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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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6760 vote 0 2020.05.11 (16:56:14)

      

    

교육이 가장 중요하다 


    교육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교육이 잘못되었다. 현대사회가 이 모양 이 꼴인 것은 교육철학의 실패 때문이다.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하는 교육방법은 부차적인 문제이고 교육의 방향설정이 중요하다. 그것은 인간 내면에 잠재해 있는 에너지를 끌어내는 것이다. 구체적인 교육방법은 대치동 학원가의 일타강사들이 답을 안다. 그에 앞서 학생의 배우고자 하는 마음을 끌어내야 한다. 배우고 싶어 안달하게 만들어야 한다.


     에너지는 집단과의 관계설정에서 나온다. 교육의 대강은 여기서 결정된다. 가족이 있는 사회와 가족이 없는 부족민의 차이는 크다. 가족의 탄생과 더불어 사유재산권이 성립하고 집단 안에서 개인이 위치를 가지게 된 것이다. 가족이 없으면 개인이 사회를 향해 발언하지 못하고 겉돌게 된다. 그러므로 개인의 발언이 먹히는 단계까지 사회가 깨진다. 부족민은 50명 정도가 단위를 이룬다. 혼자서 60명을 상대하기는 무리이기 때문이다. 다수가 합의하지 못하므로 합의가능한 수준까지 집단의 규모가 작아지는 것이다. 더 큰 의사결정단위를 만들 수는 없을까? 그래서 교육이 있다. 교육의 목적은 다수가 합의가능한 구조를 건설하는 데 있다.


    우리는 문명중독에 걸려서 오판하게 된다. 개인의 잘못된 판단은 뭐를 몰라서 그런 것이며 붙잡아 앉혀놓고 차근차근 설명해주면 된다고 여긴다. 천만에. 호르몬 때문에 안 된다. 집단 안에서 개인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외부인이 설득하려고 접근하면 이미 위협을 느낀다. 부족민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진실이 보인다. 1만 5천년 전에 처음으로 인구 1천명 이상의 대부족이 출현하면서 문명이 시작되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괴베클리 테페 유적의 발견으로 종교의 출현이 문명의 불씨를 당겼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숫자가 많으면 마찰이 일어나서 서로 불편해진다. 무리가 일제해 한 방향으로 전진할 때 집단의 구성원들이 개인의 자유를 잃지 않으면서도 서로 마찰하지 않을 수 있다. 물고기나 새가 이동할 때 무리를 이루는 것과 같다. 집단이 한 방향을 바라보게 하려면 철학이 필요하다. 1만 5천년 전에 종교가 했던 역할을 지금은 철학이 해야 한다. 종교는 교리가 있다. 교리를 학습해야 한다. 교육에 의해 문명이 일어난 것이다.


    무리가 일제히 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려면 그 철학은 일원론이어야 한다. 다원론이면 무리가 다양한 방향으로 흩어져서 마찰하게 된다. 자동차가 우측통행을 하는 것과 같다. 이원론을 적용하여 좌측과 우측을 병행하여 통행하면 당연히 사고가 난다. 다원론을 적용하여 다양하게 통행하면 다양하게 사고난다. 합리론이 옳고, 절대주의가 옳고, 보편주의가 옳은 것은 그래야 사고를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와 문명의 진보는 집단이 한꺼번에 움직이는 것이다. 집단이 움직이려면 일원론을 따를 수 밖에 없다.


    언어가 다양하면 의사소통에 실패하여 바벨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나의 언어, 하나의 기준, 하나의 체계, 하나의 원칙으로 통일해야 한다. 교육의 목적은 집단이 지식을 공유하는데 있다. 삐딱한 태도로 등 돌리고 있으면 지식을 공유할 수 없다. 팔짱 끼고 관망하며 냉소하고 야유하고 조롱한다면 지식은 공유되지 않는다. 조건을 내걸고 흥정하려고 하는 자와 지식을 공유할 수 없다. 남의 지식만 빼먹고 자기 지식은 감추는 자와 지식을 공유할 수 없다. 그런데 다들 그렇게 한다. 인간은 원래 부족민으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교육에 의해 문명화 되었을 뿐 본질은 1만 5천년 전과 달라진 것이 없다. 인간은 특별히 훈련되지 않으면 50명 이상이 무리를 이루고 공존할 수 없다.


    진정한 교육은 인류가 지식을 공유함에 있어서 원칙과 기준을 밝히고 일제히 한 방향을 바라보게 하는데 있다. 그러려면 방해자를 제거해야 한다. 이원론자, 상대주의자, 차별주의자, 실용주의자, 경험주의자, 보수주의자, 유물론자, 괴력난신의 추종자, 초능력, UFO, 안아키, 어그로를 끄는 자, 음모론자, 종교의 신도나 환빠들은 교육의 방해자다. 그들과는 지식을 공유하지 말아야 한다. 대화가 되는 사람이라야 지식을 공유할 수 있다. 수학을 공유하려면 숫자를 배워야 하고 프로그래머가 되려면 컴퓨터 언어를 익혀야 한다. 그 바닥에서 통하는 언어를 배워야 하는 것이다. 집단의 의사결정중심으로 쳐들어가서 높은 지식그룹에 가담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적과의 동침은 없다. 교육이 가장 중요한 무기다. 무기를 적의 손에 쥐어줄 수는 없다. 차별주의자는 배제하라. 적이니까. 보수주의자는 배제하라. 적이니까. 아이디어를 공유하지 않는 자는 제거하라. 적이니까. 지식은 좋은 것인데 그것을 적의 수중에 넘어가게 놔둘 수는 없는 것이다.



    교육의 목적은 지식을 공유하는 구조의 건설에 있다

     

    교육의 목적은 지식의 공유에 있다. 그룹의 구성원들이 그룹에서 가장 뛰어난 자와 대화가 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려면 한 사람의 지식을 모두의 지식으로 복제할 수 있는 구조라야 한다. 최대다수가 집단의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해야 하고 대중 속에 잠재된 역량을 최대한 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집단에 최적화된 의사결정구조를 건설해야 한다. 나아가 이를 실현하는데 따른 방해자를 제거하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다. 


