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사물의 집합이 아니라 사건의 연결이다. 사건은 계속 연결되므로 엔트로피의 방향성이 있다. 여럿이 일제히 움직이면 방향이 생긴다. 그러므로 깨달아야 한다. 여럿이 한 방향으로 일제히 움직이는 데는 정해진 순서가 있기 때문이다. 이층을 먼저 짓고 일층을 나중 지을 수는 없다. 움직이는 것은 방향과 순서가 있어서 임기응변으로는 곤란하고 사전에 규칙을 정해놓아야 한다. 모든 사건의 공통규칙이 곧 깨달음이다. 여기까지 진도를 따라왔다면 구조론 사람이 될 수 있다. 인생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 뿐이다. 자기편이다. 자식을 많이 두는 흥부의 방법이 아니고는 내편을 얻기가 만만치 않다. 자기중심으로 남을 줄 세우려고 하므로 내편이 되어주지 않는다. 순리를 따라서 내가 천하의 편에 가담해야 한다. 꼼수를 버리고 정공법으로 내편을 얻는 것이 구조론사람의 길이다. 문전에서 기웃거리는 구경꾼이 될지, 안으로 들어와서 구조론의 동료가 될지는 각자의 결정에 달려 있다. 그러나 첫 한 걸음을 떼었다면 두 번째는 앞의 걸음에 연동된다. 구조화 된다. 한 수 물러주고 그런거 없다. 결대로 계속 가야 한다. 구조론은 특별하다. 누가 갑이냐다. 진리가 갑이다. 구조론은 경쟁하는 이웃가게가 없다. 수 틀리면 다른 사이트로 가겠다고 위협해봤자 먹히지 않는다. 규칙을 따라야 한다. 오합지졸은 곤란하고 손발이 척척 맞는 베테랑의 자세가 되어야 내편을 얻는다. 문명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집단에서 나왔다. 무엇이 집단을 만들었는가? 종교다. 종교에는 무엇이 있는가? 권력이 있다. 그래서? 인간들이 말을 잘 듣는다. 힘 없는 엄마라도 자녀들을 소집하여 식탁에 앉혀놓고 감사기도를 명령할 수 있다. 다 교회 덕분이다. 권력이 이득이다. 그러나 독자들이 구조론 말을 들을 이유는 없다. 구조론이 그런 사설권력을 만들어주지 않으니 거꾸로 갑질하려 한다. 번짓수 잘못 짚은 사람을 일일이 강퇴시키기도 귀찮다.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은 필요없다. 세례식도 필요없고 십계명도 필요없다. 지킬 것은 각자가 알아서 지켜야 한다. 한 마디로 자기소개짓 하지마라는 거다. 인간은 대칭을 통해 사유한다. 자기를 개입시키지 않고 사유는 불가능하다. 날고 기는 재주꾼이라도 여기서는 백 퍼센트 깨진다. 아는 사람은 도구를 쓴다. 구조론은 도구다. 객관적인 사유가 가능하다. 자체의 결을 따라간다. 에너지가 가는 경로를 따르는 것이 정답이다. 어느 분야든 전문가는 도구를 쓴다. 도구가 없으므로 자기를 개입시켰다가 상대주의 오류에 빠진다. 구조론은 모두 연결하여 통짜덩어리로 보는 관점이다. 모두 연결되었으니 플러스는 불가능하다. 나는 남자니까 여자를 플러스하면 되겠네. 나는 백인이니까 흑인을 플러스 하자. 이런 식의 사유가 자기소개다. 통짜덩어리로 보는 관점이라야 한다. 당신은 백인이고 흑인이며, 남자이고 여자이며, 한국인이고 일본인이다. 내 생각을 물리치고 천하의 생각을 내 생각으로 삼아야 한다. 모두 연결되면 더 이상 플러스하여 들여올 수 없다. 빈 공간이 없다. 오직 마이너스만 가능한 세계다. 바둑이라도 하수는 이것 저것 실험을 해 볼 수 있다. 