게 된다. 모였다 해도 만화가 조석이 혼자 떼돈을 벌면서 네이버 웹툰 특유의 살가운 분위기는 깨지고 만다. 오래가지 못하는 것이다.
정답은 교육의 목적이 지식을 공유하는데 있다는 본질을 정확히 아는 것이다. 방해자를 제거해야 공유가 가능해진다. 실용주의, 경험주의, 상대주의, 허무주의, 유물론, 이원론, 다원론, 보수주의, 괴력난신, 음모론. 히피족, 펑크족, 초능력, 환빠, UFO, 무당, 주술, 종교, 관습이 지식을 공유하는 시스템의 방해자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대중에게 아부하는 모든 것이 그러하다. 우리 진지해야 한다. 우리는 지식을 공유하는 물리적 구조를 건설하고 방해자를 척결해야 한다. 보수꼴통, 실용주의자, 광신도, 음모론자, 환빠, 기득권 중독자는 어른들의 진지한 대화에 끼워주면 안 된다.
집단이 아이디어를 공유하는게 중요하다. 중국은 다른 나라의 아이디어를 훔쳐서 성공했다. 모방대국 일본이나 짝퉁대국 한국도 그런 시절을 거쳤다. 아이디어의 공유야 말로 인류의 지상과제라 하겠다. 그런데 일방적으로 훔치기만 하면 선진국이 가만 있지 않는다. 문제는 인류가 제대로 된 의사결정구조를 만들어 낼 수 있느냐다.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자에게 권력과 명성과 돈이 흘러가야 한다. 남의 아이디어만 빼먹고 자기 아이디어는 숨겨놓는 자는 무리에 끼워주지 말아야 한다. 자기 의견은 절대 말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의견을 말하면 토를 달아 반격하는 얍삽한 기술을 쓰는 자들 있다.
서양의 발전은 학회와 논문과 특허와 저작권 덕에 가능했다. 서구는 아이디어를 공유하는 자에게 상응하는 권리와 대가를 주었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시궁창인 법. 대단한 아이디어를 쏟아내고도 노벨상을 못 받은 사람도 많고 남의 아이디어를 어깨너머로 훔쳐서 노벨상을 수상한 자도 많다. 떠먹여주는 정답은 없지만 방향은 명백하다. 실용주의, 상대주의, 경험주의가 인류를 망친다. 합리주의, 절대주의, 지성주의가 대범한 지식의 공유를 가능케 한다. 우리는 이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또다른 문제를 찾아내는 게임을 영원히 반복한다. 인류가 살아가는 방식이 그러하다.
최적화된 의사결정구조라야 한다. 교육이 답이다. 서구교육은 교실붕괴로 실패했다. 민주 찾다가 일진이 권력을 쥐는 정글이 만들어졌다. 그들은 이성이 아닌 본능을 따라간 것이다. 교실에서는 지식을 가진 자가 우선이어야 한다. 한국도 학폭위 열다가 교권붕괴로 막장교육이 되었다. 교사에게 권력이 가야 한다. 잘잘못이 있어도 학교라는 공간 안에서 용해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함부로 심판의 칼을 휘두르지 말고 호르몬이 해결하도록 시간을 끌어야 한다. 원인제공자에게 보복하면 된다는 부족민의 충동을 버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하나가 되는 훈련을 해야 한다.
피아구분의 방법으로 3분만에 해결할 문제를 3년 동안 끙끙대며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이 존 듀이의 실용주의 교육이다. 문명중독에 걸려 인간이 서열정리에 집착하는 동물임을 망각한 것이다. 교실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혼란은 원시 부족민의 서열정리 본능 때문이다. 민주와 자유의 이름아래 짐승의 서열싸움을 하고 있으니 그것은 교육이 아니다. 주먹으로 싸우면 안 되지만 입으로 싸우는건 괜찮다는 식이라면 착각이다. 때로는 말의 상처가 오래간다.
교육은 편가르기다. 같은 편은 공간을 공유해야 한다. 인간의 길을 갈 것인지 아니면 짐승의 길을 갈 것인지를 먼저 결정해야 한다. 인간의 길을 선택했다면 호르몬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좁은 공간에 몰아넣고 서로의 방귀를 먹게 해야 한다. 서로의 냄새에 익숙해져야 한다.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배경이 다른 사람을 한 곳에 섞어놔야 한다. 낯선 사람에게서 본능적으로 스트레스를 느끼지만 극복해야 한다.
미국의 노예제도는 민주적인 결정으로 채택된 것이다. 민주주의 찾다가 남북전쟁으로 백만 명이 죽었다. 히틀러와 뭇솔리니도 민주주의를 악용했다. 교육은 지식의 주입이 아니라 인간의 길과 짐승의 길 중에서 자기편을 선택하는 것이다. 사회의 편에 서면 사회생활을 하고 반사회의 편에 서면 교도소 생활을 한다. 나쁜 방향에는 물리적인 장벽을 세우고 옳은 방향에는 방해자를 제거하는 방법으로 올바른 편먹기는 가능하다.
뛰어난 자에게 권력이 가야 하며 뛰어난 자는 지식을 공유해야 한다. 능력이 있는 자에게 권력이 가야 하며 능력이 있는 자는 성과를 내서 사회에 보답해야 한다. 지식 뿐 아니라 돈도 공유되어야 한다. 일을 많이 한 사람이 돈을 분배하는 권력을 가져야 한다. 지식도 돈도 궁극적으로는 사유될 수 없다. 성과를 낸 자가 분배권을 가질 뿐이다.
공유의 방해자는 제거해야 한다. 범죄자가 처벌받는 이유는 공유 시스템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는 대가 없이 공유하려다가 지식인이 각자 서랍에 지식을 감추는 바람에 망했다. 테트리스와 AK소총만 소련이 망하기까지 무한공유되었다. 자본주의는 이명박의 기술적인 도둑질을 장려하다가 사장은 초졸, 이사는 중졸, 간부는 고졸, 말단은 대졸, 신입은 박사로 되어 구조붕괴에 직면했다. 삼성의 재용이나 현대의 의선이나 솔직히 능력은 고졸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