    아는 자가 모르는 자에게 맞춰야 하는가, 아니면 모르는 자가 아는 자에게 맞춰야 하는가? 교육은 모르는 자가 아는 자의 기준에 맞추는 것이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아는 자가 모르는 자의 눈높이에 맞춘다. 모르는 자는 어차피 아는 자의 기준에 맞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장의 난관이지 교육의 목표가 아니다. 험난한 교육과정을 거치며 난관을 돌파하여 마침내 모르는 자가 아는 자를 따라잡아야 교육된 것이다.



    교육의 목적은 집단적 권력과정을 통한 집단적 자아실현이다


     개인적 자아가 있는가 하면 집단적 자아도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무의식적으로 집단과 자기를 동일시한다. 집단과의 관계설정에서 에너지가 나오기 때문이다. 교육의 목적은 개인적 자아에서 집단적 자아로 인격을 성숙시켜 거기서 에너지를 끌어내는데 있다. 개인적인 쾌락의 추구가 아니라 집단 안에서 역할을 찾아 임무를 수행하는 데서 에너지를 끌어내고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 집단적 자아실현이다.


    문제는 교육받지 못한 사람이 자신이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점이다. 노예주는 교묘한 수법으로 노예끼리 싸우게 만든다. 적은 외부의 노예주인데 노예는 동료를 공격하는 실패를 저지른다. 집단 내부의 착취구조를 깨닫고 동료와 연대하여 왜곡된 구조에 맞서야 한다. 교육받지 못하면 집단적 자아가 왜곡되어 피아구분을 잘못하게 된다. 적을 동료로 착각하고 동료를 적대하게 된다. 피부색과 성별과 종교와 관습이라는 장벽에 막혀 동료를 적대하고 지배자에게 복종하는 실패를 저지른다. 특히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지배자의 편에 서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자아는 곧 자기 통제권이다. 자기 통제에 실패하므로 두려워하여 주인에게 의존하는 것이다.


    자아가 약하면 자기 몸을 통제할 수 없고, 감정을 통제할 수 없고, 습관을 통제할 수 없다. 나아가 가족과 동료와 이웃을 통제할 수 없다. 그럴수록 힘을 가진 자에게 복종하게 된다. 그냥 나쁜 짓을 그만두면 되는데 꼭 형님에게 깐죽대다 매를 번다. 한 대 맞고 나쁜 짓을 그만둔다. ‘아버지는 그때 왜 나를 주먹으로 바로잡아주지 않았나?’ 하고 항의하는 일도 있다. 매를 맞아야 집단에 소속감을 느낀다. 이는 동물의 본능이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 불안해 하며 자신이 집단의 일원인지 확인하려는 것이다. 자기통제를 못하므로 외부통제에 의존하는 것이다. 강자의 철학을 가져야 자존감을 얻는다. 그럴 때 자신의 몸과 감정과 습관을 통제할 수 있고 가족과 동료와 팀과 국가에 대해서도 올바르게 대응할 수 있다. 


    자존감이 낮은 약자는 에너지가 없으므로 직접 발언하지 못하고 관심있는 이성을 괴롭힌다든가 하는 식으로 한 바퀴 꼬아서 행동한다. 사귀자는 말을 못하고 깐죽대다가 한 대 맞는다든가 하는 식이다. 뭔가 일을 저질러 나쁜 상황을 만들고 윗사람이 개입하게 하는 것이다. 윗사람에게 에너지를 의존하기 때문이다. 뭐든 나빠지게 만든다. 자존감을 얻게 하는 강자의 철학이 필요한 이유다. 절대강자는 신과 진리다. 신의 편에 서고 진리의 편에 설 때 자신이 천하와 연결되어 있다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그것이 믿음이다. 믿음을 얻을 때 자신이 소속된 집단을 정확히 파악하고 주변사람을 경쟁자가 아닌 동료로 받아들이게 된다.


    개인이 목표를 세우고 실천하여 행복감을 얻는 것이 개인적 권력과정이라면 집단이 무언가를 지향하고 서로 역할을 나누고 이를 실현하는 것이 집단적 권력과정이다. 곧 집단적 자아실현이다. 존 듀이 교육은 개인적인 권력과정에 천착해 있다. 개인의 행복감은 무의미하고 동료의식이 중요하다. 오늘날 철지난 종교가 여전히 극성을 부리는 이유는 진보 지식인들이 개인적 권력과정에 천착해서 인류를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가 유일하게 집단적 자아실현을 가능케 하는 수도 있는 것이다.


    룻소나 소로가 전원생활에서 느끼는 행복감은 아스퍼거 증후군이다. 유나바머가 숲 속에 오두막을 짓고 살아도 대단한 자연주의 철학이 아니다. 그게 아스퍼거인의 자기소개다. 칸트의 규칙적인 생활도 마찬가지다. 헌신적인 진보 활동가들은 자기만 할 수 있는 일을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끊임없이 설득하고 토론하고 대화하는 것은 지극히 인내심이 강한 즉 성격이 특이한 극소수의 사람만 가능하다. 그게 다수에게는 지나친 참견과 극성으로 보인다. 유난을 떠는 것이다. 좌파의 오류는 아스퍼거 증후군을 자연주의자 행세로 커버하는 것과 인내심이 강한 이상 성격자가 그것을 성품론으로 포장하여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이다. 주사파의 성품론 말이다. 