플러스가 가능하다. 그러나 고수라면 실수를 줄이는 일 외에 다른 방법이라고는 없다. 알파고와 바둑을 둔다면 나올만한 수는 다 나왔다. 더 이상 묘수도 없고 신수도 없으며 꼼수는 먹히지 않는다. 자기 실수는 줄이고 상대편 실수는 응징하는 마이너스로만 통제한다. 높은 레벨로 가면 하지 말 것을 안할 뿐 다른 방법이 없다. 구조론사람의 규칙은 많다. 절하지 마라. 단순하게 가라. 대승의 길로 가라. 의리를 지켜라. 에너지를 유도하라. 대중에게 아부하지 마라. 호연지기를 키워라. 등등 여러가지를 말할 수 있지만 본질은 하나이다. 괴력난신을 멀리하라는 것이다. 쓸데없는 삽질을 하지 마라는 거다. 군자의 마음을 품고 천하인의 마음을 품으라는 거다. 당신이 조바심을 내며 자기소개하는 소인배의 마음을 극복하고 태연하기 짝이 없는 천하인의 호연지기를 가진다면 남들이 못 보는 다른 것이 보인다. 한국인이면서 일본인이고, 여자이면서 남자고, 어른이면서 어린이고, 백인이면서 흑인이면 다른 것이 보인다. 천하인의 마음으로 보면 집단의 방향성이 보인다. 무리가 일제히 한 방향으로 갈때의 대처방법이 보인다. 모세가 그것을 보았다. 거함의 함장이 되면 가까이 있는 파도가 아니라 멀리 있는 북극성이 보인다. 에너지를 유도하여 장기전을 할 수 있다. 답은 세번 째 걸음에 있다. 하나는 주체이니 나다. 둘은 타자이니 상대다. 둘을 연결했을 때 세번 째 보이는 것이 길이다. 너와 나를 넘어 근원의 것이다. 결이 보인다. 에너지의 드나듦이 보여야 한다. 방향을 옳게 잡고 확률을 높여가며 삽질을 삼가면서 끝까지 가면 남는 것이 정답이다. 여러분은 권력을 원한다. 구조론은 괴력난신의 사설권력을 쥐어주지 않는다. 퀘이커 교도의 실험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인간은 호르몬에 지배되는 동물이다. 한 공간에 모아놓고 땀냄새를 맡게 해야 안정감을 느낀다. 퀘이커는 교회도 없이 각자 자기 내면의 빛을 들여다 보라고 가르쳤기 때문에 신도가 모이지 않았다. 인간은 별 수 없는 동물이다. 반드시 스킨십을 해줘야 한다. 심리적 스킨십이라도 좋다. 스킨십을 하려면 좁은 틈새에 몰아넣어야 한다. 그래서 다들 괴력난신의 삿된 길로만 가는 것이다. 다수에 대항하여 구석에 몰린 극소수가 되려고 한다. 지구평면설로 한 번 밀어나 보세. 절대다수에 맞서는 극소수파가 되어 극단적으로 구석에 몰리니 심리적 스킨십이 짜릿하더라. 소인배의 멸망공식이다. 문제를 정확히 알면 답은 이미 얻어졌다. 자기편을 얻는 것이 인생의 진정한 목적이다. 이 사실을 정확히 알고 바른 길로 가면 된다. 시간이 걸려도 확률에 따라 옳은 것은 반드시 드러나는 법이다. 장기전을 할 수 있는 배짱이 있다면 천하를 움직일 수도 있다. 세상은 우리 편이고 시간은 우리 편이다. 우리는 할 바를 다하면 된다. 잘못된 것은 인류의 탓이다. 진리가 있고 먼저 알아내고 깃발을 꽂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했다는 사실로 충분하다. 북극성은 그저 있기만 하면 된다. 사막을 건너는 대상이 별을 본다. 구조론은 존재만으로 역할이 넉넉하다. 무리를 이끄는 모세가 찾아온다. 우리편이 도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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