    개인의 도덕성은 중요하지 않다. 집단 내부의 상호작용이 중요하다. 호르몬을 움직여야 한다. 호르몬은 무의식이 환경을 읽은 결과다. 비좁은 공간에서 서로의 방귀를 먹어야 한다. 개인적 성취보다 자식의 성공, 동료의 성공, 국가의 성공이 더 유의미하다. 개인적 권력과정은 쉽게 허무주의로 빠지게 된다. 집단적 권력과정을 통해 더 많은 에너지를 끌어낼 수 있다. 그러려면 성공한 그룹에 들어야 한다. 인류에게 중요한 것은 강자의 그룹에 속하는 것이다. 이기는 팀에 들어야 자존감을 얻고 집단적 자아실현이 가능하다. 지는 팀에 들어서 반복적으로 패배를 맛 보면 퇴행한다. 모두가 이기는 팀에 들 수 있도록 사회를 정밀하게 디자인해야 한다. 


    진보가 비현실적인 도덕가나 무절제한 히피를 지향한다면 좋지 않다. 점차 고립되어 상호작용의 부족으로 수평적 연결에 실패하기 때문이다. 도덕가도 고립되고 히피도 고립된다. 팀에 들어서 반복적으로 이겨갈 때 인류는 하나가 된다. 하나의 게임을 깨고 다음 스테이지로 올라서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문제해결은 중요하지 않다. 환경문제든 빈부격차든 노동문제든 보안법이든 교육개혁이든 성과주의 집착은 좋지 않다. 문제해결보다 싸워서 이겨본 경험이 중요하다. 연대하여 싸움판에 나서는 것이 중요하다. 문제의 해결과정에서 우리가 더 단단해지는 것이 중요하다. 


     

    집단과의 관계설정에서 에너지가 나온다


    지구촌에 70억은 너무 많고 2억이 적당하다고 한다. 2억 정도면 인류 모두가 행복을 누리며 쾌적하게 살 수 있다고. 일본인의 지혜 마비끼를 떠올릴 수 있다. 간단히 68억을 죽이면 된다. 만약 이렇게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 자가 실용주의자다. 틀렸다. 문제는 해결되기 위해 존재하는게 아니다. 다수의 문제는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다. 문제의 해결과정에서 인류가 전진했느냐가 중요하다. 컴퓨터 게임과 같다. 한 단계를 깨고 나면 또다른 스테이지가 주어진다. 하나의 문제가 해결되는 즉시 인류는 또다른 문제를 만들어낸다. 미투는 옛날에 없었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자 새로운 문제를 발굴해낸 것이다. 어떻게든 문제를 발굴하고야 만다. 그것인 인간이다.


    인간은 무엇을 원하는가? 보통은 행복을 말한다. 틀렸다. 마리화나를 피우면 바로 행복해진다. 그냥 대마초를 합법화 하면 되는데 어디서 행복을 찾는다는 말인가? 부작용 없는 마약을 제조하면 된다. 왜 WHO는 인류를 쾌락으로 인도하는 마약을 공급하지 않는가? 아놀드 슈바제네거는 약물로 몸을 만들었다. 그래서 불행해졌는가? 그래서 건강을 해치고 일찍 죽었는가? 피둥피둥 잘만 산다. 그런데도 왜 인류는 스테로이드를 금지하고 있지? 어떤 지혜로운 한의사는 첩약에 비아그라와 스테로이드를 써서 명의가 되었다고 한다. 이런 실용적인 방법이 있을 줄이야? 그렇다. 인류는 어리석기 그지없는 동물이다. 행복해 지고 싶다고? 진심이라면 복제 비아그라를 무한정 허용케 하라. 아주 밥에 비벼 먹어라. 스테로이드 먹고 근육맨 되거라. 부작용이 걱정되거든 아놀드 슈바제너거를 보라. 대마초 합법화를 요구하고 부작용 없는 마약의 개발에 매진하라. 더 간단한 방법을 써라. 그것은 인간 68억 명을 죽이는 것이다. 왜 당신은 쉬운 길을 가지 않는가? 왜 당신이 존경하는 존 듀이의 실용주의를 실천하지 않는가? 왜 쉬운 길을 놔두고 어려운 길을 찾고 있는가? 당신은 바보인가 아니면 양심에 찔려서인가? 당신의 양심은 무엇인가? 인류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당신의 양심이란 말인가? 어쨌든 당신은 사이코패스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사이코패스라면 벌써 68억을 제거하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마비끼당을 창당했을 것이다.


    인류는 스스로 난관을 조성하고 자청하여 불행의 길을 가는 동물이다. 스스로 문제를 만들고 문제의 해결을 시도하니 패턴이 반복되는 컴퓨터게임과 같다. 게임을 이기는 방법은 게임을 그만두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원래 게임하는 동물이다. 어떻게든 난관을 조성하고 또 그것을 극복해 보인다. 그리고 의기양양해 한다. 그 결과로 얻는 것은 문제해결능력의 상승이다. 인간이 원래 그렇다면 받아들여야 한다. 


    인간은 불행해 하면서 도전을 멈추지 않는 동물이다. 에너지가 있기 때문이다. 에너지는 집단과의 관계설정에서 나온다. 게임을 진행하면서 동료를 만들고 친구를 사귀고 파트너를 얻는다. 만날 사람을 만난다. 거기서 에너지를 얻는다. 문제의 해결은 필요없다. 개인적인 행복도 필요없다. 에너지가 중요하다. 에너지가 있으면 어떻게든 하루를 살 수 있다. 에너지를 주는 집단과의 관계설정이 중요하다.



    문명의 목적


    문명의 목적은 집단이 최선의 의사결정구조를 갖추는데 있다. 행복이나 쾌락은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본능이 인간을 유인하는 미끼다. 동물은 죽음의 공포만으로 되는데 인간은 영리하므로 더 많은 보상이 필요한 것이다. 어린이는 부모의 칭찬이라는 보상 때문에 공부하지만 공부를 하다보면 깨닫게 된다. 왜 공부해야 하는지를. 처음에는 행복과 쾌락이라는 보상 때문에 문명의 길을 가지만 나중에는 깨닫게 된다. 문명의 진짜 목적을 집단의 완성에 있다는 사실을. 팀과 하나가 되는데 있다는 사실을. 최적화된 의사결정구조를 건설했을 때 집단은 완성되는 것이다.


    집단이 처한 환경이 다르므로 인종과 지리와 전통에 따라 다양한 의사결정구조가 등장한다. 그 본질은 하나다. 그것은 지식의 공유다. 한 사람이 아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될 때 집단은 막강해진다. 그리고 강한 집단이 살아남는다. 문제는 방해자다. 인종이 다르고, 피부색이 다르고, 성별이 다르고, 사투리가 다르고, 종교가 다르고, 나이가 다르고, 관습이 다르다는 사실이 장벽이 되어 지식의 공유를 방해하고 있다. 우리가 믿는 자유와 평등과 민주는 그 장벽을 제거하는 장치다. 그러나 많은 경우 자유와 평등과 민주의 이름으로 또다른 장벽이 만들어진다.


    텍사스 사람들은 총을 들고 앞을 막아선다. 그들은 자유의 이름으로 장벽을 만들었다. 우리는 그들과 지식을 공유할 수 없다. 평등의 이름으로 남의 아이디어를 훔치는 자들이 있다. 초졸과 대졸이 같은 그룹에 속해 있다면 일방적으로 초졸이 대졸의 아이디어를 훔친다. 대졸은 초졸의 아이디어를 훔칠 수 없다. 그 경우 대졸은 입을 다물어 버린다. 억지 평등이 또다른 장벽이 된다. 민주도 때로는 장벽이 된다. 그룹에서 가장 뛰어난 자에게 발언권을 줘야 지식이 공유된다. 민주의 이름으로 다수가 시간을 끌어 뛰어난 소수를 지치게 만드는게 보통이다. 애를 먹이는 것이다. 


    일본 만화가들은 학동사의 주선아래 데즈카 오사무를 필두로 10여명이 토키와 장에 모여 지식을 공유했고 그걸로 일본 애니메이션의 르네상스를 열었다. 일본 만화의 양산박이라고 불린다. 한국의 바둑은 충암사단이 키워냈다. 2008년에 충암고 출신으로만 프로기사 100명에 합쳐서 500단이라고 한다. 인상주의 초기에 화가들은 살롱에 모여 지식을 공유했다. 일론 머스크가 특허를 공개한 것이나 구글이 인공지능 엔진을 공개한 것이 그러하다. 지식의 공유에 의해 인간은 한 단계 위로 도약하는 것이다.


    문제는 방해자다. 인간의 본능이 가장 큰 방해자다. 인류는 원래 100명 정도의 소부족으로 생활하도록 만들어졌다. 사피엔스의 역사 30만년 동안 인류는 그렇게 살아왔다. 문명은 1만 5천년 전에 종교가 탄생하면서 인구 1천명이 넘는 대부족의 출현으로 인해 갑자기 찾아온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문명중독에 걸려 그러한 사실을 망각한데 있다. 우리는 여전히 정글에 흩어져 사는 부족민으로 태어난다. 교육에 의해 문명인 행세를 할 수 있지만 맞지 않는 옷처럼 어색하다. 수시로 본능이 살아나서 히피족이나 펑크족 행동을 하게 된다. 본능대로 했을 뿐인데 많은 흑인은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다. 호주 애보리진의 수감비율은 비원주민의 15배나 된다. 한국인은 다를까? 아슬아슬하다. 언제든 그렇게 될 수 있다. 우리는 1만 5천년 전의 부족민에서 그리 멀리 떠나오지 않았다. 교육에 의해 겨우 무마되고 있을 뿐이다.


    진정한 교육은 호르몬의 공유로 가능하다. 인종이 다르고, 성별이 다르고, 배경이 다른 사람이 같은 집에서 생활하며 서로의 냄새와 땀을 공유할 때 진정한 도약이 일어난다. 보통은 한 공간에 모으는 과정에서 온갖 장벽들이 등장하여 좌절하게 된다. 모였다 해도 만화가 조석이 혼자 떼돈을 벌면서 네이버 웹툰 특유의 살가운 분위기는 깨지고 만다. 오래가지 못하는 것이다.


    정답은 교육의 목적이 지식을 공유하는데 있다는 본질을 정확히 아는 것이다. 방해자를 제거해야 공유가 가능해진다. 실용주의, 경험주의, 상대주의, 허무주의, 유물론, 이원론, 다원론, 보수주의, 괴력난신, 음모론. 히피족, 펑크족, 초능력, 환빠, UFO, 무당, 주술, 종교, 관습이 지식을 공유하는 시스템의 방해자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대중에게 아부하는 모든 것이 그러하다. 우리 진지해야 한다. 우리는 지식을 공유하는 물리적 구조를 건설하고 방해자를 척결해야 한다. 보수꼴통, 실용주의자, 광신도, 음모론자, 환빠, 기득권 중독자는 어른들의 진지한 대화에 끼워주면 안 된다. 


    집단이 아이디어를 공유하는게 중요하다. 중국은 다른 나라의 아이디어를 훔쳐서 성공했다. 모방대국 일본이나 짝퉁대국 한국도 그런 시절을 거쳤다. 아이디어의 공유야 말로 인류의 지상과제라 하겠다. 그런데 일방적으로 훔치기만 하면 선진국이 가만 있지 않는다. 문제는 인류가 제대로 된 의사결정구조를 만들어 낼 수 있느냐다.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자에게 권력과 명성과 돈이 흘러가야 한다. 남의 아이디어만 빼먹고 자기 아이디어는 숨겨놓는 자는 무리에 끼워주지 말아야 한다. 자기 의견은 절대 말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의견을 말하면 토를 달아 반격하는 얍삽한 기술을 쓰는 자들 있다.


    서양의 발전은 학회와 논문과 특허와 저작권 덕에 가능했다. 서구는 아이디어를 공유하는 자에게 상응하는 권리와 대가를 주었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시궁창인 법. 대단한 아이디어를 쏟아내고도 노벨상을 못 받은 사람도 많고 남의 아이디어를 어깨너머로 훔쳐서 노벨상을 수상한 자도 많다. 떠먹여주는 정답은 없지만 방향은 명백하다. 실용주의, 상대주의, 경험주의가 인류를 망친다. 합리주의, 절대주의, 지성주의가 대범한 지식의 공유를 가능케 한다. 우리는 이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또다른 문제를 찾아내는 게임을 영원히 반복한다. 인류가 살아가는 방식이 그러하다.


    최적화된 의사결정구조라야 한다. 교육이 답이다. 서구교육은 교실붕괴로 실패했다. 민주 찾다가 일진이 권력을 쥐는 정글이 만들어졌다. 그들은 이성이 아닌 본능을 따라간 것이다. 교실에서는 지식을 가진 자가 우선이어야 한다. 한국도 학폭위 열다가 교권붕괴로 막장교육이 되었다. 교사에게 권력이 가야 한다. 잘잘못이 있어도 학교라는 공간 안에서 용해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함부로 심판의 칼을 휘두르지 말고 호르몬이 해결하도록 시간을 끌어야 한다. 원인제공자에게 보복하면 된다는 부족민의 충동을 버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하나가 되는 훈련을 해야 한다.


    피아구분의 방법으로 3분만에 해결할 문제를 3년 동안 끙끙대며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이 존 듀이의 실용주의 교육이다. 문명중독에 걸려 인간이 서열정리에 집착하는 동물임을 망각한 것이다. 교실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혼란은 원시 부족민의 서열정리 본능 때문이다. 민주와 자유의 이름아래 짐승의 서열싸움을 하고 있으니 그것은 교육이 아니다. 주먹으로 싸우면 안 되지만 입으로 싸우는건 괜찮다는 식이라면 착각이다. 때로는 말의 상처가 오래간다. 


    교육은 편가르기다. 같은 편은 공간을 공유해야 한다. 인간의 길을 갈 것인지 아니면 짐승의 길을 갈 것인지를 먼저 결정해야 한다. 인간의 길을 선택했다면 호르몬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좁은 공간에 몰아넣고 서로의 방귀를 먹게 해야 한다. 서로의 냄새에 익숙해져야 한다.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배경이 다른 사람을 한 곳에 섞어놔야 한다. 낯선 사람에게서 본능적으로 스트레스를 느끼지만 극복해야 한다.


    미국의 노예제도는 민주적인 결정으로 채택된 것이다. 민주주의 찾다가 남북전쟁으로 백만 명이 죽었다. 히틀러와 뭇솔리니도 민주주의를 악용했다. 교육은 지식의 주입이 아니라 인간의 길과 짐승의 길 중에서 자기편을 선택하는 것이다. 사회의 편에 서면 사회생활을 하고 반사회의 편에 서면 교도소 생활을 한다. 나쁜 방향에는 물리적인 장벽을 세우고 옳은 방향에는 방해자를 제거하는 방법으로 올바른 편먹기는 가능하다. 


    뛰어난 자에게 권력이 가야 하며 뛰어난 자는 지식을 공유해야 한다. 능력이 있는 자에게 권력이 가야 하며 능력이 있는 자는 성과를 내서 사회에 보답해야 한다. 지식 뿐 아니라 돈도 공유되어야 한다. 일을 많이 한 사람이 돈을 분배하는 권력을 가져야 한다. 지식도 돈도 궁극적으로는 사유될 수 없다. 성과를 낸 자가 분배권을 가질 뿐이다. 


    공유의 방해자는 제거해야 한다. 범죄자가 처벌받는 이유는 공유 시스템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는 대가 없이 공유하려다가 지식인이 각자 서랍에 지식을 감추는 바람에 망했다. 테트리스와 AK소총만 소련이 망하기까지 무한공유되었다. 자본주의는 이명박의 기술적인 도둑질을 장려하다가 사장은 초졸, 이사는 중졸, 간부는 고졸, 말단은 대졸, 신입은 박사로 되어 구조붕괴에 직면했다. 삼성의 재용이나 현대의 의선이나 솔직히 능력은 고졸에 불과하다. 



    교육이냐 반교육이냐


    서열싸움 하는 개를 방치하는 견주가 있다. 서열이 정리되면 괜찮아질 거라고 믿지만 그 싸움이 10년 간다. 싸우는 개는 죽을 때까지 싸운다. 서열 1위인 알파독이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는 넓은 공간이 주어진 야생환경이고 좁은 울타리 안에서 스트레스받는 개는 죽을 때까지 서열정리를 못 한다. 무조건 견주가 개입해서 싸움을 중단시켜야 한다. 무는 개는 계속 물기 때문이다. 호르몬이 바뀌어야 싸움이 중단된다. 오줌냄새를 묻혀서 서로를 동료로 인식하게 만들어야 한다. 개는 가까운 형제간에 더 싸우므로 많은 경우 입양을 시켜서 물리적으로 떼어놔야 한다. 인간도 개와 다르지 않다. 싸우는 사람은 계속 싸운다. 물리적으로 제압해야 한다. 주먹으로 제압하라는 말은 아니다. 환경을 바꾸어야 한다. 교실에 가둬놓거나 여행을 하게 하거나 운동을 시키는 것도 호르몬을 바꾸는 물리적인 해결책이 된다. 정 안 되면 교도소에 수감할 수 밖에 없지만.


     수학여행 가는 버스에서 일진은 맨 뒷자리에 앉는다. 앞자리가 좋은데 왜 뒤에 앉을까? 자기 등 뒤에 누가 있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등 뒤에서 공격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벽을 등지고 앉아야 안심이 된다. 버스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보여야 한다. 공간 전체를 감시하려는 거다. 이는 전사의 본능이다. 학생들에게 말해줘야 한다. 네가 그러는 것은 상대가 어쨌기 때문이 아니라 정글의 부족민 본능이 튀어나와서 그런 거라고. 호르몬의 명령에 굴복한 것이라고. 아직 인간이 덜된 거라고. 


    존 듀이 교육은 교사들에게 아부하는 비겁한 짓이다. 자유와 민주를 핑계로 싸우는 개를 그냥 방치한다. 교육은 호르몬을 바꾸는 것이다. 현명한 훈련사는 금방 해결한다. 3년 동안 물던 개를 하루 만에 바뀌게 하는 것이 교육이다. 호르몬이 바뀌어 적이 아니라 동료로 인식하는 순간 문제는 해결된다. 인간은 사춘기가 되면서 호르몬이 변한다. 부족민은 사춘기에 나타나는 질풍노도가 없다. 자연스럽게 이성과 접촉하므로 호르몬이 해결된 것이다. 소녀나 소년에게서 사춘기의 행동이 보인다면 그것은 사회가 잘못되었다는 증거다. 어쩌면 문명은 통째로 인간에게는 어색한 것일 수 있다. 어쩔 수 없다. 적응해야 한다. 부족민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인간의 실패는 호르몬 때문이므로 많은 경우 말로 타일러서는 답이 없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자유와 민주의 이름 아래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서열싸움에 허비한다. 군 훈련소에 입소했다고 치자. 거기서 엄마를 부를 수 없다. 우리 아빠가 칠성파 두목인데요? 이런다고 집에 보내주겠는가? 그 공간을 탈출할 수 없다. 그 사실을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는데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밤중에 이불 속에서 우는 녀석도 있다. 그러나 악랄한 조교는 30분 만에 훈련병의 어리광을 해결한다. 욕설과 얼차려가 날아든다. 요즘은 달라졌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말이다. 이곳은 훈련소이고 떼를 쓴다고 집에 보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두가 납득한다면 그런 불필요한 신경전과 욕설과 얼차려가 필요 없지 않은가? 납득하기가 어렵나? 고문관이 있다. 우리 아부지 장관인데요? 피곤한 넘이다. 어떻게든 요령을 부려서 규칙을 어길 궁리만 하는 자가 있다. 헛심을 쓰는 것이다. 한 사람 때문에 많은 사람이 피해를 본다. 군대에서는 그냥 시키는 대로 하는 척하며 시간을 깎아 먹는게 최고다. 


    이 시대에 세계 모든 나라의 교육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 서열싸움에 불필요한 에너지를 낭비한다. 눈치를 보고 분위기를 익히고 서열을 정하며 헛심을 쓰는데 경상도 넘들이 지금 대한민국 안에서 서열정리가 안 되어 꼴통을 부리고 있다. 미통당 찍는다고 대구의 서열이 올라가겠는가 말이다? 군대라는 공간은 강원도넘, 제주도넘, 경상도넘이 섞여 있는데 요즘은 괜찮겠지만 과거라면 제주도 병사와는 일단 말이 통하지 않는다. 사투리가 심하다. 90년대만 해도 내무반에서 고졸파와 대졸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웃기는 짓이 아닌가? 대졸파들은 여유 있게 웃어넘기는데 고졸파들은 우리 고졸이 뭉쳐야 해 하며 화장실에 따로 모여서 분기탱천해 있었다. 대졸파를 제압한다며 태권도 시범 때 쓸데없이 만용을 부리다가 부상당하는 꼴을 봤다. 왜 그런 멍청한 짓을 하지? 가만있다가 제대하면 되는데. 교육은 그런 것이다. 사회에서는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하지만 내무반에 머리 깎고 앉아있으면 똑같다. 그런 것을 빨리 납득할수록 군생활이 편해진다. 잘생겼든 못생겼든, 얼굴이 희든 검든, 고졸이든 대졸이든 다 필요없다는 사실을 납득해야 한다. 진보교육이 자유주의 민주주의를 떠들며 이런 걸로 헛심을 쓴다. 눈치보고 견제하고 서열 따지며 말로 해결하려 한다. 주먹으로 하지 왜 말로 해? 말로는 해결이 안 되지만 호르몬으로 해결된다. 


    '화이트 스콜'이라는 영화가 있다. 13명의 소년들이 해양학교에 입학하여 범선으로 항해를 하다가 화이트 스콜을 만나 몇몇 학생들과 선원이 죽고 재판이 시작된다. 교사는 혼자 책임을 뒤집어쓰려고 한다. 학생들은 스승을 변호한다. '우리는 한 팀이다.' 하고 교사는 강조하지만 말로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비좁은 공간에서 땀냄새를 맡다 보면 호르몬이 움직여서 원팀이 된다. 바다는 위험하고 범선의 마스트는 긴장된 공간이다. 다들 예민해진다. 그런 공간에 풍덩 빠뜨려 놓으면 저절로 교육된다. 계속 시합에 이기면 호르몬이 나와서 원팀이 되고 시합에 매번 지면 분노가 치솟아서 팀이 깨진다. 교육은 말로 하는게 아니다. 교실에 가둬서 서로의 땀냄새를 맡게 하는 것이다. 체육수업이 필요한 이유는 그래야 땀냄새를 맡기 때문이다. 남자는 여자냄새를 맡고 여자는 남자냄새를 맡아야 한다. 냄새가 다르면 뇌는 본능적으로 상대를 적으로 간주한다. 영화 기생충에 냄새 이야기가 괜히 나오는게 아니다. 말로 가르치는 것은 교육이 아니고 비좁은 공간에 가둬서 냄새를 공유시켜야 한다. 물리적인 방법을 써야 한다. 경상도 학생은 전라도에서 공부하고 전라도 학생은 경상도에서 학교를 다녀야 한다. 


    성별이 다르고, 출신이 다르고, 배경이 다르고, 나이가 다르고, 말투가 다른 사람과 비좁은 공간에서 부대껴야 한다. 방귀냄새를 공유해야 한다. 엄격할 때는 엄격하고, 긴장할 때는 긴장하고, 절도가 있을 때는 절도가 있고, 위아래가 있을 때는 위아래가 있어야 교육이다. 그것은 자유와 민주로 되는게 아니고 호르몬으로 된다. 우리는 그런 문제에 너무 많은 헛심을 쓴다. 약간의 말투 차이로 서로 경계한다. 경상도 출신 병사는 전라도 병사의 표정을 잘못 읽는다. 내무반에서 갑자기 서열이 없어지고 모두 친구가 되는 수가 있다. 미묘한 분위기가 있다. 같은 지역 출신 병사끼리 말 트는 분위기다. 자기도 맞먹으려고 하다가 선임병에게 한 방 맞는다. 이런 걸로 서먹서먹해하다가 갈등이 생겨서 망한다. 참호 구덩이에 집어넣고 30분만 뒹굴게 하면 해결된다. 무의식적인 경계심이 남아있기 때문에 그런게 걸리는 것이다. 역시 호르몬 문제다.


    구조론으로 말하면 형식이 내용에 우선한다. 말투, 성별, 표정, 나이, 학력 이런 것이 형식이다. 에너지의 70퍼센트를 이런 데서 허비한다. 선배가 ‘얌마들아. 모여봐. 오늘부터 말 터라.’ 한마디면 해결될 것을 3개월 동안 씨루며 기운을 뺀다. 자유 민주 좋아하네. 그냥 놔두면 뻔뻔한 넘, 얍삽한 넘, 비열한 넘, 보수꼴통이 이긴다. 나 같은 숙맥은 말 한마디 못 붙여보고 어리둥절해 있다가 슬그머니 빠져나간다. '그래. 니들끼리 다 해 먹어라.' 이렇게 된다. 목청 큰 예비역 몇 사람이 주름잡는다. 자유와 민주가 교실을 정글로 만드니 교실붕괴다. 유능한 교사가 개입하면 1분 만에 해결될 것을 말이다.


   


    교육의 목적


    서세동점의 시대가 끝나고 동세서점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동양과 서양의 차이는 교육에 대한 관심의 정도에 있다. 오늘날 미국과 유럽이 이 모양 이 꼴로 된 것은 교육이 망했기 때문이다. 교육의 요체는 최선의 의사결정구조를 건설하는데 있다. 한 사람보다는 두 사람이 낫다. 문제는 두 사람이 힘을 합칠 수 있느냐다. 방해자는 호르몬이다. 낯선 사람과 마주치면 무의식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아 상대를 공격하려고 한다. 동물은 오줌을 묻혀 놓으면 가족으로 알고 공격하지 않는다. 냄새로 피아구분을 한다. 낯선 냄새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교육의 목적은 타자를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아니라 협력대상인 동료로 인식하게 하는데 있다. 호르몬이 바뀌어야 교육된 것이다. 


    일본이 혐한을 하는 것은 몰라서가 아니다. 일본인들은 한국의 반일이 편향된 지식의 주입 때문이라 여긴다. 정확한 사실을 알려주면 일본인도 변하고 한국인도 변할 것이라고 여긴다. 인간을 너무 만만하게 보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건 전략이다. 한국인과 일본인은 둘 다 자신을 약자로 규정한다. 약자의 전략은 상대를 자극하여 반응을 끌어내고 그 반응을 토대로 상대의 허점을 공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단 상대와 각을 세우고 상대의 약점을 찾아서 집적거리게 되어 있다. 결국 철학의 문제다.


    강자의 철학으로 갈아타야 한다. 90년대만 해도 일본이 강했기 때문에 혐한은 없었다. 한국은 일본문화를 개방했고 극장에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나 모노노케 히메 같은 일본 애니메이션이 상영되었다. 일본이 약해지면서 혐한이 흥한 것이다. 서로가 자신이 피해자라고 주장하니 답이 없는 교착상태다. 한국이 월등하게 강해져야 이 지루한 게임은 끝나게 되어 있다. 약자의 철학은 답이 없다. 더 약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일본은 점점 약해지고 있다. 강자의 철학으로 갈아타야 강해진다.


    공자의 철학이 강자의 철학이라면 노자의 철학은 약자의 철학이다. 서구권은 니체사상이 강자의 철학에 가깝지만 니체는 개인문제에 집착하는 소승적 태도에 매몰되어 있다. 개인의 도덕성이나 권력의지로는 강해질 수 없고 다수가 힘을 합쳐야 강해진다. 대승적 태도가 아니면 안 된다. 기독교는 약자의 철학이다. 예수는 박해받았고 유대인은 노예로 끌려갔다. 서구사상은 대체로 약자의 철학이며 경쟁을 중시하는 일부 게르만족 관습이 강자의 태도를 보여줄 뿐이다. 집단적으로 강해져야 강자가 된다. 강자의 호르몬이 나와야 한다. 두목 자리에서 끌어 내려진 늙은 수컷 침팬지는 호르몬이 바뀌어 어리광부리며 늙은 암컷 침팬지들의 품에 안긴 이후 다시는 두목 자리에 오르지 못한다. 절치부심에 와신상담하는 도전자의 자세를 잃었기 때문이다.


    강자의 철학이냐 약자의 철학이냐가 교육철학의 문제다. 에너지의 원리에 의해 한 번 방향이 한 번 정해지면 그 길로 계속 가게 된다. 호르몬 때문이다. 집단 안에서 개인은 스트레스를 받아 주눅들기도 하고 흥분하여 업되기도 한다. 한 방향으로 가야 스트레스를 덜 받는 것이다.


    20세기는 공장에서 일할 수 있는 노동자의 양성이 중요했다. 작업 매뉴얼을 읽을 수 있는 정도의 중등교육이면 충분했다. 노동자는 상대적 약자이므로 약자의 철학이 필요했을 수 있다. 전 국민이 자신을 약자로 여기고 어리광을 부리고 떼를 쓰면 재앙이 일어난다. 코로나19 상황에서 보여지는 미국의 현실이다. 지금은 모두가 엘리트가 되어야 하는 21세기다. 한 개인이 스마트폰으로 70억 인류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시대다. 고등교육이 필수가 되었다. 강자의 철학으로 갈아타야 한다.


    올바른 교육철학이 없는 이유는 교사의 입맛에 맞는 교육철학을 생산했기 때문이다. 지식인은 대중의 비위를 맞추기 급급했다. 교사들에게 아부하는 교육론이 진보교육에 민주교육으로 포장되었다. 공자의 교육사상이 옳다. 노자의 길을 가면 망한다. 존 듀이의 교육사상은 히피교육, 펑크교육에 불과하다. 자유와 민주를 표방하지만 말이 그러할 뿐 교사들에게 맡기자는 말이다. 교육목적도 없고 교육목표도 없다. 교육의 목적은 집단의 구성원이 그룹에서 가장 뛰어난 자와 대화가 되게 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지식을 모두의 지식으로 복제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최대다수가 집단의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다. 대중 속의 잠재된 역량을 최대한 끌어내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는 도덕의 수양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지식의 주입으로 되는게 아니다. 치열한 토론과 경쟁에 의한 상호작용으로 된다. 구조의 건설이 중요하다. 문제는 대화가 되는가다. 숫자를 모르면 수학자와 대화할 수 없고, 영어를 모르면 외국인과 대화할 수단이 없다. 


    사회 분위기가 중요하다. 환경에 맞게 호르몬이 나오기 때문이다. 두목에 도전하는 젊은 침팬지의 호르몬이 나오는가 아니면 암컷들의 동정심에 호소하며 어리광을 부리는 늙은 침팬지 호르몬이 나오느냐다. 호르몬이 방향을 정하면 그 길로 계속 간다. 그러므로 엄격한 교육이 아니면 안 된다. 조금 과장하면 이런 거다. 필자가 정당의 대표라면 금뺏지 중에 걸어 다니는 자는 출당이고, 3분 이상 지각하는 자는 퇴장이고, 5분 이상 발언을 끌면 마이크를 빼앗는다. 1만 원 이상을 밥값으로 쓰는 자는 퇴출이다. 운전기사나 수행비서는 인정할 수 없다. 운전도 못 하면서 금뺏지를 바란다고? 기본이 안 된 황교안들이 너무 많다. 장난이 아니라야 한다. 정치는 전쟁이다. 제대로 해야 한다. 스티브 잡스가 측근들과 회의할 때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회의시간에 잡담하면서 부하직원의 웃음을 유도하는 자는 3초 만에 아웃이 맞다. 긴장 타야 한다. 높은 레벨에 맞추어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게 교육이다.


    존 듀이가 등신교육을 주장한 이유는 일반인들은 고도의 긴장이 요구되는 높은 레벨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인이야 뭐 슬금슬금 걸어 다녀도 되겠다. 그러나 리더는 뛰어다녀야 한다. 병사의 행군속도보다 느리면 자동퇴출이 맞다. 청와대 직원 700명은 어쩌고 있는지 모르지만 나사 빠진 자가 있을 것이다. 이 시국에 이태원 술집에 출입하는 청와대 직원도 있을 것이다. 기강을 잡아야 한다. 


    강자의 철학으로 갈아타야 강자가 된다. 박지성은 열심히 뛰어다녔다. 메시의 패스를 받으려면 메시보다 많이 뛰어야 한다. 기술이 메시만 못해도 손발은 맞춰줘야 한다. 집단에서 가장 뛰어난 자와 호흡을 맞출 수 있도록 하는게 교육의 목표다. 리더의 마음을 읽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 집단의 의지를 나의 마음으로 삼아야 한다. 개인 입장 내세우면 곤란하고 인류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삼아야 한다. 


    반지성주의에 빠져 지식인을 경계하는 사회는 망한다. 집단의 구성원들이 그 집단에서 가장 뛰어난 자를 바라보고 거기에 맞춰가려고 노력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개고기 먹는 자는 교육이 안 된 자다. 개를 마당에 묶어서 키운다면 교양이 없는 자다. 성소수자 혐오를 드러내는 자는 경멸되어야 한다. 그것이 부족민의 야만행동이다. 탈근대사상은 비판되어야 한다. 대중에게 아부하는 저질이다. 21세기가 요구한다. 모든 자원이 언제든 지휘관이 될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고. 대장이 전사하면 부관이 지휘한다. 모두가 전사하면 그대가 장군이다.


    스위스인은 거리를 청소하는 사람도 엘리트인 양 넥타이 매고 출근한다고. 아마 과장된 말일 것이다. 스위스는 1년에 투표를 네 번 하는데 그것도 광장에서 공개투표로 한다. 그런 공간에 왔다갔다 하다보면 아무래도 의관을 갖추고 폼을 잡을 수 밖에. 의견을 내고 타인을 설득할 때는 지성인처럼 보여야 한다. 지성을 존중하고 지성적인 분위기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민주주의 핑계로 대중에게 아부하는 저질행동은 곤란하다.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맞추는 것이 자연스럽다. 2층에 있는 사람이 1층으로 내려가기는 쉽고 1층에 있는 사람이 2층에 올라가기는 어렵다. 엔트로피의 법칙이다. 그렇지만 교육은 1층에 사는 사람이 2층에 사는 사람의 기준에 맞추는 것이다. 교육은 원래 엔트로피와 어긋난다. 노예는 평민이 되고, 평민은 귀족의 에티켓을 배우고, 귀족은 왕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교육이다. 그것은 자연법칙을 거스르는 것이므로 인간만 되고 동물은 안 된다. 교육은 원래 특별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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